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8일 목요일

1강.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14)

3) 부부생활 (2)


고린도전서 7:10-11에서 “혼인한 자들, 즉 결혼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내가 명한다”하고는 실제로 “이 명령은 나의 명령이 아니고 주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말씀들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아주 드뭅니다. 겨우 서너 번 그렇게 합니다(고전 7:10, 9:14, 11:23-26, 살전 4:14).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권위가 더 있다”고 강조하고 나서,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지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남편과 화합하도록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도 철저하게 상호주의적 원칙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혼하지 말라고 해도 이혼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시 화해를 하든지 정 안되면 혼자 지내라”고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남편만 아내와 이혼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이 주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주의 말씀이 어디 쓰여 있습니까? 마가복음 10:9-12, 마태복음 5:32, 19:6-9, 누가복음 16:18, 이런 곳에 “이혼하지 말라”는 주의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고 쫓아낼 수 있는데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세 율법의 한시적이고 완벽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모세의 율법에서는 너희들의 완악함 때문에 그런 식의 이혼이 허락되었지만, 원래 한 아내와 한 남편을 짝지은 하나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혼을 금지하신 것은 당시 여성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신 신명기 법에는 결혼 전후에 아내에게서 부정이 드러나면 이혼 증서를 써주고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사회에서는 이것을 모두 남성 위주로 아주 너그럽게 적용하여 아내가 조금만 남편의 맘에 안 들어도 내칠 수 있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보다 약 20년 정도 앞선 시대의 가장 위대한 랍비 힐렐은 “남편의 비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것이 있을 경우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거슬리는 것의 예를 들었는데, “아내가 나이가 먹어 얼굴에 주름이 많다든지, 빵을 굽다가 태운다든지 할 때도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서 내 보내면 이 여자는 오갈 데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인권이 유린되는 것입니다.

이 유대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이슬람 코란입니다. 코란은 구약과 유대교 전승, 신약과 기독교 전승, 아랍 토속종교가 엉성하게 혼합된 이슬람 경전입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전승을 받아서 그것을 극단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니에게 “내가 너와 이혼한다, 내가 너와 이혼한다, 내가 너와 이혼한다” 세 번 선언하면 이혼이 됩니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이런 무자비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께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결혼으로 한 몸 되게 하신 것을 인간이 가르지 못한다”고 하시며, 창조 원리의 ‘한 몸 원칙’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이혼을 금지시켰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해서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한다. 이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고 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7:12-16에서 혼합결혼 상태의 부부들, 즉 부부간에 한쪽만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를 믿고 다른 한쪽은 믿지 않는 경우들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당시 헬라세계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란 오늘날의 세속화된 세계의 무종교자들 같은 자들이 아니고 자신들의 신전에서 행하는 제사 잔치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직업적인 이유로, 또는 시민 생활의 여러가지 이유들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공동체에서만 가르쳤기 때문에 혼합결혼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인용할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내가 예수의 전권대사인 사도로서 나의 명령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즉 그리스도인 남편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여자에게 즉 그리스도인 아내에게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그 남편이 함께 살기를 원하면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혼합결혼 상태에서도 예수의 이혼 금지의 정신을 최대한 존중해서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철저하게 남녀평등, 상호주의입니다.

“왜 혼합결혼 상태에서도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의 신학적인 근거가 14절입니다. 사실 14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접속사 “왜냐하면”을 빠뜨려서 뜻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우리 개역성경에 이렇게 접속사를 빠뜨려 논리적 흐름을 잘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함).

바울은 어느 가르침을 주고 나서는 항상 신학적 근거를 댑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나, 이제 거룩하니라.”


4) 성별에 관한 유대교적 원칙의 혁명적 전환(1)

정한 것과 부정한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모든 종교들은 한결같이 무슨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 “더러운 것과 연결되면 내가 더러워진다”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부정한 것과의 연결을 피해서 자신의 정결을 유지하려고 최대로 노력한 백성이 누구입니까? 유대 백성입니다. 그중에서도 최대로 그렇게 하려 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이란 말은 “성별을 추구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 글을 쓴 바울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바로 이런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어떤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선교하고 있습니까?

제일 부정한 이방인들 가운데 살면서 선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더러운 것과 연결되면 내가 더러워진다”는 원칙을 뒤집어서 “그렇지 않다. 부정한 자들이 성도들과 연결되면 성도들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거룩해진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로 인해서 성별됩니다.

마찬가지로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으로 인해서 성별됩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원칙을 180도 뒤집어서, “불신자들이 성도들과 짝지어짐으로 그들이 성도의 거룩성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혼합결혼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거룩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되어 이방인들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엊그제까지 바리새적 원칙으로 살았던 바울이 어디서 이런 놀라운 원칙을 배운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문둥병자를 만짐으로 예수님이 더러워진 것입니까? 오히려 예수로 인해 문둥병자가 깨끗해진 것입니다.



김세윤 교수 | kcj@kcjlogo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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