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에서의 일제 군국주의 파시즘의 하부동원체제 곧 신사참배체제는 제국적 불일치라는 상황 속에서 계속 견고해지고 있었는데, 한국교회가 신앙의 이원론으로 교회재산을 보호하고, 성도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서 어그러지기 시작했고, 이 체제에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일제 군국주의, 국가주의에 신앙이 포섭되고, 전쟁동원 상태, 거기에 적극적으로 한국 교회가 교리의 변질과 군사동원체제의 하부구조로 참여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일제는 1931년부터 만주와 중국 본토 등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일본의 전쟁을 위해 한국인을 마음대로 동원하려고 전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황국신민화정책을 전개하는데, 신사참배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신도(神道)는 일본인들의 정신생활의 기반이 되는 민족신앙입니다. 신사에는 엄연히 제사와 기도 등 여러 가지 종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일반 민중은 신사를 종교로 여기고 있습니다. 더욱 문제는 일제하 신사참배는 일본제국 군국주의 상징인 일왕에 대한 충성맹세와 참배를 의미했다는 사실입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설치와 더불어 신사 설치를 장려하였고, 서울의 남산에 조선신궁까지 세웠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부터 국민정신 총동원하기 위해서 전 한민족에서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합니다.
이런 신사참배에 거부한 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주기철 목사처럼 투옥당하고, 죽어갔습니다. 또한 거기에 거부했던 고신의 전신이나 침례교의 전신인 동아기독교회 등의 교단들은 국가의 수혜를 받지 못해 지금도 성장하지 못하고, 교세가 습니다. 고신교단의 선구자가 되는 분들은 잔혹하게 고문, 투옥, 탄압받고 침례교의 전신인 동아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교단 자체를 해체합니다. 실제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에 의해 해체당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세가 크지 못하고 축소되거나 소수자로 한국에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주류 기독교 대부분이 신사참배에 참여합니다.
이 신사참배체제 문제에 있어서 좌우가 없습니다. 김재준 등도 장로교가 나누어지기 이전에 장로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습니다. 진보든 그 반대편이든 다 결의하고 거기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신사참배체제는 단순히 일왕을 모신 신사에 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군국주의 파시즘 일본이 시키는 것은 다한 일제 군국주의 파시즘의 하부동원체제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이었습니다. 군국주의의 하부동원체제로 교회가 조직되어 멸사보국행위라는 명분 아래 전쟁 동원하고, 국방헌금하고 징병모집에 적극 참여하고, 위안부도 보내고, 그 동원령을 내렸으니까… 돈 모아서 비행기 헌납하고… 이런 일을 교회가 전체 교단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신사참배의 양태에 대해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온 『친일인명사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양이 많긴 하지만, 중요한 내용인지라 요약해서 인용하겠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정책에 따라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1939년 9월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했다. … 1937년 7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장로회 총회연맹에 보고된 장로교의 친일행위는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국방헌금 1만 5803원24전, 휼병금 1726원46전, 유기(鍮器) 308점, 시국강연 1355회,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였다. 전국에 26개 노회지맹이 결성되었고, 731개 애국반이 조직되었다. 총독부는 장로회 총회가 1년에 한 번밖에 열리지 않기 때문에 상설적인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1940년 9월 총회에 상치위원회를 구성하고, 10월 이 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이른바「조선예수교 장로회 혁신 요강」을 결의하여 시행케 했다. 1941년 8월 ‘조선장로교도 애국기헌납기성회’를 조직하고 모금을 시작하여 1942년 2월 ‘육해군에 애국기 1대와 육전기관총 7정’의 대금으로 15만 317원 50전을 냈으며, 그 후 들어온 자금으로 같은 해 6월 ‘육군환자용 자동차 2대’의 기금으로 2만 3221원 28전을 조선군사령부에 냈다.
조선감리교에서는 수장인 양주삼 총리사가 1936년 4월 10일자 『조선감리회보』에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게재함으로써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총독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순응’하도록 했다. … 감리교회가 본격적으로 친일에 나서게 된 것은 1939년 9월 감리회 총리원 이사회에서 정춘수 목사가 감독으로 피선되면서부터였다. 정춘수 목사는 1940년 여름 국민정신총동원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을 결성하고 이사장을 맡았으며, … 1941년 10월 이사회를 열고 “전시하 황국신민으로써 종교보국에 충성을 다하기로” 결의했다. 1942년 2월 각 교구장에게「황군 위문 및 철물헌납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교회종도 헌납하여 성전(聖戰) 완수에 협력”하도록 지시했고, 같은 해 5월 일제의 ‘징병제 실시’ 예고와 관련해서도「공시」를 통해 철저한 준비와 참여를 독려했다. 1943년 10월 일본교단 임시총회에서 새로 제정된 교단규칙(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규칙)을 가결하여 실시했다. 1944년 3월에 개최한 교단상임위원회에서는 경성, 제물포, 송도, 해주, 평양, 진남포, 원산, 강릉, 강경 등지에 있는 34개의 교회를 폐쇄하여, 그 재산을 팔아 비행기 3대의 헌납 기금으로 바칠 것을 결의했다. 1944년 4월부터 수천 원의 돈을 들여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을 설치하기로 하고 그 회장은 정춘수 통리사, 부회장은 이동욱 목사, 관장은 갈홍기 목사가 맡기로 하여 1944년 9월 개관 특별행사를 열었다.
성결교회가 조선총독부 최대의 외곽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단체로서 참가하기로 결정한 것은 1939년 9월 제2회 연회에서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39년 10월 경성 성서학원 대강당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성결교 회연맹 결성식’을 갖고, 박현명 목사가 이사장을 맡았다. 1940년 7월 각 지방구역에 지부장을 두고, 각 교회에도 애국반을 조직하게 했다.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되자, 성결교회도 10월 22일 임시연회에서 국민총력 성결교회연맹으로 개편하고 이명직 목사를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1943년 5월 이른바 기구를 ‘쇄신’하여 ‘일본기독교 조선성결교단’이라고 명칭을 바꾼 뒤 이명직 목사가 통리를 맡았으며, 전국을 6교구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재림 교리 문제로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아 1943년 12월 교단 해산 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산했다.
구세군(救世軍)에서도 1938년 7월 일주일 동안 ‘국민정신총동원에 대한 특별기도회’를 열고 ‘황군위문금’을 모금해 헌납했다. 영국 구세군 본영과 영국인 선교사의 지휘를 받던 구세군 조선본영은 일제가 영국과 적대관계가 되자 1940년 10월 조선본영 사령관 토마스 윌슨 소장이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조선인 사관 황종률을 대표자로 임명했다. 이들은 일제 당국의 지도에 순응하여 같은 해 11월 「조선구세군 혁신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교단 명칭도 조선구세군에서 조선구세단(朝鮮救世團)으로 바꿔 일본인 사관 사카모토(坂本雷次)가 단장을 황종률이 총무부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체제 ‘개혁’과 친일에 나섰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1』, p.49-50)
이건 개신교만이 아니라 가톨릭도 똑같았습니다. 가톨릭은 노기남 주교란 분이 주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이 노기남 주교와 인연이 깊으신 분이 지금의 정진석 추기경입니다. 친일의 양상이 조직적인 것은 가톨릭도 똑같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천주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총독부와 관계가 원만한 편이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없진 않았으나, 이 문제도 1932년 교리문답의 수정과 1936년 교황청 포교성의 지시에 순응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총독부의 독려에 따라 8월 15일 종현천주교청년회에서 ‘황군에 대한 무운장구 및 국위선양 기도회’를 열고 고문신부로서 노기남 신부가 참여하여 시국강연을 했다. 이후부터 각종 시국행사에 동원되다가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을 조직하여 국민정신총동원 조선 연맹에 가맹했다. 1937년 7월부터 1939년 말까지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천주교계의 친일행위는 시국관련 기원미사 2만 9622회, 시국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와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 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됨에 따라 그 다음 달인 11월 10일 국민 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1941년 2월호 『경향잡지』를 통해 매월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지키며, 애국주일에는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내고, 미사 전후에 연맹 상회(常축)을 거행하며, 미사 중 시국에 대한 강론과 미사 후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단체로 하도록지시했다. … 1941년 5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 연맹은 총회를 열어 이른바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확립’과 신도(臣道) 실천’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 무렵 경성교구연맹 이사회에서 ‘군기헌납운동을 벌이기로 하여 매월 1인 1전 헌금을 하게 했다. 1942년 3 월『경향잡지』를 통해 ‘대동아전쟁 기구(祈求)’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각 성당에서는 미사 끝에, 각 가정에서는 조과(朝課)나 만과(晩課) 끝에 기도하도록 통지했다. 1942년 9월 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이 노기남 주교에서 남상철로 바뀌고, 1943년 10월 이사장이 직접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주최 징병제 관련 강연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장연․신천․제천 등지에서 강연했다. 노기남 주교는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1943년 11월 6일 임시특별지원병(학병) 시행을 계기로 적극적인 내선일체, 대정익찬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기독교, 천주교, 불교, 천도교 등 종교단체가 연합하여 조직한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천주교측 위원으로 참여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1』, 51-52)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 및 가톨릭의 신사참배는 단순한 신사참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사참배를 통해서 관철된 일본의 제국의 질서, 군국주의 동원체계, 국가주의와 신앙이 혼합된 콘스탄틴적인 혼합주의가 기독교 국가체제 안에 포섭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이 일제 군국주의 파시즘 하부동원체제인 신사참배체제가 인적, 물적 청산이 전혀 되지 않은 채 미군정의 "일제하 행정관료 재등용정책, 적산불하" 등을 경유해 지금도 모습을 달리해 동일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와 같은 책에서 보듯이 유신개발독재는 일제 군국주의 파시즘의 근대적 재현이었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이 신사참배체제가 우리 사회에 견고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상징물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활용해, 즉 악한 정사와 권세와 결탁한 교권주의자들이 국가의 권력을 활용해서 교회 안의 자기의 지위와 재산을 보호받고 또 유지해나가고, 그 대가로 끊임없이 정신분열적인 신앙의 이원론 구조로 국가 이데올로기에 부응합니다. 신앙을 이데올로기화해서 지극히 정치적인 행동을 하면서 마치 사회정의를 위한 정치적인 참여가 비신앙인 것처럼 끊임없이 비방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를 노골적으로 일삼으며 복음대로, 말씀대로 사는 제자들을 오히려 비난하는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복음의 변질과 제자도의 왜곡, 정신분열적인 기복신앙, 번영신학의 정신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사참배체제입니다.
신사참배체제란 한 마디로 일제 군국주의 파시즘의 하부동원체제인 콘스탄틴적 혼합주의가 관철된 준중심부/주변부인 대한민국에 제국적 불일치와 제국적 일치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기독교 국가체제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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