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7)

5. 사도적 고백/선포(2)


좀 더 되돌아보니 다니엘 7:14에 근거하여 그가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임을 주장했는데 하나님이 그를 옳다고 했으니 ‘과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신 것이구나. 그의 죽음은 새 언약과 대속의 제사로서의 죽음이었구나’ ‘그의 죽음이 새 언약과 대속의 제사라고 가르친 것을 하나님이 다 옳다고 인정했다. 그 결과 우리를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창조하신다고 함이 다 옳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고전 15:3)라는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여기까지 인식한 제자들이 부활의 이편에 서서 볼 때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어 구원을 얻게 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그의 죽음과 새 언약의 제사로서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어 구원을 얻게 하였다. 그것을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켜 확인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후자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했다’보다, ‘그의 죽음으로 그렇게 약속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이루셨다’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되풀이하지 않고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셨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오신 종말의 구원자이시다, 곧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상속받은 아들이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주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더 나아가서 메시아적 행위를 더 이상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예수가 실제로 하신 일, 즉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 스스로를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바쳐 우리 죄를 씻어버리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심(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받게 함), 즉 우리를 아담적 죄와 숙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충만에 참여하게 하심(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주심을 덕 입어 살게 함)이 진정한 메시아(종말의 구원자)의 행위이고, 예수가 바로 그런 구원을 가져온 메시아라는 것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예수의 메시아/그리스도적 행위 또는 사건을 그의 죽음과 부활로 보고,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셨다”라는 것을 선포하는 데 집중한 것입니다(고전 15:3-5).


<2> 사도적 복음 선포 양식


1. 기독론적 선포(1)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서신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 가지를 설명하겠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도적 복음 선포 양식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예수가 메시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대행하신 분이다. 그리고 지금 주이시다”라는 소위 기독론적 형태로서의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사도적 공통 케리그마(선포)에 쓰이는 칭호들이고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은 기독론적 칭호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만 해도 예수에 대해 “말씀(로고스)이다, 어린양이다, 하늘에서 온 떡이다, 세상의 빛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선한 목자이다, 양의 문이다, 포도나무이다” 등의 칭호들이 있고, 히브리서에는 “대제사장이다, 믿음의 개척자요 완성자이다”, 바울서신에는 “종말의 아담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지혜다”, 요한계시록에는 “알파와 오메가다, 하나님 말씀이다, 유다의 사자다” 등등 아주 많습니다.

이런 기독론적인 칭호들 중 “예수가 메시아이다”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칭호입니다. ‘메시아’란 말을 헬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그리스도란 말은 ‘종말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란 칭호는 항상 그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예수의 메시아적 행위/사건을 언급할 때 쓰입니다. 그리스도가 기본 칭호이고, 그 외의 칭호들은 예수의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로서의 여러 면들, 여러 가지 의미들을 특별히 부각시키기 위해 동원된 그림언어들입니다.

‘주’라는 칭호는 예수가 부활 승천하여(“하나님 우편에 앉아”)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이는 칭호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시편 110:1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자기 우편에 앉혔다는 것입니다.

시편 110:1에 시인이 “야훼가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등상이 되게 할 때까지 내 우편에 앉으라 하리니”라고 합니다. 발등상이 되게 한다는 말은 완전히 굴복시킨다는 말입니다. 발등상이란 옛날 근동에서 왕이 앉을 때 발을 딛는 발판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소탕할 때까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빌립보서 2:6-11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유명한 찬송시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이셔서 만유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할 때 여기서 만유에 뛰어난 이름은 곧 하나님 이름 ‘야웨/퀴리오스/주’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 위에 있는 인간들이나, 땅 아래 있는 악령들까지도 그에게 무릎을 꿇고(무릎을 꿇는다는 말은 예배한다는 말) 예수를 “주시다”라고 부르짖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시인하게 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주 약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예배 때 “주여”라고 부르짖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부르짖는 행위는 그의 도움을 청하고 그에게 순종을 서약하는 행위입니다. 예수가 ‘주’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니까 온 우주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에게 무릎 꿇고 예배하며 “예수가 주이시다”라고 부르짖게 했다는 아주 아름다운 시입니다.

‘주’라는 칭호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는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나타낼 또 윤리적 권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 통치를 따르도록 가르치는 것이므로 바울은 윤리적 권면을 줄 때 ‘주’ 예수의 요구를 강조합니다(예: 롬 14:5-9, 고전 7:10-11, 빌 4:2, 살전 4:1).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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