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축복(Ⅰ)―죄 사함
요 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리고 있는 축복들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기에 이 땅에서 맛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축복 중에서 "죄 사함"의 축복을 살펴봄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난 자유로움과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사는 이 기쁨이 바로 천국의 기쁨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미 실현되었고 그 완성의
극치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있을 것임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통하여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에 당연히 우리는 현재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들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실들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진심으로 그 나라의 완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 지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의 축복들을 맛보고 있지
않다면 나중에 완성될 그 나라에는 더 더욱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꿀통의
꿀을 조금 맛본 자가 그 꿀통을 다 먹기를 소원하듯이 하나님 나라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인간이 처해있는 상태에 비추어 볼 때 소극적인 축복과
적극적인 축복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인 축복으로는 사람이 죄로
인하여 지금 처해있는 징벌과 심판의 상태를 해결하는 것이며, 적극적인 축복은
단순히 징벌을 그치는 정도에 머무르는 정도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셨던 완성의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전자를 우리는 죄 사함이라 부르고
후자를 영생(생명)을 얻었다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메시야 시대의 축복 중의 하나로 죄
사함을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31:34).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53:11)
또한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순서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한
후에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아 가르쳤고
바로 이어서 죄를 용서해 주실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생이라면 누구나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법정 앞에 서서 자기가 행한대로 하나라도
남김 없이 죄를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면 공정하신 재판장인 하나님은 당연히 죄 있는
자로 죄 있다고 선언하시며 거기에 알맞은 형벌을 집행하십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우리를 변호하는 독특한 변호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죄인을 대신하여
자기가 모든 형벌을 받았으니 이것을 의지하는 죄인은 죄 사함을 받았다고 변호하실
것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일을 재판하시는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지만 신자들에게는
이 일을 이미 이 땅에서 맛보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 바로 죄로 말미암는 심판에서
벗어나 죄 사함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마지막 날의 천국의
기쁨 중 죄 사함의 기쁨을 지금 이 땅에서부터 맛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역 중 자주 죄 사함에 대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7:48). 이 선언은 그분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존재, 즉 하나님이신 메시야(죄는 하나님만이
사할 수 있기에)임을 보이심과 동시에 천국이 예수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지금 여기서 죄 사함 받은 것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죄 사함의 축복을 맛본 자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갖는 참다운
삶의 특징인 용서를 받아본 자만이 진정으로 용서해 주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용서함과 그의 자비가 필요치 않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이 필요한 자이며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모습을 주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하여 요구하시며(마18:21-35)
팔복의 말씀으로도 가르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인 죄 사함과 용서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용서의 축복, 즉 하나님의
복을 끼치는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임한 천국의 축복인 죄
사함을 누리고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동시에 지금 맛보고 있는 것들로 인하여 앞으로 온전히 맛볼 그 나라의 완성된
모습으로서의 예수님의 재림을 기쁨으로 고대하는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Ⅱ)―영생
요 점
하나님 나라의 적극적인 축복은 우리가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 자녀의 생명(영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이 이미 내 안에 있어 나의 삶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을 볼 때 지금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 생명이 충만히 만개될 주의 재림의 날을 소망하는 축복을 누리기로 합시다.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들어가는가? 요한복음 3장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니고데모와의 변론에서 예수님의
답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중생과 무엇을 연결시키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또 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하는 모든 일이 무엇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고 합니까?
중생으로만입니다. 이같이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영생을 얻었다는 것과
언제나 같은 뜻으로 씁니다.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고 합니다.
이「안다」는 말은 우리가 아는 것 같은 단순한 지식에 관한 단어가 아닙니다. 안다는
뜻은 훨씬 깊은 뜻입니다. 나는 저 여자를 안다. 이런 때 쓰는 말입니다. 깊은 교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박찬숙을 아십니까? 190㎝에 태평양화학 선수. 이렇게
그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안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도
여러가지로 쓰입니다만「그는 내가 잘 아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야」이럴 때 쓰는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깊은 속마음을, 그의 됨됨이를, 속성과 성격과 인격을
안다는 뜻입니다. 인격적인 깊은 교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U영생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며 이것이 없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얼마나 깊은 교제에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갖고 있는 영생의 정도가 어떤 것이냐가 구별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영생을 지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서 추적해야 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모릅니까? 압니다. 분명히
압니다. 그럼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까? 모릅니까? 알죠!
그러나 어떤 식으로 압니까? "오,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신, 고무신" 이러면서
약을 올린다구요.
「예수는 처녀가 낳았다며」이것이 그들이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이미 저들과 다릅니다. 그 구별이
생활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런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거기엔 급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둑으로 치면 지금 18급 아니면 12급도 아직 못 올라 오셨습니다.
새까맣게 놓고 두어도 지는 것입니다. 그 수준이 지금의 우리 됨입니다. 도대체 9점을
놓고도 지니까 "에이! 그럴바엔 맞두자" 이겁니다. 우리의 생활 태도입니다.
세상 사람보다 도대체 무엇이 더 낫습니까? 전혀 다릅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입니다. 단지 우리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이렇게 점검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우리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곤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아야 할 때 자꾸
흔들립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 우리가 못되게 살고 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개처럼 노는
것과 개가 사람처럼 노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개처럼
놀아도 그건 사람이고 개가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어도 그것은 개입니다. 말은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는 개를 보았습니까? 사람은 어쨌든 사람입니다. 개집에
들어가서 자도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오해하느냐 하면 사람이라면서 왜 개보고 더럽고 개만도 못 하냐
이겁니다. 여기서 늘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압니다. 안다고 말하기가 면목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 감정은 이럴 때가 많죠?
"어디가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그래 봤자 하나님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제가
안 믿는다고 그랬습니다." 이 부분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또 하나의 기준선입니다. 우리가 지금 영생을 얻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백성에게 허락하시는 적극적인 축복은 한마디로
영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영원한 생명이라 표현할 수 있고 그 생명은 당연히 생활을 가지기에 영생의 삶이라는
표현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영생을 우리가 앞으로 얻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에 우리도 지금 여기서 영생의 삶을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생명은 원래 아담을 처음 지으신 후 약속하신 것이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그 생명이 오히려 영생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 성격은 하나님 자녀의 생명을 나타내지 못하고 단지 사람의 생명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알기쉽게 생각해 보면 동식물의 생명이 각각 차이가 있듯이 사람과 동물의
생명에도 차이가 있으며 사람의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에도 뚜렷하고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생명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부자지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양자 됨의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앞 과에서 살펴
보았던 죄 사함의 축복을 훨씬 뛰어넘는 궁극적인 축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의 보호하심 아래서 그의 자녀들이 평안히 거하는
것을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으로 제시하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사65:17-25;시100:3;계21:2-4)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생명의 특징을 이렇게 하나님의 은총을 알고 그것으로
즐거워하는 자의 번영과 행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얻는 축복, 즉 하나님 자녀의 생명(영생)은 즐거움의 가장 으뜸되는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의 지배(다스리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이 영생은 물론 현재에도 있지만 내세에 가서야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만히 이루어져 지금은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로 보는 것 같이 분명하리라고 바울은 말하기도 합니다.(고전13:12)
하나님과 사귐으로 특정지워지는 이 생명을 소유한 자는 당연히 그 사람의 바로
이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 자녀들이 얻은 생명의 질의 표현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강력하게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조로서의 중대한 역할을
하나님 자녀들에게 축복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축복으로 알 때 하나님 자녀이기에
당하는 이 땅에서의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누구인가를 더욱 잘 드러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보이는데 쓰임 받는 인생임을 알아 단지 고통을 없애달라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환난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기뻐하는 자리까지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마5:10-12;요15:18,19)
그러나 또 하나 꼭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 영적으로 완성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영적으로 여기서 주 하나님과 교제를 지금
나누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아는 것이
있습니까? 왜 모른다고 감히 선언할 수 있습니까? 거울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뒤통수도 못 보는데 무슨 거울로 봅니까? 이것이
성경의 요구이며 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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