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 사람>
얼마 전 루터교회 목회자 연장 교육에서 박윤만 교수의 강의를 매우 인상 깊게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첫 번째 주제가 “초기 기독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라는 문제였습니다. ‘기독교’, ‘교회’라는 말이 너무 익숙해서 이 질문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첫 질문이 저에겐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정말 1세기엔 예수 따름이 스스로 뭐라고 불렀을까, 그리고 밖에선 또 어떻게 이름했을까.
그 답이야 예수님 만나봐야 알겠지만, 강의를 맡았던 박윤만 교수는 성서의 다양한 구절(행 9:2; 19:9, 23; 22:4; 24:14)을 근거로 초기 기독교는 “그 길”, 또는 “나사렛 이단” 같은 말로 불렸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다”라고 선언한 구절,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길”(도)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름을 지을 땐 아무렇게나 짓지 않지요. 그 이름에 소망을 담는 건 상식입니다. 1세기 교인들이 스스로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건, 자신들이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의식이 담겨 있다고 봐야합니다.
마가복음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길을 중심으로, 이 길이 도대체 무엇인지 설명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일단, 막 1:1절은 마가복음이 교회 공동체 예배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운율을 통해 감지 할 수 있습니다. 한글 번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인데, 헬라어는 “아르케 투 에방겔리우 예수 크리스투 후이우 데우”라고 읽습니다. 여기, ‘우~’라는 음이 반복되는데, 고대인들에게 이 운율의 반복은 경건한 분위기를 깊게하는 예전적 음운이예요.
그다음 2절에 저 유명한 이사야의 예언이 나오지요. 여기서 마가복음서 기자는 구약을 인용하면서 ‘과거에서 현재로’라는 시간의 길을 닦아 놓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길을 준비하리라..., 길을 곧게하라”라는 인용구를 살포시 넣어둡니다. 이로써 마가복음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길을 밝히는 의도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특별한 것은 그 길의 출발지가 ‘광야’라는 점입니다.
5절을 봅시다.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이 다” 광야로 나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요? 잘 정비된 지역, 사람들의 밀도가 높은 대도시이지요. 여기서 복음서 기자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살짝 숨겨 놓은 것 같아요. ‘유대,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로 정작 말고 싶은 단어는 ‘성전’이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살지요. 그곳에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야말로 유대인의 삶을 지탱하는 근간이고,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유대인들의 통념으로 봐서는 성전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시온의 대로’라는 탄탄한 대로를 거쳐 갑니다. 그런 대로를 걸어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기존의 통념이지요.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를 뒤집어 버립니다. 대도시, 성전, 탄탄대로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와 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대 땅의 사람들, 예루살렘에 모여 살던 도시인들,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예측할 수 없는 황량한 땅, 광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이동 경로가 완전히 바뀌어버렸지요. 길 없는 곳으로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광야라는 곳은 족장과 예언자들의 땅이기는 하지만, 이 광야에 그 어떤 나라가 세워진 적도 없고, 안전이 보장된 체계가 세워진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과거의 역사는 있지만, 제도와 틀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복음은 도시 사람들을 불러 이곳으로 인도한 다음, 진리의 길을 걷게 만듭니다. 물론 모두가 이 길 걷기에 동의하고 그 길을 걸어간 건 아닙니다. 고향 가족들과 가진 자들은 이 길을 거부했고, 제자들은 이 길에 올라섰다 탈선하기를 반복합니다.
중심지 예루살렘을 비우고, 광야에서, 그리고 외곽 갈릴리에서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광야 한 가운데서 예수를 만나 눈을 뜨기 시작하지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맹인이 시력 회복하고 “모든 것을 밝히 보는” 구절일 겁니다(8:22-26). 새롭게 눈을 뜬 사람에게 이 길이 어떤 길인지, 그 방향이 어디인지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그 길의 종착지는 무덤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길이 끊어진 어두운 무덤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며 복음서를 마무리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무덤 안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길인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부활’, ‘십자가 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교회력의 새해는 마가의 해입니다. 그래서 이번 해 교회 주제를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분명히 오늘 우리의 상황도 코로나 때문에 암흑 같은 상황입니다. 무언가 계획하거나 준비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으니 대비할 수 없는 무덤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탈선하더라도 일단 일어나 걸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골머리 쓸 것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강점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고유의 것, 우리 교회 말고는 다른 곳에선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나눌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예수의 길 위에 있기 기도하며, 서로를 돌아보는 것, 즉 복음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가장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이들의 지혜로운 나눔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 중앙루터교회 2021 정책 당회 설교 막 1:1-5 ‘길을 걷는 사람들’
최주훈 목사 (2020.11.20.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