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디딘 복음의 첫 발자국
최근 한국교회의 정체(停滯)가 심각하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교회와 목회자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도 곱지 않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분들은 성서로 되돌아가야 한다거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며 한국교회의 갱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초대교회는 무엇일까요? 예루살렘교회나 안디옥교회, 로마교회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아마도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또한 성서로 돌아가자면 구체적으로 성서의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일까요?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 우리는 다시 바울의 삶과 신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철저히 순종하고 복음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순교의 순간까지 충성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바울의 믿음과 열정이 지난 2000년 세계 선교역사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을 통해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100여 년 전 미지의 나라 조선으로 달려와 피와 땀과 눈물로 복음의 씨를 뿌린 초대 선교사의 믿음과 헌신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봅니다. 100여 년 전 한국에 온 초대 선교사들, 그 중 특히 변방의 땅 호남지역에 내려와 자갈밭 가시덤불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고 복음의 씨를 뿌린 호남 선교사들의 열정을 우리 신앙의 삶에 되새겨 보고, 다시 오늘에 재현시킨다면 침체된 한국교회의 영성이 다시금 불일 듯 일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탁류를 거슬러온 기쁜 소식
1937년 군산이 낳은 소설가 채만식이 「조선일보」에 ‘탁류’라는 소설을 연재했습니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로부터 물은 조수까지 섭슬려 더욱 흐리나 가득하니 벅차고, 강 너비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난 강경 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 …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 온 물이 마침내 황해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에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채만식의 『탁류』에서 보여준 대로 호남 선교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고 하겠습니다. 복음은 군산 옆구리를 훑으면서 바다로 흘러가는 금강의 탁류를 거슬러 군산에 흘러들어 왔습니다. 1890년대 당시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면이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며 온통 탁류가 되어 흐르던 그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복음의 빛을 이 땅에 비추어 주셨던 것입니다.
1832년 7월 25일 귀츨라프 선교사가 군산을 지나 금강의 물을 타고 강경까지 이르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지만 그때는 그저 돌짝밭에 불과하던 때라 쉽게 싹을 내리지 못했지요. 그러나 당시 귀츨라프 선교사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조선에 파송된 하나님의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주님께서는 예정하신 때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
주님께서 예정하신 그때가 언제입니까? 그러나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 2:3)고 하신 말씀대로 조금은 지체되었지만 때가 차매 그때가 이르렀던 것입니다. 귀츨라프 선교사가 지나 간지 62년 그리고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처음 한국선교를 개시한지 9년이 된 1894년 3월 30일이였습니다.
군산의 봄눈 녹은 언덕바지에서 나물 캐던 아낙들은 배에서 막 내리는 이상한 양복차림의 두 서양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레이놀즈(W. D. Reinolds, 한국명 이눌서)와 드류(A. D. Drew, 한국명 유대모) 선교사였습니다. 이들은 목선을 세내어 네 명의 선원과 함께 약과 책 그리고 몇 가지 생필품을 갖고 인천을 출발하였고, 열하루 만에 200km가 떨어진 당시는 작은 어촌이었던 군산의 선창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선창에서 군산 땅을 바라보며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구나”하며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그 첫 발을 내려 땅을 밟았습니다. 어째서 이들은 이처럼 탁류가 부딪치는 낯설고 물 선 군산 땅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성령께서 가라 하시지 않았다면 도무지 생각지도 못했던 이 머나먼 여행을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려는 그 일념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흔들리는 그 작은 목선을 타고 인천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호남 선교는 육로보다는 바다를 통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더욱 편리하다 싶어 먼저 답사를 하기 위해 군산 땅을 밟게 된 것입니다.
레이놀즈와 드류 선교사는 군산에서 아침 9시에서 밤 10시 반까지 복음을 전하는 한편,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전하는 전도지를 잘 받아주었고 전하는 복음 또한 귀담아 들었습니다. 물론 영어로 말을 하니 한마디도 알아듣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루에 5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볼 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답례로 생선, 굴, 미역, 달걀 등을 가져와 이들의 호의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며칠을 군산에서 보낸 그들이 임피(臨陂)를 향해 갈 때 사람들은 매우 호의를 가지고 그들을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분들의 선교 일지를 보면 임피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빈대와 벼룩들이 어찌나 달려드는지 밤새 한 숨도 못 잤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다음날 일찍 전주를 향해 떠났고, 마침내 전주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은송리에 거처를 잡았습니다. 그곳에는 레이놀즈의 한국어 통역을 맡은 정해원이란 사람이 이미 2월에 내려와 작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주에는 서양인에 대한 반감이 강한 곳이라 전주성 안으로는 서양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 밖에 있던 은송리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4월 9일부터 두 선교사는 다시 김제, 금구, 태인, 정읍, 흥덕, 줄포, 곰소 등지로 선교여행을 다녔습니다. 그 뒤 16일부터는 영덕, 함평, 무안, 목포까지 내려갔으며, 해남, 우수영, 진도, 고흥, 녹동, 벌교까지 샅샅이 다녔습니다. 이 선교여행은 30일 순천을 방문한 뒤 다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이들이 다시 기선을 타고 인천을 통해 서울로 돌아온 날은 5월 12일이었습니다.
드류 선교사는 오랫동안 육로의 험한 길을 걷다보니 발에 물집이 생겨 고생이 이만 저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전도하는 기쁨이 너무나 커서 물집 잡힌 발의 아픔은 느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드류 선교사는 서울에서 열린 선교회의에서 호남 선교부로 가장 합당한 장소는 군산이니, 군산에 호남 선교부를 세우자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되라고 하셨습니다. 바야흐로 극동의 아시아 지역인 조선 땅에 그리고 이미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셨던 군산 땅에 호남 선교부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아름다운 성령의 계절이 이제 막 시작될 수 있었으니 여기에 기막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되고 있었음을 어느 누가 알았겠습니까?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 나운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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