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선교의 숨은 동역자들(1)
바울 사도가 제3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동역자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 서신에 40여 명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동역자’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불린 사람은 16명 이상이나 됩니다. 그중에서도 마가, 실라,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누가 등이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그밖에도 복음을 듣고 믿게 되자 자기 집을 내 놓아 교회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사람들이나, 바울사도가 머물 편의 공간을 제공한 수많은 지역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선교 발자취를 되밟아 간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도, 수많은 복음 전파의 협력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선교사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많은 이들은 선교사들의 동역자로서, 자신의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키우는 일을 위해 열심히 도왔습니다.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 송영도의 헌신
먼저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 송영도와 그의 가계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송영도는 조선의 통영대부 예조 참의를 지낸 송진호의 5남매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96년 7월 20일, 호남지역 최초의 세례교인이라는 빛나는 영예를 안고, 그는 남은 일생을 오직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는 전킨(W. M. Junkin) 선교사를 도와 구암교회의 설립위원으로 7년간 헌신하다가, 그 후 거주지를 군산 조촌동 메두에서 완주 이서 두현리로 옮겼습니다. 그는 그 곳의 부락민 50여 명을 전도하여 함께 4-5리 길을 걸어 전주 서문밖교회(현 서문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 후 그 부락에 단독으로 두현리교회(현 만성교회)를 설립하여, 그 당시엔 대단한 인원인 200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부흥시켰습니다. 그는 다시 군산 옥구군 남내리로 이사를 와서 나문절교회(현 옥구중앙교회)를 설립하며 헌신하던 중, 1916년 2월 1일 향년 60세로 소천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바울에게 있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같은 존재였고 평생 선교사들을 도운 헌신으로 채워졌습니다.
송영도의 딸 송성장은 1896년 10월 4일 호남지역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장남 송만남은, 어릴 적부터 부친을 따라 교회를 섬기다가 22세가 되던 해에 나문절교회를 떠나 군산개복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34년 5월 6일 37세 나이에 장로로 장립되었지요. 송만남 장로는 23년간 시무하면서 주일 청년 공과를 혼자서 지도하였으며, 10여 차례나 신사참배를 거부해 군산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송만남 장로는 1957년 1월 조촌교회(현 동광교회)를 개척하여 21년간 장로로 시무하다가 1985년 7월 23일 89세에 소천하였습니다.
송만남 장로의 슬하에 9남매가 있는데 군산 중동교회의 송기권 장로, 군산 개복교회의 송기수 장로 등 모든 자녀가 교회의 중진 교인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중 장손 송관석 목사 등, 목사 3명에 장로 3명 전도사 3명 집사 20여 명 등 자손도 번창하여 120여 명이나 되는데, 그들 모두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현재 군산 토성산 기슭에 송 씨 집안의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는데, 마치 아브라함의 막벨라 상수리나무 아래 무덤처럼 송영도 씨의 후손들의 묘들이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기업의 축복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조사(助事)들의 수고 장인택과 최흥서
100여 년 전,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낯선 땅에 와서 선교활동을 펼쳐 나갔을 호남 지역 초대 선교사들의 삶은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의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에게 선교의 동역자들이 존재했듯이 선교사들에게도 ‘조사’(助事)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곁을 지켰습니다. 레이놀즈 선교사에게는 정해원이라는 조사가 있었으며, 미스 테이트 선교사에겐 남씨 부인이, 테이트 선교사에게는 최중진, 윤식명, 이자익, 신경운, 오덕홍 등이, 잉골드 선교사에게는 오씨 부인이, 멕커첸 선교사에게는 이원필, 이경필, 최대진, 김응규, 김성식, 장경태가 있었고, 해리슨 선교사에게는 김창국, 양웅칠, 김옥여 등이, 얼 선교사에게는 김치만이, 미세스 얼 선교사에게는 윤씨 부인이, 전킨 선교사 부인에게는 최씨 부인이 있었습니다. 특히 전킨 선교사에게는 김필수, 장인택, 오인묵 등 여러 조사들이 늘 함께 하였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놀라운 선교 역사가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선교적 열정과 노력이 한국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면, 이들 선교사 뒤에는 수많은 한국인 조사들의 헌신과 인내, 충성이 디딤돌로 존재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전킨 선교사의 조사 가운데 장인택이라는 분의 수고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명준 교수와 김수진 목사가 장인택 조사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하셔서 묻혀 있던 그분의 삶이 오늘 날 다시금 조명 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장인택 조사는 경기도 평택 출신입니다. 그는 일찍이 한문을 깨우치고 지식인으로 행세하면서 서울을 드나들며 새로운 서구 문화에 호기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과의 만남은 그로 하여금 신지식에 눈뜨게 했고, 그는 자연스레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어학교사로 돕게 되면서 조사의 직분을 받게 됩니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공의회의 회의 석상에서는 영어만 사용되었는데, 그는 자리에 장인택 조사가 조선인 대표로 참석했던 것을 보면, 그는 신앙은 물론 영어 실력도 선교사들에게 큰 신뢰를 얻고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장인택은 1896년부터 전킨 선교사를 따라 군산에 내려와 군산교회와 궁멀구암교회의 설립 과정에 큰 기여를 합니다. 그는 본래 평택 지역의 부호였기에, 군산 궁멀에 와서도 대규모 토지를 구입하여 대농(大農)이 되었습니다. 농사철에는 농사일을 돌보면서 농한기에는 선교사를 도와 조사로서 활동하였으니, 전킨 선교사가 가는 곳에는 늘 장인택 조사가 함께 했습니다. 그는 군산 부두에 나가 전도를 하고, 전킨 선교사의 집을 건축하며 교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키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처럼 교회 일에 열심을 다하니 초기 구암교회의 성장에 그의 공로를 첫 번째로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 전 구암교회가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하였는데 교회 전면에 8개의 큰 기둥이 세워졌습니다. 일곱 기둥은 미 남장로회가 파견한 일곱 명의 초대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둥이고, 나머지 하나는 장인택 조사를 기념하는 기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끝내 장로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그의 이름이 초대교회 역사에서 자취가 희미해져 갔습니다. 그는 1916년 구암교회가 교회당을 신축할 때에 건축위원으로 회계를 담당한 바 있습니다. 그의 외아들 장재서, 장녀 장한나, 차녀 장은숙, 셋째 딸 장태인 등, 1남 3녀의 자녀들은 구암교회에서 믿음 가운데 성장하며 영명학교과 멜본딘여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바대로 장한나는 다음에 소개할 만지산 지경교회의 최흥서 장로의 맏며느리가 되었으며, 그 남편 최주현은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지경리에서 삼성병원을 운영하게 됩니다. 최주현의 큰 아들 최영태도 영명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후에 세브란스대학 학장을 지내며 우리나라 세균학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최주헌의 동생 영환도 형과 같은 학업을 마치고 경기도 파주에서 병원을 개업하는 등 그들로 인해 한국인의 주체적인 초기 의료선교의 역사를 열게 됩니다.
장인택이 구암교회의 초창기 기둥역할을 하였다면, 최흥서는 개복교회의 기둥이었습니다. 최흥서는 1860년 7월에 김제군 만경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873년 가족을 따라 임피 만지산 현 지경리로 이주하여 살았습니다. 당시 조달현이라는 보부상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복음을 믿었는지 알려진 바 없습니다만, 조달현은 보부상으로 이 마을로 저 마을 다니며 물건을 팔면서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최흥서는 이 조달현을 만나 복음을 듣고 신앙심을 가지게 됐고, 그 후 군산에 있던 선교사 전킨을 찾아가 기독교 교리를 정식으로 배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잠시 뒤에 다시 전하겠습니다.
해리슨 선교사는 그에 대한 성품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최흥서는 중산층에 속한 농민입니다. 그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수줍어하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전킨 선교사도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떠한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성실한 사람으로 좋은 집사 한 사람과 좋은 장로 한 사람을 결합시켜 놓을 정도의 인물입니다. 그는 초신자를 가르치며 거의 모든 집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흥서의 신앙과 성품은 당시 군산교회의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고, 교인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1986년 그가 처음 군산교회에 나오던 때에 소송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당시는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던지라 선교사들이 교인들의 일상생활 또한 요긴하게 도움을 주곤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최흥서의 소송 문제도 전킨 선교사에 의해 원만히 해결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흥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였고, 그 뒤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최흥서는 1897년 4월 10일에 전킨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한 후 이웃 사람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자신의 집에서 10km나 떨어진 군산교회를 걸어 다니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만지산에서 최흥서를 비롯하여 김채오, 정치선, 최관보, 정백현, 이양화 등 많은 교인이 1900년 최흥서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이 만지산교회, 즉 현재의 지경교회가 첫 발을 내디딘 순간입니다. 그 후 중만자에 초가삼간을 세워 예배당으로 삼고 2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최흥서는 앞에서 소개한 대로 1902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 군산교회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군산 선교부가 궁말로 이전하게 되자 군산교회의 맥을 이어 개복동에 교회를 재건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1903년에는 만지산교회 최초의 장로로 피택되었으나, 지체하던 중 1905년 말이 되어서 장로로 공식 장립하게 됩니다. 1907년 교회의 부속 2년제 소학교를 불(W. F. Bull, 부위렴) 선교사의 도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 졸업생은 이요한, 최주일, 김준실, 양해성, 고란섭 등이었는데, 그 가운데 이요한은 1947년 제헌국회의 국회의원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전북도지사까지 역임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이루어졌을 당시, 최흥서 장로는 교인들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철야기도회를 가졌고,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만세 시위를 하다가 교인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최흥서 장로는 군산 선교부가 설립한 복음서원의 매서인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서적들을 읽을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구원 사역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 나운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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