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장부터 16장까지는 고린도전서의 제3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편지를 써서 “이러이러한 것들에 대한 답을 주십시오”하고 요청한 것에 대해 바울이 답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7:1에 이런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너희들이 쓴 것들에 대하여”.
이것이 제목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너희들이 쓴 것”이라는 말 다음에 ‘들’자가 나타나지 않지만, 사실 여기에 ‘들’이라는 글자를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해집니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편지에 써서 문의한 것들에 대하여 내가 이제부터 대답하겠다”는 것입니다.
1. 복음의 사회윤리학적 적용
1) 남녀평등과 상호주의
첫번째 문제를 보겠습니다. 7:1의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아니함이 좋다” 이 말은 고린도인들의 구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신도들, 특히 여자 신도들이 헬라적,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젖어서 “영혼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영혼의 정결함을 유지함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몸의 향락을 취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요, 특히 성적 관계는 더러운 것이니, 결혼하면 안 된다. 그리고 성관계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혼 운동을 주장한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의 구호가 “남자가 여자를 만지지 아니함이 좋다” 이것입니다.
바울이 그 말을 인용해서, “(그 말도 일리가 있을 수 있으나) 그러나” 하면서 고쳐 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음행이 더 조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결혼하라. 그리고 결혼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이혼하지 말고 결혼관계를 유지하라.”
그러고는 3절에 “남편은 아내에 대한 성적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 합니다. 즉 “아내가 성관계를 요구하면 남편이 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입니다.
그것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4절에 나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적 이유인즉,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그 남편이 한다.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아내가 한다.” 이보다 남녀평등을 더 강하게 가르치는 성경구절은 갈라디아서 3:28을 제외하고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28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의 질서에는 옛 창조 질서의 전형적인 불평등관계인 구원사적, 인종적 구분(이스라엘 vs 이방인 - 더 이상 없음), 성적 구분(남자 vs 여자 - 더 이상 없음), 사회 신분적 구분(노예 vs 상전 - 더 이상 없음) 없이 모두 다 하나라.” 이것은 해방의 복음을 사회 윤리학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제대로 선포된 곳에선 항상 노예와 여성이 해방되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아직도 신의 이름으로 여자를 굴종시키고 무자비한 인권유린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도 조선시대에 여자들을 완전히 굴종시키는 상황 속에서 복음이 들어와서 여성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28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 및 노예와 상전의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부간의 삶에서도 “아내가 주장하면 남편은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5:21에도 “남편과 아내가 피차 순종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7:4에도 “피차 순종하라”는 뜻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아내만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의 몸의 주인 노릇을 아내가 한다는 것입니다.
2) 공예배시 여성의 역할
그래서 바울 교회에서는 남녀 차별없이 여자들도 공예배 인도를 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설교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무엇이 문제가 됐습니까? 그 당시의 단정한 복장으로 여자들이 머리에 너울을 쓰고 해야 되는데 그것을 벗어던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1:2-16에서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여자들 교회에서 설교시키니까 안 되겠다.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계속해서 “공예배에서 설교도 하고 예배도 인도하는데, 다만 머리에 수건을 쓰고 하라. 즉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14 말씀은 “남자가 여자의 머리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창조질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가르치려는 의도는 딱 한 마디입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설교하되 머리에 수건을 쓰라.” 그 하나의 권고를 강조하려고 바울이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고 설교해야 할 이유들을 여러 가지로 대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는 것의 신학적 근거를 바울이 어디서 찾습니까? ‘머리’란 말의 기본 의미은 원천(origin)입니다. 바울이 “창세기 2장에서,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왔으니까 남자가 여자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의 머리다”라는 식으로 논증해 나갑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다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남자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렇다면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아무튼 우리가 남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하고 그런 식의 논증을 중단하고 맙니다(7:11-12). 그래서 결국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아름답다는 자연의 이치에 호소함으로 “아무튼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권고를 끝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1장을 대면서 실제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 “여자가 교회의 공예배에서 설교를 하되 복장을 단정히 하고 하라”는 것은 터득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남자는 머리/권위자, 여자는 순종해야 할 자”라고 하는 ‘창조 질서’를 가르치려 한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서신서들을 읽을 때 본문의 의도를 잘 살펴야 합니다.
여기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여자들이 복장을 단정히 하는 한 남녀가 함께 예배드리는 공예배에서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는 것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데도, 이 본문은 무시하고, 예배시 설교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을 금하는 구절인 고린도전서 14:34-35을 들이대며 근본주의자들은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구호를 앞세워 여자들이 설교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다수 근본주의자들은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1:2-16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고린도전서 14:34-35(바울이 쓴 것이 아니고 후대에 쓰여 여기 끼어들어간 구절들)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가운데, 오로지 율법주의 정신과 문자주의 정신에 빠져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성경의 구절들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그냥 되뇌기만 하면서 자신들이 성경의 권위를 가장 많이 존중하고 ‘성경적’으로 생각하고 목회한다고 주장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3) 부부생활 (1)
7:5에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서로 상대방의 성적 권리를 빼앗지 말라”는 말을 점잖게 번역한 말입니다.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성생활을 자제할 수 있는데, 조건은 “첫째, 둘이 합의를 해야 한다. 둘째 얼마동안만 해야 한다. 셋째,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부부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제하지 못해서 “사탄이 더 시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부부의 동등성과 상호성을 전제로 하고 이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 잘 나타납니다. 그러고 나서 “나와 같이 독신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지 못하니 다 결혼하고 정상적으로 성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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