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에 대한 이런 저런 우려에 대해
- 아직 사회적 교회적 합의가 안 되었는데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불평이 있다. 차별금지법은 이미 2006년부터 발의되었다. 수 차례 발의되었지만, 그때마다 보수 기독교계가 나서서 계속해서 무산시켰다. 그리고 2020년이니 이미 10년이 넘어간다. 그 긴긴 동안 뭐하고 이제 와서 아직 합의가 안 이루어졌다니. 그것은 게으름이요 무지를 드러낸 소리일 뿐이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는 이들이 대략 90퍼센트 가량이었다. 결국 일부 보수 개신교를 제외하고 대체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 셈이다. 박근혜 탄핵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정이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탄핵이 부당하다는 소리가 거의 20퍼센트 넘게 존재한다. 어떤 합의를 해야지 개혁과 변화가 가능할까.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성 소수자에 대한 합의라니, 왜 누군가의 존재가 사회의 합의에 의해 인정되어야 하는가? 왜 보수 개신교계가 누군가의 성별 정체성을 합의해 주어야 하는가? 왜 보수 개신교계가 성별 정체성의 다양성에 대해 합의할 때까지 나머지 사회 전체가 기다려야 하는가? 이미 많은 소리가 있어 왔고, 많은 괴로움이 보고되었건만,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무관심과 게으름 말고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으로 차별금지법 반대하는 이들은, 기존 교회가 성 소수자를 환대하지 못했음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차별금지법 조차 반대하는 처지에, 대체 기존 교회는 그들을 환대하지 못했던 과거를 어떻게 반성하자는 것일까? 오직 립서비스일 따름이다. 이 문제와 연관해 계속 반복되는, '죄악은 반대하되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이 왜 허망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 차별금지법의 네 영역 가운데 고용 영역이 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가 교회 직원에 지원했을 때 그 법으로 인해 차별하지 않아야 해서 뽑아야 한다는 어려움을 우려하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가령, 불교인이 교회 직원을 뽑는 데에 지원할까? 그 곳이 교회임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지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렇더라도 현재 그 사람을 종교 이유로 안 뽑거나 불이익을 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기는 교회 직원에 동성애자인 분이 지원할까? 어쩌면 누군가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특수한 사례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사유가 되기는 어렵다. 저러한 사례는 달리 다루어져야지, 저런 사례를 끄집어 내어 차별금지법을 우려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저런 가능성으로 인해 우려한다면, 지금 현재 보수 교회에서 자행되는 극심한 차별과 혐오 발언의 현실에 대해 더 깊이 개탄하는 것이 먼저다.
- 교회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 설교 못하게 될까봐 어지간히도 염려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이 목사들이 그야말로 순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저런 소리를 설교랍시고 하게 될 현실이 떠올라 끔찍하지만, 그렇게 설교할 자유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의 영역은 교육, 고용, 재화와 서비스, 행정 서비스 영역이기에, 종교 시설 내에서의 설교나 가르침은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가령, 기독교 학교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라고 가르칠 수 없게 될까봐 우려하는 소리도 있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제발 기독교 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기를. 대체로 저런 기독교 학교는 ‘창조 과학’이라는 사이비 가르침을 확신에 가득 차서 가르치곤 한다. (나는, ‘창조 과학’ 옹호하는 무리와 ‘동성애 반대’하는 무리 사이에 교집합이 상당히 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중대형 크기 교회를 자기 새끼에게 물려준 교회는 대체로 저 교집합에 속할 것이라는 심증이 있다^^) 어떤 기독교인은 ‘창조 과학’이야말로 ‘성경적’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시대는 대체 무엇이 성경의 가르침과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이들이, ‘우리가 이 뜻으로 만들었으니 우리는 이 뜻으로 갈거야’라고 우겨대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적 동기에서 나온 확신이라기보다 ‘이 학교는 내꺼야’라는 그릇된 소유 의식일 가능성이 크다.
기독교 정신의 근본은 사랑, 섬김 같은 가치, 혹은 예수님의 표현대로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 23:23),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이다. 이러한 가치를 결코 양보할 수 없되, ‘창조 과학’이니 ‘동성애에 대한 견해’는 논의될 문제이지, 일방적으로 선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 짐승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이들의 행동으로서 동성 성행위를 규탄한 바울의 로마서 1장과는 달리, 예수를 내 구주로 고백하는 동성애자가 존재하는데, 바울을 근거로 ‘동성애는 죄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며 문제 제기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 못 가르칠까봐 우려하는 것 역시 지극히 협소한 우려이며 부당하기까지 한 우려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의 존재를 두고 죄악이라고 규정하는 말을 못하게 될까봐 저토록 우려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기독교 학교의 학생 중에도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한 성 소수자가 적은 숫자이지만 있을 수 있는데, 그를 향해 ‘동성애가 죄악이다’라는 식의 가르침이 대체 무슨 놈의 자유인가. 그런 자유를 잃게 될까봐 그리도 두려운가. 기독교 학교의 정말 좋은 점은, 일방적 전달과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 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도록 돕는 것, 그래서 언제건 우리가 중요하다 여겼던 것들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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