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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이해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고난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저 유대인들을 향해 분개하거나, 가룟 유다의 죽음을 말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불평하고 뒷말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걸 두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의 수난을 이야기한다면 차라리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대하여‘라고 제목 붙이는 게 더 낫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여러 유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고난을 머리에 한 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금식을 하거나 긴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유익을 준다는 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무 십자가나 십자가 그림을 집 안에 걸어놓거나 십자가 목걸처럼 작은 십자가 장신구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그 십자가가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들을 불행을 막아내는 방패나 부적으로 사용합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고난을 엉뚱하게 묵상한 탓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에 오르실 때 예수님을 따르며 슬퍼했던 여인들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죄 없는 분이 그런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두고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슬퍼해야만 바른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책망하시면서, “차라리 자기 자신과 그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들을 위해서 울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까지 말한 방법들, 즉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잘못만 들추거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지켜준다고만 말하거나, 죄 없는 사람이 왜 고난 받냐며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제아무리 십자가를 많이 이야기하고, 장시간 기도하고, 설교를 수천 번 듣는다 해도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그 심장이 공포로 얼어붙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죄인을 너무나도 가혹하고 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거침 없은 진노와 심판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생명 값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너무 큽니다. 이사야 53:8에 나오는 "그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하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 이토록 고난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죄인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우리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그제사 알게 됩
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심령은 참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죽는 것과 같은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공포로 얼어붙고, 공포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6-37에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고 외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포에 떨면서 사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떨며 부르짖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손을 꿰뚫은 못을 보면서, 그 못이 바로 우리의 잘못된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머리를 찌르고 있는 가시관을 보면서 그 가시가 바로 예수님을 피흘리게 만드는 우리의 악한 생각들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시 한 개가 예수님의 피부를 찌르고 피 흘리게 하는 것을 볼 때, 그 장면에서 우리는 수천 개의 가시가 나 자신을 찔러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그 가시들이 영원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훨씬 더 엄청난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손과 발을 관통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고, 더 많은 못에 박히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을 진동하는 울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순교를 보고서 너희가 어떤 운명에 던져져야 했는지 깨달으라"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울려 퍼져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묵상의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악한 현실의 직시하고, 거기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고난을 참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몸과 영혼에 그토록 무서운 형벌을 받으셨다면,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묵상은 그 어떤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깨달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고난을 알고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강팍하고 굳은 마음을 스스로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이 바로 나의 것임을 이생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옥에서라도 그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생에서 경험하지 않는다면 지옥에서 당하는 길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공포에 떨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모든 것을 직접 겪게 될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이것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심어주시지 않는 한, 그의 고난을 스스로 깊이 있게 묵상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로 나의 죄에 대한 형벌로 경험케 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사모하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알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사색하는 이성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주어집니다.


III.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위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니거나,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거나, 교회에서 어떤 공로를 쌓아 죄를 없애보려는 잘못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케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여러분에게서 떼어 그리스도께로 맡기고, 그분이 나의 죄를 담당하고 해결하셨다는 진리만 신뢰하길 바랍니다.
이사야 53:6에서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24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셨으며, 바울은 고린도후서 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들을 의지하여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그가 부활하심을 통해 죄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이 부활로 인해 우리의 두려움이 비로소 사라집니다.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을 믿으면, 죄에 대한 두려움은 부활의 능력에 의해 삼켜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이런 죄 용서의 능력을 믿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이 믿음을 위해 삶의 자세를 고쳐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공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과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마음을 통과하여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까지 더 높이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처럼 여러분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향해 사랑으로 복종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요한복음 3:16에 있는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말씀 위에서 우리의 신앙과 신뢰는 확고한 것이 되고,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에 대한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죄의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은,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받아야 하는 고난의 모본이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당하고 있다면, 그 슬픔과 아픔이 그리스도의 가시와 못들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길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떠나기 싫은 것을 떠나고, 어떤 것을 억울하게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결박당하고 사로잡히셔서 이리저리 끌려다니셨는지를 기억해보길 권합니다.
속에서 또다시 죄가 고개를 치켜들때 예수님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교만이 여러분을 공격할 때 여러분을 사랑하신 주님이 살인자들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얼마나 조롱과 수치를 당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부정함과 욕망이 고개를 들면, 그리스도의 연약한 살이 찢기고 창에 관통되고 구타당하실 때 그 고통이 어떠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증오와 시기가 여러분을 부추기면서 복수하라고 외칠 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여러분과 또 모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시련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시련이 여러분의 몸과 영혼을 괴롭힌다면, 마음을 굳건히 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 내 주님께서 염려와 슬픔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를 흘리셨는데, 이 정도쯤이야 나도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죽음의 고통과 투쟁을 하셨는데, 종인 내가 발 뻗고 편히 누워있기만 바란다면, 나는 게으르고 부끄러운 종이 아니겠는가!” 이런 묵상의 방법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과 나쁜 습관들에 대항할 힘과 위로를 발견하고,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것이며, 고난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삶과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들이, 그분을 참되게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나타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마음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성한 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진실한 행동과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히브리서 12:3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안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일이 아주 드문 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잡한 설명으로 바꾸어버렸고, 행사로 바꾸어버렸고, 장식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입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성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금요일 설교 (출처: 루터선집 10:203-211; 영어원서 Luther's Works 42:7-14)
*덧)
1. 중앙루터교회 성금요일 저녁예배 설교는 루터의 이 원고를 낭독합니다.
2. 퍼가셔도 됩니다.

* 출처 최주훈 목사님 페이스북

2020년 3월 26일 목요일

동성혼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성찰

동성혼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성찰
김기호교수(한동대)

서 론
정치철학자 너스바움(Martha C. Nussbaum)의 말과 같이 동성결혼(同性結婚, Same-sex marriage)의 문제는 오늘 날 유대교-기독교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 최대의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1) 지난 2015년 6월 미국 대법원이 Obergefell v. Hodges 판결에서 동성혼(同性婚)을 합헌(合憲)으로 결정을 하면서 성(性) 혁명은 역사상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동성애를 죄로 간 주해왔으며 복음주의 기독교는 동성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이미 20개국이상이 동성혼을 헌법적 수준에서 지지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다.
크리스천은 동성혼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동성애(同性愛)에 대한 혐오감정(嫌惡感情) ‘호모포비아’(homophobia)는 정말로 비합리적인 공포심, 적개심, 혐오 감이 혼합되어 있는가?
크리스천들이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 없이 동성애와 동성혼을 정죄 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성적 지향성(指向性)’과 ‘성별 정체성(正體性)’ 그리고 동성혼의 권리가 차별적 대우를 받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동성애 결혼과 이성애(異性愛) 결혼이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인가? 혹은 동성 혼을 최고의 헌법적 가치로 설정하는 것인가?
유럽과 미국 등 서구사회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동성애자들의 요구대로 차별금지 조항에 성적인 지향성이 추가되어 있지 않다. 아직은 우리 사회의 다수가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사법계와 국가인권위는 선도적인 역할을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2)
필자는 한국의 복음주의 진영은 동성애 지향성과 행위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결혼관과 동성애에 대한 판단을 토대로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복음주의적 신학의 성경해석에 의하면 동성애는 명백한 죄이며 동성혼도 아담과 하와를 위해 창조주가 만든 결혼제도가 아니다. 성경의 결혼관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로 이루어진 이성애에 입각한 일부일처제이다. 이외에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동거, 불륜, 성매매, 수간 등은 모두 혐오스러운 죄에 해당된다고 본다.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에 대한 보호와 동성결혼의 권리는 정의로운 요구는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지 않은 것을 권리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3)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은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결혼관이기도 하고 성경적인 결혼관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와 동성혼으로 양분된 미국 교계와 각각의 찬반 이유들을 살펴보고 마지막 결론에서 동성혼에 대한 한국교계의 대응원리와 대책을 복음주의적 신학과 목회자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한다.


Ⅰ. 결혼과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견해
(1) 성경적인 결혼제도
동성혼의 문제는 성경의 결혼관을 통해 조명해야 한다. 에밀 브루너가 지적한 대로 결혼과 국가는 창조세계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다. 결혼에 관한 창세기 1장과 2장의 본문은 남성과 여성의 창조와 이성애에 근거한 결혼제도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부부로 일부일처의 원형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창세에 만드신 최초의 제도로써 인류의 타락이전부터 존속해온 유일한 제도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2-24, )
신약성경에 예수님은 공생애에서 창세기 기록과 동일한 관점으로 결혼제도를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마19:4-6)
예수님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아담과 이브의 창조기사를 사실로 확인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타락하기 전부터 있던 결혼제도를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보존해야하는 제도로 풀이해주셨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각자의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가정을 형성해야 한다.
최초의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아담은 흙에서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본래 한 몸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결혼제도를 통하여 재(再) 연합하게 된다. 아담과 이브는 단순한 친구관계도 단순한 동거인도 아니며 그들은 오직 ‘한 몸’이라는 표현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신비로운 관계를 이룬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는 것은 부부의 친밀함을 함축한다.
사도 바울은 남녀의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비유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 남녀 부부의 하나 됨과 같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2) 결혼제도의 목적
예수님은 언약으로서의 결혼의 우선적인 목적은 결혼한 부부의 상호간의 사랑과 협조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시니라.”(창 2:18)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배필이요 친구요 협조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장 1항은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남자이든지 동시에 한 아내 이상을 가지거나 어떤 여자든지 동시에 한 남편 이상을 가지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결혼제도에서 또 다른 목적은 출산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출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출산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의 언약이 취소될 수 없기 때문에 출산은 결혼제도에서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 이차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성경의 가르침은 남성과 여성의 성별로 창조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의 성별에 입각한 이성애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제도이고 부부의 정절은 하나님의 뜻이다. 동성혼은 성경의 이성애에 입각한 결혼관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동성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적 성향이 자연스러운 본성이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고 한다. 이제 다음 장에서 필자는 성경의 동성애 본문을 찾아서 동성애에 대한 원래의 의미를 간략하게 탐구하고자 한다.

(3)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평가
1) 구약성경과 동성애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동성애를 직접 언급하는 본문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19:1-11, 사사기 19:22-30, 레위기 18:22, 20:13이다. 그 외에는 열왕기 본문과 에스겔 선지자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소돔에 대한 평가적 교훈에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 소돔과 고모라
남색(男色)과 항문성교를 의미하는 ‘sodomy’는 구약성경 소돔성의 멸망에서 유래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소돔성은 아브라함의 간청으로 정한 최소한의 기준 ‘의인 열 명’이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멸망한 성읍이다. 소돔성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 본문은 일관되게 소돔성 사람들의 타락을 기록한다. 창세기 13장에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고 기록했다.
주님은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 18:20,21)고 하신다. 소돔성의 남자들은 롯의 집에 있는 방문자들과 성관계를 갖겠다고 소동을 벌였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그러나 반세기 전 베일리(Derrick Sherwin Bailey)의 주장과4) 이 베일리의 주장을 토대로 보스웰(Boswell)은 소돔은 동성애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고 동성애가 소돔 멸망의 핵심요인도 아니라고 주장한다.5) 소돔성의 남자들은 단순히 그 여행자들과의 교제를 원했을 뿐이지 동성애의 성관계를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일리는 히브리어인 ‘야다’(yadah)가 성경에 943번 사용된 것 중에 불과 10회 만이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부 성경의 역본에 “we can have sex with them!”으로 표현 하는 것은 근거 없는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이다.
서우(Soew)는 구약의 다른 본문들(렘 23:14의 끔찍한 일, 간음, 악행, 거짓말, 겔 16:50의 역겨운 일, detestable things)이 동성애에 대한 심판의 직접적인 이유가 아니라고 하며 심판의 원인은 끔직하고 역겨운 일들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베일리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학자들은 ‘야다’(yadah)가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고 보며,6) 스카조니(Scanzoni)와 모렌코트(Molenkott)는 고대 근동에서 지배의 수단으로 성립된 남성 강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필자의 견해로는 서우(Soew)가 동성애를 심판의 직접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본다. 또한 에스겔서의 ‘역겨운 일’은 레위기의 동성애 금지에 대한 표현으로 보는 것도 맞고,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 안에서 폭넓은 문화적 관행이 되었으며 그래서 그 성의 멸망을 피할 수 없게 한 악행의 핵심 요소라는 점은 분명하다.
– 레위기 18장과 20장
레위기 18:22, 20:13은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분명하게 언급한 것으로 동성 간의 성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명문화 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친(親) 동성애 신학자들은 레위기 본문을 동성애 금지조항으로 해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보스웰은 히브리어 ‘토바’(toevah)를 ‘본래 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례적(祭禮的)으로 부정한 것을 지칭한다고 보아 레위기 본문은 이방종교의 우상숭배를 금지한 법이라고 주장한다.7) 그러나 보스웰의 주장의 약점은 ‘토바’(toevah)가 우상숭배에 관련된 행위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악한 것을 명백하게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8) 실제로 잠언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용례는 이방종교의 우상숭배와 무관하다.(잠언 3:32, 15:9) 설사 가나안 종교의 우상숭배와 연관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레위기 본문은 동성애의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라는 점을 너무나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들
여호수아 이후의 사사시대에도 동성애와 연관된 참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삿 19장) 소돔 남자들처럼 기브아의 불량배들도 한 노인의 집에 유숙하려고 온 레위인을 요구한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하니”(삿 19:22) 마지 막 부분을 HCBS 번역본은 그들이 동성애 성관계를 요구하였다고 보아 “Bring out the man who came to your house so we can have sex with him!”로 옮기고 있다.
이 밖에도 신명기 23:17을 새 번역에선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남창이 될 수 없습니다.”로 개역성경은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美童, 카데쉬, 동성애자)이 있지 못할지니”로, KJV에서는 “There shall be no whore of the daughters of Israel, nor a sodomite of the sons of Israel.”(신23:17)로 옮기고 있다. 열왕기에서도 남색(男色)은 정죄 받는 큰 죄악이었다. “그 땅에 또 남색 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왕 상 14:24) 그리고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왕상 15:11-13)

2) 신약성경의 동성애 관련 본문
– 사도 바울의 견해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동성애를 큰 죄로 간주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보낸 서신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라고 말한다.
그리고 디모데전서도 역시 이렇게 말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 1:9,10)
– 기타 신약성경 유다서, 베드로서
바울의 서신 이외에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함이 심판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그리고 사도 베드로 역시 소돔과 고모라의 도덕적 타락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이라고 밝혀 말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벧후 2:6-10)

3) 동성애자들의 성경의 동성애에 대한 내용 반박
동성애와 동성혼 지지자들은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죄로 간주하는 사도 바울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첫째, 그들은 사도 바울이 ‘동성애 성향’과 ‘동성애 탐닉 자’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완전한 동성애자는 여자와의 ‘올바른 성관계’ 를 처음부터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성 애자들이 동성 배우자와 서로 사랑과 진정한 헌신의 관계에 있다면 바울의 정죄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동성애자에 대한 바울의 정죄는 인격적 본성에 반대되는 행위를 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가령 보스웰은 이방인들이 자연스러운 유신론적 성향과 성적인 성향을 포기했다는 것에서 바울의 비판의 핵심이 있다고 본다. 보스웰은 로마서 1:26,27에 서 자연스런 관계는 부도덕함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셋째, 동성애 금지는 시대와 문화에 제한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서우(Seow)는 바울의 비판이 모든 세대에 적용되지 않는 다고 주 장하며, 퍼니쉬(Furnish)는 바울의 전제는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태도에 근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9) 그들은 동성애가 우상숭배와 관련되었을 경우에 한해서만 죄가 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유다는 모두 동성애와 성적인 음란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원인이라고 공통되게 지적한다. 존 스토트는 디모데전서 1:10의 (불법한 죄의 예들) ‘간음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와’(for the sexually immoral and homosexuals)에서 ‘남색 하는 자’로 해당하는 헬라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말라코스’(μαλακός)는 남색의 상대자로서 수동적 역할을 하는 남성을 가리키고 ‘아르세노코이테스’는 동성애 관계에서 적극적인 남자 역할을 하는 동성애자를 가리킨다.10)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의 목록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일반적으로 남성 매춘부와 동성애 제공자로 여겨지는 ‘말라코이’(malakoi)를 포함시킨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arsenkoita’와 ‘pornia’를 그 목록에 포함시킨다. 상술한 대로 성경에서 동성애를 언급하는 구절은 동성애를 금지하며 분명하게 죄로 규정한 것을 알 수 있다.
베일리는 바울을 포함하여 성경의 저자들이 ‘성적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며 성경의 진리를 시대에 따라 제한 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보스웰은 ‘말라코스’가 동성애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동성애를 죄로 지칭하는 성경의 본문이 상대적으로 소수이긴 하지만 그것이 친 동성애적 신학자들의 논거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죄의 지향성과 죄의 행동과 결과를 명료하게 구분한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desire)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9)고 말씀하였다. 죄의 소원은 죄를 짓는 성향으로 보아도 된다. 동성애를 포함한 죄를 향한 성향(소원)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갖는 특성이다. 사람은 말씀과 성령으로 그 죄의 성향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동성애적 지향성’을 알지 못했다는 비난은 ‘성경이 동성애를 허용할 수 있다’는 근거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존 스토트는 친 동성애적인 성경본문 해석을 단호하게 오류라고 비판한다. 스토트는 “이런 주장이 매우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성경자료를 이런식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 관행을 거부하는 것은 고립되어 있고 분명치 않아서 얼마든지 논리를 뒤집을 수 있는 몇몇 증거본문 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11) 그는 동성애 관행에 대한 성경의 부정적 인식은 창세기의 성욕과 결혼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동성애가 소돔과 고모라의 유일한 죄는 아니지만 그것을 포함한 심각한 죄들의 고착화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교훈이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금지는 창세기의 최초의 결혼제도에 연결되어 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과 이성애의 결혼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Ⅱ. 동성혼에 관한 미국교회와 사회적 상황
(1) 미국 교계의 상황
1) 양분된 미국교계
동성애 성향과 동성혼 인정과 투쟁은 현대 사회의 중대한 이슈이다. 한동안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성향을 숨겨왔지만 이제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벽장에서 나와서 공공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동성애적 지향성을 차별금지법으로 보호하고, 헌법적 수준에서 동성혼의 합법성을 얻게 되어 더욱 거세게 사회전반에 확대되어가고 있다. 서구사회의 대부분의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자들이 있으며 동성애의 축제는 도시들의 정규행사가 되어버렸다. 동성애가 과거역사의 교회사에 엄격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의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 황제 저스티니안(Justinian)은 동성애자들에 대해 교회의 감독 하에 참회를 요구한 온건한 입장이었던 반면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동성애자들을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12) 아직까지는 로마 가톨릭은 동성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까지인지는 불확실하다.
미국의 개신교는 교단에 따라 동성혼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동성혼을 지지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내홍을 겪고 있으며 일부는 교회 재산을 포기하고 탈퇴를 하고 있다. 특별히 미국에서 주요교단과 복음주의 진영은 동성애와 동성혼의 문제에 대해선 정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가령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미국 연합그리스도교회(UCC)13), 미 연합장로교회(PCUSA)14), 미 성공회15), 미 복음주의 루터교회(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16), 미 침례교회(American Baptist)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교회(Disciples of Christ)는 동성애와 동성혼을 지지하는 주요교단들이다.
이에 비해 복음주의 진영은 동성애 성직 임명을 거부하거나 반대하고 있으며 동성혼을 성경과 배치되는 세상의 가치로 보고 허용하지 않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동성혼을 반대하는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미국의 개신교단들은 가장 큰 교단인 미국의 남침례 교단을 포함한 대부분의 침례교단들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와 같은 오순절교단, 하나님의 교회, 나자렛교단을 포함한 성결계통 교단들 및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독립교단들이 동성혼을 반대하는 진영에 속한다.

2) 동성혼을 지지하는 근거 : 이성과 문화 중심
동성애와 동성혼 지지교단들은 일반적으로 현대사상, 현대과학, 문학, 예술에 개방되어 있으며 그것들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17) 그들은 각기 다른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와 동성혼을 위한 기도, 신학, 예전에서 강력한 유대감을 국내 수준과 국제 수준에서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인정하는 권위의 근거로는 성경, 전통, 이성(理性), 인권이다. 개신교의 주요한 교단들은 이 네 가지 권위적 근원을 통해서 동성애 문제에 접근하고 동성애 지향성과 동성혼의 권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치 있는 선물이며 성경과도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게이(Gay) 신학자들은 이성을 동성애 문제에 대한 권위로 사용한다. 이성(理性)에의 개방성은 두 가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문화(文化)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인간의 이성(理性)은 인간의 행동의 패턴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우주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탐구와 인류의 문화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 운 통찰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동성애 문제도 심리학자, 사 회학자,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의존한다는 특징이 있다.
둘째,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성경과 전통의 요소에 대한 비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들은 성경의 저자들은 어느 정도 그 들의 상황 속에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저자들은 현대의 과 학과는 양립되지 않고 수용되지 않는 고대의 우주관을 가지고 있 으며 현대의 서구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노예제도, 절대군주제도, 여성비하와 같은 문화를 지지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동성애에 대한 진술도 현대의 지식에 비추어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경의 일부를 비판하는 것은 성경전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 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율법과 명령이 현대의 문화에 적용되지 않는 것은 일차적으로 성경의 저자들이 문화적 제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법과 사회제도로 부터 존중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동성애자의 인권과 동성혼의 권리도 법과 사회로부터의 존중 이라는 차원에서 정당한 요구라는 것이다.18)
3) 동성혼을 반대하는 근거 :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반(反) 동성혼의 입장을 가진 복음주의 교단들은 인간의 이성(理性)과 전통을 권위의 근거로 삼는 주류 교단의 의견에 반대한다.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자들에게는 성경이 유일한 권위의 근거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모든 세대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역사와 문화(文化)를 초월하여 적용되어야 하며 크리스천들은 성경에 순종해야 한다. 남침례교의 신조는 “거룩한 성경은 하나님이 영감을 주신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이고, 성경의 목적은 구원이며, 성경은 오류 없는 진리이다.”라고 진술한다.19) 이처럼 성경에 완전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성(理性)과 문화(文化)를 근거로 삼아 성경을 비판하고 성경의 저자들을 문화에 예속 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2) 교육계와 성적 지향성
미국 버지니아 주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회는 2014년 11월에 학교에서 보호되어야 할 권리 항목에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을 추가했고 2015년 5월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을 교육위원들이 투표한 결과 10대 1로 가결했다. 학부모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육위원회가 압도적으로 가결한 이유는 ‘성 정체성’을 보호 하지 않을 우 연방정부가 카운티 교육국에 4,200만 달러의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단체는 LGBT 활동조직으로서 인권캠페인(Human Right Campaign)을 통해서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 법안(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SOGI 법안)을 신용, 교육. 고용, 연방예산, 주택, 법정의 모든 영역에서 ‘성 정체성’을 보호되어야 할 항목으로 추가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회의 결정은 성 소수자의 보호라는 측면보다는 새로운 문제들을 생산하고 있다. 가령 성별 정체성에 따르면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의 성별 정체성을 가졌을 경우에 여성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면 학교의 수학여행 중에 여성 정체성을 가진 생물학적 남성이 여학생들과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것도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LGBT활동 단체들은 ‘차별금지 법안’이 보호할 항목에 ‘동성애적 지향성’을 삽입하기를 추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미국이나 유럽처럼 ‘동성혼’을 법제화하는 것이 성소수자의 차별을 없애고 성소수자에게도 보편적 인권을 실현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동성혼 지지자들은 과거의 인종차별이 도덕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을 차별하는 것은 부도덕한 짓이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활발하게 그들의 의견을 대중화 및 법제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은 동성애가 차별금지 조항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나아가 동성혼이 법제화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는 예산을 통해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 대해 성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왜 그 것이 정당한 조치인가? 인류의 역사 가운데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자연법에 의존하고 있는데 자연법을 어기는 정책을 강요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러므로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적 특성에 의존하는 ‘성 정체성 차별금지’는 앞으로 종교의 자유, 경제적 자유, 아동복지에 관련된 많은 문제를 수반할 것이 자명하다.

(3) 동성혼 지지자들의 논리 : 동성혼 차별은 인종차별과 같다.
동성혼 지지자들이 가장 중요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인종차별과의 비유’이다. 동성혼 옹호자들은 올해의 대법원의 판결(Obergefell v. Hodges)은 낙태와 관련된 Roe v. Wade처럼 국민적 논쟁을 수반하지 않고 인종 간 결혼 금지를 철폐시킨 판례 Loving v. Virginia처럼 보편적인 도덕성으로 수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동성혼을 반대하는 것은 인 종 차별 주장처럼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차별금지법 조항에 ‘동성애 지향성’과 ‘동성혼의 권리’를 추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LGBT는 동성혼의 문제를 인종의 문제와 같은 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전통결혼의 신념에 따라 혹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종간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동성혼 반대자들은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은 편협한 사고를 가진 비도덕적인 사람들이기에 그에 따른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동성혼 합헌판결(Obergefell v. Hodges) 이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서의 전통적인 결혼을 결혼제도의 본질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편협하고 완고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가령 성적 지향성에 따라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에 비판하는 일반 시민들을 관용이 없는 비도덕적인 사람들로 왜곡하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결혼 지지자는 근거 없이 동성혼을 반대하고 성적지향성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하고 편협한 사람들인가? 그들은 동성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인가? 전통적인 결혼을 지지자들은 인종차별주의 자처럼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미국에선 Roe v. Wade 판결이후 미국 법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여성 혐오주의자(anti-woman)로 매도당하거나 구금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공공 정책에 대한 토론에서 합당한 지위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관용의 정신이 동성결혼 반대자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가? 정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전통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종교와 양심에 따라 사는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정치와 도덕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정치철학자 존 롤즈에 의하면 미국 민주주의의 힘을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에서 찾는다.20) 그는 유럽 교회의 쇠퇴는 정교분리가 실현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유럽의 기독교는 국가의 권력을 사용해서 종교재판을 했고 억압적인 국가기관으로 전락했다. 국가와 교회 는 분리를 통해 각각 최상의 기능을 발휘한다.

(4) 동성혼에 대한 반대 논거
1) 동성혼 반대와 인종차별은 동일한 도덕적문제가 아니다.
동성혼 지지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동성혼의 문제는 인종 간 혼인금지의 문제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심리적인 성정체성은 생물학적인 인종과 동일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생물학적인 차이에 의한 차별을 정당화한 인종 간 혼인금지 조항은 철폐되는 것이 정당하고 필연적이지만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과 성 정체성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동성혼의 반대를 인종주의나 인종 간 결혼금지에 비유하는 것은 논리적 역사적 오류에 해당된다. 세계역사에서 인종 간 결혼금지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 법안은 일종의 인종계급 카스트제도가 구현된 사회 안에서만 존재했었다. 그러나 남녀 간의 결합으로서의 결혼제도는 인류역사상 처음부터 있었던 규범이며, 위대한 사상가들과 동서양 종교들은 이성애에 입각한 결혼제도를 모두 인정해왔다.
대부분 유신론적 종교는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의 결혼을 자연적인 것으로 가르쳐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라철학, 어거스틴, 아퀴나스에 이르는 기독교 철학,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사상, 로크와 칸트의 근대철학,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같은 사상가들도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연합을 결혼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결혼에 있어서 인종을 고려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등장한 정치 공동체일 뿐이다. 근대 영국의 식민지들에서만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고 처벌한 것은 분명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한 것이었으며 기득권을 지키는 정치적인 동기였을 뿐이다.
결혼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구별은 결혼의 핵심이다. 인종이 무엇이든지 남자와 여자는 결혼으로 연합할 수 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프랜시스 벡위드(Francis Beckwith)에 의하면 인종 간 혼인금지 법안은 보통법(common law)에서는 선례가 없는 것으로 백인의 문화적 주도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지배 계급에 가까운 백인의 인종적 순수 혈통을 보존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법에서는 합당한 결혼의 필수조건은 인종과는 전혀 관계없이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에 의존한다.21)

2) 전통적인 결혼의 보호가 필요하다.
동성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것과 성관계는 결혼을 위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결혼을 약화시킨다. 동성혼은 인류의 오랜 역사동안 가져왔던 전통적인 결혼관을 파괴하려고 한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서의 결혼 이해는 자연법에 근거한 것으로 합당하며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그러나 인종 간 결혼금지는 타당하지 않으며 어떤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인종 간 결혼금지는 대개 사회의 억압을 위한 동기로 작용한 것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서의 전통적인 결혼관은 억압 기제(機制,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가 아니다.
따라서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을 인종문제처럼 다루는 것은 어떤 역사적, 철학적 근거가 없다. 성적 지향은 결코 인종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 보호를 위한 법안(SOGI)를 반대하는 것은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다.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이 보호받는 항목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성적 지향성은 도덕적 평가와 연결되어 있다.
성적 지향성은 인종처럼 생물학적으로 분명한 것이 아니라 지나 치 게 애매하다.
성적 지향성은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약화시킨다.
특히 옥스퍼드 대학교의 존 피니스(John Finnis) 교수는 현대의 법체계의 차별금지 조항에 ‘성적 지향성’이라는 항목을 추가하는 것은 시민들이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미국의 서구사회에서 동성혼이 헌법적 수준에서 합법성을 갖게 된 것은 동성애자들의 주도면밀한 투쟁과 로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즈에 의하면 사회의 주요제도는 “정치의 기본법이나 기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체제를 말한다. 그래서 사상의 자유 , 양심의 자유 , 경쟁적 시장, 생산수단의 사유 등에 대한 법적인 보호와 일부일처제 등은 주요한 사회제도의 예들이 된다.”22)
롤즈가 가족을 사회의 주요 제도로 설정하는 이유는 가족의 중요한 역할 때문이다. 가족의 역할은 자녀들에게 도덕적 정치적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물론 롤즈는 가족의 역할에 대해 아주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롤즈의 전기 저서들은 이성으로 구성된 일부일처제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사회의 주요제도로 설명한다. “가족제도가 정의롭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며 그의 선을 귀하게 여김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명백히 표현할 경우 어린이는 그에 대한 그들의 명백한 사랑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23)
그렇지만 롤즈는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에 대해 또는 이성애적 가족이라는 전통적 견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견지한다. 롤즈는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출생과 사망은 매우 중요하며, 출생을 통해서만 그 사회에 진입되며, 사망을 통해서만 그 사회에서 탈퇴한다.”고 말한다.24) 그는 일부일처제를 사회의 주요제도로 설정하였고 출생을 통해서만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주장을 통해서 전통적인 결혼관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롤즈는 그의 사상체계 안에서 일부일처제를 일관성 있게 주장하지 못하고 “동성애자들의 권리와 의무가 질서 있는 가족생활과 자녀교육에 일관된다면 동성애자들의 가족형태도 허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25)
지난 2015년 6월 미국 대법원의 판례를 통해서 가족에 대한 재정의(再定義, 단순히 두 사람간의 결합)는 이미 성(性) 혁명을 통해 무너진 전통적인 가족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경우 성(性) 혁명을 통해서 이미 출생하는 아이들의 40%는 미혼의 여성에게서 태어나고 있으며 금번 동성혼 판결을 통해서 부친과 모친에게 생물학적 구분이 없다는 것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지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전통적인 결혼을 완전하게 붕괴시킬 것이다.

3) 종교의 자유는 천부적 기본권이다.
필자가 동성혼을 반대하고 차별금지 법안에 ‘동성애적 정체성’ 항목이 추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동성혼 지지법안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인 ‘종교의 자유’와 ‘연설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성혼지지’ 법안과 그에 따른 ‘혐오금지’ 법안의 제정은 결국 전통적인 결혼 문화를 편협한 것으로 보게 할 뿐만이 아니라, 종교행사의 자유, 종교적 신념의 보호,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경제활동의 자유 그리고 아동복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동성혼의 권리보다 종교의 자유가 더 상위의 가치이다.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동성애와 동성혼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공적 영역의 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정부의 역할은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과 모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위임을 받았다.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예배할 자유와 신(神)에 대한 진리를 추구할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
롤즈의 유명한 ‘정의의 두 원칙’에 의해서 보장되는 기본 권리에는 정치적 자유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사유재산권과 신체의 자유, 법의 지배라는 명목으로 부당한 체포 및 구금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포함되며,26) 국가의 중요한 책무는 당연히 양심과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우선적인 것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그는 “국가는 특정한 종교를 선호할 수 없으며 어떤 종교에 가입하거나 탈퇴한다고 해서 벌금이나 근신을 부과할 수 없는 것이다. 법은 한 종교에 대한 배교뿐만 아니라, 전혀 종교를 갖지 않는 것까지도 법률상의 죄로 인정하거나 형벌을 부과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국가는 도덕적 종교적 자유를 지지하게 된다.”고 말한다.27)
롤즈는 ‘절차의 중립성’과 ‘목적의 중립성’ 중에서 그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절차적 중립성’을 지지한다.28) 중립성이 의미는 “국가는 어떤 특정한 포괄적 교리를 다른 교리보다 선호하거나 장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들로 하여금 특정한 신관을 수용하도록 하는 어떤 행위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29) 그래서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자녀들이 사회에 존재하는 양심의 자유를 배우고, 배교가 법률상의 죄가 아님을 알게 된다고 한다.30)
그렇다면 부모의 종교에 대한 배교마저도 법률상의 죄가 아님을 가르치는 것이 정치적 시민의 교육이라고 한다면 왜 자녀들이 부모의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해 결별하고 이성애 결혼을 택할 수 있는 ‘동성혼에 대한 배교’는 생각도 못하게 하는가? 동성혼 지지자들은 차별금지 법안을 통하여 동성혼에 대한 어떤 비판도 용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상적 독재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 역시 동성혼의 합헌 결정보다는 오히려 ‘혼인제 폐지’를 통해서 아예 국가가 혼인제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31) 정부는 혼인문제를 사적인 영역에 남겨두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샌델은 동성혼이 개인의 자유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성혼이라는 결혼의 형식이 공동체의 인정과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인가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동성애의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을 차별되지 않아야 할 권리로 일단 규정하고 나면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22
미국의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국의 논리를 좀 더 확대해 적용해본다면 성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갈 수 있다는 논리는 성정체성에 따라 학교의 수학여행 기간 중에 생물학적 특징이 다른 두 사람이 한 방을 쓸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성정체성이 차별 금지조항에 들어가면 그 가치는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고 제한하는 ‘독재 적 지위’를 갖게 된다. 공공장소에서 동성애와 동성혼을 비방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가령 영국, 캐나다, 미국 등에서 동성결혼 주례를 거부한 목회자들에게 구금 형벌과 벌금형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동성애 지향성과 동성혼의 지위가 독재적이라는 것을 말 해준다.

Ⅲ. 동성혼에 대한 교회의 자세
(1) 기독교적 인간관은 타락한 본성을 전제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선한 본성과 타락한 본성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펠라기우스(Pelagius)와 계몽주의 철학은 선한 인성론과 자유의지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성경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원죄에 의해 타락되고 부패되었다. 따라서 타락한 이후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움은 도덕적 자연스러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타락한 이후 인간은 모든 종류의 죄악이 일어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It’s desire is for you, but you must master it.)말씀하셨다. ‘it’s desire‘는 다스림의 대상이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살인, 시기, 질투, 분당 등 죄악 된 욕구를 자연스럽게 느낀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의 욕구를 사람들이 갖게 된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가 되게 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다. 이성간 결혼에 대한 대안은 동성혼이 아니라 독신(獨身)과 성적 절제(節制)이다.
그렇다면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 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 하 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말한 직후에 바로 이어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고 했다. 그렇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복음의 능력은 사람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

(2) 동성애치료에 대한 공중보건 정책과 사회적 담론을 형성 해야 한다.
미국 정신의학사전에서 동성애가 정신병 목록에서 제외된 후 이제는 동성애를 자연스러움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어떤 치료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곡되고 잘못 된 이성애도 처벌과 치유가 필요한 것처럼 동성애적 성향이 아니라 동성애적 행동을 통해서 잘못이 발생한다면 그에 따른 치유와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성(性) 범죄자들에게 주는 전자발찌를 동성애 범죄자들에게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죄의 성향은 이성애(異性愛)와 동성애(同性愛)를 막론하고 모두 적용되는 것이 바로 법의 지배이다.
또한 자연스러운 욕구가 반드시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소아(小兒) 성애와 강간은 처벌의 대상이다. 동성애에 대한 치료를 거부하는 시도는 사라져야 한다. 모든 동성애자가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 환자는 아니고 모든 에이즈 환자가 반드시 동성애자도 아니다. 그러나 동성애와 에이즈는 분명히 밀접한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2004년부터 한국의 청소년들에게서 에이즈 환자의 비율이 높게 증가하는 것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3)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는 천부적 인권이다.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동성혼을 거부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정부가 만든 권리가 아니라 하늘이 부여한 천부적(天賦的) 인권에 해당된다. 동성애 지향성 보호법안과 동성혼을 반대할 수 있는 종교적인 자유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판단의 오류 가능성과 인식론적인 불일치로 인하여 관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이고 근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그런데 차별금지 조항은 동성애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게 한다. 동성혼이 한국에서도 허용되고 동성애 지향성을 보호하는 법안이 등장한다면 천부적(天賦的)인 자연권인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침해되고 종교의 자유는 주일에 교회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자유’로만 극히 제한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예배시간에 목회자의 설교도 심지어 처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4) 동성혼을 반대하는 교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교회 안에선 돌이키지 않는 동성애와 동성혼 지지자에 대해 성경적인 가르침을 표명해야 한다. 현대 서구교회가 동성애를 용납하는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이성과 문화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가증한 죄로 말한다. 죄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철저히 회개만이 필요하다. 존 스토트 목사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박사의 견해를 인용하며 이를 동조한다. “동성애 결합과 성경적 결혼을 대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교회가 아니다.”32)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복음주의 교회라면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안수하여 세울 수 없다. 만일 누구든지 성적인 죄로부터 회개하지 않는 다면 비록 성직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리더십의 지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성경은 교회 안에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은 더 엄격하게 말씀의 기준이 적용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능력으로 회심한 사람이 리더십이 되는 것을 막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선포한다. 사람은 새롭게 될 수 있다.

결론
복음주의적 크리스천들은 성경적인 결혼관에 따라서 살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온건한 방식을 통하여 동성혼의 문제를 지적하고 성경적인 결혼은 자연법에 의거한 것이기에 전통적인 결혼관을 가진 유교를 비롯한 동조 그룹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도덕(道德)은 정치(政治)보다 앞선다. 한 남성(男性)과 한 여성(女性)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결혼관은 국가의 정책과 법으로 변경할 수 없는 자연법적 도덕성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지속적으로 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 담론화(談論化) 해야 한다.
(*) 글쓴 이 / 김기호 교수(한동대)

< 참고 문헌 >
1) Kevin Deyoung, What does the Bible really teach about Homosexuality? Wheaton, Crossway, 2015.
2) Duane Olson, issues in Contemporary Christian Thought,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1
3)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 Phillipsburg: 2004
4) 캐시 루디, 섹스 앤 더 처지: 젠더, 동성애,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변혁, 서울: 한울, 2012
5)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서울: IVP, 2011
6) 플로랑스 마뉴, 동성애의 역사 서울: 이마고, 2007
7) Martha C. Nussbaum, Sex and Social Justi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8) Craig A. Williams, Roman Homosexual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9) Ryan T. Anderson, Truth Overruled: The Future of Marriage and Religious freedom, Washington D.C.: Regnery Publishing, 2015.
0) John Rawls, Political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5
1)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Cambridg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1999
< 미 주 >
1) Martha C. Nussbaum, Sex and Social Justice (Oxford: Oxford University,1999), 200
2) 국가인권위원회 관련법 30조 2항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2002년 7월에 생물학적 요인과 상관없이 심리적 정체성 장애를 인정하고 성전환자의 경우 호적상 성별을 정정하도록 하는 부산지법의 판결도 있었다. 그 후 2002년 12월 한 성전환자가 법적으로 변 경 된 성별을 갖게 된 적도 있었다.
3) John Stott, Same-Sex Partnerships?(Zondervan,1998) 제4장 참조 26
4) Derrick Sherwin Bailey, Homosexuality and the Western Christian Tradition(London:Longmans, Green, 1955)
5) Homosexuality: Not a Sin-Not a Sickness: Toward an evaluation of pro-Gay heological perspec
-tives, 80 & Russ Tate, John Boswell,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Gray People in Western Europe from the Beginning of Christian Era to the Fourteenth Century, 90-97을 참고
6) 존 스토트,‘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서울: IVP, 2006) 510-512.
7) Boswell, ibid., 103.
8) R. E. Clements,‘Abomination in the Book of proverbs’in Fox, Michael et al(ed.), Texts, Temples, and Traditions: A Tribute to Menahem Haran(Winona Lake: Eisenbrauns, 1996), 211-225.
9) Victor Paul Furnish, “what does the bible say” in Geis, Caught in the Crossfire, pp. 57-66.
10) 존 스토트의 동성애 논쟁, 26-30. 가톨릭 역본인 예루살렘 성경은 이 단어를“미동과 남색자 catamites and sodomites”로 표현한다.
11)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517.
12)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133.
13)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UCC)는 1972년에 동성애자였던 윌리암 존슨(William Johnson)의 목 사안수를 허락한 이후, 1980년 남녀 동성애자들을 목사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한 최초의 대교단 이 되었다. 1991년 UCC 총회는 게이, 레즈비언, 성전환자가 성직자가 되도록 허락하는 것을 압도적 표수로 결정하였다. 2005년에는 공식적으로 동성혼을 지지한다고 결의하였다. Mike Schuenemeyer,“Marriage Equality”United Church of Christ Web Site, November 4,2009,
http://www.ucc.org/lgbt/issues/marriage-equality/#Marriage_Equality_and_the_Ucc.
14) 대한민국의 선교에 크게 기여했던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1999년 레즈비언 제인 스파 (Jane Spahr)를 그 해의‘신앙의 여성’수상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는 그 교단 을 섬기는 첫 번째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 그리고 2015년 현재 미합중국장로교회는 동성혼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교회들은 교단을 떠나가고 있다.
15) 2003년 6월 7일 미국 성공회는 주교 관구를 둘로 나누어서 뉴햄프셔의 교구에 공공연한 동성애자 인 진 로 빈손(V. Gene Robinson)을 뉴햄프셔 주교로 선출하였다. 13년 전의 결혼 서약을 어기고, 그의 아내와 두 어린 딸을 버린 후에 진 로빈슨은 게이로 등장했고 그는 남자 파트너와 함께 산다. 그를 주교로 임명하기 위해서 미국 성공회 내 두 단체의 표결이 필요했다. 주교단은 62대 45로 찬 성했고 평신도 사제로 구성된 단체는 128대 63으로 찬성을 했다. B.A. Robinson“Religious conflicts: The Episcopal Church, USA and Homosexuality,” Ontario Consultants on Teligious Tolerance, last updated 2007.9.22., http://www.religioustolerance.org/hom_epis.htm.
16) 2009년 미국 루터교(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of America)는 676대 338로 동성애자가 성 직자로 사역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동성결혼 역시 지지하였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교회들은 교단을 떠났다. Mark S. Hanson, “churchwide Assembly Updat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2009.8.22. http://elca.org/Who-We-Are/Our-Three-Expressions/Churchwide-Orginization.
Office-of-the-Presi ding-Bishop/Messages-an-statement/090822.aspx.
17) Duane Olson, Issues in Contemporary Christian Thought, 204.
18) Nussbaum, Sex and Social Justice, 5.
19) Southern Baptist Convention,“The Baptist Faith and Message,”sbcnet, n.d.,
http://sbc.net/bfm/bfm/bfm2000.asp#i.
20) John Rawls, Political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2005), 477.
21) Francis Beckwith,“Interracial Marriage and Same-Sex Marriage”
22) John Rawls,‘정의론’40. 이탤릭은 필자의 강조사항이다.
23) Ibid.629.
24) Rawls, Political Liberalism, 84-85. 27
25) Ibid., 467. 각주 60을 보라.
26) John Rawls,‘정의론’106.
27) Ibid., 289.
28) Rawls, Political Liberalism , 192-193.
29) Ibid., 193.
30) Ibid., 193.
31)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서울; 김영사, 2010) 354.
32)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 133
– 성적 지향(性的 指向, Sexual orientation) / 자신이 이끌리는 이성, 동성, 혹은 복수의 성 또는 젠더를 나타낸다. ‘성적 취향’이나 ‘성적 성향’이라는 용어도 종종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 때의 끌림은 감정적이거나, 낭만적인, 성적인 끌림일 수도 있고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대다수의 심리학 혹은 정신의학 단체는 성적 지향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었다.(그러나 복음주의 교회와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성적 지향의 분류에는 크게 반대 성에 이끌림을 뜻하는 이성애, 같은 성에 이끌림을 뜻하는 동성애, 두 성 모두 또는 때에 따라 둘 중 한 성에 이끌림을 뜻하는 양성애, 이분법적인 남성과 여성 외에도 모든 성에 이끌릴 수 있음을 뜻하는 범(汎) 성애, 성적 이끌림이 없음을 뜻하는 무(無) 성애 등이 있다. 이러한 분류는 때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마다 느끼는 이끌림이나 행동의 경향 및 강도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의 이성애는 종종 동성애로 오해받곤 한다. 젠더 퀴어나 간성에게는 동성과 이성의 판단이 모호할 수 있다. 법률 용어로서의 ‘성적 지향’은 처음에는 판례를 통해서 의미가 형성되었다. 동성애, 이성애 또는 양성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에서 주로 사용한다.
– 성 정체성(性 正體性, gender identity) / 자신의 젠더에 대한 자각, 자아의식을 말한다. 성별 정체성, 성 주체성, 성 동일성이라고도 하며, 성적 정체성과는 다르다. ‘성 정체성’의 종류는 남성 정체성, 여성 정체성, 젠더퀴어적 정체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성 정체성이 신체성별과 일치하는 경우를 시스젠더, 성 정체성이 신체성별과 반대인 경우를 트랜스젠더, 그리고 시스젠더에도 트랜스젠더에도 속하지 않는 성 정체성을 가진 경우를 젠더퀴어라 한다.
– 성적 정체성(性的 正體性, sexual identity) / 스스로 어떤 사람에게 연애 감정이 생기는지 혹은 성적으로 끌리는지 자신이 판단한 것이다. ‘성적 정체성’은 더 정확히 말해 성적 지향 정체성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의 인정 또는 내재화를 뜻하기도 한다. ‘성적 정체성’과 ‘성적 행동’은 ‘성적 지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나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생각을 가리키는 정체성, 개인의 실제 활동을 가리키는 행동, 동일하거나 반대, 둘 다의 성별 또는 성 정체성에 대한 연애적 또는 성적 이끌림 또는 둘 다에게 이끌리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성적 지향과는 구분된다.
기존에 ‘성적 정체성’의 형성은 성 소수자만이 겪는 과정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보다 현대적인 관점은 ‘성적 정체성’의 형성이 더 보편적이라고 보면서 현대의 다른 주류 정체성 형성과 이론의 넓은 영역 내부에 성적 정체성을 넣으려고 시도한다. 출처 / 위키백과 (주) 위의 내용 중 일부는 본지의 취지와 일치 하지 않습니다.(편집자)

2019년 8월 3일 토요일

주기도문의 기독론적·종말론적·성령론적·교회론적 강해 _ 송영목교수

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www.daehaak.org )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요청을 받고 가르쳐주신 기도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기도이기에 완벽한 기도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 얼마되지 않아서 교회에서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1세기 사도들의 교훈집으로 알려진 디다케(Didache)는 교회 정식 회원들을 향해 하루 세 번씩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것을 권면했다. 주기도문에 관한 첫 번째 주석을 쓴 사람은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인데, 그는 주기도문을 모든 복음의 요약이라 불렀다. 다른 교부 키프리안(Cyprian)은 주기도문을 천국 교리의 체계라고 불렀다.
 
루터는 주기도문은 최고와 최선의 기도이기에 성도는 주기도와 함께 하루를 열고, 하루를 마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존 칼빈도 주기도문은 신자가 간구하여야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면서 주기도문을 올바른 기도의 모델로 간주했다. 이렇게 주기도문이 초창기부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리는 주기도만 하면 왠지 아주 빠른 속도로 주문 외우듯이 기도하지는 않는가? 끝 부분의 -원히만 길게 정상적인 속도로 암송하지 않는가? 하지만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주기도문 한 절 한 절이 심령 깊은 곳에 와 닿는 말씀임을 느낄 수 있다.
 
주기도는 마 6:9-13 그리고 눅 11:2-4 두 곳에 나타난다. 초기 교회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기도문을 표준적인 주기도문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매일 드려졌던 기도 시간에 혹은 회당에서 안식일에 드려졌던 예배 시간에 기도문을 활용했다(. 유대회당에서 설교 끝에 낭송하는 기도인 Kaddish, 그리고 18번 축복 기도로서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 -아침, 오후의 시작 그리고 석양 때- 드렸던 기도인 Shemone Esre).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와 같은 형태로 하나님을 송영하는 마무리가 18번 등장한다.
 
12번째 기도문에는 기독교인들을 저주하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 나사렛 이단들을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하시며 ... 교만한 자를 겸손케 하시는 주님, 당신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벌써 회당과 교회의 분리가 일어났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이 공식기도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기도와는 다른 새로운 기도문을 주심으로써,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구원의 복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주기도문은 유대인의 종파의 가르침뿐 아니라, 세례요한이 가르친 교훈과도 다른 그 무엇을 담고 있다. 그 무엇은 예수() 공동체의 정체성과 이상을 가장 잘 담고 있다는 말이다.
 
1. 6:9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를 먼저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아버지로 나타내는 경우는 15번 정도이다(32:6; 3:4 ).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강조하려는 목적과(64:8),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강조하려는 목적이다(14:1-2).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父性적 사랑을 강조하려는 목적도 있다(103:11).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개인이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경우는 없다.
 
복음서에는 아버지170회 이상 등장한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을 믿는 교회까지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다. 8: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버지라는 용어는 아람어로 아바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격과 사명을 밝힌다. 11:27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계시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말한다. 14:36아바 아버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밝힘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다볼 때 아바가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신뢰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친근함과 의존성이 강조되어 있지만 하늘에 계신하나님이기에 우리보다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즉 우리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제 우리에 초점을 모아 보자. 주님은 나의 아버지와 너의 아버지를 철저히 구분했다. 따라서 우리 아버지란 말은 교회와 예수님의 연합을 가리키지 않는다. 성도와 성도 사이의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신약 교회 전체가 공유하는 기도이다.
 
적용을 해보면 주기도문의 시작에 이미 교회의 공동체성이 명시되어 있다. 우리는 좁게는 특정 지역교회로 모여 동일한 한 분 아버지를 모시고 산다. 그 아버지는 우선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2. 69절 하반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를 살펴보자. 구약에서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 자체를 가리킨다. 사람이 새로운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17:5) 야곱이 이스라엘로(32:28)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17:1), 모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6:2)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3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20:7) 주의를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과 임재하심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예수님 자신의 인격, 임재하심 및 능력과 동등하게 간주한다. 예를 들어 마 18:5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바로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며, 18:20에서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예수님이 임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같은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아도 원래부터 거룩하신 분이 아니신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람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오신 분이심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17:26에서 의로우신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예수님의 과거의 사역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신 사역이고, 미래의 사역은 하나님의 이름을 장차 알게 하시는 사역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어느 시점이 되면 천하만민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예언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39:7에서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리니 열국이 나를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 알리라.” 이런 예언은 주로 메시아 예언의 문맥에서 나타나기에(2:28-32; 9:11-12; 14:1, 9),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이루어 질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는 차원이라는 말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서 거룩히 받으시오며는 아오리스트 수동 명령형이다. 이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름을 거룩히 하신다는 것이다. 주체는 위의 메시아 예언의 빛에서 볼 때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이시다. 아오리스트이기에 어떤 결정적인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단번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승천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영화롭게, 12:28) 하셨다면 신약 교회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신 의도는 무엇인가? 이 간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과거에만 묻혀져 있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계속 선포되고 확장되어야 할 사건이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거룩하게 되신 하나님의 이름이 더욱 선포되고 완성되어 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행전은 계속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죄 사함과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따라서 우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암송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거룩하게 되신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선포와 삶으로 더욱 온 세상에서 거룩히 되고 영화롭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선교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3. 6:10절 상반절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예수님의 설교와 가르침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1:15에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시작함. 부활 후 승천하실 때까지 40일간 역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다(1:3). 바울 역시 로마 감옥에서 온 이태를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다(28). 예수님과 사도의 가르침의 시작은 하나님 나라였고 마침도 하나님 나라였다(4:43).
 
그러므로 주기도문에 하나님 나라에 관한 기도가 등장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늘 나라 즉 천국으로(6:33; 12:28; 19:24; 21:31, 43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로 나타나지만 히브리어는 말쿠트 샤마임으로 동일하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한번도 글자 그대로 등장하지 않고 신구약 중간기 문헌이나 유대 문헌에서도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주기도문을 핵심적으로 요약해보라면 바로 나라이 임하옵시며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익숙한 용어였다.
 
구약의 경우를 살펴보자. 15:18에서는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라고 함으로 여호와의 나라(말쿠트 야웨. 神政思想)를 언급한다(33:5). 나중에 왕정시대에는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왕으로 다스리셨다(삼하 7장 대상 28:5). 10:16와 시 22:28 등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온 열방의 왕이심을 찬송한다. ()선지서에는 포로 귀환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말한다(52:7-9; 33:7-9; 34:13-15).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포로귀환의 약속을 메시야 사상과 연관시킨다는 사실이다(참고 사 9:6-7; 30:8-9; 34:24-25; 미가 5:2; 14:9-17; 3:15; 1:14; 2:44; 4:2, 34, 37; 7:13-14 ). 바벨론 포로 귀환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과 왕적 통치의 구현이 유수 70년 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이루실 죄 사함을 통한 우주적인 통치를 긴밀하게 내대보게 한다. 즉 구약의 모든 출애굽 주제와 바벨론 포로 귀환의 진정한 성취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발견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적어도 69회나 하나님 나라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중심이기에 인간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선적으로 사탄과 죄를 물리친 수직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이다(1:23). 예수님은 수평적인 차원의 혁명가나 사회변혁가의 차원에 머물 수 없으신 메시아시다. 수평적인 것은 수직적인 것의 필연적인 산물이지 본질은 아니다. 수직적 차원이 없는 하나님 나라는 진화론적이고 낙관론적이며 휴머니즘적인 인간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영적이고 수직적인 것이기에, 이 세상의 문제인 인간의 존엄성, 평들, 자유, 정의, 환경, 평등, 인권과 같은 문제와는 무관한 것인가? 아닙니다. 부활-승천하신 주님의 왕권은 우주적인 것이기에 어느 영역 하나라도 주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0-23; 2:9-11; 1:16-20). 1:2에서 그리스도는 만유의 후사로서 ()창조주라고 하신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은 더 이치에 맞지 않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인데 이제 온 우주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도록 소망하며 뒤틀린 것이 바로잡혀 정상적인 것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11:14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는 것이 나라가 임하옵시며의 뜻이다. 임하옵시며(eltheto: 아오리스트 능동태 명령형 3인칭 단수)는 결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승천-성령의 강림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임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간구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회복된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더욱 강력히 임하며, 주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소망하는 기도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며,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조속히 실현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4. 610절 중하반 절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제 우리는 주기도문 중에서 3번째 간구를 살펴볼 차례이다. 11장에는 이 간구가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 누가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간구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가 실제적으로 중복되어 포함되어 있거나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 간구는 독립적인 기도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이루어지이다’(geneitheito)는 아오리스트, 수동태 명령법인데 이것 역시 이전 간구에서 사용된 동사처럼 신적 수동태로 보이기에 행위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으로 보인다. 사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을 교회를 통해서 성령께서 계속해서 이루시길 원하는 종말론적인 기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기도문 전체는 기독론적, 성령론적, 교회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종합적으로 요청한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 하나님을 그 자신의 존재 양식의 주체로 삼고 있기 때문에 오순절의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 자신의 하나의 오심(a parousia)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오순절 성령님 사이의 일치는 본체의 일치 혹은 위격의 일치가 아니고 종말론적 구속사역의 일치이다. 환언하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교회의 설립과 성장, 복음 전파, 중생과 성화의 사역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사역을 이루기 위해 일체가 되신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 혹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승천하사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사역인 동시에 오순절에 인하신 성령님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약의 많은 부분 특히 승천하신 이후의 사건은 기독론적, 성령론적, 교회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동시에 연결되어 등장하는 해석의 원칙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며 지금의 천상의 사역 역시 하나님의 뜻을 성령으로 성취하고 계시는 것이다. 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비슷하게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참고. 10:7, 9).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은 성자를 통해 잃은 자를 찾는 일이었다(잃은 양을 찾는 비유- 18:12-13; 15:3-6). 18:14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흥미롭게도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 당시 가장 인간 대접 받지 못했던 천민들인 창기, 세리와 같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죄인들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셨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설명하는데 적합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도 받게 되었다(11:19).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이런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2:17).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런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욱 더 하나님 나라에 근접해 있는 사람들이었다(21:31). 이것은 사 61:1-2과 겔 34:15-16의 예언의 성취인데, 예수님은 실로 가난한 자, 잃어버린 자, 상한 자, 병든 자를 구하러 오신 분이셨다 (4:21). 물론 이 구절들을 영적인 의미로 볼 수도 있겠으나 물질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를 배제하지 않음도 기억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뜻의 성취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분리할 수 없다. 14:36에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2:42).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이었다(1:4; 10:9-10). 즉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구속사의 경륜을 이루시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죄와 사탄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것인데, 구속 곧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1:13-14; 53:10-11).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일차적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사역 속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위의 신적 수동태를 기억하라), 이 간구와 이 간구를 해야만 하는 신약교회는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어 버린 이 간구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하늘은 사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12:9). 이제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땅은 하나님과 사탄의 격전지인데, 교회의 승리의 원천은 성령의 권능을 입는 것인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이루신 승리를 믿고 담대히 행하는 것이다.
 
마치 하늘의 승리는 지상의 승리를 비추는 것과 같이 십자가와 부활의 결정적인 과거의 승리는 지상 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승리를 이미 결정해 버린 것과 같다. 하지만 이 땅 위에는 여전히 사탄의 세력이 힘 있게 활동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6: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는 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놀이-게임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만 하는 전투이다(12:4).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구원사역에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겠다. 우리 인생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향방이 달라지고 승패가 갈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서 찾고 이루기 위해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데 무엇보다 말씀에 기초한 기도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간적인 야망을 이루도록 강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순종하고 경청하려는 자세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망과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품은 소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따라서 이 점검 부분을 위해 성령님께 간구하여 점검하도록 해야 한다.
 
그 후 우리는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략적으로 체계적으로 시간과 물질의 청지기로서 비전을 현실화 시키도록 최선의 삶을 경주해야 한다. 이 경주 속에서 평안과 보람, 그리고 기쁨을 누린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찾고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뜻을 이루는 과정도 우리의 충성을 도구로 한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는 것임을 기억하자.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힘들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 중심의 삶을 순종적으로 살고자 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하늘로부터 수직적으로 입고 싸우는 이런 영적 전투와 더불어, 신약 교회는 예수님의 삶에서 본받아야 할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수평적인 사랑의 실천은 수직적인 구원을 선포하기 위한 차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본주의적인 간구와 나의 뜻을 접어주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순종의 마음이 더욱 요청되는 시대이다. 아멘!
 
5. 6:11절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제 우리는 주기도문의 전반부인 하나님에 대한 청원(Thou petitions)을 마치고 우리자신에 대한 청원을 다루게 된다(We petitions). 전반부의 하나님에 대한 청원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것이다. 후반부에도 3개의 간구가 등장하는데 우리를 위한 양식’, ‘우리의 죄’,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는 마치 마 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순서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십계명의 1-4계명이 하나님 중심과 관련된 계명에서, 5-10은 수평적인 이웃과의 계명을 다루는 것과도 유사하다.
 
어떻든 우리와 관련된 간구가 3개나 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위한 중요한 관심을 보이고 계심을 의미한다. 2차적으로는 물론 나중에 있을 마태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3번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난 후 3번은 우리에 관한 간구를 하게 하셨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 나라, 그리고 뜻이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에서 다 이루어져서,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의롭게 되었고, 부활과 하늘에 앉힘을 누리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직 아니의 측면으로 인해 우리의 일상 양식과 범죄에 대한 용서와 시험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관계는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양식(arton)은 무슨 의미인가? 좁게 그리고 일차적으로는 빵을 의미하고 넓게 그리고 2차적으로는 삶을 영위하게 하며 생명을 보장하는 제반 양식과 음식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목수의 아들로 가난을 경험했으며, 제자들과의 공동체적 삶에서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한 것은 아니었다(12:1-8; 6:32-44; 11:5). 사실 예수님 당시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가난과 투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빵을 구하는 간구를 가르치신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6: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신 주님이시기에, 과연 물질적인 빵 만을 구하게 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은 영적인 양식도 공급하고 계신다. 이 이유로 마 6:11절의 양식은 육신의 양식뿐 아니라 은혜의 양식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넓게 보아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일용할’(epiousios)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오리겐이 말하듯이 존재(ousia)를 위해 필수적인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오늘을 위한이란 뜻인가?
 
주기도문에서 양식은 오늘 날 우리에게라는 말과 결부하여 보면, 필수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매일 공급해 주시는 만나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양식이 은혜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미래론적으로는 이 양식은 교회로 하여금 미래적 천국에서 영원히 먹을 만나를 내다보게 한다.
 
적용해보면 생업과 사업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 순서가 지켜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신다.
 
6. 6:12절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마 6:12과 눅 11:4 사이에 표현상 차이가 있음을 본다. 마태복음에서는 죄를 채무라는 뜻의 용어(opeilemata: 하지만 아람어에서는 죄[hoba]를 부채로 표현한다)를 사용하지만, 누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죄를 가리킬 때 죄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의 용어(hamartiai)를 사용한다. 하지만 누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를 가리킬 때는 채무의 의미로(opeilo) 사용한다.
 
마태복음의 간구는 우리가 우리들의 채무자들을 이미 용서한 것 같이(hos= as와 과거완료형) 우리의 채무를 용서하여 주소서로 번역된다. 누가복음의 간구는 우리 자신들이 우리에게 채무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현재형)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런 용어의 차이점은 유대인 독자와 이방인 독자를 각각 염두에 둔 표현상의 차이일 뿐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 기도를 해석하는 열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과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우리가 용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그 조건으로 먼저 타인을 용서해 주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타인을 자연스럽게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예수님 당시의 불신 유대인들은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타인을 용서하는 일이 조건으로 그리고 공로로 선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락(Sirach) 28:2에서 너희 이웃의 불의를 용서해 주어라. 그런 다음에 네가 기도할 때에 너희 자신의 죄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Mishnah Taanit 16에서는 우주의 주재자시여,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우리 또한 우리의 동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니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금 가르치시는 기도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조건이나 공로를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이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은 매일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함을 알 수 있다. 매일 죄를 범하기에 사죄의 은총도 항상 필요하다. 우리가 남을 용서했기에 그 조건을 기억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의 죄 용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는 마 18:21-35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50- 이것은 도무지 노력으로는 갚거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이요 죄이다)을 왕은 불러서(수동형: 왕이 주도권을 가지고 탕감 작업에 돌입했음을 의미함) 완전히 탕감해 주었지만, 그 탕감 받은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500만원)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일만 달란트 빚졌던 자를 투옥시켜 버렸다. 왕의 용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자신의 용서의 삶으로 표출되었어야 했다.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의 삶은 변화되어야만 했다. 성도의 변화된 새로운 삶으로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증명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죄를 진정으로 받지 못한 사람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는 불가분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남을 용서해 준 만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고 공로적-조건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현실적인 적용을 위해 하나 더 생각해 보자. 형제 자매의 과거의 죄를 다시 상기시켜 정죄하는 일은 마귀적인 일임에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사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정죄하면서 악용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죄의 은혜를 진실로 알지 못한 처사이며,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처사이다.
 
7. 6:13절 상반절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처음으로 부정적인 간구를 접한다. 이 간구와 관련하여 자연스러운 질문은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는 분이신가? 1:13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렇다면 시험(peirasmon)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복음서에서 시험은 주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바리새인과 같은 예수님의 대적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행위와 관련된다(41:1; 1:13; 4:2; 고전 7:5; 16:1; 19:3; 22:28; 8:11; 10:2; 11:16 ).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아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활동하는 사탄의 시험과 유혹과 방해 공작은 나중에는 교회를 향해서도 계속된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은 비록 그것이 사탄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내면에 유혹을 받게 하여 죄를 범하도록 하는 차원으로는 시험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26:41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주기도문의 간구처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주의를 주신다. 이 시험은 사탄에 의한 것으로서 제자들을 향한 시험이다. 따라서 이 시험은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외적인 어려움과 핍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주님께 더욱 헌신하면 할수록 이런 어려움과 시험은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흔적도 더 많아진다(6:17).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러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무엇인가? 이 간구는 우리가 사탄의 유혹과 핍박을 전혀 만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간구는 아니다. 반대로, 사탄의 시험을 만나더라도 이기도록 해 달라는 간구이다. 예방 차원이 아니라 승리하고 극복하는 차원의 간구이다. 예수님의 사역에 사탄과 대적의 시험은 지속적이었는데, 그 때 마다 피하거나 경험하지 않도록 간구 한 적은 없다. 예수님은 그 시험과 타협하지도 않으셨을 뿐더러 실패하지도 않으셨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계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체험에서 나오는 확신 가운데 기도를 가르치시고 있다. 성도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마귀와 싸울 수밖에 없다.
 
뒤따르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앞부분과 무슨 연관을 가지며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악’(tou poneirou)는 무엇인가? Tou라는 정관사를 남성으로 볼 수도 있고 중성으로도 볼 수 있다. 남성으로 본다면 사탄을 가리키며, 중성으로 본다면 그 악 혹은 그 악한 행동을 의미한다. 13:19, 4:15, 8:12, 17:15, 그리고 요일 5:18에서 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킨다(그리고 엡 6:16; 살후 3:3도 보라). 이 구절들을 통해서 볼 때 '그 악'은 사탄을 가리키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부정적인 간구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긍정형으로 다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즉 주제의 반복을 의미하기에 같은 내용의 다른 양상일 뿐이다.
 
고후 12:23이하에서 사탄에 의해 고난당한 바울의 모습을 우리는 본다.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지만 하나님은 사탄의 손에서 바울을 건지셨고 보호하셨다. 11장은 믿음의 선진들 역시 이런 고난을 통과했다고 증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엡 6:10 이하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부활로 사탄을 이기셨고 그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지속적인 승리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의 나라를 확고히 해야 한다. 이것이 이 간구에 나타난 주님의 소원이다.
 
8. 6:13절 하반절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6개의 간구 (청원)가 끝나고 이제 송영(doxology)으로 주기도문을 마친다. 하지만 송영의 원래의 형태에 대한 사본상의 증거는 논란의 대상이 된다. 본문비평의 외적 증거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고대의 사본 중에서 시내산, B, D, Z, f1, 대부분의 라틴 번역본들, 그리고 주기도문에 대한 주석을 쓴 많은 교부들(터툴리안, 오리겐, 키프리안, 니사의 그레고리, 어거스틴, 암브로스 등)은 이 송영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송영을 가지고 있는 사본들은 5세기경의 K, W, 그리고 델타 사본 등의 비잔틴 사본계열, 다수의 소문자 사본, 그리고 일부 교부들(타티안, 크리소스톰 등)이다. 외적 증거로만 보면 이 송영부분이 없는 것이 훨씬 지지를 받는다.
 
내적 증거를 살펴보자. 송영이 없는 본문은 아마 마태의 주기도문 보다 더 오래된 누가의 주기도문에 더 일치하는 것 같다. 11:4에서 주기도문은 마치는데, 송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 송영이 없는 주기도문이 예수님의 원래의 말씀에 일치하고, 송영은 후대(아마 예루살렘의 예수님의 제자들)에 교회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첨가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기도문인 18복 기도문이 매 부분마다 송영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가 주기도문을 사용하면서 당대의 유대관습을 따라서 송영과 함께 주기도문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짙게 한다.
 
다수사본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깜뻔 심학교의 판브럭헌(Van Bruggen- 최갑종에서 인용됨)은 이 송영 부분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원래의 기도문에 포함되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단지 소수의 사본들만이 송영을 생략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다수사본 옹호자들이 사본 숫자의 기계적인 계산을 맹종적으로 의존하는 오류를 볼 수 있다.
 
판 브럭헌은 계속 말한다: “이것은 동방교회 예배의식에서 사제가 송영을 말하고, 반면에 회중들은 서문과 여섯 청원들, 그리고 아멘을 암송했다는 사실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여기서 좁게는 판브럭헌, 넓게는 다수사본 옹호자들의 역사적인 객관성이 결여된 일방적인 추측을 볼 수 있다.
 
판 브럭헌의 계속되는 주장이다: “ ... 동방교회 예식과, 그리고 적어도 암브로스 때 밀란의 사람들이 사제들이 말하는 일정한 형식의 송영을 알았다는 사실은 송영의 진정성을 보증해 준다. 암브로스 역시 송영이 성경적인 기도 방식에 속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역사적인 신빙성이 결여된 주장인 것은, 예를 들어 암브로스는 송영이 있는 주기도문을 제시하지도 않았으며, 송영이 성경적 본문에 속한다는 주장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암브로스는 그의 책 성례전에 대하여” 5.4.18에서 분명히 송영이 없는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다. 송영 부분은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보이기에 여전히 그 의미가 유효하며 살펴볼 가치가 있다.
 
송영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구약에서도 동일한 주제를 볼 수 있다(7:13-14, 27). 계시록에는 이 주제가 종종 등장한다(1:6; 4:11; 5:12-13; 7:10-12; 11:15). 중요한 것은 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성부하나님만 독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자 예수님도 공유하시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도 공유하게 된다(12:32; 22:28-29; 1:5-6; 5:9-10).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 3개의 하나님을 향한 간구들(Thou-petitions)로 다시 돌아간다. 주기도문의 결론 부분에 송영이 위치함으로 이 송영은 주기도문 전체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않으시며, 악에서 구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송영을 받으셔야 한다. 우리가 각 간구를 송영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종말론적으로 다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현재적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고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아멘 역시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들에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적인 기도 그리고 공적인 기도 한 마디 한 마디 역시 하나님을 찬송하는 마음으로 아멘으로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의미 없는 아멘의 남발은 아멘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 있다.
 
나오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주로 기독론적, 성령론적, 종말론적, 그리고 교회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기도이다. 우리의 공적 그리고 사적인 예배와 기도에 더욱 빈번히 주기도가 찬송으로 혹은 대표기도에서 조차 때로는 애용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