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조선에 가야 하는 이유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선교사
1893년 1월 28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빈톤(C. C. Vinton)의 서울 집에 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를 조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한국 선교를 수행할 수 있을까를 논의했던 이 회의에서 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선교정책으로 공식 채택했습니다.
네비우스(John Nevius)는 1890년부터 중국 지푸에서 선교활동을 한 사람이었는데, 이때 서울에 와서 선교 방법과 원칙에 대해 내한 선교사들에게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강의한 선교 방법 가운데는 다른 교파 혹은 단체들과 상호 선교 협력과 일치의 노력은 하되 선교지역을 분할하여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단 5,000명 이상 되는 도시나 개항장은 공동으로 선교할 수 있지만 그 이하 되는 지역은 한 선 교부가 맡아서 선교활동을 한다는 방침도 정했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지역과 충청도 일부 지역은 미 남장로회가, 평안도, 경상북도, 황해도, 충청북도 그리고 서울과 경기 일부 지역은 미국 북 장로회가,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회가, 경상남도는 호주 장로회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부지역과 강원도 북부지역은 미 남감리회가, 충청남도와 서울과 경기 일부, 강원도 남부지역은 미 북감리회가 맡아 선교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각 선교회가 선교지역을 분할한 것은 불필요한 경쟁을 하지 않고 각 선교회가 독립적, 집중적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여 보다 빠른 시일 내에 한반도의 복음화의 선교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교정책은 오늘날 특정지역에 편중된 교파의 분포와 교파와 지역적 차별성으로 인한 갈등과 분쟁,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선교사들이 하나 되어 하나의 한국교회를 이루었다면 더욱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호남지역의 기독교 선교는 미국의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어떤 선교사는 말을 타고 또 어떤 이는 도보나 선박을 이용해 전라도 지역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질병의 페러다임을 바꾸다
1895년 6월에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 콜레라가 발생하였습니다. 서울에서만 하루에 60여 명씩 죽어갔고, 전국적으로는 5,000명 이상이 콜레라로 사망했습니다. 최초의 발병지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평안도부터 시작된 콜레라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콜레라는 양반, 평민, 천민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하얀 쌀뜨물 같은 설사와 구토를 했습니다. 심하게는 하루에 20리터의 설사나 구토를 했습니다. 자연히 환자들의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고, 그 모습은 미라처럼 변해갔습니다. 아픈 환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환자 못지않게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병을 괴질(怪疾)이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어로는 코레라(コレラ)라고 발음하는 것을 한자로 호열랄(虎列剌)이라고 써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고, 호랑이가 살점을 뜯는 듯 심한 고통을 준다고 하여 흔히 호열자(虎列刺)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이 방역위원장으로 제중원 의사였던 에비슨을 임명하였습니다. 에비슨은 우선 전국에 콜레라를 예방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방을 써서 붙였습니다.
콜레라는 악귀에 의해서 발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균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생물에 의해서 발병됩니다. 만약 당신이 콜레라를 원치 않는다면 균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은 음식은 반드시 끓이고, 끓인 음식은 다시 변질되기 전에 먹기만 하면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콜레라가 귀신에 의해 생긴 병이라 여겨 무당을 불러 치병굿을 하곤 했습니다. 다행히 식수와 음식물을 끓여 먹으라는 방을 본 사람들은 그렇게 실시했고, 그것으로 콜레라의 전염은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습니다.
방역위원회는 격리 수용소를 설치하여 환자들을 격리하였고 방역 계몽활동을 벌였습니다. 이 콜레라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체계적인 방역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이처럼 온 나라가 급박하던 때에 가장 헌신적으로 활동한 의사가 드류 선교사와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선교사였습니다.
이 두 선교사는 서대문 밖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며 예방활동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환자들을 돌보며 한편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는데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어떤 선교사보다 더 열성으로 활동한다는 정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드류와 전킨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이 조정까지 알려졌고, 고종은 이를 매우 고맙게 여겨 그들에게 은제 스탠드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한국의 토양과 기후는 선교사들의 어린 자녀에게는 매우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1893년 8월 4일 첫 아기를 낳았는데 한국의 무더위를 견디지 못해 그만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또한 전킨 선교사에게도 같은 해 봄에 첫 아기 ‘조지’가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18개월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교적 사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남부에서 한반도의 남부로
마침내 전킨과 드류 선교사는 한 팀이 되어 호남지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군산을 향해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레이놀즈 선교사와 함께 군산에서 잠시 선교활동을 했던 드류 선교사가 호남 선교의 교두보로 군산을 적극 추천하고 군산에 호남 선교부를 설치할 것을 주장했던 적이 있었지요. 이에 남장로교 선교회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드류 선교사를 전킨 선교사와 함께 군산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
남장로교회는 1861년부터 일어난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조직되었습니다. 남장로교의 외지 선교사업회가 이탈리아, 중국, 일본, 브라질, 멕시코, 쿠바, 그리스 등의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습니다. 남장로교의 해외 선교사들은 주로 시카고의 멕코믹신학교와 버지니아의 유니온신학교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이미 1885년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 받은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1891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하여서 그해 9월 멕코믹신학교에서 조선선교보고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학교 졸업생인 루이스 데이트(Lewis B. Tate)가 그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다시 10월에는 테네시 주의 네쉬빌에서 전국신학교 해외선교연합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곳에는 언더우드 목사와 벤더빌트대학교에 유학하여 와있던 윤치호가 초청되어 선교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강연을 들은 7명의 남·여 학생들의 가슴에 조선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타올랐습니다. 이들은 서로 알지 못하던 사이였지만 그 후 조선 선교의 열렬한 동지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앞서 소개한 루이스 데이트 외에 유니온신학교의 전킨, 레이놀즈, 존슨 그리고 데이트의 동생 메티 데이트(Miss Mattie Tate, 최마태), 버지니아 아빙돈 출신 린니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버지니아 렉싱톤 출신 메리 레이번(Mary Leyburn) 그리고 역시 버지니아 출신인 펫시 볼링(Patsy Bolling) 이렇게 8명의 청년들이였습니다.
당시 레이놀즈는 중국 선교를, 볼링은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선교의 뜻을 모으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레이번은 전킨을 만나 “당신이 가는 것이면 나도 가겠다”고 하며 부부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언더우드의 강연을 들은 존슨은 아저씨 댁에서 조선에 대한 희귀본 역사책을 발견하여 이 책을 가져와 친구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책을 돌려 읽은 이 젊은이들은 매우 흥분하였고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에 달려가고픈 열망에 사로 잡혔습니다.
이보다 앞서 데이트는 남장로교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 선교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미지의 나라였기에 현재로선 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이 전혀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됩니다. 당시 선교회는 그리스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식을 받고 주저앉은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레이놀즈, 존슨, 전킨은 재차 조선 선교 신청서를 제출하였지만 역시 돌아온 통보는 여전히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할 계획이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들이 찾은 길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모아 조선 선교를 위한 뜨거운 기도를 함께 드렸습니다. 얼마나 오래 동안 했을까요. 그들은 2년을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저기 각 선교부를 찾아다니며 조선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 선교의 열망을 가지고 이곳 저곳 선교부를 찾아다니던 이 젊은이들의 열정과 수고가 결코 그들만의 의지만 가지고 된 일이 아니며,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놀라운 활동이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모두가 반대하는 조선 선교를 마치 골리앗 앞으로 달려 나가던 다윗처럼 담대히 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당시 그처럼 조선 선교를 열망하며 기도하던 그 젊은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그들은 언더우드 목사를 모시고 버지니아, 노스케롤라이나, 테네시 등 미국 각 주의 여러 도시의 교회를 순방하면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기독교 잡지에 원고를 투고하여 기독교 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레이놀즈는 1892년 2월에 「선교」(The Missionary)라는 잡지에 “왜 우리는 조선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가 발표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지금 조선 왕실은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입니다. 현재 조선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강하게 반대할 만한 조직화 된 종교도 없습니다. 현지의 선교사들만으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선교역량을 모두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 조선 선교는 우리와 쉽게 협동할 수 있는 북장로교회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서 각 방면에 호소한 지 2개월여 쯤 지났을까요? 그들은 해외 선교부 실행위원회로부터 “9월에 항해할 준비를 하시오”라는 전보를 받게 됩니다. 할렐루야! 마태복음 18장 19절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 나운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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