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3일 금요일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남도행전 (12) <모악산 자락에 뿌리내린 복음2>

모악산 자락에 뿌리내린 복음의 숲(2)
 
 
남대창교회는 19083월 군산에서 전주로 옮긴 전킨 목사와 김필수 장로를 초빙하여 공동회의를 열고 최학삼을 장로로 선출했으며, 19104월 이명순의 아들 이재언을 장로로 선출하였습니다. 1915년에는 최윤중과 그 아들인 최태진이 동시에 장로가 되었고 이어 최경윤, 최경택 등 16명이 차례로 장로로 장립되었습니다.
 
번드리 일대는 드넓은 벌판으로 농산물의 집산지였습니다. 번드리 서북쪽은 만경 관내로 구한말 매국노 이완용이 막대한 돈을 들여 이 동네 사람들을 동원해 바다를 둑으로 막아 거대한 농토로 만든 것입니다. 이후 이완용이 자기 농장을 보호하기 위해 기린봉에서 동진강과 수교천으로 흐르던 물을 보로 막는 바람에 비가 올 때마다 번드리 일대는 홍수가 났습니다. 그러나 워낙 권력이 있는 자라 아무도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대창교회 최학삼 장로가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여 이완용이 막은 수교천 근방의 보를 터버렸습니다. 그 후로는 비가 많이 와도 번드리에는 홍수가 나지 않았습니다. 최학삼 장로는 키가 육척인 거구로 언변이 좋고 성격은 대쪽 같아서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이완용이 최학삼 장로를 고발하여 2년 동안 재판이 이어졌지만 대구고법에서 최학삼 장로가 승소하여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대창교회 출신인 최학삼은 1911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주명준 교수는 그가 신학교육을 제대로 밟지 않고 목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주명준, 전북의 기독교 전래, 전주대학교 출판부, 1998, 220) 1914913일 함흥 신창리 예배당에서 제13차 장로회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총회의 결의 사항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북노회에서 문의한 신학구제 3년급까지 공부한 최학삼 장로를 목사로 장립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묻는 데 대하여는 정치 제146조와 11조를 의하여 해노회가 처리할 것이오며
  
최학삼이 당시 5년제 신학교를 3년만 다녔으나 총회의 허락으로 전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최학삼은 목사가 된 후 대창교회에서 분립해 죽동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명량교회, 남포교회, 선유도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의 손자인 최현식 장로는 신흥건설이라는 큰 건설업체 사장으로 있으면서 1973년 노아의 방주 모양으로 아름답고 독특한 양식의 죽동교회당을 지었습니다. 최학삼 목사가 소천한 지 1년이 지난 1935610일 대창, 죽동, 명량, 남포 교회는 공동명의로 죽동교회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 기념비에 다음과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주명준, 위의 책, 221)  
서양의 기독교를 이 지역에 전도한 것은 공이 처음입니다. 30년 동안 쉬지 않고 곳곳에 교회를 세우셨고 노령에 이르기까지 계속 목회활동을 하시다가 생을 마친 뒤 이곳 죽동에서 영원히 반석이 되셨습니다.
  
최학삼 목사의 아들 최용한은 임선유와 결혼했는데 임선유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최측근이고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의 친언니입니다. 최학삼 목사의 둘째 딸 최정순은 전주 동부교회와 죽동교회 등이 지역 여러 교회에서 활발하게 목회활동을 한 정희수 목사와 결혼했습니다. 또 조카인 최원선은 옥산교회 정공선과 결혼하였는데 옥산 출신인 정공선은 군산 궁말병원 원장 패터슨(J. B. Patterson, 1909-29년 활동)의 조수로 의학공부를 하여 김제에 벽성의원을 개업하고 옥산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김제에다 신풍교회를 세우고 김제읍중앙교회를 세웠습니다
의사로서 복음 전도에 힘을 쏟은 정공선 장로는 6명의 사위를 두었는데, 그들 모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큰사위 장태수는 신풍병원을 운영하면서 김제중앙교회 장로로, 둘째 사위 김보라는 서울에서, 셋째 사위 김형록은 부안읍교회 장로로, 넷째 사위 이동신은 김제 백산병원 원장으로, 다섯째 사위 조용근은 장항교회 장로로, 여섯째 사위 민생은 전주 남문교회 장로로서 각기 장인의 귀한 뜻을 이어갔습니다.
 
 
김제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땅을 구입해 경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끼(多木)라는 사람과 이사가와(石川)라는 사람이 넓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대창교회 교인들이 1922700원을 들여 132규모의 예배당과 대창학당을 세웠습니다. 교장으로 최경택, 교사로 김선애가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했습니다. 이때 찬송가도 가르쳤는데 안경석이라는 청년은 학생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온 교인들이 쌀을 모아 악기를 구입하였고 안경석, 김중화, 최준식, 이병욱, 최태영, 홍재일 그리고 최종수 장로도 뒤늦게 참여하여 6인조 악단을 만들었습니다.
 
대창교회 종소리는 이 지역에서 대단히 유명했습니다. 번드리 넓은 논밭에 종소리가 퍼지면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두 시각을 알 수 있었고, 그 종소리로 비상사태를 알려주기도 하고, 결혼예식이나 장례예식을 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깡패가 사람들을 괴롭힐 때 종을 치면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이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1913년에 이재언 장로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목사가 되어 1916년 대창교회 첫 번째 위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재언 목사는 대창교회뿐 아니라 인근 여러 교회도 함께 돌봄으로 이 지역의 영적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재언 목사는 대창교회 초기 신자인 이명순의 아들로 이명순은 전남 해남군 북평면 오산리에 살다 1894년 광주 무등산 아래로 이주하였다가 더 좋은 집터를 찾아 김제군 죽산면 명량리 우렁산 아래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명당자리를 찾았으니 이는 이기선의 전도를 받아 지난호에 소개한 대로 대창교회 설립 교인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친인 이명순은 처음부터 아들 이재언을 목사로 만들어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하고 기도하며 신앙으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마침내 목사가 되어 모교회의 목사로 오게 되니 그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명당 중의 명당을 찾은 것입니다.
 
이처럼 대창교회에서는 최학삼, 이재언 목사를 비롯하여 정진철, 안경운, 안상영, 이병상, 윤식명 목사 등 약 18명에 이르는 많은 목회자가 배출되었습니다. 함태영 부통령도 이 교회 출신이고 한국전쟁 때 순교한 안덕윤 목사는 한국 기독교사에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을 지낸 이리신광교회의 안경운 목사 등 총회장을 4명이나 배출했습니다. 또 대창교회 출신으로 이상섭 목사가 있는데 그의 가계에서는 목회자가 11명이나 배출되었습니다. 처가를 제외하고 직계 쪽만 이 목사를 포함해 7명이 목회자입니다. 큰형 이상운 목사는 서울 영등포 당일교회 담임이었으며 교경중앙협의회 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상섭 목사는 현재 방파선교회 회장으로서 이슬람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상당수의 동학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동학도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의 교리가 자기들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교리가 자기들의 교리인 인시천(人是天), 사인여천(事人如天), 인시평등(人是平等), 차별철폐, 인상무인, 인하무인 등 다르지 않다고 보아 비록 완전한 개종은 아니더라도 관군의 추격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적어도 위장개종이라도 하는 다급한 처지였습니다. 갑오경장 이후 동학교도들은 상투를 자르고 채색 옷이나 검정색 옷을 입도록 하는 진보적인 개혁을 선도하였는데, 당국은 상투 자른 자들은 동학교도들이니 무조건 잡아들이라.”고 공표했습니다. 이때 동학교도들을 잡아 조사하는 중에 상투를 잘랐다 하더라도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석방되었기 때문에 동학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것입니다.
 
1900년 동학세력이 집단으로 개종하면서 그들 중심으로 입석리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처음에 입석리교회는 작은 기도처였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기독교로 귀의한 동학의 접주였던 김국현이 월천면 입석리 선돌 도로변에 있는 자신의 네 칸짜리 집을 기도처로 삼으라고 전킨 선교사에게 요청했습니다. 당시 전킨 선교사는 송지동교회 개척을 위해 열심히 이 지역을 찾아왔습니다. 이후 전킨 선교사가 전도한 김국현, 구덕삼, 이기선, 조원배와 목수 일을 하면서 매서인으로 활동하던 곽성국 등 몇 사람이 모여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기선이 전도한 이순명, 최학성, 최학삼, 최대삼, 최윤증 등도 1903년 대창교회가 설립되기까지 입석리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김국현이 헌금을 교인들의 밥을 지어준다는 명목으로 자의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계를 맡은 구덕삼이 장부 기재를 제대로 몰라 수입만 적고 지출을 적지 않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이에 월봉리에서 오는 교인들이 김국현이 내놓은 기도처 집을 뜯어다가 월봉리에 18평짜리 초가 교회당을 짓고 1908101일 봉월교회를 세웠습니다. 입석리교회 교인들이 이곳에 봉월교회를 세운 이유는 그들이 월봉리 사람일 뿐만 아니라 실상 1905년 이곳에 정착한 일본인 마스도미 야스자이몽(升富, 이하 승부)의 권유 때문입니다. 승부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세운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장로였습니다. 그는 농장의 농민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유하였고 그로 인해 대부분의 소작농민들이 봉월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승부 장로에 대해서는 정읍지역 교회를 소개할 때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김국현도 월봉리로 이사와 봉월교회에 계속 출석했습니다.
 
설립 이후 봉월교회는 신양교회, 유정교회, 농원교회(현 월촌중앙교회) 등을 개척하는 등 지역 복음화에 주력했습니다. 일제강점기 후반인 1940년경 교인들은 교회 종을 내려 감추었습니다. 교회 종을 징발하러 온 일본 순경들이 화를 내며 교회당 구석구석을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종을 감췄다는 죄목으로 윤동석, 구봉규 장로와 오해석 집사를 구속해 핍박하기도 했지만 교인들은 끝까지 종을 지켜냈습니다. 현재 봉월교회는 지역 친화적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독거노인을 위한 복지관 건축, 학생을 위한 독서실 및 피아노 교습소 운영, 결혼식 장소 무료 대여 등과 같은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봉월교회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면장을 지낸 백봉석 장로의 아들 백영훈 박사가 있는데, 그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독일 에어랑게대학에서 경제학박사를 취득하고 9-10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한국 경제발전에 초석을 다진 인물이었습니다. 현재 그는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 군산 나운복음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다. 현재 전북교회역사문화연구원을 개원하여 호남지역의 교회사와 종교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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