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신학의 하나님 나라 이해
이신건
들어가는 말
이른바 '신정통주의(Neo-orthodoxie)' 신학에 의해 결정적 타격을 입었던 18∼20세기 초엽의 독일 중심의 신학조류를 우리는 흔히 '자유주의'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신정통주의'라는 용어도 이 신학의 대표자들이 이러한 표현 아래 불리는 것을 기꺼이 환영한 것이 아니고 이 신학을 분류하려는 사람들이 붙여준 범주적 어법이듯이, '자유주의'라는 용어도 후대의 사람들이 특정한 신학경향이나 신학방법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꽤 모호한 용어이다. 그리고 '보수주의'라는 용어가 특정한 전통을 보수(保守)하려는 사람들이 즐겨 채택하는 능동적·방어적 개념이지만, '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자유로운 신학자들에게 흔히 붙여지는 피동적·공격적 용어이다. 그런데 공격받는 신학자들이 침묵하거나 방어하지 않을 때나 죽고 난 다음에라면, 으레 공격하는 사람들의 소리만이 크고 유리할 뿐이다. 또 공격하는 사람들은 더욱 선명하고 흑백논리적인 어법을 즐겨 사용하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주의'라는 표현은 오용되기 쉽고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무조건 복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목소리를 내며 결집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복음의 근본을 방어하려고 등장한 '근본주의(根本主義)'처럼 어떤 공통된 신학을 표방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라는 용어처럼 '자유주의'라는 용어도 꽤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을 광범위하게 지칭한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당대의 기계론적 유물주의, 허무주의, 정신사조의 혼란과 전통의 해체, 진보사상과 진화론 등의 도전 앞에서 복음을 새롭게 변증하려고 고심했다.(주1) 물론 이들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근대의 계몽철학적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그리하여 형이상학적 교의와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기(liberal)' 원했다. 그래서 이들의 신학은 '자유로운 신학(Liberale Theologie)' 혹은 '현대학파(Moderne Schule)'라고 불리웠다.
바르트(K. Barth)는 이 신학의 근본사고가 인간중심적이라고 보았고, 이 신학이 물려준 학습내용이 '종교적 개인주의(Religiöser Individualismus)'와 '역사적 상대주의(Historischer Relativismus)'라는 공통분모 아래 묶여진다고 보았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이 학파는 하르낙(A. von Harnack),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및 리츨(A. Ritschl)의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역사적 현상으로 해석하거나, 압도적으로 종교적·도덕적인 특징을 띤 내적 체험의 사실로 보았다.(주2)
그리고 이 신학은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라고도 불리웠다. 왜냐하면 이 신학은 기독교에서 이른바 낡은 형이상학적 교리의 외피를 벗기고, 기독교를 근대의 문화와 종합하려는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함으로써 이 신학은 자기 나름대로의 기독교적 경건성을 지닌 채 한 세기 이상 교회와 신학의 심성을 지배했다.
이제 필자는 앞에서 지적한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한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유보 아래 이 신학의 대표적 지도자들 가운데 세 사람(F. Schleiermacher, A. Ritschl, W. Herrmann)의 '하나님 나라(Reich Gottes)' 사상을 통해 이 신학의 핵심적 내용을 간결하게 조망하고 비판하려고 한다.
I.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
슐라이어마허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19세기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자의식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만들었다.(주3) 그는 신의식(Gottesbewußtsein)을 하나님 나라의 이상 안의 활동상태의 전체와 전적으로 관련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를 목적론적 성격을 지닌 종교로 만들었다.(주4) 그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문화의 진보와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동일하다.(주5) 따라서 그의 신학은 윤리적 진보사상의 영향을 받은 관념주의(Idealismus)의 해석형태를 지닌다.(주6)「그리스도인의 윤리(Die christliche Sitte)」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이 땅 위에 세워질 신국의 이상(理想)과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13f).「신앙론(Glaubenslehre)」에서 슐라어마허는 경건한 의식에서 생겨나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실제로 기여하는, 하나님 나라 안의 활동이라고 말한다(3.Aufl, 53,55).「철학적 윤리(Philosophische Sittenlehre)」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결국 하나님 나라를 자연과 이성의 완전한 교통(Durchdringung)과 일치(Vereinigung)라고 설명하기까지 한다(45f, 152f).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윤리적 특징을 부여한다. 경건(Frömmingkeit)과 윤리(Sittlichkeit)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본질인데, 이것은 가시적인 완전성의 최고단계로 발전하는 진보 속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목적론적 경건 혹은 윤리적 과정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 발전과정은 이 땅 위의 인간의 모든 생활과 그 역사를 동반한다.(주7) 실로 그는 윤리적 발전을 '자연의 진화과정을 역전시키는 전진'(주8)이라고 표현한다. 이 모든 설명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인류의 진보적 발전의 마지막 상태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슐라이어마허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의 바탕에는 두 가지의 본질적 요소가 깔려 있다. 하나는 인간화(Menschwerdung)이해인데, 그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자연화(Naturwerdung)로 이해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사귐 안으로 받아들여진 인간들에 의하여 이룩되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미 창조를 통해 만물은 하나님의 계시를 준비하고 이에 영향을 주면서 이 방향 속으로 관련을 맺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육신 속에서 일어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하여 창조를 가능한 한 모든 인간의 본성(Natur)에 완전히 옮겨놓는다.(주9) 여기서 '창조를 인간의 본성에 옮겨놓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인간의 활동에 위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는 예수가 세운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고 이에 영향을 주면서 이 방향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창조는 '하나님의 세계통치'라는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 나라의 준비와 이의 시작과 발전적 실현 사이를 구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오직 한 목적,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관련시키고, 이를 항상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것은 "하나로서 하나를 지향한다. 우리는 개체를 전체의 한 부분으로 상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개체를 위하여 전체와의 상관성과 분리되어 있는 특별한 하나님의 원인을 상정하고, 개체를 하나님의 세계통치의 특별한 목적과 결과로 간주하여 다른 모든 것을 그 종속적 수단으로 본다면 잘못된 것이다. 모든 개체는 제약하면서도 제약받는 통과지점(Durchgangspunkt)으로 나타난다."(주10)
여기서 우리는 슐라이어마허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견해로 분명하게 요약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원인성(Ursächlichkeit)과 세계통치는 직접적으로 서로 속해 있다. 2) 세계통치와 원인성의 마지막 목표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자연적 세계 안에서 전개되는 실체를 뜻한다.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의 모든 개별적 결과들은 그 실현의 수단으로서 이 실체에 종속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전능과 구별되는 세계 안의 '자연메카니즘'의 결과들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실과 같다.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불변적·무시간적·세계외적 존재와 가변적·시간적 존재 사이의 완전한 대립을 견지하면서도, 자연세계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자연세계는 역사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의 형태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세계도 시간적 존재로부터 영원한 존재로 넘어가게 된다. 창조물은 창조자와 화해되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된다.(주11)
그런데 하나님의 원인성은 신의식으로 경험되는 절대의존의 감정으로서의 직접적 자의식 속에서 드러난다.(주12) 이 하나님의 원인성은 유한한 인과체계와는 구분되지만, 이것과 동일한 규모(Umfang)의 하나님의 행동으로써 경험된다. 모든 유한한 존재가 하나님의 인과성에 종속하는 한, 하나님의 행동은 유한한 '자연의 상관관계'의 규모와 동일하다. 하나님이 모든 사건에서 협동한다는 것을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의 전능(Allmacht)이라고 부른다.(주13) 하나님의 세계통치 안에서 하나님의 원인성은 사랑과 지혜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랑은 다른 것과 일치하려고 하고 다른 것 속에 존재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의 근본을 이루는 인간화 사건의 배후에 있는 마음은 오직 사랑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 본성의 일치는 세계통치의 주축(Angelpunkt)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의미한다. 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실현시키는 기술(Kunst)이다.(주14)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설립에 참여한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의식'(神意識)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의식을 설명할 때, 슐라이어마허는 '경건'(敬虔) 혹은 '직접적 신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지식이나 행위라고 정의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서 경건은 원초적으로 '감정의 결정성'(Bestimmtheit des Gefühls)을 의미한다.(주15) 감정은 다양한 모든 존재의 근저를 이루는 하나의 존재가 '자의식'에 의해 파악되는 원초적 바탕(Urgrund)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최상의 존재인 하나님과 자기 자신이 직접적 자의식 속에서 하나가 된다는 생각이다. 신의식은 모든 종류의 지식이나 행위와 분리된다. 왜냐하면 지식과 행위는 일치보다 대립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감정'이나 '직접적 자의식'의 개념은 절대적 존재가 여기서 본래적 존재로서 현재화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주16) 신의식은 '절대적 의존감정'이기도 하다. 이 감정 안에서 더 높은 존재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추구가 일어난다. 이 감정은 자유감정과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직접적인 자유감정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일치의 감정이다.17)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생각에는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로부터 유래한 강한 신비적 특징과 헤렌후트(Herrenhut)적인 영향이 깔려 있다.(주18)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 안의 활동상태를 모두 신의식과 관련시킨다.(주19) 즉 절대적 의존감정은 하나님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생각될 때만, 인간은 최상의 존재의 이상을 위해 활동할 수 있다.(주20) 인간 존재는 자유감정과 의존감정의 분리 과정 속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상호작용의 지배법칙 아래 있기 때문이다. 획득되는 모든 것은 이 법칙에 종속해 있고, 항상 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창조의 목표로서 변할 수 없고 지속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과 인과체계를 깨뜨리고 이와 독립된 힘을 인간에게 줄 때에만, 인간은 창조적 임무를 위해 해방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과의 인과체계적인 상호작용을 지양시키면, 이렇게 고양된 경건 안에서 실천되는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촉진에 기여한다.(주21)
그런데 인간의 임무실천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죄다. 죄는 하나님 나라의 발전을 저지하는 것, 육이 영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것이다.(주22) 영과 육은 서로를 위하도록 구성되어 있고, 감각적 자연은 창조적 이성과 관련되어 있지만, 죄는 이 관계를 파괴한다. 물질적 자연이 인간의 영적 자발성을 위해 조직되었지만, 죄 때문에 영과 물질의 이러한 관계가 파괴됨으로써 신의식의 자유로운 전개는 저지를 받게 된다.(주23) 이러한 무신성(無神性) 혹은 하나님 망각의 상태는 신의식을 실제생활의 관련성 안으로 끌어오지 못한다.(주24)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죄에서 해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화(성육신)를 통하여 비록 과도적이지만 세계통치의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새로운 동인(動因)을 마련한다.(주25)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허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표상(表象)은 인간화와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인간화는 하나님 나라의 자연화이기 때문이다.(주26) 하나님의 나라는 신적인 본성과 인간적 본성의 일치(결합)를 내용으로 삼는데, 이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모범적으로 나타났다. 이 일치는 완성된 신의식의 형태 안에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자의식 속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주27) 내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 신의식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요 새로운 전체적 삶의 창시자이다. 그가 일으키는 구원은 신의식 저지의 제거, 구원자의 신의식의 능력 안으로 죄인을 받아들이는 것, 신의식의 활성화(Belebung)이다.(주28)
그렇지만 구원자의 활동은 즉각적인 효력을 낳지 않는다. 그는 그의 모든 활동과 함께 역사 발전의 법칙 아래 있고, 이 활동은 그의 출현시점이 전체로 서서히 확대됨으로써 완성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출현시기로부터 진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고, 기독교 역사는 예수에 의해 시작된 신의식 저지의 제거가 꾸준히 점차로 가시화되는 역사로 볼 수 있다. 구원이란 그리스도인의 자의식의 발전, 신적인 본성과 인간적 본성의 일치(성육신)가 모든 인류에게 파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그 이후 전체의 진보과정의 원형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완성된 인류의 원형이며, 그 안의 계시는 신적인 본성과 인간적 본성의 영원한 일치과정의 원형으로서 모든 창조의 중심이다.(주29)
II. 리츨(A. Ritschl, 1822∼1889)
리츨의 하나님의 나라 표상은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는 슐라이어마허로부터 목적론적 성격을 갖는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그도 성육신을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중심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그는 신비주의를 공박하고, 그의 출발점을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자의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복음에 두었다. 그는 슐라이어마허에게서 기독교의 윤리적 이해가 하나님 나라의 이상 아래서 올바르게 표현되어 있지 못함을 비판했다.(주30) 슐라이어마허가 구원과 인간의 윤리적 임무관계를 충분히 사고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결함을 나타낸다고 그는 보았다. 왜냐하면 슐라이어마허는 어떤 경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의식을 예수에 의한 구원과 관련시키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이를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관련시켰기 때문이다.(주31) 이 비판은 옳다. 왜냐하면 슐라이어마허는 구원을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친교 안으로 받아들여짐에 의해 가능해지는 신의식의 재강화로만 이해했고, 따라서 단지 간접적으로만 구원을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관련시켰기 때문이다.(주32)
그러나 리츨은 구원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고 봄으로써, 양자를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 규정한다. 그는 구원을 '절대적 의존감정'을 회복하는 단순한 수단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의지와 구원은 직접적인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칭의의 올바른 영적 이해는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내용으로 삼는다.(주33)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인간 활동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포기하고 그러한 근거를 역사적 사건에서 찾는 리츨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는 슐라이어마허보다 칸트의 하나님 나라 표상과 더 가깝다. 리츨은 반형이상학적 도덕철학자로 해석되는 칸트의 입장에 따라 기독교를 특별한 생활 이상의 실현을 지향하는 윤리적 종교로 이해한다.(주34) "기독교는 유일신론적으로 전적으로 정신적·윤리적 종교이다. 이 종교는 그 창시자의 구원 생애와 하나님 나라 설립의 생애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자녀됨의 자유 안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인류의 윤리적 조직화를 지향하는 사랑의 행동을 일으킨다."(주35)
리츨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초세계적 미래성을 분명히 강조하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그 어떠한 기존하는 지상의 공동체형태도와도 동일시하는 것을 배격한다.(주36)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내재적 현재성도 똑같이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 과정'과 그 '성장'에 관해서 말한다.(주37) 따라서 이미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상응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사는 자들도 있다. 물론 그 완성은 먼 미래에 있다.(주38)
리츨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직접적인 종교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세계 안에서 실현하려고 원하는 '최고의 선'이고, 절대적으로 신적인 '세계의 마지막 목표'이다.(주39)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를 원하는 윤리적 행동을 보여주는 인간의 종교적 태도의 요소도 갖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실현하는 최고의 선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임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배는 오로지 인간의 순종의 실천에 의해 존속하기 때문이다."(주40) 그러므로 인간의 윤리성은 하나님 지배의 외형적 반사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윤리가 실천되는 바로 그것에 하나님이 지배한다.
인간의 임무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사상은 하나님의 활동에 상응하는 자발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리츨은 최고의 선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행위와 이 실현을 촉진하는 인간의 행위를 구분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활동은 처음부터(apriori) 모든 인간의 협동을 배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인간의 활동은 단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반응(Rsaktion)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주41)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관련해서 리츨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를 나눈 것은, 그가 분명히 하나님과 인간을 구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게 하고 자신과 화해시키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고의 선을 위한 하나님의 활동은 죄의 제거이다. 인간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행동의 직접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임무를 성취하는 윤리적 실행능력을 부여하는데 있고, 그 간접적 목표는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이것은 모든 윤리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인간은 단지 화해된 자로서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주42)
리츨에 따르면 죄란 도덕률(Sittengesetz)과 자유의 상호관계가 교란됨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이 교란은 도덕법에 배치되는 자유의 남용에서 비롯된 것이다.(주43) 여기서 하나님을 도덕적인 세계 지배자로 보는 칸트의 생각이 드러난다. 칸트도 역시 하나님을 도덕률의 창시자와 옹호자로 생각했다. 하나님은 또한 세계의 마지막 목표의 달성을 옹호하는 자이기도 하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저항, 하나님의 계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의지의 영역에서 죄는 의지와 하나님과의 이상적인 관계의 교란이다.(주44)
그리고 죄의 용서는 의지와 그 마지막 목표와의 이상적인 관계 회복이다. 그런데 인간의 마지막 목표는 최고 윤리성의 의미에서 인간의 정신화(Vergeistigung)이다. 인간은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목표실현에 봉사함으로써, 즉 인류가 하나되는 뜻에서 윤리적 정신들의 친교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동시에 그의 목표를 실현한다. 인간이 도덕률에 나타난 도덕적인 세계지배자의 의지에 순종할 때, 즉 하나님의 통치를 윤리 속에서 실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자기목표는 인간의 자기목표가 된다. 바로 이러한 목표의 동일성의 회복은 리츨의 화해론을 지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그의 창조의 영원한 목표이기 때문이다.(주45)
리츨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의 관점 아래 요약될 수 있다.
1)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절대적으로 윤리적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을 위한 윤리적 임무를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 안의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이기 때문에, 인간의 윤리적 추구는 이 목적의 성취에 이바지한다.
2) 초세계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성육신과 더불어 시간 안으로 들어왔고, 예수의 활동 속에서 실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윤리적으로 완전한 인류의 원형(Urbild)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예수가 창설한 종교적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수단이다. 이 공동체의 목표는 윤리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안으로 더욱 더 완전하게 옮겨놓는 것에 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데에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된다.
3) 리츨의 하나님 나라 이해의 또 다른 주요 관점은 하나님 나라의 발전이다.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는 세계내적인 현실이 되었지만, 윤리적인 것 안의 그 실현은 인간의 여전한 죄악 때문에 항상 접근해 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먼 미래에 있다.
4) 그러나 리츨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예수의 선포에서 찾아보려고 시도함으로써, 바이쓰(J. Weiß)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에서 나중에 도달했던 결론(하나님 나라의 초월성, 이원론 및 하나님 나라의 돌입에 대한 기대)에 이르는 길을 예비했다. 바이쓰는 매우 날카로운 역사비판의 척도를 적용하여 당대의 지배적인 하나님의 나라 해석을 뒤흔드는 결과는 남겼던 것이다.(주46)
III. 헤르만(W. Herrmann, 1846∼1922)
헤르만은 한편으로는 칸트학파의 일원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슐라이어마허의 제자였다.(주47) 그에 따르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로부터 발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활동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피안(Jenseits)으로부터 온다. 이것은 인간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Gabe)이다. 당대 유대인들이 완전한 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보상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예수는 잘못이라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의(義)는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의 자체를 축복(마5:6)의 내용으로 삼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함으로써 비로소 의로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의의 추구와 하나님 나라의 추구를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주48)
헤르만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그 시대의 경건한 유대인과 다르게 이해했다. 메시야 희망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피안으로부터 오는 것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차안(此岸)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들의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지상적 소원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연적인 생활의 단순한 증진으로 보지 않았고, 축복을 자연적인 생활기쁨의 완성으로 보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에게서 나오고 자신에게 이해될 수 있는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속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치적 희망과 뒤섞는 모든 시도를 배격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 받게 될 최상의 생활은 자연적 욕구를 움직이는 차원 너머에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최고의 선으로 가시화하는 모든 수단을 배격했다. 이로써 그는 우리가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은 오직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점을 말하려고 했다. 그렇기에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묘사하지 않았다.(주49)
헤르만의 입장에 따르면, 예수는 우선적으로 윤리적인 선(善)의 순수한 의미를 선포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지의 친교 혹은 공동체 위에 세워진 의지, 내적인 자율(自律)이다. 이와 함께 예수는 우선적으로 의의 요구를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동일시하려고 했다. 인간 속에서 그러한 의와 신뢰 혹은 종교가 생겨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에게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이 보고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 특히 인간 자신 속의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복종시키는 것은 '경건한 신의식'이나 '도덕률'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Macht)이다. 우리가 이 능력에 실제로 복종하려면, 그를 순수히 신뢰하고 내적인 자율 속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선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에게 완전히 복종시킴으로써, 우리를 내면적으로 변화시킨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혹은 예수의 견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인간에게 오는지는 이차적인 질문이다.(주50)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의 힘(Kraft)을 통해 인간을 내면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지배한다. 메시야는 마음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주51)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의 권능, 예수의 놀라운 권능, 그의 인격의 힘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은 죄인 안에서 실현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 출현의 인상(印象),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인간을 사로잡는 예수의 인격(人格), 자신의 활동을 통해 인간의 마음 속에 기억을 산출한 그의 인격의 상(像)이다. 그의 인격의 힘에서 우리는 첫 증인들이 경험한 바로 그것을 체험한다.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그와의 고유한 체험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 앞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주5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체험하는 현실의 능력으로써 예수의 내적인 삶의 상을 파악할 수 있다. 예수의 인격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릴 수 있는 권능의 순수한 현상이 된다. 이것은 탐구할 수 없는 비밀이지만, 다른 모든 것보다 더 친숙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예수를 그 자신의 내적인 삶에서 인식하지 못한다며, 자연에 대한 그의 놀라운 권능,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의 권능도 파악할 수 없다. 예수의 인격이 역사 안에서 참으로 효력을 끼치는 것은 역사적 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정신적 생활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이다. 모든 것은 우리가 신약성서에서 참으로 예수의 상을 알 수 있느냐, 그에게서 우리가 경외와 신뢰 속에서 온전히 복종할 수 있는 권능을 체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오직 이것만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다.(주53)
V. 평가
앞에서 말한 세 신학자들의 입장을 다 함께 묶어서 평가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개괄해 본다면, 이들의 신학은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현대인의 자의식 속에서 새롭게 파악하고 표현하려는 정당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적 유산을 파괴하려고 한 게 아니라, 단지 이를 변화된 문화의식 속에 이식하려고 고심했다. 그리하여 혼란한 정신세계에 새로운 통합성을 주고 기독교적 경건성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학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다.
1) 이들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는 서양의 형이상학과의 분명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종합하고, 기독교를 문화운동과 동일시 하려는 시도를 나타낸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립이 모호해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신학의 주어가 아니라 술어가 되고 있다. 이 신학의 주어는 바로 인간 혹은 인간의 경건, 도덕, 체험이다.
2) 이들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는 진보적·낙관적 역사이해가 깔려 있다. 이들은 인간의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문화와 역사의 절대적 진보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3) 비록 이들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이 실현의 가능성을 세계 안의 인간의 가능성 위에 두고 있다. 여기에는 세계, 자연, 역사를 인간의 손 안에 넣고 자신의 뜻에 따라 형성하려는 인간의 자율성, 하나님 나라의 세속주의적 구조가 드러난다. 이러한 천년왕국적 형이상학은 역사의 과정과 그 다음의 신학(요하네스 바이쓰, 칼 바르트 등)에 의해 추월당하고 의심스럽게 되었다. 새로운 신학의 방향전환은 현대의 주관주의를 극복했다. 즉 인간과 그의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근거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표상, 실현방식과 완전히 일치될 수 없다.
4) 이들의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압도적으로 도덕적·체험적 기독교 이해 위에 서 있는 주관주의의 특징을 띤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주관주의의 실현만이 아니라 그 종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학은 칼 바르트의 말대로, 쉽사리 개인주의와 상대주의에 떨어진다.
5) 이 신학에서는 하나님 나라 실현의 결정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발견한 이상적 인간의 원형(Urblid)이지, 인간에게 낯선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온 자가 아니다. 이 신학은 예수의 인격이나 선포 혹은 성육신에 더 강조점을 두고, 그의 구체적 생애와 활동,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현저히 축소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이 신학은 도덕이나 체험 등으로 경험될 수 있고 실용화될 수 있는 것만을 흥미있게 받아들인다.
6) 이 신학은 전체적으로 반지성적·반교리적·반도그마적 경향을 보인다. 즉 오직 인간의 주관에 의해 파악되는 것 혹은 인간의 주관을 사로잡는 것에만 흥미를 보인다. 그리하여 인간이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 자신이 발견한 도덕의식, 역사의식, 체험의식이다. 이 신학은 결국 자신을 추구하는 우상숭배의 모습을 띠고, 기독교를 자신이 이해하는 종교의 범주 안에 가두어 버리며, 인간성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을 희생시켜 버린다.
<목회와 신학, 1991년 7월호 >
주
1. 18, 19세기 독일 개신교신학의 역사적·종교적·철학적 배경에 관해서는 특히 F. Mildenberger, Geschichte der deutschen evangelischen Theologie im 19. und 20. Jahrhundert, Verlag W. Kohlhammer 1981과 H. Stephan-M. Schmidt, Geschichte der evangelischen Theologie in Deutschland seit dem Idealismus, Walter de Gruyter, Berlin 1973 참조.
2.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München 1975, 58ff.
3. C. Walter, Typen des Reich-Gottes-Verständnisses, München 1961, 88.
4. K. Barth, Dis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19. Jahrhundert, Zürich 1947, 389.
5. K. Barth, 상게서 388.
6. C. Walter, 상게서 88.
7. F. Schleiermacher, philosophische Sittenlehre ed. Kirchmann, Berlin 1870, 132.
8. 상게서 132.
9. Glaubenslehre II, 508(이하에서는 GII라고 표기함).
10. 상게서 510.
11. C. Walter, 상게서 91f.
12. Glaubenslehre I, 15ff(이하에서는 GI이라고 표기함).
13. 상게서 49ff, 248ff.
14. GII, 512.
15. GI, 6f.
16. F. Flückiger, Philosophie und Theologie bei Schleiermacher, Zollikon-Zürich 1947, 26ff.
17. GI, 169.
18. C. Walter, 상게서 95.
19. GI, 55.
20. 상게서 18.
21. 상게서 52f.
22. 상게서 316.
23. 상게서 361.
24. 상게서 70.
25. GII, 510.
26. 상게서 103, 115ff.
27. GI, 169.
28. GII, 94f.
29. 상게서 15ff.
30. A. Ritschl, Di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öhnung, Bd3. Bonn 1895, 8ff(이하에선 RuV라고 표기함).
31. 상게서 9.
32. C. Walter, 상게서 138.
33. RuV, 10f.
34. C. Walter, 상게서 138.
35. RuV, 13f.
36. 상게서 266f, 294.
37. 상게서 40f.
38. 상게서 32.
39. A. Ritschl,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Bonn 1875, 51f.
40. 상게서 30.
41. 상게서 31.
42. 상게서 34f.
43. RuV III, 56.
44. 상게서 56f.
45. 상게서 282ff.
46. C. Walter, 155.
47. E.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München 1975, 56.
48. W, Herrmann, Dogmatik, Gotha-Stuttgart 1935, 23.
49. 상게서 24.
50. 상게서 25.
51. 상게서 26.
52. 상게서 27.
53. 상게서 27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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