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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6일 목요일

동성혼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성찰

동성혼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 성찰
김기호교수(한동대)

서 론
정치철학자 너스바움(Martha C. Nussbaum)의 말과 같이 동성결혼(同性結婚, Same-sex marriage)의 문제는 오늘 날 유대교-기독교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 최대의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1) 지난 2015년 6월 미국 대법원이 Obergefell v. Hodges 판결에서 동성혼(同性婚)을 합헌(合憲)으로 결정을 하면서 성(性) 혁명은 역사상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동성애를 죄로 간 주해왔으며 복음주의 기독교는 동성혼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이미 20개국이상이 동성혼을 헌법적 수준에서 지지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다.
크리스천은 동성혼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동성애(同性愛)에 대한 혐오감정(嫌惡感情) ‘호모포비아’(homophobia)는 정말로 비합리적인 공포심, 적개심, 혐오 감이 혼합되어 있는가?
크리스천들이 아무런 합리적인 근거 없이 동성애와 동성혼을 정죄 하고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성적 지향성(指向性)’과 ‘성별 정체성(正體性)’ 그리고 동성혼의 권리가 차별적 대우를 받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동성애 결혼과 이성애(異性愛) 결혼이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인가? 혹은 동성 혼을 최고의 헌법적 가치로 설정하는 것인가?
유럽과 미국 등 서구사회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동성애자들의 요구대로 차별금지 조항에 성적인 지향성이 추가되어 있지 않다. 아직은 우리 사회의 다수가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사법계와 국가인권위는 선도적인 역할을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2)
필자는 한국의 복음주의 진영은 동성애 지향성과 행위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결혼관과 동성애에 대한 판단을 토대로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복음주의적 신학의 성경해석에 의하면 동성애는 명백한 죄이며 동성혼도 아담과 하와를 위해 창조주가 만든 결혼제도가 아니다. 성경의 결혼관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로 이루어진 이성애에 입각한 일부일처제이다. 이외에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동거, 불륜, 성매매, 수간 등은 모두 혐오스러운 죄에 해당된다고 본다.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에 대한 보호와 동성결혼의 권리는 정의로운 요구는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지 않은 것을 권리로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3)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은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결혼관이기도 하고 성경적인 결혼관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와 동성혼으로 양분된 미국 교계와 각각의 찬반 이유들을 살펴보고 마지막 결론에서 동성혼에 대한 한국교계의 대응원리와 대책을 복음주의적 신학과 목회자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한다.


Ⅰ. 결혼과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견해
(1) 성경적인 결혼제도
동성혼의 문제는 성경의 결혼관을 통해 조명해야 한다. 에밀 브루너가 지적한 대로 결혼과 국가는 창조세계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다. 결혼에 관한 창세기 1장과 2장의 본문은 남성과 여성의 창조와 이성애에 근거한 결혼제도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의 부부로 일부일처의 원형이다. 결혼은 하나님이 창세에 만드신 최초의 제도로써 인류의 타락이전부터 존속해온 유일한 제도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 2:22-24, )
신약성경에 예수님은 공생애에서 창세기 기록과 동일한 관점으로 결혼제도를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마19:4-6)
예수님은 마태복음 본문을 통해 아담과 이브의 창조기사를 사실로 확인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인류가 타락하기 전부터 있던 결혼제도를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보존해야하는 제도로 풀이해주셨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각자의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가정을 형성해야 한다.
최초의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아담은 흙에서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본래 한 몸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결혼제도를 통하여 재(再) 연합하게 된다. 아담과 이브는 단순한 친구관계도 단순한 동거인도 아니며 그들은 오직 ‘한 몸’이라는 표현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신비로운 관계를 이룬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는 것은 부부의 친밀함을 함축한다.
사도 바울은 남녀의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비유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 남녀 부부의 하나 됨과 같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2) 결혼제도의 목적
예수님은 언약으로서의 결혼의 우선적인 목적은 결혼한 부부의 상호간의 사랑과 협조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시니라.”(창 2:18)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배필이요 친구요 협조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장 1항은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남자이든지 동시에 한 아내 이상을 가지거나 어떤 여자든지 동시에 한 남편 이상을 가지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결혼제도에서 또 다른 목적은 출산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출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출산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의 언약이 취소될 수 없기 때문에 출산은 결혼제도에서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 이차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성경의 가르침은 남성과 여성의 성별로 창조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의 성별에 입각한 이성애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제도이고 부부의 정절은 하나님의 뜻이다. 동성혼은 성경의 이성애에 입각한 결혼관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동성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적 성향이 자연스러운 본성이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고 한다. 이제 다음 장에서 필자는 성경의 동성애 본문을 찾아서 동성애에 대한 원래의 의미를 간략하게 탐구하고자 한다.

(3)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평가
1) 구약성경과 동성애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동성애를 직접 언급하는 본문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19:1-11, 사사기 19:22-30, 레위기 18:22, 20:13이다. 그 외에는 열왕기 본문과 에스겔 선지자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소돔에 대한 평가적 교훈에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 소돔과 고모라
남색(男色)과 항문성교를 의미하는 ‘sodomy’는 구약성경 소돔성의 멸망에서 유래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소돔성은 아브라함의 간청으로 정한 최소한의 기준 ‘의인 열 명’이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멸망한 성읍이다. 소돔성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기 본문은 일관되게 소돔성 사람들의 타락을 기록한다. 창세기 13장에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고 기록했다.
주님은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 18:20,21)고 하신다. 소돔성의 남자들은 롯의 집에 있는 방문자들과 성관계를 갖겠다고 소동을 벌였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그러나 반세기 전 베일리(Derrick Sherwin Bailey)의 주장과4) 이 베일리의 주장을 토대로 보스웰(Boswell)은 소돔은 동성애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고 동성애가 소돔 멸망의 핵심요인도 아니라고 주장한다.5) 소돔성의 남자들은 단순히 그 여행자들과의 교제를 원했을 뿐이지 동성애의 성관계를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일리는 히브리어인 ‘야다’(yadah)가 성경에 943번 사용된 것 중에 불과 10회 만이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부 성경의 역본에 “we can have sex with them!”으로 표현 하는 것은 근거 없는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이다.
서우(Soew)는 구약의 다른 본문들(렘 23:14의 끔찍한 일, 간음, 악행, 거짓말, 겔 16:50의 역겨운 일, detestable things)이 동성애에 대한 심판의 직접적인 이유가 아니라고 하며 심판의 원인은 끔직하고 역겨운 일들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베일리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일단의 학자들은 ‘야다’(yadah)가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고 보며,6) 스카조니(Scanzoni)와 모렌코트(Molenkott)는 고대 근동에서 지배의 수단으로 성립된 남성 강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필자의 견해로는 서우(Soew)가 동성애를 심판의 직접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본다. 또한 에스겔서의 ‘역겨운 일’은 레위기의 동성애 금지에 대한 표현으로 보는 것도 맞고,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 안에서 폭넓은 문화적 관행이 되었으며 그래서 그 성의 멸망을 피할 수 없게 한 악행의 핵심 요소라는 점은 분명하다.
– 레위기 18장과 20장
레위기 18:22, 20:13은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분명하게 언급한 것으로 동성 간의 성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명문화 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
친(親) 동성애 신학자들은 레위기 본문을 동성애 금지조항으로 해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보스웰은 히브리어 ‘토바’(toevah)를 ‘본래 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례적(祭禮的)으로 부정한 것을 지칭한다고 보아 레위기 본문은 이방종교의 우상숭배를 금지한 법이라고 주장한다.7) 그러나 보스웰의 주장의 약점은 ‘토바’(toevah)가 우상숭배에 관련된 행위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악한 것을 명백하게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8) 실제로 잠언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용례는 이방종교의 우상숭배와 무관하다.(잠언 3:32, 15:9) 설사 가나안 종교의 우상숭배와 연관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레위기 본문은 동성애의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라는 점을 너무나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들
여호수아 이후의 사사시대에도 동성애와 연관된 참혹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삿 19장) 소돔 남자들처럼 기브아의 불량배들도 한 노인의 집에 유숙하려고 온 레위인을 요구한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하니”(삿 19:22) 마지 막 부분을 HCBS 번역본은 그들이 동성애 성관계를 요구하였다고 보아 “Bring out the man who came to your house so we can have sex with him!”로 옮기고 있다.
이 밖에도 신명기 23:17을 새 번역에선 “이스라엘의 아들들도 남창이 될 수 없습니다.”로 개역성경은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美童, 카데쉬, 동성애자)이 있지 못할지니”로, KJV에서는 “There shall be no whore of the daughters of Israel, nor a sodomite of the sons of Israel.”(신23:17)로 옮기고 있다. 열왕기에서도 남색(男色)은 정죄 받는 큰 죄악이었다. “그 땅에 또 남색 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왕 상 14:24) 그리고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왕상 15:11-13)

2) 신약성경의 동성애 관련 본문
– 사도 바울의 견해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동성애를 큰 죄로 간주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보낸 서신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라고 말한다.
그리고 디모데전서도 역시 이렇게 말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 1:9,10)
– 기타 신약성경 유다서, 베드로서
바울의 서신 이외에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의 음란함이 심판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그리고 사도 베드로 역시 소돔과 고모라의 도덕적 타락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이라고 밝혀 말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벧후 2:6-10)

3) 동성애자들의 성경의 동성애에 대한 내용 반박
동성애와 동성혼 지지자들은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죄로 간주하는 사도 바울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첫째, 그들은 사도 바울이 ‘동성애 성향’과 ‘동성애 탐닉 자’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완전한 동성애자는 여자와의 ‘올바른 성관계’ 를 처음부터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성 애자들이 동성 배우자와 서로 사랑과 진정한 헌신의 관계에 있다면 바울의 정죄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동성애자에 대한 바울의 정죄는 인격적 본성에 반대되는 행위를 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가령 보스웰은 이방인들이 자연스러운 유신론적 성향과 성적인 성향을 포기했다는 것에서 바울의 비판의 핵심이 있다고 본다. 보스웰은 로마서 1:26,27에 서 자연스런 관계는 부도덕함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셋째, 동성애 금지는 시대와 문화에 제한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서우(Seow)는 바울의 비판이 모든 세대에 적용되지 않는 다고 주 장하며, 퍼니쉬(Furnish)는 바울의 전제는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태도에 근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9) 그들은 동성애가 우상숭배와 관련되었을 경우에 한해서만 죄가 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과 베드로와 유다는 모두 동성애와 성적인 음란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원인이라고 공통되게 지적한다. 존 스토트는 디모데전서 1:10의 (불법한 죄의 예들) ‘간음하는 자와 남색 하는 자와’(for the sexually immoral and homosexuals)에서 ‘남색 하는 자’로 해당하는 헬라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말라코스’(μαλακός)는 남색의 상대자로서 수동적 역할을 하는 남성을 가리키고 ‘아르세노코이테스’는 동성애 관계에서 적극적인 남자 역할을 하는 동성애자를 가리킨다.10)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의 목록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일반적으로 남성 매춘부와 동성애 제공자로 여겨지는 ‘말라코이’(malakoi)를 포함시킨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arsenkoita’와 ‘pornia’를 그 목록에 포함시킨다. 상술한 대로 성경에서 동성애를 언급하는 구절은 동성애를 금지하며 분명하게 죄로 규정한 것을 알 수 있다.
베일리는 바울을 포함하여 성경의 저자들이 ‘성적 지향성’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며 성경의 진리를 시대에 따라 제한 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보스웰은 ‘말라코스’가 동성애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동성애를 죄로 지칭하는 성경의 본문이 상대적으로 소수이긴 하지만 그것이 친 동성애적 신학자들의 논거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죄의 지향성과 죄의 행동과 결과를 명료하게 구분한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의 소원’(desire)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9)고 말씀하였다. 죄의 소원은 죄를 짓는 성향으로 보아도 된다. 동성애를 포함한 죄를 향한 성향(소원)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갖는 특성이다. 사람은 말씀과 성령으로 그 죄의 성향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동성애적 지향성’을 알지 못했다는 비난은 ‘성경이 동성애를 허용할 수 있다’는 근거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존 스토트는 친 동성애적인 성경본문 해석을 단호하게 오류라고 비판한다. 스토트는 “이런 주장이 매우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성경자료를 이런식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동성애 관행을 거부하는 것은 고립되어 있고 분명치 않아서 얼마든지 논리를 뒤집을 수 있는 몇몇 증거본문 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11) 그는 동성애 관행에 대한 성경의 부정적 인식은 창세기의 성욕과 결혼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동성애가 소돔과 고모라의 유일한 죄는 아니지만 그것을 포함한 심각한 죄들의 고착화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교훈이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인 금지는 창세기의 최초의 결혼제도에 연결되어 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과 이성애의 결혼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Ⅱ. 동성혼에 관한 미국교회와 사회적 상황
(1) 미국 교계의 상황
1) 양분된 미국교계
동성애 성향과 동성혼 인정과 투쟁은 현대 사회의 중대한 이슈이다. 한동안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성향을 숨겨왔지만 이제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벽장에서 나와서 공공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동성애적 지향성을 차별금지법으로 보호하고, 헌법적 수준에서 동성혼의 합법성을 얻게 되어 더욱 거세게 사회전반에 확대되어가고 있다. 서구사회의 대부분의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자들이 있으며 동성애의 축제는 도시들의 정규행사가 되어버렸다. 동성애가 과거역사의 교회사에 엄격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의 반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 황제 저스티니안(Justinian)은 동성애자들에 대해 교회의 감독 하에 참회를 요구한 온건한 입장이었던 반면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동성애자들을 화형(火刑)에 처하도록 명령을 내린 적도 있다.12) 아직까지는 로마 가톨릭은 동성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까지인지는 불확실하다.
미국의 개신교는 교단에 따라 동성혼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동성혼을 지지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내홍을 겪고 있으며 일부는 교회 재산을 포기하고 탈퇴를 하고 있다. 특별히 미국에서 주요교단과 복음주의 진영은 동성애와 동성혼의 문제에 대해선 정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가령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미국 연합그리스도교회(UCC)13), 미 연합장로교회(PCUSA)14), 미 성공회15), 미 복음주의 루터교회(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16), 미 침례교회(American Baptist)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교회(Disciples of Christ)는 동성애와 동성혼을 지지하는 주요교단들이다.
이에 비해 복음주의 진영은 동성애 성직 임명을 거부하거나 반대하고 있으며 동성혼을 성경과 배치되는 세상의 가치로 보고 허용하지 않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동성혼을 반대하는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미국의 개신교단들은 가장 큰 교단인 미국의 남침례 교단을 포함한 대부분의 침례교단들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와 같은 오순절교단, 하나님의 교회, 나자렛교단을 포함한 성결계통 교단들 및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독립교단들이 동성혼을 반대하는 진영에 속한다.

2) 동성혼을 지지하는 근거 : 이성과 문화 중심
동성애와 동성혼 지지교단들은 일반적으로 현대사상, 현대과학, 문학, 예술에 개방되어 있으며 그것들에 권위를 부여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17) 그들은 각기 다른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와 동성혼을 위한 기도, 신학, 예전에서 강력한 유대감을 국내 수준과 국제 수준에서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인정하는 권위의 근거로는 성경, 전통, 이성(理性), 인권이다. 개신교의 주요한 교단들은 이 네 가지 권위적 근원을 통해서 동성애 문제에 접근하고 동성애 지향성과 동성혼의 권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가치 있는 선물이며 성경과도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게이(Gay) 신학자들은 이성을 동성애 문제에 대한 권위로 사용한다. 이성(理性)에의 개방성은 두 가지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문화(文化)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인간의 이성(理性)은 인간의 행동의 패턴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우주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탐구와 인류의 문화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 운 통찰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동성애 문제도 심리학자, 사 회학자,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의존한다는 특징이 있다.
둘째,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성경과 전통의 요소에 대한 비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들은 성경의 저자들은 어느 정도 그 들의 상황 속에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의 저자들은 현대의 과 학과는 양립되지 않고 수용되지 않는 고대의 우주관을 가지고 있 으며 현대의 서구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노예제도, 절대군주제도, 여성비하와 같은 문화를 지지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동성애에 대한 진술도 현대의 지식에 비추어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성경의 일부를 비판하는 것은 성경전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 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율법과 명령이 현대의 문화에 적용되지 않는 것은 일차적으로 성경의 저자들이 문화적 제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법과 사회제도로 부터 존중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동성애자의 인권과 동성혼의 권리도 법과 사회로부터의 존중 이라는 차원에서 정당한 요구라는 것이다.18)
3) 동성혼을 반대하는 근거 :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반(反) 동성혼의 입장을 가진 복음주의 교단들은 인간의 이성(理性)과 전통을 권위의 근거로 삼는 주류 교단의 의견에 반대한다.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자들에게는 성경이 유일한 권위의 근거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령의 영감을 통해서 모든 세대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역사와 문화(文化)를 초월하여 적용되어야 하며 크리스천들은 성경에 순종해야 한다. 남침례교의 신조는 “거룩한 성경은 하나님이 영감을 주신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이고, 성경의 목적은 구원이며, 성경은 오류 없는 진리이다.”라고 진술한다.19) 이처럼 성경에 완전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성(理性)과 문화(文化)를 근거로 삼아 성경을 비판하고 성경의 저자들을 문화에 예속 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2) 교육계와 성적 지향성
미국 버지니아 주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회는 2014년 11월에 학교에서 보호되어야 할 권리 항목에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을 추가했고 2015년 5월엔 ‘성별 정체성’(gender identity)을 교육위원들이 투표한 결과 10대 1로 가결했다. 학부모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육위원회가 압도적으로 가결한 이유는 ‘성 정체성’을 보호 하지 않을 우 연방정부가 카운티 교육국에 4,200만 달러의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단체는 LGBT 활동조직으로서 인권캠페인(Human Right Campaign)을 통해서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 법안(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SOGI 법안)을 신용, 교육. 고용, 연방예산, 주택, 법정의 모든 영역에서 ‘성 정체성’을 보호되어야 할 항목으로 추가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회의 결정은 성 소수자의 보호라는 측면보다는 새로운 문제들을 생산하고 있다. 가령 성별 정체성에 따르면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의 성별 정체성을 가졌을 경우에 여성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면 학교의 수학여행 중에 여성 정체성을 가진 생물학적 남성이 여학생들과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자는 것도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LGBT활동 단체들은 ‘차별금지 법안’이 보호할 항목에 ‘동성애적 지향성’을 삽입하기를 추구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미국이나 유럽처럼 ‘동성혼’을 법제화하는 것이 성소수자의 차별을 없애고 성소수자에게도 보편적 인권을 실현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동성혼 지지자들은 과거의 인종차별이 도덕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을 차별하는 것은 부도덕한 짓이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활발하게 그들의 의견을 대중화 및 법제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은 동성애가 차별금지 조항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으며, 나아가 동성혼이 법제화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는 예산을 통해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 대해 성 정체성을 반영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왜 그 것이 정당한 조치인가? 인류의 역사 가운데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자연법에 의존하고 있는데 자연법을 어기는 정책을 강요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러므로 도덕성이 아니라 심리적 특성에 의존하는 ‘성 정체성 차별금지’는 앞으로 종교의 자유, 경제적 자유, 아동복지에 관련된 많은 문제를 수반할 것이 자명하다.

(3) 동성혼 지지자들의 논리 : 동성혼 차별은 인종차별과 같다.
동성혼 지지자들이 가장 중요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인종차별과의 비유’이다. 동성혼 옹호자들은 올해의 대법원의 판결(Obergefell v. Hodges)은 낙태와 관련된 Roe v. Wade처럼 국민적 논쟁을 수반하지 않고 인종 간 결혼 금지를 철폐시킨 판례 Loving v. Virginia처럼 보편적인 도덕성으로 수용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동성혼을 반대하는 것은 인 종 차별 주장처럼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차별금지법 조항에 ‘동성애 지향성’과 ‘동성혼의 권리’를 추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LGBT는 동성혼의 문제를 인종의 문제와 같은 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전통결혼의 신념에 따라 혹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동성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종간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동성혼 반대자들은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은 편협한 사고를 가진 비도덕적인 사람들이기에 그에 따른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동성혼 합헌판결(Obergefell v. Hodges) 이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서의 전통적인 결혼을 결혼제도의 본질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편협하고 완고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 가령 성적 지향성에 따라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에 비판하는 일반 시민들을 관용이 없는 비도덕적인 사람들로 왜곡하는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통결혼 지지자는 근거 없이 동성혼을 반대하고 성적지향성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하고 편협한 사람들인가? 그들은 동성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인가? 전통적인 결혼을 지지자들은 인종차별주의 자처럼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미국에선 Roe v. Wade 판결이후 미국 법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여성 혐오주의자(anti-woman)로 매도당하거나 구금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공공 정책에 대한 토론에서 합당한 지위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관용의 정신이 동성결혼 반대자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가? 정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전통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종교와 양심에 따라 사는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정치와 도덕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정치철학자 존 롤즈에 의하면 미국 민주주의의 힘을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에서 찾는다.20) 그는 유럽 교회의 쇠퇴는 정교분리가 실현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유럽의 기독교는 국가의 권력을 사용해서 종교재판을 했고 억압적인 국가기관으로 전락했다. 국가와 교회 는 분리를 통해 각각 최상의 기능을 발휘한다.

(4) 동성혼에 대한 반대 논거
1) 동성혼 반대와 인종차별은 동일한 도덕적문제가 아니다.
동성혼 지지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동성혼의 문제는 인종 간 혼인금지의 문제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심리적인 성정체성은 생물학적인 인종과 동일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생물학적인 차이에 의한 차별을 정당화한 인종 간 혼인금지 조항은 철폐되는 것이 정당하고 필연적이지만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과 성 정체성은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동성혼의 반대를 인종주의나 인종 간 결혼금지에 비유하는 것은 논리적 역사적 오류에 해당된다. 세계역사에서 인종 간 결혼금지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 법안은 일종의 인종계급 카스트제도가 구현된 사회 안에서만 존재했었다. 그러나 남녀 간의 결합으로서의 결혼제도는 인류역사상 처음부터 있었던 규범이며, 위대한 사상가들과 동서양 종교들은 이성애에 입각한 결혼제도를 모두 인정해왔다.
대부분 유신론적 종교는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으며, 남성과 여성의 결혼을 자연적인 것으로 가르쳐왔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헬라철학, 어거스틴, 아퀴나스에 이르는 기독교 철학,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사상, 로크와 칸트의 근대철학,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같은 사상가들도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연합을 결혼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결혼에 있어서 인종을 고려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최근에 등장한 정치 공동체일 뿐이다. 근대 영국의 식민지들에서만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고 처벌한 것은 분명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한 것이었으며 기득권을 지키는 정치적인 동기였을 뿐이다.
결혼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구별은 결혼의 핵심이다. 인종이 무엇이든지 남자와 여자는 결혼으로 연합할 수 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프랜시스 벡위드(Francis Beckwith)에 의하면 인종 간 혼인금지 법안은 보통법(common law)에서는 선례가 없는 것으로 백인의 문화적 주도권을 유지할 목적으로 지배 계급에 가까운 백인의 인종적 순수 혈통을 보존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보통법에서는 합당한 결혼의 필수조건은 인종과는 전혀 관계없이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에 의존한다.21)

2) 전통적인 결혼의 보호가 필요하다.
동성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라는 것과 성관계는 결혼을 위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결혼을 약화시킨다. 동성혼은 인류의 오랜 역사동안 가져왔던 전통적인 결혼관을 파괴하려고 한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서의 결혼 이해는 자연법에 근거한 것으로 합당하며 성경적인 근거를 갖는다. 그러나 인종 간 결혼금지는 타당하지 않으며 어떤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인종 간 결혼금지는 대개 사회의 억압을 위한 동기로 작용한 것이지만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서의 전통적인 결혼관은 억압 기제(機制,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가 아니다.
따라서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을 인종문제처럼 다루는 것은 어떤 역사적, 철학적 근거가 없다. 성적 지향은 결코 인종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 보호를 위한 법안(SOGI)를 반대하는 것은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다. ‘성적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이 보호받는 항목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성적 지향성은 도덕적 평가와 연결되어 있다.
성적 지향성은 인종처럼 생물학적으로 분명한 것이 아니라 지나 치 게 애매하다.
성적 지향성은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약화시킨다.
특히 옥스퍼드 대학교의 존 피니스(John Finnis) 교수는 현대의 법체계의 차별금지 조항에 ‘성적 지향성’이라는 항목을 추가하는 것은 시민들이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과 미국의 서구사회에서 동성혼이 헌법적 수준에서 합법성을 갖게 된 것은 동성애자들의 주도면밀한 투쟁과 로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즈에 의하면 사회의 주요제도는 “정치의 기본법이나 기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체제를 말한다. 그래서 사상의 자유 , 양심의 자유 , 경쟁적 시장, 생산수단의 사유 등에 대한 법적인 보호와 일부일처제 등은 주요한 사회제도의 예들이 된다.”22)
롤즈가 가족을 사회의 주요 제도로 설정하는 이유는 가족의 중요한 역할 때문이다. 가족의 역할은 자녀들에게 도덕적 정치적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물론 롤즈는 가족의 역할에 대해 아주 체계적인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롤즈의 전기 저서들은 이성으로 구성된 일부일처제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사회의 주요제도로 설명한다. “가족제도가 정의롭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며 그의 선을 귀하게 여김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명백히 표현할 경우 어린이는 그에 대한 그들의 명백한 사랑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23)
그렇지만 롤즈는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에 대해 또는 이성애적 가족이라는 전통적 견해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견지한다. 롤즈는 “질서정연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출생과 사망은 매우 중요하며, 출생을 통해서만 그 사회에 진입되며, 사망을 통해서만 그 사회에서 탈퇴한다.”고 말한다.24) 그는 일부일처제를 사회의 주요제도로 설정하였고 출생을 통해서만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주장을 통해서 전통적인 결혼관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롤즈는 그의 사상체계 안에서 일부일처제를 일관성 있게 주장하지 못하고 “동성애자들의 권리와 의무가 질서 있는 가족생활과 자녀교육에 일관된다면 동성애자들의 가족형태도 허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25)
지난 2015년 6월 미국 대법원의 판례를 통해서 가족에 대한 재정의(再定義, 단순히 두 사람간의 결합)는 이미 성(性) 혁명을 통해 무너진 전통적인 가족의 붕괴를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경우 성(性) 혁명을 통해서 이미 출생하는 아이들의 40%는 미혼의 여성에게서 태어나고 있으며 금번 동성혼 판결을 통해서 부친과 모친에게 생물학적 구분이 없다는 것이 자녀들에게 가르쳐지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전통적인 결혼을 완전하게 붕괴시킬 것이다.

3) 종교의 자유는 천부적 기본권이다.
필자가 동성혼을 반대하고 차별금지 법안에 ‘동성애적 정체성’ 항목이 추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동성혼 지지법안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인 ‘종교의 자유’와 ‘연설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성혼지지’ 법안과 그에 따른 ‘혐오금지’ 법안의 제정은 결국 전통적인 결혼 문화를 편협한 것으로 보게 할 뿐만이 아니라, 종교행사의 자유, 종교적 신념의 보호,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경제활동의 자유 그리고 아동복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동성혼의 권리보다 종교의 자유가 더 상위의 가치이다.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동성애와 동성혼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공적 영역의 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정부의 역할은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과 모든 시민의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위임을 받았다. 정부는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고 종교적 신념에 따라 예배할 자유와 신(神)에 대한 진리를 추구할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
롤즈의 유명한 ‘정의의 두 원칙’에 의해서 보장되는 기본 권리에는 정치적 자유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사유재산권과 신체의 자유, 법의 지배라는 명목으로 부당한 체포 및 구금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포함되며,26) 국가의 중요한 책무는 당연히 양심과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우선적인 것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그는 “국가는 특정한 종교를 선호할 수 없으며 어떤 종교에 가입하거나 탈퇴한다고 해서 벌금이나 근신을 부과할 수 없는 것이다. 법은 한 종교에 대한 배교뿐만 아니라, 전혀 종교를 갖지 않는 것까지도 법률상의 죄로 인정하거나 형벌을 부과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국가는 도덕적 종교적 자유를 지지하게 된다.”고 말한다.27)
롤즈는 ‘절차의 중립성’과 ‘목적의 중립성’ 중에서 그의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절차적 중립성’을 지지한다.28) 중립성이 의미는 “국가는 어떤 특정한 포괄적 교리를 다른 교리보다 선호하거나 장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가는 개인들로 하여금 특정한 신관을 수용하도록 하는 어떤 행위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29) 그래서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자녀들이 사회에 존재하는 양심의 자유를 배우고, 배교가 법률상의 죄가 아님을 알게 된다고 한다.30)
그렇다면 부모의 종교에 대한 배교마저도 법률상의 죄가 아님을 가르치는 것이 정치적 시민의 교육이라고 한다면 왜 자녀들이 부모의 ‘동성애와 동성혼’에 대해 결별하고 이성애 결혼을 택할 수 있는 ‘동성혼에 대한 배교’는 생각도 못하게 하는가? 동성혼 지지자들은 차별금지 법안을 통하여 동성혼에 대한 어떤 비판도 용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상적 독재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 역시 동성혼의 합헌 결정보다는 오히려 ‘혼인제 폐지’를 통해서 아예 국가가 혼인제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31) 정부는 혼인문제를 사적인 영역에 남겨두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샌델은 동성혼이 개인의 자유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성혼이라는 결혼의 형식이 공동체의 인정과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인가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동성애의 지향성과 성별 정체성을 차별되지 않아야 할 권리로 일단 규정하고 나면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22
미국의 패어팩스 카운티 교육국의 논리를 좀 더 확대해 적용해본다면 성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갈 수 있다는 논리는 성정체성에 따라 학교의 수학여행 기간 중에 생물학적 특징이 다른 두 사람이 한 방을 쓸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성정체성이 차별 금지조항에 들어가면 그 가치는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고 제한하는 ‘독재 적 지위’를 갖게 된다. 공공장소에서 동성애와 동성혼을 비방하면 처벌받을 수 있다. 가령 영국, 캐나다, 미국 등에서 동성결혼 주례를 거부한 목회자들에게 구금 형벌과 벌금형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동성애 지향성과 동성혼의 지위가 독재적이라는 것을 말 해준다.

Ⅲ. 동성혼에 대한 교회의 자세
(1) 기독교적 인간관은 타락한 본성을 전제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선한 본성과 타락한 본성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펠라기우스(Pelagius)와 계몽주의 철학은 선한 인성론과 자유의지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성경해석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원죄에 의해 타락되고 부패되었다. 따라서 타락한 이후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움은 도덕적 자연스러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타락한 이후 인간은 모든 종류의 죄악이 일어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It’s desire is for you, but you must master it.)말씀하셨다. ‘it’s desire‘는 다스림의 대상이다. 사람의 타락한 본성은 살인, 시기, 질투, 분당 등 죄악 된 욕구를 자연스럽게 느낀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의 욕구를 사람들이 갖게 된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인간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가 되게 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다. 이성간 결혼에 대한 대안은 동성혼이 아니라 독신(獨身)과 성적 절제(節制)이다.
그렇다면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 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 하 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말한 직후에 바로 이어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고 했다. 그렇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복음의 능력은 사람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

(2) 동성애치료에 대한 공중보건 정책과 사회적 담론을 형성 해야 한다.
미국 정신의학사전에서 동성애가 정신병 목록에서 제외된 후 이제는 동성애를 자연스러움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어떤 치료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곡되고 잘못 된 이성애도 처벌과 치유가 필요한 것처럼 동성애적 성향이 아니라 동성애적 행동을 통해서 잘못이 발생한다면 그에 따른 치유와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성(性) 범죄자들에게 주는 전자발찌를 동성애 범죄자들에게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죄의 성향은 이성애(異性愛)와 동성애(同性愛)를 막론하고 모두 적용되는 것이 바로 법의 지배이다.
또한 자연스러운 욕구가 반드시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소아(小兒) 성애와 강간은 처벌의 대상이다. 동성애에 대한 치료를 거부하는 시도는 사라져야 한다. 모든 동성애자가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 환자는 아니고 모든 에이즈 환자가 반드시 동성애자도 아니다. 그러나 동성애와 에이즈는 분명히 밀접한 상관관계(相關關係)가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2004년부터 한국의 청소년들에게서 에이즈 환자의 비율이 높게 증가하는 것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3)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는 천부적 인권이다.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고 동성혼을 거부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정부가 만든 권리가 아니라 하늘이 부여한 천부적(天賦的) 인권에 해당된다. 동성애 지향성 보호법안과 동성혼을 반대할 수 있는 종교적인 자유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판단의 오류 가능성과 인식론적인 불일치로 인하여 관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이고 근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그런데 차별금지 조항은 동성애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게 한다. 동성혼이 한국에서도 허용되고 동성애 지향성을 보호하는 법안이 등장한다면 천부적(天賦的)인 자연권인 종교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침해되고 종교의 자유는 주일에 교회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의 자유’로만 극히 제한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예배시간에 목회자의 설교도 심지어 처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4) 동성혼을 반대하는 교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교회 안에선 돌이키지 않는 동성애와 동성혼 지지자에 대해 성경적인 가르침을 표명해야 한다. 현대 서구교회가 동성애를 용납하는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이성과 문화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가증한 죄로 말한다. 죄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오직 철저히 회개만이 필요하다. 존 스토트 목사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박사의 견해를 인용하며 이를 동조한다. “동성애 결합과 성경적 결혼을 대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교회는 더 이상 거룩한 보편적인 사도적교회가 아니다.”32)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복음주의 교회라면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안수하여 세울 수 없다. 만일 누구든지 성적인 죄로부터 회개하지 않는 다면 비록 성직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은 리더십의 지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성경은 교회 안에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은 더 엄격하게 말씀의 기준이 적용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능력으로 회심한 사람이 리더십이 되는 것을 막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선포한다. 사람은 새롭게 될 수 있다.

결론
복음주의적 크리스천들은 성경적인 결혼관에 따라서 살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온건한 방식을 통하여 동성혼의 문제를 지적하고 성경적인 결혼은 자연법에 의거한 것이기에 전통적인 결혼관을 가진 유교를 비롯한 동조 그룹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도덕(道德)은 정치(政治)보다 앞선다. 한 남성(男性)과 한 여성(女性)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결혼관은 국가의 정책과 법으로 변경할 수 없는 자연법적 도덕성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지속적으로 교회는 물론 사회적으로 담론화(談論化) 해야 한다.
(*) 글쓴 이 / 김기호 교수(한동대)

< 참고 문헌 >
1) Kevin Deyoung, What does the Bible really teach about Homosexuality? Wheaton, Crossway, 2015.
2) Duane Olson, issues in Contemporary Christian Thought,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1
3)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 Phillipsburg: 2004
4) 캐시 루디, 섹스 앤 더 처지: 젠더, 동성애, 그리고 기독교 윤리의 변혁, 서울: 한울, 2012
5)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서울: IVP, 2011
6) 플로랑스 마뉴, 동성애의 역사 서울: 이마고, 2007
7) Martha C. Nussbaum, Sex and Social Justi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8) Craig A. Williams, Roman Homosexual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9) Ryan T. Anderson, Truth Overruled: The Future of Marriage and Religious freedom, Washington D.C.: Regnery Publishing, 2015.
0) John Rawls, Political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5
1)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Cambridge: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1999
< 미 주 >
1) Martha C. Nussbaum, Sex and Social Justice (Oxford: Oxford University,1999), 200
2) 국가인권위원회 관련법 30조 2항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2002년 7월에 생물학적 요인과 상관없이 심리적 정체성 장애를 인정하고 성전환자의 경우 호적상 성별을 정정하도록 하는 부산지법의 판결도 있었다. 그 후 2002년 12월 한 성전환자가 법적으로 변 경 된 성별을 갖게 된 적도 있었다.
3) John Stott, Same-Sex Partnerships?(Zondervan,1998) 제4장 참조 26
4) Derrick Sherwin Bailey, Homosexuality and the Western Christian Tradition(London:Longmans, Green, 1955)
5) Homosexuality: Not a Sin-Not a Sickness: Toward an evaluation of pro-Gay heological perspec
-tives, 80 & Russ Tate, John Boswell,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Gray People in Western Europe from the Beginning of Christian Era to the Fourteenth Century, 90-97을 참고
6) 존 스토트,‘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서울: IVP, 2006) 510-512.
7) Boswell, ibid., 103.
8) R. E. Clements,‘Abomination in the Book of proverbs’in Fox, Michael et al(ed.), Texts, Temples, and Traditions: A Tribute to Menahem Haran(Winona Lake: Eisenbrauns, 1996), 211-225.
9) Victor Paul Furnish, “what does the bible say” in Geis, Caught in the Crossfire, pp. 57-66.
10) 존 스토트의 동성애 논쟁, 26-30. 가톨릭 역본인 예루살렘 성경은 이 단어를“미동과 남색자 catamites and sodomites”로 표현한다.
11) 존 스토트,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517.
12)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133.
13)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UCC)는 1972년에 동성애자였던 윌리암 존슨(William Johnson)의 목 사안수를 허락한 이후, 1980년 남녀 동성애자들을 목사가 될 수 있도록 허용한 최초의 대교단 이 되었다. 1991년 UCC 총회는 게이, 레즈비언, 성전환자가 성직자가 되도록 허락하는 것을 압도적 표수로 결정하였다. 2005년에는 공식적으로 동성혼을 지지한다고 결의하였다. Mike Schuenemeyer,“Marriage Equality”United Church of Christ Web Site, November 4,2009,
http://www.ucc.org/lgbt/issues/marriage-equality/#Marriage_Equality_and_the_Ucc.
14) 대한민국의 선교에 크게 기여했던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1999년 레즈비언 제인 스파 (Jane Spahr)를 그 해의‘신앙의 여성’수상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는 그 교단 을 섬기는 첫 번째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 그리고 2015년 현재 미합중국장로교회는 동성혼을 지지하고 그에 반대하는 교회들은 교단을 떠나가고 있다.
15) 2003년 6월 7일 미국 성공회는 주교 관구를 둘로 나누어서 뉴햄프셔의 교구에 공공연한 동성애자 인 진 로 빈손(V. Gene Robinson)을 뉴햄프셔 주교로 선출하였다. 13년 전의 결혼 서약을 어기고, 그의 아내와 두 어린 딸을 버린 후에 진 로빈슨은 게이로 등장했고 그는 남자 파트너와 함께 산다. 그를 주교로 임명하기 위해서 미국 성공회 내 두 단체의 표결이 필요했다. 주교단은 62대 45로 찬 성했고 평신도 사제로 구성된 단체는 128대 63으로 찬성을 했다. B.A. Robinson“Religious conflicts: The Episcopal Church, USA and Homosexuality,” Ontario Consultants on Teligious Tolerance, last updated 2007.9.22., http://www.religioustolerance.org/hom_epis.htm.
16) 2009년 미국 루터교(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of America)는 676대 338로 동성애자가 성 직자로 사역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동성결혼 역시 지지하였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교회들은 교단을 떠났다. Mark S. Hanson, “churchwide Assembly Update,” 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2009.8.22. http://elca.org/Who-We-Are/Our-Three-Expressions/Churchwide-Orginization.
Office-of-the-Presi ding-Bishop/Messages-an-statement/090822.aspx.
17) Duane Olson, Issues in Contemporary Christian Thought, 204.
18) Nussbaum, Sex and Social Justice, 5.
19) Southern Baptist Convention,“The Baptist Faith and Message,”sbcnet, n.d.,
http://sbc.net/bfm/bfm/bfm2000.asp#i.
20) John Rawls, Political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2005), 477.
21) Francis Beckwith,“Interracial Marriage and Same-Sex Marriage”
22) John Rawls,‘정의론’40. 이탤릭은 필자의 강조사항이다.
23) Ibid.629.
24) Rawls, Political Liberalism, 84-85. 27
25) Ibid., 467. 각주 60을 보라.
26) John Rawls,‘정의론’106.
27) Ibid., 289.
28) Rawls, Political Liberalism , 192-193.
29) Ibid., 193.
30) Ibid., 193.
31)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서울; 김영사, 2010) 354.
32) John Jefferson Davis, Evangelical Ethics, 133
– 성적 지향(性的 指向, Sexual orientation) / 자신이 이끌리는 이성, 동성, 혹은 복수의 성 또는 젠더를 나타낸다. ‘성적 취향’이나 ‘성적 성향’이라는 용어도 종종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 때의 끌림은 감정적이거나, 낭만적인, 성적인 끌림일 수도 있고 이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대다수의 심리학 혹은 정신의학 단체는 성적 지향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었다.(그러나 복음주의 교회와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선택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성적 지향의 분류에는 크게 반대 성에 이끌림을 뜻하는 이성애, 같은 성에 이끌림을 뜻하는 동성애, 두 성 모두 또는 때에 따라 둘 중 한 성에 이끌림을 뜻하는 양성애, 이분법적인 남성과 여성 외에도 모든 성에 이끌릴 수 있음을 뜻하는 범(汎) 성애, 성적 이끌림이 없음을 뜻하는 무(無) 성애 등이 있다. 이러한 분류는 때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마다 느끼는 이끌림이나 행동의 경향 및 강도가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의 이성애는 종종 동성애로 오해받곤 한다. 젠더 퀴어나 간성에게는 동성과 이성의 판단이 모호할 수 있다. 법률 용어로서의 ‘성적 지향’은 처음에는 판례를 통해서 의미가 형성되었다. 동성애, 이성애 또는 양성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에서 주로 사용한다.
– 성 정체성(性 正體性, gender identity) / 자신의 젠더에 대한 자각, 자아의식을 말한다. 성별 정체성, 성 주체성, 성 동일성이라고도 하며, 성적 정체성과는 다르다. ‘성 정체성’의 종류는 남성 정체성, 여성 정체성, 젠더퀴어적 정체성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성 정체성이 신체성별과 일치하는 경우를 시스젠더, 성 정체성이 신체성별과 반대인 경우를 트랜스젠더, 그리고 시스젠더에도 트랜스젠더에도 속하지 않는 성 정체성을 가진 경우를 젠더퀴어라 한다.
– 성적 정체성(性的 正體性, sexual identity) / 스스로 어떤 사람에게 연애 감정이 생기는지 혹은 성적으로 끌리는지 자신이 판단한 것이다. ‘성적 정체성’은 더 정확히 말해 성적 지향 정체성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의 인정 또는 내재화를 뜻하기도 한다. ‘성적 정체성’과 ‘성적 행동’은 ‘성적 지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나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생각을 가리키는 정체성, 개인의 실제 활동을 가리키는 행동, 동일하거나 반대, 둘 다의 성별 또는 성 정체성에 대한 연애적 또는 성적 이끌림 또는 둘 다에게 이끌리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성적 지향과는 구분된다.
기존에 ‘성적 정체성’의 형성은 성 소수자만이 겪는 과정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보다 현대적인 관점은 ‘성적 정체성’의 형성이 더 보편적이라고 보면서 현대의 다른 주류 정체성 형성과 이론의 넓은 영역 내부에 성적 정체성을 넣으려고 시도한다. 출처 / 위키백과 (주) 위의 내용 중 일부는 본지의 취지와 일치 하지 않습니다.(편집자)

2015년 3월 18일 수요일

현대사회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상담_최재락교수(서울신학대학교)

현대사회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상담
최 재 락
 
(서울신학대학교)
 
 
I. 서 론
 
오늘날 인간들은 과학적 정신으로 끊임없이 많은 것들을 창조하고 생산해 내고 있다. 사람들은 과거에 비하여 엄청난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현대사회에서 "생산적인 인간(Productive Person)"은 하나의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회생의 가능성이 없는 죽어 가는 사람은 비생산적인 인간으로 간주되어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유한적 존재로써 죽는다. 인간이 경험하는 죽음의 상황은 같지 않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인격적인 경험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인격적 경험이란, 의미를 발견하고 품위를 갖고 죽고 싶은 욕구가 충족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인격적 경험은 점점 어려워져 가고 있다.
 
그렇기에,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돕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고려되어져야 할 특별한 마음가짐과 가설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인들은 각자 다른 견해들을 갖고 있지만,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이고 또한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욕구를 갖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다 현명하고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전문적인 통찰력을 나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의사의 경우, 죽음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유기체적이며 생물학적이다. 그는 육체적 죽음을 적으로 생각하고 생명을 유지시키도록 훈련을 받았다. 임상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는 환자의 마음과 감정 깊은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직업상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지만, 그가 상담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목회자는 육체적 죽음에도 관여하지만 자신의 내담자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유한성과 관련된 생물학적 사건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이렇게 다양한 견해는 상담자의 독특한 역할과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의사나 목회자의 예비훈련이 심리학적 통찰력에 의하여 더욱 심도 있게 되며, 목회자나 임상심리학자가 병원의 일정과 의학적 통찰력에 의하여 도움을 받을 때 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간 학문적인 방법을 통하여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상담에서 요구되는 종합적인 통찰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논문의 취지와 더불어 2장에서는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상담의 기본전제들이 서술될 것이다. 3장에서는 죽는 자를 위한 상담의 이론과 실제가 검토될 것이다. 그리고 4장에서는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중시되는 종교적 가치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문제점과 더불어 탐구될 것이다. 5장에서는,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목회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문인들 사이에 보다 창조적인 협력이 요구됨을 설명하고자 한다.
 
Ⅱ. 죽는 자를 위한 상담의 기본 전제들3
 
죽어 가는 환자는 상담자에게 특별한 기회와 위험 요소들을 제공한다. 상담자가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환자를 피하게 되면 그의 특별한 요구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다. 반면, 상담자가 자신을 환자와 지나치게 동일시하면 심각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죽어 가는 환자와 의사소통을 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죽음의 주제에 대한 침묵이다. 우리는 유한성에 대하여 사회적 금기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존재인데도 죽음의 의미에 대한 건전한 토론을 꺼린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죽어 가는 환자는 자신의 내적 요구는 더욱 깊어 가는 반면에 그것을 만족시켜 줄 기회는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죽어 가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가족이나 공동체와의 정상적인 의사소통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가장 인간적인 접촉이 필요할 때 완전히 고립될 수 있다. 이러한 분리의 현상은 불안의 표현인데 오히려 그것은 자주 배려의 행위로써 합리화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족 공동체와 격리된 병원과 같은 환경에서 임종을 맞게 된다. 병원은 의사나 간호원들의 영역이며, 만약 그들이 환자의 감정적 요구에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 환자의 고립감은 심각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문가들로 하여금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다.
 
E. 에슬러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심리치료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이 삶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연장이 되기 위하여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R. 버틀러 역시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므로 상담자의 역할은 환자에게 단순히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차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사는 육체적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는 자신의 역할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심리치료사는 환자가 심리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그의 존재 전체에 관여하여야 한다. 아마, 그는 때때로 죽어 가는 환자들과 같이한 시간들이 낭비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회복되어서 좋은 모습으로 보답한다는 약속 없이 죽음을 향해 외로운 순례의 길을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깊어지면, 그는 삶과 인격의 성스러움에 대하여 믿음을 갖기가 어렵게 되며, 결과적으로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감으로부터 회피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직면하는 동안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더욱이, 종교와 분리된 일반학문을 통하여 훈련받은 심리치료사들은 종교적 제의나 성례전의 치유적 기능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례전은 말기 환자가 분리의 느낌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성례전은 말보다 깊은 언어로 환자로 하여금 신앙공동체와 관련되어 있음을 느끼도록 해준다. 심리치료사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말하는 수단으로써의 상징적인 종교적 행위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심리치료사가 죽어 가는 환자로 하여금 깊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도록 도울 때, 그는 환자가 식별할 만큼 육체적 건강도 좋아지고 감정적으로도 건강하게 변화한 것을 보게 된다. 심리치료사가 종교적으로 훈련된 환자를 대할 때에는, 자신의 일들이 환자로 하여금 성례전에 참석하고 고백하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임을 인정할 만큼 겸손해야 한다. 무의식적 죄의식 때문에 계속되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불안한 환자에게는, 심리치료사와 많은 시간을 같이 일한 뒤에 성례전에서 그가 처음으로 경험한 면죄의 은총은 극적이면서 감사한 경험이 될 것이다. 때때로 심리치료의 과정은 깊은 감정적 갈등을 드러내어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삶에 새로운 의지를 부여한다.
 
심리치료의 목적은 환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환자들은 질병 대신에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며, 이때 그들이 제기하는 질문에는 신학적인 측면이 있다. 그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나?" 또는 "왜 내가 죽어야 하나?"와 같은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왜 나는 인간인가?", "나는 어떠한 존재였는가?",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묻는다. 환자는 이러한 질문을 추구하는 가운데, 현재의 고난 속에 과거와 미래가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현재의 고통을 넘어서서 내적인 만족을 갖게 된다. 이렇게 환자가 시간의 한계점을 극복할 때 영혼이 삶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자신의 병과 시간의 흐름에 대하여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더욱이 심리치료사가 시간에 대하여 너무 의식하면 환자의 생각과 느낌에 집중해야 하는 정상적인 치유과정을 방해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환자로 하여금 우주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기가 어려워진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넘어서서 우주의 깊이를 깨달을 때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높은 수준으로 고양된다. 그러므로, 심리치료자는 시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환자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기보다는 환자 자신이 육체적 죽음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는 가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죽어 가는 환자가 일시적으로 의식을 되찾거나 호전될 때 예상과는 달리 의사의 노력에 감사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환자에게 있어서 의사의 노력은 경우에 따라서 한번 겪어야 할 과정을 여러 번 겪게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환자는 이 과정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이 다른데 써야 할 에너지를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쓰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사실, 죽음 앞에서 인간에게는 고통보다 의미와 품위, 그리고 개인적 자유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암과 투병하는 한 여인은 이같이 말했다. : "나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그러나 죽는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혼돈과 경멸감에 대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인간으로써 삶의 의미를 느끼며 품위를 지키면서 죽고 싶다." 그녀의 경우 자신이 지켜 왔던 가치를 끝까지 보유한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초인적으로 의식에 매달렸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사건이지만, 비존재의 상태로써의 죽음과 과정으로써의 죽음에는 다른 점이 있다. 죽음의 과정에 개입하는 상담자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에 좀 더 성숙하게 직면하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도울 수 있다. V. 프랭클은 이것을 그의 저서 From Death-Camp to Existentialism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 있던 친구들이 공포에 질린 동물처럼 죽음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갖고 죽음에 직면하도록 도왔다. 그는 인간이란 살았던 것처럼 죽을 것이라고 믿었다. 불안과 공포에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반면 내면에 평정을 갖은 사람은 평화롭게 죽을 것이다. 이것은 G. 카플란의 말대로 인간은 위기를 대응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전 존재를 연결시킨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삶을 완성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위기의 시간에도 자신이 지켜 왔던 가치와 의미를 실행한다. 그러나, 삶에는 때때로 실패와 좌절감이 너무 압도적일 때가 있다. 악성 종양으로 죽음 앞에서 분노를 느끼며 삶을 포기한 청년의 경우, 그는 자신이 겪는 고난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여기서 V. 프랭클의 견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의 고난은 우리가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에도 의미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꽃은 어느 누구도 보거나 감사하지 않을 때에도 피고 진다. 가치는 사실에 있다. 그 사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의미 없이 창조된 것은 없다는 믿음에 의하여 인정되는 것이다. 냉혹하게 허물어진 삶도 내적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사람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의미의 타당성을 명상할 수 있어야 한다.
 
상담자가 죽음 앞에서 좌절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중요한 의무이다. 프랭클은 심리치료자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믿음이 죽는 자를 상담하는데 있어서 결핍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보통 전문가들은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고착되어 있어서 환자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즉 믿음으로부터 오는 확신의 감정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상담자는 죽어 가는 환자가 신앙 속에서 삶의 의미와 질서를 발견하는 것은 삶의 종결이 아니라 삶의 시작임을 인식하고 자신을 이 구원적 사건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써 이해하여야 한다.
 
Ⅲ. 죽는 자를 위한 상담
 
임상적 증거에 의하면 많은 환자들이 심리치료를 받으면 회복시킬 수 있는 삶의 의지를 상실하기 때문에 예측된 시간보다 빨리 죽는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죽어 가는 환자들은 상담자보다는 그들에게 불길한 예후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말하는 의사들과 지지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으로써의 욕구는 전반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우리는 환자들이 죽는 과정에서 둔화되어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한다고 들어왔다. D. 케폰에 의하면, 인간은 이상한 성격과 감정에 의하여 고통받고 살았던 사람처럼 죽어가기 때문에 전과같이 접근하기 힘들며 다가오는 죽음은 그의 자아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는 자와 대화를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상담가들은 케폰의 의견에 반박한다. 아마 D. 케폰의 생각은 의사가 환자와의 관계를 회피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무의식적 소원일 것이다.
 
환자에게 심리치료가 생각보다 훨씬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사례가 여기 있다. 한 의사는 악성 대장염으로 인하여 직업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평소 심리학적 해결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상담과정에서 그가 사춘기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 때 그는 생명을 구하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사춘기에 있는 그의 아들이 죽음으로써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아들이 죽은 몇 달 후 그의 첫 증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계속 그 증상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그를 괴롭혔다. 상담과정에서 그는 의사가 된다는 것의 고통은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으로 그가 느꼈던 공포와 분노에 대하여 말했고 어린 시절에 억압했던 눈물을 흘렸다. 그후 그의 증상은 사라지기 시작하여 완전히 회복되었다.
 
삶의 의지와 죽음의 의지 사이의 갈등에서 나타나는 요인들은 심리적이고 영적이다. 삶의 의지가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라면 그 의지를 강화시키는 치유적 자원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때, 시간은 상대적일 수 있지만, 삶의 의미는 절대적이다. V. 프랭클에 의하면, 인간이 미래를 추구할 때만 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다. 말기 환자를 위한 상담의 목적은 삶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만약 신체적 회복이 어려우면, 상담은 죽음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직면하여 인간은 과거의 삶 속에서 성취할 수 없었던 존재의 완전한 성장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 있어서, 상담자, 의사, 목회자, 심리치료사, 환자의 가족들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중요한 목적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는 신비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삶과 죽음의 세력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개념화 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의 경우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더 살기를 원하며 이러한 열망이 질병에 대한 육체의 저항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환자의 살려는 의지를 강화시키는데 있어서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은 환자 자신의 가치들이다. 환자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할 때 수반되는 자기발견과 자기수용 속에서 성숙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자아의 성장은 시간의 흐름과는 관계가 없는 가치이다. 우리가 인간의 가치와 삶의 거룩한 특성을 믿는다면 죽음이 다가와도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리치료사, 의사, 목사, 상담자들의 책임은 어떤 발달단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치료는 경과되는 시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창조된 가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의미와 관련된 철학적 문제를 짧게 다루고자 한다. 철학적 전제 없이 치유적 가치를 논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상담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 상담가의 견해는 치명적으로 아픈 환자들과 일할 때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죽음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일반적인 의학적 견해는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만약 상담자가 삶과 죽음의 의미의 절대적 분리를 믿으면서 환자를 대한다면 그것은 상담의 목적인 삶의 수용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 때 상담자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데 관심을 두기보다는 죽음을 막는데 에너지를 쓸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견해는 삶과 죽음은 의미 있는 실존의 양면이라는 것이다. 누가 진리를 위해 불의와 싸우다 죽는 순교자를 구할 것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그의 존재의 참된 의미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가 죽지 않고 산다면 그는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배반하는 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희랍의 성인 Hygeia가 건강의 의미를 육체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게 하는 전체성(Wholeness)의 견지에서 설명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건강의 의미는 현대 심리학자 A. 매슬로우에 의해서도 자아실현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환자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신체적 상태가 호전되지 않거나 악화될 때에도 죽음의 공포는 점점 감소될 것이다. 치유는 죽어 가는 환자에게 거짓된 희망을 주어서는 안 된다. 치유는 육체적 회복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아의 해방과 확대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새로 찾은 생명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 때 상담의 접근방법은 환자에게 있어서 자아의 궁극적 관심을 증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담자 자신이 먼저 궁극적 관심을 갖고 환자의 절망에 직면해야 한다. 상담관계 속에서 환자 안에 신앙이 내재할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앙이란 P. 틸리히가 말한 의미와 같다. : "신앙은 궁극적인 관심을 갖는 상태이다." 상담자는 환자로 하여금 성공에 대한 관심과 두려움, 그리고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의 내적 발전에 관심을 갖도록 인도해야 한다. 틸리히에 의하면 신앙의 영역에 들어가는 사람은 삶의 성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앙을 환자가 붙잡고 응답할 때 그는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신앙을 요구하는 환자들을 여러 명 갖는 것은 상담자에게 긴장감을 안겨 준다. 이러한 유형의 상담은 열정적인 집중과 거의 절대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보살핌은 상담자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취하는 신중함이라던가 친절함의 성격과 다른 것이다. 상담가는 동정이 아닌 공감 속에서 환자가 마음 문을 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망설임 없이 환자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 없이도 상담자와 환자는 종종 치료과정에서 협조적으로 일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죽어 가는 환자에 대한 상담의 절대적 관심은 환자로 하여금 스스로 참된 자아를 발견하도록 돕는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프리니(c. 61-114)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그는 이것을 재차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진실한 모습으로 즐길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은 완전한 성장이다." 환자는 이러한 의미의 가치와 경이감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가치의 증거는 환자가 상담을 통하여 성장할 때 나타난다. 환자는 상담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게 된다. 이러한 자아의 추구는 상담자에게도 중요한 과제이다. 흔히 상담자는 자신의 접근방법에 지나치게 확신을 하기 때문에 환자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상담자가 자신을 알지 못할 때, 그는 환자에게 지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가치나 생각을 행할 때가 있다. 환자는 이것을 재빨리 느끼게 되며 상담의 효과는 심각하게 감소된다.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에서 상담자는 환자가 갖고 있는 정신적 증상의 원인보다는 환자의 삶에 대한 열정을 해방시켜 주는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신적 증상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는 무능력과 자기표현을 계속 억압하는 행동양태로 생각되어 진다. 매슬로우는 이것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 "인격장애는 자신의 진실된 본성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다." 우리는 환자를 상담할 때 환자의 정신적 병리나 죽음에 대한 준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환자의 내적인 힘을 추구하는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일반적인 상담방법은 환자의 인격적 약점을 찾아내려는데 시간을 많이 쓴다. 그러나, 로젠탈이 주장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환자의 두려움을 감소시키는 것은 그의 창조적인 힘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이다." 많은 상담자들이 이러한 접근방법을 통하여 큰 결실을 얻었다고 믿고 있다.
 
Ⅳ.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 있어서 종교적 가치
 
말기 환자들은 종종 자신들을 압도하는 두려움과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에 귀의하고 싶어한다. 때때로 그들은 절망 속에서 마술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종교가 주는 위로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정리한다.
 
종교적 자원들은 환자들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데, 이것은 결코 두려움이나 불안과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죄책감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행하여지면 안 된다. 반대로, 종교적 자원은 환자들의 회복과정을 촉진시키며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창조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종교적 상담자는 종종 무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실존적 불안을 환자에게 투사한다. 그는 환자에게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종교적 흥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삶을 보장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종교적으로 흥정하려는 노력은 실제적으로 환자에게 성숙함과 현실성이 요구되는 때에 마술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치유 팀에서 목회자는 죽어 가는 환자를 죄책감과 불안감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도록 돕는데 있어서 타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그는 환자가 진정한 자기발견과 자아실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G. 질보르그가 지적한 것처럼, 심리치료는 발견되지 않은 자아, 즉 성서가 말하는 옛 사람을 다루는 반면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체성의 신비한 형태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사람"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포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자기완성이 되는 십자가(the Cross)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강한 끈기를 낳고 그와 같은 끈기에서 희망이 솟아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Rom 5:4-5)" 이와 같은 신앙발달은 죽어 가는 환자로 하여금 현실을 도피하지 않으면서도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현상을 초월하여 자기 발견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자기발견은 위기에 직면하여 종교 속에서 도움을 구하는 환자와 더불어 심리치료사나 목회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목회자나 의사가 죽어 가는 환자는 더 이상 잠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환자와의 관계를 회피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종교의 모험적 정신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각성의 시간에 활성화되는 잠재력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인식할 때 시간과 공간에 속박된 많은 생각들이 부적절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 존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므로 이미 영원한 것에 대한 경험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환자로 하여금 죽음이 다가올 때 자신의 존재가 갖는 고유성과 그의 존재 안에 영원한 것이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에 대한 확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C. 융에 의하면 그의 환자들은 자신들의 기본적 욕구가 근본적으로 종교적임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이 엄격한 태도로 너무 쉽게 비판하면서 설교를 하였기 때문이다. 융은 상담과정에 있는 목회자의 훈련에 많은 진보가 있음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이었다. 의사들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해결하기에는 복잡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목회자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꼈다. 과학으로써의 의학은 인간의 전인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의학이 인간적 동기를 탐구하지 않는다면 질병의 근원을 다룰 수가 없게 되었다.
 
정서장애를 다룰 때 나타나는 문제 중 하나는 "무능한 통찰력(impotent insight)"이다. 환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볼 능력이 없어서 그것을 변화시킬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삶의 의미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사실과 직결된다. V. 프랭클은 이러한 환자들을 다루면서 실존주의적 분석의 과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하여 책임감을 갖고 자신에게 적당한 일을 하도록 인도하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이 환자들을 대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심리학적 통찰력은 삶에 대한 중요한 영적 질문에 대답을 요구하는 인간의 개념에 도달해야 한다. 비종교적으로 훈련된 심리치료 방법을 오랫동안 사용한 후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어디서 힘을 얻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의사도 삶의 궁극적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치유체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사실, 어떤 치유체계도 치유 받는 인간의 개념보다 더 클 수는 없다. 잘 조직되고 분류된 지식으로서의 과학조차도 부분적인 인간 경험에 국한된다. 과학이 갖고 있는 이 같은 한계는 전인적인 인간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상상력을 억압하기 쉽다. 만약 인간이 다양한 화학적 요소들로 균형 있게 조직된 존재라면, 약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내적인 화학적 균형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치유하기 위해서 과학은 인간을 화학적 요소들의 종합체가 아닌 인격적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의학은 그 자체 안에서 인간의 전인성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인간 그 자신이 이해되지 못하면 인간의 질병이나 불운한 일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과학은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학자는 결국 형이상학자가 된다. 그가 "왜?"라는 질문을 계속 할 때마다 그는 결국 의미와 목적이라는 궁극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철학자와 종교적 사상가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간의 종교적 견해도 의학적 견해와 같이 부분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종교에 대하여 너무 윤리적이나 초자연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인간이 갖는 전체성의 견지에서 볼 때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종교나 의학의 한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신체의학과 종교사이의 공동 영역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시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의학은 그 자체의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삶에 고유한 빛을 던져 주고 있다. 그러나, 삶에는 각기 다른 빛을 요구하는 여러 면들이 있다. 인간과 그의 건강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이 모든 면들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종교적 연구방법은 육체적 증상의 치유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전체성을 산출하는 영적 조화를 어떻게 성취하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인간의 영적 본질에 대한 이해가 인간의 전인 건강에 부여하는 통찰력은 엄청나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인간이 건강하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육체적 건강은 무너질 수 있지만 자기 의식과 영적 각성은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패배의 시간이 아닌 확실한 신앙의 표현으로 만들어 준다. 신앙은 우리가 믿는 것이라기 보다는 존재하는 것이다. 신앙의 힘은 합리적인 사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완성에 이르는 길에 있다. 성숙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위기의 시간에 미성숙하게 의존하거나 자기 소망을 투사시키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성숙한 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삶과 죽음의 의미에 전적으로 직면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삶 속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M. 부버가 말하는 "나와 너(I & Thou)"의 인격적 관계를 성취할 수 있는 심오한 능력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 안에서 꾸준히 성장한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늘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의 신비함을 믿는다.
 
자신의 신앙을 가족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나누면서 신앙 안에서 죽는 사람은 가장 의미 있는 봉사를 한 것이다. 신앙 안에서 죽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다. 육체를 다루는 의사와 영혼을 다루는 사람들이 먼저 이러한 신앙을 스스로 발견하고 환자들과 의사 소통할 때, 그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일들을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이 항상 도전적인 존재의 과정 속에서 성장할 때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로 볼 것이다.
 
Ⅴ.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목회자의 문제와 과제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에서 종교적 가치가 강조된 것처럼 그 가치를 체현해야 하는 목회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죽어 가는 환자나 그의 가족들은 자주 영적인 상담자를 원하며, 목사가 지원해 주면 안정감을 느낀다. 이것은 죽음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육체적 차원의 안정감보다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담당의사나 직계가족이 죽어 가는 환자로 둘러싼 일에 관여하듯이, 목사도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은 의사나 환자의 가족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목사는 시작부터 모순된 입장에 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인간이면서 거룩한 것을 증거해야 하고 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한 것을 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하면서 영원불멸한 것에 대하여 말해야 하며,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추측할 뿐 답을 갖고 있지 않을 때에도 설명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하여 목사 자신이 갖고 있는 태도는 그가 죽어 가는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깊다. 죽음에 대하여 그가 느끼는 두려움, 고립감, 불안은 그가 죽어 가는 환자와 같이 일할 때 나타난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외롭고 내버려진 말기 환자를 대할 때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문제의 주요 원인은 그들 자신이 언젠가는 버림을 받고 외롭게 죽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두려움이다. 목사들이 갖고 있던 깊은 무의식적 감정이 환자의 상태와 동일시됨으로써 죽어 가는 환자와 일하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다.
 
M. 바워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때 동기가 있으며 어린 시절에 충격적인 죽음의 경험을 한 목사들은 목회를 하면서 죽음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들은 장례식을 계속 담당하지만 그들 자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계속되는 상징적인 행동은 그들에게 감정적인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그 안정감은 상징적일 뿐 죽음의 실체는 그의 역할을 혼돈스럽게 하여 그의 존재에 위협을 주고 있다.
 
뛰어난 설교자와 능력 있는 행정가로 알려진 K목사는 자신의 회중을 보거나 병원에 있는 신자를 방문하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주일에 그는 회중 위의 높은 곳에다 눈을 맞추고 매우 학문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신도와의 만남을 회피하였고 특히, 병원은 그에게 힘든 곳이었다. 그에게 있어 아픈 사람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의 죽음을 목격했고, 고아원에서 성장하였으며 안정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를 벗어나 사람들을 만날 때 위험을 느꼈다.
 
C라는 목사는 특히 성만찬식을 행할 때 고통스러워했다. 심리치료를 통하여 밝혀진 것은, 그가 어렸을 때 병리학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아이를 돌볼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 어린 아들을 실험실로 자주 데리고 갔었다는 것이다. 어린 소년은 본의 아니게 자기 아버지가 많은 동물을 갖고 생체실험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어떤 살인적인 의지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가 싫어졌다. 그가 목회의 길을 택했을 때 그것은 그가 두려워했던 아버지가 아니라 훌륭한 아버지 즉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들이 희생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성만찬식을 행할 때는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었던 두려움이 표출되었다. 우리는 그가 죽어 가는 환자 옆에서 성례전을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목사들이 깊은 인간적 만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쓰는 가면들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목사가 그의 가면을 의식하고 던져 버릴 때만 죽어 가는 환자와 자유롭고 개방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의식적 행사의 가면이 있다. 목사는 형식화된 기도와 전통적인 절차를 사용함으로써 깊은 인간적 만남을 회피할 수 있다. 그는 환자의 침대 곁에 서서 진정한 관심을 표현하기보다는 "우리 짧게 기도할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은 환자의 대화에 대한 욕구를 차단시킴으로써 환자를 더 외롭게 만드는데 목사는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느끼면서 병실을 빨리 떠난다.
 
둘째, 특수한 종교적 언어의 가면이 있다. 전통적으로 쓰여 왔으나 개인적 의미를 갖지 못한 언어들은 대화의 통로가 아니라 장벽이 될 때가 많다. "은총"이라던가 "구속의 힘"같은 말들은 공중예배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환자에게는 그 말들의 깊은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러한 언어는 깊은 인간적 배려가 없으면 결코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에게 있어서 그 언어들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편한 언어들이기 때문에 그 언어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는다.
 
의사에게는 죽음이 그의 직업적 역할에 도전이 되는 것처럼 목사에게는 죽음이 그의 신앙에 도전이 된다. 다행히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 속에서 죽음과 잘 타협하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사는 목사들이 있다. 그들은 환자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 축복된 영적 공동체 안에서 마지막 순간들을 나누고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의미를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대하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의 감정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목사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목사이다. 그는 삶 속에서 마음의 가면을 쓰거나 방어기제를 발전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환자의 침상 옆에서 몇 시간이고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말을 하면서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의식적 행사조차도 장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사표현을 위한 접근방법이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직업의 성격이나 관계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사람들조차 죽음에 대한 문화적 반감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문화적 반감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환자와 만날 때 감당해야 하는 긴장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직업을 이용한다.
 
오늘날의 문화를 살펴보면 젊음, 건강,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마치 최고의 선이나 되는 것처럼 강조되고 있다. 은퇴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특별한 양로원이나 실버타운이 사회로부터 떨어져 건설되고 있다. 그러나, 젊음에 문화적 프리미엄이 붙는 것과 동시에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들이 공동체의 부분이 되었다. 이러한 분리는 건강하지 못하다. 또한 육체적 미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삶의 의미와 깊이를 부정하는 경과를 갖고 온다. 이러한 풍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노화현상을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때 자신을 지탱해 줄 적합한 가치 창조를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이 젊음의 상징일 뿐 현명하고 건강하게 늙어 간다는 의미를 배제한다면 건강의 개념은 가치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분명히, 문화적 산물이라고 생각되는 죽는 자에 대한 태도는 윤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기에, 직업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책임감을 갖은 사람들은 문화적 성향을 다시 검토하고 삶의 철학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이러한 책임감에 정직하게 직면할 때 문화적 조류는 좀더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죽어 가는 환자와 관련된 전문인들 사이에 창조적인 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 대한 자신의 책임이 신체적이며 생화학적인 관심 이상의 것을 요구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목사도 자신의 목회를 병들게 하는 개인적인 두려움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환자뿐만 아니라 그와 같이 일하는 전문인들에게도 방해가 된다. 목사나 그 외의 전문인들은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하여 공통된 과제를 설정하고 좀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두려움과 실패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Ⅵ. 결 론
 
죽어 가는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문화적 가치에 의하여 제약을 받기 쉽다. 현대 사회에서 생산성이나 젊음, 건강에 대한 지나친 찬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어 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치유적 상담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올 때 절망과 공포 그리고 고립감속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죽어 가는 환자를 전문적으로 돕는 사람들은 환자들이 죽음을 패배의 사건으로 경험하지 않고 비존재의 위협에도 파괴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의 고유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삶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죽어 가는 환자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했을 때 죽음이 예측보다 빨리 진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증상과 정신적 증상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 그렇기에, 죽는 자를 위한 상담에서 심리학적 그리고 영적 차원들이 탐구되고 적절하게 사용될 때 상담자의 환자에 대한 책임은 좀 더 완전하게 수행될 것이다.
 
특히,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에서 종교적 가치는 매우 의미 있다.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상담을 통하여 전보다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효과적인 상담이 언제나 육체적 죽음으로부터의 회복을 촉진시키는 것은 아니다. 상담자는 환자로 하여금 죽음이 다가와도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죽음 속에서 발견하고 성취함으로써 존재의 완성에 이르도록 도와야 한다. 즉, 치유과정의 목적은 환자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종교적 차원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 만큼 확대되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치유 팀에서 목회자의 역할이 갖는 고유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죽어 가는 환자를 위한 상담이 인간 존재가 갖는 전체성이라는 특성의 견지에서 보다 심도 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담자의 인격적 완성이 요구된다. 다양한 상담 기술에 앞서 상담자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환자와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상담가는 환자와 그의 문제에 대하여 진실된 태도로 직면하여 기본적 신뢰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는 환자의 분노나 허세 속에 감추어진 숨은 의미와 욕구까지도 볼 수 있는 깊은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죽어 가는 환자에게 필요한 삶의 의미를 전달할 만큼 신앙적인 확신이 있어야 한다. 또한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일에 관련된 전문인들, 즉 의사, 심리치료사, 정신의학자, 목회자, 상담자 등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전문 분야가 갖는 특성과 약점을 이해하고 창조적인 대화를 함으로써 죽어 가는 환자에게 보다 인간적이고 효과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전문가들이 이러한 책임을 완수할 때, 죽어 가는 환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패배가 아닌 삶의 완성으로써 경험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