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4)ㅤ<호남 선교의 관문, 군산>

호남 선교의 관문, 군산
 

궁멀에서의 새 출발
 
19세기 말 조선은 열강의 위협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이 그 사직의 명운이 가물거리고 있었습니다. 또각거리는 게타(, 일본의 전통 나막신) 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들려 왔습니다. 군산은 일본인들의 코앞에 펼쳐 놓은 잔치 상과도 같았습니다. 군산의 드넓은 황금 논밭을 바라 본 일본인들은 코를 벌렁거리며 군침을 삼켰습니다. 군산에 처음 정착한 일본인은 사도 도미지로(左藤豊次郞))라는 자로 군산 옥구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미곡상이었니다
처음엔 군산 구영리에 작은 일본식 판자 집을 짓고 살면서 군산 옥구의 쌀을 긁어모아 일본으로 가져가는 데 혈안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그 정도로 만족할만한 족속입니까? 일본은 계속해서 군산의 개항을 고종 황제에게 요구하였고 마침내 189951일 군산 개항을 이끌어 냈습니다. 여기에는 다만 상업적인 목적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일본은 군산 개항을 통해 조선과 대륙을 통하는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속셈이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인들은 본격적으로 군산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군산에는 일본인 거주지가 자연스럽게 조성되었습니다. 개항 전에는 20여 호에 77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이, 1900년에는 131호에 422명으로, 1904년에는 1,260명으로, 1909년에는 8193,229, 1910년엔 9573,649명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군산에는 약 4,000여 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항 당시 군산의 조선인 주민이 150호에 511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일본 세력이 급격히 확장돼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목포영사관 군산 분관을 설치하고 바야흐로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본격적인 침탈행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군산 땅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고, 선교 본부가 자리 잡고 있던 초가집 인근까지 그 세력이 침투해 오면서, 군산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왜인들의 거주지를 지나야 하는 군산교회 방문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전킨(William M. Junckin) 선교사와 드류(A. Damer Drew) 선교사는 그 지역을 고수하는 한, 더 이상 이곳에서 군산에서의 조선인 선교와 복음 전파가 쉽지 않을 거라 내다보았고, 새로운 선교 기지를 물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박 선교 활동도 겸할 수 있는 옥구군 임피면 구암리 일대(일명 궁멀)로 선교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해로의 교통도 편리할 뿐 아니라 내륙 교통도 유리한 지역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드류 선교사의 의견에 따라, 18981221일에 궁멀에 호남 최초의 서양식 주택을 준공하고 호남 선교부 본부 및 구암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에 대해서 1928년 간행된 朝鮮耶蘇敎長老會史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899년 옥구군 구암리 교회가 설립되다. 앞서 선교사 전킨, 의사 드류, 전도인 장인택이 이곳을 왕래하여 열심히 전도함으로 신자가 점점 많아져 예배당을 신축하고 그 후에 오인묵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
 
  
이처럼 호남 지역 선교의 문을 새롭게 열기 시작한 이 과정에 대해서 사기는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습니다.
 
1905년 군산부 개복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전위렴과 의사 유대모가 본처에 주택을 정하고 복음으로 선전하며 의약으로 시제하야 신자를 득함으로 전위렴 사저에서 집회하난 중 김봉래 송영도 이인이 호남에 최선 수세자가 되니라. 기후에 선교사 스테슨회 위취를 옥구 구암으로 이전케 됨으로 약간의 신도는 구암으로 래왕하며 예배하고 혹은 타처로 이거하니라. 기후에 선교사 어아력(A.M.Earle)이 조사 최흥서로 군산에 전도케 함으로 신자를 얻어 구복동에 처소를 설립하고 회집하는 중 최흥서는 전도 매서가 되어 전무하얏고 개복동 남편산에 12간 예배당을 신축하고 수십 신자가 예배함으로 교회가 완성되야 점차 발전되난 중 배경원 홍종익 이춘선 양석주 이호성 남 필 김명후 김두현 진운옥 홍인원등이 열성 협동하야 다대한 효과를 있었고 진운옥이 조사로 시무하니라 (史記, 138-139)
 
 
 
이와 같이 선교부가 궁멀로 옮겨 가는 바람에, 일부 교인들은 궁멀로 따라갔지만 일부 교인들은 흩어져 버렸으며, 그 밖의 나머지 교인들은 군산에 남아 최흥서 조사와 홍조익 등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중인 1904320일에 군산시 구복동 77번지에 예배당을 건립하였고, 1906년 현재 개복교회 자리인 개복동 13-1번지로 이전하였습니다.
 
다른 기록을 보면 18991221일자로 군산교회는 궁멀로 이전하여 궁멀교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해리슨 선교사가 구복동의 집 한 채를 구입하여 복음 서적의 매서인인 최흥서에게 군산모임을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19071월에는 18명이 학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최흥서 조사는 교회당이 건축될 때까지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하였고 19029월 조선예수교 장로회 공의회가 제 2회로 서울에서 열렸을 때에 그는 군산 선교부의 유일한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1904년 예수교장로회 연감을 보면 18991221일 궁멀교회가 창립되었다고 하였으나 개복동교회 창립은 미상이라 하였습니다. 당시 궁멀은 옥구에 소속되어 옥구군 구암리에 세워진 교회이었습니다. 전라노회의 노회록을 보면 1915년까지 개복교회를 군산 교회로 부르다가 개복동 교회로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개복동교회가 군산의 교회로 명맥을 이어 받았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옥구군 구암리가 군산에 편입되므로 구암교회가 선교부 이전의 군산교회로서 법통을 이어 받았으니 더 이상 지역을 구분하여 선후를 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따라서 혹자는 구암리 교회가 먼저다”, “아니다! 개복동 교회가 먼저다라는 논쟁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한 나무에서 자란 두 가지이기 때문에 어느 교회가 먼저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호남 선교의 개척자, 레이놀즈 선교사
 
중국 청나라 말기 1899112일부터 19019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외세 배척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일찍이 산둥 지역에서는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민간 결사가 생겨나 반외세 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1897년 독일이 산둥성 일대를 점령하자 의화권의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이 격화되었습니다. 의화권은 다른 민간 자위 조직에 침투해 통합을 이루고는 스스로 의화단이라고 칭하였습니다. “부청멸양을 구호로 내건 본격적인 의화단 운동은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활동이 왕성했던 산둥성의 북부 지역에서 18984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해 여름부터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어 가뭄 피해가 극심해지자 많은 유민이 발생했는데 이들이 대거 의화단에 가입하여 의화단 난은 점점 더 기세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189912월에 새로 부임한 산둥 순무(巡撫) 위안스카이는 열강의 요구에 따라 의화단을 강력히 탄압했는데 이것이 의화단 세력이 허베이 성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면서 의화단은 철도, 교회, 전선 등 모든 외래적인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를 학살하였습니다.
 
이 같은 의화단 난의 영향이 우리나라 서북부지방 주민들에게 영향을 주어 서북부 지방의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학살하려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1900년 겨울 미국인들이 전차를 부설하자 반대하던 군부대신 이근택과 내장원경 이용익이 기독교와 선교사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고종은 전국에 알리기를 외국인과 기독교인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고, 이들은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위기를 벗어난 교회는 19019월 서울 정동 예배당에서 선교사 25, 조선인 장로 3인 그리고 조사 6인으로 구성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 정교분리 원칙과 전라도와 경상도에 대리위원부를 설치하는 등의 문제를 결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레이놀즈 선교사가 회장으로 있던 1902년부터 전라도 총대들이 정기적으로 공의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레이놀즈(이눌서, William David Reynolds, 1867-1951) 선교사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초로 호남 선교를 시작한 선교사가 레이놀즈 선교사임을 앞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 번 그에 대한 소개가 있겠습니다만, 레이놀즈 선교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갑자기 제 마음속에 요동치게 되어 이참에 잠시 그를 자세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18671211일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포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었던 레이놀즈는 어린 시절의 꿈처럼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등을 익히게 되는데 그의 재능은 훗날 우리나라 한글 성서번역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햄펀 시드니 대학을 최우등을 졸업한 후 레이놀즈는 남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891년 안식년을 맞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 해 레이놀즈가 재학 중인 신학교에서 선교보고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 때 레이놀즈는 조선 행을 기도하며 전킨이라는 귀한 동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결과 레이놀즈와 전킨은, 매일 3시에 기숙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온 마음을 쏟아, 조선 선교의 길을 열어줄 것을 끈질기게 기도하며 간구했습니다.
 
레이놀즈는 선교의 뜻을 같이하는 볼링 양과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하고, 그와 결혼한 뒤 1892113일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어학 실력이 뛰어났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 섬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한국말로 전도 강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적응 훈련과 언어 훈련을 마친 레이놀즈 부부는 1894327일 군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임피,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기 직전이어서 민심이 흉흉한데도, 그들은 각 고을을 돌며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 강연을 하면서 호남 선교의 문을 열어갔던 것입니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조선어와 씨름하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조선말이 입에 붙게 되자 언더우드 선교사와 게일 선교사 등과 협력하여 본격적인 성서번역에 착수했습니다. 18979월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여, 9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집회가 열리면 인도자들 가운데 레이놀즈 선교사가 단연 우리말을 훌륭하게 구사했으며 유식한 표현을 능숙하게 활용해 가며 설교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예배는 훗날 전주서문교회의 설립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레이놀즈는 1895년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한글성서 번역에 매진하였습니다. 성서번역은 외국인선교사와 한국어 선생의 공동 작업이라고 할 만큼 한국어 선생의 역할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레이놀즈가 한글성서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다식한 한국어 선생 김필수 장로의 공이 컸습니다.
 
끈기 있게 성서번역을 진행하던 레이놀즈는 마침내 그 열매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권씩 개인역이나 수정역으로 나오던 신약 전체를 묶어서 1900년 단권 신약성서를 출판한 것입니다. 출판된 성서에서 여러 가지 오류가 발견되자 레이놀즈와 언더우드, 게일은 아예 성서번역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무려 555회의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친 후에 로스역 성서가 번역된 이후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필수 목사의 활약
 
다시 돌아와, 전라 대리위원부에 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라대리위원부의 총대로서 군산 출신으로 활동한 이는 1902년 군산교회의 최흥서(崔興瑞)였고, 1903년에는 군산 교회의 조사 양응철이었으며, 1906엔 다시 최흥서가 군산을 대표하여 참석하였습니다. 1907년 미국 남 북 장로회와 캐나다 장로회 호주장로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97일 조직하였습니다. 선교사 38명 조선인 장로 40명 합 78명으로 회장은 마펫(Samuel A. Moffet) 선교사, 부회장에 한국인 방기창, 서기 한석진, 부서기 송인서, 회계 그래함 리(Graham Lee) 선교사를 선출하였습니다
당시 독노회는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 7명 즉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그리고 송인서에게 최초의 목사 안수를 하였습니다. 독노회 창립당시 전국적인 장로교 교세는 조선인 목사 7명 장로 53989교회에 19천여 명의 세례교인과 7만여 명의 교인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괄목할만한 부흥의 역사였습니다. 이 역사적 회의에 군산교회 대표로 최흥서가 참석하였던 것입니다.
 
19111015일 전주 서문 밖 예배당에서 목사 20명 장로 25명으로 성찬식을 거행하고 전라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회장으로 김필수(金弼秀) 목사, 부회장으로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 서기에 이승두 장로, 회계에 최의덕 목사, 최국현 장로를 선출하였습니다. 공천위원으로 최흥서 장로가 활동하였으며 김필수 목사에게 군산교회와 궁멀교회를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서 추강(秋岡) 김필수 목사님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 전택부 선생님께서 쓰신 인물로 본 YMCA 100(2009130일자)를 인용한 내용입니다.
 
김필수 목사님은 18727월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죽산의 부유한 연안(延安)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문이 본래 선비 가문이고 독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귀동자로서 한학 수학에도 남다른 대우를 받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일찍이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상경하여 과거에 응시하고자 했으나 때마침 일어난 갑신정변과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당 지도자들과의 교분관계로 일본 고베(神戶)로 망명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관계로 역적의 혐의는 받지 않고 귀국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머리를 깎고 기독교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었습니다.
 
귀국하자 김필수 목사님은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의 추천으로 레이놀즈 목사의 어학선생이 되었습니다. 레이놀즈 목사의 한국어 선생으로 일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레이놀즈 목사가 성서번역 때문에 서울에 와있었을 때에 한국 YMCA 창설이사로 발탁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YMCA운동을 통해 식민지 치하에 기독청년들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심어주는 등 한국 YMCA 운동 발전에 앞장섰습니다.
 
그 뒤 김필수 목사님은 전주에 내려가 완산교회의 장로로 피택이 되었고, 다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제 2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 그는 진안·무주·장수 지방과 군산 지방을 순회 전전하면서 개척 선교에 헌신했으며, 1915년 장·감 두 교파가 연합으로 기독신보를 창간할 때에는 상경하여 그 편집인이 되는 한편 YMCA의 일로는 강화 및 사경회 강연회 등의 명강사로 활약하였습니다
특히 191811월에는, YMCA가 세계 기도주간을 맞이하여 대강연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 목사님은 사회개량의 요소란 제목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무단정치의 종식을 암암리에 주장한 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김필수 목사님은 3·1독립운동 직후 YMCA의 회보인 청년(靑年)을 창간할 때 그 권두언을 썼으며, 192071일부터 12일까지 전국 순회 전도단을 조직하여 활동할 때에는 그 단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김필수 목사님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심하여 기도하라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라는 베드로전서 4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으로 전도대 발족 설교를 한 뒤 제1대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2대는 충청북도와 전라북도, 3대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나누어져 전도와 계몽강연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그밖에도 목사님은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에 앞장서서 YMCA 계몽사업을 주도했으며, 특히 이상재, 윤치호와 함께 소위 3거두의 지도체제를 이루어 실무담당인 신흥우 총무의 배후인물이 되어주었습니다.
 
한편 1907년에 조직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동노회 때부터 1914년까지는 선교사들이 회장직을 독점했으나 1915년 제4회 총회에서는 김필수 목사님이 최초로 한국인 목사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은 한국 교회연합 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물론 YMCA운동 자체가 연합운동이어서 이미 교회연합운동에 선봉을 섰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1918326YMCA회관에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해서 조선예수교 장감(長監)연합협의회가 창설될 때에는 목사님이 초대회장으로 피선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국인만 아니라 선교사들도 참석했으며, 이 총회는 남북감리파와 남북 장로파, 캐나다 및 호주 장로파 등의 정식총대 4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김필수 회장은 취임설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교파를 나누는 일은 다만 때와 장소에 의한 형식에 불과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장감 두 교파가 하나의 연합기관을 조직한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그 당시 김필수 목사님은 아래와 같이 선언하심으로서 한국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일 천부(天父)의 뭇갿들, 일 구주(救主)의 지톄(支體)로써 교파를 분립(分立)은 다만 시긔(時期)와 쟝소(場所)에 의야 형식에 불과거늘 라서 정신세계에 지 영향이 혹 잇슨 즉 현금에 쟝로 감리 량교파가 이를 고념(顧念)야 일톄적(一的) 련합긔관을 조직다
김필수 목사님은 실로 한국의 사도바울처럼 활약하면서, 군산과 전주의 초기 교회사의 초석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반드시 기억할 귀한 어른이시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습니다. 김필수 목사님은 그처럼 꿈꾸고 기도하던 조국의 해방을 보시면서 1948103076세로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오늘에 추강 김필수 목사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분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기념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채로 남을 것입니다.
 
 
 
전병호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 나운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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