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은혜 받아 거듭난 사람들
김제군 황산면 들판에 선인동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가을철 수확이 끝나면 여러 퇴폐적인 생활을 함으로 1년 농사를 한 번에 날려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테이트(Lewis Boyd Tate, 한국명: 최의덕) 선교사가 선인동을 찾았습니다. 그는 안백선이란 사람을 만나 쪽복음을 건네주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술 담배에 투전까지 좋아하던 안백선은 단번에 손을 저으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시는 능력의 말씀인지라, 어느 날 담배를 말아 피우려고 쪽복음 한 장을 찢던 그에게 이런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18-20)
순간 마음에 찔림을 받은 안백선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말아 피우려던 입담배를 태워버린 뒤 전주 서문밖교회로 테이트 선교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찌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된 심정으로 테이트 선교사를 만난 그는 이후로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50리나 되는 길을 걸으며 전주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마침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 한국명: 전위렴) 선교사가 근처에 월성교회를 설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월성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05년 3월 15일, 같은 마을에 사는 박순경과 함께 집 근처 초가 3칸을 매입하고 선인동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전주 선교부에서는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한 성경학교에 안백선을 입학시켜 공부를 시켰습니다. 1908년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한국명: 이눌서) 선교사의 위임을 받고 선인동교회 영수가 된 박순경의 충성으로 교회는 날로 부흥하였습니다. 박순경 집사는 1919년 장로로 임직하였습니다.
김제 감옥에서 옥리 일을 보는 김여일이라는 사람이 선인동교회 소식을 듣고 찾아와 신앙생활을 하니 교회는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1921년부터는 스위코드(Donald A. Swicord, 한국명: 서국태, 1921-49년 전주에서 활동) 선교사가 교회를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생겼습니다. 안백선 영수가 남의 보증을 서 농토를 다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가 전주로 이사를 하자 김여일이 영수 일을 인계받게 되었습니다. 김제 읍내에서 선인동을 오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김여일은 1910년 옥산리에 옥산교회(김제제일교회)를 세웠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몰려오자 1917년 하목마을에 임성용을 중심으로 하목교회를 또 설립하였습니다. 선인동교회에 김익두 목사가 와서 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한상용이 은혜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1920년 김제군 용지면에 임상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농촌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는 믿음을 가진 선인동교회 교인들은 보이어(Elmer Timothy Boyer, 한국명: 보이열, 1921-66년 활동) 선교사가 당회장으로 있을 당시 1925년 선인동학원을 설립하여 야학교육을 활발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진관리로 교회를 옮겨 진관리교회라 부르다가 1970년 4월 7일 황산 들녘의 수문장처럼 높다란 십자가를 세우고 동부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현재는 1997년에 부임한 김철안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데, 삶의 안식과 기쁨을 주는 교회로 거듭나 청소년 신앙운동과 독거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한 지역 봉사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함으로 더욱 부흥하고 있습니다.
선인동교회를 설립한 안백선은 전주로 이주하여 서문밖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세 아들은 머리가 영특하고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전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신흥학교를 다녔습니다. 둘째 아들 안삼용은 의사가 되어 태인읍에서 개업을 하고 태인교회를 섬겼으며, 셋째 아들 안상용은 대구의학전문학교(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를 졸업하고 군산에서 의원을 개업하여 지금까지 세광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선인동교회에 안백선 장로가 있었다면, 임상교회에는 한상용(1889-1963) 장로가 있었습니다.(김수진, 『호남기독교 100년사』, 259쪽 참고) 한상용은 김제군 용지면 임상리에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한상용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나라의 어지러움이 그에게도 영향을 끼쳐 술집을 드나들며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김제 읍내에 나갔다가 선인동교회에서 김익두라는 목사가 와서 사경회를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평양에서 유명했던 불량배가 목사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 예배에 참석한 그는 설교가 끝난 후 당돌하게 김익두 목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는 누가 믿는 것입니까?”
“죄인이면 누구든지 믿을 수 있습니다.”
한상용은 죄인인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그날부터 선인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집에서 선인동교회까지 가려면 늘 다니던 주막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주일날 그 주막 앞을 지나노라면 기생들이 돈 많은 그를 그냥 놔둘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끌려들어가 억지로 술을 마시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믿으려면 철저히 믿자.’라고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1920년 9월 1일, 동네에 잠실 한 채를 구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임상교회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토지 1,500평을 교회 앞으로 등기 이전하고, 1926년 십자가 모양의 22평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임상교회에는 한상용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소작인들이 출석하였습니다. 이제 한상용은 지체 높은 양반 지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고넬료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1924년 장로가 되어 자기가 중생함을 받았다는 의미로 중생학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하니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왔습니다. 이 학교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1941년 폐교될 때까지 500명도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이 학교 교사 중에 전주신흥학교 출신인 오기준이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스위코드 선교사는 그에게 중생학교에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면 신학교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오기준 선생은 성경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우리나라 역사를 함께 가르쳤습니다. 이후 그는 교회의 장학금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전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임상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상용 장로 부인 함연춘은 전주 태생으로 기전여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기전여학교 영어선생으로 재직 중 한상용과 결혼하였습니다. 함연춘은 1919년 3월 전주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한 애국 여성으로, 임상리 야학교에서 부녀자들을 가르치며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서 일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동네에는 문맹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상용 장로는 교회 내에 농우회를 조직하고 자작농운동을 실시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주민들에게 암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 키우게 합니다. 암소가 자라면 팔아서 송아지 값만 받고 나머지는 키운 농부가 갖게 합니다. 또 받은 송아지 값으로 송아지를 사도록 돈을 줍니다. 이렇게 계속 불려나가 마침내 농토를 소유하게 된 소작인들은 모두 지주가 되었습니다. 이에 임상리 주민들은 1939년 임상리교회 뜰에 ‘한상용 장로 영원 기념비’를 세웠고, 1941년에는 용지면 반교리 원임상리 농무들이 뜻을 모아 임상리교회 뜰에 ‘사인 한상용 시혜불망비’(士人 韓相龍 施惠不忘碑)를 세웠습니다. 이 자작농운동은 임상리 지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전해져 모두 지주가 되니 소작료를 지불할 일도 없었고, 흉년이나 보릿고개가 와도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상용 장로는 가난하고 병든 가정이 있으면 아무도 몰래 그 집 문 앞에 쌀가마를 놓아주곤 하였습니다. 1926년 그는 오갈 데 없는 강정리 노인을 집으로 데려와 사랑채에 모시고 그 노인을 천사가 보내준 사람이라고 하면서 돌보았습니다. 그의 사랑채는 한국 기독교 역사상 두 번째 양로원이 되었습니다. 양로원에서 매입한 공동묘지에는 300기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한상용 장로의 맏손자인 한규택 장로가 애린양로원 원장으로 대를 이어 섬기며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김수진 목사는 그의 책 『호남 기독교 100년사』에서 “한상용 장로는 이웃 사람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늘 말하였으며, 물질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시로 자기에게 맡겨주신 것이고 자신은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며 그렇게 많은 땅을 이웃을 위해 썼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성경대로 살다 간 사람입니다. 그는 헐벗고 병든 자를 돌보는 일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말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다녔습니다.
1904년 3월 1일 김제군 봉남면 대송리에 사는 주원선은 예수를 믿고 전주의 테이트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송리로 다시 와서 대송교회를 세우고 영수가 되었습니다. 레이놀즈 선교사가 대송교회를 맡아 말씀을 전하다가 1921년부터는 스위코드 선교사가 뒤를 이어 농촌 선교에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봉남면은 본래 금구 남쪽에 있다 하여 남면이라 불렸는데, 1914년에는 하지면으로, 1935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봉남면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송리는 봉남면 중심에 있습니다.
김제의 동남쪽 지역을 맡아 선교 활동을 하던 테이트 선교사는 1905년부터 금산면 두정리의 큰 유지인 조덕삼(1867-1919)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의 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입니다. 정읍이나 태인에서 전주나 서울을 가려면 금산면으로 들어와 두정리, 일명 팟정이(赤豆)를 거쳐야 했기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도 조랑말을 타고 남쪽 지역을 전도하러 가면서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하루는 조덕삼이 찾아와 자기 집에 와서 머물라고 초청을 하였습니다. 본래 조덕삼은 항상 문을 열어놓고 나그네들을 대접하곤 하였는데 그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보아 오다가 마침내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조덕삼의 할아버지 조정문은 평양에 살면서 중국 동북부지방으로 홍삼무역을 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아버지 조정인은 전라도 김제의 금산이 글자 그대로 금이 많이 나오는 산이라는 소문을 듣고 가솔들을 데리고 팟정이에 자리를 잡은 뒤 사금광산업을 하여 역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자인 조덕삼이 테이트 선교사를 청하니 테이트 선교사는 뛸 뜻이 기뻤습니다. 이 지역이 불교를 믿는 지역이고 신흥종교가 들끓는 곳이라 감히 전도할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호박을 넝쿨째 주시니 이 어찌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만남으로 하나님의 놀랍고 새로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 종교심이 많은 이 지역 사람들을 구원시켰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이 일이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함으로 한국교회 전체에 큰 빛을 비추는 일이 되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조덕삼이 테이트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네 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인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교사는 대답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 때문입니다.”
조덕삼은 선교사의 희생적인 정신과 용기에 감동을 받아 1905년 봄부터 자기 사랑채에서 조덕삼 부부, 마부 이자익, 같은 마을의 박화서 등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팟정이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팟정이교회는 후에 금산교회로 불리게 됩니다. 금산교회는 1905년 조덕삼의 과수원이 있는 두정리에 초가삼간을 예배당으로 바꾸고 10월 10일 조덕삼과 이자익이 학습 받은 날을 교회 설립일로 정하였습니다. 다음 해 5월 30일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로 조덕삼, 이자익, 박화서가 세례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성찬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주명준 교수가 쓴 『연정교회 100년사』를 보면 예수를 먼저 영접하여 팟정이교회를 시작한 이는 이자익이라고 합니다. 이자익이 처(김선경)와 함께 처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독교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내의 할머니가 금산사의 여승이었는데, 그의 친구 김종규 등 몇 사람들과 함께 ‘팟정이 모임’을 2년간 지속하며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합니다.
이자익은 경남 남해 이동면 탐정리 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3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6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어린 이자익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다가 17살 때 무작정 배를 타고 섬을 탈출하였습니다. 경남 하동 근처에 도착한 그는 남원과 전주를 거처 금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굶주린 이자익을 조덕삼이 발견하여 자기 집 마부로 삼았습니다. 조덕삼의 아들 조영호는 서당 훈장에게 한문 공부를 배웠는데, 하루는 이자익이 그것을 귀동냥으로 듣고 있는 것을 조덕삼이 보고 자기 아들과 함께 정식으로 공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이자익이 주인 조덕삼과 함께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펴 교회에 열심을 다하니 나중에는 주인 조덕삼과 함께 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주인과 하인 마부가 함께 교회의 영수가 된다는 것은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1907년 조덕삼을 제치고 이자익이 먼저 장로로 피택되었습니다. 이 일은 당시 선교사들에게 매우 놀랍고 염려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서울 승동교회에 많은 하층민들이 출석하였는데 박성춘이란 백정이 장로가 되자 양반 교인들이 반발하여 교회를 떠나 안국동교회를 설립한 일이 있었습니다. 연동교회에서도 고찬익이란 갖바치가 장로가 되자 양반 교인들이 반발하여 종묘 인근에 묘동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전주 선교부에서도 염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덕삼 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의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 열의가 대단합니다. 저도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이자익 장로를 섬기겠습니다.”
조덕삼 영수의 말을 들은 교인들은 힘찬 박수를 보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때때로 선교사가 오지 않을 경우엔 이자익 장로가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럴 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맨 앞자리에 앉아 조용히 말씀을 들었습니다. 비록 집에서는 주인과 하인 관계이지만, 교회에서는 장로와 영수로 각자 자기의 책임을 다함으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덕삼 영수도 1908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해 4월 4일 부활절 예배 후에 조덕삼 장로가 헌금하여 교회를 세우고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나라 초기 교회당 모습은 대체로 ㄱ 자형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분리하여 앉아 예배를 드렸고 강대상은 꺾인 가운데에 놓였습니다. 일자 교회라 하더라도 남녀 좌석 가운데에 포장을 쳤습니다. 조덕삼 장로의 의견을 따라 남자석 상량문에 “일천구백팔년 무신양사월사일음삼월삼일”(一千九百八年 戊申陽四月四日陰三月三日)이라 쓰고 이어 한문으로 고린도후서 5장 1-6절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자석의 상량문에는 고린도전서 3장 15-16절의 말씀을 한글로 기록하였습니다. 강대상 뒤쪽으로 목사님이 드나드는 쪽문이 있었는데 이 문을 겸손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테이트 선교사가 이 작은 문을 들어올 때 ‘주께서 나에게 겸손을 가르쳐주신다.’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1950년 6·25한국전쟁 때 마을이 불바다가 되어 집들이 모두 타버렸지만 금산교회는 불타지 않았습니다. 좌익계 사람들이 우리 교회라며 금산교회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금산교회당은 전북제정문화재 13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907년 『예수교회보』 11월 27일에 이자익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경계자 이곳은 금산사가 가까우므로 우상만 섬기고 패속만 숭상하여 전도인을 보면 핍박이 자심하더니 삼 년 전에 조덕삼 씨께서 회개하고 주를 믿은 후 열심 전도하여 사람을 주의 앞으로 많이 인도할 뿐 아니라 먼저 신화 십오환을 내어 초가삼간을 사서 예배당을 삼으니 형제들이 열심 연보하여 그 돈을 갚은 후에 예배당이 또 좁아서 십이 간을 더 늘이옵고 매주일에 모여 예배 보는 형제자매가 이백 여 명이 되오니 감사하오며 세례인이 칠십오 인이요 원입교인이 삼십구 인이 되오니 하나님 은혜 감사하오며 각처 형제자매는 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하였더라.
이 기록에 의하면 조덕삼이 테이트 선교사를 만난 해가 1905년이 아니라 1904년입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어 공부시켰습니다. 이자익은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후 초대 최대진 목사의 뒤를 이어 금산교회 2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 이자익 목사는 1925년부터 전국에 2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고, 1927년에는 경남노회장으로, 거창선교부 순회목사를 지냈습니다. 다른 사람은 한 번도 하기 어려운 장로회총회 총회장 직분을 1924년, 1947년, 1948년 세 번에 걸쳐 감당하였습니다. 1954년에는 대전신학대학을 설립했고,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다가 1958년 김제 원평에 살고 있는 셋째 아들의 집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이보다 먼저 조덕삼 장로는 유광학교(동광학교)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 삼나무심기운동도 벌이며 농촌 경제를 독려하다가 1919년 12월 17일 52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마지막 유언으로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마라. 제사를 지내지 마라. 예수를 잘 믿어 나를 만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 잘하고 너희들은 내 대를 이어서 이자익 목사님을 잘 섬기고 교회를 지켜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찬송가 “주 믿는 형제들”을 4절까지 부른 후 소천하였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 군산 나운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을 개원하여 호남지역의 교회사와 종교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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