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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9일 수요일

우리 시대 자유민주주의의 실패

 공생의 정치신학: 캐서린 켈러의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2)


오늘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democracy)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체제이다. 즉 자유주의(liberalism)과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이념적 대립이 ‘자유’와 ‘평등’ 혹은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담지되어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공동의 적, 즉 절대주의와 권위주의적 전통들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공동투쟁의 결과였다.(1)

하지만, 이미 보수적 정치학자 칼 슈미트(Karl Schumitt)가 지적했듯이, 자유와 평등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란 이 갈등의 자리를 “긴장의 장소”(the locus of tension)(2)로 간주하고, 이 “구성적 긴장”(3)을 “여러 다른 헤게모니적 배열들 간의 끊임없는 협상과정”으로 삼는 정치적 절차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지배로 인해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로 진입했고, 이제 ‘평등’의 이념은 ‘공정한 경쟁’으로 대치되어, ‘개인의 권리’로 환원되어버린 껍데기뿐인 ‘인권’ 개념으로 초라하게 남아있을 뿐이다.(4)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더불어 급격히 ‘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었고, 평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자유선거 시행과 인권 수호”의 초라한 구호들로만 존재해고 있을 뿐이다.(5) 즉 우리는 “대중주권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이 침식”된 “포스트 민주주의의 상태”(6), 즉 ‘자유주의’ 체제가 승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공평성, 다르고 다양한 문화와 믿음들에 대한 관용, 인간 존엄성의 수호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의 신장을 외쳤던 자유주의 체제는 “실제적으로는 거대한 불평등을 낳고, 획일성과 동종성을 부여하고, 물질적 영적 퇴화를 부추기고 그리고 자유를 침해”(7)했다. 자유주의가 이상적으로 주장했던 것과 우리가 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 차이의 격차가 점점 심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를 해방하는 수단들이 우리를 감금하는 철장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그래서 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와 불만족이 증폭되고 누적되고 있으며, 때로 마녀사냥의 대상을 찾아 정의(justice)의 이름으로 분노를 광장으로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유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이행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 금융귀족같은 소위 신-엘리트들의 출현(8), 그에 따른 대중들의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가 자제력과 숙고의 능력 그리고 민주적 정부를 만들어가기 위한 절차들보다는 “정치적 분노와 좌절”을 표현하는데 소진되고 있다.(9)

자유주의(liberalism)의 핵심에는 “권리를 담지한 개인이 자신만의 훌륭한 삶을 추구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인간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10)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자유주의 모델 정치체제는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주장하며, 이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각 개인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동의한 소위 “사회 계약”(social contract)설을 발명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주창하였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점점 더 미세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확장되고 있고, 시민들은 정부가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멀리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세계화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시민들을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그리고 각자도생의 삶으로 몰아갈 뿐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자유주의 체제가 유일하게 확보해준 개인의 권리란 오직 충분한 부와 지위를 확보한 이들의 권리와 자율뿐이라고 느낀다.(11) 따라서 시민들은 현 체제가 ‘실력주의’(meritocracy)가 되었고, 소위 능력있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세습하고, 교육 시스템은 인성이나 소명을 찾는 장이 아니라 사회의 소위 ‘루저’(loser)를 솎아내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다고 느낀다.

소비자본주의 체제와 결탁하여,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로 대치하였고, 사회적 경쟁의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적 구조가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는 현실과 그로 인해 야기된 경제적 불안정성과 심화되는 불평등의 격차를 값싼 상품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통해 무마시키려 노력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격차가 공정성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승자로부터 패자를 채로 거르는 시스템을 통해 심화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격차가 초첨단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의 격차로 이어져, 정말 소수의 초부유층이 자신들을 수퍼휴먼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현실이 소위 “호모 데우스”의 시대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를 하라리는 “불평등의 업그레이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2) 세계화가 초래하는 무한경쟁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논리로 포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대의 모두는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발전의 혜택을 누린다는 위로 아닌 “위로”가 주어지기도 한다.(13) 분명한 것은 이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세계화 경제가 현세대의 누구로부터도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드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총체적 난국이 자유주의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가 그 본연에 충실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고 진단한다. 즉 자유주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14)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총체적인 좌절과 실패는 바로 우리가 “자유주의의 이상들에 맞추어 살아내는데 실패”(15)했다는 잘못된 분석이다. 이는 우리가 ‘자유주의’(liberalism)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비롯된 것이며, 이 이데올로기의 동굴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비교를 통해 알려줄 다른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보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이다.

현재 우리 시대의 실패는 자유주의의 전적인 성공에 따른 결과라는 드닌의 진단과 병행하여, 샹탈 무페는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의 무능이 이 실패를 부추긴 주요원인들 중 하나라고 진단한다. 즉 현재 서구 정치에서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이 담고 있는 수많은 요구들이 진보적 해답이 필요한 민주주의 요구라는 것을” 좌파 정치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16) 즉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일구어낸 타협이 우리 시대 유래없는 승자와 패자의 격차를 양산해 내고 있으며, 이 세계화의 패배자들이 외치는 함성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로 반영되는 민주주의적 열망들이 낙오자와 실패자의 좌절과 분노로 응집되고, 그 분노의 감정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적대와 혐오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중산층의 최소한의 이익도 지켜내지 못한”(17) 진보정치인들에 대한 깊은 불신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성공적인 실패’는 “더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18) 즉 ‘성공보다 나은 실패’를 시도하지 않았던 결과인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불안한 결합은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성공을 양산해내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진화에 의존한 결과이다. 그래서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안정성이 극히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비교적 경제변화와 상관없이 정치적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던 마을 공동체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붕괴 혹은 폐지되고, 전 지구를 시장경제라는 우산 하에 두고자 기획되었던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다문화’ 시대에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인 다문화’가 자유주의 기획의 일부로 고립되어 게토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모순을 대변한다. 그래서 정치는 차라리 실패했었던 것이 나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실패를 경험했더라면, 지금같은 극단적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해도 말이다.


미주

(미주 1)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이승원 역,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 2쇄 (서울: 문학세계사, 2019), 28.
(미주 2) 앞의 책, 29.
(미주 3) 앞의 책, 30.
(미주 4) 앞의 책, 31.
(미주 5) 앞의 책, 31.
(미주 6) 앞의 책, 34.
(미주 7) Patrick J. Denneen,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8), 3.
(미주 8) 이를 샹탈 무페는 “서구 사회의 과두제화”(oligarchization)로 표현하고 있다(『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3).
(미주 9)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xiv.
(미주 10) Ibid., 1.
(미주 11) Ibid., 3.
(미주 12) Yuval Noah Harari,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 (London: Harvill Secker, 2015), 346.
(미주 13)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10.
(미주 14) Ibid., 3.
(미주 15) Ibid., 4.
(미주 16)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9.
(미주 17)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노정태 역, 『진보의 몰락』(Death of the Liberal Class) (서울: 프런티어, 2013), 25.
(미주 18)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123.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동성애를 죄로 간주하는 나는 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가

 1. 동성애는 성경적 관점에서 죄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다. 나는 우리 신앙과 행위를 위한 최고 기준을 성경이라고 받아들인다. 어느 것도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며, 성경보다 높은 권위는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인정하거나 열린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만, 나는 동성애가 죄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동성애를 사랑으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배우자가 아닌 사람을 만나는 게 참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륜인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동성애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경우에도 신앙적 관점에서 여전히 죄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죄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우리는 모두 탐욕적 성향과 이기적 성향을 안고 태어난다. 선천적으로 도벽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도둑질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처럼, 선천적으로 동성애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성경적 관점에서는 죄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차별도 성경적 관점에서 죄다

하지만 동성애가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죄라는 말은 동성애자들을 차별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을 죄라고 가르친다(약 2:8-9).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롬 2:11).

누군가 죄를 짓는다고 그를 미워하거나 박해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예수님께서 세리를 용납하고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만났을 때 원수 지간인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처럼,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게 옳다(약 3:9-10). 우리가 사랑할 이웃은 우리에게 문안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마 5:46-47). 오히려 우리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누군가 도둑질했다면 그것은 죄다. 범죄행위에 맞게 적절히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전과자라고 하더라도 사적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전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물건을 팔지 않거나 출판물로 공개적으로 모욕해서도 안 된다. 도둑질이 옳아서가 아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더라도 적절한 처벌을 벗어난 대응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녀 훈육은 부모에게 주어진 의무다. 어떤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해서 밥 먹이지 않고 폭력적으로 대하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 부모는 처벌받게 될 것이다. 국가에서 훈육을 금하지는 않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자녀를 죽였기 때문이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죄다. 하지만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대부분 처벌이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이 신정국가가 아닌 이상 성경적 규범은 대한민국 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샤리아나 불교의 법이 대한민국 국법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성경 속 모든 규정이 대한민국 법이 될 수는 없다. 간음이나 이혼과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국가에서 처벌하는 일이 불가하다. 성경에서는 우상숭배가 가장 큰 죄이지만, 우상숭배를 대한민국 국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동성애자라서 모욕한다거나, 왕따한다거나, 능력이 있는데도 회사에서 여러 불이익을 주는 일은 정당하지 않다. 차별금지법은 그러한 차별을 미리 방지하자는 법이다. 아무리 신앙적 관점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합리한 차별을 당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법이다.

범죄 혐의자에게 미란다원칙을 적용하고, 변호인 도움을 받도록 보장한다. 범죄 혐의가 있다고 피의 사실을 미리 공표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죄를 짓는 게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보면 분통 터지는 일일 것이다. 경찰이 자기 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보호하는 모습을 볼 때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죄를 지었다고 피해자 가족에게 폭행당하고 죽임 받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그 사람이 행한 게 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의미에서다. 이와 비슷하게 차별금지법은 차별이라는 불합리를 막자는 법이다. 이것은 성경적 가치에 해당한다.

인간은 악해서 다수가 되면 횡포를 부리기 쉽고, 소수는 다수의 횡포에 차별을 받아 정말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동남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당하기 쉽다. 차별금지법은 차별하지 못하게 해서 모두가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성경적 가치를 담고 있다.


3. 신정국가가 아니기에 불신자들 행태에 상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우상을 찍어내 버리고 산당을 제거하라고 규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을 인정하셨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절간에 잠입해 기드온처럼 용감하게 부처상들을 파괴하는 일이 옳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만 섬기기로 시내산 언약을 통해 계약 맺은 신정국가에서나 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는 곳은 신정국가가 아니다. 성경 율법을 국가의 법으로 가지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이 세상 법칙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우상을 찍어 버리지는 않았다. 바벨론은 신정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를 향한 가르침은 바울서신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 우상숭배하거나 음행하는 자들이 있다면 출교시키라고 명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상숭배한다고 해서 절교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들의 삶에 신경 쓰지 말라고 권면했다.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고전 5:12-13). 교회가 할 일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에 참견하는 게 아니다. 동성애자들을 찾아가 죄라고 지적할 게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불신자들과 거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상에게 바친 물건일 가능성이 있어도 묻지 말고 사서 먹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고전 10:25). 우리는 지금까지 불교도들에게도 장사하면서 살아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 불신자들이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한다.

동성애자에게 케이크 주문이 들어왔을 때 그들에게 케이크를 파는 일은 신앙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 집을 타 종교인들에게 파는 일도 문제가 아니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라 세상이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관계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불교도들처럼 산속에 들어가 혼자 고고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기 때문이다.


4.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은 동성애자들과의 전쟁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이나 반기독교적 성향이 있는 세력을 우리의 영적 대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물리적 방법으로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세를 과시해 입법을 막고, 단체로 몰려가 시위하는 방법으로 굴복시키려 한다. 전화 돌리거나 문자 폭탄을 돌려 우리 힘을 보여 주어 온갖 이 세상 세력을 굴복시키는 일을 영적 승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대적은 그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영적 싸움 대상은 마음속에서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고, 탐욕적으로 만들고, 음욕을 품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고,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게 만드는 사탄이다(엡 6:12). 사탄은 우리의 신앙 열정을 교만으로 바꿔서 망하게 만든다. 사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공로로 바꿔 버리고, 주님을 향한 헌신을 자랑거리로 바꿔 버린다. 이러한 영적 대적과 싸워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우리 대적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왔다. 그 대적이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이며, 힘겨루기를 통해 그들을 짓밟아 버리는 것을 영적 승리라고 속삭이는 사탄의 속임수에 곧잘 넘어갔다. 그래서 베드로는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잘라 버렸다. 예수님을 체포하는 자들을 칼을 써서라도 물리치는 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는 무리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다.

타락할 대로 타락했던 중세 기독교는 십자군을 동원해 이슬람 사람들을 박멸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전쟁에 순수한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자원했다. 그러한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을 이용한 자들은 정치권이고 장사치였다. 자신들의 정치적·물질적 이익을 위해 신앙으로 십자군 전쟁을 포장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이 이용만 당했다. 역사는 십자군 운동이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기록한다. 기독교는 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없다. 칼을 쓸 때 오히려 기독교는 망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동성애자들을 향해 기독교가 힘을 사용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싸움에서는 반드시 질 수밖에 없다.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5. 빛과 소금 역할 감당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다

힘을 과시하는 방법으로는 동성애자들 마음을 얻을 수 없고, 그들을 회개로 인도할 수 없다. 힘으로는 우리보다 이 세상이 더 세다는 사실을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절망적이지 않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기신 싸움을 하고 있으며,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은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동성애는 죄이자 하나의 우상이기에, 결코 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들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경 가르침대로 아름답고 건전한 가정을 이루어 산다면, 그들은 비로소 우리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다. 옛날 다신교를 믿던 사람들이 유일신을 섬기던 유대인을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생각하고 돌아섰던 것처럼 말이다.

진리에는 힘이 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은 가장 강력한 전도 방법이다. 우리가 음란하게 살며 온갖 매체를 통해 목사들 비리와 성 추문이 방송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동성애가 죄라고 외치면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아냥만 들을 것이다. 이 세상은 오히려 동성애자들 편에 서게 될 것이다.

- 보수 교계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기 위해 '진정한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 연합'을 창립했다. 


6. 차별금지법은 신앙의자유 억압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종교의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이는 헌법적 권리이기 때문에 하위법인 차별금지법에 따라 제한될 수 없다. 일각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성경이 불온·금지 서적 취급받게 되고, 신앙의자유가 박탈될 것이며,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는 등 온갖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외국 사례들을 언급하며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과도한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시행되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전히 신앙의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고용이나 직업 문제에서,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는 학교에서,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 행정 서비스를 받을 때 차별하는 일을 금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네 가지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분야는 문제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설교하거나 동성애 관련 주장이 담긴 책을 쓰는 일 등은 대상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를 반대하다가 경찰에 잡혀가고 직장에서 해고됐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러한 주장도 억지다. 동성애를 반대해서 경찰에 잡혀가거나 직장에서 해고된 게 아니다. 현행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반대하는 일을 하다 도로교통법을 위반했거나, 집회 신고까지 마친 정당한 집회를 방해했거나, 반동성애 강의를 하는 중에 성희롱적 표현을 무분별하게 사용했다가 처벌받기도 하고 불이익당하는 것이다. 동성애에 반대하지만 법을 위반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동성애에 반대했기 때문에 핍박당한 것이라고 우기는 일은 옳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악마가 되기 쉽다. 그게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방식이다. 우리는 자녀가 잘못했을 때 윽박지르거나 가혹하게 때려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범죄행위다. 교회 분쟁이 일어났을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무찌르기 위해 무슨 짓을 해도 옳다고 착각하고는 한다. 다른 편 예배를 방해해도 괜찮고, 반대편 사람들이 교회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폭력을 써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동성애가 죄라는 생각이 들면, 종종 동성애를 반대하는 모든 행위가 정당할 것이라고 착각하고는 한다. 법을 어기거나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신고를 마친 그들의 집회를 물리력으로 방해해도 괜찮다고 여기기도 한다. 강의할 때 동성애를 반대한답시고 성희롱적 발언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이런 일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을 때 동성애를 반대했기 때문에 받는 억울한 처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칭찬받을 게 없기 때문이다(벧전 2:20).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더라도 강단 위에서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종교의자유는 헌법적 권리이고, 일개 법이 헌법을 능가할 수는 없다. 길거리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외치는 일은 제지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가 신정국가가 아니고, 다양한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를 인정받는 민주국가이기에 당연하다. 아무리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민주국가 내에서 남의 집 우상을 부술 권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길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선포하고 싶겠지만, 그러한 행위는 결코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낸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했던 것처럼 먼저 접촉점을 찾아 대화하며 마음을 여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사람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외치는 일은, 팀 켈러 말처럼 다이너마이트를 바위 옆에서 터트리는 것과 같아서 바위를 그슬리게 할 뿐 쪼개지는 못한다.


7. 서구 교회 몰락은 차별금지법 때문 아니다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퍼트리는 주장이 있다. 프랑스에서 차별금지법을 막지 못했기에 학교에서 동성애 교육을 하고, 교회에서 동성애 반대 설교를 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교회가 문을 닫고 술집으로 변했다는 내용이다. 프랑스에서 교회가 문을 닫은 게 정말 차별금지법 때문일까. 인과관계가 맞는가? 오히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꼰대처럼 굴어서 우리에게 그런 꼰대 같은 종교가 필요 없다고 느끼게 만든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나그네든 과부든 고아든, 약자를 돌보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게 성경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이 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고 하는 옹졸한 바리새인 같은 마음이 더 문제 아닐까.

프랑스에 차별금지법이 있지만 교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교회 내에서 동성애가 죄라는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칼뱅주의·개혁주의적 교회도 프랑스에서 성장하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들도 잘 활동하고 있다. 세상은 동성애를 잘못된 방식으로 반대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적어도 생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다원화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지내야 한다.

사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었다. 미국에서는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 대우하면 처벌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미국 내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설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교회에서 그렇게 설교하고 있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모욕 주거나 사회생활할 때 차별하는 일은 금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차별금지법이 아주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지만 수많은 교회가 여전히 부흥하고 있다.

지혜롭지 못한 어머니는 아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다 너의 그런 행동 때문"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모든 것을 하나의 원인에 갖다붙이는 방식으로는 아이 행동을 교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승전 동성애, 기승전 차별금지법이라고만 외치는 일은 일부 사람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을 수 있겠지만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8. 차별금지법은 미래의 우리를 위한 법이다

사실 차별금지법은 결국 결국 우리를 위한 법이다. 우리가 지금은 다수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사회에서 소수가 될 수 있다. 청소년 중 기독교 신자 비율이 3% 미만이라 한다. 머지않아 기독교는 소수가 될 게 자명하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혐오하면서 왕따하고, 거래에서 불이익을 주고, 직장에서 차별 대우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없다면 말이다. 여당일 때 했던 말을 야당이 됐을 때 뒤집고 야당일 때 했던 말을 여당이 됐을 때 뒤집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처럼, 우리도 그때 가서는 말을 뒤집을 것인가. 항상 역지사지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다양한 사람이 서로 존중하며 살기 위한 최소한의 법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유리한 법이다. 옛날 바울 사도가 로마법 보호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차별금지법 때문에 보호받을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소수가 됐을 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집을 매매하는 것이나 세입자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할 수 있다. 우리가 소수가 됐을 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차별을 받아 승진을 거부당할 수도 있고, 좋은 성적을 거두어도 입사를 거부당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그러한 행위 자체를 못 하게 돕는 좋은 법이다.

그래서 나는 동성애가 죄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다.


9. 학교에서 동성애가 나쁘다고 가르칠 수 없게 된다는 우려에 대하여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학교에서는 동성애를 비판하는 말을 전혀 할 수 없게 되고, 만일 이를 위반하면 처벌받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분이 많다. 그건 사실이다. 앞으로 우리가 학교에서 함부로 동성애에 대해 비판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다시 질문해 봐야 한다. 과연 우리가 믿는 바를 공적 영역에서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게 옳은지 말이다.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개인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자신에게 기독교 신앙이 있고 예수님을 믿는 일을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하더라도 부하 직원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공적 영역에서 강요할 수 없다. 부대 지휘관이라 하더라도 다른 종교를 가진 부하들을 존중해 줘야 한다. 부대 내 다른 종교 시설물들을 함부로 처분해서도 안 된다.

내가 창조론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칠 수는 없다. 물론 진화론과 창조론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고 소개할 수는 있겠지만, 자기 신앙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우상숭배가 악한 일이라는 신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학교에서 불교인을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종교의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믿는 바를 공적 영역에서도 강요할 수 있게 허용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학교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면 우리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개인의 신앙을 공적 영역에서 강요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나쁜 일이 아니다. 결국 모두에게 유익한 법이다. 

학교에서 동성애가 나쁘다고 가르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학교 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공개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아무리 성경에서 금하더라도, 이혼하는 것이 죄라고 가르칠 수 없고,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가르칠 수 없다. 우상숭배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가르칠 수 없고, 이자를 받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칠 수 없으며, 이슬람이 나쁜 종교라고도 가르칠 수 없다. 그렇게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다면, 타 종교가 대한민국 다수를 차지할 때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라고 가르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이제 전적으로 사적 영역이다.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줄 때, 세상은 비로소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다. 진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국진 / 신학 박사, 전주 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 전북극동방송 신앙 상담 프로그램 '아그런가' 진행자, 이국진TV 운영 유튜버, 각종 매체 칼럼니스트. 아가페 성경 편찬책임자를 역임했고, 저서로는 <아, 그런가?!>·<두들겨 보기>(WBS), <사람이 여물어 교회가 꽃피다>(홍성사), <사랑>(아가페북스), <예수는 있다>(국제제자훈련원) 등이 있다.

[출처: 뉴스앤조이] 동성애를 죄로 간주하는 나는 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가

2020년 8월 1일 토요일

부동산문제와 그리스도인_주택임대차보호법_김요한

1. 7월 30일에 계약 갱신 청구권과 전월세 상한제를 골자로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그다음날인 7월 31일부터 즉각 시행에 돌입하였다.

2. 이번에 통과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의 핵심인 '계약 갱신 청구권'은 건물 임차에 있어 2년 간 1차 연장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고, '전월세 상한제'는 기존 계약을 갱신할 때 임대료 상승폭을 최대 5%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다.

3. 새로 제정된 주책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되기 직전 혹은 직후부터 이 법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혹자는 이 법이 기존의 주책 임대(차) 시장 질서 및 관행을 붕괴시킬 것이라 주장하고, 서울 강북에 집을 한 채 갖고 있고 강남에서 전세를 사는 어떤 국회의원은 자신을 '임차인'이라고 주장하며 마치 이 법이 임차인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처럼 사자후를 토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단체로 모여 '왜 내 집에서 세입자를 마음대로 못 내보내냐?'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조차 등장했다.

4. 더욱이 무슨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모임인지 뭔지 하는 집단에서는 아예 이번에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헌법에 규정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위헌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니, 혹여라도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다 한들 그들이 추구하고 지지하는 나라의 모습이란 게 오로지 가진 사람들의 이익과 권리 보존에만 몰두하는 나라일 듯 싶어 정신이 아득해지기까지 한다.

5. 주택임대차보호법에 극렬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의 핵심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경제적 권리'가 자리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개인의 재산권을 왜 사회가 규제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사실상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도 안 된다. 국가 혹은 사회가 무엇이건대 개인의 돈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뺏어가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런 주장이 온당한 것인가?

6. 주택임대차보호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내가 뼈빠지게 일해서 천신만고 끝에 장만한 집"을 왜 사회가 이래라저래라 하느냐고 한다.
그런데 이 주장도 틀렸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뼈빠지게 일해서' 집을 장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까말, 우리 사회에서 순전히 자기가 노동을 통해서 번 돈만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있다면 몇 명이나 있을까?
유주택자들 대부분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샀거나- 이 경우 은행의 돈은 누구 돈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광의의 의미에서 은행의 돈 역시 사회 공금이다- 혹은 부모에게서 다양한 편법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식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들이 '뼈빠지게'란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정말 '뼈빠지게' 일하는 노동의 고통과 눈물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7. 한편으로 지금  이 시국에 부동산 문제로 온 나라가 양분되어 내전에 가까운 분열과 갈등을 노출하는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 지각있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현 정부를 향해서 더 이상 실기하지 말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건만 정부-여당이 미적거리다가 부동산이 겉잡을 수 없이 폭등하면서 사후약방문격으로 뒤늦게 팔을 걷어붙인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8. 그럼에도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동산 문제에 대해 내 나름의 생각과 입장을 밝힘으로써 몇몇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판단에 약간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이 글을 쓴다.
만일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이번에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경도된 현 정권이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박탈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9. 성경은 오로지 '영적' 문제만을 가르친다고 믿는 많은 보수적(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달리 사회 문제,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당연히 그런 이슈들에 대해 다각도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성경이 사회 문제에 발언하는 것의 상당수는 '부동산' 정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공평하게 '배분 받아' 사는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성경은 고아, 과부, 나그네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땅을 확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심지어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모든 사람이 원래 소의 땅을 회복할 것을 사회적 구원과 윤리의 궁극적 목포로 제시한다(희년, 레위기 25:23 이하).

10. 부동산 정의에 관한 성경의 통렬한 가르침은 구약성경 예언서에 이르면 더욱 노골적인 양상을 띤다.
주지하듯이 구약의 예언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불의와 부패에 맞서 신적 계시를 선포하면서 투쟁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히 자기 시대의 이스라엘이 부동산 문제에 있어 극도로 타락했다고 비판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언한다. 
가령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정의를 바라셨으나 압제뿐이었고,
의로운 삶을 바라셨으나 고통의 부르짖음뿐이었다.
오호라, 다른 사람들이 집과 밭을 차지할 수 없도록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하여, 이 땅 가운데 홀로 살려 한 너희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이사야 5:7-8).

예언자 미가도 비슷한 말을 한다.

"그들의 침상에서 악을 계획하고 동이 트면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손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밭이 탐나면 밭을 빼앗고
집이 탐나면 집을 빼앗는다.
사람을 속여 그의 집을 빼앗고 그의 재산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계획했으니 너희는 이 재앙을 피하지 못하리라'"(미 2:2-3).

11. 통상 이사야와 미가를 가리켜 최초의 문서 예언자라 칭하는데, 우리는 이들 예언자들이 출현하던 시기에 이미 이스라엘 사회가 부동산 문제로 사회 양극화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구약 예언서(총 16개 예언서) 메시지의 핵심은 우상숭배를 질타하고 사회정의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부동산 양극화 문제를 한편으로 사회정의가 실종된 대표적 현상이자, 탐욕이란 우상숭배의 극단적 모습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본질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12. 신약성경에 이르면 구약의 땅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가르침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수렴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 때문에, 신약에서 부동산 문제를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신약성경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동산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준다.

첫째는 사도행전 2-5장에 나타난 것처럼 오순절 직후에 성령이 충만해진 초기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는 것이다. 즉 성령충만함의 공동체적 결과는 빈부격차의 완화 내지 해소를 위한 사회적 나눔에 있었다.
둘째는 초기 교회가 강력하게 견지했던 종말론적 삶의 모습이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어떠해야 할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지금부터는...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쁨에 넘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그것들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그것은 이 세상의 현재 모습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7:29-31).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종말론적인 소망을 품고 있다면 이 세상의 위대한 가치(행복, 성공, 자랑, 안전에 대한 욕구)들을 과격하게 '상대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교훈한다.

13. 따라서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부동산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는 비교적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사회에서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 불안에 대해 긍휼과 연민의 시선을 가져야 하며,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에 대한 탐욕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물론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집을 소유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소유와 재산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비춰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히브리서 11:16의 말씀을 약속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고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두셨습니다."

만약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그리고 교회 중에 이런 신앙 가치관과 신념이 분명한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필경 우리 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엄청난 진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교회가 천민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오로지 개인의 탐욕과 특권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도 진정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별하고 성찰하지 못한다면, 교회나 사회나 공히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_채영삼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오늘 강의 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한다. 특히, 청년들의 고민이 많다. 나 역시 아직 고민을 계속하고 있지만, 부족한대로 내 의견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포괄적차별법의 문제는, 좌파 우파의 이념의 문제도, 진보와 보수의 대결도, 네오-맑시즘과 자본주의의 대결도, 친정부-반정부의 문제도 아니다. 이 문제를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다루는 것은 왜곡이다.

2. ‘법 제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이슈는,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도 아니다.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조장하고, 인권을 신장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어느 쪽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차별, 평등, 인권의 프레임에서 다루는 것은 착시현상이다.

3. ‘포괄적차별금지법’의 ‘법’으로서의 핵심 문제는, ‘자유’의 문제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문제에 대해 ‘찬성’하고 ‘옳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그것을 ‘반대’하고 ‘틀렸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4. 동성애 등을 찬성하는 논리로서, “동성애자를 사랑한다면, 동성애를 죄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일부 현실적이나, 상식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어떤 사람의 의견과 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상식이다. 어느 쪽이든 생각이 다르다고 그 사람의 입을 막거나 차별할 수 없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다. 죄를 심판하시며 죄인을 구원하신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고 죄인은 사랑하신 지혜의 나타남의 절정이요 증거이다.

5. 동성애를 찬성하는 논리로서, 보수교회는 ‘모든 죄를 지으면서 굳이 동성애만 최악의 죄처럼 말하는 것은 자격 없는 일’이라는 비난이 있다. 이 논리는, ‘동성애는 죄’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 주장은 위의 4의 주장과 공존할 수 없다.

6.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에 대한 개인의 자율성 문제는, 단지 성윤리에 그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문제가 서구 기독교 사회에 닥친 ‘성 혁명’의 문제일 때, 이 문제는 결혼, 가정, 교육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문제이며, 무엇보다 기독교 전통,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도전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이슈이다.

7. ‘성경은 동성애를 모른다’는 주장, 즉, 성경에서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며, 19세기 이후 동성 인격 간의 애정을 포함한 성행위로서의 ‘동성애’는 성경이 ‘몰랐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에서도, 블랙수면방이나 게이클럽처럼, 단지 ‘동성 성행위’로서 동성애를 행하기도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고대의 노예제도에서 노예는 ‘재산’이지 ‘인격’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노예들은 주인이나 주인의 자녀들의 선생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가족 이상의 대우를 받기도 했다.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지 ‘동성애가 아니라는 주장은, 예컨대 ‘과식은 했는데 음식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주장처럼 추상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의 자기 결정권’이나 ‘동성애’ 등은 명백히 부정적이며 인정되기 어렵다.

8. ‘동성애는 죄이나, 차별금지법은 찬성한다’는 의견은, 교회를 공적 영역에서 축소시킨다. 교회를 위한 법은 세상을 향한 양심의 법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고,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도 교회는 할 말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현재 차별금지법의 핵심이 ‘신념, 사상의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9. 교회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십자가의 공의와 긍휼의 복음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이론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이나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큰 어려움 없이 찾아올 수 있는 ‘품’이 되어야 한다. 중국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한 학생에게 아들이 있었다. 부모의 이혼 후에, 그 아들은 동성애에 빠졌다. 그 소문이 교회에 돌았고, 그 아들은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 어머니 학생이 한 말이 마음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내 아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죄라고 정죄하고서, 그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나님은 죄인인 당신과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동성애 커플이 들어온다면, 두 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한 번에 다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더 큰 죄들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가? 동성애자,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청년들이 그저 머물 수 있는 교회의 품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죄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은 무책임하지 않은가?

10.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를 법의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정치적 세력과 권력의 힘으로 풀려 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교회는 그런 방식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의 9번에서와 같은 노력이, 진정성을 보여주는 참된 해결책에 가까울 것이다. 더 나아가, ‘성 혁명’에서 ‘성’(gender)이라는 주제는, 단지 ‘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몸’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권리인가? ‘나의 자궁은 내 것이기 때문에, 임신은 병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성경이 ‘몸’을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할 때,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할 때, 아니, 동양이나 서양 고대 사상에서 한 인간의 몸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했을 때, ‘몸’이란 무엇인가?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의 저자, 로드 드레허는, ‘성(性)의 형이상학’을 제안한다. 교회는, 이 기회에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고민하여 다루고, 다음 세대에게 성경적인 ‘육체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11. 만일,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 등의 문제가 서구를 휩쓴 ‘성 혁명’의 일환으로서, ‘다원주의’의 폭넓은 도전 가운데 하나라면, 그 배후에는 불가피한 ‘영적 싸움’이 있음도 자각해야 한다. 다원주의의 사회적 모토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란, 이제 정상(正常)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가? 교회가 뭔데,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을 이야기하는가? 정상과 비정상은 사회적 학습의 결과이고, 결국 사회적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 각각의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비정상이 없다는 새로운 정상’은, ‘정상-비정상이 있다’는 ‘하나의 비정상’(예컨대, 기독교의 전통)만큼은 인정하지 못한다. 논리적 말장난이 아니라, 그것이 다원주의의 자기모순이며 독재성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12.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다. 폐해가 많다. 권위주의를 타파하자고, 권위 자체를 없애버리면,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없앤 권력이 새로운 권위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창조질서, 중세인들이 ‘합리적 직관’으로 알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 직관’은 정상이 있고 비정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원주의자들도, ‘옳고 그름이 있다’는 그 사실, 틀렸다고 말할 때는 옳다고 믿는 기준이 있다는 그 사실, 기준, 곧 정상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질서 자체는 파괴할 수도 없고, 하려 해서도 안 된다. 남성 중심의 지배체제가 낳는 폐해가 심하다. 아직도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참으로 그러하다. 바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남성 지배체제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해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더 큰 폐해를 낳는다. 세상이 어둠인 이유는, 분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컨대 창조질서로 표명된 그 기준, 성경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질서의 남용, 악용의 폐해를 바로 잡는데 역시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13. 법적인 해결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리가 없이 사랑은 사랑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사랑 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도 진리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셋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함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교회를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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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6일 월요일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런 저런 우려에 대해_김근주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런 저런 우려에 대해

- 아직 사회적 교회적 합의가 안 되었는데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불평이 있다. 차별금지법은 이미 2006년부터 발의되었다. 수 차례 발의되었지만, 그때마다 보수 기독교계가 나서서 계속해서 무산시켰다. 그리고 2020년이니 이미 10년이 넘어간다. 그 긴긴 동안 뭐하고 이제 와서 아직 합의가 안 이루어졌다니. 그것은 게으름이요 무지를 드러낸 소리일 뿐이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는 이들이 대략 90퍼센트 가량이었다. 결국 일부 보수 개신교를 제외하고 대체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 셈이다. 박근혜 탄핵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정이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탄핵이 부당하다는 소리가 거의 20퍼센트 넘게 존재한다. 어떤 합의를 해야지 개혁과 변화가 가능할까.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성 소수자에 대한 합의라니, 왜 누군가의 존재가 사회의 합의에 의해 인정되어야 하는가? 왜 보수 개신교계가 누군가의 성별 정체성을 합의해 주어야 하는가? 왜 보수 개신교계가 성별 정체성의 다양성에 대해 합의할 때까지 나머지 사회 전체가 기다려야 하는가? 이미 많은 소리가 있어 왔고, 많은 괴로움이 보고되었건만,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무관심과 게으름 말고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으로 차별금지법 반대하는 이들은, 기존 교회가 성 소수자를 환대하지 못했음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차별금지법 조차 반대하는 처지에, 대체 기존 교회는 그들을 환대하지 못했던 과거를 어떻게 반성하자는 것일까? 오직 립서비스일 따름이다. 이 문제와 연관해 계속 반복되는, '죄악은 반대하되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이 왜 허망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 차별금지법의 네 영역 가운데 고용 영역이 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가 교회 직원에 지원했을 때 그 법으로 인해 차별하지 않아야 해서 뽑아야 한다는 어려움을 우려하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가령, 불교인이 교회 직원을 뽑는 데에 지원할까? 그 곳이 교회임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지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렇더라도 현재 그 사람을 종교 이유로 안 뽑거나 불이익을 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기는 교회 직원에 동성애자인 분이 지원할까? 어쩌면 누군가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특수한 사례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사유가 되기는 어렵다. 저러한 사례는 달리 다루어져야지, 저런 사례를 끄집어 내어 차별금지법을 우려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저런 가능성으로 인해 우려한다면, 지금 현재 보수 교회에서 자행되는 극심한 차별과 혐오 발언의 현실에 대해 더 깊이 개탄하는 것이 먼저다.

- 교회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 설교 못하게 될까봐 어지간히도 염려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이 목사들이 그야말로 순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저런 소리를 설교랍시고 하게 될 현실이 떠올라 끔찍하지만, 그렇게 설교할 자유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의 영역은 교육, 고용, 재화와 서비스, 행정 서비스 영역이기에, 종교 시설 내에서의 설교나 가르침은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가령, 기독교 학교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라고 가르칠 수 없게 될까봐 우려하는 소리도 있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제발 기독교 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기를. 대체로 저런 기독교 학교는 ‘창조 과학’이라는 사이비 가르침을 확신에 가득 차서 가르치곤 한다. (나는, ‘창조 과학’ 옹호하는 무리와 ‘동성애 반대’하는 무리 사이에 교집합이 상당히 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중대형 크기 교회를 자기 새끼에게 물려준 교회는 대체로 저 교집합에 속할 것이라는 심증이 있다^^) 어떤 기독교인은 ‘창조 과학’이야말로 ‘성경적’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시대는 대체 무엇이 성경의 가르침과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이들이, ‘우리가 이 뜻으로 만들었으니 우리는 이 뜻으로 갈거야’라고 우겨대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적 동기에서 나온 확신이라기보다 ‘이 학교는 내꺼야’라는 그릇된 소유 의식일 가능성이 크다. 

기독교 정신의 근본은 사랑, 섬김 같은 가치, 혹은 예수님의 표현대로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 23:23),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이다. 이러한 가치를 결코 양보할 수 없되, ‘창조 과학’이니 ‘동성애에 대한 견해’는 논의될 문제이지, 일방적으로 선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 짐승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이들의 행동으로서 동성 성행위를 규탄한 바울의 로마서 1장과는 달리, 예수를 내 구주로 고백하는 동성애자가 존재하는데, 바울을 근거로 ‘동성애는 죄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며 문제 제기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 못 가르칠까봐 우려하는 것 역시 지극히 협소한 우려이며 부당하기까지 한 우려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의 존재를 두고 죄악이라고 규정하는 말을 못하게 될까봐 저토록 우려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기독교 학교의 학생 중에도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한 성 소수자가 적은 숫자이지만 있을 수 있는데, 그를 향해 ‘동성애가 죄악이다’라는 식의 가르침이 대체 무슨 놈의 자유인가. 그런 자유를 잃게 될까봐 그리도 두려운가. 기독교 학교의 정말 좋은 점은, 일방적 전달과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 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도록 돕는 것, 그래서 언제건 우리가 중요하다 여겼던 것들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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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일 금요일

역사로 본 성시화운동 1.성시(聖市)와 성시화운동이란 무엇인가?

<역사로 본 성시화운동 성시(聖市)와 성시화운동이란 무엇인가?> 김중락

 
영어의 ‘city’란 단어보다 더 번역하기 어려운 말도 없을 것이다. 이 단어는 우리말로 도시’, ‘국가’, ‘’, ‘도성등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5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저서 De civitate Dei(The City of God)를 우리가 하나님의 도성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국()으로 번역하는 것도 이 같은 혼란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은 우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서양의 고대도시 개념 때문이다.
 
고대 서양에서 도시와 국가의 구분은 모호하였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권국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테네나 코린토스 그리고 스파르타 같은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 도시들은 그 자체로 폴리스’(Polis)라 불리는 도시국가였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로마도 조그만 도시국가 로마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서양인들은 ‘city’라는 용어에 도시와 국가라는 이중적 개념을 부여하고 사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중세 도시들은 방어를 위해 도시를 두르는 성곽(Wall)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양에서는 주로 도시 그 자체를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물론 동양에서도 고대에는 이 국가를 의미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시는 거룩한 도시인 동시에 거룩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역대의 미국 정치인들이 선거때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들은 동네(도시)를 미국이라는 국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시와 국가는 역사적으로 치환 가능한 용어였다.
 
오늘날은 도시가 하나의 국가인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에 한국의 각도시마다 기독교인들이 성시화운동 조직을 만들고 이를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성시는 국가보다는 도시를 가리키는 개념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운동도 전국적이고 결국은 성스러운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시화운동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말 그대로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와 국가를 성스럽게 만들자는 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협력해야 될 일이 아니던가? 아니면 이 운동이 방향을 바꾸어야 할까? 그 답을 역사에서 먼저 찾아보자.
 
역사는 기독교회가 탄생한 이후로 수많은 성시화운동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중세의 십자군이 세웠던 예루살렘왕국도 성시를 이루고잔 한 노력이다. 그리고 중세의 수많은 도시들도 나름대로의 성시를 지향하였다. 종교개혁시 칼뱅도 제네바를 성시로 만들고자 하였고, 17세기에는 스코틀랜드의 언약파 지도자들과 잉글랜드 청교도 지도자였던 크롬웰도 각각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성스러운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종교적 분파들의 성시화 시도가 있었다.
 
이들 성시화 운동은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면 이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역사적 성시화운동이 실패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보여진다. 먼저, 성시화운동이 기독교권익옹호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장은 기독교를 세력화하고 이 세력으로 세속정부에 압력을 넣어 기독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손해보아야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이 운동에서 기독교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진리로 나타나고, 이익집단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복음의 문은 저절로 닫히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운동에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는 말씀이 설 자리가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까지의 많은 성시화 운동이 타종교인들의 개종을 강제화 하거나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들이나 신앙고백이 다른 이들을 살해하고 박해한 적이 적지 않다.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이나 에스파냐의 종교재판등이 대표적이다. 양심을 강제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수백년 동안 기독교 지역이었던 북 아프리카에 7세기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기독교가 뿌리조차 사라진 것은 강제화된 신앙이 얼마나 헛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성시화 운동이 성공하려면 역사적 성시화운동의 한계를 먼저 살피고 이들로부터 참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현 성시화운동은 이전의 전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성시는 피켓으로 무장하고 무리지어 시가행진하거나, 수만명 모여 세력을 과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앞으로 연재를 통해 역사적 성시화 운동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 한계점을 지적해보고자 한다. 이 연재가 현 한국 성시화운동의 방향전환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은 2011년 대구 성시화운동 특강을 수정보완 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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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락 페이스북에서 퍼온 글임을 밝힙니다.

2018년 7월 2일 월요일

한국의 복음주의는 '복음주의'인가?

'베빙턴 테제와 복음주의에 대한 성찰


1. ‘복음주의라는 불편한(?) 용어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어느 순간 한국 사회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이 보수 기독교라는 말과 큰 차별성을 갖지 못한 표현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때 한국 기독교의 성장을 주도하던 복음주의 교회라 불리던 대형 교회들이 보이는 반사회적이고 보수 일변도의 모습이 그런 인식을 강화합니다. 이른바 복음주의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안타깝게도 종교인 과세 반대, 반동성애, 반이슬람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 일변도의 목소리들입니다.
 
복음주의에 대한 우려가 더해진 데에는 아마 소위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한 것도 영향이 있을 듯합니다. 지난 미국 대선 때 교묘하게 트럼프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던 존 맥아더 목사나, 요사이 반여성주의 발언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존 파이퍼 목사 등은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목사들로 불립니다. 물론 이러한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리던 분 중 한 분인 홍정길 목사나, 미국의 팀 켈러 목사는 복음주의권에 대한 반성과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제 고백을 보태자면, 한국에서는 줄곧 장로교회를 다녔지만 신학을 공부하지는 않았기에 어떤 신학을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와 같은 비신학자·비목회자가 신학자·목회자나 일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쓸 때는 알게 모르게 조심스러워집니다. 이럴 때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말이 복음주의자라는 표현입니다. 저를 복음주의자라고 전제하고 글을 풀어나갈 때 저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기본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용어의 의미를 깊이 고민해서라기보다는 복음의 가치를 여전히 믿고 살아내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 때문에 스스로를 기꺼이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출판사에 보낼 원고를 교정하다가 서문에 쓴 복음주의자라는 자의식으로라는 표현을 고민 끝에 지웠습니다. 초고를 쓰고 시간이 꽤 지나는 동안 저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자라는 용어가 한국의 맥락 속에서 사용되는 방식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전히 여성 안수의 성경적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연구하고 고민하는 학자들, 창조과학자들, 그뿐 아니라 창조에 대해 자신들이 수용할 수 있는 신학적 가이드라인을 정해 놓고 과학적 가설을 받아들이는 신학자들과 함께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것을 받아들이기 부끄럽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폴 스티븐스의 일터신학이 이랜드와 만나고, 진보적 사상가 짐 월리스가 명성교회와 만나고, 팀 켈러를 온누리교회 양재 센터에서 만나고, 창조과학이 한동대에서 꽃피는 현실에서 복음주의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아마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간 제가 복음주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복음주의라는 것이 오해되었거나이겠지요.
 
모든 이데올로기의 특성이겠습니다만,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분석하는 대부분의 글은 해당 이데올로기는 규정하기가 어렵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복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편리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아마 한국에서 복음주의를 정의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 베빙턴 테제라고도 불리는 영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의 복음주의 4대 강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근대 영국의 복음주의: 173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의 역사에서 복음주의의 핵심을 성서주의, 회심주의, 십자가중심주의, 행동주의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이 정의를 중심으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지점은 무엇인지, 지향할 바는 무엇인지 고민하고자 합니다.
 

2. 베빙턴 테제

베빙턴의 이 책이 한국에서도 번역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베빙턴 테제를 그의 책을 통해서 듣기보다는 그의 테제를 인용한 다른 책을 통해서 접합니다. 그러니 베빙턴 테제가 출현한 맥락(context)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특정한 정의를 수용하는 것을 복음주의자의 특성이라는 오해를 낳습니다. 저는 이러한 오해를 낳게 한 데에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복음주의 관련 책들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베빙턴은 같은 문화적 콘텍스트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아도 맥그래스 자신이나 영미권 독자들은 베빙턴 테제가 태동한 문화적 맥락을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맥락은 사라지고 텍스트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베빙턴 테제의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빙턴은 자신의 책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은 보다 최근에 생겨난 운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1730년대 이후 영국에서 생겨난 대중적인 프로테스탄트 운동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전통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운동이라고 주장합니다. 1730년대라면 유럽에서 어떤 시기일까요? 간편하게 떠올려 보겠습니다. 영국에서 존 웨슬리가 탄생한 것이 1703년입니다. 한창 그의 메소디스트 운동(Methodist Movement, 감리교 운동)이 일어날 때이겠지요. 영국의 남동쪽 도버해협 건너 프랑스는 어떠한 시기일까요? 계몽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된 시기이지요. 그로부터 반세기 후 유럽은 프랑스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시대를 맞습니다. 이 때문에 베빙턴은 복음주의는 계몽주의의 프로테스탄트 버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영국의 메소디스트 운동이나 프랑스 계몽주의가 공유하고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은 대중운동으로 귀결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프랑스혁명에서 그 대중의 범주를 어디까지를 볼 것인지도 논쟁거리이긴 합니다만, 영국과 프랑스 귀족과 성직 중심의 절대군주 시대에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대중들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이 이미 맥그라스나 한국 기독교계에서 놓친 부분입니다. 맥그래스는 복음주의운동을 지성운동이라고 규정했고, 한국 사회에서도 복음주의운동은 지성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됐습니다. 명확하게 구분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베빙턴 테제에 등장하는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사회 엘리트 계층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복음주의운동을 지성운동이라고 부른다면 큰 오해입니다.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가진 자의 위치에서 가부장적이거나 온정적인 자세로 대중들에게 접근했다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들의 운동이 지성운동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웨슬리의 메소디스트 운동이 지나치게 열광적이며 세련되지 못하다고 비판받는 것도 이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맥락을 오해한 것이지요. 흔히 규범적으로 제시되는 4대 강령에 대해 베빙턴이 어떠한 식으로 언급했는가를 보아도 맥락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세기는 기독교가 이미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신념을 복음주의라는 틀로 만들었던 시기이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특징은 회심주의, 성서중심주의와 십자가중심주의이다. 다른 특징, 즉 행동주의는 1730년대의 각성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저 복음주의 4대 강령을 나열하는 것과 베빙턴이 행동주의의 등장을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흐름과 다른 흐름이라고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의 복음주의 이해에서 행동주의는 어느 지점에 서 있을까요? 간편하게 맥그래스의 논의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미래에서 행동주의를 복음전도와 다른 형태의 기독교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전도와 제자도 프로그램에 열심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계몽주의의 프로테스탄트 버전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빈약한 설명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이 규정은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행동주의라는 것도 복음전도나 제자도 프로그램으로 읽힐 여지가 많습니다. 필연적으로 복음주의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잘 구축되어 있는 한국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소개되고 소비되어온 것이지요.
 
저는 이 지점이 한국 복음주의가 길을 잃은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주의라는 것이 곧 기독교 교리체계를 열심히 연구 학습하고, 그것을 열심히 전도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한 한국의 복음주의가 과도하게 회심주의와 성서중심주의에 초점을 두다 보니, 복음주의를 칼뱅주의나 알미니안주의 등 다른 신학체계 중 하나로 인식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한국 복음주의가 무의식중에 연결시켰던 지성운동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콘텍스트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초래한 공백을 지적 정합성을 추구하는 텍스트로 끊임없이 채워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복음주의운동 내에서 과학마저 자신들의 이념 체계로 종속시키고자 하는 너무나 진지하지만 서글픈 시도인 창조과학이 여전히 활개 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베빙턴은 영국 복음주의에서 행동주의 이외의 세 가지 규범 역시 이전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통일된 흐름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영국 복음주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슬리의 사상 역시 청교도 전통과는 무관한 고교회 전통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적어도 베빙턴의 맥락 속에서 복음주의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규범은 행동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영국의 복음주의는 복음을 사회적 맥락속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 가지는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베빙턴이 주장하는 의미에서 복음주의를 가늠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행동주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제 이 복음주의가 영국에서 어떠한 식으로 발전했는가를 보겠습니다.

 
3. 클래팜, 섹트(분파) 혹은 성자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잘 알려진 영국 노예무역 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가 있습니다. 그가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던 1780-1825년의 시기는 이른바 영국의 복음주의운동이 만개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중에 역사가 기억하는 단연 큰 열매는 1807년의 노예무역 폐지법일 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혁명을 했던 프랑스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된 것이 1817년이고, 실제로 발효된 것이 1826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결과입니다.
 
영국에서 이른바 복음주의자라는 자의식을 가진 25명 남짓한 운동가들이 체계적으로 사회개혁을 주창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국 런던 남부에 있는 클래팜(Clapham)이라는 곳에서 주로 모임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일컬어 클래팜 섹트라고 부릅니다. 윌버포스를 지원했던 클래팜 섹트의 구성원은 사업가, 법률가, 성직자와 학자들이었습니다. 윌버포스와 클래팜 섹트의 활동 시기와 프랑스혁명의 시기가 정확하게 겹칩니다. 프랑스에서 사회 불평등으로 전대미문의 혁명이 발생할 정도였다면, 영국의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국 역시 아동들이 하루 18시간씩 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하던 시기입니다. 노동자들은 고된 하루의 피로를 선술집에서 술에 의지해서 풀어야 했습니다. 그 시기를 술의 시대’(Gin Age)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맥락이 있습니다. 작은 범죄에도 가혹한 형벌이 따르는 시기였습니다. 소매치기범에게 사형이 선고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반인간적 사회의 정점 유럽 열강들이 시행하고 있던 노예제도였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를 중심으로 한 클래팜 섹트에서 내건 기치는 정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무역 금지와 사회 도덕 개혁을 두 가지 위대한 목표라고 명확하게 설정하였습니다. 물론, 영국에서 노예무역에 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은 클래팜 섹트가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18세기 초반 퀘이커들이 노예무역에 반대하여 반노예제운동을 펼치고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20대에 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윌버포스는 자신이 가진 복음주의 신념에 따라 당시 보수당(토리)과 자유당(휘그)의 경계를 넘어 노예무역 폐지를 지원하는 곳에 투표했습니다. 윌버포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다른 인간이 노예로 삼는 차별이 사회적인 죄악이며, 그 속에 사는 개인도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이러한 도덕적 악에 대하여 책임을 느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는 1789년의 한 연설에서 노예제도 폐지와 같은 사회개혁은 정파적인 질문이 아닌 사람들 모두가 들어야 할 이성과 진실의 소리라고 갈파했습니다. 또 그는 1797년에 쓴 실제 기독교의 가르침과 비교해 본 영국의 중상류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연한 관행적인 종교 체계에서 하층민의 삶에 여전히 무관심한 엘리트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했습니다. 윌버포스와 클래팜 섹트는 바로 이 중상층의 사람들을 일깨워 노예제를 폐지하고 사회의 도덕 개혁을 이루어가는 데 필요한 지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시기적으로 프랑스 상류층이 혁명으로 무너져 내린 터라 다행히 영국에서 그의 목소리는 힘을 얻었습니다. 6개월 만에 그의 책이 7,500부가 팔리고 급속도로 상류층에 퍼져 나갔습니다.
 
윌버포스와 클래팜 섹트는 신문과 대중매체 선전을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노예무역 폐지를 포함한 사회 개혁 이슈들에 대해 의회의 찬성을 끌어내는 데 대중들이 의회를 압박하도록 했습니다. 예컨대, 클래팜 섹트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에 선교사 파송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무려 50만 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영국 인구가 900만이었던 점에 비춰보면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 개혁은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며, 복음주의와는 무관하다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클래팜 섹트는 대다수 부유한 배경을 지닌 엘리트 출신의 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공유했던 한 가지 정치적 이념은 노예 해방, 노예무역 폐지와 형법 개혁 등의 사회 개혁이었습니다. 그들의 개혁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목적에서가 아닌 복음이 제시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의 운동은 종교적 인도적 이상 속에 평등 사회를 추구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을 클래팜 섹트라는 별명으로 불렀지만, 재미있게도 당대의 반대파들은 그들을 경멸적인 의미로 클래팜 성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들은 가진 자들이었고, 그들의 개혁은 가부장적인 시각의 개혁이라고 비판받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영국제국을 이끌어 가는 주요한 동력의 하나였던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것은 국가의 경제적 이익과 배치되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인군자 같은 소리를 한다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현실 사회인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기보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현실 사회 속에 구현하는 개혁이 목표였기 때문에 성자라는 비아냥은 그들에게 훈장이었습니다.

 
4. 복음주의에 대한 정의를 재고한다

이쯤 되면 우리가 적어도 베빙턴 테제에서 언급된 복음주의에 대해서 재고할 지점이 명확해지지 않을까요? 여전히 앞의 세 가지 복음주의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이제 복음주의가 그 이전과는 다른 정체성으로 등장하게 된 행동주의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는 복음주의자가 인간에 대한 차별을 행하고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에 대해 문제제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하는 인간관에 반하는 배제, 차별, 혐오에 맞서야 합니다. 사회 개혁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마땅히 복음주의자라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을 지지해야 합니다. 여성과 외국인, 다른 종교, 소수자 등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차별을 복음의 이름으로 거부해야 합니다. 복음주의자라면 토지 소유 유무를 통해 확대되는 불공정한 부의 편중에 반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세상 물정을 모르는 성인군자 같은 소리만 한다는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정부 들어서 이루어지는 한국 사회의 정상화 속에 교회는 그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아노미와 문화지체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 개혁을 위해 제시되는 어젠다마다 혼란스러워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에 맞서는 것이 복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커집니다.
 
적어도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종교적 이념을 들어 반대하는 이들은, 이제는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을 떼어내야 합니다. 그들이 칼뱅주의자, 알미니안주의자 등으로 불릴 수 있을지는 모르나 역사적 복음주의자의 범주에는 들지 않습니다. 맥락 없이 사용하는 복음주의’ ‘복음주의자라는 말을 이제는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합니다.
 
복음주의를 신학적 경계로 범주화하는 것은 역사적 복음주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적어도 18세기 영국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출발한 베빙턴 테제에 대한 해석을 신학자들이 독점한다면 시대착오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주의에 대한 베빙턴의 정의를 21세기 한국의 콘텍스트 속에 재해석해야 합니다.
 
먼저 성서주의를 보겠습니다. 성서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느냐의 여부로 판단하는 것이어야 할까요? 성서의 문자적 완결성을 믿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복음주의라고 보기보다는 성서의 가르침, 성서에서 바라보는 인간관, 세계관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실천적인 고백이 복음주의에서 말하는 성서주의여야 합니다.
 
십자가중심주의는 어떨까요? 우리가 십자가 대속을 받아들이는지 여부, 혹은 그 이후 부활의 역사성을 믿느냐는 중요한 신학적 논제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복음주의 맥락에서는, 이 논쟁에 머무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삶의 중심에 놓고,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결단하는 것이 복음주의여야 합니다.
 
회심주의에 대한 해석 역시 복음을 수용하는 개인적 회심을 넘어선 사회적 회심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회심이란 복음이 가지는 공공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우리의 삶의 지향이 그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변화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되었다는 것이 회심의 극적인 고백이 아니라, 예수를 고백하고 사회를 바라보니 개인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복음으로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바꾸어가야겠다는 실천적인 고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행동주의 역시 재고가 필요합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교회 내의 제자도와 복음전도라는 어휘로 표현한 20세기 영미의 행동주의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18세기 상황에서 윌버포스와 클래팜 섹트가 주장한 사회참여가 우리에게 더 절실한 상황입니다. 2009년 경북대에서 영국의 종교와 교회역사적 조망이라는 주제로 영국사학회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저 역시 그 당시 발표자로 참여하였기에 기억이 뚜렷한데, 당시 워릭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윤영휘 박사가 대서양복음주의 네트워크의 노예무역 폐지주의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발표에 언급된 베빙턴의 행동주의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윤 박사는 본인이 직접 베빙턴으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웨슬리와 영국 복음주의자들의 노예무역 폐지와 같은 사회참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복음주의마저 교리적 체계, 혹은 지성의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복음주의를 사회 바깥으로 더욱 고립시킬 뿐입니다. 복음주의가 고민해야 할 것은 교리이기보다는 공적 영역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로 규정되어야 합니다. 복음주의의 존재감은 복음의 공공성을 이 사회 속에서 실현하는 것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의인 10인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을 영국 사회는 스무 명 남짓한 클래팜 성자들의 공로로 성취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복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활력이 사라지면 이데올로기만 남습니다. 그 결과가 미국 복음주의에서 보이는 것처럼 보수 기독교와 자연스레 등치되는 구조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맥락은 사라지고 글자만 남는 화석화입니다. 이제 복음주의자의 고민은 어떤 이념을 지킬까가 아니라 복음의 가치를 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서에 대한 관점, 회심에 대한 관점,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논쟁하기보다는 이 사회 속 공공재로서 복음의 성격, 복음이 지향하는 인간애를 실현하는 것을 방해하는 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실현될 때 우리는 언젠가는 다시 자랑스럽게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원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원문출처 http://m.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