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15) <예수의 복음, 신분차별의 벽을 넘다>

예수의 복음, 신분차별의 벽을 넘다



정읍시 신태인읍 지역의 첫 교회는 190039일 최중진에 의해 세워진 매계교회입니다. 그러나 매계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최중진은 어느 사랑방을 빌려 이미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김수진 목사의 호남선교 100년과 그 사역자들의 기록을 보면, 최중진은 태인의 어느 양반집 사랑채에 하룻밤 신세를 지던 중 그 집 머슴들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 집 주인이 사랑채 앞을 지나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사랑방 문을 여니 최중진이 머슴들과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호통에 머슴들은 다 물러갔지만 최중진은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주인이 최중진을 바라보니 그 얼굴에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그 기세가 꺾였습니다. 최중진이 주인에게도 전도하니 주인도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이 양반집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 태인면은 유학이 성행하던 곳이라 유생들이 최중진을 몰아내고 아예 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러자 최중진은 데살로니가의 박해를 받고 물러난 바울의 심정으로 인근 매계리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지금은 매계리가 태인면 관할이지만 당시에는 함보면 관할이었습니다. 전주에서 태인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에 태인면이 있고, 태인에서 정읍으로 가는 국도변에서 동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진 매계리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매계리가 아니고 매화리였으며, 풍수지리상 매화락지라 하여 명당자리였습니다.

최중진은 테이트 선교사와 상의하여 매계리 전도에 나섰습니다. 물론 매계리 전도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최중진이 태인에서 예수를 전하다가 쫓겨났다는 소식이 매계리에도 전해져 최중진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중진은 변장을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매계리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이 마을의 이 씨 문중과 권 씨 문중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도하던 중 약한 문중을 먼저 전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마을 유생들의 계속되는 훼방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계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최중진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애국의식을 고취하고, 학도가를 가르치며, 한글과 성경을 부지런히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소문이 퍼지면서 점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제는 반대하던 유생들도 그리고 전에 쫓겨났던 태인현 사람들도 매계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매계교회의 부흥의 소식을 들은 전주 선교부 선교사들은 크게 기뻐하고 직접 매계리를 찾아왔습니다. 당시 매계교회에 3,000명이 모였다는 놀라운 기록도 있습니다. 최중진은 매계교회를 중심으로 인근 태인, 정읍, 부안, 고창 등지로 선교의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최중진은 정읍군 고부에서 최석학의 장남으로서 위로 두 누이와 아래로 최광진, 최대진 두 동생이 있었습니다. 최광진은 서문교회 초대장로가 되었고, 최대진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시베리아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금산교회의 초대목사가 되었습니다.
최중진은 두 동생과 함께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가 매부가 있는 순천으로 잠시 피신을 하였고, 다시 고부로 돌아와 테이트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귀의하였습니다. 그는 테이트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태인 정읍 지방 전도에 매진하며 장로가 됩니다. 이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0996, 평양 장대현예배당에서 열린 제3회 독노회에서 김필수, 윤식명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테이트 선교사로부터 태인, 매계, 고부, 천원 등 여덟 교회의 당회 권리를 맡아 열심히 교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소 마음속에 쌓아둔 게 있었는데 군산, 전주 등 선교사들의 지도를 직접 받는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지원이 부족하여 어려움이 많다고 느낀 것입니다. 결국 목사가 된 지 4개월 만에 그는 191015일 전주에서 열리는 북전라대리회에 회의불참사유를 통보하며 5개 항을 서면으로 제의함으로 소위 최중진의 자유교회 사건이 발발하게 됩니다. 그가 제출한 5개 항의 서면청원서는 다소 감정이 격앙된 상태라 문장이 매끄럽지 않았지만 그의 주장은 당당하였습니다. 그가 제시한 5개 항목 중 어느 하나라도 채택이 안 된다면 그는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그가 제출한 5개 항의 서면청원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원입교인에게 지키라는 현 교회의 규율이 너무 엄격하니 이를 버리고 학주인(學主人오늘의 학습교인 격) 제도를 세워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로 자유롭게 가벼운 멍에를 메고 예수를 믿고 배우도록 하라.
(2) 군산지방에 편입시킨 부안 지방을 그곳과 인접한, 내가 맡고 있는 지방에 합병하여 줄 것이며, 이뿐 아니라 묵은 밭과 같은 고창 무장 지방을 나에게 맡겨 기경(起耕)토록 하라. 1-2년 내에 일으킬 것이다. 나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전도구역을 넓혀 달라.
(3) 내가 맡은 지방에 고등학교 하나를 세워서 주님 은혜를 먼저 받은 자가 나라를 위하여 교육사업에 책임을 갖게 하라.
(4) 교회마다 상구(常救)위원 두 사람씩 두어서 가난하고 어리석은 백성을 교회 이름으로 구제하게 하라. 육신이 먼저 있으니, 물질적으로 주고받는 것이 없이 말씀으로 함보다 사랑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을 사회로 하여금 알게 하여야 한다. 사회는 교회의 밑천이다.
(5) 기왕에 나는 은혜받은 바 있으나 금번 은혜를 한 번 더 받고자 하니 나에게 집 한 채를 줌으로 내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하라.

이러한 제의에 대리회에서는 특별위원으로 김필수, 레이놀즈, 최흥서를 정하고 최중진의 청원은 (1) 배은(背恩), (2) 배약(背約), (3) 분쟁(紛爭), (4) 무지각(無知覺), (5) 불복(不伏)하는 일이므로 거절하며, 그가 맡고 있는 당회 권리를 보류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에 최중진은 불복하고 독립의 뜻을 나타내고 장로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대리회와 선교사들에게 반발하여 자유교회를 선언한 최중진 목사에 대해 깊은 유감을 가진 레이놀즈 목사는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자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또 용서하여 좋은 해결책이 나오도록 권면하며 화목을 이루자.”라고 제의하고 다시 한 번 김필수, 마로덕, 서영선을 특별위원으로 뽑아 최중진 목사에게 보내 위로와 화목을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최 목사가 이미 마음을 굳혔으므로 위원들의 방문은 별다른 효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기성(旣成) 장로교회와 결별을 선언한 최중진 목사는 그동안 태인 정읍 지방의 각 교회를 돌보며 당회 권리를 행사하였던 만큼 영향력은 실로 컸습니다. 3,000여 명을 헤아리는 많은 교인들이 자유교회 주장에 동조했고, 여러 교회가 동요하였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분쟁에 휘말렸는데 오랫동안 최중진 목사의 직접 지도를 받아온 지역 교회들은 대체로 자유교회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교회들은 찬반쟁론으로 예배당 쟁탈전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대리회는 최 목사 처리 문제로 특별임시노회를 소집할 것을 긴급 청원하고 산하 모든 교회들에게 자유교회운동에 미혹되지 말고 교회를 수호하라는 목회서신을 띄웠습니다. 대리회는 노회의 업무처리를 대행할 수 있다는 서울의 노회 지도자들(당시 노회장은 언더우드와 게일 목사 등)의 유권해석을 재확인하고, 1910222일 전주에서 전북대리회를 열고 토의 끝에 최중진 씨가 목사 직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 직분을 거두고 이 사건을 노회로 올려 보내자.”라는 안을 기립투표로 가결하게 됩니다. 이로써 다음 정기노회 때까지 최중진 목사에게는 휴직이 명해집니다.

1910918일부터 평북 선천 염수동예배당에서 열린 제4회 독노회에서는 22일 정사위원회(定事委員會)의 보고에 따라 전북대리회에서 최중진 씨를 휴직시킨 사건에 대하여 조사하여 본 바 최중진 씨가 청원한 일이 법 밖의 일이오며 또 자기가 스스로 퇴각(退却)하여 교회를 해롭게 하며 노회 앞에서 한 약조를 배반하였으므로 대리회가 노회 때까지 임시 휴직시킨 것이 가합(可合)한 일이온 바 지금까지 불복하니 회개하기를 바라므로 혁직(革職, 免職)함이 가한 일이라 함을 채택하여 최중진 목사의 신분 처리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최중진 목사는 목사가 된 지 6개월 만에 휴직되고 1년 만에 노회에서 면직되었습니다. 전북교회사에서 목사면직사건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테이트 선교사와 오랫동안 동역하면서 인격적 차별대우와 감정대립이 발단이 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목사가 된 후 그의 자세와 주장을 통해 볼 때 자존심과 왕성한 사업 욕구에서 경제적 요망이 뚜렷하였고, 상대적으로 선교사가 받는 대우에 불만을 느끼고 시정해 보려고 하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최중진 목사는 일찍부터 동학농민운동이나 의병 활동으로 민족자존의 정신이 강하였고, 열정적이고 언변과 통솔력이 뛰어나 선교사들과 마찰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목사로서 선교사들보다 못한 경제적 차별과 선교사들의 주도적인 교회 운영에 대한 불만을 키워온 것입니다.

그는 동생 최대진 목사의 간곡한 설득과 권유로 19141012일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노회에서 강도사로 복구되었지만, 하필이면 그간 갈등을 빚어온 테이트 선교사와 동사케 되어 복구 1년도 안 돼 일본 조합교회로 교직을 옮겨버렸습니다. 그러자 노회에서는 그를 제명 처리하였습니다. 그가 어찌 일본화 운동의 앞잡이 역할을 한 조합교회에 가입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를 따르던 많은 교인들이 이 일로 더 이상 최중진 목사를 따르지 않게 되었고 그의 지도력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전도운동으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매계교회를 떠나 정읍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적 천민계급의 신분해방을 주장하는 형평운동(衡平運動)에 열심을 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형평운동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소개할 것입니다.

최중진 목사가 매계교회를 떠나니 1923년까지 교회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 최중진 목사는 사회운동에서도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남은 생애를 보내다가 1940년 정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같이 피어올랐던 그의 믿음의 열정이 스러지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의 청원을 들어주고 그의 전도 열정에 좀 더 관심을 갖고 협력을 했더라면, 태인 정읍지역뿐 아니라 호남 선교에 엄청난 부흥의 바람이 불었을 터인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민족의식은 당당하였지만 그는 극한 감정에 사로잡혀 일본 조합교회에 동참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의 자치교회 운동에 동조하는 여파가 여기저기 나타나 1911년 평북 의주군 노북교회의 영수 김원유(金元瑜)와 강계의 차학연(車學淵) 장로 역시 최중진 목사의 주장과 운동에 공감하여 자유교회 운동은 이북으로까지 번졌습니다.

최중진 목사의 면직으로 문을 닫은 매계교회는 박봉래((朴琫來, 1880-1950) 장로에 의해 1926년 재건되었습니다. 박봉래 장로는 부모를 따라 전주 서문교회를 다니던 중 한일병합이라는 나라의 비극적 역사을 맞아 북간도 용정에 머물면서 독립군 소대장으로서 신참 훈련병들을 교육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일본군 무기고를 털어 용정으로 이송하던 중 체포되어 1921618일 재판을 받고 5년형을 받아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소한 뒤에 전주로 내려와 최중진 목사를 따라 매계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매계교회가 문을 닫자 그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매개교회를 재건하고 그 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19506·25전쟁 중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에 체포되어 그해 8571세의 나이로 태인 돌미산 언덕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때 박봉래 장로뿐 아니라 박도춘 집사, 박봉래 장로의 아들, 김제 난산교회의 박종헌 장로, 그리고 천원교회의 박영기 장로, 강태주 전도사, 매계교회에서 분립한 두암교회 임윤례 집사 등 22명이 순교하였습니다. 국가에서는 1977년 박봉래 장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습니다.(김수진, “장로열전”, 한국장로신문20091212, 발췌)

앞서 소개한, 최중진 목사가 참여한 형평운동은 한국판 노예해방운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500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우리나라는 엄격한 신분차별제도가 있었습니다. 한번 종이 되면 대대로 종살이를 해야 하고, 어쩌다 중인으로 태어나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고 대대로 신분의 차별로 불이익을 당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신분차별의 적폐를 하려는 일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대역 죄인으로 다스리니 감히 대항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고려시대 1198(신종 1) 5월 당시 집권자인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이 수백 명의 노비들과 봉기를 일으켰지만 내부자 고발로 실패한 바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간간이 신분제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학자들도 있었습니다만, 일회성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만인 평등을 주창하는 기독교가 들어옴으로써 본격적으로 신분제도가 부당하다는 의식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때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급을 천민이라 불렀는데 그중 8천이라는 천민이 있었습니다. 노비, 백정, 재인, 기생, 공장, 승려, 무당, 상여꾼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 조선 8천 중 가장 멸시받는 사람이 백정이었습니다. 고려시대 때 이들은 화척(禾尺楊水尺)이라 불렸는데 아마도 고려시대 북방에서 들어온 유목민 타타르인(韃靼人) 계통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백정은 도살업과 육류판매를 하며 국가에 세금이나 부역도 하지 않았으므로, 몰락한 빈민들이 백정으로 전락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 백정의 수가 40만 명에 이르기도 하였고, 1923년경 형평운동에 참여한 백정의 수가 34,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김수진 목사의 호남선교 100년과 그 사역자들86쪽 이하에, 형평운동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습니다. 이 글을 발췌해 보면, 백정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와집에 살 수 없었고, 명주옷을 입지도 못하고, 망건도 쓰지 못하였습니다. 외출 시에 상투도 틀지 않고 평량자(平凉子, 패랭이)를 써서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백정이 죽으면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고, 묘를 쓸 때도 떼를 입히지 못하였습니다. 혼인 때 여자들은 가마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비녀를 꼽지 못하고 트레머리를 하여야 했습니다. 이름도 인의예지충효(仁義禮智忠孝) 자가 들어간 글자를 사용할 수 없었고, 물론 족보도 없으니 항렬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자신을 소인이라 칭하여야 하고, 일반인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함께 길을 갈 때도 몇 걸음 뒤처져서 걸어야 했습니다. 만일 이런 규례를 어기면 가차없이 감금을 당하거나 사형으로 태장을 받았습니다.

미국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무어(S. F. Moore, 1846-1906, 한국명: 모삼율) 선교사는 언더우드의 영향을 받아 1892921일 한국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1893년 곤당골교회(승동교회)를 설립한 그는 특히 백정들의 실상을 보고 백정 전도에 열정을 기울였습니다. 9월 어느 날 관자골 백정 박 가의 아들 봉출이 무어 선교사를 찾아와 아버지의 병을 고쳐 달라고 말했습니다. 무어 선교사가 가서 보니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고종 임금의 주치의 에비슨(O. R. Avison, 한국이름 : 어비신) 선교사에게 부탁하여 병을 고쳐주었습니다박 가는 임금의 주치의가 자기 병을 고쳐준 것에 너무나 감동해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무어로부터 성춘이란 이름도 얻었습니다
그 후 1911년 박성춘이 장로가 되자 교회 내의 양반들이 반발하여 홍문수골교회(안동교회)를 세우고 분리해 나갑니다. 이후 1914년에 왕손인 이재형이 이 교회에서 장로가 됨으로 그리스도 안에 신분의 차별이 없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朴瑞陽, 1885930-19401215)은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생이 되어 그 후 10년간 이 학교의 교수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무어 선교사는 뜻밖에 장티푸스로 인하여 1906122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이전 박성춘과 많은 백정들의 소원을 들은 무어 선교사는 에비슨 의사와 협력하여 1895년 고종에게 백정인권탄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 탄원서의 내용을 김수진 목사의 책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소개합니다.
 
당신의 비천한 우리 백정들은 과거 500년 이상 짐승을 도살하는 생업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나라에서 하라는 대로 모든 일에 무조건 순종하고 삵도 안 받고 섬겨 왔지만 우리는 천민 중에서도 제일 바닥사람으로 천대받아 왔습니다. 다른 천민들은 그래도 긴 소매 옷과 망건 따위를 쓰고 다니지만 유독 우리 백정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삽니다. 심지어는 관가에서 심부름하는 하치들까지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가끔 우리의 재산을 노략질해 갑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는 날이면 벼락이 떨어집니다. 그네들은 우리 뺨을 갈기고 옷을 찢고 온갖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그자들은 우리를 잡아다가 강제로 일을 부려먹으며 엽전 한 푼 안 주면서 천대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제일 참기 어려운 일은 삼척동자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대말을 쓰는 일이옵니다.(89)
 
이 같은 탄원서는 1896년 갑오개혁 때 윤허를 받아 마침내 백정을 비롯한 신분차별이 사라지니 이는 링컨의 노예해방에 버금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쓰고 긴소매 옷도 입고 족보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백정은 너무 기뻐서 잘 때도 갓이나 망건을 벗지 않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무어 선교사는 자비를 들여 백정해방선언문 360여 장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습니다. 백정들이 교회로 몰려오니 수원 지방에서는 50여 명이 한꺼번에 교회로 나왔고, 서울에서만도 132명의 백정들이 교회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는 아직도 신분차별의 풍속이 여전하였으므로 19234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과 장지필과 같은 백정 출신 지식인, 이학찬과 같은 경제력을 갖고 있던 백정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는 목적 하에 형평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이 같은 형평운동이 점점 사회운동화되고 일본 총독부는 이들을 이용하여 민족 분열을 획책하는 정책에 넘어가 1935년엔 이름을 대동사로 바꾸면서 친일을 하게 되니 점점 형평운동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형평운동에 최중진 목사가 처음으로 호남에서 그 운동을 시작하여 정읍 지역의 천민 인권운동의 효시를 이루었고 이 같은 운동은 천민 노동자 농민의 권익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신분차별의식은 호남 지역 내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 군산 나운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을 개원하여 호남지역의 교회사와 종교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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