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벗자!
-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가
1. 일상이 거룩해야 하는가?
본래 사람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에 대한 경외감이 있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역사에서 범인을 넘어선 성인을 만들고 그들을 기리는 이유이다. 같은 맥락에서 세속 사회에서도 영웅을 만들고 그들의 삶을 기념한다. 적어도 사후에 평가가 이루어지고 나서 존경 받는 것이야 그들의 삶 자체가 증명한 것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치자. 사람들은 죽은 자만을 성인으로 받들지 않는다. 이 땅에 살면서 범인의 삶을 초월하는 사람들을 본받고 싶고, 그들의 말에서 삶의 해답을 찾고자 귀 기울인다. 그래서 삼천 배를 하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사람들은 기를 쓰고 성철 스님을 만나고자 했었다.
그 결과 신앙의 높은 경지란 일반 대중들은 도달할 수 없는 고귀한 종교 엘리트의 것이 되었다. 이 분리가 가속될수록 종교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게 된다. 신앙은 일상의 영역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 되어 버린다. 하루 7시간 기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는 분, 24시간 예수만을 바라보고자 한다는 분 등 범인의 수준을 넘어서는 이들은 때마다 나타났다.
불온하게 표현하자면 삶이 종교에 삼켜져 버렸고, 사람들은 종교에 강박을 갖게 되었다. 내부에서는 경건이라고 부르나 외부에서는 엄숙주의라고 부른다. 일상이 거룩해야 하는가?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세상에 나가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것, 이것이 거룩인가? 주일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위선이라 비판하고, 나머지 6일도 주일처럼 살아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나머지 6일도 주일처럼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은 더 큰 위선이다. 물론 그 의도를 이해하긴 하지만, 6일의 삶에 통념적인 거룩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상의 거룩이 무엇일까? 매일 새벽 기도를 하거나, QT를 하거나, 성경공부로 일주일을 보내어 주변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다는 식으로 암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주일의 위선의 주중의 연장일 뿐이다. 오히려 일상의 거룩이나 영성은 일상의 타인과의 부딪침 속에서 그들에게 관심 갖고 베푸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주일은 그러한 삶에서 오는 수고와 피로를 안식하고 서로 격려하고 재충전하는 축제여야 한다.
2. 근대, 놀이의 죽음
<중세의 가을>과 <에라스무스 전기> 등으로 잘 알려진 요한 후이징가 (1872-1945)는 1, 2차 세계대전의 격동기를 몸으로 살아낸 네덜란드 역사가이다. 중세사가였지만 그는 양차대전의 격랑 속에서 과학과 진보에 대한 맹신이 우상화되어 비판적 성찰 능력을 상실한 당대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호모 루덴스 (유희의 인간)>에서 산업혁명을 거치며 생산성 향상을 위한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고발했다. 후이징가는 모든 문명은 놀이 정신이 없을 때 존재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인간성을 상실시키며 쌓아올린 근대 문명의 결과를 비극적으로 전망하였다. 그는 중세의 민중문화가 담보했던 놀이의 가치를 재해석하였고, 고대의 놀이문화를 재발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본래 그랬다. 고대의 모든 종교 제의는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놀이 한 마당이었다. 실제로 중세에서 문화로 자리잡은 종교는 각종 축일 등을 제정하며 민중의 놀이문화와 함께 발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유희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와 예배하는 인간인 호모 아도란스 (homo adorans)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종교는 축제였고, 예배는 놀이였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직 중심의 엘리트 문화가 지배하였지만, 자연스레 엘리트 문화와 다른 대중문화가 보편 교회의 전통 안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 중세는 일관된 종교성이 강제되기 보다는 서로 다른 종교 문화들이 지역별, 신분별로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이 느슨한 종교적 실천은 도전 받았다. 개별 국민 국가가 종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함에 따라 종교는 국가의 통치의 효율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개별 국가들에서 독자적인 예배의식과 교리를 만들어냈다. 스콧 헨드릭스를 비롯해 종교개혁기를 연구하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16세기를 재기독교화 (re-Christianization)라는 시각에서 접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관점에서 종교개혁을 보면 전형적으로 국가주의와 근대성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청교도 목회자들과 대중들 사이 종교 실천을 둘러싼 계급갈등이 그 한 사례이다. 잉글랜드 혁명 이후 청교도 목회자들이 주일 오후 대중들이 즐겼던 맥주 파티 (church ale)와 축구의 관습을 금지시켜 반발을 샀다. 대중들은 국왕 제임스 1세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청원하였고, 국왕은 <스포츠의 서 (Book of Sports)> (1617)를 반포하여 대중들에게 주일에 즐길 수 있는 문화 활동을 정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대중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조치로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내에서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종교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분리주의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이 개신교 전통이 자리한 지역의 대중들은 엘리트가 부과하는 강화된 신앙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불면증의 문화사>를 쓴 뉴질랜드 역사학자 서머스브렘너는 구원과 금욕에 대한 칼뱅주의의 강조가 근대인들에게 종교의 강박으로 작용하여 ‘불면증’이라는 질병을 야기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3.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과학의 발전과 진보를 지향하는 근대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한다. 규율과 제도를 강조한다. 학교, 병원, 감옥, 군대뿐 아니라 교회 역시 규율을 통한 확장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 결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대형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교역자가 관리와 통제의 중심에 서고 그 허리는 믿음 좋은 제직들이 떠받치고, 셀 모임이나 구역 모임으로 표현되는 촘촘한 직제로 위계체제가 완성된다. 하지만 효율과 통제에 기반한 조직은 종교이건, 군대이건, 학교이건 억압과 폭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왜 ‘미투’ 운동이 극단, 연예계, 문학계 등에서부터 주로 터져 나왔을까? 개인의 장래를 쥐고 통제할 수 있는 수직적 권력구조가 폭력을 방관하고 조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입 간호사들에 대한 ‘태움’ 문화라든가 해마다 3월이면 반복되는 대학 신입생 군기잡기 같은 폭력성 등 역시 효율적인 통제와 관리를 목적으로 한다. 형태는 다르나 본질은 집단주의, 전체주의의 구현이다.
한국 교회 성장에 여러 긍정적, 부정적 유산을 남긴 제자훈련은 어떨까? 훈련의 목적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새벽 기도하고, QT를 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일정부분 동의할 수 있지만 신앙이 같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이 생긴다. 즉,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는 개인성이 개발되기 보다 집단성이 강화된다. 한 번 질문해 보자. 신앙 훈련의 목적이 습관을 만드는 것인가? 사명과 소명과 제자됨 속에 인간성이 사라질 위험은 없는가? 자기가 없어지는 훈련에 인간애마저 상실할 수 있고, 제자가 되는 것마저 도그마가 될 수 있다. 제자도와 훈련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교회는 엄숙주의 (quietism)가 지배하게 된다. 자신을 전적으로 신의 뜻에 복종시키고 이 땅의 것을 포기하고 하늘에만 가치를 두는 삶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엄숙주의란 17세기 말 등장한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고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에 무관심하며 신과 신성한 것에 수동적인 태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가톨릭 백과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엄숙주의는 ‘인간의 가장 높은 완성도는 정신적인 자기 소멸과 결과적으로 현재의 삶이 영혼의 신성한 본질에 흡수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따르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신이 개인 안에서 행동하는 동안 개인은 수동적이 된다. 일반적으로 엄숙주의는 거짓되거나 과장된 신비주의를 의미하며, 가장 비현실적인 영성을 떠올리게 되고, 도덕성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긴다.’
이 엄숙주의의 가치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즉, 인간의 유한성을 기억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만을 강조하게 된다. 그 속에서 현재의 삶에 가치를 두는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 양 되어 버린다. 엄숙주의가 지배할수록 교회는 천상의 가치를 강조한다. 교회 내의 비판의 소리를 내는 것도 덕이 되지 않으므로 경계하게 된다. 교역자들과 제직들은 제자도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가치를 주입한다. 왜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이런 구조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내포하는 폭력에 저항하면 은혜와 덕이 되지 않는다고 정죄한다. 제자훈련이란 교회가 근대의 효율을 위해 기계적인 규율을 강제하는 것을 그럴싸한 용어로 포장하는 것일 수 있다. 솔직해지자. 이건 아니다.
실제 한국 교회는 사명과 선교, 제자도에 몰두하느라 현재의 가치, 놀이의 가치, 휴식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그런데도 24시간 예수만 바라보고 생각하라 한다. 현실은 교회 성장과 유지를 위한 프로그램을 돌리느라 격무에 시달리는 교역자들이 절대 다수이다. 또 24시간 예수만 생각하라는 메시지에 일반인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아마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연약한 자신을 자책하며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믿음의 삶의 표징은 이 세상과 단절하고 좀 더 주님을 바라보는 내부지향으로 좁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믿음이고, 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영성 훈련, 제자 훈련이라면 근본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엄숙주의를 강요하고 훈련을 강조하는 것은 목표달성의 효율을 위해 개인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4. 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벗자
하루 24시간 예수와 살면 행복할까? 진짜 그런 삶이 바른 삶이라고 믿는 걸까? 이것이야말로 위험하다. 하늘의 것을 사모하느라 이 땅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어 보인다. 하루 종일 예수께 사로잡히려면 가톨릭 봉쇄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게 맞다. 물론 24시간 예수만 생각하라는 것은 ‘레토릭’이겠지만, 이러한 류의 사고는 그리스도인들을 오도할 수 있다. 죄의식과 마음의 부담을 효과적으로 덜면서 사회 현실을 외면할 구실이 되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 연구하고 싶다는 열망도 자칫하면 엄숙주의의 반영일 수 있다. 너무 하늘의 것만을 사모하게 되면, 변화산의 초막에 머무르며 사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땅의 문제를 강 건너 불 보듯 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을 하루 종일 생각한다면, 바리새인, 서기관, 외식하는 자들을 비판하던 예수, 가나안 혼인 잔치에 가서 먹고 즐기던 예수,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던 예수, 장사치의 소굴이 되어 버린 성전의 좌판을 둘러 엎으신 예수,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살았던 예수, 자기를 욕하는 자에게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라며 용서했던 예수 등을 외면할 수 있을까? 당대 사회의 불의와 아픔에 공명하는 예수를 보면 약자에 대한 편애도 보여야 마땅할 것 같다. 그런데 예수를 많이 생각하고 바라볼수록 현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심판자가 되어 판단하거나, 엄정하게 중립적인 언어만을 구사하는 천사가 되어 버린다. 그런 분들이 사회적인 이슈 앞에 “이제는 그만 하고 기도할 때입니다”고 짐짓 중재재판의 판결자가 된 양 선포한다. 사회가 정의 실천을 외칠 때 그들은 공의의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다. 사람들이 차별에 대해 지적하는 문제를 그들은 영적 분별이라 한다. 대중들이 혐오라 표현하면 그들은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라고 한다.
이것이 온통 예수님만 생각할 때 생길 수 있는 삶의 부작용이다. 신앙과 일상이 괴리되어 생기는 분열증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러한 주입을 신성하게 여기고 그것이 지향하는 도달할 수 없는 약속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가장 숭고한 종교처럼 보이나 가장 위선일 수 있는 것, 가장 타계적이어서 가장 현실에 무관심할 수 있는 것, 이 삶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우상숭배일 수 있다. 이 연장에서 미션얼 교회, 제자훈련 혹은 세속성자라는 것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새로워지고자 하는 몸부림과 의도는 충분히 존중한다. 다만, 이러한 것이 근대 사회 구조의 틀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신자들을 객체화 시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자.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로 옮기건 ‘오늘 최선을 다하라’라고 옮기건 하늘만 바라보는 데서, 오늘 우리와 주변의 현실을 직면하여야 한다. 교회 내의 일상화된 엄숙주의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온함이 변화를 이끈다.
168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는 엄숙주의 68개조를 정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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