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7)ㅤ<호남 선교의 숨은 동역자들2>

호남 선교의 숨은 동역자들(2)
 
 
해리슨 선교사의 헌신
 
해리슨(William B. Harrison, 河緯廉, 1866-1952) 선교사부터 소개해 보겠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1866년 미국 캔터키에서 출생하여 캔터키 센트럴대학 화학과를 졸업한 뒤, 루이스빌 의대에서 1년간 의학 공부를 하고, 유니온 신학교까지 마치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894년 남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선교사로 파송 받아 제3진으로 내한하였습니다. 잠시 서울에서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 및 풍습을 익힌 뒤, 1896년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선교사와 함께 나주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나주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유진 벨 선교사는 오웬(C. C. Owen) 선교사와 함께 목포로 내려갔는데, 이때 해리슨 선교사는 전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전주로 온 그는 1897년에는 전주 서문 밖의 은송리에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 선교활동을 펼칩니다. 특히 그는 전주에서 5일마다 열리는 장터에 헛간 2곳을 마련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장터에 몰려온 사람들 사이에선, 장날 특유의 들뜬 분위기와 함께 서양인을 구경해 보려는 호기심이 발동해 그가 어눌한 한국말로 전하는 복음 소식을 듣고 신기해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해리슨 선교사는 장터 선교사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이후 전킨 선교사가 건강상의 문제로 군산에서 전주로 옮겨오자, 해리슨 선교사가 군산 선교부의 책임을 맡게 됩니다. 1903년에 부인 데이비스 여사가 별세한 뒤 해리슨 선교사는 군산 지역으로 완전히 활동무대를 옮겼습니다. 그 결과 해리슨은 전킨 후임으로 군산 영명학교 교장, 남전교회(1904-1908 1916-1917), 개복교회(1905-1911)의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웅포교회, 동연교회, 무주읍교회에서도 전도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처럼 해리슨 선교사는 군산지역뿐 아니라 익산 지역까지 활동 무대를 넓히면서, 특히 익산 고현교회 설립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고현교회를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군산 대야에 위치한 지경교회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경교회 이야기
 
지경교회가 설립된 공식 지명은 임피군 남산면 만자산리입니다. 이 지역은 김해 김씨,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전주 최씨 등 여러 명망 있는 성씨들의 집성촌이었습니다. 마을 뒷산의 모습은 흰 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서 백마산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그 산 아래에 살면 아들을 많이 낳게 된다고 하여 만자산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최흥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서 해 보겠습니다. 18964월 초 어느 날, 전남 신안 출신의 보부상인 조달현이 만자산에 당도합니다. 그곳에서 조달현은 군산에 서양 사람이 와서 예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는 소문을 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만자산의 강채오, 이양화, 최관보, 최흥서 등은 조달현을 따라 군산에 가서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과 인격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생전 처음 마주한 서양인과 그들이 전하는 복음, 그리고 성심껏 환자들을 치료해 주는 모습은 그들이 볼 때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조사 장인택으로부터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듣게 되면서 더욱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군산을 찾아와 복음을 청해 듣곤 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군산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로 결심합니다

1896613일 토요일, 최관보, 정치선, 강채오, 정백현, 이양화와 그의 부인 삭녕 최씨(후에 최매리로 불림), 최흥서, 그리고 삭녕 최씨의 4살 난 딸 순길이 등이 군산으로 향합니다. 그때 돌이 막 지났던 순길이는 눈에 질병이 생겨 고름이 나오는 등 통증이 심할 때였습니다. 헌데 드류 선교사가 순길이의 눈을 정성껏 치료하고 고름도 제거해 주는 수술도 해 주자, 그 덕분에 상태가 호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경험은, 특히 순길이 엄마로 하여금 뜨거운 신앙생활의 길로 이끌게 됩니다. 이후 순길의 엄마는 이름도 최매리로 바꾸었고 그 뒤 지경교회의 전도사로 활약합니다. 지경교회가 공식 창립될 때, 이 일곱 사람은 만자산교회 창립의 칠선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군산교회를 방문한 다음 날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은 마침 미국 장로교회의 어린이 주일이었습니다. 이날 전킨 선교사는 누가복음 1916-17절 말씀을 통해 주님이 사랑하신 어린이들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예배에 참석 후 만자산에서 30리 길을 걸어 다니며 군산교회를 다니던 일곱 사람은 어느 날 최흥서의 집 사랑방에서 기도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교인수가 점점 많아지자 중만자의 최찬일 씨 집 근처에 있는 초가삼간을 20원에 구입하였고, 1900109일에는 이곳에 공식적으로 만자산교회를 설립해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장인택 조사의 사회로 모두가 <예수사랑하심>을 찬송했고, 최흥서가 기도한 뒤에는 불(W.F. Bull) 선교사가 마태복음 1613-20절을 본문으로 만세반석 위에 세운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당시 첫 예배 참석자는 성인이 35명 어린이가 40명에 불과했지만, 그날 전파된 설교 메시지처럼 오늘날의 지경교회는 군산의 유서 깊고 중심적인 교회로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당시 이 만자산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오원집이란 청년이 있었습니다. 오원집은 임피 공창리 출신으로 친척인 완산의 오 할머니 댁에 왔다가 당시 군산교회를 다니고 있던 만자산 교인들의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만자산 사람들과 군산교회를 다니다가 만자산 기도처에서 본격적인 신앙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책임성이 강하여 한 번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며 달성하는 젊은이였습니다. 따라서 한 번 복음을 듣고 난 후부터는 한 번도 빠짐없이 만자산 기도처와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는 익산 고현리의 한 여성과 결혼하여 그곳으로 옮겨 간 이후에도 만자산까지 수십 리 길을 걸어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이때 그를 유심히 살펴 본 선교사가 바로 해리슨 목사였습니다. 오원집은 해리슨 선교사에게 학습과 세례를 받은 뒤 해리슨과 함께 여러 곳을 다니며 쪽복음을 파는 등 전도 활동을 해나갔습니다.
 
오원집은 친구 오덕근과 김자윤, 고선경, 김경장, 오덕순 등과 함께 만자산 전에 위치한 고현리에 교회를 세우자는 뜻을 세우고, 고현리의 곽도일 사랑방을 기도처로 삼아 열심히 기도회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1906년 해리슨 선교사와 양응칠 조사의 도움으로 마침내 그곳에도 고현리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양응칠 장로의 미담
 
양응칠(1855-1932) 조사가 1903년 제3회 예수교장로회 합동공의회 당시, 전라대리회 총대 자격으로 참석한 것을 보면, 그가 당시의 선교사들과 교회 공동체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1896316일 군산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직후, 궁멀교회를 설립하던 시점부터 전킨 선교사를 도와 열심히 교회를 섬겼던 것입니다.
 
양응칠 장로의 믿음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지곡교회 100년사에 소개된 그분의 이야기를 소개해 볼까 합니다. 1905년 불 선교사와 양응칠 장로의 권유로 백토리에 살고 있는 고형일, 고익순, 고창여, 전학천, 김이주, 고준석 등이 궁말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07년 고형일의 집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양응칠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면서 지곡교회(훗날 남성교회로 분립됨)가 창립되었습니다. 당시 양응칠 장로는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본래 유교를 신봉하던 부모로부터 배척을 당해 집에서조차 쫓겨나 자주성가할 수밖에 없었던 양응칠은 전주 서학동에 정미소를 설립해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그는 한의학도 공부하여 침술로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외손녀인 이정은 권사(안산제일교회)의 증언에 따르면, 양응칠 장로의 집은 부유하여 여러 명의 머슴을 둘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양응칠 장로는 주일이 되면, 머슴들에게도 일체의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일만 되면 인근의 거지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집으로 초대해 무료로 급식을 해주었습니다. 이때 양 장로의 부인과 자녀 등, 가족들이 이들을 대접하다 보니 아무래도 일손이 많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너무 일손이 부족한 나머지 양 장로의 부인이 머슴들에게 물 긷는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양 장로는 온 가족과 머슴들을 마당에 불러놓고, 어째서 주일에 부인이 머슴들에게 일을 시키게 되었는지를 문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물어 부인의 종아리를 걷게 하고 회초리로 부인의 장딴지를 사정없이 때렸다고 합니다. 주일 성수를 어겼다는 이유로 부인에게 회초리를 때린 것도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 종아리를 걷고 남편에게 회초리를 맞은 그 부인의 순종도 놀라운 모습입니다. 철저한 주일 성수를 고집한 양응칠 장로는 옷고름이 떨어져도 주일에는 꿰매지 못하게 하였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추수하기 전에 미리 십일조를 헌금하였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에게 제공할 식량도 자진해 담당했고, 주일이면 곳간을 열어 어려운 이웃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였습니다. 임피 선산에 가면 양응칠 장로의 묘소가 있는데, 그 묘비명에는 믿음의 횃불 되어, 길이 빛내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매서인(권서인)의 활약
 
여기서 잠시 매서인(賣書人)들이 한국 초기 선교사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말씀해 드리고자 합니다. 매서인은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이라고도 부르는데, 한국 최초의 성경인 로스역 성경이 번역 출판되자 번역에 종사한 백홍준, 이성하, 서상륜 등이 성경을 한 짐씩 짊어지고 도시와 시골을 다니면서 약간의 돈을 받고 성경을 전해 준 것이 그 유래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접해 온 유교의 사상과는 다른 기독교라는 종교에 호기심을 가지고 너도 나도 성경을 사서 읽다가 어느새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매서인들은 선교 초기에 성경을 널리 보급하였을 뿐 아니라 신앙의 기초를 튼튼하게 쌓게 해 준 장본인인 셈입니다.
 
안양대학교 이은선 교수의 논문을 보면, 1907년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부가 부산에서 연차회의를 개최했을 때, 그들은 성서공회의 역할에 대해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성경 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했으며, “복음 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밀러는 한국 기독교인의 첫 번째 특징을 성경을 사랑하는 기독교인”(Bible-loving Christian)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매서인들의 사역을 통해 한국인들의 의식은 새롭게 깨어났습니다. 영국성서공회의 한국지부 총무로 활동했던 캔뮤어(Alexander Kenmure)는 한국의 성서보급 결과에 대해 말씀이 읽혀지고 암송되고 있다. 말씀은 이 생기 없고 영감 없는 백성들의 피와 뼈와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가고 있으며, 그들은 반드시 새로운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질 것이다라고 전망했습니다. 권서인들을 통한 성경 보급은 성경연구모임인 사경회로 연결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사랑하는 한국기독교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바로 매서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부산 지방에서 크게 활동하였던 호주 선교사 엥겔(George O. Engel)매서인들이 먼저 가서 지역을 넓히고 관심을 일깨운 후에 선교사들에게 영구적인 결과가 있을 곳을 알려주면 선교사가 가서 모임을 만들고 교회를 조직하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선교 100년 만에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세계선교에 2만 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한국 선교와 교회 개척의 최선봉에 서서 목숨을 걸고 성경보급에 힘쓴 사람들이 바로 매서인들이었습니다. 매서인들은 초기 한국교회에 몰려온 온갖 시련과 모진 풍상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황무지를 개척한 믿음의 용사들이었습니다. 민족의 수난기에도 성경봇짐을 메고 다니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한 이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선구자요 개척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은 교회 설립의 모태이자 그 발전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군산의 최흥서 장로가 있습니다. 1935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최흥서 장로는 마지막까지 성경을 전파하며 충성된 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홍종익과 홍종필 형제의 신앙과 공로
 
군산 개복동교회에서 활약한 새로운 일꾼, 홍종필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종필은 진사 홍종익의 사촌 동생이었습니다. 원래 이들은 강원도 평해가 고향이었습니다. 그런데 홍종익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와 구한말 서울에서 관리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1905년에는 사촌 홍종필과 함께 홍종익이 선조의 500지기 농토가 있는 익산군 웅포리 제석리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들은 마을 한 가운데 서울식 곰배 집 두 채를 지었습니다. 윗집은 홍종익이 살았고 아랫집에서는 홍종필이 살았습니다. 비록 지방으로 내려왔지만 부유한 가문이었던지라 밤만 되면 도둑들이 출몰하여 쌀과 물건들을 훔쳐갔습니다. 대낮에는 아예 불량배들이 대놓고 몰려와 강압적으로 재물을 빼앗아 가곤 했습니다. 이 같은 행패를 견디지 못하여, 이들은 개항을 하게 된 군산으로 이사를 합니다. 여기서 최흥서를 만난 이들은, 복음을 접해 듣고 입신하여 개복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구복동에서 개복동으로 교회를 새로 지어 이사를 할 때에 홍종익은 상당한 액수의 건축 헌금을 냈다고 합니다. 진사 홍종익과 그 사촌 동생 홍종필은 본래 양반으로, 학문에도 대단한 깊이가 있던 터라,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도 남들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마침내 이들은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교회의 장년부를 신설하여 성경 교육과 나라 사랑하는 교육에도 열심을 기울입니다.
 
1911년에는 홍종익이 1912년에는 홍종필이 장로로 장립이 되었습니다. 더욱 특이한 일은 홍종익과 홍종필이 군산으로 옮겨와 독실한 교인이 되자, 익산 제석리의 빈 집을 교회당으로 만들어 제석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홍종익이 군산으로 이사를 나와 1906년 생일에 제석에 있을 때에 그를 도와주던 마을 사람인 송원규, 강진희, 엄주환, 강두희, 강문희를 군산에 초청하였습니다. 홍종익은 그들에게 예수를 믿으면 일본 사람들이 함부로 무시를 못한다고 하면서 예수 믿기를 권하였고, 이에 호응한 그들은 제석교회의 첫 교인이 되었습니다. 제석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한 박수명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하였습니다.
 
처음 군산에서 예수를 믿고 돌아왔던 엄주환과 강진희는, 본래 들녘에서 농토를 일구면서 사는 소시민이었으며, 송원규, 강두희, 강문희는 홍종필과 홍종익의 집에서 일꾼으로 살았던 천민들었지만, 예수 안에서 천민, 진사 구별없이 형제처럼 지내며 살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되었고, 강문희는 후에 조사 및 전도인이 되어 제석을 떠나게 되었다.
 
또한 웅포 소재지에 있는 학교에 가려면 20리 길을 아이들이 걸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 위해 제석리의 홍종익과 홍종필은 자신의 집에 부용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학교를 졸업하면 군산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군산 영명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며, 여자 아이들은 멜본딘여학교에 진학하여 신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홍종필 장로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졸업하였고, 1923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개복교회의 청빙으로 한 교회의 목사로서 사역하게 됩니다. 그가 목회에 전념한 결과 그 교회의 출석 교인 수가 420명까지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19249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3회 총회부 회의록 서기, 1927-29년 총 3년 동안은 총회 서기로, 이외에도 장감연합공의회 이사,「基督申報이사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편집위원, 금강산기독교수양관 건축위원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부총회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1930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19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임되기까지 했습니다. 호남 출신으로 김필수, 이기풍, 이자익 목사에 이어 네 번째로 장로교 총회장이 탄생한 것입니다. 1930912일에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9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피선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43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한 점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교회와 총회를 위해 충성스럽게 섬기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홍종필 목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1935529일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시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전북노회에서는 그의 죽음이 너무나 애석하여 전북노회록 제30회 회록에 그의 약력을 소개를 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선생(先生)은 천성(天性)이 침진(沈眞)하시고 언소원념(言少遠念)하사 진리(眞理)를 경애(敬愛)함으로 일반신자(一般信者)에 모본(模本)이 되시었다.
 
홍종익 장로와 홍종필 목사, 이들 사촌 형제는 군산교회의 발전은 물론, 전라노회와 나아가 총회적이 차원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업적을 남기신 분들로서, 특히 군산 지역 기독교계가 기억하며 따라야 할 귀한 신앙의 선배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병호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 나운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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