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8)

1. 기독론적 선포(2)


‘하나님 아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을 상속/이양 받은 분이란 사실을 나타낼 때 쓰는 칭호입니다. 그것은 비교적 드물게 쓰이는데 가장 중요한 대목에 아껴 쓰는 심오한 칭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요약이나 정의로 쓸 때 사용되기도 하고, ‘보냄의 형식’과 ‘내어줌의 형식’에 쓰입니다.

‘보냄의 형식’은 하나님+그의 아들+보내셨다+목적(우리의 구원)의 형식을 가진 문형입니다(요한 3:17, 롬 8:3-4, 갈 4:4-6, 요일 4:-14). 이 ‘보냄의 형식’은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일꾼임을 잘 나타내는 문형입니다.

또 하나는 ‘내어줌의 형식’입니다. 하나님+그의 아들+내어 주셨다+목적(우리의 구원)(요 3:16, 롬 8:32, 갈 2:20).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내어 줌의 형식’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됩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데, 본질을 계시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을 계시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자,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성경 숙어로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에서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본질을 드러낸다는 말, 즉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이 사랑임을 드러내고, 그렇게 하여 아버지가 아들의 본질(아들의 본질은 아버지의 계시자, 구원의 대행자임을 보여 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의하면 ‘십자가가 수난이 아니고 높여짐’입니다. 따라서 3장부터 계속 나오는 요한복음적 숙어 “그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져야 된다”는 것입니다(이 문장 형식은 공관복음에서 “그 ‘사람의 아들’이 넘겨진다”는 문형에 상응함). 그것은 요한복음적 이중 의미입니다. ‘땅바닥에서 십자가에 달려 들어 올려짐’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높임받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십자가의 죽음을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들어 올려짐”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8:28에서도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것을 알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ego eimi’(Iam)인데 우리말로 보어가 없이 “내가 ~이다”입니다. Ego eimi란 말은 출애굽기 3:14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시는 존재로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들어 올릴 그가 하나님과 다르면, 하나님보다 조금 열등하면, 하나님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원숭이가 사람을 완벽하게 나타낼 수 없고 오직 사람만이 사람을 완전히 나타낼 수 있듯이, 예수가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거기에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초월자이시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그 사랑을 시위하셨기에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요, 그것을 우리가 크리스마스 때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요체를 알아야 성경을 더 올바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어찌하여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으로 전화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복음을 두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예수나 그의 제자들이나 하나의 구원의 봉우리를 바라보고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 봉우리를 향해 가시면서 구원을 예고하고 약속하며 구원에 참여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봉우리를 되돌아보면서 종말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미 일어났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복음서들에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복음과, 서신서들에서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이런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성경을 읽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구원론적 복음 선포(1)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은 “하나님이 예수를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사로 죽음에 넘겨 주셨고(그래서 예수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죽음을 죽었고)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켜 그것을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속죄제사로 드려져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역사적 구원의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건은 오늘 나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메시아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덕입게 되는데, 그 덕입어 얻는 구원을 신약성경은 여러가지 그림언어들로 표현합니다: ‘구속(속량)’, 죄용서/칭의, 화해, 입양, 새 창조 등.

이 그림언어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뜻을 가진 것들로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어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덕입어 살게 되었다는 것, 즉 신적 생명(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탄의 나라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속전을 주고 노예를 해방시키는 그림을 연상케 하는 ‘구속(속량)’이라는 언어를 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또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우리가(사탄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골 1:13),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을 덕입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사실을 하나님의 아버지 노릇해 주심을 덕입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얍’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었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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