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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9일 목요일

길을 걷는 사람_ 최주훈

<길을 걷는 사람>
얼마 전 루터교회 목회자 연장 교육에서 박윤만 교수의 강의를 매우 인상 깊게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첫 번째 주제가 “초기 기독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라는 문제였습니다. ‘기독교’, ‘교회’라는 말이 너무 익숙해서 이 질문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첫 질문이 저에겐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정말 1세기엔 예수 따름이 스스로 뭐라고 불렀을까, 그리고 밖에선 또 어떻게 이름했을까.
그 답이야 예수님 만나봐야 알겠지만, 강의를 맡았던 박윤만 교수는 성서의 다양한 구절(행 9:2; 19:9, 23; 22:4; 24:14)을 근거로 초기 기독교는 “그 길”, 또는 “나사렛 이단” 같은 말로 불렸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다”라고 선언한 구절,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길”(도)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름을 지을 땐 아무렇게나 짓지 않지요. 그 이름에 소망을 담는 건 상식입니다. 1세기 교인들이 스스로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건, 자신들이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의식이 담겨 있다고 봐야합니다.
마가복음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길을 중심으로, 이 길이 도대체 무엇인지 설명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일단, 막 1:1절은 마가복음이 교회 공동체 예배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운율을 통해 감지 할 수 있습니다. 한글 번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인데, 헬라어는 “아르케 투 에방겔리우 예수 크리스투 후이우 데우”라고 읽습니다. 여기, ‘우~’라는 음이 반복되는데, 고대인들에게 이 운율의 반복은 경건한 분위기를 깊게하는 예전적 음운이예요.
그다음 2절에 저 유명한 이사야의 예언이 나오지요. 여기서 마가복음서 기자는 구약을 인용하면서 ‘과거에서 현재로’라는 시간의 길을 닦아 놓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길을 준비하리라..., 길을 곧게하라”라는 인용구를 살포시 넣어둡니다. 이로써 마가복음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길을 밝히는 의도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특별한 것은 그 길의 출발지가 ‘광야’라는 점입니다.
5절을 봅시다.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이 다” 광야로 나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요? 잘 정비된 지역, 사람들의 밀도가 높은 대도시이지요. 여기서 복음서 기자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살짝 숨겨 놓은 것 같아요. ‘유대,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로 정작 말고 싶은 단어는 ‘성전’이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살지요. 그곳에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야말로 유대인의 삶을 지탱하는 근간이고,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유대인들의 통념으로 봐서는 성전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시온의 대로’라는 탄탄한 대로를 거쳐 갑니다. 그런 대로를 걸어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기존의 통념이지요.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를 뒤집어 버립니다. 대도시, 성전, 탄탄대로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와 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대 땅의 사람들, 예루살렘에 모여 살던 도시인들,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예측할 수 없는 황량한 땅, 광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이동 경로가 완전히 바뀌어버렸지요. 길 없는 곳으로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광야라는 곳은 족장과 예언자들의 땅이기는 하지만, 이 광야에 그 어떤 나라가 세워진 적도 없고, 안전이 보장된 체계가 세워진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과거의 역사는 있지만, 제도와 틀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복음은 도시 사람들을 불러 이곳으로 인도한 다음, 진리의 길을 걷게 만듭니다. 물론 모두가 이 길 걷기에 동의하고 그 길을 걸어간 건 아닙니다. 고향 가족들과 가진 자들은 이 길을 거부했고, 제자들은 이 길에 올라섰다 탈선하기를 반복합니다.
중심지 예루살렘을 비우고, 광야에서, 그리고 외곽 갈릴리에서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광야 한 가운데서 예수를 만나 눈을 뜨기 시작하지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맹인이 시력 회복하고 “모든 것을 밝히 보는” 구절일 겁니다(8:22-26). 새롭게 눈을 뜬 사람에게 이 길이 어떤 길인지, 그 방향이 어디인지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그 길의 종착지는 무덤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길이 끊어진 어두운 무덤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며 복음서를 마무리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무덤 안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길인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부활’, ‘십자가 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교회력의 새해는 마가의 해입니다. 그래서 이번 해 교회 주제를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분명히 오늘 우리의 상황도 코로나 때문에 암흑 같은 상황입니다. 무언가 계획하거나 준비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으니 대비할 수 없는 무덤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탈선하더라도 일단 일어나 걸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골머리 쓸 것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강점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고유의 것, 우리 교회 말고는 다른 곳에선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나눌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예수의 길 위에 있기 기도하며, 서로를 돌아보는 것, 즉 복음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가장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이들의 지혜로운 나눔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 중앙루터교회 2021 정책 당회 설교 막 1:1-5 ‘길을 걷는 사람들’
최주훈 목사 (2020.11.20.토)

2020년 8월 1일 토요일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_채영삼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오늘 강의 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한다. 특히, 청년들의 고민이 많다. 나 역시 아직 고민을 계속하고 있지만, 부족한대로 내 의견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포괄적차별법의 문제는, 좌파 우파의 이념의 문제도, 진보와 보수의 대결도, 네오-맑시즘과 자본주의의 대결도, 친정부-반정부의 문제도 아니다. 이 문제를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다루는 것은 왜곡이다.

2. ‘법 제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이슈는,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도 아니다.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조장하고, 인권을 신장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어느 쪽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차별, 평등, 인권의 프레임에서 다루는 것은 착시현상이다.

3. ‘포괄적차별금지법’의 ‘법’으로서의 핵심 문제는, ‘자유’의 문제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문제에 대해 ‘찬성’하고 ‘옳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그것을 ‘반대’하고 ‘틀렸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4. 동성애 등을 찬성하는 논리로서, “동성애자를 사랑한다면, 동성애를 죄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일부 현실적이나, 상식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어떤 사람의 의견과 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상식이다. 어느 쪽이든 생각이 다르다고 그 사람의 입을 막거나 차별할 수 없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다. 죄를 심판하시며 죄인을 구원하신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고 죄인은 사랑하신 지혜의 나타남의 절정이요 증거이다.

5. 동성애를 찬성하는 논리로서, 보수교회는 ‘모든 죄를 지으면서 굳이 동성애만 최악의 죄처럼 말하는 것은 자격 없는 일’이라는 비난이 있다. 이 논리는, ‘동성애는 죄’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 주장은 위의 4의 주장과 공존할 수 없다.

6.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에 대한 개인의 자율성 문제는, 단지 성윤리에 그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문제가 서구 기독교 사회에 닥친 ‘성 혁명’의 문제일 때, 이 문제는 결혼, 가정, 교육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문제이며, 무엇보다 기독교 전통,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도전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이슈이다.

7. ‘성경은 동성애를 모른다’는 주장, 즉, 성경에서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며, 19세기 이후 동성 인격 간의 애정을 포함한 성행위로서의 ‘동성애’는 성경이 ‘몰랐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에서도, 블랙수면방이나 게이클럽처럼, 단지 ‘동성 성행위’로서 동성애를 행하기도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고대의 노예제도에서 노예는 ‘재산’이지 ‘인격’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노예들은 주인이나 주인의 자녀들의 선생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가족 이상의 대우를 받기도 했다.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지 ‘동성애가 아니라는 주장은, 예컨대 ‘과식은 했는데 음식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주장처럼 추상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의 자기 결정권’이나 ‘동성애’ 등은 명백히 부정적이며 인정되기 어렵다.

8. ‘동성애는 죄이나, 차별금지법은 찬성한다’는 의견은, 교회를 공적 영역에서 축소시킨다. 교회를 위한 법은 세상을 향한 양심의 법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고,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도 교회는 할 말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현재 차별금지법의 핵심이 ‘신념, 사상의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9. 교회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십자가의 공의와 긍휼의 복음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이론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이나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큰 어려움 없이 찾아올 수 있는 ‘품’이 되어야 한다. 중국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한 학생에게 아들이 있었다. 부모의 이혼 후에, 그 아들은 동성애에 빠졌다. 그 소문이 교회에 돌았고, 그 아들은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 어머니 학생이 한 말이 마음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내 아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죄라고 정죄하고서, 그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나님은 죄인인 당신과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동성애 커플이 들어온다면, 두 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한 번에 다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더 큰 죄들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가? 동성애자,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청년들이 그저 머물 수 있는 교회의 품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죄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은 무책임하지 않은가?

10.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를 법의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정치적 세력과 권력의 힘으로 풀려 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교회는 그런 방식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의 9번에서와 같은 노력이, 진정성을 보여주는 참된 해결책에 가까울 것이다. 더 나아가, ‘성 혁명’에서 ‘성’(gender)이라는 주제는, 단지 ‘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몸’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권리인가? ‘나의 자궁은 내 것이기 때문에, 임신은 병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성경이 ‘몸’을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할 때,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할 때, 아니, 동양이나 서양 고대 사상에서 한 인간의 몸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했을 때, ‘몸’이란 무엇인가?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의 저자, 로드 드레허는, ‘성(性)의 형이상학’을 제안한다. 교회는, 이 기회에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고민하여 다루고, 다음 세대에게 성경적인 ‘육체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11. 만일,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 등의 문제가 서구를 휩쓴 ‘성 혁명’의 일환으로서, ‘다원주의’의 폭넓은 도전 가운데 하나라면, 그 배후에는 불가피한 ‘영적 싸움’이 있음도 자각해야 한다. 다원주의의 사회적 모토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란, 이제 정상(正常)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가? 교회가 뭔데,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을 이야기하는가? 정상과 비정상은 사회적 학습의 결과이고, 결국 사회적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 각각의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비정상이 없다는 새로운 정상’은, ‘정상-비정상이 있다’는 ‘하나의 비정상’(예컨대, 기독교의 전통)만큼은 인정하지 못한다. 논리적 말장난이 아니라, 그것이 다원주의의 자기모순이며 독재성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12.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다. 폐해가 많다. 권위주의를 타파하자고, 권위 자체를 없애버리면,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없앤 권력이 새로운 권위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창조질서, 중세인들이 ‘합리적 직관’으로 알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 직관’은 정상이 있고 비정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원주의자들도, ‘옳고 그름이 있다’는 그 사실, 틀렸다고 말할 때는 옳다고 믿는 기준이 있다는 그 사실, 기준, 곧 정상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질서 자체는 파괴할 수도 없고, 하려 해서도 안 된다. 남성 중심의 지배체제가 낳는 폐해가 심하다. 아직도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참으로 그러하다. 바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남성 지배체제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해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더 큰 폐해를 낳는다. 세상이 어둠인 이유는, 분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컨대 창조질서로 표명된 그 기준, 성경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질서의 남용, 악용의 폐해를 바로 잡는데 역시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13. 법적인 해결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리가 없이 사랑은 사랑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사랑 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도 진리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셋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함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교회를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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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0일 토요일

마르다와 마리아 _ 최주훈

<마리아와 마르다>
 
이전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10:38-42)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민했던 대목인데, 참고가 될까 해서 몇 글자 다시 남겨본다. 이 본문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 단순히 말씀과 노동의 우위를 따지는 본문이 아닌 건 확실하다. 특이한 해석 중 하나는 여성인권문제로 접근하는 방법인데, 케네스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보는 예수, 239-301)가 대표적이다. 상당히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난 좀 다른 방식으로 이 본문을 들여다본다. 미쉬나 전통을 배경에 깔고 이 구절을 해석해 보면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미쉬나에서 명령하는 손님 접대법에 충실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때문에 이제껏 읽어왔던 독법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본문을 읽어낼 수 있다.
 
못된 언니 마르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니라, 미쉬나에 기록된 대로, 주인의 권리를 손님으로 오신 지혜자에게 넘겨주며 율법에 순종하는 마르다, 게다가 자기 동생의 역할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연장자의 권리를 사용하라며 손님 예수께 겸손히 말을 올리는 착한 여인의 뉘앙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 다음 예수님의 반응 역시 주목할 만하다. '마르다를 두 번 부르는 것을 두고 화가 나거나 짜증 섞인 예수님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게 통념적이지만, 나에겐 전혀 다른 색깔의 목소리로 들린다. 마르다를 인정해주고 사랑하는 예수의 온유한 목소리로 말이다.
 
마리아도 미쉬나 율법에 충실하다.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증거다. 미쉬나의 율법, 손님 접대법'에 보면, ‘지혜자가 집에 왔을 때 그에게 눈과 귀를 가까이 청종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리아는 그 율법을 그대로 준행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케네스 베일리는 발치에 앉았다는 표현을 중동의 일반적인 화법이라고 말한다. 특히 바울이 가말리엘의 발 밑에서 자랐다는 인용구를 들어 제자가 된다라는 해석을 한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마리아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율법에 순종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본문은 둘의 우열, 마리아와 마르다, 또는 '노동''말씀 듣는 것'의 우열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한 가지만 언급하면, 등장인물의 이름 속에 담긴 비밀이다.
 
마르다는 주인이란 뜻이다. 마르다는 이름에 걸맞게 주인의 권리를 (율법에 따라) 예수에게 넘겨준다. 칭찬받을 일이고 칭찬 받는다.
 
마리아는 어떤가? ‘좋은 것이란 뜻이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은 마지막 구절이다. 여기 보면,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들었을까?
 
마리아는 마리아를 택했다. 그러므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을 택했다. 그러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예수 앞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예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누구도 그 생명의 고귀함과 존재의 가치를 빼앗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히 깨닫는 순간 영원한 생명의 신비가 열려졌다는 의미도 여기 있다. 누가복음서 기자는 이 사건을 통해 영생의 신비가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다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미 눅10:25절부터 시작하는 율법교사와 예수의 대화 주제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주제? 영생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란 길로 설명하고,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꺼내놓는다. 이건 영생을 위한 이웃사랑 항목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지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하나님사랑에 해당하는 항목으로써, 궁극적인 영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체를 문학적 기법으로 보면, 중동문학에서 흔히 보이는 수미상관법’(댓구법)에 속하는 것 같다.(이 기법을 베일리는 아주 강조한다. 그래서 혹자는 누가 복음서 기자보다 베일리가 댓구법을 더 좋아한다고 할 정도다.)
 
어찌되었건, 누가복음서 기자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청중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예수 앞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영생', 곧 하나님사랑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어디 서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목사, 장로, 기업인, 정치인, 이라는 것은 모두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 서 있는지 근본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지 알아야 산다. 개 속에 늑대의 유전자가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야 하듯, 우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파멸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 존재의 신비를 깨닫는 길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누가복음서 기자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던 복음이 아니었을까?
 
설익은 내 해석이다. 설교 준비하다가 생각나는대로 주절주절 써 본다.
 
#설교 #메모 #단상
 

2018년 12월 6일 목요일

페미니스트 바울?

예수 오빠는 좋지만 바울 아저씨는 싫어?
   
 
 
이민규(교수, 한국성서대 신약학)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3:27-28).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나를 여자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나를 야만인으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랍비 예후다의 기도 중, T. Berakot 7:18).
 
 
얼마 전 <조선일보>에 기독교 환경-여성신학자로 저명한 현경 교수가 한 유교학자와 나눈 대화에 이런 말이 나왔다. 페미니스트들은 예수 오빠는 좋지만, 바울 아저씨는 싫다고 한단다. 이는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가부장적인 종교로 만든 장본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수 운동은 처음엔 평등한 종교였는데,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강자의 논리가 됐다는 말이다(<조선일보>, 유교와 페미니즘, 2002318). 사실 페미니스트들은 기독교가 매우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종교라고 주장한다. 현재 현실적인 교회의 모습을 볼 때 이러한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이는 우리 나라와 같은 철저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교회가 사회를 너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서 생겨난 문제이지 원래 초대교회가 추구한 종교상은 아니다.
 
  
사도 바울을 가부장적 기독교를 창시한 장본인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현대 사회의 기준을 고대 문화의 잣대로 삼는 실수로 범하는 것이다. 만약 수천 년 후 지금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이 우리를 판단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미개하게 보이겠는가! 그레코-로마문명은 여성의 인권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던 지독하게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사회였다. 탁월한 사상가요 시대를 앞서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세네카 같은 지식인들조차도 남존여비를 당연시 여겼던 문화였다.
 
그런 문화에서 본다면 바울은 당시 남자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그레코-로마의 문화에서 기독교 안에서 만큼은 여성을 위한 파격적인 권리와 자유를 주장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예수조차도 하나님을 남성적 이미지인 아버지라 부르고 그가 세운 열두 사도 중에는 여성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현대인들이 만족할 만한 남녀 평등을 실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제의 진보가 오늘의 보수라는 말이 있다. 즉 진보와 보수는 상대적 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바울은 이론가가 아닌 선교사였기에 현실적인 복음 전파와 교회 정착을 위해 당시 가부장적인 문화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완전 평등의 이상주의적 대응은 당시 교회에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까지 혼동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세기 그레코-로마의 문화 기준으로 바울을 보아야 한다. 당시 여성들의 삶은 아래와 같았다.
 
  
 
유대교의 여성
 
제국주의와 그 영향권에 있던 국가들은 계층과 계급 중심으로 사회 구조를 형성하기 때문에 남녀 차별의 현상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유대교에서도 농경 사회를 기반으로 한 국가가 형성되면서 가부장 제도와 남녀 차별이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특히 예수 당시에는 지독히 남성 중심적인 그레코-로마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이러한 사상은 더욱 강해졌다.
 
예를 들어 역사가 요세푸스는 율법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Ag. Ap. 2.23 §201). 유대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여자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Op. Mund. 151-52; Quest. In Gen. 1.33) 집 안에서 격리된 생활을 사모해야 한다고 말했다(Spec. Leg. 3.169-77; Flacc. 89). 당시 현인으로 알려진 벤 시라의 말은 더욱 엽기적이다. “옷에서 좀이 나듯이 여자에게서는 여자의 심술이 나온다. 여자의 친절보다는 차라리 남자의 심술이 낫다. 여자는 치욕과 비난을 자아낼 뿐이다”(집회서 42:13-14).
 
조혼은 당시 보편적 현상이었다. 유대 부모들은 딸이 월경을 하는 나이가 되면 결혼을 시켰다. 결혼은 아버지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결혼 첫날 신부는 침대보의 혈흔으로 자신의 처녀성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혈흔이 결코 신부가 처녀였음에 대한 절대적 증명이 될 수 없기에 당시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이 억울하게 음탕한 여자로 낙인찍힌 신부들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혈흔이 없는 경우 신부의 아버지는 신랑측이 지불한 신부 값을 모두 돌려주어야 했지만 신부의 가족이 마을에서 당할 조롱과 치욕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심한 경우 신부는 마을 주민들의 돌에 맞아 죽게 되었다.

유대 남성들은 부인에게 수치되는 일을 발견할 경우(24:1) 부인과 쉽게 이혼할 수 있었는데 유대인의 이혼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수치되는 일에 관한 해석은 다양했다.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는 오직 간통의 경우만 이혼을 허락했지만 보다 급진적인 힐렐 학파는 거리에서 춤을 추거나 외간 남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저녁식사를 망친 경우, 개한테 물린 상처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보다 매력적인 여인을 만난 경우(아마 아내의 부족함이 원인이라 생각되어)도 수치되는 일로 간주하여 이혼을 허락했다. 그러나 진보적이던 보수적인 집단이던 여성의 이혼의 권리를 논한 적은 없다. 또한 일부 다처제는 권력과 경제력을 지닌 남성들에겐 보편적이었지만 일처 다부제는 절대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위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미혼 여성은 별궁을 떠나지 말아야 하며 기혼 여성은 집 정문까지, 그리고 다른 여성들과 함께라는 전제 하에 회당의 기도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실지로 팔레스타인과는 달리 디아스포라에서 유대여성들은 대체로 자유로운 편이었다.
  
 
종교 생활에 관하여도 여성의 역할은 매우 수동적인 것들에 국한되었다. 공적인 회당은 열 명의 성인 남성이 있으면 공인될 수 있었지만 여성의 수는 어떤 영향력도 없었다. 유대 여성들에겐 안식일 날 회당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본당 예배는 남자들에게만 허락되어서 칸막이 뒤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안식일 날 집 밖에서 아기를 업거나 안는 것은 노동으로 간주되었기에 아기가 있던 여인들에겐 이조차 그림의 떡이었다. 여성에겐 토라를 낭독하는 일(Megil. 23a), 소리내어 식탁기도를 하는 일(T. Ber. 20b)도 허락되지 않았다. 여성이 유대교에서 가질 수 있는 장점이라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스 여성
 
그레코-로마 문화에서 여성들을 가장 심하게 구속한 문화는 그리스이다. 그리스 부모들은 자신의 딸들을 사춘기 이전에 결혼시켰다. 여자가 나이가 들면 처녀성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발견된 비석에 의하면 의학적으로 너무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여 해산 중 사망한 소녀들이 많았다. 그리스에서는 소년들은 7살이 되면 철학, 문학, 과학, 정치와 체육 등에 관한 교육을 받지만 평범한 소녀들은 공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리스 여성들의 삶은 창살 없는 감옥의 삶이었다. 여성들은 별궁에서 살았는데 그들의 숙소는 매우 비좁고 어두웠다. 그리스의 황금기로 불리는 B. C. 475~425년에 아테네의 여성에겐 얼굴을 창문이나 문 밖으로 보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여성이 남자보다 덕이 없으며 도덕에 관한 양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시민 계층의 여성들에겐 가족 이외의 외간남자와의 대화는 철저히 금지되었다.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 출신의 그리스 여인이 자신의 귀신들린 딸로 인해 남자인 예수와 심한 논쟁을 한 사실이 나온다(7:24-28). 이 사건은 그 여인이 얼마나 급박했는가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당시 통념을 깬 그 무엄하고 발칙한 여자(남자들의 입장에서)가 진정 용기 있고 신앙 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일부 철학자들은 남녀 평등에 대한 의외로 발전된 사상을 가졌으나 이는 철학에 머물렀고 사회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리스에서 여성은 나이를 불구하고 어린아이 취급을 받았으며 보호자되는 남성의 소유물이었다.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나, 그 법적 권리는 아버지나 남편과 같은 그 여성의 보호자가 소유했다.
 
Demosthenes는 그리스 사람은 즐거움을 위해서는 헤타이라이(고급 창녀), 나날의 육욕을 위해서 첩을, 그리고 적법한 아들을 얻고 충실한 가정부를 가지기 위해서 아내를 두었다고 말했다.
 
그리스 사회의 수많은 파티에는 일상적으로 동료란 의미의 헤타이라이라 불린 창녀들이 동반되었다. 이들은 당시 상류층이 아니면서도 유일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여성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여선생으로부터 노래, , 그리고 플룻을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들은 명석하고 유머 감각이 탁월한 어린 창녀들 중에서 발탁되었는데 엘리트 남성들을 접대하기 위해 철학을 배울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로마의 여성
 
로마의 소녀들은 14살이 되면 당시 풍습에 따라 결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결혼 전날 여신의 신전에 자신의 인형을 헌납하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며 생식력의 신인 프리아포스(Priapus)나 무투누수 투투누스(Mutunus Tutunus) 신상과 성행위를 해야 했고, 신상의 남근에 자신의 처녀막을 잃어야 했다.
 
로마의 여성들은 그리스 여성들에 비해 보다 자유로운 편이었다. 로마의 여성들은 그리스의 여성들보다 덜 격리되어 살았다. 실제로 장사를 할 수도 있었으며 정치적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 했고 남편을 따라 외출을 했고 사교 생활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처럼 전문적인 교양이 넘치는 고급 창녀 헤타이라이의 육성은 로마에서 불필요했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은 아버지, 남편, 아들의 순으로 보호자를 두어야 했는데 여성들은 재산을 팔고 살 때, 합법적 유언을 할 때, 이혼 시 보호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로마 사회에서 매춘은 매우 일상적인 것이었다. 일부 고급 창녀들은 청치가나 시인의 보호로 노후의 삶을 연명할 수 있었겠지만 평범한 창녀들은 나이가 들면 비참한 삶을 살았다. 로마에서 창녀를 돈을 버는 여인(meretrix)이라 부른 것은 아마 여자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거의 매춘에 제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리스의 창녀들은 음탕한 여자들이 아니었다. 매춘은 당시 가족이나 남편의 보호에서 제외된 여성들이 생존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성차별에 의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의 당연한 결과였다. 오늘날도 성차별이 심한 제3세계에서 이혼당한 여성, 부모로부터 버려지거나 팔려간 많은 소녀들이 생존을 위해 매춘을 해야 하는 실정과 마찬가지이다. 로마의 창녀들은 주로 노예들이었는데 전쟁포로보다는 약탈과 유괴의 희생자, 버려진 길거리의 소녀들이었다.
 
  
 
성차별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과 사도 바울의 대응
 
로마제국의 성차별은 극심한 성비율의 불균형이란 결과를 낳았다. 200년경 로마의 역사가 Dio Cassius는 로마제국에 여성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했다. 실지로 당시에 로마에는 남자 131명에 여자는 100명밖에 없었고 이탈리아, 소아시아, 북아프리카에는 남자 140명에 여자 100명이 존재했다. 델피에 있는 비문들을 조사한 결과 600여 가족 중 1명 이상의 딸을 기르고 있던 집은 6가족 밖에 안 되었다. 이는 로마인들의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해 여자 아기를 죽이는 풍습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에게 장애가 있거나 원치 않는 아기를 버리는 행동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래의 글은 한 로마인이 자신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가 아직까지 알렉산드리아에 있다는 것을 아시오. 그리고 만일 모두가 돌아가고 나만 알렉산드리아에 남게 되어도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아들에 대하여 잘 돌보기를 부탁하며 월급을 받는 대로 당신에게 부치리라.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아기를 낳는다면, 아들이면 놔두고 딸이면 버리시오. 당신이 나에게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말을 전했지만 어떻게 내가 당신을 잊겠소. 걱정 말기를 부탁하오(N. Lewis, Life in Egypt under Roman Rule, 1985, 54에서 인용).
 
  
또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거나 혹은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낙태 역시 많이 행해졌다. 낙태를 원하는 산모는 유산을 유도하기 위해 미량의 독약을 복용하거나 독을 자궁에 주입하여 태아를 죽였다. 그러나 독약의 부작용으로 혹은 죽은 태아를 밀어내지 못해 많은 산모들이 사망하였다. 낙태수술도 유행했는데 비누도 소독약도 항생제도 없던 시절이어서 의사가 갈고리를 산모의 뱃속에 넣어 태아를 끄집어내는 방법으로 행해진 낙태 시술은 많은 여성들의 생명을 단축시키거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런데 사회에서와는 달리 기독교 내에서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보다 훨씬 높았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안부를 전할 때 15명의 여성과 18명의 남성이 언급되었다. 이는 남성이 주로 지도자로 세워졌던 당시 풍습으로 보아서는 상당히 많은 여성이 지도자로 세워졌다고도 볼 수 있고, 또한 로마 교회의 다수가 여성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A. D. 313년 북아프리카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있을 때 Cirta 도시의 한 가정교회에는 16개의 남자 겉옷과 82개의 여자 겉옷, 그리고 47개의 여성용 슬리퍼가 발견됐다. 이는 분명히 기독교 교회에 여성의 수가 훨씬 많았다는 증거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기독교 안에서는 여성의 수가 압도적이었을까? 이는 기독교가 여성들에게도 권익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기독교는 낙태와 영아살해를 심각한 살인죄로 여겼다. 즉 뱃속의 태아나 영아의 생명을 전적으로 남자의 뜻에 의존해야 했던 불안함을 더 이상 가지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혼, 근친상간, 일부 다처제는 구약의 전통을 따라 혹독하게 비난했다.
  
 
교회가 그들에게 매력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조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혼이 만연한 당시 사회에서 부모의 결정에 따라 이방 여성들이 보통 12살 전후로 결혼한 반면 기독교 여성들은 대체로 당시 수준에서 만혼인 18세의 나이쯤에서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여권 신장에 있어 가장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었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사도 바울은 성적인 순결에 대하여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똑같이 엄격하게 요구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획기적인 풍습이었다. 기독교인이 된 남자에게는 성적 방탕함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풍습은 분명히 여성들이 기독교를 선호하게 만든 이유였다.
 
  
사도 바울은 또한 부부간의 정절을 강조하기 위해 재혼하거나 부인을 여럿 둔 사람을 교회의 감독 직분에서 제외시켰다(딤전 3:2). 그는 보다 평등한 부부 관계를 위해 권위적 가부장 제도를 사랑의 가부장 제도로 변화시켜 주었다(5:21-33). 이런 제도들은 기독교 여성에게 비기독교 여성들보다 훨씬 더 안정된 결혼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또한 기독교인 과부들은 이방인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이방 여인들은 과부가 되면 당시 사회적 풍습에 따라 서둘러 재혼해야 했다. 실제로 강력한 로마제국의 건설을 위해 인구 증가를 원하던 아우구스투스(Augustus)2년 내로 재혼하지 않는 과부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물론 재혼하면 모든 재산은 새로운 남편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주인을 섬겨야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재혼을 장려하지 않았을 뿐더러 과부의 정절을 높이 평했다(고전 7:8). 또한 교회는 가난한 과부를 돕는데 적극적이었다(비교, 딤전 5:16).
  
 
그리고 사도 바울은 소녀들이 처녀로 지낼 수 있었던 자유를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참조, 고전 7:26). 당시 처녀로 지낼 수 있는 자유는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었다. 남성에게 매이지 않은 삶을 허락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여성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통한 교육과 선교의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여성의 무대를 집안에서 사회로 확장시켜 주었다. 상거된 바와 같이 고대사회의 여성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인식 수준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여성에게 매우 개방적이었고 많은 자유와 권리를 되찾아 준 종교였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성들의 활발한 역할로 인해 교회는 더욱 성장했다.
 
바울 서신에서 성차별적이라고 가장 공격받는 부분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고린도전서 1434절부터 36절까지일 것이다. 이 본문을 읽을 때 바울이 여인들에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이나 지도자 역할을 금지시킨 것으로 사람들은 이해하지만 사실 이는 고린도 교회에서 적당하고 질서 있게(고전 14:40) 행해지지 못한 예언의 은사로 인해 발생한 특수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당시에는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서 공인된 종교로 인정되지 않는 디오니소스나 시벨레 제의, 델피의 피티아 제의, 시빌 제의에 참여했는데 이는 주로 황홀경을 통해 신과의 교류를 하던 무속적인 제의였다. 예를 들어 디오니소스 제의에서는 여성들이 모여 술이나 마약, 환각성 식물이나 연기 등의 도움으로 황홀경에 빠져 찢어지는 듯한 소리(ololygia)를 지르며 파괴적 행동을 하면서 음탕한 말과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리고 헝클어지고 뒤로 제쳐진 머리는 황홀경에 빠져 신과의 접촉을 하는데 필수적이었다. 이는 차별받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억압된 분노와 한을 풀어 나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런 문화가 고린도 교회에 영향을 주었는데 바울은 아마 이런 무속적인 영향이 강한 예언의 은사를 행하던 고린도 여성 지도자들의 행동을 통제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여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교의 열정 속에 바울은 여러 여성들에게 지도자적인 사명을 감당시켰다. 그는 뵈뵈 자매를 겐그리아 교회의 집사로 세웠다(16:1). 초대교회의 집사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교회 지도자였으며 가르치는 역할과 구제와 행정 일을 담당하였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안부를 전한 교회 지도자 중에는 브리스기와 마리아와 같은 여성들(16:3, 6)이 나온다. 여성들은 집 안에 갇혀서 사는 수동적인 삶에서 집사의 직분을 받아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기도 하고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사명 속에 바깥 삶을 체험하고 종교를 근거로 한 사회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바울은 당시의 페미니스트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른 초대교회는 분명히 진보적인 여권 신장의 장소였고 이를 통해 교회는 발전했다.
 
당시 사도 바울이 선교한 초대교회는 여권 신장에 있어 사회보다 훨씬 앞서갔다. 물론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권의 수준은 고대 사회보다 훨씬 발전하여서 초대교회가 보여 주었던 여성의 권익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그러나 여성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페미니즘과 초대교회의 정신을 본받아 남녀가 가장 평등한 사회가 될 때까지 현실을 고려한 지혜로운 방법을 통해 여권 신장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성서의 원리로 보건대 설사 사회에는 성차별이 있다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의 신앙 생활은 남성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성 위주의 설교자, 목회자 사이의 성차별, 전도사 사례비에 대한 성차별, 교인들의 사고 구조 속의 성차별, 직분이나 역할을 분담함에 있어 성적인 것이 기준이 되는 문제들은 이제 교회에서 점차 사라져야 한다. 이는 성서적이지 않고 사회에 모범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여권 신장의 가장 앞서가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아직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페미니스트 소리를 들을 때 진정한 성서적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18년 8월 31일 금요일

로마서 장별 정리_ 매일성경QT페이스북

로마서 장별 요약정리(2018)
 
로마서 1.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전하고 싶은 복음을 자세히 설명하는 편지를 씁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보시기에 불의를 따르며 진리를 막는 삶 즉 죄악 된 삶을 살기에 죄인입니다. 사람의행위는 심히 패역하며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이 멸망에서 벗어날 길을 마련하시고 이 길에 대한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소식이 곧 복음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믿는 자는 살 수 있는데 이는 이 복음 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얻는 방법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17). 하나님께서 마음이 심히 악한 인간들에게 크게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 벌 중 하나는 인간들이 악한 욕심대로 마음껏 행동하게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를 내동댕이치고 그 질서와는 거꾸로 살아갑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야 하는 데도,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 부끄러운 짓들을 서슴없이 행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는 도덕적으로 악하고 부끄러운 짓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사회적으로 악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악한 까닭은 자신들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개의치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악한 일들을 거침없이 행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어떤 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버리고 살도록 내버려두셨다고 말합니다(28).
 
로마서 2.
 
하나님은 누구에게든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다는 사실(6)을 풀어서 설명한 곳이 롬 2:7-10절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과 자기 뜻대로 살려는 사람입니다. 8절에서 당을 지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자기 욕망을 따라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여 자기 욕망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니 불의를 좇아가며 악을 행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심령에는 환난과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9).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남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이방인들을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악 됨은 못 본 체하고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시되 공의롭게 즉 각 사람이 행한 대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만 보고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음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24).
 
로마서 3.
 
사람은 누구나 하나도 예외 없이 악하며 죄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이 말씀하는 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싫어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사람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서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20).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이며 영광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은혜와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유익이 없습니다. 이들은 불행하게도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을 얻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기에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또한 이렇게 주시는 의로움은 차별이 없습니다(22).
 
로마서 4.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선행이나 업적을 세워서 하나님에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미치게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혈통적인 후손을 뜻함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을뿐더러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의 죄악 때문에 죽으셨으며 또 나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음을 믿는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24절과 25).
 
로마서 5.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누립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그분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고 이분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아니하며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9-11).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과, 새 인류를 시작하신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아담 때문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듯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생명이 임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것은 사람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은혜와 의의 선물임을 알려 줍니다(17).
 
로마서 6.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서 죽었기에 죄가 우리를 종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죄를 이길 능력을 갖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전처럼 불의(不義)의 병기(兵器)로 사용할 수도 있고, ()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 하느냐는 그리스도인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지체를 의를 위해 사용하여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합니다(19).
 
로마서 7.
 
그리스도인이 되면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해 죽은 자라는 뜻은, 죄를 행할 가능성이 없거나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은 자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듯이, 죄의 유혹에 반응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심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전에는 죄의 유혹에 자연스럽게 넘어가기에 갈등할 필요가 없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는 죄의 유혹을 이길 능력을 사용할 것인가 아닌가를 고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것은 이제껏 살아온 삶의 습관이지만, 이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바로 이 지점에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갈등이 매우 심하기에 사도 바울도 자신을 가리켜 곤고한 자라고 표현합니다(24).
 
로마서 8.
 
사도 바울은 육신 안에 있어 그 욕심을 따라 사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못 박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는 사실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시기 위함입니다(29).
 
로마서 9.
 
바울은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에 대해 가슴 아파 합니다(9:1-3).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택하심은 그 사람의 잘남이나 뛰어남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유대인이 아닌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구약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25절과 26).
 
로마서 10.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들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립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시인하며 그분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은혜가 구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를 자세히 말씀해 줍니다(9절과 10).
 
로마서 11.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 받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노력은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주시는 의로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남은 자 즉 믿음으로 은혜를 받는 자가 있었고,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거나 낭비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과 부르심에도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합니다(29).
 
로마서 12.
 
하나님의 은혜(자비)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에 힘쓰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12:2).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떠한 삶인지를 12장에서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특별히 서로 사랑함을 강조하며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악에게 이기는 방법은 내게 악을 행한 자에게 보복하거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대하는 것이기에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21).
 
로마서 13.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마디로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어떤 한 부분에서만 드러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 곧 모든 영역에서 다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로마서 12장부터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사는 삶은 사랑에 뿌리를 둔 삶이며, 주님 오심을 바라고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소망의 삶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위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엄히 말씀합니다(14).
 
로마서 14.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이며 기쁨으로 여기고 삽니다. 제멋대로 살며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害惡)을 끼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 사는 사람은 상당히 건전하고 귀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 는 사람은 이기적인 삶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를 주님의 것으로 삼아 주님을 위해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동일한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화평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목적입니다(9).
 
로마서 15.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 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인 이 믿음은, 단지 믿는 내용을 아는 지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믿는 바대로 행하는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는 또는 그런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졌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을 가졌다고 착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12장부터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주시는 위로를 얻으며 인내하며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4).
 
로마서 16.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게 보내는 이 위대한 편지를 마치면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매우 길게 나열합니다. 이들 가운데는 헬라 식 이름을 가진 자들 즉 이방인들도 있고, 유대인들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도 있고 관직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고 부유한 이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 다양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위해 함께 일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전하는 이 복음을 통하여 믿는 모든 이들의 신앙과 삶을 튼튼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2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