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4일 목요일

오늘날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 실천_김회권

 
오늘날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 실천
김 회 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오늘 우리의 주제는 두 가지 질문 속에 함축되어 있다.
첫째, 과거와 달리 오늘의 시대에 요구되는 기독교회의 정치실천은 무엇인가?
둘째, 오늘의 기독청년, 대학생들이 정치에 대해 가져야 할 관심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은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실천이라는 과제를 이해하기에 앞서 답변되어야 할 질문들이다. 이 두 질문에 대한 잠정적 답변부터 제시하고 강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첫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정치적 관점을 깊이 이해한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예수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왕성하게 선포하고 그 복음적 진리를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명확한 정치실천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섬기는 지도자들을 배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확장하여 가는 길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천적인 정치실천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것이다. 기독청년 각 자가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직업생활의 영역에서 왕같은 제사장역할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 정치참여다. 넓은 의미의 정치활동은 모든 직업 및 사회활동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이 강의안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실현에 대한 생각을 네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정치란 무엇인가?
둘째, 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하는가?
셋째, 성경적 정치실천이란 무엇이며, 그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넷째, 정치발전에 대한 기독청년들의 참여가능성은 무엇인가?
에 대한 논의로 구성될 것이다.
 
1.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회의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통괄적으로 조정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정치의 목적은 재화와 용역의 적절한 배분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마찰과 갈등을 최소화하는 데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는 민주주의 정치다. 민주주의 정치는 데모스, 국민들”(세금을 내고 징병 의무를 지니는 자유시민들)들의 이해를 집중적으로 대변하는 정치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들은 단일한 구성체가 아니라 복합적인 계층과 계급을 망라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가리킨다.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적 원리의 하나인 견제와 균형이다. 권력분산을 통한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갖고 민주주의 사회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 계급이나 계층의 자원 및 재화, 용역의 독점욕과 이기심을 억제하고 경계한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원리는 공동체 구성원이 그 가치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신봉하고 수호할 의지로 똘똘 뭉쳐 있지 않다면 부서지기 쉬운 유리잔과 같다.
현실 사회에서 정치는 거의 도덕적 슬럼지대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정치는 비린내나는 이기심과 이익, 탐욕과 각축을 다루는 일이기에 정치가는 도덕적 윤리적 청정상태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정치는 항상 전쟁분위기와 같은 긴장과 적의를 타고 항해하는 배와 같다. 지방선거나 대선을 앞두고 우리 나라는 정치열기로 거칠게 가열되는 양상을 보인다. 아무리 정치에 무관심하려고 해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집안까지 차고 넘칠 수 있는 거칠고 위협적인 정치격랑이 드세게 일고 있다.
최근 우리 나라의 정치도 왕성한 민주주의 정치의 빛과 그림자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치는 각축, 상호비방, 비난과 비판, 야유와 조롱 등 지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게임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이 개인과 집단/계급/계층의 이기심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상호 정쟁과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정치는 진화되어야 할 여지가 적지 않다. 어찌 보면 최근 우리 나라의 정치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는 절차상 더디고 답답한 과정을 거치기도 하고 무리해 보이는 쟁점을 놓고 각축하는 일을 자주 연출한다.
왜냐하면 어떤 정파나 개인도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탐욕과 권력욕, 특권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정치는 항상 시끄럽고 번잡스럽다.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고, 자유와 자유가 대립하는 곳이 정치다. 최고 헌법 기관인 대통령도 자신의 권리주장을 위해서 헌법소원을 낸 판국이다. 이처럼 정치는 시끄럽고 너저분한 하수구 도랑같은 악취를 풍긴다. 왜냐하면 정치는 인간의 거의 억제되지 않는 원초적 집단적 계급적 이기심을 대변하는 전사들의 각축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외양이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환멸이나 실망을 정당화하며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참 태도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미 용인되고 있는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는 개인과 집단(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상호간의 끊임없이 깨어있는 상호감시작용을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정치영역에서의 각축과 경쟁은 이기심의 억제와 권력감시 차원에서는 순기능을 보여줄 때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한다면 정치 또한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각성된 신앙양심에게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정치 분야도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입문해야 할 영역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2. 그리스도인과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 현실과 당위 사이에서-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자체의 도덕적 애매모호성과 열악성 때문에 정치를 신앙적 실천의 영역에서 제외하려고 노력해 왔다. 특히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기독인들의 정치참여가 절실히 요청될 때마다 경건주의적인 정적주의(pietistic quietism)나 예언자적 비관주의(어차피 역사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야 되고 하나님의 불심판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로 도피하여 너저분해 보이는 현실정치를 강 건너 불 보듯 하였다. 그나마 이런 소극적 불참은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에 아부하고 결탁되어 가장 나쁜 형태의 정치참여를 실행해 온 보수주의 교회의 행태에 비하면 한결 낫다. 무조건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과 결탁하는 것은 그 세력이 옳건 그르건 간에 항상 조심해야 할 정치참여다.
물론 가장 나쁜 정치참여는 악한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의 정치원리를 저버리는 경우다.
우리가 오늘 주요 과제로 설정한 것은 경건주의적 정적주의에 빠져 정치의 중요성을 몰각하고 있거나 세상 정치에 무관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정치에 연루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는 더럽다고 피해갈 영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양심과 고상한 윤리, 영적인 권세와 선교열정이 과시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창조시 주셨던 문화명령에 대한 순종의 일환으로 정치에 참여하여야 한다. 창세기 1:26-28(2:15)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고 피조세계를 다스리라고 명령하신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다스리는 일, 에덴 동산을 관리하고 지키는 일은 아담에게 본원적으로 부여된 사명이다. 여기서 다스리는 일이 아담의 원초적 사명이다. 아담은 동물들의 세계(야수성, 본능성)를 다스려야 할 사명이 있다. 정치는 인간 안에 내재된 동물스러움을 다스리는 일이 아닌가? 따라서 정치는 잠재적인 무질서와 혼돈세력을 다스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해야 할 사명 수행의 일환인 셈이다. 모든 직업 활동이 이런 넓은 의미의 정치참여다.
둘째, 아담의 범죄로 이 세상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땅으로 돌변하였다. 인간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죄인인 인간은 다른 죄인들의 최악의 타락사태를 막기 위하여, 정치에 참여하여야 한다. 야수적 본성이 충돌하는 정치현장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의 정치는 인간들이 더 나쁘게 타락하지 못하도록 막는 억제와 정죄기능의 율법 역할을 하는 셈이다. 공권력을 가진 국가나 정부의 공무원으로 취직하는 것은 이런 의미의 정치참여다. 정권 획득이나 유지를 위한 파당적 정당활동만이 정치참여가 아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참회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활동에 참여하여야 한다.
셋째,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를 위한 도구로서 정치활동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 때 정치권력 획득 과정에 참여하기 위하여 선거에 참여하는 것, 피선거권자가 되는 활동 등이 전문적인 의미의 정치참여로 간주된다. 이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현실 정치를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근사치적으로 수렴하는 정치적 실천에 투신하여야 한다(비스마르크의 조롱: “나는 산상수훈처럼 정치할 수 없다.”).
 
이런 삼중적인 의미의 정치참여의 모본을 보이신 분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실천의 전범(典範)이 된다.
 
3. 성경적 정치실천이란 무엇이며, 그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실상 우리가 주()와 스승으로 섬기고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가 당대의 정치적 갈등과 분쟁의 한 복판에서 격랑을 일으킨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상 권력과 정치에 대한 근원적 공격이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인간의 정치의 소멸을 가져오기 때문에 모든 세상 권력자들은 거의 필사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저항한다(정사와 권세, 보좌와 주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통치로 세상권력에 희생당하고 죽임 당한 사람을 구출해 내는 대항정치운동이었다. 마귀의 권세에서, 질병의 권세에서, 그리고 악한 율법체제와 억압적 종교체제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해 내어 하나님의 영의 자유 속으로 초청하려는 운동이었다.
예수의 공생애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확산시키는 운동으로서 당시의 주류 정치세력들의 통치 정당성을 빼앗아가버리는 아주 위험하고 거룩한 도발이었다.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면 외칠수록 세상 나라들의 권세는 쇠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그의 대적들은 원래 서로 적대적인 원수 사이였으나 "예수"라는 엄청난 하나의 공공의 적을 대면하고서 동지처럼 단결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운동은 당대의 권력자들과 지배세력들과 충돌하였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 소식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다"는 예수의 선언은 하나의 중립적인 사실을 알리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거짓된 왕들을 보좌로부터 끌어내리는 정치운동이요, 앙시엠레짐(구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장로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헤롯당, 열심당원, 사두개인, 로마 총독부 등의 집중적이고 통일된 저항과 박해를 초래하게 된다. 이 여섯 개의 정파들과 집단들은 원래 각각 사이가 나쁜 세력들이었으나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는 한 패거리가 되었다. 예수님은 온순한 인격과 얌전한 매너(예수님에게서 기대하는)로 그들의 적대행위와 저항을 넘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대적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한결같이 권력의지의 화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종교와 정치의 권력의 힘에 의지하여 사람을 지배하고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세력들이었다.
이에 비하여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권력의지의 영원한 포기였다(2:6-11). 자신을 위한 권력을 영원히 포기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권력의지의 포기는 유대 광야에서 마귀와 백병전을 벌일 때 이미 실현되었다. 마귀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세에 정의는 특별한 권능의 남용, 특별한 보호의 향유, 그리고 부귀 권세 영화의 독점을 의미하였다. 모든 지상의 세속권력은 이 세 가지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부당하게 행사되는 지상 권력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왜냐하면 마귀의 본질은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세속적 권력자들은 빼앗길 때까지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지는 못한다.
권력의 마귀적 속성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통제하는 일은 12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조종하는 것처럼 현기증 일으키는 고난도의 기술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권력포기와 비움의 길이다. 유대 광야에서 40일간 굶주리면서 하나님 아들, 즉 메시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직접 시험하였다.
여기서 시험의 본질은 권력을 휘두르는 메시야(카리스마, 기적 능력, 특권적 권능 호소형 메시야)가 될 것인지 아니면 비권력적 메시야가 될 것인가를 결정짓는 시험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가? 마귀와 예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정의가 다르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특혜적 권능과 권력을 휘두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예수님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됨은 굶주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여 복종함(복종함으로 원기를 얻음), 특혜 대신 비특권적 겸손, 그리고 부귀영화권세 대신에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위한 자기희생(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김)을 의미하였다. 예수님에게 아들됨은 배타적인 충성심이었다. 여기서 그의 일생을 특징지운 예수님의 신적 겸손과 자기비하가 시작된다. 마귀에게 절하지 않은 결단이 그로 하여금 권력자형 메시야의 길 대신에 수난과 모욕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메시야가 되게 하셨다.
 
이전부터 우리나라는 엄청나게 높은 도덕적 수준과 국민의 힘을 무섭게 자각하는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다. 이제 권력이 특권과 반칙적 혜택과 탈법적 권위남용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추세다. 앞으로 세계는 민주주의 단계를 지나 예수 그리스도적인 기준에 못 미치는 자들을 정치 모리배요 협잡꾼 혹은 마귀의 꼭두각시로 금방 식별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마귀적 지도자와 참 지도자를 지혜롭게 분멸하는 메시야적 백성 공동체도 나타날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는 정쟁과 권력투쟁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정치의 빛 하에서 분석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을 빼앗기도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도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비권력적 섬김이야말로 예수님의 섬김 지도력에 접근하는 지도력이다. 권력의 정상에서 자신을 냉정하게 살피고 엄격하게 다그치면서도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멸사봉공하는 지도력이 출현할 때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분투하여야 한다.
많은 권력자들이 권력의 전성기에서 낙마하고 추락한다. 권력의 마귀적 속성에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권력의 기만적 속성에 대책 없이 당한다. 권력의 마귀적 속성에 깨어있는 사람은 권력을 봉사의 도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악한 지도자들과 부패한 왕후장상들이 정치권력의 정점에서 앉아서 멍한 상태에서 겪는 마귀의 시험을 예수님은 유대 광야 모래 바람 맞으며 감당하신 것이다. 자기비하의 힘으로 마귀를 이겨냈다. 겸손의 힘으로 마귀를 결박하였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머문다. 예수님의 말의 위력의 그의 극단적인 겸손과 자기비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공생애 동안 내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그의 권력의지의 포기에서 용솟음치는 말씀과 겸손한 섬김행위 속에서 치료의 능력을 방출하였다. 유대 광야에서 마귀(권력의지)의 시험을 이긴 예수님이 골고다 십자가상의 마귀의 조롱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모든 권력자들이 예수님의 자기비하와 자기 비움의 결단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선포가 그리스도인의 핵심적 정치참여인 셈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권력포기를 구현하는 지도자들이 섬기는 정치가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4. 정치발전에 대한 기독청년들의 참여 방법은 무엇인가? - 섬기는 지도력의 배출을 통한 한국교회의 정치참여
이제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방안을 생각해 보자. 모든 그리스도들에게 기대되는 정치실천은 두 가지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전도 활동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섬기는 리더로서의 헌신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외에 비상시국이 아닌 한(독일 나치하 혹은 일제 치하) 정치권력을 획득할 목적을 염두에 둔 채 한국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특정한 정치활동을 벌여서는 안 된다. 다만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부름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상생활 및 직업영역에서 섬기는 리더의 삶을 살아야 한다. 결국 한국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길로서 앞으로 더 많은 전문적 연구가 필요한 분야가 지도력 양성 및 배출 분야다. 그래서 요즈음 생각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심각한 화두(話頭)어떻게 하면 성경적인 지도자 혹은 지도력을 발굴하고 배출할 수 있을까?”이다.
리더란 일정량의 권한과 권위를 위임받아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지도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리더는 자신의 지도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다. 가정의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종업원을 거느리는 가게 주인, 교사, 공무원, 조직과 위계사회에서의 각 단위의 책임자, 장관, 그리고 대통령 모두가 리더다.
위임받은 권력과 권한()의 크기와 범위가 차이가 날 뿐 위에서 열거된 모든 사람들이 리더다. 리더는 자신의 권한과 권위()의 한계 안에서 자신의 지도력(방향 定位)을 발휘하여 조직 혹은 공동체가 합의한 목표를 성취시키는 촉매자 역할을 감당한다.
모든 리더들은 제한된 권위와 권력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일정량의 권위와 권한을 부여한 조직/혹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평가와 감시에 늘 노출되어 있다. 지도자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타당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그 지도자에게 권한과 권위를 위임한 조직/혹은 공동체가 우선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검증 장치가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단위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위임된 권력과 권한을 초월하여 과잉 지도력을 발휘하려는 유혹에 시달린다.
과잉 지도력은 대부분 지도자 자신의 관심과 이익을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관철시키거나 추구하려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반()유기체적이고 반()공동체적인 현상이다. 자신이 위임받은 권한과 권위 경계 너머까지 지도력을 발휘하려는 지도자는 지도자의 범주를 이탈하여 소위 지배자가 되려는 사람들이다.
지배자는 지도자가 부패하고 타락한 경우 출현하는 권력강제자(power enforcer)이며 권력남용자(power abuser). 성경의 오랜 전통에서 보면, 하나님의 권한과 권위를 위임받은 지도자들(, 방백,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은 하나님의 상시적(常時的)인 감시와 감찰 앞에 벌거벗은 존재처럼 노출되어 있었던 존재였다. 전제 왕권을 휘두르던 왕들도 하나님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파견된 하나님 나라의 전권대사인 예언자들의 탄핵과 비판 앞에 전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왕상 22; 7:10-17).
한국교회가 지도자를 배출하려고 투신할 때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지도자는 하늘이 낸다는 운명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문제다. 실상 하늘이 내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리더는 훈련과 오랜 교육, 연단과 실습을 통해 양성되는 산물인 것이다.
 
1. (1) 과연 지도자는 과연 하늘이 내는 것일까?
우리 나라는 지도자 복이 없다는 탄식어린 말을 자주 듣는다. 사실 돌이켜 보면, 2,000년 역사 동안 우리 나라에 자랑할 만한 지도자가 많지 않았고, 현대사 반세기 동안에는, 더더욱 민족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지도자가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많은 경우 민족적 지도자로 등장했던 사람들이 악명높은 지배자로 단죄되며 역사의 무대로부터 퇴장당하곤 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우리는 우리 나라를 국민들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세계 공동체의 발전에 창조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내는 데 쓰임받을 만한 지도자들을 거의 갖지 못하였다. 왜 우리는 긴 역사에 비하여 민족의 사표와 귀감이 될 만한 지도자적인 인물들을 갖지 못하였을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운명주의적인 세계관이 그 중의 하나라고 본다. 그 동안 국가적 사표가 될 만한 지도자가 등장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지도자란 하늘이 낸다는 식의 막연한 운명주의적 세계관이 우리 국민들의 의식을 지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향도(嚮導)할 지도자적인 인물들이 하늘로부터떨어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그런 지도자적인 인물들을 미리 발굴하고 길러낼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한 시대를 넘어 통할 수 있는 깊은 경륜과 세계적인 안목을 갖춘 지도자는 갑자기하늘에서 떨어지는 방식으로 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지도자를 길러내는 시대, 즉 우리 시대의 중심과제를 능숙하게 다루고 한 시대를 앞서가는 영적 경륜을 구비한 지도자들을 주문생산(注文生産)해 내야 하는 시대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경륜과 실력과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구비한 지도자는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생산되지 않고 가내 수공업적인 생산 양식으로 양성된다. 지도력은 이상적인 모범을 통하여 모방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도자 배출은 가내수공업적인 수작업(手作業)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그것은 시간과 정성이 투입되는 공정(工程)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적인 공평과 정의가 정착된 공동체를 창조하고 운영할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투신하는 인재양성소가 되어야 한다. 이사야 58:12은 이런 비전을 고취시켜 준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이사야 58:12). 한국교회는 오랜 역사 동안에 걸쳐서 파괴된 기초(“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다시 쌓고 무너진 데를 보수하며 인적이 끊어진 황무지를 사람 살 만한 땅으로 만드는 일에 투신하는 기관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럼 역대의 파괴된 기초란 무엇인가? 역대의 파괴된 기초란 민중수탈형 엘리트가 국가 및 사회의 중심기관을 장악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현장을 의미한다.
민중수탈형 엘리트는 자신의 출세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부귀영화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때나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비하여 악하고 어그러진 지도력의 최대 피해자들은 권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할 만한 조직력도 어떤 언로(言路)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릇된 지도자들이 만들어내는 권력강제와 권력남용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민중수탈형 엘리트의 역사를 끝내고 목민애중형(牧民愛衆型)(민중을 섬기고 무리를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겨레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비젼(vision)에 투신하여야 한다. 목민애중형 지도자들은 자신의 출세와 권력을 무리들(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고 권력을 비절대화하고 그것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을 축소하고 부정하는 지도자들이다. 이런 지도자들은 마치 화학원소 운동에서 에너지 준위가 더 큰 궤도를 돌던(K, L 궤도) 원소들이 에너지 준위가 작은 궤도로 진입하면서 열과 빛을 발산하듯이(자기부인/자기축소의 결과),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축소시킴으로써, 일종의 구원 에너지를 방출한다.
 
 
2. (2) 성경적인 지도력의 근거와 자기 제한-사사(師士) 시대에서 왕정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성경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신정통치)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지도력을 대행하는 대리자다. 한 공동체의 성장과 번영에 결정적인 조타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사무엘상 8-12(8:6-18)에는 인간 왕정이 시작되는 경과가 소개되고 있다. 인간 왕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등장하기 전에는 사사(師士)”라고 불리던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지도력을 행사하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다. 하나님은 사사(師士)”라고 하는 아주 제한적인 권위만 행사하는 지역지도자들을 통하여 신정통치를 실행하셨다. 이런 사사와 달리,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상대로 징병과 징세를 강요할 수 있는 전제적(專制的) 지배자로서의 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왕이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위협하는 존재로 소개된다(삼상 8:6-18[특히 11-18]; 삼상 12:12-13).
 
11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12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13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14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6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 8:11-18)
 
사무엘은 자신과 같은 순회 지도자(사사)에 비하여, 인간 왕은 거의 전제권력을 소유한 지배자로 발전될 위험이 있음을 알린다. 하나님께서도 인간 왕정은 신정통치의 이상을 배척하는 것이며 중앙집권적 권력을 행사하는 인간 왕의 출현은 신정통치의 이상-제한적인 권위와 권력을 위임받은 사사의 다스림에 비하면-을 거부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6-7).
그래서 특히 신정통치의 이상(理想) 대신에 등장한 인간 왕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징발한다는 점이 부각된다. 궁궐을 유지하기 위한 인력동원,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광범위한 물자징발은 사사시대의 신정통치적인 이상에 비하면 엄청난 재앙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가장 역설적인 음조로 들리는 말이 18절이다.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점이 바로 모든 인간 지도자들을 세울 때 야기되는 항구적(恒久的)인 위험요소다. 옛날 사사들에 비하면 인간 왕은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 권위를 위임받은 전시(戰時) 대비 지도자였기 때문에 지배자로 변질될 가능성이 많은 존재였다(삼상 8:19-20; 삼상 12:14-15). 이런 전제권력을 행사할 지도자의 출현이 이스라엘 사회에 끼칠 악영향을 사무엘 선지자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왕정이 도입된 이후 이스라엘의 왕들은 권력남용과 권력강제를 통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유혹 앞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신하는 과도기적 피위임자(被委任者)들임에 불과하였지만, 일단 한 번 선택되자마자 그들의 위임받은 지도력을 전제권력으로 변질시킴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백성들의 우환거리가 된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지도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지도력 행사의 실패 때문에 야기된 온갖 시련과 좌절에 직면하고 있다. 돈과 권력남용, 도덕적 및 윤리적(성적인 부패) 부패 등으로 세계의 지도자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참된 지도자와 참된 지도력을 갈구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때가 될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어쩌면 그들의 우환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지도자들을 뽑는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일반 사회에서도 통할 수 있는 지도력의 전범(典範)을 성경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보편적인 지도력은 어떤 것일까?
 
3. (3) 성경적인 지도력의 전범(典範)으로서의 메시야적 지도력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일관되어 흐르는 이상적인 지도력은 메시야적인 지도력이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예수가 행사한 지도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혹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다. 메시야(그리이스어로 메시야가 그리스도로 번역)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도 예수의 중심 메시지는 메시야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친정(親政)통치 시대의 도래였다.
예수님은 메시야인 자신을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주제아래 종속시켰기 때문에, 즉 그 만큼 자신을 감추고 부인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신약의 사도들은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 철저하게 복종시킨 그 나사렛 예수가 구약시대가 그토록 오랫동안 예언하고 고대해 오던 메시야임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이상왕(메시야)의 관점에서 인간 왕들(지도자)의 통치행위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예수님은 인간 왕에게 위임된 지도력이 필연적으로 지배력(권력남용과 권력강제)으로 변질된 점을 직시한다.
예수 당시의 세계는 로마제국의 가이사(Caesar)의 권력(공포, 권력, 폭압)강제와 권력남용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좀더 국지적으로 보자면, 팔레스틴은 헤롯 가문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권력강제와 권력남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모든 단위의 인간 왕(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권한사용의 한계를 넘어 권력남용과 강제적인 사용에 경도되었음을 간파한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이런 권력남용과 권력강제로 특징지워지는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표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스승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도외시한 채, 영광중에 인자의 나라(메시야의 나라)가 임하면, 왕이신 예수님의 옆자리에, 즉 큰 자리에 앉으려고 각축하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예수님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섬기는 지도력의 본질을 가르치신다.
예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곧 하나님 나라가 영광과 권능 중에 임할 때, 즉 예수가 왕으로 등극할 때, 자신들을 왕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청탁하자, 10제자들이 격분한다. 이내 제자공동체는 누가 크냐?,” “누가 왕이신 예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을 것인가?”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 이 다툼의 상황 속으로 예수님이 끼어든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 자신의 지도력, 즉 섬기는 지도력(牧民愛衆型 지도력)의 본질을 보여준다.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35-45)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표현은 예수님은 당시의 로마제국과 헤롯 가문의 통치 본질을 권력강제적 통치(kata-kurieuaw[임의로 주관])와 권력남용(kata-exousiazaw[권력 남용])이라고 정의하는 장면이다. 41절의 소위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라는 표현은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다. 원전의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다: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예수는 권력강제와 임의주관(권력남용)을 통하여 지배하는 사람들은 소위(순전히 외견상의) 집권자들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실제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즉 다스리지 못한다. 그들은 강제로 지배하고 억압적으로 내려 누를 뿐이지, 마음의 승복이나 복종을 얻어내지 못한다. 예수는 자신이 대안적인 지도자라는 자의식을 공적인 맥락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다. 예수는 에스겔 34장의 빛 하에서 자신을 선한 목자(“자신이야말로 선한 목자라고 규정한다.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0-15).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그가 목자없는 양같은 무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기를 자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마가복음 6:34). 결국 예수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주장하는 성경적인 맥락을 이해하려면, 에스겔 34(특히 2-24)을 살펴보아야 한다.
 
2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5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6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8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9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찌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1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2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13 내가 그것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14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1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찌라. 16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찐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22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같은 무리들에 대하여 애끓는 연민과 긍휼을 느꼈다. 법과 체제 바깥으로 밀려난 자, 그 당시 정치-종교 기존체제 안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채 방치된 대중들, 그들이 예수님께 흡인된 무리였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선한 목자로서의 감수성을 불러일으켰고 예수는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의 다스림 안으로 초청하였을 때, 이미 그는 하나님 안에서 이미 구원을 누린다고 주장하던 종교적인 지배세력과 충돌한다. 예수는 무리들의 질병을 고쳤고 그들을 점령한 귀신들을 축출하였고 그들의 문드러지고 훼손된 존엄성을 회복하였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뜻한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넘치는 애찬의 식탁으로 초청하였고 그들과 기꺼이 한 통속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은 권력강제와 권력남용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사랑어린 돌보심(loving care)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지도력은 선한 목자의 지도력이다.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같은 민중들을 위하여-자기의 인권과 권리를 지킬 수 없는 체제 밖의 사람들-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던진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라는 말은 전투적인 이미지가 있다. 에스겔 34장에는 악한 목자, 거짓 목자, 삯군 목자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양은 수탈의 대상이다. 초식동물인 양을 육식동물인 늑대들과 사자들이 잡아먹으려고 덤벼들 때 예수님은 초식동물을 지키신다. 예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육식동물들은 식성을 바꾸어야 한다. 예수님은 육식동물을 초식동물로 변형시킨다.
예수님의 권능과, 놀라운 지혜의 말씀과 성경해석, 그리고 병자들과 어린아이들, 여인들, 이방인들에 대한 자비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왜 예수님은 그 시대의 권력강제와 남용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던 지배자들과 그토록 달랐을까? 빌립보서 2:5-11은 예수님의 지도력의 진정한 근원을 보여준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는 철두철미 자신(메시야 비밀)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친정통치만 선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진실로 하나님 아버지를 완벽하게 대표하고 대신한 메시야임을 증명하였다. 신약의 사도들은 예수의 공생애 선포와 십자가의 죽음 사건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축소시키고 부정한 그 모습이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입증한 사건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예수가 반역한 천사들의 세계, 즉 영적인 세계에 대한 통치권까지 구사하게 된 근거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한없이 낮춘 메시야, 그리스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a man after God's heart)였다. 그는 첫 아담과 달리 하나님과 동등됨을 강탈할 그 무엇으로 간주하지 않고(something to be robbed/grasped),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곧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의 길은 자기비움, 권력의 비절대화였다. 소위 집권자들은-겉으로 볼 때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권력강제자들, 임의주관자들임-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강제로 움직이려고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완벽하게 낮춤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다.
성경적인 지도력이란 희생과 섬김을 통한 지도력이다. 지도력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통하여 시범을 보이는 것이다. 산상수훈이라는 말은 실천하여 시범을 보이면서 가르쳐주신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자신을 비워 종의 도를 실천하는 지도력을 유산으로 남기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을 극대화하였고, 하나님은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크리스챤 지도자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자적인 품성을 구현하는 지도자다.
 
4. (4) 소결론: 예수는 믿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모방의 대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모방의 대상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 세 가지 의미는 (1) 의존 (2) 사랑 (3) 모방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의존할 뿐만 아니라 예수가 걸어간 길이 궁극적인 진리임을 믿고 그를 모방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왕적인 지도력을 모방하도록 초청받은 사람들이다. 특별히 지도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세 번째 의미가 중요하다. 크리스챤 지도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오로지 예수의 섬기는 지도력을 모방함으로써만이, 세상의 잘못된 지도력 관행(권력강제와 권력남용)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다. 또한 자신을 종으로 낮추셨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자신을 낮추는 크리스챤 지도자들은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구원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추후적 성찰
* 모든 전제(독재)권력 행사자들은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위협하는 난입자들이다.
* 하나님의 신정통치의 현실적인 양태는 지역, 마을 자율주의적 사회다. 강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자가 필요없는 사회다. 사랑의 법이 지배하는 고도로 성숙한 자율적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친정통치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사회다.
 
 
<참고도서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예언자들, 이현주 역(서울: 삼인, 2004)
레오나르도 보프, 주의 기도, 이정희 역(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윤종석 역(서울: 복있는 사람, 2002)
쟈크 엘룰, 뒤틀려진 기독교(서울: 대장간, 1998)
찰스 링마, 행동하는 신앙인을 위한 자크 엘룰 묵상집,
윤매영 역(서울: 죠이선교회, 2004)
라인홀드 니이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이병섭 역(서울: 현대사상사, 1977)
Richard J. Neuhaus, The Naked Public Square(Grand Rapids, IN: Eerdmans, 1984)
Jim Wallis, The Soul of Politics(New York: Orbis Pr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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