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11) <모악산 자락에 뿌리내린 복음1>

모악산 자락에 뿌리내린 복음의 숲(1)
 
  
모악산에 깃든 깊은 종교성
 
남한의 국토면적은 한반도 면적의 45%(99,284)로 그 70%가 산지를 이룹니다. 태백산맥 뒤로 마식령산맥, 차령산맥, 조령 산맥, 소백산맥 그리고 광주산맥이 줄지어 마치 등뼈에 붙은 갈비뼈 형상으로 서해바다를 향해 뻗어 있습니다. 노령산맥 끄트머리에 마치 정맥과 동맥이 흐르듯 만경강과 동진강이 흐르고 그 언저리에 넓은 문전옥답이 펼쳐져 있으니 호남평야의 중심지인 김제평야가 뱃살을 자랑하듯 드러내 놓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호남평야의 경지 면적은 약 185000로 전라북도 총 경지의 약 72를 차지합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인구는 180만 명으로 전라북도 총 인구의 약 77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서해 바닷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수평선이 보이고 동쪽을 바라보면 지평선이 보이는 김제는 풍요롭고 넉넉한 인심으로 예부터 수많은 정치가, 학자, 예술가들을 배출해 왔습니다.
 
호남의 4대 경치로 변산반도의 녹음(邊山夏景), 내장산의 가을단풍(內藏秋景), 백양사의 겨울설경(白陽雪景)과 함께 모악춘경(母岳春景)이라고 부르는 모악산의 봄 경치가 있습니다. 모악산은 김제의 머리처럼 우뚝 서 김제평야를 내려다봅니다. 이 산은 해발 793m로 예로부터 엄뫼, 큰뫼로 불렸는데 산 정상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상과 같아서 모악산(母岳山)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호남평야에서 모악산을 바라보면 마치 어머니가 양팔을 벌려 사방 몇 백 리의 너른 들판을 감싸 안은듯 하여 고은 시인은 그의 시 모악산에서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 외다 / 어머니외다라고 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중 신앙의 모태로 널리 알려져 있는 호남의 영산입니다.
 
모악산 아래 미륵불교의 본산인 금산사가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동학혁명의 기치를 든 전봉준 역시 모악산이 길러낸 인물입니다. 모악산 일대를 신흥종교의 메카로 만든 강증산(姜甑山)은 이산 저산 헤매다가 모악산에 이르러 천지의 대도를 깨우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악산 아래 증산교 교파의 하나인 법종교 본부가 위엄 있게 세워져 있습니다. 대순진리회도 증산교 본당 인근에 큰 규모로 수련회장을 지어놓았습니다.
 
유교도 만만치 않습니다. 김제시 교동 38번지에 있는 벽성서원은 김해 김씨 종친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여기에는 김유신을 중심으로 고운 최치원, 죽강 김보, 점필제 김종직, 탁영 김손일 등을 모시고 제향하고 있습니다. 김제시 신풍동에 팔효사가 있는데 이곳은 3대에 걸쳐 효자가 배출되어 이를 기리는 사당입니다. 나주 나씨 가문에서 태어난 아홉 효자의 효행을 길이 빛내고 후세에 가르침을 주기 위해 건립하였습니다. 팔효사 안에는 수령 550년 된 은행나무가 아직도 무성한 잎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1890년대 호남에는 3개의 성당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귀의했습니다. 되재(완주 화산), 나바위(익산 망성), 수류(김제 금산)에 본당이 있습니다. 노령산맥의 주봉인 모악산과 상두산, 국사봉에 둘러싸인 수류성당은 1907년 건축됐고 이듬해 인명학교(이후 화율국민학교)가 세워져 한문과 신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수류본당의 관할은 김제, 부안, 정읍, 순창, 고창, 담양, 장성까지였습니다. 수류는 한국뿐 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많은 신부를 배출한 지역으로 이름이 나있습니다. 그 수는 무려 11명으로 김영구, 정재석, 서정수, 김반석, 김영일, 범석규, 박영규, 안복진, 박문규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화율리의 다섯 마을인 상화, 평지, 시목, 율치, 복호주민이 모두 천주교회의 신도들이라고 합니다.
 
곁들여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로, 김일성의 시조 묘가 모악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김정일 집무실에 그 시조 묘 사진이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셋째 아들이 마의 태자인데 그는 금강산으로 갔고 넷째 아들 김은열()은 완주로 와서 살았는데 그의 7대 손인 김태서라는 분이 전주김씨의 시조로 그분의 무덤이 지금 모악산 산기슭에 있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김태서의 34대 손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김일성의 시조만은 아닙니다. 현재 전주김씨 되는 분들이 5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모악산 솔숲에 뿌리내린 복음의 씨앗
 
이처럼 종교심이 가득한 모악산 아래, 김제 황금벌판에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그러한 풍성한 복음의 씨앗은 오늘날 군산, 익산과 더불어 인구 비례 30%가 넘는 복음화 열매를 맺어 왔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농촌 지역인 호남인들은 인화 단결이 그 어느 지역보다 돈독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도 그런 성향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베드로의 전도로 고넬료의 가솔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였고, 바울이 선교하러 다닐 때 루디아 온 가족이 복음을 따랐듯이, 어느 가정의 누구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가족과 친척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역사는 순교를 당할 때도 같았습니다. 한 사람이 순교를 당하면 그 가족 모두가 함께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 순교자 1000명 중 850명이 호남 사람들입니다.
 
전주선교부의 테이트 목사는 모악산 너머에 있는 김제의 팟정이(두정리)로 다니면서 전도를 하여 1905년 팟정이교회(현재의 김제 금산교회)를 세웠고 군산선교부의 전킨 목사는 궁말에서 말을 타고 지경리(옥구 대야)를 거쳐 만경강을 배로 건너 김제군 공덕면으로 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교회가 189753일 김제 지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송지동교회입니다.
 
송지동은 온통 솔나무로 가득하여 이리 보아도 솔나무 숲이요 저리 보아도 솔나무 숲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송지동에 살던 송원성과 강문성은 군산 장날이 되면 배를 타고 만경강을 건너 지경을 거쳐 군산의 장터를 오고 갔는데 어느 날 군산에서 만난 전킨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전킨 선교사와 함께 송지동에 와서 전도를 하게 되었고, 전도 결과 송지동 문학선의 집 대청마루에서 송원선, 강문성, 최치국, 문학선, 문종삼 씨 외 다수가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때가 1896년도였습니다. 그 후 신자가 증가하여 1897년에 교회당을 신축하여 자형으로 남녀가 분리되어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이곳은 세례 교인 15명이 되는 189753일을 기해 정식으로 교회 설립이 보고되었습니다.
김제군 송지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선교사 전위렴이 당지에 래도하여 전도함으로 송원선, 강문성 등이 시신하고 신자 점차 증가한지라. 지시하야 예배당을 신축하니 교회가 완성하니라.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 1928, 40.)  
그래서 송지동교회에서는 이것을 역사적인 자료로 하여 1896년을 설립일로 하던 것을 189753일로 교회설립일을 수정하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간행된 The Missionary(19024월호 194)에는 “Home-Coming to the Morning calm Contry”(주명준, 원평교회 100년사, 93)라는 제목으로 전킨 선교사가 기고한 글이 있습니다.
  
6년 전 우리가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얼마나 많은 호기심으로 그리고 의혹에 가득한 눈초리의 군중들이 우리를 에워 쌓던가! 형제 자매들 중 약간은 16마일에서부터 찾아 왔고 한 형제는 30마일 떨어진 곳에서 찾아 왔다. 나의 두 번째의 군산지역 봉사는 규칙적으로 5군산, 통사동(옥구군 개정면 통사리), 만자산(지경리), 남차문(오산면) 송지동 에서 행해졌다. 그 마지막 언급한 곳(송지동)은 군산에서 16마일 떨어진 것으로 전주선교부로 가는 길가에 있다. 
 
이때 주명진 교수는 전킨 선교사의 글에 약간 착오가 있다고 합니다. 송지동이 군산에서 16마일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30마일 떨어져 있었고 또 전주 선교부로 가는 길가에 있지 않았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전킨 선교사가 교회를 돌아보며 말씀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 때는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하여 갔습니다. 그 후 전킨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국 시에는 해리슨 선교사, 불 선교사가 계속해서 교회를 돌아보며 말씀을 전하면서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특별히 불 선교사는 전북지역 교회들을 많이 돌아보며 복음을 전했는데 1937년까지 수시로 송지동교회 당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05730일 오후 1시 송지동교회 최초의 장로인 최치국의 장로 장립식이 있었는데, 이때 참석하여 예배드린 신도가 87명이었다고 당회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치국은 송지동의 건너편 청하면 대신리에 거주하던 교인으로, 송지동교회에 다니면서 장로가 되었고, 그의 아들 최봉중도 뒤에 송지동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190897일 서울 연동교회에서 예수교장로회 제2회 노회가 있었는데 최치국 장로는 전주의 김필수 장로, 매계교회의 최중진 장로, 임피 만자산의 최흥서 장로와 함께 호남지역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솔향 되어 퍼지다
 
송지동교회로부터 1901년에 익산 오산의 남전교회, 1903년에 봉남면 대송리의 대송교회, 1933년에 공덕 중앙교회, 1955년에 월현교회가 차례로 송지동교회로부터 분립해 나갔습니다. 1991319일 옛 예배당을 헐고 3층 건물로 된 새 예배당을 지어 1992330일에 준공하고 53일에 입당 예배를 드렸습니다. 1903년에는 당시 김제군 봉남면 월성리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903년 김제군 월성리 교회가 성립하다. 先是正道가 선교사 전위렴의 전도를 듣고 信敎한 후 예배당을 신축하여 열심히 전도하야 교회 인도자가 되니라.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 1928, 104)

월성리교회는 설립된 지 2년 만에 월성학원을 설립하였는데, 전주 선교부 레이놀즈 선교사의 어학교사이던 김필수가 처음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몰려오는 학생들을 감당할 수 없어 다섯 칸짜리 한옥을 신축하고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교회는 비록 신도 수는 적었지만 신학문을 가르치겠다는 의지만은 강하였습니다. 신학문이라고 해봤자, 한글이 고작이었지만 차차 새로운 학문들이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월성리교회에 뜻하지 않은 일꾼이 나타났습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개화해야만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박금이란 청년이 월성리교회에 첫발을 내딛은 것입니다. 박금은 원래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와 함께 김제 지역으로 이주한 뒤 월성리에 자리 잡고 남의 집살이를 하면서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후 그는 월성리교회 초대 장로가 되어 월성리교회와 월성학원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1915년에 레이놀즈 선교사가 당회장으로 있었고 제주도 1호 목사로 19484·3사건 때 순교한 이도종 목사가 시무하였으며 1920년에는 스위코드(Donald A. Swicord, 서국태 1921-1949 신흥학교 봉직)선교사가 당회장으로 있었습니다.
 
죽산면 대창리를 번드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드넓은 마을의 논에 물이 들어오면 멀리서 볼 때 햇빛에 반사되어 번들번들하게 보인다고 해서 번들이 마을이라고 합니다. 1903410일 죽산면 대창리 최윤중의 4칸 집에서 목요일 밤 기도회가 시작되는 것으로 대창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전킨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은 입석리교회의 이기선에게서 복음을 듣게 된 대창리의 이명순, 최학성, 최학삼, 최태산, 최윤중이 목요기도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1906년엔 임덕윤과 최학원 그리고 그의 가족들이 예배에 참석하면서 대창교회는 더욱 전도의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춘성의 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전병호|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회장, 군산 나운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을 개원하여 호남지역의 교회사와 종교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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