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5)ㅤ<한국교회의 교육선교와 호남의 첫 열매>

한국교회의 교육선교와 호남의 첫 열매
 

한국 교회의 미션스쿨 설립과 작금의 연세대 사태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오자마자 미국 공사 푸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교육 사업을 시작하고 어학을 연구하러 왔습니다우리는 서울에서 한국어 연구생으로서 또는 교육 사업가로서 미국의 국기아래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선교 사업이 아니라 교육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같은 언더우드의 입장은 종교보다는 교육을 강조함으로 한국인들에게 더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선교적 입장을 피력한 것이었습니다. 18858월에 아펜젤러에 의해 최초로 서구식 학교인 배재학당이 세워졌습니다. 188768일 고종께서 친히 배재’(培材)란 이름을 지어 당대의 명필인 정학교 선생에 의해 간판을 써 붙이게 하였습니다. 1886530일 스크랜튼 대부인이 여성 교육을 위하여 여학교를 세우니 이번에는 명성왕후께서 이화학당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후 속속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이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1886년 서울에 경신학교가 1887년엔 정신여학교, 광성학교, 1894년엔 평양에 숭덕학교와 정의학교 그리고 1895년에 동래에 일신여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1909년까지 장로교가 605개 학교이며 그 학생수가 14,708명이고 감리교가 200개 학교로 학생수가 6,420명이나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교파들도 곳곳에 학교를 세워 한국 근대교육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수많은 한국 근대화의 인재들이 양성되고 독립인사이나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지도자들을 다수 배출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20111027일 연세대학교 법인이사회가 정관개악으로 연세대학교 법인이사회의 교단추천 이사제도를 폐지한 것에 대해 NCC가맹교단과 비가맹교단이 포함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16개 교단이 연합하여 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강력하게 정관개정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법인 이사회 측에서 학교 설립 당시 한국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연세대학교 이사회 결의 확인 소송을 하였습니다. NCCK 총무 김영주 목사는 연세대학교의 설립정신에는 교육과 의료를 통해 사회와 민초들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온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함께 수행하는 연합과 공공성이라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다라는 등 사실 확인서를 이사회 측에 발송한 바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시작은 광혜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885(고종 22) 미국인 선교 의사인 알렌이 세운 광혜원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1884년 의료선교사로 1884년 우리나라에 와있던 알렌이 우정국사건으로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하게 되고 그 후 청나라 병사들을 치료하다가 궁중의 전의(典醫)로 발탁됩니다. 알렌은 고종에게 건의 하여 18852월 광혜원을 설립하였다가, 3월 의학교육을 위해 최초의 의학생을 선발하면서 12일에는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897년 운영권이 선교부로 이관되었고 1900년 미국 클리브랜드의 사업가 세브란스가 거액의 기부금을 보내어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 골에 한국최초의 근대식 병원이 준공되고 이름도 세브란스병원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로 교명을 제정합니다.
 
한편 19153월 미국 뉴욕의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적극적인 협조와 재한 남북 감리교 선교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협력을 얻어 서울 YMCA에서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학과는 문과, 수물과, 상과, 농과, 신과의 총 5개로 시작했습니다. 학교 부지는 1917년 원두우 목사의 형인 존 T. 언더우드(John T. Undewood) 씨의 기부금으로 구입하였고, 찰스 스팀슨 씨의 기부금으로 스팀슨홀을 건립하여 1920년에 이전하였습니다. 19233월에는 신교육령에 의해 교명이 연희전문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희대학교는 설립 당시부터 서로 밀접한 선교적 동조(同調)를 통해 한국교회의 교육 및 선교기관으로 발전하여 왔습니다. 마침내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희전문대학이 통합되어 연세대학교가 되고 그 학교 설립연도를 광혜원이 설립된 해로 정하였습니다.
 
지난 130년간 건학 이념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는 기독교 정신으로 진리와 자유의 정신을 체득한 한국 사회의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온 연세대학교를 한국교회로부터 뺏어가려는 현 연세대학교의 법인 이사회가 연세대학교는 한국교회와 관련이 없다는 식의 망발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저의를 의심하게 만들며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법인이사회로부터 하나님의 학교인 연세대학교를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호남 지역 최초의 미션 스쿨 설립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처럼 선교사들은 전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는 일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회당이나 산,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무엇보다 제자들을 말씀으로 양성하시면서 수많은 병자를 치료하셨으니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는 일이 복음 전파에 효과적인 방법임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셨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선교지에서 학교를 세우는 일에 치중하여 선교의 목적보다는 교육에 치중하다 보니 본래 복음 전도를 소홀히 하는 일이 많다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선교사들도 있었습니다. 1878년 미국 남 감리교회 선교사로 첫 번째인 리드(C F Reid 1849-1915)선교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봉사 활동보다는 차라리 복음전도 사업을 우리 선교부의 주된 특징으로 삼고자 한다. 중국에 이어서 여러 기관 학교 병원 등이 가장 유능한 사람들과 많은 돈을 소모하였었다. 좋은 학교와 병원은 물론 훌륭한 기관 사업이다. 그런 나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업가운데 지극히 적은 비율만이 교회 안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아 왔으며 또 복음 전도 사업에 치중하는 선교부가 수천에 달하는 성도들을 헤아리는 데 반하여 그러한 기관 사업에 치중하는 선교부는 겨우 수백의 신도들을 헤아리고 있다는 것을 보아 왔다.
 
이 같은 입장은 신학교육 정책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레이놀즈 선교사가 규정한 신학교육 정책을 보면 첫째로 목사는 영적인 경험을 가진 영적인 사람이어야 할 것이고 둘째로 성서 말씀을 핵심적으로 가르치되 기독교 중심의 역사와 지리를 철저히 교육시킬 것이며. 세 번째로 목사의 교육 정도는 한국 교인의 지적 수준에 상응하게 할 것이지 지나치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거나 서로 어울리지 아니할 정도로 높은 교육을 시킬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원칙 하에서 당시의 선교사들이 교육에 관한 입장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낯설은 한국 땅에 와서 해야 할 사명은 교육을 시켜 문명인을 만드는 일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해서 구원시켜 천국가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직 복음전도에 합당한 교육만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니스켓 선교사는 그들의 사역자는 항상 그들에게 휘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외쳐 대고 있다. 그래서 학교 사역은 그들에게 있어서 부차적인 고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선교회의 공식입장은 불신자는 전도하고 신자는 교육시키다였습니다. 비록 형평상 불신자의 입학이 허용된다 해도 전체 학생수의 60%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한국에서 기독교 전도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신학과 신앙성숙이란 면에서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선교사의 입장은 우리나라가 예부터 얼마나 교육열이 심하였는지를 간과한 일로서 그 후 김구, 이광수, 이동휘 등 많은 지식인과 애국인사들이 교회를 떠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선교사가 한국인에게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열정으로 한국인들을 가르쳐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901년부터 전주 선교부에서는 학교 설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교부는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신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교육 사업을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는 선교사들이 선교회가 책정한 계획에 따라 남녀 학교를 각각 하나씩 새우기를 권하는 바이다라고 학교설립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훈련된 남녀 사역자들을 확보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학교 설립에 동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02년부터 전킨 선교사는 군산의 그의 서재에서 소년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여 영명학교라 하고 그의 부인은 안방에서 소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멜본딘 여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멜본딘이라고 이름을 짓게 된 것은, 미국 버지니아주 랙싱톤 장로교회의 부인들이 불 선교사 부인의 소식을 듣고 학교 신축기금을 모아 보내왔는데 이들 부인들이 멜본딘 학교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군산에 근대 교육의 산실이 탄생되었는데, 오늘날에는 학교 교명이 각기 제일고등학교, 영광여자고등학교라고 바뀌었지만 이곳을 통해 수많은 군산 인재들이 해마다 알알이 영근 열매로 한국 사회에 배출되고 있습니다.
 
군산영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전킨 선교사는 미국 여러 교회에 학교 건물 신축과 교육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미국의 교회들에서 모금이 속속 오게 되자 그는 중등부를 신설하고 3층 건물과 기숙사를 지었습니다. 새로운 서양식 3층 건물은 군산 지방의 명물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오기도 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병탄으로 식민지 교육이 실시되자 교회가 운영하는 대부분의 학교는 폐교되었고, 폐교된 학교들의 학생과 선생님들은 군산 영명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충남 한산에 있는 한영서원 중등부 학생들 전원이 영명학교로 옮겨 오기도 했습니다. 이로서 영명학교는 활기를 띠게 되었고, 학생들의 수업 받는 소리가 교실 밖을 넘어 널리 군산 지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학제는 보통 6년과 고등부 4년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성서는 매 학년 모든 과에 공통으로 교육시켰으며 세계사, 수학, 자연과학, 기독문학, 작문, 음악, 체육 및 율동 등의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영명학교에는 투철한 민족주의로 무장한 애국애족의 선생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910년대부터 박연세, 김인전, 문용기, 문정관,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등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들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어 191935일 호남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전킨 선교사 부인은 남편을 따라 전주로 옮겨 감으로 얼 선교사 부인이 멜본딘학교의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바대로, 불 선교사 부인인 엘비 선교사는 자기의 모교인 멜본딘대학에 군산 여학교의 건축을 호소하였습니다. 엘비 선교사의 호소를 들은 멜본딘대학의 졸업생들이 모금운동에 나섰고 심지어 멜본딘대학의 여학생들은 아침식사를 금식하여 모은 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빵 장사를 하여서 얻어진 이익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내진 돈으로 구암에 아담한 신식 3층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군산 여학교라고 부르던 학교명을 앞에서 소개하였듯이 멜본딘 여학교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멜본딘 여학교의 교사로 성경과목을 전킨 선교사 부인의 조사였던 김 부인이 담당하였는데, 김 부인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당시 학생들이 존경하던 선생님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외 안락 소학교 및 군산 진료소 소장으로 있던 오긍선 박사의 두 여동생이 서울에서 고등과 교육을 이수하고 군산에 내려와 선생님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193·1운동으로 학교사정이 어려울 때에 엘비 교장의 초청으로 멜본딘 여학교의 학감으로 김영배 영수가 취임을 하였는데, 김영배 영수는 일찍이 서울에서 예수를 믿고 고향에 내려온 큰 형님 되는 김규배의 명령에 못 이겨 교회를 다니며 영명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생활 중에 믿음이 크게 성장한 그는 군산지역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피신생활을 한동안 하던 중 멜본딘 여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충남 서천 출신인 윤석구는 만주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군산에 와서 멜본딘 여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1937년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학교가 폐교가 되고 선교사들이 강제로 귀국하게 되자 윤석구는 한약 사업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 후 건국준비위원과 독립촉성회 군산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제헌국회의원이 되고 초대 체신부장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전북 서부 지방에 3,200명의신자와 50여개의 교회당이 있어 교회 내에서 운영하는 사립보통학교가 21개소였고, 학생수가 436명이였는데 비록 학생 수는 51명이었지만 여학교는 멜본딘 여학교 밖에 없었습니다. 디샤트 여선교사가 풍금을 치며 노래를 가르치자 여학생들은 신기하게 여겼고 이웃사람들도 구경을 왔습니다. 케슬러 간호선교사는 위생을 담당하였는데 여성의 생리변화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여학생들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었던 일이라 신기해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엘비 선교사는 가사를 담당하여 재봉틀을 가르치고 얼 선교사 부인은 자수 놓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멜본딘여학교에서 배운 여학생들이 졸업 후에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 개 교회에서 지역의 복음화와 더불어 신문화 운동이나 야학운동을 일으켜 당시 침체된 민족의 활기를 북돋아주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일부 여학생들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 부설 간호학교로 진학하여 간호사로 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여성이 장인택 조사의 큰 딸인 장한나를 들 수 있는데 장한나는 멜본딘 보통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 고등과를 거쳐 멜본딘 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최주현과 결혼하여 옥구지경에서 살았는데 자녀들을 모두 잘 키워서 한국 의학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했습니다.
 
 
 
전병호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 나운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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