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커첸 선교사와 익산의 초기 교회들
멕커첸 선교사의 활약
군산과 전주 지역에 온 선교사들은 보다 원활한 선교 활동을 위해 일정한 선교지를 분할해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불(부위렴) 선교사는 군산의 서북부 지역인 옥구, 익산, 김제, 부안을, 해리슨(하위렴) 선교사는 군산의 동북부 지역인 부안, 부여, 서천, 옥구, 익산을,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의 서남부 지역인 임실, 남원, 금구, 정읍, 고부, 태인, 부안 등을, 레이놀즈 선교사는 전주의 서북부지역인 김제, 고부, 흥덕, 조촌, 이서 등을 담당 선교지역으로 정했습니다. 또 전주 동남부지역은 윈(Winn,Samuel Dwight 위인사. 1880-1954 1911년 전주선교부에 부임)선교사가 전주의 동남부 지역인 남원, 인실, 진안, 장수를, 클락(Clark, William Monroe 강운림 1881-1940, 1909년 전주에 부임)선교사가 무주, 상관, 장수, 진안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멕커첸 선교사는 전주의 동북부 지역과 군산 서북부 지역을 맡아 익산, 보령, 서천, 진안, 무주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특히 이번에 소개할 멕커첸((Luther Oliver McCutchen, 馬路德, 1973-1960) 선교사는 호남의 초기 선교 역사에서 가장 혁혁한 공헌을 세운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비숍빌리라는 곳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컬럼비아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02년 미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전주지역 선교사로 부임해 왔습니다. 연례 모임의 결정에 따라 멕커첸 선교사는 헤리슨과 1년 동안 함께 선교지를 돌며 견습 과정을 거친 후 1904년 9월부터 전주 동북부지역 선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위로는 무주에서 아래로는 목포, 제주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담당하며 괄목할만한 선교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서는 그의 선교를 통해 설립된 교회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교회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 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전주 봉동면 낙평리에 영흥학교를 세웠고, 금산 읍내에 금산 신광학교를, 금산 진산면에는 육영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전주 선교부 대지 내에 전주 성경학원을 개설하여 농촌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는 멕커첸이 세운 교회를 21곳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는 전북 26개 군 가운데 11개 군을 맡아 1년 중 4개월 동안 순회전도를 했습니다. 멕커첸 선교사의 모토는 “항상 준비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자!”(Make ready and get down among them)였습니다. 1905년 9월 선교보고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멕커첸과 최대진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2-3개월씩 머물면서 복음사역을 하였다. 이 지역은 7개 군으로 나뉘어 있다. 여기서 우리의 사역은 열매를 맺고 안정되어 가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소규모의 그룹들이 주일날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잦는 곳이 다섯 군데나 된다. 이들 중 두 곳에서는 몇 사람이 초신자 반에 들어갔고 한곳에서는 두 명의 세례교인이 나왔다.
다섯 개 군으로 구성된 이 지역에서 멕커첸과 그의 조사 최대진이 활동하였습니다. 그들은 두 달 가량 함께 활동하였는데 조사 최대진은 이 지역의 개척을 위해 한 달 간 더 일했습니다. 많은 복음서적이 준비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하였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사역을 맡은 다른 복음 전도자가 절실하게 요청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때로는 두로와 시돈, 베레아까지 복음을 전파 하시느라 바쁘게 다니셨던 것처럼, 멕커첸 선교사 역시 제자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전라도 각 읍면리 마을마다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전라북도 어느 곳이든 그의 발자국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남전교회와 문용기 열사
익산의 가장 오래된 교회로는 함라교회가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는 오늘날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대체로 1897년에 설립된 남전교회가 가장 오래된 교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킨 선교사에 의해 전도 받은 7명의 신자가 50리길 군산에 와서 예배를 드리다가 마침내 1897년 10월 15일 익산 오산면 남전리에 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들은 처음 예배 장소인 이윤국의 집을 남차문교회라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899년 3월 15일 전킨 선교사의 집례로 김정현, 이성일 부부가 익산지역 최초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남전교회의 역사를 말하자면 이곳은 1919년 4월 4일 익산 솜리 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전교회 최대진 목사를 비롯하여 김만순, 김필례, 장경춘, 문용기(군산영명학교 교사, 문정관으로도 불린다)와 학생 박영문, 박도현 등 교인 150여 명이 하얀 한복을 입고 나와 솜리 장날에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 받아 허리춤과 바지 속에 감추었다가 솜리 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일제 헌병대가 긴급 출동하여 시위를 강제 진압하였습니다.
당시 문용기는 일본 경찰이 칼로 오른 팔을 내려치자 왼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들어 계속 만세를 불렀고 다시 왼손까지 내려치자 땅에 뒹굴면서 마지막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군산 구암교회의 삼일운동기념관에 전시된 당시 문용기 열사가 입었던 피 묻은 두루마기를 보면서, 삼일 만세운동으로 수많은 열사들의 희생이 있었는데, 문용기 열사의 순국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려 옵니다. 이 때 박영문, 장경춘 등도 함께 현장에서 희생되었습니다. 한편 솜리 장터에 참여하지 못한 30여 명의 남전교회 교인들은 별도의 만세 시위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남전교회 교인들의 4·4 만세운동은 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높이 평가하여 친필로 순국선열비문을 써 주었는데, 6·25 전쟁 중 북한군이 이 비석을 넘어뜨리고 “李承晩書”(이승만서)라고 새긴 부분을 깨뜨려 없애려 한 흔적이 현재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전북 익산 남전교회를 4·4 솜리 만세운동 기념 기독교사적지로 웅포 제석교회와 함께 지정하였습니다. 역사위원장 정재훈 목사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국가와 민족, 사회에 큰 공헌을 했던 교회”라며 지정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런 애국 애족의 전통을 이은 남전교회는 6·25 전쟁의 시련을 고스란히 겪은 교회였고, 1970년대는 기독교 인권운동의 중심에도 섰으며, 80년대는 반부패 운동에도 나섰던 교회입니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해방, 6·25 전쟁의 참화 그리고 민주화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에 늘 서 있었던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전교회에는 귀한 보물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남전교회 출신으로 미국 플로리다에 유학중이던 한 학생이 자신이 출석하던 미국 교회의 종을 한국의 고향교회에 기증해 달라고 요청해 이를 한국으로 옮겨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옮겨 오던 중 6·25 전쟁으로 이 종은 일본에 잠시 머물렀다가 1951년 남전교회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종의 표면에는 그 제작년도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데 이 종은 1884년에 제작된 종이었습니다. 남전교회에서는 매년 성탄절에 이 종을 탄일종으로 울린다고 합니다.
동련교회 이야기
1901년 옥구군 서수면 신기리 장평마을에서는 송군선, 장휘서, 정문주, 백락규, 장치오 등의 사람들이 지성록의 집에 모여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들이 1902년 황등면 동련리로 옮기면서 동련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동련교회를 시작할 때 백낙규(1876-1943)의 도움이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는 전남 승주군 송광사 옆 뱃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백낙규는 어린 시절 송광사에 들어가 심부름꾼으로 생활하다가, 동학에 귀의하여 송광군 이음리에서 동학접주로 활동했으며, 1893년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여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머리카락 판 돈을 밑천 삼아 소쿠리 장사를 하며 장터마다 찾아다니다가 황등 장(場)에서 해리슨(하위렴)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장평교회를 다니다가 동련리에 자리 잡고 살면서 동련교회 설립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 교회당을 신축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세례를 받음으로써 동련교회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1909년부터 불(부위렴)선교사와 함께 학교를 세워 운영하던 중 정식으로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1910년 8월 15일 학교를 시작하여 예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구원의 원동력이라 하며 농민들을 깨우치는 데 앞장섰습니다. 계동학교는 1935년까지 4년제로 운영되어 오면서 105명이 졸업을 하고 1936년부터는 6년제로 1947년까지 운영되었으며, 121명이 졸업하여 수많은 인재들이 이 학교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서두교회와 박병렬 장로의 순국
1898년 11월 삼기면 서두리에 정정보가 기도처를 마련하여 교회가 첫걸음을 내 디뎠습니다. 그 후 멕커첸 선교사의 지도하에 강화철 등에 의해 1903년 10월 10일 원서두 546번지에 초가 3칸을 빌어 정식 교회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서두교회는 애국지사 박병렬 장로(1881-1940)가 있습니다. 박병렬은 전북 익산군 삼기면 간촌리에서 한의사 박영호와 방씨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도마리교회, 방주간교회, 와리교회, 부송교회 등의 매서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익산에서 4·4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비록 적은 수이지만 서두교회 교인들은 박병렬을 따라 참여하였습니다. 박병렬은 곧 체포되어 옥에 갇혔는데 옥중에서 밤낮없이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눈물의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멕커첸 선교사가 이리경찰서에 박병렬을 면회하여 위로하고 일경에 박별렬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일경은 매우 난색을 표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석방하였습니다. 박병렬은 1935년 5월 7일 서두교회 장로로 장립 되었습니다. 그 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심기주재소에 감금되어 있으면서도 그는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면 그만큼 일본제국주의의 생명이 단축된다.”면서 소리쳤고, 이에 일경은 모진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는 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출소했지만 고문 후유증이 심해 1940년 9월 2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986년 7월 17일 후손들과 교인들이 힘을 모아 엘리사기도원에 박병렬 장로 순교비가 세워져 그의 아름다운 신앙의 빛을 후대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제석교회 이야기
제석교회는 지난 달 소개한 적이 있지만 좀 더 부언하여 소개합니다. 1899년 궁말교회(구암교회)에서 불(부위렴)선교사의 매월 성경학교에 참석했던 엄주환, 강진회, 송원규, 강두희, 강문회 등이 복음을 받아들여 군산선교부 전위렴 선교사에게 교회설립을 허락받고 1906년 12월 25일 엄주환의 사랑채에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908년 4월 8일 군산으로 이주한 홍종필 씨가 14칸 곱패집을 희사하므로 십자가를 설치하고 교회당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곰배집이라고도 하는데 곱은자집이란 뜻입니다. 집모양이 ‘ㄱ’자 집으로 경기지방 말로서, 평안도 지방은 꺾음집, 충청도 지방에서는 곱패집이라 부릅니다. 곱패집은 평면의 모양이 ‘ㄱ’자를 이룰 뿐만 아니라 용마루도 ‘ㄱ’자로 꺾인 형태입니다.(표면상 외양간이나 부엌을 덧댄 ㄱ자 모양이어도 용마루가 하나인 것과는 구별이 됩니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등지에 많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제석교회는 꺾인 코너 부분에 강대상이 놓이고 좌우 공간에 남녀가 배치되어 서로를 바라 볼 수 없는 ‘ㄱ’자 구조의 예배당입니다. 해리슨(하위렴)선교사가 파송당회장으로 교회를 지도하여 1909년 4월 30일 부용학교를 세우고 100여 명의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지난번에 소개드린 것처럼 홍종필 씨는 군산 개복교회에서 장로가 되었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1월 22일 개복교회 3대 목사로 부임했으며, 1930년 9월 제19회 총회에서 총회장에 선임기도 했습니다.
엄칠중은 강경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제석교회 교인인 이형오는 함라 웅포장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엄주환 씨는 6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엄창섭 씨는 강경 장날 독립선언서를 읽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하여 2년 동안 징역을 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제석교회는 남전교회와 함께 익산 지역 삼일운동 사적지로 인정되어 후대에 나라사랑과 민족구원의 신앙적 귀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 나운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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