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한다
(<복음과상황> 4월호 “한 인문주의자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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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장에 선 ‘구국의 기독교’
해마다 벌어지는 일이니 굳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지난 삼일절에 광장에 모여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애국과 반북, 반정권, 친미를 부르짖던 목회자들과 기독교인들의 추태는 올해 유독 심했다. 그저 설 자리를 잃어버린 수구 세력의 몸부림으로 측은히 바라보기에는 신앙의 이름으로 여과 없이 내뱉는 어휘들이 지나치게 섬뜩했다. 행여 기독교에 애정과 관심을 거두지 않고 있는 이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완전히 등을 돌려버리지나 않을까 두렵다.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잔혹성을 보인 사건으로 기억되는 십자군 원정을 위해 참가자들을 모집할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설교를 마치자마자 청중들은 전의에 불타올라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광장에서 구국을 외치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그때의 모습이 연상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교회는 국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교회 하면 자칭 ‘애국보수’가 떠오르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교회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불편할지 모르지만, 그 뿌리를 찾아갈 때 오늘 기독교가 고민하고 돌이켜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들이 국가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국가라 해도 궁극의 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다. 개별 국가가 요구하는 가치가 인류 보편의 가치와 충돌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후자를 선택해야 한다. 이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부터 현재까지 국가 이념에 경도된 교회에 대해 한번쯤은 의문을 던져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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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
로마는 피지배국의 종교에 관용적이었고, 피정복지의 종교와 언어, 문화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의 정책과 기독교회는 출발 당시부터 불편한 관계였다. 왜 로마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을까? 로마인들에게 종교란 개개인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한 신념 체계이기보다는, 로마제국이 지향하는 사회 통합과 제국의 일체성을 위한 도구였다. 로마인들이 종교를 지칭하는 단어 중에 ‘피에타스’(Pietas)라는 용어가 있다. 이 단어는 흔히 종교에 적용되는 ‘경건’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충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키케로가 “피에타스에서 로마적 의미를 뺀다면 사회 일체성과 정의는 무너질 것”이라고 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지닌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제국에 도움이 되는 종교로 볼 수 없었다. 결국, 기독교회는 제국의 일체성을 해치는 집단으로 인식되어 공개적인 탄압을 받은 것이다.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로마가 지니고 있던 제국의 일치를 위한 보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다. 기독교 사상은 바로 로마제국에 복속되어 있는 다양한 민족에게 행사하려는 제국의 통합을 위한 정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영향력과 중첩되었다. 기독교는 신앙생활과 사회에서의 삶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영역에 믿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지향했다.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사회 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려는 로마제국의 통치 방식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에 대한 믿음은 로마 안에서는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과 마찰을 일으키며, 도전하는 모습이 되었다. 타 종교들은 자기의 신을 믿으면서도 로마 황제를 하나의 신으로 인정하고 숭배하기만 하면 제국의 통일성 안에서 융합될 수 있었지만, 기독교는 이 암묵적 약속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다시 말하자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은 이유는 종교가 제국의 가치를 넘어서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본래 초대 기독교는 국가주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저항하여 박해를 겪으며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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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는 겉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를 경험한다. 우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단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국가 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벗어났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특권이자, 교회가 성장하고 세력이 확대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동시에 교회가 타락할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순수 교회사의 차원에서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역할이 과연 기독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반대였는지 평가하는 작업은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교회사》를 쓴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열세 번째 사도라고 칭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직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받고 순교하거나, 또는 배교를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었으니,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평가에 대체로 동의했을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이런 상황의 반전을 과도하게 해석해서, 이제 지상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고 서술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것이 제국의 가치를 종교의 가치보다 앞세우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가의 중요한 종교가 되면서 교회의 힘도 비례해서 강력해졌고 국가주의는 강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으로 소집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종료된 후 황제 즉위 2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실질적으로 이 연회는 제국이 교회를 지배하는 다가올 미래를 미리 축하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참여한 감독들은 제국 황제의 뜻을 받드는 무장한 군인들에 둘려 싸여 식사를 했다. 교회와 국가의 관심이 일치할 때, 위로부터 이루어지는 지배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종교개혁 역시 이런 흐름은 거스르지 못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작한 종교개혁 역시 세속 군주인 선제후의 보호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때도 시의회가 지지하고 뒷받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톨릭뿐 아니라, 국가와 종교가 일치된 시스템 아래에서는 언제나 종교가 위로부터 부과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왕이 특정 종교로 개종하면, 백성들이 모두 개종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났던 것이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이 가장 희극적인 사례이다.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문제로 가톨릭 교회와 대립하자 로마가톨릭과 결별하고 국교회(성공회)를 수립했다. 헨리 8세가 죽고 가톨릭 교도인 메리 여왕이 즉위하여 신교 주교 몇 명을 제거하자, 많은 성직자들이 처자식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종교개혁기에 모두가 국가주의에 부합하는 개혁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재세례파(Anabaptist)라고 불리는 분파는 종교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313년 국가주의 교회 형성 이전의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재세례파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사와 관계 없이 누구나 국가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들은 신앙이란 자발적인 의지 가운데 개인이 선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재세례파 사상은 위정자들 시각에서 볼 때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그들은 국가를 부정하는 불순한 사람들이기보다는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평화를 실천하는 삶을 추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관점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다. 역사 속에서 그들은 반국가적이라고 비판 받았다. 국가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은 철없는 이상주의자들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 보편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이들은 국가와 종교 사이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둘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 평화 활동을 위해 이라크 바그다드로 떠났던 유은하 씨는 장로교회 교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활동을 주류 교단에서는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유은하 씨가 파송 받은 단체는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였다.
오늘날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며, 그 속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을 보면 국가주의에 편승하며 기득권을 누리고, 충실하게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는 이러한 국가주의에 경도된 교회에 관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에 종교가 모두 이런 퇴행의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다. 토니 블레어 정부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명분을 쌓아나갈 당시 영국은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 극심했다. 그때 성공회 수장인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와 가톨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교구장인 코맥 머피오코너 추기경이 공동으로 이라크 전쟁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두 종교의 수장이 한 카메라 앵글에 서서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토니 블레어 정부의 정책에 당대 교회가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미국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성전’에 참여하는 미군들을 위해 기도해준 것과도, 한기총이 ‘국익’을 위해서 이라크 파병을 해야 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한 것과도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렇다. 종교는 국가라는 거대 이데올로기나 애국이라는 허상을 통해 정당성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아파하는 작은 자 한 사람과 구체적으로 함께하는 일에서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한다. 초대 교회는 반제국주의를 실천하여 박해를 받았지만, 그것이 제국을 넘어 지평을 확대해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교회가 위기에 처했던 때는 박해받았던 때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던 때였다. 국가의 공인과 지원 하에 교회는 독자적인 힘을 키워가기보다 가장 기생적인 조직이 되었다. 국가 교회가 되면서부터, 사회 기득권과 권력의 시스템에 합류하면서부터 그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경향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사고에도 남아 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황제의 주도로 교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일 등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진 역사의 부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 제국과 기독교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국가와 교회가 동일한 가치를 동일시하고, 국가 지도자를 신이 세운 지도자로 추앙하여 절대화하는 전근대적인 현상은 생각 이상으로 그 뿌리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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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국가주의 신화를 넘어서
광장에 선 기독교인들이 내세우는 애국이란 국가가 이데올로기로 변형된 사례이다. 교회와 국가 권력의 긴장 관계가 사라진 후 교회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국가주의에 봉사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본원적인 존엄성을 지켜나갈 것인지 택해야 했다. 국가주의는 유한하다.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국가 권력에 맞서 순교를 택한 것이 기독교였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국가 권력보다 더 지고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위정자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국가 없이는 ‘교회’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등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래 내려온 국가주의와 교회가 만나 엮어낸 신화의 구성물이다.
원형극장이라는 광장으로 내몰린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을 저주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맹수로 표현되는 제국의 폭력 앞에서 죽음의 순간까지도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광장의 야수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로마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광장에서 외치는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 야수들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세상과 대비되는 다른 가치를 추구했던 교회가 이제는 가장 충실히 세상 논리를 추종하고 있다. 그들의 옳고 그름은 광장을 바라보는 대중들이 준엄하게 판단할 것이다. 원형극장에 갇힌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당대의 로마인들은 감동을 받았지만, 오늘 한국 사회의 광장에 갇힌 저들을 보며 대중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저들에게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지역이나 국가의 가치가 아닌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을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보이는 태도가 하나님께 대한 자세라고 했다. 개개인을 향한 삶의 포용과 관용의 태도가 궁극적으로는 그 무엇보다 국가를 위하는 길이다.
광장에 서서 애국을 외치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 긍휼의 마음을 찾을 수 없다. 그들 주장의 역사적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종교의 외피를 입은 광기만이 보인다. 그들을 보며 이제는 우리가 외쳐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가 외치지 않으면 저 길가의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제주4·3 사건이 발생한 지 올해로 70년을 맞았다. 국가가 가한 폭력에 반공 기독교가 깊숙히 연결되어 있는, 국가주의와 연관된 대표적인 사건이라는 것은 이미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피해자와 제주도민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은 나라도, 교회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풀어주지 않은 가슴 속에 맺힌 억울함과 슬픔을 달래주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마땅히 할 역할이다. 더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의무가 남아 있다.
첫째는 기억하는 것이다. 둘째는, 개개인의 기억을 사회적 기억으로 승화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 사회적 기억을 세대 간의 기억으로 전승하는 것이다. 그럴 때 더 이상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고자 하는 어떠한 반동적인 시도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4·3이 세대 간의 기억으로 이어지기 전까지 역사는 정리된 것이 아니다. 교회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벗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하기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의 깨어 있는 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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