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2)

4. 경고와 달램의 교차 구조


2) 은혜 위에 서 있는 삶지금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서 사는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의 계속되는 통치에 날마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뿌리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으로 상기시키는 하나님의 통치를 늘 받으려 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로 온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칭의’하면 ‘무죄 선언’ 또는 ‘의인이라 칭함’받았음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칭의’가 그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뜻만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칭의’된 사람, 곧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사람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올바른 관계에 계속 서 있어야 함’, 곧 우리의 현재적 실존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계속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에 완성될 때 구원의 완성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칭의론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이 중요한 진리가 무시되어왔던 것입니다.

칭의를 다른 말로 하면 ‘주권의 전이’라고 합니다. ‘죄와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탄의 나라에서 해방되어서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로 이전됨’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잘 표현한 곳이 골로새서 1:13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칭의란 무엇인가?’ 곧 우리가 사탄의 흑암의 통치에서 건져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행하는 의와 생명의 통치에로 넘겨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 신학의 강조점인 은혜에 의한 칭의에는 익숙하지요? 즉 “우리가 선행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었다”는 것에는 익숙하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은혜 위에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5. 구원 사건에 대한 서술과 그것에 근거한 윤리적 명령

1) 복음 선포와 윤리적 요구 


그러므로 바울 서신의 구조가 다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가령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의인이 되는가,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가?”의 문제를 다룹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만 우리가 의인된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가장 기본 의미는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임’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복음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1-8장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에 대한, 그리고 우리가 그 구원을 믿음으로 덕 입음에 대한 서술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15장까지를 보십시오. 로마서 12:1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됐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의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날마다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이것이 로마서 12-15장 전체의 윤리적 명령의 명제입니다.

로마서 1-8장을 ‘교리장’ 또는 복음 선포장이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이 실제로 우리를 어떻게 의인되게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러고 나서 ‘의인’으로서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12-15장에 나오는데, 이것을 ‘윤리장’이라고 합니다.

이 윤리적 요구는 “그러므로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서로 사랑하라, 화평을 도모하라”등에서 보듯이, 다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윤리적 명령들을 자세히 보면 사랑의 이중계명을 다양한 삶의 상황에 적용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5장도 자세히 보면 사실 사랑의 이중계명의 적용들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예수의 산상수훈도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강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서술, 즉 복음 선포에 근거해서, 선포된 복음에 힘입어 의인된 사람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사람들, 하나님 통치 아래 놓인 사람들이 이제는 실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윤리적 요구입니다.

다른 종교는 윤리적 요구가 먼저이고 그 요구를 다 이룸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적 업적에 구원이 달린 것이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구원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통치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탄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시켜 주셨기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윤리적 삶을 살 수 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비극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렇게 포괄적으로 가르쳐지지 않아 많은 신자들이 윤리없는 믿음 생활을 하며, 오늘 제자도의 실천없이도 ‘믿기만 하면’ 장차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원파 사람들은 이렇게 왜곡된 복음 이해를 극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지만, 그들을 이단자들이라 비난하는 많은 정통 그리스도인들도 실제 삶에서 그런 왜곡된 생각을 나타내며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인구의 ¼이 그리스도인들이라지만, 나의 삶에서, 아니 심지어 교회 안의 삶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샬롬은 잘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주의와 근본주의적 문자주의 극복

한국 교회의 또 하나의 비극은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윤리의 명령어들이 어떻게 복음에 근거하는가?”하는 구조를 모른 채, 성경의 명령어들을 율법주의적,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경향들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음’은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인데, 그때에 우리는 율법주의적 경향, 문자주의적 경향을 피해야 합니다. 이렇게 율법주의, 문자주의에 얽매여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데, 한국교회에서 이런 근본주의적인 신학 색채가 아주 강합니다. 한국의 다수의 기독교적 신앙의 양태가 근본주의적 양태입니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경시하고, 성경의 가르침의 진리됨에 대한 확신이 적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성경을 해석하고, 특히 역사적 진실에 대해 회의적이고, 성경의 가르침을 가볍게 생각하여 성경과 기독교 진리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은 신학적인 해석을 할 줄 몰라서 문자주의, 율법주의에 얽매여서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 신앙을 왜곡합니다. 그래서 제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근본주의적 신앙 양태를 가지고 있으면 온갖 이단사설이 난무하게 되는 토양을 만듭니다. 한국교회 주변에 온갖 이단사설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수교회들의 근본주의적 신앙 양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의 문자주의와 율법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유주의적 신앙양태에 노출되기보다는 근본주의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예를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스스로가 예수님의 말씀들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재적용했는지를 봄으로써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학적인 뜻, 특히 사랑의 이중계명이지, 문자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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