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9일 화요일

교회, 기적을 만들어가는 공동체_최종원



교회, 기적을 만들어가는 공동체
- 2019 VIEW 가을 졸업생 환송회 메시지

1.
‘모든 중세사가는 교회사가’라고들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중세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이니 중세역사와 교회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다만, 저 같은 중세사가는 그 시대 속에 존재했던 하나의 제도로서의 교회를 탐구한다는 면에서 신학적인 접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달리 얘기하자면,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제도에 우선하는 특별한 의미를 교회에 부여하거나, 신적인 가치를 지닌 기관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제 수업을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시겠습니다만, 저는 교회란 기본적으로 전통과 교리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보수적인 조직이며,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근대에 최적화된 근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혐오와 배제의 아이콘 마냥 되어버린 개신교의 현실에 여러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전긍긍 속앓이를 하지요. 하지만 다원화된 사회에서 생성될 수밖에 없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단일하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근대성의 명제로 환원하여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워 대응하고자 하는 한, 한국 교회에 대한 전망은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면 상대적이라고 펄쩍 뛰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전 것이 무너지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필연입니다. 고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도 교회의 역사는 무너지고 세워짐의 연속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교회 구조나 심지어 신학의 뼈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이런 시각으로 진단하는 것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들을 짚어준다는 점에서 신선할 수도 있으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적잖이 불편함을 느낍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우기 보다는 흔드는 것이 아니겠냐는 우려가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교회론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오늘은 VIEW에서의 학업을 마무리하고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교회를 전망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할 분들에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교회란 무엇인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2.
저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거나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하자”와 같이 교회를 정체성 혹은 본질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치 교회에서 한때 이상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오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단코 그런 시절은 없었습니다. 유럽에서 교황의 힘이 정점을 찍고 가톨릭 체계가 완성된 장기 12세기나 종교개혁 이래 프로테스탄트 시스템이 정착된 17세기를 역사에서는 다름을 틀림으로 옥죄는 이단이나 마녀사냥이 활발한 탄압사회(persecution society)의 형성기로 봅니다. 종교가 정체성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면 반드시 다름을 억압하는 폭력을 낳았습니다. 제도화된 종교가 피해갈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질문이 나오게 되겠지요. 종교의 속성이 그러함에도 제도교회가 두 번의 천년을 넘어 유지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에 대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제도나 교리를 체계화하고 붙드는 것이 교회의 핵심이 아니라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질문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물론 거창하게 교회론이라고 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제게 교회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다소 모순적인 곳입니다. 결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에 대한 지향을 포기할 수 없는 곳 말입니다. 시대의 주류 교회가 어떠한 길을 걸어왔건,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 무엇인지를 품고 시대에 거슬러 교회가 지녀야 할 가치에 천착해 온 공동체 말입니다.

그 점에서 교회란 기적을 '만들어가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그 이데아가 현실에서 구현된 사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수 많은 기적 중 단 일곱가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각각의 기적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5장의 베데스다 못가에 찾아가셔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셔서 베데스다 못가를 방문하셨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 안에 많은 불치병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자비라는 뜻이 무색하게 베데스다 연못은 병든 사람들이 제한된 기회를 잡고자 무한경쟁 하는 불안과 염려가 상존하는 곳, 바로 인간사회의 축소판입니다.

예수님이 명절에 그 베데스다에 가셨다는 것, 그리고 그 곳에서 아마도 가장 절망으로 보이는 38년 동안 병으로 앓고 있던 사람을 주목해 고쳐 주셨다는 것은, 평범해 보이지만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이며, 교회가 이룰 수 있는 기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에베소서 1:23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명절에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으로 가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서 있어야 할 곳이 바로 병들어 아프고, 소외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속한 세상을 외면하고 내세나 타계를 지향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사회에 찾아가신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 속에서 가장 희망을 볼 수 없는 자에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역할일 것입니다.

3.
제가 말하는 것과는 다소 다른 의미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기적을 만드는 공동체’라는 자의식이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곡되어 오늘 교회는 가장 빨리 남을 제치고 연못 속에 들어가는 것을 학습하는 공간인양 변질되었습니다. 입시철을 앞두고 11월이면 한국에서 한창이라는 입시생을 위한 기도회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교회에 오니 병 낫고, 물질의 축복 받고, 자녀가 성공했다는 간증의 또 다른 변형입니다. 다들 교회와 기도하니 베데스다 연못가에 물이 움직일 때에 일등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자녀들이 입시에 성공하는 체험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오해하는 것이고, 기적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너머가 있음을 알게 하고, 그 너머를 지향해야 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한경쟁의 베데스다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를 전복하는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교회가 만들어 낼 기적입니다.

우리는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기적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사용할 때의 쓰임새는 조금 다릅니다. 흔히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돕기 위해 희생한 사례, 초월의 인간애를 기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진정한 기적이란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본성인 이기심을 거스르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기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치유이건, 물질이건, 축복이건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적이 아닌, 주술이고 미신입니다.

정말 큰 기적이 무엇일까요? 서로 다른 문제를 안고 있는 병자들이 베데스다와 같은 경쟁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살면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가장 소외된 자, 가장 낮은 자를 서로 보듬어 주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평화로울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기적을 꿈꾸는 공동체는 공동체와 사회의 가장 작은 자, 가장 대접 받지 못할 자,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두고 다가서는 공동체입니다. 나와 우리의 이기심과 이익, 욕심에 매몰되지 않고 타자를 지향하는 것이 기적을 만들어 가는 첫걸음입니다. 기적은 나를 위한 뭔가를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나를 넘어선 공동체를 지향하며 함께 가꾸고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4.
역사가 주목하는 교회의 변곡점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 나왔습니다. 율법과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교에 토대를 두었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른바 이방인들을 차별 없이 맞아들이기 위해 율법과 할례라는 제도종교의 핵심적인 틀을 포기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근친상간이나 식인을 행한다는 오해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중세 시절, 교황의 세력이 무소불위로 커지고 십자군이라는 광기로 나타났던 그 교회를 성찰하도록 해준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모든 재산을 버리고 청빈을 추구하는 각성 운동을 일으켰던 ‘작은형제회’라는 수도회였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형성의 비극인 노예무역 역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각성한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으로 폐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적같은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바라보고 준비하고 헌신한 이들이 만들어 간 결과입니다.

교회가 기적을 일으킨 사건으로 기억할만한 역사의 사례들은 교회가 교회밖의 타자, 이방인, 나그네에게 관심을 전환할 때였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멈춰 서서 교회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존속을 위해서는 이같은 기적이 필요해 보입니다. 실상 전방위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배제와 혐오를 실천하고 있는게 교회인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때로 우리 무릎의 힘을 빼 놓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고 구현할 수 없는 이데아 속의 기적을 여전히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많은 과오로 이 땅에서 사라졌어야 마땅했을 것 같은 그 교회가 이기심을 내려놓고 타자를 용납하는 기적을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기적은 얼마나 냉철하게 본질 앞에서 성찰하고 방향을 잡아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게 기적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기적은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배제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우리가 가꾸고 만들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적은 문제의식을 가진 개개인이 마음을 모았을 때 성취될 수 있는 필연의 사건입니다. 그 전제는 낙심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포기할 수만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기적을 준비해야 하는 한 가지 당위가 우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는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인간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기적 위에 세워졌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와 마지막 모임을 하게 된 모든 분들이 VIEW에서 함께 한 경험을 안고 한국 교회의 기적을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동역자로 더욱 든든하게 서 가시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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