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
(이어서)
최중진 목사가 예수교 장로회 총회로부터 면직을 당하고 교회를 떠나자, 최 목사가 집사 시절 정읍지역에 최초로 개척한 매계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교회로서의 명맥을 거의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중흥을 위한 새로운 일꾼을 보내셨는데 그가 바로 박봉래 장로(朴琫來, 1880. 4. 26 - 1950. 8. 5)입니다.
그는 소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전주 서문밖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에 입문했습니다. 일제식민통치 기간에 자라난 박봉래는 청년이던 1905년, 만주로 망명하여 의병으로 항일투쟁을 하였습니다. 1920년 그는 동지들과 함께 노령에서 총기와 탄환을 구입하여 양자구(楊子溝)에 있는 대한의용군단장 이병준(李秉俊)에게 전달하였으며, 같은 해 8월 하순에는 망원경과 시계 등을 구입하여 의군부(義軍府)의 이범윤(李範允)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초 소총 125정과 탄환 1만 2,500발을 구입하여 운반하다가 그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박봉래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함흥감옥에서 복역했습니다.(1977년 건국포장 추서됨.)
박봉래는 1922년 출소 후에 매계리 수리조합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 집으로 온 뒤 1924년 매계교회를 다시 일으키게 됩니다. 그는 전주의 테이트 선교사를 찾아가 교회를 다시 시작할 것을 청원했고, 그해 부활절에 테이트 선교사의 사회와 박창욱 목사(천원교회 설립교인이자 장로였으며, 1922년 평양신학교(제15회)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고향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의 설교를 계기로 매계교회는 문이 닫힌 지 10년 만에 다시 열리게 되었습니다.
매계교회를 다시 열 수 있게 힘쓴 박봉래 장로는 한국전쟁 시 이 지역을 점령한 공산군에 의하여 자본주의자라는 죄목으로 붙잡혔고, 1950년 8월 5일 71세의 나이로 태인 돌미산 언덕에서 교회 청년들과 함께 순교했습니다. 이때 순교한 매계교회 신자는 박봉래 장로 외에 박동춘(1918. 5. 22.) 집사도 있었으며, 박봉래 장로의 아들 박봉헌 장로도 난산교회에서 순교했습니다.
박동춘 집사는 태인면 사무소의 주사로 근무 중 동료 박헌철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었으며 일제의 잔학상을 보고 1943년 공직을 사직한 뒤 교회 전도활동에 매진하여 왔습니다. 그는 김제 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5년 만에 졸업하고 매계교회 박봉래 장로의 주선으로 하퍼 선교사(Hopper,Joseph Barron 한국명 조요섭 1948-1983 전주 김제에서 선교활동. 아버지 Hopper,Joseph은 1919년1957까지 목포선교부에서 활동)에게 자전거를 기증받아 전서노회 지역의 매서로 활동하였습니다.
6·25전쟁 당시 체포된 그는 정읍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9·28수복이 될 때 다급해진 공산군이 유치장에 불을 지르고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박헌철 집사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수감되었던 150여 명의 기독교인, 우익 인사들과 함께 타죽었습니다. 박봉래 장로의 차남인 박종순은 이리성결교회 집사로 봉직하고 있으며 장남 박종현 장로의 아들인 박인규 집사는 서울에서 신앙생활 하는 등 그 외의 자손들이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로서 선인들의 피에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매계교회 출신 교역자로 현재 조기술 선교사(싱가폴) 김갑석 목사(충남 아산) 이연태 목사(고창용교교회) 김영범 목사(고창 성내교회) 우종천 목사(안양 사랑의 교회) 권순익 목사(동두천 소망교회) 이종열 목사(수성교회) 백남선 목사(성남 성일침례교회), 백남용 목사(북면 마정리교회) 서석동 목사(산내 두월리교회) 등이 있습니다.
정읍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른 내장산이 떠오를 것입니다. 우리나라 가을 단풍 중에 가장 색깔이 붉고 아름다운 단풍이 바로 내장산 단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을 단풍철이 되면 매일 수십만 인파가 내장산 가는 길에 장사진을 치고 있습니다. 내장산 단풍을 구경하고 전주로 가게 된다면 그 길은 정읍군 산외면을 지나갑니다.
산외면은 정읍시 동북부 25㎞ 지점에 위치해 있고, 완주군 구이면, 김제시, 금산면, 임실군 운암면과 경계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산외면을 지나가면서도 이곳의 맛있는 청정 한우 소고기 구이 맛을 보지 못한다면 불행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산외 한우 마을엔 정육점 44여 곳, 그리고 정육식당이 25여 곳이나 있어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이곳은 정육점에서 먹고 싶은 소고기 부위를 직접 구매하여 정육식당으로 가져가 숯불과 반찬 등 상차림 비용을 지불하고 구워먹을 수 있는데, 돼지고기를 먹는 값으로 소고기를 먹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값도 저렴합니다.
이 산외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인 동곡리에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산외교회 주보의 첫 표지 상단에 적힌 ‘1900년 3월 7일에 설립’이라는 문구가 오래된 교회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04년 5월경 매계교회 또는 구이면 정자교회로부터 이곳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909년 3월경 평사리 398번지에 기도처가 마련되고 곽 씨의 인도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그 기록에는 1950년 공산군에 의해 그 교회 신자인 강성애 집사(70세)와 장남 한판갑 성도, 임신 중인 자부 안 씨, 막 젖을 뗀 아기 등 일가족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죽창과 도끼로 학살했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양송회 집사와 그 모친 등도 수복 후 치안 부재 시 빨치산에 의해 순교하였는데 그 양 집사 사위가 매계교회 출신 조기술 목사(선교사)입니다. 강성애 집사의 자부 장옥순 권사와 손자 한동석 집사(전주시의원), 외손 고 손병선목사(군산 세광교회 시무), 고 손금자 권사(전성교회) 등으로 이곳의 아름다운 신앙의 맥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읍군 용북면 신덕리에는 테이트 선교사와 최중진 조사에 의해 전도 받은 김덕수, 이복국, 신준삼이 중심이 되어 신덕리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사기』(255쪽)에 “1907년 井邑郡 新德里교회가 成立하다. 先是 本地人 金德守 李輔國 申俊三등이 몬저 밋고 鄰近에 傳道하야 信者가 增加됨에 禮拜堂을 新築하고 敎會를 設立하니라.” 적혀 있습니다.
1925년에 11월 17일에 첫 당회가 열렸는데 당회장은 스위코드(Switcord, 서국태)선교사였고 장로는 김덕수였습니다. 1927년에는 윈(Winn, 위인사) 선교사가 당회장을 맡았습니다.
이미 옥구 땅을 차지한 일본인 구마모도가 화호리에 사무소를 설립하고 화호리의 농토들을 사들여 한국인 소작농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가난한 농민들은 화호리로 이주하였고, 1929년이 되자 신덕리교회 교인들도 화호리로 이사 오게 되어 그때부터 신덕리교회를 화호교회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구마모도의 행패는 날로 심해져가니 견디기 어렵고, 의지할 데 없는 소작농민들은 점차 하나님을 믿고 성경말씀에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교회 출신으로 재야활동을 한 전주남문교회의 고 은명기 목사, 기장 총회 총무를 지낸 이영민 목사, 예장통합 총회장, 한국교회 협의회 회장과 한기총 대표 회장을 지낸 박종순 목사(서울충신교회), 김현식 목사(전주태평교회원로) 오병길 목사 등 한국교계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화호교회의 목회자였던 두 분의 목사를 기억하게 됩니다. 한분은 곽진근 목사(1897-1941)입니다. 곽 목사는 김제 출신으로 불(Bull, W F)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2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뒤 완주의 삼례읍교회, 김제의 금산교회, 원평교회 등에서 시무하였습니다. 1937년 신태읍교회를 거쳐 화호교회 목사가 된 그는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의 서기를 맡으며 입지를 쌓아가다가 1938년 전북노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을 제출하는 등 신사참배에 앞장 섭니다. 결국 곽진근 목사의 건의를 받아들인 전북노회는 총회에 헌의하고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제 27회 총회(총회장 홍택기 목사)에서 역사에 부끄러운 한 획을 긋는 천추의 사건인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를 전격적으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때 총회 서기 곽진근 목사가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결의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신사가 종교가 아니요… (중략)…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히 국민정신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 )을 다하기로 함.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안이 가결된 후, 장로급 이상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신사에 참배하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을 하였고, 그들은 조선에 돌아와 역대 천황을 위한 사당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수많은 목사와 신자들이 일본경찰에 끌려 나가 온갖 박해와 옥고를 치렀는데 주기철 목사도 결국 이로 인해 순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신사참배 결의에 공로가 많은 곽진근 목사는 1940년 제29회 총회에서 일약 44세의 나이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후 그의 친일 행각은 장로교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총회장을 끝낸 1941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분 기억할 목사는 임종헌 목사입니다. 임종헌 목사는 1906년 충남 부여군 수원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머리가 총명한 그는 고학으로 군산 영명학교를 간신히 졸업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지자 더 이상 공부를 못할 뿐 아니라, 친구와 함께 일본에 공부하러 갔다가 고생만 하고 귀국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이 좌절되었다고 날마다 술타령과 놀음에 빠져 살아갑니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 김인배가 임종헌에게 신앙심이 돈독한 자기 여동생을 소개하고 결혼을 시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을 위해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니 이에 임종헌은 정신을 차리고 홍산교회 집사로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1944년에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대전제일교회에서 시무하다가 해방 이듬해 황등 용산교회로 옮겼다가 신태인 화호교회 목사로 오게 됩니다. 화호교회에서 임 목사는 식량비축운동과 음주투전추방운동 등 절제운동을 전개하면서 영적 부흥과 함께 농촌부강을 이룩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1950년 2월에는 고창읍교회로 부임하여 “우리 농토에 풍년을 오게 합시다”하고 외치며 목회의욕을 불태웠습니다. 그런 그는 1950년 6·25전쟁으로 모두 몸을 숨길 때 “하나님의 가슴만큼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소?”하며 새벽기도와 가정예배를 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내무서원이 그를 체포하여 ‘지상낙원인 공산주의의 우산아래 모이자’라는 선전방송을 하길 강요하자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라며 거절하고 3개월간 유치장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그 후 퇴각하는 공산군에 끌려 나가 고흥 뒷산 솔밭에서 총살당하니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1903년 최중진 목사에 의해 정읍군 북면 화해리에 화해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화해리의 서쪽 드넓은 평야를 화해평야라 불린 데서 화해리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태인과 정읍 사이 칠보를 향한 갈래 길 주변, 정읍 방향으로 한교(漢橋)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동리를 한교리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처음엔 한교교회 또는 한다리교회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주명준 교수에 의하면(『전북의 기독교전래』 243쪽) 6·25전쟁 때 근처 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에 의해 교회가 전소되어 교회의 모든 비품과 자료들이 다 불에 타버렸다고 합니다. 당시 교회가 불타는 것을 본 김한수 집사의 말에 의하면, 교회의 상량문 일부가 불에 탔는데 상량문에 기록된 글자인 ‘주후’(主後)는 불에 타 버렸지만 1901년이란 숫자가 적혀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합니다. 이 증언이 맞다면 화해교회의 건축 시기를 1901년으로 보게 됩니다.
화해교회 출신으로 김병엽 목사가 있습니다. 김병엽은 1900년 2월 18일 전북 조촌면 여의리 용정마을에서 김성중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의 손에 괴롭힘을 당하며 자랐는데, 당시 면소재지인 유상리에 와서 전도하는 선교사의 말씀에 호기심을 갖고 교회에 나간 것이 인연이 되어 신자가 되고 열심 있는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계모의 미움을 받아 가출하게 되자 구걸을 하며 노숙생활을 하던 중에 화해교회 김달석 장로의 집에서 10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마침내 논 14마지기(2,400평)를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김병엽은 그 무렵 그가 사는 동네에 교회가 개척되어 대지는 마련되었으나 재정이 말라 건축이 지지부진하게 진척될 줄 모르자 미쳤다는 동네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가며 그가 가진 전 재산인 논 14마지기를 팔아 헌금하여 칠보교회를 지었습니다. 이러한 그에 대한 소문이 노회까지 알려졌고, 노회는 부안군에 소재한 줄포교회 조사로 그를 파송하였습니다. 그 뒤 그는 35세의 늦은 나이로 전주고등성경학교를 입학해서 졸업하고 봉상교회의 정칠호 장로의 도움을 받아 조선신학교에 들어가
제2회로 졸업하여 목사가 됩니다, 그는 대수교회, 고부읍교회, 고창읍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1949년부터 교회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김병엽 목사는 부흥 강사로 담양지역에서부터 곡성군을 거쳐 화순지방의 교회들을 다니며 그해 7월 초까지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외지로 다니며 바쁘게 살다보니 그는 6·25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전쟁이 일어난 줄 알게 된 김병엽 목사는 광주로 돌아왔고, 주일이 되자 늘 하던 대로 예배당의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리다가 잡혀가 광주 내무서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곧 그를 잘 알고 있던 인민위원장의 구명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풀려난 김 목사는 본댁이 있는 김제로 가던 중 9·28 수복이 되었는데, 이때 공산군들이 물러갔지만 아직 남아 있는 빨치산들이 여전힌 활동하는 바람에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신태인에 머물게 됩니다. 당시 신태인교회는 담임목사 김병구 목사가 순교를 하여 설교할 목회자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신자들은 김병엽 목사에게 강단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결국 거기에 머물게 된 김병엽 목사는 1950년 10월 10일 신태인제일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량을 구하러 온 200여 명의 빨치산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예배를 드리고 있던 교인들에게 총을 난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김병엽 목사는 복부에 총을 맞고 군홧발로 짓밟혀 결국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에는 1904년 4월 20일 천원교회(현재 천원제일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입암면은 내장산 톨게이트를 나와 장성방향으로 가다보면 정읍시 최남단에 위치한 있는 입암면이 있습니다. 입암면은 방장산과 입암산(笠岩山 633m)을 배경으로 한 아름답고 인심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옛날 왜구들이 전라남도 바닷가로 침범하여 이곳까지 들어올 때 입암산성을 쌓았는데, 이 산이 삿갓 모양이어서 그때부터 입암산이라 불렀고, 그 산 아래는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 중심에 천원리가 있는데 이곳은 옛날 장성에서 재를 넘어 오면 이곳에서 말을 갈아타고 하룻밤을 자는 역과 숙소가 있던 곳입니다.
최중진 조사가 이곳에서 머물며 전도를 하니 지역 주민인 서영선, 박창욱, 박성숙, 이공숙, 김도흥, 김윤구, 김일언, 조면선, 송세문, 허기서, 양경현 등이 중심이 되어 1904년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차츰 교인수가 늘어나자 교인들이 교회 건축을 위한 헌금을 하여 14칸 교회당을 신축하고 박창욱이란 청년이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사기』, 177쪽)
당시 천원에는 100호 정도의 초가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서 큰 집으로 교회가 우뚝하니 서 있어서 교인들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천원교회는 광주와 전주의 중간 지점이라 선교사들이 오가며 머무는 숙소 역할도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미리 음식과 침구를 보내 여행의 편의를 도모하였습니다.
2011년 2월 13일 애나벨 메이저 니스벳(Anabel Lee Major Nisbet, 한국이름 유애나. 1869. 1. 19.-1920. 2. 21. 존 사무엘 니스벳(John Samuel Nisbet, 한국이름 유서백 선교사와 1899년에 결혼하여 1906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전주와 목포에서 선교 활동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있었던 삼일운동에 영향을 받아 4·8 만세운동에 애나벨 니스베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적극 참여할 때 도와주다가가 낙상하여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목포에 유애나기념관이 있고 1923년 정명학교 동창들이 “교장 유다해 묘”란 묘비를 세웠는데 현재 그의 묘는 광주 양림선교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다.)은 내한한지 6개월 정도 된 간호선교사 피츠(Laura May Pitts)와 함께 천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피츠 선교사는 “돕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여 한국의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이들은 천원에 도착하기 전 날씨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천원에 오는 중 갑자기 폭우를 만나 길을 잃게 된 것입니다. 두 시간 가량 길을 헤매고 있는 동안 폭우는 눈으로 변해 이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리 사나운 북풍한설이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 해도 우리는 전진하리라’ 하는 마음으로 웃으며 갈 길을 재촉했습니다.
마침내 천원에 도착한 이들은 천원교회 교인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습니다. 특히 서영선 장로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서 장로는 본래 술주정뱅이에 노름꾼으로 세월을 보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그의 속에 들어오자 그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란 평판을 얻게 되었습니다. 에나벨 선교사는 어느 믿지 않는 한 부인이 하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부인은 “당신이 거듭나야 한다”는 테이트 선교사의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 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분이 얘기하고 있는 거듭난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요. 바로 우리 마을에 살고 있지요. 그분은 예수쟁이가 되고 나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답니다.” 하면서 서 장로에 대해서 얘기를 했던 겁니다.
천원에 온 애나벨 선교사와 피츠 선교사는 부인들과 함께 천원교회에서 저녁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갑자기 피츠 선교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때 서 장로는 나서서 다음날 일찍 전주 선교부로 전보를 치도록 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제는 지혜의 아버지께 길을 보여 달라고 간구 합시다“라고 말하면서 미국에 있는 피츠 선교사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또 애나벨 선교사를 위해서도 기도했는데, 그를 위해선 관습의 장벽을 일소하고 선교사들을 잘 이해하고 도우며 가족처럼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 중에 애나벨 선교사는 마치 하늘 문이 열리고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합니다. 애나벨 선교사는 이때의 기억을 그의 책 Day in and day out in Korea(『한국 선교초기 역사』 한인수 옮김 1998 도서출판 경건)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피츠 선교사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위의 책 180쪽)
전주에서 찬실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한 여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당신은 천원에서 세상을 떠난 정규간호원을 기억하나요? 언젠가 내가 아파서 입원해 있었을 때에 그녀는 아름답고 청결하며 매우 친절했지요. 나는 왜 그녀 같은 여인이 고향을 떠나 이곳에 와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나는 어느 한국여인에게 그 이유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정규 간호원에게 물어보았어요. 그때 정규 간호원은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 했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녀는 한국말을 잘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나는 예수님의 사랑이 그녀를 불렀기 때문에 그녀가 이곳에 와서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섬기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지요. 그녀의 서거 이후 나는 그녀가 섬겼던 예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어요. 그분은 밤낮 그녀의 메시지를 통해 저를 부르고 계셨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나는 그분에게로 올 수 밖에 없었답니다.”
천원교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23년 철원에서 이사 온 박영기(1877-1950)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강원도 이천군 출신으로 무당에게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제주도로 이사를 갑니다. 제주도로 간 그는 그곳에서 교회(성내교회)를 다니면서 자신의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그 후 천원으로 이사 온 뒤 인근 평야에서 나오는 쌀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여 사들였다가 서울에 가서 팔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매계교회의 박봉래, 정읍교회의 정종실과 함께 박영기, 이 세 장로는 부호로 이름을 날리며 교회를 섬겼는데, 천원교회는 박영기 장로의 영향으로 한때는 600명이 넘는 큰 교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박영기 장로의 부인 안덕신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당시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한 자녀들을 위하여 천원학원을 설립하여 중등교육을 시켰는데 이 학교를 졸업하고도 더 이상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여 전주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하는 등 교회의 어머니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해 50일간이나 경찰서유치장에 수감되었던 박영기 장로는 6·25전쟁 시에 교회를 지키던 강해주 전도사와 함께 인민군에게 끌려가 그해 9월 28일에 인민군의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입암면 하부리 부락 언덕에서 그 부락의 청년들 50여 명과 함께 말입니다. 이때 박영기 장로는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도 인민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며 눈을 감았습니다.
정읍제일교회는 1909년 시작됩니다. 1999년에 발행된 정읍제일교회 90년사에 의하면, “1909년 4월 5일 정읍 상리 황대일 씨 居에서 數人의 기도회로 시작되었는데, 정읍군 태인면 매계리와 한교리와 입암면 천원리에 최중진 목사가 교회를 설립한 후 최중진 목사의 활동으로…” 정읍제일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시작될 당시 교회 이름은 마을 이름을 따 상리교회라 했습니다. 1911년 황대일 씨는 집 앞에 초가 2칸을 건축하였습니다. 1912년 노회에서 상리교회 설립을 허락하고 황대일을 초대집사로 임명하였으나 1915년 황대일 씨가 타락하는 바람에 이 교회의 성장이 멈춰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새 일꾼을 예비하여 주셨으니, 1918년 장현팔 씨가 이 교회의 집사로 임명받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자 교회는 다시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의 역할이 교회의 꺼져가는 불을 다시 활활 일으켜 교인수가 80여 명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상리 원상동 산하에 초가 3칸을 신축하고 교회 이름도 정읍교회라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1922년 천원교회 설립교인 중의 한분인 박창욱 장로가 목사가 되어 초대목사로 오자 교회는 더욱 부흥했고, 그 뒤로 인근 장명리의 밭 98평을 매입하고 목조기와 50평 교회를 신축한 뒤 그동안 쓰던 상리예배당은 목사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23년이 되자,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박치규라는 사람이 정읍교회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교회가 다만 예수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지역민들을 계몽하는 것을 보고 이에 감동을 받아 땅을 헌납하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의 정읍제일교회로 발전하는 기틀을 제공하였습니다.
전북노회 제23회 회록(1929. 3. 28. 44-45쪽)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정읍 상리교회는 제직과 김수영 조사의 성역으로 유익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숙제이던 예배당 이전문제는 독지가(박상열집사의 작은 아버지) 박치규씨가 중앙 적소에 시가 천여원의 기지 248평을 기부하여 준 일과 임선호 씨가 풍금 1대를 기부하여 준 일, 집사 양공윤씨가 예배당 건축비로 750원을 낸 일이 있사오며…”
6·25전쟁은 역시 이 지역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쟁은 많은 순교자의 피를 요구했습니다. 박창욱 목사는 원평에서 순교하였으며, 박 목사의 아버지 박순영 씨도 본래 독립운동 하다가 공주에서 여기까지 왔지만 안타깝게도 순교하였습니다. 홍재기 장로도 순교의 제단에 그 생명을 바쳤습니다. 또한 그해 10월 26일 공비들에 의해 교회당도 모두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정읍제일교회에는 수많은 훌륭한 신자들이 있지만 그중에 기억할 한 사람은 정종실 장로입니다. 1938년 장로로 임직한 정종실 장로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정읍으로 내려와 삼남의원을 개업하였습니다. 비록 그는 외지인이지만 성심성의로 환자들을 치료하며 교회에 충성하고 많은 봉사활동을 하여 신뢰를 얻어 당시 읍장인 최인철과 함께 장로가 되었습니다.
1945년 11월 당시 최상섭 목사는 최인철 장로와 함께 30여 명을 모아 고아들을 수용하는 정읍애육원을 세웠고, 이로써 정읍시 최초의 민간 사회복지시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6·25 전쟁 후에는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애육원에서 큰 위로와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이 같은 일에는 막대한 재정이 소비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정종실 장로가 병원에서 얻은 재원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성의껏 애육원을 돌보았습니다. 앞에서 이미 소개한 적 있는 매계교회 박봉래 장로, 천원교회 박영기 장로가 있듯이 정읍제일교회에는 정종실 장로가 있어 교회를 섬기는 일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큰 공헌을 하였던 것입니다.
정읍제일교회와 연관된 목사로는 길진경 목사를 기억하게 됩니다. 길진경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차남으로 1958년 7월에 정읍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서구적인 감각으로 전통적 역사의 고장인 정읍에서 새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정읍 다방가와 골목을 누비며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1961년 길진경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총무로 선출되어 이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한신대 박근원 박사는 고창출신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정읍제일교회에 출석하여 믿음을 키웠습니다. 그는 예배학의 대가로서 한국교회 예배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는 정읍제일교회 90년사 발간 축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습니다.
8·15 해방을 맞아 정읍제일교회는 여전히 그 지역의 사회복지와 국가재건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일조를 했고 6·25 전란의 비극으로 피해가 어느 지역보다도 극심했던 상황에서 전쟁고아들의 복지를 위한 정읍애육원의 설립운영, 전쟁미망인들을 위한 정읍모자원과 그들의 재활을 위해 직조공장을 세워 운영했던 그때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개인 활동이라기보다는 당시 제일교회의 신앙적인 집단 역학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다.
정읍제일교회는 1994년 부임한 김천영 목사가 지금까지 담임을 맡으면서 교인들의 영성 함양은 물론 지역 내 하나님의 선교와 한국기독교 연합 사업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읍제일교회는 이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여전히 널리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 군산 나운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을 개원하여 호남지역의 교회사와 종교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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