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의(Ⅱ)
요 점
우리가 주기도문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내 삶의 전영역에서 나타나기를 소원하는 기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제시하신 '의'의 구체적인 수준들을 몇 가지 법칙(분노의 법칙, 성결의 법칙, 정직의 법칙)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발견할 때마다 우리 마음에 가장
크게 찾아오는 자세는 끊임없는 자기 반성입니다. 그 반성이란 단순히 내가 이것을
잘못했다가 아닙니다. 늘 솟구쳐 나오는 죄의 기계가 내 마음에 있다는 그 두려움입니다.
"저희의 입은 열린 무덤이요!" "회칠한 무덤같으니"(롬3:13;마2:27). 그 안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썩은 것밖에 나오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열린 무덤인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만이 그것을 고쳐내기 위한 싸움에 전목표를 두고 치열하게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싸움에 목숨을 걸지 않고 누가 더 많은 열매를 쌓아 놓았느냐로
시선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참으로 무서운 함정입니다
이와 관련된 두번째 법칙은 '성결의 법칙'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기준, 수준으로 성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7절 이하에 나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것이 유익하니라"(마5:27-30)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만일 우리의 눈이 나로 범죄케 하면 눈을 뽑아버리고 팔이
나로 범죄케 하면 팔을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U그리스도를 좇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이 있거든 절대 타협하지 말라는 것이 일차적인 요구입니다. 네 부모나 처자나
운명이나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절대 타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네 부모나 처자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나를 좇을 수 없다는 말씀의 의미는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비교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도
미움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대조입니다. 저쪽이 너무 커서 비교를 하자면
그런식으로 설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몸의 일부로서 잘라버릴 수 없는 것들을 자르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눈을 뽑는다고 범죄가 그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팔을 자른다고
범죄를 그만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히 힌트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견물생심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다시 보게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얘기를 이상하게 성결의 법칙으로 제시를 합니다. 네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눈을
빼라! 무슨 얘기인지 아십니까? 그 죄를 짓는 원인이 내 마음에 있으므로 최선의
방법이 있다면 죄와 더불어 노는 자리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라는 얘기입니다. 절대
죄와 장난하지 마십시오.
지금 성결의 법칙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성결하기 위하여
우리 쪽에서 나를 어디로부터 한 걸음씩 빼어내야 하는가에 대한 얘기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내 팔로 하여금 더 이상 장난질을 못하게 하고 내 눈으로 하여금 더 이상
악을 보지않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 얘기는 우리를 금욕주의로 만들고 세상에서
격리되는 삶이 최선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제시하느냐 하면 네
손이 나가서 만지고 네 눈이 보아서 촉발되는 자리가 사실은 어디냐는 것 때문입니다.
듣고 보고 맛보고 하는 모두가 그 사람의 인격이 아닙니까? 감각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개성이요, 기호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지적들을
요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의 법칙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결의 법칙에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하면 우리가
성결해진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가 요구하는 데 비하여 우리가 어느
수준에 있는가를 제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모든 얘기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 소리 못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지적이 아닙니다. 바로 나에 대한 지적입니다. 스스로를 누구보다 낫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오십보, 백보가 아닙니까?
세 번째 법칙으로 '정직의 법칙'이 나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3-47)
맹세를 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원래 맹세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맹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 맹세라는 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느냐 하면 마태복음
23:16 말씀부터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16-19절)
이 말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맹세를 해 놓고도 지켜야 할 맹세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맹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왜 나왔습니까? 맹세를 안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안 지키는
맹세를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남을 속이기 위해서 필요한 맹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도장으로 찍으면 약속을 지켜야 하고 저 도장을 찍으면 안 지켜도 된다는 뜻입니다.
안 지켜도 되는 도장은 상대방을 속이는 데 쓰는 것입니다. 도장을 찍었으니
상대방이 됐다고 믿을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서의 맹세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납득시키기 위한 맹세로 쓰는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은
하나님을 두고 맹세했으니까 이것은 지킬 것이다'라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 안목에서 보시면 마태복음 5장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일에
하나님이 들러리가 되는 일은 할 엄두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에 내가
들러리가 되는 일은 있어도 하나님이 왜 들러리가 되는 일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맹세가 그렇게 쓰여져서는 안됩니다.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네 발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옳다", "내 생각에는 아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뿐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서 상대방을
속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요구하는 의의 기준입니다.
여태까지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이 수준에서도 우리는 무릎을 꿇어 꼬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여러 측면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가장 여러분이 항복하시고 또 생각을 하셔야 할 부분이 있다면 인간이 뭐냐 하는 데
대하여 뼈저린 감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상 큰 축복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나는 그래도...」라고 생각하는 법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감각이 있으냐! 그것을 성경에서 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사실은 성경이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이냐 하는 데 대한 목표 제시입니다.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생각하면 끔찍한 요구들입니다. 그런데 됩니다.
정말 됩니다. 되고야 맙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고집이 더 세시기 때문입니다. 말로
할 때 들으면 칭찬받고 그 자리까지 가고, 말로 해서 안 들으면 터지고 그 수준까지
간다고 그랬습니다. 가긴 갑니다. 열차를 타라 그럴 때 타면 의자에 앉아서 가고 타라는
데도 안 타면 새끼줄에 목을 매인 채 기차 뒤에 묶여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길을 끌려가 보십시오. 덜커덩 덜커덩 신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이 아무리
짧았을지라도 돌아보십시오. 사람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결국은 바꿔
놓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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