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9)

2. 구원론적 복음 선포(2)


그런데 구원론적 그림언어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칭의’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 언어로 선포된 복음의 재발견으로 중세 가톨릭 교회의 공로/상급신학을 타파하고 은혜로만/믿음으로만 ‘의인됨’을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를 창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언어는 한편 법정적 개념으로서 무죄선언, 의인이라 칭함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종말의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얻을 죄용서와 의인이라 인정됨을 지금 지레 얻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의”라는 개념은 그런 법정적인 함축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고, 더 본질적으로 관계론적 함축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인’된다 할 때, 그것은 ‘죄용서’라는 법정적, 부정적인 뜻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이라는 관계론적, 긍정적인 뜻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를 믿음’의 축약 형식)으로 칭의를 얻음은 죄용서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됨, 그리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하심을 덧입어 살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칭의’는 바울만 쓰는 언어인데, 바울은 또 독특하게 ‘화해’라는 언어도 씁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사를 믿어 죄용서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것을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친구 관계가 된 것으로 나타내고자 해서입니다. ‘새 창조’(고후 5:17)의 언어도 바울만 쓰는 구원론적 언어인데 하나님을 적대하던 관계를 버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된 것을 아담의 죄와 숙명을 극복하고 ‘종말의 아담’(곧 그리스도)적 존재들이 됨을 뜻합니다.

이것이 “새 창조” 또는 “새 피조물”됨이라 포현하는데, 이 언어와 함께 가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얻음(롬 8:29, 고후 3:18, 빌 3:20-21 등)을 쓰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구원론적 그림언어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부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덧입게 됨, 그래서 신적 충만에 참여하여 신적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됨”인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3.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1)

그런데 구원은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음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출범했고, 죄와 죽음으로 통치하는 이 세상의 신을 그리스도가 결정적으로 이겼습니다. 이러한 승리를 2차 대전 때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여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무찌른 1944년 6월 승리, 즉 전쟁이 ‘결판난 날’의 승리에 비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을 결정적으로 이기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시대가 시작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이 완성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의 재림 때에 비로소 그 구원이 완성됩니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연합군과 소련의 군대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하고 히틀러의 후계자 되니쯔 제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1945년 5월 8일에 2차 대전의 승리가 완성되었듯이 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사탄의 등뼈를 부러뜨려 결정적 승리를 거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사탄의 모든 잔여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여 온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이 세상이 지속되면서 사탄의 역사가 계속 막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탄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우리는,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 살면서 동시에 아직도 사탄의 통치가 드러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인이라 선언된’ 또는 하나님과 ‘화해된’ 우리는 날마다 사탄의 통치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두 주장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탄의 명령을 들을 것인가, 주 예수의 명령을 들을 것인가?’하는 갈림길에 놓입니다. 사탄은 우상숭배로 나를 유혹하면서 자신의 통치를 받도록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그래야 너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웃 것도 빼앗고, 탈세도 하고, 사기도 치고, 환경도 오염시키면서 무조건 돈만 많이 벌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 예수는 뭐라고 합니까? “아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다.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믿고,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믿고 그의 통치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온다고 가르쳤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는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온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적으로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중계명의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의 반대말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경계한 형태의 우상숭배는 무엇일까요?

한강가에 가서 음식 놓고 비는 것입니까? 아니면 불상이나 장승 앞에서 절하는 것입니까? 그리스 로마시대에 도시마다 신전을 세워놓고 예배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우상숭배입니다. 모든 우상숭배에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우상숭배들은 파괴력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파괴력이 제일 큰 우상숭배는 무엇일까요? 바로 재물을 섬기는 맘몬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이 형제를 원수가 되게도 하고, 사회 계층들간에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나라들끼리 전쟁도 하게 하지 않습니까? 또 그것이 인간성을 황폐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마태복음 6:24에 예수께서 “누구도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맘몬 우상숭배를 가장 경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우리에게 맘몬을 숭배하도록 충동해서 우리를 자기의 죄와 죽음의 통치로 몰아넣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네 안녕과 행복을 확보한다”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착취하고, 거짓말하고, 직장에서 동료를 헐뜯고, 사기도 치고, 탈세도 하고, 그러다보니 갈등과 불의가 조장되고, 인권이 짓밟히고, 환경 파괴가 일어나고, 경제 양극화가 일어나고 심지어 세계전쟁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사탄의 통치를 받는 악인들의 공동체는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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