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일 화요일

레너드 스윗의 「미래 크리스천」

 
레너드 스윗의 미래 크리스천
 
미래 크리스천이란 단순히 시간적 의미로 다음 세대의 크리스천을 뜻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과거나 현재의 크리스천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미래 교회 학자인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 박사는 미래 크리스천이란 단지 세대적 구분으로 한 개인이나 집단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단자라고 정의한다.
 
내일을 잡아라
미래 크리스천의 원명 Carpe Manana(카르페 마냐나)는 스윗 박사가 만들어낸 라틴어 ‘Carpe’(잡다)와 스페인어 ‘Manana’(내일)의 합성어다.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가 지속되는 변화의 현장에서 내일을 잡는하나님의 뜻을 붙잡고과감한 삶의 항해를 이어가는 사람이 바로 미래 크리스천이다. 이 항해는 믿음과 비전을 뜻한다. 한 개인이 지금 어떤 단계에 있을지라도 마이클 J. 폭스가 주연한 영화 <백 투 더 퓨처>처럼, 미래를 향해 성령님의 타임머신에 올라타야 한다는 것이다.
 
스윗 박사는 미국 뉴저지 주 드류신학대학교 전도학 석좌 교수이며, 조지폭스대학교 명예 교수로 있으면서자신이 설립한 세계적인 미래 교회 연구 센터인 스피릿 벤처 미니스트리(Spirit Venture Ministries, www. leonardsweet.com)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는 학계와 교계를 망라해 미래 교회의 청사진들을 쏟아내는 독보적인 미래 교회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또 그는 제3밀레니엄 시대를 위한 새로운 신학 교육의 유형을 창조하는 ‘NexSem Project’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는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미래 교회(The Postmodern Pilgrims),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Jesus Drives Me Crazy), 모던 시대의 교회는 가라(AquaChurch), 귀 없는 리더? 귀 있는 리더(Summoned to Lead) 등이 있다. 그의 홈페이지에 스윗 박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도발적인 사상가들 중에 한 명이다.” “어떤 교회 지도자도 21세기의 바다를 어떻게 항해해야 하는지 그보다 더 잘 이해하지 못한다.” “엄청난 상상력과 균형 감각 그리고 매력을 지닌 작가다.” “미국에서 레너드 스윗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교회 지도자를 상상할 수 없다라는 말이 올라와 있어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알 수 있다.
 
새 천년이 시작되면서 찾아온 미래의 첫 인사는 소위 ‘Y2K’라는 경고 문구였다. 2000년을 인식하지 못하는 구형 컴퓨터에 의해 작동되던 수많은 기술 문명의 이기들이 돌연히 위험의 요소로 변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윈도즈(Windows)라는 개인용 컴퓨터 작동 시스템이 출현하기 전에 사용되던 컴퓨터 언어를 조작할 줄 아는 기술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먼지투성이가 돼 버린 옛 기술이 환영 인파의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스윗 박사가 말하듯이, 새 천년의 위협은 밀레니엄 버그(Y2K)가 아니라 러브 버그라는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컴퓨터 작동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는 파괴 프로그램이 인터넷이라는 통신망을 통해 마치 역병처럼 전파된 것이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분장한 채 말이다.
 
미래 사회의 이민자에서 주권자로
미래는 더 이상 시간적 개념으로 이해될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향수를 달래주는 복고풍에 대한 관심은 옛것이 미래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스윗 박사가 말하는 고대 미래 교회’(AncientFuture Church)란 미래 교회와 미래 크리스천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신앙은 복고적이자 혁신적이며 과거를 상기시키는 새로운 것이다. 고대 미래 신앙(이 부분은 미래 크리스천의 편집 과정에서 실수로 고대의 미래 신앙이라고 오역돼 있음)은 박물관의 유물로서가 아니라 아직도 살아 있는 영향력을 지닌 히포의 어거스틴, 본 회퍼, 시에나의 카타리나, 자비에를, 예브스 그리고 츠빙글리 등의 인물을 탄생시켰다”(26).
 
따라서 스윗 박사는 미래 크리스천을 토착민 즉 미래 환경에 적응한 사람들과 미래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할 이민자들로 이미지화해서 제시한다. 역자가 언급하듯이, “본서에서 스윗 박사는 귀화 강좌라는 은유를 통해 미래 사회에서 이민자가 돼 버린 교회에게 미래 문화의 시민권자로 되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이민자에서 시민권자로의 이동은 문화적 적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신앙적 결단이며 각성을 뜻한다”(10).
귀화 강좌는 다음과 같이 9가지 주제로 제시된다. 수동에서 디지털로, 직선에서 곡선으로, 말에서 이미지로, 규모에서 속도로, ‘일리 있는 말에서 감동을 주는 말, ‘나는 누구인가?’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분명함에서 모호함으로, 외부 세계에서 내면 세계로, 시계 태엽 오렌지에서 웹 그린으로이다. 이는 모던 사회에서 포스트모던 사회로, 산업 사회에서 후기 산업 사회로 그 전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변화(change)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변형(morph)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여기서 변형이란 한 가지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이동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 즉 때로 복잡하게 엉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창조적 혼돈 속(비단선적 우주)으로 회귀하는 것을 말한다.
기술 문명의 경이적인 발전은 생활 양식뿐 아니라 사고 방식까지도 뒤바꾸어 놓고 있다. 과연 기술화되는 세계가 인간적인가 아니면 비인간적인가에 관한 질문은 과거와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 외에는 그다지 절실한 것이 되지 못한다. 마치 한 개인이 특정 국가에서 태어나 생득한 시민권이 그에게 철학적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를 묻는 것과 같이, 이것은 비판과 재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세대 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느 세대도 다른 세대를 향해 일방적 가치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른 세대를 배우고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스윗 박사의 대답은 명확하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죄는 커미션(commission, 죄를 범함), 오미션(omission, 태만)도 아니다. 그것은 노 미션(no mission) 즉 선교하지 않는 것이다.” 디지털이 수동의 시대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단순 명료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미래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새로운 문화와의 소통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전제로 스윗 박사는 모던 사회가 문자 해독 능력(literacy)을 소통(communication)의 기본 요건으로 보았다면, 미래 사회는 영상 해독 능력(graphicacy)이 소통의 필수 요건이라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지능은 은유적이기 때문에 영상 해독 능력은 문자 해독 능력보다 더욱 강력하다고 한다. 더욱이 은유는 언어보다 더 영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성경의 문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전 문화에 보다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스윗 박사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토착민(미래 크리스천)들에게 보여주고자 한다면,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고자 한다면, 성경이 지닌 은유적인 힘을 호시탐탐 노리는 문화가 기독교 고유의 이미지와 형상을 강탈하기 전에 그것들을 사용하는 게 좋다”(122).
 
미래 크리스천을 향한 영적 교회
계속되는 귀화 강좌에서 스윗 박사는 변화의 성패가 규모보다 속도에 좌우되고, 이해보다 감동에 초점을 맞춰야 하며, 지위보다 역할이 강조됨을 지적한다. 이는 외형을 중요시하는 모던 사회의 성향을 거부하고 미래 세대는 내면 곧 참된 것’(real thing)을 찾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마치 먼 길을 돌아 본향으로 가는 방랑객처럼 미래는 원초라는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닐까?
 
스윗 박사가 말하는 내면 세계는 영적 세계를 뜻한다. 그는 토착민을 신중독자들’(godaholics)이라고 지칭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적 추구의 시대를 일궈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토착민들에게 있어서 영적 추구가 교회로의 복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은 단호하다. 영성은 환영, 종교는 반대다!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서 영성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변화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긍정적 발전이다. 그런데 이런 변화 속에서 교회가 설 자리가 없다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스윗 박사는 교회는 모든 것을 시도해 보았다. 정작 필요한 한 가지(영적 교회가 되는 것)만 빼놓고 말이다. 포용력을 가지려고 교회는 노력했다.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다. 프로그램 지향적인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다. 구도자들에게 민감한 교회가 되려고 노력했다”(229)면서 미래 크리스천을 위한 영적 교회가 될 것을 강력히 주문한다.
그렇다면 과연 영적 교회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영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 말해, 일상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을 신비적이고 정신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가진 교회이다. 본서에서 비만이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영적으로 비효율적이다라고 선포하는 한 복음주의자의 설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 대한 관심 곧 환경 문제에까지 옮겨져야 한다.
 
세상의 변화와 창조의 중심에서
스윗 박사가 진단하는 미래 크리스천의 신앙은 무엇보다 관계와 경험을 중요시하는 경향을 지닌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소위 포스트모던인들은 원초적 경험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갈망하며, 교회가 자신들의 경험의 터전을 제공하길 바란다. 오순절 운동과 같은 원초적 영성의 등장은 20세기에 가장 두드러진 신앙 운동이 되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오순절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교회가 갖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적(experiential), 참여적(participatory), 이미지 추구적(image-driven), 연결적(connected) 교회를 뜻한다. 스윗 박사는 이 네 가지 요소의 앞 글자를 모아 EPIC 교회의 역할을 역설한다.
교회는 세상의 변화에 창조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유일한 원칙이 된다. 따라서 교회는 변화를 준비하고 변화에 참여하며 변화의 주역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어느 때보다 창조적이어야 한다. 스윗 박사는 창조주를 예배하는 공동체가 창조성의 빈곤을 체험한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미래를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스윗 박사가 즐겨 사용하는 흥미로운 예가 있다. 얼마 전에 유행하던 매직 아이(Magic Eye)라는 책을 기억할 것이다. 각양각색의 점들로 채워져 있는 책의 표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면 그 안에서 3차원의 형태가 나타난다. 그런데 누구나 3차원의 형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요령이 있다. 스윗 박사는 숨은 그림을 보는 방법이 미래를 준비하는 창조적 크리스천의 태도를 일러준다고 말한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초점을 포기하라(lose focus), 통제를 포기하라(lose control)는 것이다. 즉 교회와 세상 전체를 바라보면서 전통이나 기존의 제도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감격적인 미래의 교회가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대하라는 것이다. 미래는 시간 저 편에 있는 게 아니다. 미래는 매일 순간마다 다가오는 현실이다. 미래 크리스천으로서 교회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돼야 한다.
 
스윗 박사는 새 천년이 시작된 지금은 여명인가, 석양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분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포스트모던의 문화는 위기의 문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자로 위기가 무엇을 뜻하는가?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를 말한다. 히브리어에서 위기를 뜻하는 ‘mash-ber’를 살펴보자. 이 단어는 고대에서 산모가 출산할 때 앉았던 의자를 말한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창조의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세 번째 천년의 첫 10년 동안 교회는 문 밖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환희는 선택이다. 열정도 선택이다. 교회는 두 손을 펼쳐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미래와 악수하기를 거부할 것인가?”(246). 그리고 그는 내 교회는 강한 성이요가 아니라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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