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14)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복음>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복음


김제군 월천면 연정리에는 냉정마을이 있습니다. 마을 앞 야산에 냉정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있어 마을 이름을 냉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냉정 우물은 여름에는 차고 맑은 물이,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더욱이 아무리 가물어도 냉정의 물은 마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을 큰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후의 이야기입니다만, 냉정교회를 세운 뒤 냉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교회 이름을 냉정하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뒷말을 하곤 했지만, 이 마을 사람들로 이뤄진 냉정교회 교인들은 그 이름을 한사코 고집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1936년에 가서야 보다 따뜻한 느낌의 정감 있는 연정(蓮井)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1906년에 박사일, 박지홍, 박중집, 김기선, 김경집, 김병룡 등 여러 사람이 입석리교회를 다녔습니다. 입석리교회가 봉월리교회로 옮겨지자 이들은 대창교회로 출석하였습니다. 주명준 교수가 저술한 연정교회 100년사를 보면 연정교회 설립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주 교수의 기록에 의하면, 박사일은 연정리 월봉마을에 사는 자로 두레박을 등에 지고 팔러 다니던 중에 입석리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박지홍은 당시 마을에 부자로 알려진 박중집(박지홍의 사촌형)의 농토를 소작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촌형제는 본래 동학도로서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동학도들을 색출하려는 정부군과 일본군으로부터 피신할 목적으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동안 점차 신앙이 깊어 입석리교회와 대창리교회를 열심히 다니게 된 것입니다

냉정마을에 살던 삼형제인 김기선, 김경집, 김영선 역시 동학도였지만 예수를 믿고 입석리교회에 출석하게 됐습니다. 이들을 교회로 이끈 사람은 김기선의 아내 지변화였습니다. 지변화는 군산에서 전도하러 온 선교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 후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여 동학도로 체포되는 것을 면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지변화는 시동생인 김경집과 김영선도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연정교회 역사를 보면 지변화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는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20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죽산 대창리교회를 다니던 박중집과 박지홍은 1908년 냉정리에도 교회를 세우기로 마음먹습니다. 이들 중 가장 재산이 많은 박중집이 자기 땅과 재목과 물자까지 다 내놓으며 교회당을 건립하는 데 큰 몫을 합니다. 또 본래 목수였던 김경집이 여러 교인들과 함께 힘을 모아 교회당 건립에 앞장섭니다. 1908118(919) 10평 정도의 초가삼간을 건립하였고, 드디어 냉정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냉정교회가 창립될 당시 얼(A. M. Earle, 한국명 어아력) 선교사가 당회장을 맡았는데, 건강상의 문제로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 뒤 1910년부터 19146월까지 불(한국명 부위렴) 선교사가 당회장을 맡았습니다. 냉정교회 창립 초기에는 신자가 적고 재정 또한 넉넉한 상태가 아니어서 멍석을 깔고 예배를 드리다가 1917년에 가서야 마루를 깔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냉정교회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냉정교회의 영수로 봉사하던 박중집이 큰아들이 죽게 되자 그만 배도를 하고 교회와 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인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박지홍과 김기선 그의 아내 지변화, 이렇게 세 명만 교회에 남게 되었습니다. 본래 냉정교회 터는 박중집의 활터였습니다. 배도한 박중집은 교회 건너편에 과녁을 세우고 뭇 사람들과 함께 활을 쏘며 술을 마시고 즐겼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비방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박중집이 활을 쏘려 활터에 오르고 보니 지변화가 겉저고리를 벗어젖히고 과녁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결연한 표정의 지변화는 활을 쏘려면 자신을 먼저 쏘라고 외쳤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박중집은 당황했고 더욱이 겉저고리를 벗은 여자를 함부로 끌어내리지도 못하니 결국 활 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변화는 마침내 교회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미 교인들이 다 떠나버려 여전히 어려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최학삼 장로가 전 가족과 죽동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교회 재건에 힘써주었습니다.
 
지변화는 키가 크고 얼굴도 아름답고 말도 잘해서 선교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지변화는 양채선과 함께 군산 선교부의 그린(Willie Burnice Greene, 한국명 구리인, 1988. 5. 5. 조지아 주 뉴애틀랜타 커크우드 출생. 1919년 내한하여 1960년까지 군산선교부에 소속하여 활동하였으며, 영명학교 멜본디여학교와 여자달성경학교를 운영하였다.) 선교사가 설립한 달성경학교를 졸업하고 그린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습니다. 조사가 된 지변화는 군산, 옥구, 김제, 부안 등을 다니며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최학삼 장로가 무너진 주춧돌을 다시 세우듯 냉정교회를 인도하며 흩어진 교인들을 다시 불러모으는 중에 죽산면 홍산리 내촌부락에 살던 오봉순 가족이 냉정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오봉순은 일본인 농장에서 일하며 많은 농사일을 하고 있어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봉순은 교회에 올 때마다 조랑말을 타고 왔다고 합니다. 오봉순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자 냉정교회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봉순은 후에 냉정교회 장로가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을 하다가 교회에 나오게 된 이명수 또한 당시 9,000평의 논농사를 지으며 그 일대에서 큰소리를 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열심히 교회 일을 하니 박지홍 다음으로 교회 영수가 되었습니다. 이명수 영수는 교인들이 아프면 보름이고 한 달이고 병이 나을 때까지 그 집을 찾아가 기도를 해주곤 하였습니다. 이처럼 냉정교회에 헌신한 김기선 집사는 1928년 소천하였고, 1929729일에는 당시 나이 61세로 박지홍 영수가 소천하였습니다
최학삼 장로는 박지홍과 입석리교회 때부터 함께 신앙생활하여 온 연고로 비록 가난하지만 굳은 신앙심으로 교회를 지키는 모습에 감동하여 냉정교회를 돕고자 했습니다. 최학삼은 그의 막내딸 최영안을 박지홍의 큰아들 박영현에게 시집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들 부부는 두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냉정교회에 헌신하며 평생토록 봉사하며 섬겼습니다.
 
  
다음은 구봉리교회로 가보겠습니다. 장로회 사기(, 176)를 보면 “1909년 김제군 구봉리교회가 성립되다. 先是에 정창화 김기환 김영국 등이 믿고 전도하야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新建하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금구현 수류면(금산면) 구월리는 구암리라고도 하고 구봉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구월리 앞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초승달처럼 펼쳐 있다고 해서 구월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홉 개 산에 아홉 개의 바위가 박혀 있다고 구암리 또는 구봉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구봉리에 테이트 선교사가 와서 교회를 세우니 그 교회가 바로 구봉리교회입니다.
 
조선 시대 조선 팔도를 지나가는 9대 간선도로가 있었는데 그중 한양 숭례문에서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항에 이르는 천리 길(정확히는 950)에 이르는 대로를 경기도·충청도·전라도를 지난다 하여 삼남대로라고 하였습니다. 주명진 교수가 기록한 원평교회 100년사에 소개된 대로 말씀드리면, 이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공주를 거쳐 삼례에 이르는데, 여기서 방향을 틀어 부산을 향한 대로가 영남대로입니다. 삼례에서 발길을 오른편으로 틀어 모악산 오른쪽 아래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산 중턱을 거쳐 청도원에 다다르게 되고, 여기서 3리를 더 가면 금산면 팟정이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다시 10리를 남행하면 금산면 소재지인 원평리에 닿게 됩니다. 또 원평리에서 출발하면 태인과 정읍을 거쳐 입암면 처원역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노령산맥의 갈재를 넘으면 장성에 닿을 수 있고, 또 영암을 지나 해남 이진항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곳 이진항에서 배를 타면 제주시 관덕정에 이르게 되는 이 길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거리인 삼남대로입니다. 이 삼남대로를 따라 남하하며 전도하던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선교사가 팟정이에 와서 조덕삼, 이자익을 구원시켜 금산교회가 설립된 이야기는 지난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쪽복음을 들고 전도하는 테이트 선교사를 원평장에서 만난 정창화, 김기환, 김영국은 테이트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고 구봉리에서 10여 리 떨어진 팟정이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팟정이교회에서는 구봉리 교인들을 위해 구봉리에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당시 임실 심덕면 삼길리 교인들이 모악산을 넘어 50리 길을 걸어나와야 해서 삼길리에 교회를 세우기로 했던 때입니다. 테이트 선교사와 팟정이교회 교인들은 함께 돈을 내어 초가삼간을 구입하고 구봉리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교회가 부흥하자 다시 14칸 초가집으로 증축을 하였습니다. 팟정이교회에서 구봉리교회를 분립할 때 한국인 책임자는 이자익 장로였습니다. 이자익 장로는 테이트 선교사와 함께 구봉리에 와서 학습문답과 세례문답을 지도하곤 하였습니다.
 
1912년 최대진 목사가 구봉리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습니다. 본래 목포교회에 시무하는 윤식명 목사를 초빙하였으나 윤 목사가 목포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자 구봉리교회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윤식명 목사는 본래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구원을 받아 유진벨 목사의 조사가 되어 정읍에서 사역하다가 1904년 테이트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19099월 최중진, 김필수, 김창국과 함께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이 되어 목포교회로 부임하였던 것입니다. 최대진 목사가 구봉리교회에 부임할 당시 70여 명의 교인이 있었는데 최 목사가 부임한 지 석 달 만에 교인이 늘어나 150명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최대진 목사는 18791015일 정읍군 덕천면 상학리에서 최석학의 삼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최대진 목사는 최중진 목사와 최광진 장로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이들 삼형제는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가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서문밖교회를 다녔습니다. 먼저 형 최중진 목사는 김필수, 윤석명과 함께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정읍, 부안, 고부, 고창 지역의 교회들을 돌보았습니다. 둘째 형 최광진은 목수로 서문밖교회를 건축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자 교회를 지어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서문밖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최대진 목사는 1899년에 교회를 다니다가 19013월 해리슨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멕커첸 선교사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동북부 지역을 순회선교할 때 조사로 활동하였습니다.
 
1908115일자 예수교신보에는 최대진 조사가 기고한 다음의 글이 실렸습니다.
(마로덕) 목사와 같이 도 북동지방 진안, 장수, 무주, 용담, 금산, 진산, 연산, 고산, 익산으로 다닐새, 4년 전으로 말하면 10군중에 주의 말씀을 듣고 알고자 하는 이가 없어 재미없이 다니옵더니 그 믿지 아니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각각 주의 말씀 듣기는 스스로 원하오며, 또 교회가 수십 처이며 각 교회로 모이는 수효는 십 인으로부터 팔구십 명씩 되옵고, 예배당은 새로 짓는 곳도 많고 지금 시작하는 곳도 있으며 사서 꾸미는 곳도 있사오며, 또 형제자매들께서 열심 연보하와 제직회를 열고 두 사람을 택정하여 전도하옵더니 금년 가을에 한 사람을 더 택하였사오니 더욱 감사하오며, 또 금년에 旱災가 있는 듯하더니 팔백리 지방을 관찰하는 목사와 같이 다니며 본즉 백곡이 풍성하여 인민들이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을 보오니 하나님의 은혜 더욱 감사하오며 또 수년 전부터 금년 가을까지 원입교인과 세례를 받는 이를 통합하여 불과 삼백 명 이옵더니 지난번 문답할 때 원입교인이 160명이요, 세례 받는 이가 98인이오며, 명년 정월부터 몇 교회에서 소학교를 설립키로 작정되었사오니 하나님의 은혜 더욱 감사하오며, 각처 교회 형제는 이교회를 위해 기도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멕커첸 선교사의 조사로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던 최대진이 1908년 전라대리회의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19125회로 졸업한 뒤 구봉리교회에 초대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구봉리교회는 초대신자 정창화, 김기환, 김영국과 팟종이교회에서 이사 온 강평국이 최대진 목사에 적극 협력하여 나날이 부흥해 갔습니다. 마침내 팟종이교회의 왕순칠과 함께 구봉리교회의 강평국이 1913년 첫 장로가 되었습니다.
 
주명준 교수의 원평교회 100년사에 보면, 강평국 장로는 1875년 군산에서 아버지 강지업과 어머니 이성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강평국 장로의 첫째 아들은 강덕천으로 군산 백화양조를 창업한 강정준 장로의 아버지입니다. 1900715일 강평국은 금산 팟정이로 이사 온 뒤 1904년 금산교회에 출석하여 1906년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강평국은 1910년에 구봉리로 이사했는데, 그는 당시 미곡상을 하던 당대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독립운동에도 가담하여 원평 삼일운동을 배후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이종희는 3·1 운동 이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때 그는 독립군 장군으로 활약을 펼칩니다.(1947년 귀국 후 사망) 1977년 정부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87년 원평에 그의 추모비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강평국의 부인 김신경은 전주 서문밖교회 전도사인 박연원의 딸로 서울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인데,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됩니다. 강평국은 갑자기 아내가 죽자 군산으로 이사를 한 뒤 개복동교회를 출석하다 1947년 소천하였습니다.
 
강정준 장로는 백화양조 공장 부지로 마련한 땅인 경기도 용인군 양지면 29만 평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신학교 부지로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강정준 장로는 가훈으로 보람 있는 인생을 살자. 교회 열심히 다니자. 하나님 말씀대로 살자. 검소하게 살자.”라고 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강정준 장로의 65녀의 막내아들인 강희성 장로는 호원대학교의 총장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강평국 장로의 후손들은 돈독한 신앙으로 각처에서 교회를 섬기며 축복을 받으니 의인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봉리교회의 초대목사였던 최대진 목사는 1914년 구봉리교회를 사임하고 강진의 병영교회와 백양교회를 거쳐 제주도 선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1919년 당시에는 남전교회 목사로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최대진 목사는 서울 묘동교회와 북간도교회를 거쳐 군산 동부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426338년간의 교역자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구봉리교회는 금산면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 교회가 발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 있었고, 기왕이면 면 소재지로 이전하는 것이 좋다 하여 교회의 중심인물인 김준기 장로가 자신이 살고 있는 원평리로 옮길 것을 설득하여 1930716일 신축 이전하고 원평교회로 이름을 개칭하였습니다.
 
 
 
이제 정읍의 신태인에서 어떻게 교회가 시작되었는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김제, 부안, 완주, 고부, 정읍, 고창에 이르는 평야를 김만경(金萬頃) 평야라고 합니다. 이곳은 동진강(東津江)과 만경강(萬頃江) 유역의 충적평야와 주변의 낮은 구릉성 침식평야로 이루어진 한국 최대의 곡창지대입니다. 이미 백제시대(비류왕 27년 서기 330)에 축조된 저수지 둑인 벽골제(碧骨堤) 등이 있을 정도로 일찍이 벼농사의 중심지였으며, 사질양토가 많아 벼농사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풍요로운 땅에 살고 있던 호남의 농민들은 결코 풍요롭지 못했고 늘 가난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지리학자인 최영준 선생은 국토와 민족 생활사(한길사, 1997)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호남평야의 범위가 현재보다 훨씬 좁았으며, 바닷가의 들은 장기(獐氣)가 많고 관개시설의 혜택을 고르게 받지 못하여 한해와 염해를 자주 입는 곳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들판보다는 약간 내륙 쪽의 고라실(구릉지와 계곡이 조화를 이룬 지역)에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바닷가의 들(갯땅)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중략) 기계화의 수준이 낮은 농경사회에서는 홍수의 피해가 크고 관개가 어려운 대하천보다 토양이 비옥하고 관개가 용이한 계거(溪居)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살피지 못한 조선 시대 관리들의 탐욕과 학정으로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은 항상 피폐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부터 이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이미지 속에 저항이란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저항이 내면화되고 종교적으로 승화되면서 미륵불교가 성행하고 동학과 증산교, 보천교 그리고 원불교에 이르기까지 신흥종교가 이곳 호남지역에서 활성화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입니다

특히 정읍은 분명 혁명의 땅입니다. 반외세 반봉건의 깃발을 높이 든 혁명, 우리나라 근대사의 시작을 알린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습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학정과 부패에 이기지 못한 이들은 항상 가슴 한편에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제 아비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1,000냥의 돈을 거두었고, 황무지에도 세를 매겼고, 사람을 잡아다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워서 가둔 다음에 돈을 받고 풀어주는 등 그 행패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게다가 1893년에는 이평면에 있는 저수지인 만석보를 다시 쌓는다고 돈을 걷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일을 시켰습니다. 가을이 되어 만석보가 완성되고 농민들이 추수를 하자 처음에 걷지 않겠다던 보세700섬이나 거두어들였습니다. 그러자 가장 피해가 심했던 이평면 부근의 주민들이 이듬해인 1894년에 이평면 조소리에서 훈장을 하던 전봉준을 앞세워 진정서를 냈지만 돌아온 건 감옥신세뿐이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여 관청을 습격한 뒤, 조병갑을 쫓아내고 만석보를 부숴버렸습니다. 이때부터 동학농민혁명의 들불이 타오른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동학혁명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읍 사람들에게 갑오년의 역사는 동학비도’, ‘역적으로 몰리는 역사가 됐으며, 이런 역사의 울분을 마음 깊숙이 되새겨야 하는 비통한 아픔이 넓은 황금벌판에 질퍽하니 젖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정읍 사람들은 늘 미륵을 기다려 왔고 새로운 개혁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번번이 부서졌고 대신 그들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아픔은 일본의 침탈이었습니다. 일본에서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란 자가 나타나 아주 치밀한 농장 운영체계를 세워 악랄한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구마모토가 운영하는 농장의 총면적은 군산을 비롯한 익산, 김제, 부안, 정읍 등 5개 지역에 4000여 헥타르(1,200여만 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고 합니다. 구마모토 농장에서 그가 부렸던 소작농 수만 해도 무려 3,000여 세대 2만여 명이었고, 그들 모두는 우리 농민이었습니다

구마모토는 소유한 농장에서 소작인들에게 7 3이란 고리의 소작료 등을 착취하여 군산을 비롯한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여 매년 800만 석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흉년이 들 경우 농민들은 소작료를 내고 나면 먹을 식량이 없어, 소작료를 줄여달라고 사정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은 여지없이 주재소에 끌려가 얻어맞곤 했습니다. 이러한 수탈이 계속되자, 우리 농민들은 여럿이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주모자는 감옥에 가고 가담자들은 그 다음해에 소작지를 빼앗기는 등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살기가 어려워지자 이 지역 사람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 남자는 등에 짐을 지고, 여자는 머리에 짐을 이고)하여 고향을 버리고 정처없이 떠났습니다.
  
백제 시대 정읍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로 <정읍사>라는 노래가 전해 오고 있습니다.
  
달하 노파곰 도다샤 어리야 머리 곰 비취오시라 아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다리 져재 너러신고요 어긔야 즌듸를 드듸 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이 노래는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전주 장에 간 남편을 기다리는 내용입니다. 이때 달이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순박하고 지순한 사랑의 마음을 달에 의탁해 담은 이 노래는 을 절대자 혹은 천지신명에 가까운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그 점은 바로 민속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속 신앙에서 은 소원성취를 기원하던 전통적인 수호신적 성격을 갖고 있는 달로, 이 노래에서는 아내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도와주는 절대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달이기에 남편의 귀갓길과 아내의 마중길, 나아가 그들의 인생행로의 어둠을 물리치는 광명의 상징으로 보게 됩니다.
 
이제 정읍 사람들에게 달보다 더 환한 해처럼 다가온, 그리고 언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인가 하는 끝없는 질문에 대한 그 대답을 낯선 한 서양 선교사로부터 듣게 되었으니, 그들 앞에 복음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 낯선 외국 선교사가 바로 테이트 목사였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는 전라북도 만경강 남쪽 거의 전 지역을 순회 전도하면서 거의 9년간 35개 지역의 1,500명 이상의 입교인을 맞이했으니, 아마도 한국 초기 가장 큰 선교의 금자탑을 세웠다고 할 만합니다. 테이트 선교사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정읍 지역에서 테이트 목사의 선교활동을 돕고, 그 이상의 역할을 한 조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최중지란 사람입니다. 나중에 그는 제2회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 지역에 내려와 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선교사에 반발하여 선교사로부터 교회를 독립시켜 자유 기독교를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추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 군산 나운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을 개원하여 호남 지역의 교회사와 종교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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