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의(Ⅰ)
요 점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는 필히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실행됩니다. 따라서 그 나라 백성들의 삶의 수준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으로까지 올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의는 우리에게 짐으로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수준으로까지의 삶으로 살아갈 것임을 보여 주시는 축복임과 동시에 오늘 이미 그 나라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기에 지금 여기서도 그 모습을 내 삶을 통하여 실현하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의", 즉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의」란 어느 수준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5,6,7장의 산상설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들, 특별히 21절 이하를 보시면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21~48절까지의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얘기들은 전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그의 수준이 어느 만큼 높아져야 되고 완벽해져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지적들입니다. 산상설교에 묘사된 수준들을 보실 때마다 이 요구에 사실상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합격되지 못했다는 것도 알아야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는 것도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한번도 칭찬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잘못됐다고 그러셨습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는
얘기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쪽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왜 비교를
하시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쪽이 틀렸다 하면 반대쪽으로
가라 해야 맞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저쪽으로 가지 말고 이쪽으로 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보다 더 가라는 이야기입니다.
틀린 쪽을 ×표 하시면 당연히 반대 쪽으로 가라고 해야 맞는데 그것이 아니고
그들보다 더 가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말씀의 깊이와 내용에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어느 수준까지 요구하는가 하는 그 첫번째 법칙으로
「분노의 법칙」을 기억해 보겠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怒)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분노의 법칙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인치 말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미워하고 노하는 것으로 충분히 살인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얘기를 합니다. 참 재미있는 얘기입니다. 왜 재미있냐 하면 우선 여기있는 말
때문입니다.「라가」라는 말에 각주가 "히브리인의 욕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가란 빈머리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는「비었다」라고 하지 않고 꽉 찼다고 하여
돌머리라고 말합니다만 그 사람들은 빈머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공명(共鳴)의 법칙을 제시하는 이유는 "누구 잘못이냐! 그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히브리인들이 갖고 있었던 분노의 법칙에 대한 개념이요,
심판의 방법이었다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화를 내고 노하는 자부터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요구하는 것을 이 선에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지 않는 자리까지 가는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의 기준이라면 지금 하나님 나라가 요구하는 의의 수준은 그것이
결과되는 원인이 없어져야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로 설명을 하면
이해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기침이 납니까? 사레가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무엇일 수 있습니까? 폐결핵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기침들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목구멍을 막아버리면 됩니다.
다시는 기침을 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기침이 난 것은 어떤
현상일 뿐입니다. 무엇의 현상이냐를 진단해 내는 사람을 우리는 의사라 합니다.
「기침이 나니 기침 멈추는 약을 드십시오」그것은 바른 처방이 못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진단이 바로 똑같은 얘기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한 일이
있다면 증상을 감추는 것뿐이었지 원인 치료를 하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너희의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앞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를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살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마음에 있는 미움이 열매를
맺는 것이 살인이지 살인 따로 있고 미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의「미워하지 말고 화를 내지말라」는 이 얘기만큼 하나님 나라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가 분노에
대하여 어느 만큼 자제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스스로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느
수준만큼이냐 하면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어 놓는 자리까지입니다. 분노를
그치는 정도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더 가서 사랑의 자리까지 가야
됩니다. 우리의 수준은 기껏해야 사랑할 만한 대상을 사랑하거나 자기 자식을 돌보는
사랑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내 자식,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다. 보모는 누구나 장님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만은 천재 같고 자기 자식만은 원죄를 안 진 것 같지 않습니까? 모두가 이 못된
친구놈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23,24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사람으로서 예물을
드리러 가는 그 시간까지도 화해하지 못할 사람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는 그 사람에
대해서 보통 증오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화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십니다. 예물을 드리는데 거기서
네가 누구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놔 두고 화해하러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주님께서 하신다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은 무엇입니까? 「주여
그것만은 못 하겠습니다. 제가 제사를 곱배기로 드리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는 얘기입니다.
지금 이 대목이 갖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화해할 수 없는
대상인 우리를 용납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결단코 화해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 우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용서받았다는 그 깊이를 음미하신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화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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