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를 위한 복음서 ② - 누가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The Gospel for the Lost - How to Read the Gospel of Luke IV. 누가복음의 목회신학적 틀23) 1. 목회적 관심 누가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목회적 관심은 그의 서문(“…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 1:4)에서 밝힌 목회적 동기와 분리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목회적 관심은 사도행전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이면서도 발전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글의 성격상 누가복음에 국한하고자 한다. 다른 복음서들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서신들과 비교할 때에도 누가복음에는 기독교적 보편주의(Christian universalism) 내지 기독교적 인도주의(Christian humanism)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사회적 약자 내지 소외된 자는 누가신학의 ‘잃어버린 자’의 중심을 차지한다(19:10; 15장 참조). 이것은 누가신학에서 나타나는 반전(reversal)의 주제(1:51-53; 13:30; 14:11; 17:33; 18:9-14 참조)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게 된다.24)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에 소개된 예수의 나사렛 회당 설교(4:16-27) 중 이사야서 61장 1-2절이 예수께 성취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메시아 사역이 ‘가난한 자’/‘포로된 자’/‘눈 먼 자’/‘눌린 자’에게 희년(禧年)을 선포하는 자유-해방-구원의 사역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일차적으로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이다(6:20; 14:12-13; 16:19-31; 18:22; 참조. 12:16-21). 그러나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품을 벗어난 죄인으로서 이 세 상에서 소외된 모든 탕자(蕩子 즉, 문자적으로 ‘부자’도 포함)들을 지향한다(13:28-30; 15:11-32; 18:13; 19:2-10; 24:46-49). 따라서 누가복음의 ‘잃어버린 자’는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모든 ‘병자들’과 다름없다 (5:31-32). ‘가난한 자/잃어버린 자’는 누가복음 안에서 구체적으로 세리와 죄 인(5:30; 7:34; 15:1), 여자, 사마리아인, 이방인에게 적용할 수 있다. 누가복음이 예수를 통해 팔레스타인 안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 사도행전은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제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예수) 팔레스타인과 그 너머 이방 지역 땅 끝까지 이르러 잃어버린 자를 찾는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7:34)로서 그 당시 증오의 대상이었던 세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5:27)고 하면서 그를 제자로 불렀으며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신다(5:29; 참조. 19:5). 누가복음에서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소개되는데 비유의 초점도 독자들을 매우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내[예수]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8:14). 이와 유사하게 누가복음은 ‘죄를 지은 한 여자’의 회개(향유 담은 옥합을 예수께 부음)를 언급하면서 편견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의 교만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7:36-50). 결국 예수께서 죄용서, 즉 구원을 선포하는 대상은 ‘의로운 바리새인’이 아닌 ‘죄를 지은 한 여자’이다. 1세기 여성에 대한 종교사회적 권익이 매우 열악했던 그 당시를 고려할 때 여성에 대한 예수와 초대교회의 입장은 매우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사복음서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누가복음이다. 복음서 초두(1-2장)부터 엘리사벳, 마리아, 안나의 찬미와 증거는 누가-행전의 주요한 모티프를 제공해 주며, 사렙다 과부(4:26), 나인 성 과부(7:11), 마리아와 마르다(10:38), 가난한 과부(21:1-4), 부활을 증언하는 여인들(24:5, 10)도 주목받게 된다. 특히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을 위해 자기들의 소유를 아끼지 않은 자들은 그 당시 주요 노동자들이었던 남성이 아닌 여인들(막달라인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다른 여러 여자들)이었다. 이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만 소개되고 있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8:2-3; 참조. 행 9:36, 39; 12:12; 16:14; 18:2, 18, 26). 사마리아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과 호의는 요한복음(요 4장)과 유사하게 나타난다(마 10:5-6 참조). 누가복음 9장 51-56절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하던 중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소개한다. 이때 냉담한 반응을 보인 사마리안 주민에 대한 태도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제안하자,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대응하고자 하는 자신의 제자들을 꾸짖으신다(9:54-55).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비유의 가르침을 통해 그 당시 유대문화를 깨트리며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신실한 이웃 사랑의 모델을 소개하신다(10:25-37).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무시하고 경멸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들의 신앙적 모범으로 제시된 것이다(“가서 너[유대인]도 이와 같이[사마리아인이 행했던 것과 같이] 하라” - 10:37). 사마리아인에게 나타난 신앙적 모범은 누가복음 17장에 소개된 열 명의 나병환자 치유 사건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말하자면, 예수께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오직 한 사람만이 다시 예수께 돌아온 것을 누가복음은 잊지 않고 이렇게 소개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7:15; 참조. 행 8:4-25).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잃어버린 자는 유대인 안에서 소외 받은 자를 넘어 비(非)유대인-이방인을 궁극적으로 지향하며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복음서’라면, 누가복음은 ‘이방인의 복음서’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족보과 누가복음의 족보를 비교해 볼 때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누가복음은 예수의 족보가 다윗과 아브라함을 넘어 온 인류의 시조(始祖)인 아담에게까지 다다르며 마침내 모든 열방의 창조주와 주권자이신 하나님으로 종결된다(3:23-38).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 대한 예수의 구약성경 인용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구원이 새로운 것이 아님을 변증하기까지 한다(4:26-27; 참조. 2:30-32). 이방인 백부장의 ‘이만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신앙이었다(7:9; 참조. 마 8:10; 15:28).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신성모독의 죄명을 뒤집어 씌워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몰아넣었으나, 로마의 백부장은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23:47)고 고백하고 있다. 실제로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은 죄 용서-구원의 은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24:47)을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이것은 누가복음의 후편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능력 가운데 예수의 증인들을 통하여 성취된다(행 13:46; 18:6; 28:28 참조). 2. 신학적 주제 누가복음의 신학적 주제 역시 ‘잃어버린 자’에 대한 목회적 관심에 서와 같이 여러 면에서 사도행전과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누가복음에 제한시키면서 다섯 가지로 특징적인 신학적 주제를 소개하고자 한다.25) 1) 하나님의 뜻/계획 앞에서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줄거리를 다루면서 언급했던 ‘하나님의 뜻/계획’은 누가복음 전체 내러티브의 발단-과정-결말의 모체(母體)가 된다.26) 이 말은 구약성경이 그러하듯이 누가복음에서 다루는 이 세상 역사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의미한다. 한글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ἡ βουλὴ τοῦ θεοῦ(헤 불레 투 쎄우)는 누가복음 7장 30절에 단 한 번 사용되고 있지만(참조. 행 2:23; 4:28; 5:38-39; 13:36; 20:27) 누가의 내러티브는 여러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뜻/계획이 예수를 통해 어떻게 계시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의 사건과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을 드러내고자 누가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어 동사를 자주 사용한다: δεῖ(데이 – 눅 2:49; 4:43; 9:22; 13:33; 17:25; 21:9; 22:37; 24:7, 26, 44; 행 1:16, 1; 3:21; 4:12; 5:29; 9:6, 16; 14:22; 16:30; 17:3; 19:21; 20:35; 23:11; 24:19; 25:10), μέλλω(멜로 – 눅 9:31, 44; 22:23; 24:21; 행 17:31; 26:22, 23), πληρόω(플레로 – 눅 4:21; 9:31; 21:24; 22:16; 24:44; 행 1:16; 2:28; 3:18; 12:25; 13:25, 27, 52; 14:26; 19:21), τελέω(텔로 – 눅 12:50; 18:31; 22:37).27)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은 장래 이루어질 것으로 예언된 것도 있지만 누가복음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오늘’(2:11; 4:21; 5:26 13:32-33; 19:5, 9, 42; 23:42-43) 이미 성취된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를 오해하고 거절한 자들은 그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계획을 거부한 자가 된다. 2) 예수 그리스도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는 성취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개-죄 용서를 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계획의 중심이다.28) 누가복음 내러티브에서 인물화 되는 예수는 일차적으로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아/그리스도’(ὁ χριστόϛ)이다 (1:31-33, 35, 69; 2:11; 4:41; 9:20; 20:41-44; 22:67-71; 23:2, 35, 39; 24:26, 46).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기름 부음을 받은) 사건(3:21-22)은 시편 2편과 이사야서 42장이 반향된 것으로 왕적-선지자적 이미지(2:30-35; 4:16-30; 7:16; 9:7-9, 19, 35; 참조. 신 18:15)를 또한 드러낸다. 예수의 ‘선지자’(ὁ προϕήτηϛ) 이미지는 다양하게 소개된다(4:16-30; 9:7-9, 19; 13:33; 24:19, 21 – 엘리야/엘리사/모세적 선지자). 실제로 예수께서는 구약의 참 선지자들이 걸어가고 맞이했던 그 길로 뚜벅뚜벅 나아가시는 분이다(11:47-51; 13:33). 누가복음은 또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ὁ υἱόϛ τοῦ θεοῦ)이심을 명시적이면서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1:31-32; 2:49; 3:22; 9:35; 행 9:20; 13:33). 이 용어는 다윗의 아들/후손의 왕적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개념과도 공유되는 의미로 소개되기도 한다(1:35; 4:3, 9; 4:41; 8:28; 참조. 22:70).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하나님과 친밀하고 독특한 관계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그 사람의 아들’(ὁ υἱόϛ τοῦ ἄνθρωποῦ) 표현은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사용된 용어인데, 이것은 단순히 인성(人性)적 표현이기보다는 오히려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神性) 즉 자신이 천상(天上)의 인물임을 계시하고자 하는데 가장 적합했던 표현으로서 이해된다(21:27/단 7:13-14). 인자(人子) 용어는 예수의 현재 사역과 관련해서 묘사되기도 하며(5:24 – 죄를 사하는 권세; 6:5 – 안식일의 주인; 9:58 – 거절당하는 자; 19:10 –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자), 고난을 당하는 분으로(9:22, 44; 18:31; 22:22, 69; 24:7) 장래 묵시론적 사역을 설명할 때에도 활용되고 있다(6:22; 9:26; 12:8, 40; 17:22, 24, 26, 30; 18:8; 21:27, 36; 24:7; 행 7:56; 참조. 단 7:13-14; 출 34:5; 14:20; 민 10:34; 시 104:3). 이와 같은 복합적 또는 다차원적 메시아 이미지는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 중간기 시기의 메시아 사상을 통합적으로 성취하는 분임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예수는 메시아이자 고난 받는 ‘종’(παῖϛ)으로 인물화 됨으로써(9:20, 22; 24:25-27, 44-46; 참조. 13:33; 행 3:13, 18, 26; 4:27, 30; 사 42:1-7; 49:1-6; 50:4-9; 52:13-53:12) 고난의 메시아가 왕적-선지자적 이미지와 함께 중첩되며 통합되고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다른 복음서들과 같이) 예수께서 (고난 받는 왕적-선지자적) 메시아(χρίστοϛ)일 뿐 아니라 주(κύριοϛj)로 선포되고 있다는 점이다(20:41-44; 21:27; 22:69; 행 2:30-36; 10:36; 참조. 눅 1:43; 2:11; 롬 9:5; 히 1:8-9). 따라서 사도행전 2장 36절의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는 저자 누가에 의한 예수 인물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29) 예수의 주되심은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존귀케 되심을 의미할 뿐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과 같은 신적 권세를 동등하게 누리고 행사하는 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엘서 2장 32절이 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인용된 ‘주의 이름’은 구약 문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도행전에서 인용되고 성취되어진 ‘주의 이름’에 대한 베드로(그리고 누가)의 해석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 한다(롬 10:12-13 참조).30)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임재 하는 하나님의 통치임과 동시에 주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이기도 하다(4:18, 43; 7:22; 8:1; 9:6; 10:11, 18-19; 11:20-23; 17:21; 19:14-15; 행 2:30-36; 8:12; 20:25; 28:23; 참조. 골 1:13). 3) 성령 누가복음(-사도행전)은 바울서신 및 요한문서와 함께 신약의 성령 이해에 지대한 자료를 제공한다.31) 바울 및 요한의 성령 이해가 많은 합의에 도달한 것과 달리 학자들은 누가의 성령 이해와 관련해서 여전히 분분한 입장이다. 그럼에도 누가의 성령 이해에 있어 학자들의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은 무엇보다 누가의 성령이 유대교에서 주도적으로 이해한 ‘예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이라는 점이다. 누가복음에서 성령의 기능과 의미는 한 마디로 예수의 메시아 정체성과 그의 사역에 집중된다.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예수의 수태고지 및 탄생과 관련됨으로써 성령과 연관된 인물(세례 요한, 마리아, 엘리사벳, 사가랴, 시므온)들이 직간접적으로 메시아 예수를 증언한다(1:15, 35, 41, 67; 2:25, 26, 27). 그리고 누가복음 3장 이후부터 성령은 메시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준하고 예수께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예수의 가르침과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증언되는데 결정적 동인이 된다(행 10:38 참조). 한편 누가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이 장래에 감당하게 될 증인 사역과 관련해서 성령이 능력과 지혜를 베풀 것을 약속한다(11:13; 12:10, 12).32) 이것은 예수의 부활 이후 및 승천 직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당부에 서 더욱 확증된다. “볼지어다 내[예수]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24:49);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 [예수]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예수]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4, 5, 8 ).33) 주목할 것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성령 역시 누가복음(-사도행전) 안에서 하나님의 뜻/계획을 드러내고 인도하는데 결정적으로 쓰임 받는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으로 이어지면서 성령은 또한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주 예수의 뜻을 계시하고 지시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누가-행전의 ‘성령’(행 16:6)은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예수의 영 ’(행 16:7)으로 묘사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성령-기독론의 맥락에서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이해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해 준다.34) 4) 구원 사복음서를 비롯해서 모든 신약성경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계획 그리고 이를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준다. 이 점에서 하워드 마샬(I. H. Marshall)이 1970년에 이미 잘 논증했듯이,35) 누가복음(-사도행전)은 다른 복음서보다 더 자주 ‘구원/구원하다’(σωτηρίᾶσώζω)라는 용어를 구체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이 사실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그 이후 막스 터너(M. Turner)는 누가-행전에서 언급된 구원의 개념을 구약-유대교와의 관계 속에서 본질적이면서도 통합적으로 잘 분석함으로써 누가문서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주제를 더욱 발전적으로 탐구하였다.36) 그의 책에서 논증하듯이 구원은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회복되는 것으로 구원의 신분과 더불어 구원-윤리적 삶을 통해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사도행전)의 구원은 (다른 신약성경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여러 (신학적 그리고/또는 은유적) 용어들의 (각각의 강조점과 함께)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구원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개인과 공동체) 상호 간의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인데 누가복음은 이 회복이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긍정적이고도 필연적 관계 속에서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 관계는 하나님께서 메시아와 주로 보내신 예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된다(7:50; 8:12, 48; 17:19; 18:42; 행 3:16; 4:4; 1015:9, 11; 26:18). 이 구원은 또한 인간 차원에서의 회개(돌이킴) 및 하나님으로부터의 죄용서 개념과 더불어 이해된다(3:3; 5:32; 15:7, 10; 16:30-31; 24:47; 행 2:38; 3:19; 11:18; 17:30; 20:21).37)그리고 이런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된다(행 2:38-39; 10:44-47; 11:17; 15:8-9). 이로 인해 구원 받은 자(믿음-회개-죄용서-성령의 선물)는 매우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예. 재물에 대한 포기와 구제 – 16:9; 18:22; 19:8-10; 참조. 3:8; 행 26:20). 또한 이런 자가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요(9:26; 12:8-9; 행 22:16), 십자가를 지면서(9:23; 14:27)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9:23, 57-62)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11:28; 행 5:31-32; 10:35).38) 구원의 개념이 하나님과 그 백성(개인/공동체)과의 인격적 관계회복으로써 이해되지 않고, 단순히 도식적인 또는 기계적인 개념이나 지식이 될 때, 누가복음(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교향곡적 울림과 떨림의 하모니(빌 2:12-14; 벧후 1:5-11 참조)는 우리 안에서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5) 제자의 삶 누가복음에서 드러나는 예수 이해(기독론)와 구원 이해(구원론)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로서 구원 받은(회개-죄용서-성령의 선물) 자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주제이다.39) 우리는 이 주제를 제자도(discipleship)의 이름으로 다룰 수 있다. 실제로 각 복음서는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소개되는데, 이 단락에서 나는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를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1) 기도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서 중에서 기도에 대한 자료가 가장 풍성하다.40)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누가복음의 중요한 문맥에서 기도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복음의 첫 장은 사가랴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되며(사도행전의 첫 장도 그렇다), 마지막 장은 승천하시는 예수의 축복기도로 종결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의 예수는 ‘기도의 사람’으로 인물화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성령은 예수의 기도 중에 임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된다(3:21). 예수는 메시아 사역의 피곤함 속에서도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 하시는 분으로(눅 5:16),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6:12) 하시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누가복음 6장의 철야기도 이후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도라 명하셨다(6:13-16). 이것은 열 두 제자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수께서 선택하신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가 예수를 향하여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고백이 있기 직전에도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신 것을 보도해준다(9:18-20).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더불어 산에 올라갔을 때 예수께서 변모되는 상황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였는데(9:28-29), 이 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별세(ἓξοδοϛ – 31절)를 선언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아들이심을 선언하신다(35절). 칠십 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행한 자신들의 성공적 사역을 예수께 보고하자, 예수께서는 주저함 없이 그 현장에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감사-찬양의 기도를 올리셨다(10:17-22). 한편,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 ‘주기도문’을 일러주신 것도 예수께서 기도를 끝마친 직후였다(11:1-4). 또한 예수께서는 기도하는 과정에서 낙심할 수 있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당부하시기도 했다(18:1-8). 갈보리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예수께서는 감람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22:39-46).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처절한 상황 중에서도 예수께서는 원수들(23:34)과 자신(23:46)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 증거와 함께 고별설교를 끝낸 후 승천하시면서 그는 제자들을 위한 축복기도를 베푸신다. 이처럼 누가복음의 예수는 ‘기도의 사람’일 뿐 아니라 메시아 사역의 중요한 기점마다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에 비해 유대인들(종교 지도자들) 뿐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기도의 실패자로 인물화 되고 있다. 그 당시 경건하고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졌던 바리새인은 기도는 하지만 위선의 기도자로 판명되고 있으며(18:9-14), 종교 지도자들은 ‘기도의 집’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장본인들이었다(19:45-48). 예수의 제자들 역시 안타깝게도 기도의 실패자로 묘사된다. 제자들은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지만(11:1-2) 정작 기도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졸고 만다(22:44-45).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 제자들은 변하기 시작한다. 제자들의 첫 변화는 그들의 기도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이다(행 1:12-14). 그리고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예수의 제자들은 살아생전 보여주었던 예수의 모범을 따라 ‘기도의 사람들’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임을 여실히 증언해 준다(행 2:42; 3:1; 4:24이하; 6:4, 6; 8:15; 9:11, 40; 10:9, 30; 11:5; 12:12; 13:3; 14:23; 16:25; 20:36; 21:5; 22:17; 28:8). (2) 재물포기와 구제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이 자주 만나게 되는 주제는 재물에 대한 저자의 외침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오늘의 제자들 역시 반드시 답변해야 할 필연적 질문이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6:13).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라오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각오와 결단을 촉구하면서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33)고 하였으며,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하는 부자 관리에게 예수께서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8:22; 이에 대 부자 관리의 반응이 23절에 언급되어 있다 -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재물 포기는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할 구제로 이어진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12:33-34; 참조. 3:11; 6:34-35, 38; 11:41; 14:12-14).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설교 중에 소개된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예수 전승’은 바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씀이었다41) 이와 같은 예수 제자들의 재물포기와 구제의 삶은(7:5; 8:3; 10:34-35), 앞 단락에서 소개한 기도와 유사하게,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는 대표적 (구원의) 표징과도 같다(행 2:43-47; 4:32-37; [5:1-11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제자답지 못한 삶을 대변해 준다]; 9:36, 39; 10:2, 4, 31; 24:17[참조. 고후 8-9장; 롬 15:25-28]).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재물포기와 구제가 예수 제자 됨(또는 구원 받음)의 수단이 아닌 예수 제자 됨의 참된 표식 또는 열매가 된다는 것이다. 삭개오 사건은 이런 맥락에서 깨달아야 할 본문이다.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가 예수를 극적으로 만난 후 그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예수께 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19:9)고 구원을 선포하신다. 누가복음의 재물포기와 구제의 주제를 전체적으로 고려할 때,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한 예수의 의미는 삭개오가 단순히 재물을 포기하고 이웃을 구제한다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삭개오가 예수의 심방에 마음이 열린 후 그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참으로 회개(구원)의 사람이 된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참조. 3:8-14에서 언급된 ‘회개의 합당한 열매 ’). 이것은 삭개오의 회개한 징표가 재물포기와 구제로 나타나게 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가르침이 ‘부자와 나사로 의 비유’(16:14-31)이기도 하다. 이 비유는 16장 13절(‘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직후에 소개되는 문맥 안에서 해석될 때 그 의미가 배가된다. 즉 유대인 부자는 재물집착으로 인해 자기 집 앞에 늘 함께 했던 극심하게 가난한 동족 유대인 나사로를 구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부자는 회개의 참된 열매로서 재물포기와 구제가 부재한 ‘명목적 신앙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재물포기와 구제가 불가능했던 ‘명목적 성도’는 ‘하나님이냐 재물이냐’에 있어 결국 재물을 섬긴 것이고, 재물을 섬겼다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그 인생의 주(主)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6:24; 8:14; 12:13-21). V. 나가는 말 이 글은 누가복음에 대한 신약학계의 견해들을 고려하면서 신학생 및 목회자를 주된 독자로 간주하는 가운데 누가복음서의 개관을 나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 나는 세 가지의 틀, 즉 역사적-문학적-목회신학적 관점으로 이 글을 전개해 보았다. 누가복음은 그 당시 그리스 역사문헌의 서문 형식(1:1~4)과 함께 시작됨으로써 다른 복음서보다는 글쓰기 짜임새가 좀 더 체계적이라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준다. 아울러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을 소개하는데 있어 예수의 지상(地上) 사역뿐 아니라, 사도행전을 통해 예수의 천상(天上) 사역까지 다룸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뿌리, 가지, 열매를 처음부터 차례대로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상호 연계적으로 의식하면서 각각의 문서를 읽기에(그리고 설교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럴 경우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복음의 역사적 근거와 함께 기독교 신앙의 지리적 확장에 따른 복음의 우주성/보편성과 우월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같이 예수의 탄생을 필두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개한다. 또한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과 동일하게 예수의 메시아 사역이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종결되는 지리적 여행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도착하기까지 예수의 사역을 다루는 여행기사(9:51~19:44)는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는 누가복음의 특징적 단락이기도 하다. 이 단락은 특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주(主)가 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이 따라야 할 신앙 여정의 순례길에 모범(模範)이 되시는 분이다. 실제로 누가복음의 예수는 성령과 기도의 주제에 있어 제자들에게 큰 교훈을 보여주신다. 아울러 제자들의 삶에는 재물포기와 구제의 표징이 나타나야 하는데 이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킨(회개)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누가복음 내러티브 흐름 전 과정의 모체(母體)가 되는 하나님의 뜻/계획의 중심축을 자리한다. 따라서 예수의 인물화는 곧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메신저일 뿐 아니라(the messenger for the Kingdom)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실체(the message of the Kingdom)가 된다.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의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예수의 메시아 정체성을 확증하고(또는 드러내고) 메시아의 구원 사역에 권능을 부여해준다. 누가복음 4장에 소개된 나사렛 회당 설교 이후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로서 구원-해방-자유를 선포하는 영적 희년(禧年)의 종말론적 성취가 된다. 이것이 예수께서 사회에서 억눌리고 소외당하는 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치유를 베풀어 주시는 이유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회의 안정된 자들과 부자들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런 점에서 누가복음이 찾고자하는 ‘잃어버린 자’는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모든 탕자(蕩子)들이다(15장; 19:9-10; 24:47-48; 행 1:8; 2:38-41). 누가복음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자주 실패하는 자들로 나타나지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자들로서 모든 족속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파해야 될 증인들로 다시 새롭게 부름을 받게 된다. 수의 증인/선교 사역을 감당해야 될 제자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중심이자 성취자가 되심을 깨달아야 하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위로부터의 능력 즉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 누가복음의 독자들도 사모해야 할 일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자’를 찾고 발견하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 시대에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온전히 순종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과 언어로 ‘잃어버린 자’를 찾았듯이 오늘의 누가복음 독자/설교자들 역시 우리 시대에 하나님을 떠난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우리의 몸과 언어로 살갑게 다가가야 할 때이다. ‘위로부터의 능력’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회복하지 않으면 찾았다고 생각한 자들을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는 시대가 오늘인지 모를 일이다.
각주)---------
23) J.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I-IX) , 143-283; D. L. Bock, Luke, 27-43; R. H. Stein, Luke, 45-60; 김경진,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주 님: 설교를 위한 누가복음 연구> (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2000); 김득중, <신약성서개론>, 264-68; 레온 모리스, “누가복음의 10가지 주제”, <누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목회와신학 편집부편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43-58을 참조하라.
24) John O. York, The Last Shall Be First: The Rhetoric of Reversal in Luke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1)을 보라.
25) 대럴 벅(Darrell Bock)은 ‘누가-행전’의 신학을 14가지 주제 아래 그의 책 <누가신학> 중심부(제5장~21장; 117-504) 단락에서 심도 있게 다룬다 - ‘하나님’, ‘메시아/주 예수’, ‘성령’, ‘구원’, ‘이스라엘’, ‘이방인’, ‘교회와 길’, ‘제자도와 윤리’, ‘예수의 적대자들’, ‘여자들과 가난한 자들’, ‘율법’, ‘교회론’, ‘종말론’, ‘구약사용’. 데이비드 걸랜드 (David Garland)는 그의 2011년 주석에서(Luke, 974-83) 누가복음의 신학을 6가지로 다루었다 – The Divine “Must”; Universal Welcome to Outcasts, Sinners, and Gentiles; Prayer; Salvation; Jesus as Rejected Prophet; The Geographical Movement of the Good News.
26) J. T. Squires, The Plan of God in Luke-Act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을 보라.
27) 사도행전에서는 헬라어의 접두어 pro와 함께 사용된 복합동사들도 활용되고 있 다: προορίζω(행 4:28), προκαταγγέλλω(행 3:18; 7:52), προχερίζομαι(행 3:20; 22:14; 26:16). Ju Hur, Dynamic Reading, 182, 각주 12.
28) H. D. Buckwalter, The Character and Purpose of Luke's Christ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을 보라.
29) 누가-행전에서 예수에 대해 묘사되는 기타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ὁ ἃγιοϛ τοῦ θεοῦ(눅 4:34; 참조, 행 3:14; 2:27; 13:35/ 시 16:10); ὁ βασιλεύϛ(눅 19:38; 23:3, 37, 38; 행 17:7); ὁ διδάϛκαλοϛ(눅 7:40; 9:38; 10:25; 11:45; 12:13; 18:18; 19:39; 20:21, 28, 29; 21:7; 22:11); ὁ ἐπίστάτηϛ(눅 5:5; 8:24, 45; 9:33, 49; 17:13); (ὁ ἀχηγόϛ행 5:31 - ‘창시자 ); ὁ κριτήϛ(행 10:42; 17:31); ὁ δίκαιοϛ(눅 23:47; 참조, 행 3:14; 7:52; 22:14); ὁ λίθοϛ ὁ ἐξεουθνηθειϛ(행 4:11/ 시 118:22).
30) 예수에 대한 누가복음의 호칭으로 또한 주목해야 할 ‘구주’(ὁ σωτήρ) 용어는 ‘구출자’ 또는 ‘구원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눅 1:70-75, 77; 2:11, 30-32; 참조. 행 5:31; 13:23-25).
31) 신약성경 안에서 헬라어 πνεῖμα의 신적 표현으로서 성령의 빈도수는 약 74번 나 타나는데(πνεῖμα는 모두 106번) 누가복음에는 17번(마가복음은 6번, 마태복음은 12번, 요한복음은 15번)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57번 활용되고 있다(누가-행전에 모두 74번). 누가-행전의 성령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와 필자의 입장에 대해선 “누가와 성령”, <신학의 종을 어떻게 울릴 것인가> (서울: 그리심, 2005), 50-87을 보라. 누가-행전의 성령 이해에 대한 학문적 논쟁을 파악하기 위해선 J. Hur, Dynamic Reading (2001); M. Turner, Power from on High: The Spirit in Israel's Restoration and Witness in Luke-Act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6); R. Menzies, The Development of Early Christian Pneumatology with Special Reference to Luke-Act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1); 이한수, <신약은 성령을 어떻게 말하는가> (서울: 이레서원, 2001); 최갑종, <예수, 교회, 성령: 누가와 바울의 성령론에 관한 연구> (서울: 기독교문 서선교회, 1992); 허주, “누가 성령론 이해와 평가”, <ACTS 신학저널> 19 (2014): 7-58.
32) 누가복음 11장 13절은 마태복음의 병행구절 7장 11절에서 사용된 “좋은 것” 대신에 “성령”을 언급한다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33) 예수와 예수의 제자(특히, 베드로, 스데반, 빌립, 바나바, 바울 등)들에게 복음 사역을 위한 능력부여가 누가-행전의 성령 이해와 기능에 자주 발견되지만(‘능력과 사역의 영’ - 눅 4:18-19; 24:49; 행 1:8; 10:38 참조), 개인과 공동체(사마리아 공동체 – 행 8장, 고넬료 공동체 – 행 10장, 세례 요한의 제자 공동체 – 행 19장)가 구원의 새 시대로 나아가는데 기여하고 있는 성령에 대한 이해와 기능 역시 중요한 지표가 된다(‘구원의 영’ - 행 2:38-39; 11:15-17 참조).
34) 허주, “개혁주의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성령 이해와 그에 따른 신학적 함축들: 주로서 하나님과 예수와의 관계론적 중요성과 관련하여”, <고려신학> 2 (1999): 507-48 을 보라.
35) I. H. Marshall, Luke: Historian and Theologian (Grand Rapids: Zondervan, 1970).
36) M. Turner, Power from on High.
37) 누가-행전에서 구원 메시지가 ‘회개와 죄용서’의 주제와 긴밀하면서도 주도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위해서는 허주, “회개 –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단초: 사도행전과 평양 대부흥운동에 근거하여”, <한국개혁신학> 35 (2012): 86-138을 보라.
38) 누가복음 18장에서는 ‘구원’(눅 18:26), ‘영생’(눅 18:18), ‘하나님의 나라’(눅 18:25-26)가 모두 동일한 개념을 뜻하는 상호보완적 용어들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D. Bock은 누가-행전의 구원을 “Salvation inaugurates The Kingdom, delivers the sinner, forgives sin, provides the Spirit, and calls for committed and faithful living in the context of the kingdom's future consummation.”으로 표현한다 - Luke, vol 1: 1:1-9:50, BECNT 3 (Grand Rapids: Baker, 1994), 34.
39) R. N. Longenecker, “Taking up the Cross Daily: Discipleship in Luke-Acts,” in Patterns of Discipleship in the New Testament (ed.) R. N. Longenecker (Grand Rapids: Eerdmans, 1996), 50-76; J. B. Green, “‘Let them Take up the Cross Daily’: The Way of Discipleship,” The Theology of the Gospel of Luk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102-121; 허주, “주여 … 기도를 …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기도를 통해 본 예수님과 초대교회 경건생활의 필연적 상관성 – 누가복음-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제18회 바른교회아카데미 연구위원회 세미나 미발행논문집 (2015): 100-12를 보라.
40) ‘기도 ’ 또는 ‘기도하다 ’라는 용어가 마가복음에 13번, 마태복음에 17번, 누가복음 에는 21번 나타난다(참조, 사도행전에는 25번). Kyu Sam Han, “Theology of Prayer in the Gospel of Luke,” JETS 43 (2000): 675-93을 보라.
41) 예수의 제자에게 소유의 탐심 또는 집착이 어울리지 않는 삶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12:13-21; 16:10-13, 19-31을 고려할 수 있다. 누가-행전의 재물과 구제에 대한 주제 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문헌을 참조하라: W. Pilgrim, Good News to the Poor: Wealth and Poverty in Luke-Acts (Minneapolis: Augsburg, 1981); L. T. Johnson, The Literary Function of Possessions in Luke-Acts (Missoula: Scholars, 1977); C. M. Tuckett, “Luke and the Christian Life: Poverty and Possessions,” Luke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6), 94-110; 김경진, <누가신학의 제자도와 청기기도> (서울: 솔로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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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8일 수요일
누가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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