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기슭, 진안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해리슨 선교사의 익산 선교와 고현교회
앞서 소개한 ‘장터 선교사’ 해리슨(William B. Harrison, 1866-1952, 河緯廉)은 1903년 부인 데이비스가 별세한 후에 선교지역을 아예 군산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이후 익산지역까지 선교활동의 폭을 넓혀나가 ‘익산 고현교회’의 설립에 지대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1906년 6월 12일에는 당회장 해리슨 선교사와 서기 양응칠 조사의 집례 하에 고현교회의 첫 번째 학습문답이 있었고, 12월에도 문답을 하여 결신자들이 나온 것을 다음과 같은 자료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906년 6월 12일 온 교우가 회집하고 하위렴 목사와 양응칠 조사가 참석하야 기도하고 학습문답을 하였는데 그 중에 정사옥, 김경장, 김문선 삼씨를 시행의 가합한 결과를 좇아 학습을 세우다. (고현교회 당회록 제1권 3쪽)
하위렴 목사와 양응칠 조사가 회집하야 기도하고 문답을 한 중에 김분순, 김순녀, 박순서 댁, 오원집 댁을 합당한 결과를 좇아 학습을 세우다.(고현교회 당회록 제1권 3쪽, 12월 2일자 기록)
당회록에 등장하는 학습교인들은 양응칠 조사에게서 6개월간 열심히 성경과 교리문,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 등을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뒤 1907년엔 박분순을 비롯한 5명, 1908년에는 김자윤을 비롯하여 4명이 학습을 받았고 1909년에는 오덕근 외 3명 1910년에는 정대식을 비롯하여 6명이 학습을 받는 등 해마다 그 수가 점점 많아졌습니다. 1907년 12월 9일 마침내 세례식이 처음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첫 세례자들은 정사옥, 김경장, 김문선, 김분순, 김순녀, 박순서였습니다. 또한 이날에 첫 유아세례자가 나왔는데 바로 오원집의 아들이었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군산과 익산 특히 고현교회의 성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수많은 인근 지역을 쉴 새 없이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돌보며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그러던 중 1928년, 체력이 쇠진하여 요양 차 자신의 고국인 미국에 들어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의 진안 선교와 세동교회
1902년 멕커첸(Luther O. McCutchen, 馬路德, 1973-1960) 선교사가 곰티재를 넘은 뒤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 진안군 부귀면 원세동이였습니다. ‘원세동’(元細洞)이란 마을 이름은 원래 ‘세동리’라는 마을이 확장되면서 본래 마을의 중심지였던 곳에다 ‘원’(元)이란 글자를 덧붙인 지명입니다. 현재도 세동리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은 ‘원세리’입니다. 진안 땅에 당도한 멕커첸 선교사가 재를 넘느라 흘렸던 땀을 닦고 있자, 진안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본 서양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가 이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었겠습니까?
멕커첸은 그 자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곳에 모였던 사람 중 황준곤, 이원지, 손치문, 한선명, 최사행 등 다섯 명을 감화시켜 개종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3일 진안군 부귀면 부암리 샛터의 초가삼간에서 원세동교회가 출범하게 됐습니다. 원세동교회는 1903년에는 장경태 전도인이 교회를 이끌었으며, 1907년엔 최사행 전도인이 바통을 이어 받아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1907년 9월 17일에 최초로 설립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 9월에는 전북노회에 소속되었습니다. 원세동교회는 1921년 봄, 교인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현 위치인 세동리로 교회를 옮겼고 세동교회로 이름을 바꾼 뒤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동’이란 말은 가늘고 길게 뻗은 골짜기를 뜻하는 ‘가늘목’에서 왔다고 전해집니다. 그 지명의 유래처럼 지금의 세동교회는 작고 아담한 교회지만 1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세동교회는 2008년부터는 중령으로 예편하여 뒤늦게 신학을 공부한 김형기 목사가 목회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김 목사의 헌신으로 세동교회에는 복음의 향기가 넘쳐 나고 있습니다. 비록 한적한 시골 마을이지만 김형기 목사와 장로 여섯 분 그리고 80여 명의 성도들이 “작은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교회”(마 25:40, 레 19:18)가 되기 위하여 지역 주민들의 벗, 노약자들의 벗, 다음 세대들의 벗, 불신자들의 벗이란 ‘4벗 운동’을 전개하면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00년 전 두메산골에 세워진 거석리교회
진안군 부귀면 북쪽에는 1,126m의 운장산이 우람한 위용을 자랑하며 솟아있고, 그 주변에는 부귀산(806m), 옥녀봉(737m) 등의 만만찮은 산으로 둘러싸인 거석리가 나옵니다.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대체 어떠한 연고로 이러한 두메산골까지 100년도 훨씬 전에 복음이 들어올 수 있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이 나라 방방곡곡에 퍼져 나간 복음의 능력에 새삼 찬탄의 마음 금할 길이 없을 겁니다. 1900년 바로 이곳에 거석리교회(현 부귀중앙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는 멕커첸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진안지역에 선교의 발을 내딛기 이전의 일입니다. 그렇게 복음의 씨앗은 민들레 홀씨처럼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기도 전에 그곳까지 날아가 있던 것입니다.
1900년 거석리에 살고 있던 18세의 이원일은 어머니의 간질 병환을 고치기 위해 군산에 있는 서양의사가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궁말교회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어머니의 병환 뿐 아니라 영혼의 치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자신의 집이 있는 거석리로 돌아간 그는 자신의 집에 기도처를 마련하게 됩니다. 1902년 그는 대지 200평을 교회 부지로 헌납하여 초가 교회를 건립하여 예배를 드렸고, 이로써 거석리교회의 역사가 본격화됩니다. 그런데 1985년 12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발간한 총회사진명감을 보면, 부귀중앙교회의 창립일이 1900년 5월 1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기록은 이원일의 장남 이원태 장로(면장)와 이 교회의 첫 번째 장로인 이원칠 장로의 장남 이삼암 장로의 증언에 의한 것이기도 합니다.
『부귀중앙교회사』(27쪽)에서는 당시 거석리교회는 ‘기도처’로서의 중요한 전도적 사명을 다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교회는 비록 산골에 위치한 작고 아담한 교회였지만, 진안군에서 가장 뜨겁게 부흥하는 교회로 알려집니다. 1911년 9월 18일에 대구 남문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제5회록을 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진안 거석리교회에서 4간을 새로 건축하였는데 그곳은 산중(山中)인 고로 교인들이 심히 가난하야, 재정이 군졸하오나 육신의 힘과 영혼의 믿음은 재정이 풍족한 것보다 나음으로, 간략히 예배당을 건축하여 낙성까지 되었사오며…
진안지역의 선교활동을 맡은 멕커첸 선교사는 이곳까지 말을 타고 다니며 교회를 돌보았고, 1911년부터는 클라크(William Monroe Clark, 1881-1940) 선교사가 교회를 지키게 됩니다. 클라크 선교사는 1907년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고 1909년 8월 28일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전주에 부임하여 왔습니다. 그는 1923년 조선예수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이사로 발령받아 서울로 가기 전까지 14년 동안 거석리교회를 돌보았습니다. 1911년 10월 15일 전주서문밖 예배당에서 있었던 전라노회 1회록을 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1. 강운림(클라크)씨에게 진안 장수 무주 용담 각 교회 당회 일을 맡김
2. 강운림씨는 방언(한국말)이 아직 부족하오니 마로덕 씨와 동사 목사 될 일
1912년에 궁말교회에서 열린 전라노회 제2회 회록을 보면, 클라크 선교사의 요청으로 조사 김응규, 김성식, 장경태에게 첫 번째 학습문답을 허락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거석리교회는 나날이 부흥하여 1918 년 통계표를 보면 주일학생 48명에 세례교인이 40명이요, 예배 인원수가 85명이었고, 1932년엔 교인수가 127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원일과 함께 궁말교회에 가서 병 치료를 받은 이원칠이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원칠은 1920년 교회 장로로 장립되면서 거석리교회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이정상 목사와 증손 이한진 장로도 전주 중부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의 충성스런 일꾼 가운데 이관익 집사가 있습니다. 그는 부모형제 앞에서 당당하게 조상대대로 믿어 온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오직 예수만 믿겠노라 선언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후손들이 거석리교회를 든든하게 섬기고 있었고, 지금은 그의 차남 이정환 집사의 자부 김기옥 권사가 여전히 그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원일 집사는 한마을에 살고 있던 이관익 집사와 교회예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면 항상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또 새벽에 나가 밭일을 하고 돌아올 때 <새벽부터 우리>라는 찬송가를 즐겨 불렀습니다. 이원일의 직계 후손 중에는 전주노회장을 지낸 증손자 이주백 목사(배월교회)등 11명의 목회자가 배출되었고, 사위로는 신흥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장평화 장로와 효자로 소문난 이영태 장로(부귀면장 역임) 등이 있습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 그곳에 세운 대불리교회
진안군 주천면에 가면 명덕봉(846m)과 명도봉(863m) 사이에 형성된 길고 긴 협곡인 운일암반일암(雲日岩半日岩)에 이르게 됩니다. 여름이면 수많은 피서객들이 북적거리는 국민 관광지입니다. 예로부터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등산로를 낼 수 없어 하늘과 바위, 나무만 있을 뿐 오가는 것은 구름밖에 없다 하여 이곳을 ‘운일암’(雲日岩)으로 이름 지었다 합니다. 그리고 하루 중 햇빛을 반나절밖에 볼 수 없을 만큼 곡(谷)이 깊다 하여 ‘반일암’(半日岩)이라 불렀다 합니다. 100여 년까지만 해도 이 험한 길을 가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어 이곳을 ‘대불리’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곳까지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대불리라는 지명은 운일암과 반일암 28경 중 제12경으로 바위 위에 바위를 포갠 모습이 마치 부처 같다고 해서 붙여진 대불바위(大佛岩)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어느 날 대불리에 사는 문도순, 김병섭이 전주로 나갔다가 복음을 듣게 되었고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후 이들은 멕커첸 선교사와 함께 1903년 5월 24일 대불리 처사동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대불리교회’가 출발하게 됩니다. 그 후 교회 명을 ‘대광교회’로 바꾼 것은 아무래도 대불이란 이름이 교회 이름으로는 석연치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불리교회를 둘러싼 환경을 보고 있으면 이처럼 궁벽한 산골 마을까지 찾아와 복음을 전한 멕커첸 선교사에게 다시금 숙연함과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멕커첸 선교사를 기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씨 뿌리고 양육하며 거두는 자, 멕커첸 선교사
멕커첸 선교사는 유니온신학교 출신인 레이놀즈, 전킨, 해리슨, 오웬, 불과 같은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사로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는 자신도 조선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일로 기도하던 중 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되자 그는 곧 한국선교사로 지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02년 11월 7일 멕커첸 선교사는 서울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1904년 전주 선교지부에서 전주를 중심으로 동북부지역을 맡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이후 보인 멕커첸 선교사의 행보는 호남의 사도바울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나름대로 ‘농부선교법’을 개발하여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먼저 ‘씨뿌리기’입니다. 씨뿌리기는 길거리, 서당, 장터, 사랑채 등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단계입니다. 다음은 ‘잡초제거’와 ‘물주기’입니다. 처음 방문한 곳을 다시 방문하여 성경을 더 가르치고 교회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교정해 주는 것입니다. 다음은 ‘수확하기’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는 사람들을 정식 교회 구성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지치기’입니다. 이는 지역교회를 맡을 지도자를 양성하는 단계입니다. 그의 이러한 농부선교법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기록을 통해 보면 멕커첸 선교사의 선교사역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에 의해 1905년까지 4군데의 교회가 세워지고 14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1906년엔 17교회가 세워지고 5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1907년엔 21교회가 세워지고 201명이 세례를 받았고, 1908년엔 37교회가 세워지고 273명 세례를 받았으며, 1909년엔 56개 교회가 세워지고 451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평양신학교에서 도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전주남자성경학교의 교장으로 30년간 봉직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지도하에 수많은 교회지도자가 배출되었고, 그들은 호남지역 교회사의 주역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홀로 이룩한 수많은 교회들을 모두 돌볼 수 없었기에 여러 한국인 조사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이원필, 이경필, 최대진, 김응규, 김선식, 장경태 등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미국인 선교사들이 강제 송환되었을 때도, 한국인을 위한 그의 선교활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부목사로 재직하면서 한인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동시에 일본군 포로들 중에 있는 한인 전쟁포로를 위한 포로선교 사역도 열심히 했습니다. 호남신학대학교 이진구 교수의 논문을 보면 그는 결코 강한 체력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크고 작은 사고를 여러 번 당하였고, 때로는 과도한 선교활동으로 인해 심각할 정도로 건강을 잃기도 했습니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혈압강장제를 복용하면서 식이요법과 수혈까지 받아 가며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선교 열정을 펼치곤 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에게는 자녀가 없었지만 그는 수많은 ‘신앙의 자녀들’을 두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1946년 71세의 나이로 선교사로서 활동을 끝냈지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계속 교류를 가졌습니다. 1960년 85세 나이로 소천한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섬터(Sumter)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가 멕커첸 선교사의 선교 열정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요? 운일암과 반일암 골짜기를 타고 흐르던 그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오늘 이 순간도 대광교회 안에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 나운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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