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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이해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고난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저 유대인들을 향해 분개하거나, 가룟 유다의 죽음을 말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불평하고 뒷말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걸 두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의 수난을 이야기한다면 차라리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대하여‘라고 제목 붙이는 게 더 낫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여러 유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고난을 머리에 한 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금식을 하거나 긴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유익을 준다는 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무 십자가나 십자가 그림을 집 안에 걸어놓거나 십자가 목걸처럼 작은 십자가 장신구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그 십자가가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들을 불행을 막아내는 방패나 부적으로 사용합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고난을 엉뚱하게 묵상한 탓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에 오르실 때 예수님을 따르며 슬퍼했던 여인들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죄 없는 분이 그런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두고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슬퍼해야만 바른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책망하시면서, “차라리 자기 자신과 그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들을 위해서 울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까지 말한 방법들, 즉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잘못만 들추거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지켜준다고만 말하거나, 죄 없는 사람이 왜 고난 받냐며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제아무리 십자가를 많이 이야기하고, 장시간 기도하고, 설교를 수천 번 듣는다 해도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그 심장이 공포로 얼어붙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죄인을 너무나도 가혹하고 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거침 없은 진노와 심판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생명 값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너무 큽니다. 이사야 53:8에 나오는 "그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하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 이토록 고난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죄인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우리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그제사 알게 됩
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심령은 참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죽는 것과 같은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공포로 얼어붙고, 공포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6-37에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고 외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포에 떨면서 사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떨며 부르짖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손을 꿰뚫은 못을 보면서, 그 못이 바로 우리의 잘못된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머리를 찌르고 있는 가시관을 보면서 그 가시가 바로 예수님을 피흘리게 만드는 우리의 악한 생각들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시 한 개가 예수님의 피부를 찌르고 피 흘리게 하는 것을 볼 때, 그 장면에서 우리는 수천 개의 가시가 나 자신을 찔러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그 가시들이 영원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훨씬 더 엄청난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손과 발을 관통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고, 더 많은 못에 박히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을 진동하는 울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순교를 보고서 너희가 어떤 운명에 던져져야 했는지 깨달으라"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울려 퍼져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묵상의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악한 현실의 직시하고, 거기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고난을 참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몸과 영혼에 그토록 무서운 형벌을 받으셨다면,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묵상은 그 어떤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깨달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고난을 알고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강팍하고 굳은 마음을 스스로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이 바로 나의 것임을 이생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옥에서라도 그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생에서 경험하지 않는다면 지옥에서 당하는 길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공포에 떨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모든 것을 직접 겪게 될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이것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심어주시지 않는 한, 그의 고난을 스스로 깊이 있게 묵상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로 나의 죄에 대한 형벌로 경험케 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사모하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알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사색하는 이성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주어집니다.


III.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위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니거나,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거나, 교회에서 어떤 공로를 쌓아 죄를 없애보려는 잘못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케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여러분에게서 떼어 그리스도께로 맡기고, 그분이 나의 죄를 담당하고 해결하셨다는 진리만 신뢰하길 바랍니다.
이사야 53:6에서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24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셨으며, 바울은 고린도후서 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들을 의지하여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그가 부활하심을 통해 죄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이 부활로 인해 우리의 두려움이 비로소 사라집니다.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을 믿으면, 죄에 대한 두려움은 부활의 능력에 의해 삼켜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이런 죄 용서의 능력을 믿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이 믿음을 위해 삶의 자세를 고쳐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공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과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마음을 통과하여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까지 더 높이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처럼 여러분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향해 사랑으로 복종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요한복음 3:16에 있는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말씀 위에서 우리의 신앙과 신뢰는 확고한 것이 되고,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에 대한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죄의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은,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받아야 하는 고난의 모본이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당하고 있다면, 그 슬픔과 아픔이 그리스도의 가시와 못들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길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떠나기 싫은 것을 떠나고, 어떤 것을 억울하게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결박당하고 사로잡히셔서 이리저리 끌려다니셨는지를 기억해보길 권합니다.
속에서 또다시 죄가 고개를 치켜들때 예수님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교만이 여러분을 공격할 때 여러분을 사랑하신 주님이 살인자들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얼마나 조롱과 수치를 당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부정함과 욕망이 고개를 들면, 그리스도의 연약한 살이 찢기고 창에 관통되고 구타당하실 때 그 고통이 어떠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증오와 시기가 여러분을 부추기면서 복수하라고 외칠 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여러분과 또 모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시련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시련이 여러분의 몸과 영혼을 괴롭힌다면, 마음을 굳건히 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 내 주님께서 염려와 슬픔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를 흘리셨는데, 이 정도쯤이야 나도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죽음의 고통과 투쟁을 하셨는데, 종인 내가 발 뻗고 편히 누워있기만 바란다면, 나는 게으르고 부끄러운 종이 아니겠는가!” 이런 묵상의 방법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과 나쁜 습관들에 대항할 힘과 위로를 발견하고,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것이며, 고난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삶과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들이, 그분을 참되게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나타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마음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성한 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진실한 행동과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히브리서 12:3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안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일이 아주 드문 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잡한 설명으로 바꾸어버렸고, 행사로 바꾸어버렸고, 장식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입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성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금요일 설교 (출처: 루터선집 10:203-211; 영어원서 Luther's Works 42:7-14)
*덧)
1. 중앙루터교회 성금요일 저녁예배 설교는 루터의 이 원고를 낭독합니다.
2. 퍼가셔도 됩니다.

* 출처 최주훈 목사님 페이스북

2020년 8월 19일 수요일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_ 이정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는 개인의 안전과 위생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그렇다고 더럽다는 말도 아니다). 삶에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만큼만 적당히 조심하고 적당히 씻는 사람이라 처음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질 때만 해도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확진자 수가 20명 언저리 넘어갈 때. 뉴스는 연일 코로나19였고, 주변 사람들이 철저하게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도 '메르스 때도 그렇고 대충 넘어갔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먹고 마셔 댔다. 다시 말하지만 부끄럽다.


이 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때에는 신천지 관련하여 집단감염이 대규모로 터진 2월이었다. 대규모 감염 뉴스를 들은 날은 우리 교회의 청년부 수련회를 출발하기 전날이었고, 나는 이 수련회를 취소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사실 대규모 감염이 터지기 전부터도 수련회 취소에 대한 말들은 나왔지만, 열심히 준비한 청년들이 낙심할 것이 염려되기도 해서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대구에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 이후에는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 서둘러서 여러 회의를 열었고, 그날로 수련회 취소를 결정했다. 그 주에는 주일예배를 축소해서 드렸고, 그다음 주부터 지금까지 나는 주일에 사랑하는 성도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후 많은 분이, 한국교회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태 앞에서 여러 주장과 논의를 쏟아 냈다. 특히 주일 공예배 회집 방법과 연관하여 엄청난 논의가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쏟아지는 듯하다. 사실 필자는 이러한 담론들에 보탬이 될 정도로 사태를 잘 알지 못하기에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다만, 현실 목회자로서 실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행동 강령 몇 가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는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실천하고 있고, 또 실천하려 하는 몇 가지 행동들이다. 가능한 한 교파와 교단을 막론하고, 공예배와 교회 형태에 대한 입장이 어떻든지 대체로 동의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공동체 구성원들 간 자원 흐르게 하기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에도 아주 많은 성도가 경제적으로 급속히 어려워졌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교회 상황이 그럴 것이다. 이 와중에 관찰한 현상이 하나 있다. 이 상황에서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지 않은(심지어 이 상황 때문에 더 형편이 좋아진) 성도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그들의 열망은 전례 없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자신들만 경제적으로 평탄하다는 사실에 심지어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고, 가진 자원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달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예로, 분당우리교회에서 진행하는 미자립교회 월세 대납 운동에 20억 넘는 거액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보라. 목회자들은 여기서 신실한 중개인이 될 수 있다. 설교와 광고 시간을 이용하여 교회에 연약한 사람들을 돕도록 호소하고, 방법을 마련해 줄 수 있다. 두 가지만 예를 들겠다.

- 구제 지정 헌금

성도들끼리 교제가 활발했다면, 성도들은 이미 같은 구역이나 소그룹 내의 어려워진 형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서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받는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두렵기도 할 것이고, 또한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 6:3) 해야 하는 원칙에 위배될까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의기소침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돕고자 하는 성도들이 자신이 구제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직접 전달해 달라는 헌금을 교회에 하고, 교회가 누가 헌금했는지 밝히지 않고 대상자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으로 헌금을 만들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원할 경우) 헌금한 사람에게 투명하게 밝히면 된다. 성도들 모두에게 이 시스템은 잘 알려져 있고, 제직들에 대한 신뢰가 높은 교회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동참하는 것을 볼 것이다.

- 마스크 나눔

마스크 대란이긴 하지만, 성도들 중에는 많은 마스크를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정죄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은 마스크 대란 뉴스를 보며 찔림을 받는다. 교회는 이들에게서 마스크를 기부받아 없는 집에(그리고 지역사회에) 나누어 줄 수 있다. 실제로 필자는 마스크를 기부받아 배달하러 다니기도 했다. 마스크가 쌓여 있는 가정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챙길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쁨을 누릴 것이고, 마스크를 받은 사람들 역시 돌봄을 받고 있다는 확신에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목회자는 이 사이를 중개함으로 굉장한 보람을 누릴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동체 구성원들 간 교제 흐르게 하기

코로나19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공동체 내의 활발한 교제가 없었던 교회는 정말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전에 교회 내에서 교제와 사랑을 나누어 본 적은 없고 그냥 예배하기 위한 종교 기관으로서만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온라인으로 예배하면 되는데 왜 내가 예배당까지 가야 하지?'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공동체 내에서 사랑과 교제를 누리고 있던 사람들은 보지 못하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 시기를 힘들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 시기에 더 많은 전화 심방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위의 첫째 방안을 행하려고 하면 자연히 전화 심방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지, 어느 집에 마스크가 없는지 알지 못하면 도울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전화로 심방할 때, 서로 사정을 돌아볼 수 있도록 연락하라고 권면할 수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교회 성도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착하다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가 성도들이 잘 순종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서로를 돕고 살피라"고 권면하면 즐거이 따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목회자들의 권면을 따르지 않는 많은 경우는, 따지고 보면 동기 부여를 제대로 해 주지 못했든지, 권면의 내용이 터무니없기 때문일 수 있다. 서로를 섬기라고 권면하는 것은 성경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수준 높은 동기부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간에 연락이 별로 없었던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어색한(?) 통화라도 나누어 보도록 권면해 주라. 특히 교회 내의 약자들을 세심히 살피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세속 사회 향해 자비 흐르게 하기

개신교는 천주교나 불교처럼 모두를 관할하는 기구가 없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주일에 문을 닫고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당분간 한국교회가 세속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아무리 "우리 교회는 달라요!"라고 말해 봤자 말이다). 그렇다면 그냥 세속 사회 평가를 너무 의식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다. 지역사회에 마스크를 나누는 일도 할 수 있고, 어려운 분들을 찾아 도울 수도 있다. 두 가지만 더 제안해 보려고 한다.

- 공무원들에게 따뜻하게 협조하기

물론 정부로서는 교회가 안 모이는 것이 최선이겠고, 또한 많은 교회가 동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 모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겠다면, 최소한 방역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정부에 할 수 있는 한 협조하는 것이 옳다. 하나 확실한 것은, 최소한 일선 공무원들이 '흠, 이번 기회에 기독교를 박해해야겠어. 예배를 금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만일 더 윗선의 정치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틀렸다고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그냥 그분들은 '빨리 이 코로나19 사태 끝났으면 원이 없겠다' 하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주말에 누군들 돌아다니며 일하고 싶겠는가. 따뜻한 웃음으로 대해 주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작은 선물(예컨대 작은 음료수라도)이라도 내밀라. 그리고 꼭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말자.

- 복지 기관들 돌아보기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복지 기관에 기부를 많이 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시기에 가장 먼저 지출을 제한하는 돈 역시 기부금이다. 따라서 복지 기관은 지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 전체가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기부금이 끊긴 상황에 대해 하소연할 곳도 없을 것이다. 구제 헌금으로 걷은 돈을 약간이라도 전달한다면, 그리고 작게나마 연락을 통해 사랑을 전한다면 감사를 표현할 것이다.

여담으로, 이러한 상황은 선교사님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님이 한국교회가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 상황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번 주 선교비를 보내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는 전화를 받고서도 아무 데도 말하지 못한다. 사실 이들은 미자립 교회보다도 더 약자인 경우가 많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보내 드릴 돈이 없을 수 있다. 따뜻한 전화와 기도 제목 요청이라도 해 준다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예배 형태 바뀌면서 생기는 약자들 챙기기

특히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교회는 이 부분을 세심하게 챙겨야 한다. 교회 내의 어르신들은 온라인으로 예배를 송출해도 보시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분들은 누르면 바로 볼 수 있는 링크를 전달해 드리거나, 그것도 힘들면 누군가 도와줄 사람들을 붙여 주어야 한다. 예배할 마음이 없으셨다면 모르거니와, 예배하고 싶은데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 예배할 수 없게 되면 대단히 소외당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역시 전화로 세심하게 심방하며 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챙겨 드린다면 쉽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신경 써야 하는 분들이 있다. 가족 중 믿는 사람이 자기 혼자밖에 없는 분들이다. 청년들 중에도 이런 분이 많고, 특히 자녀와 배우자 모두가 신자가 아닌데 자신만 신자인 경우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가족끼리 모여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혼자 방에 숨어서 몰래 핸드폰으로 예배를 시청해야 하는 경우도 그나마 나은 상황이다. 자기 방이 따로 있지도 않고, 어디 나갈 곳도 없는 분들은 온라인 예배도 그림의 떡이다. 이런 분들 중 원하는 분들은 방역상 아주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고 극소수가 모여서 예배하도록 배려해 줄 수도 있고, 그것도 어렵다면 연락을 지속하며 목양적인 배려를 받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


다섯째,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설교하기

이러한 사태에서 가장 지혜롭지 않은 방식의 설교는, 정부나 특정 단체를 비난하며 공격하고 자신을(그리고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예컨대 "정부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정부는 ~을 하고 있습니다!"라든지, "지금 모여서 예배하지 않는 저들은 ~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는 "지금 모여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는 메시지들이다. 물론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이 사태 때문에 교회의 본질과 예배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질까 봐 조바심이 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시지들은 "나는 의롭고 저들은 악하다"는 식으로만 들리기 쉽다. 성도들은 결국 "나는 이런 좋은 교회를 다니고 있어! 저런 나쁜 교회들과는 다르지!" 하며 자기 의에 빠지든지, "나는 설교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저 설교자는 왜 저렇게 교조적이지?" 하며 반감만 품게 되기 쉽다(덩달아 무의미한 죄책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고 싶어 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는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이 정당화되는지, 또는 이러한 상황까지 왔는데도 꼭 모여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원리도 궁금해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은 따로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과연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짧은 지면에서 신정론에 관한 논의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교파나 교단마다, 혹은 설교자 개인마다 신정론에 관한 견해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그분의 섭리는 선하다는 것.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신다는 것. 때로 우리 눈으로 볼 때는 나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고통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합의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답이 아닌지는 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건 답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답이라면 왜 하나님 자신이 고통으로 뛰어드셨겠는가? 왜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겪으시며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겠는가?

그분은 고통을 안 주시는 하나님도 아니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 버려 두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섭리와 사랑. 은혜를 사랑 어린 마음과 눈물로 전하라. 정말 성도들은 위로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가 고난 가운데서도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 힘을 공급할 것이다.

세속 언론이 교회를 호의적으로 언급해 줄 일도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호의적으로 보도해 줄 만한 일을 많이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냥 억울해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낫다. 최소한 우리의 선행을 받는 사람들은 안다. 혹여 그들이 몰라 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보신다. 이 위기는 우리가 은혜를 행하는 연습을 할 기회이다. 교회가 코로나19를 전염시키는 원흉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 억울하거나 괴롭다면, 은혜를 전염시킬 수 있도록 힘을 내 보자. 특별히 지역 곳곳에서 교회를 섬기느라 분투하는 모든 목회자가 은혜 안에 거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힘내세요!

이정규 / 시광교회 담임목사, <야근하는 당신에게>(좋은씨앗), <새가족반>(복있는사람) 저자

[출처: 뉴스앤조이]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

2020년 5월 19일 화요일

‘5·18민주화운동 제40주년 기념 서울행사’ 기독교 예배 기도문

‘5·18민주화운동 제40주년 기념 서울행사’

기독교 예배 기도문

2020년 5월 18일, 윤환철

산 자의 하나님, 오늘 우리는 40년 전, 1980년 5월, 광주와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반인륜 범죄의 희생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 자유와 정의를 지키고 목숨을, 젊은 세월을 빼앗겼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우리 공동체에 부끄러움을 가르쳤고, 입을 열어서 자유와 정의를 표현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광주를 알지 못하는 이들도 가족과 건강과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40년이 지나도록 회개하지 않은 학살자와 그들의 패거리들과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 공동체의 수치이면서, 탈취한 권력으로도 세상을 짜 맞출 수 있다고 믿는 독사의 자식들을 배출합니다. 2019년에도 망언과 망동을 일삼은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이완영이 아직도 이 나라의 국회의원입니다.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무능한 것을 통회합니다. 무고한 죽음을 밝히는 데도, 가해자를 다뤄 정의를 세우는 데도 무능하니, 같은 일을 또 당합니다. 불의한 자들이 권력 집단이 되어 거꾸로 ‘정의’를 들먹일 때, 우리의 무능을 주님이 조롱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 편에 서지 않은 것이 바로 무능이었습니다. 도둑과 강도가 부귀를 나눠주리라는 망상이 우리 무리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범죄자를 편들고 살인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하나님께 반역한 죄악을 고백합니다.

광주민중항쟁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상처를 헤집는 망발은 우리 교회와 목회자들의 입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었던 무리들이 기막히게도 주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두려움 속에서 구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큰 죄악들을 당대에 심판하셔서 불의한 혀를 멈추게 하시고, 무고한 피를 신원하여 주소서.

양심에 화인을 맞은 학살자들의 질긴 목숨이 이어지는 동안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엄위한 음성을 하루 종일 듣게 하소서. “혹시라도 그들이 죽기 전에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 애끓는 어미들의 심정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맡겨주신 시공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 교회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불의한 희생을 못견디는 성정을 표현하게 하소서. 의로운 희생을 기리지 않고 조롱을 방치하는 것이 곧 불의의 대유행을 부르며, 피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그들의 어미와 누이와 형제들을 주님이 위로하여 주소서.

무리의 멸시와 외면 속에 돌아가신 주님,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2018년 6월 25일 월요일

기도란 무엇인가요?

- 기도란 무엇인가요?
 
하나님과 진심어린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인 동시에 우리의 의무입니다. 믿음 가운데 드리는 기도엔 영과 물질의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참조: 93/96
 
- ‘하나님의 명령이며 의무라는 게 무슨 말인가요?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은 거룩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위급한 모든 순간에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곧 기도입니다.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참조: 8:5-13
 
- 기도에 약속된 영적인 복이란 무슨 말인가요?
 
기도할 때 영적인 복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 피조물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 죄를 용서하시는 성자 그리스도의 칭의, 그리고 우리를 깨닫게 하시며 치료하며 도우시는 성령의 거룩한 인도가 기도 가운데 임한다는 뜻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의심 없이 기도하는 자에게 이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십니다.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8:2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 기도할 때 약속된 물질의 복이란 무엇인가요?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부족함 없이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때 부자 돼서 혼자 떵떵거리며 살라고 그런 복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물질의 복을 주시는 이유는 언제나 우리 삶 속에서 그분의 이름이 드높아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기도 네 번째 간구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26:39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언제 어디서 기도해야 하나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식사 시간과 잠자리에 들고 일어날 때는 꼭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쁠 때나 슬플 때, 특별한 일이 있을 때도 역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장소는 교회건 집이건 직장이건 길을 가건 가릴 필요 없습니다. 모든 곳이 기도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꼭 자녀의 손을 잡고 하루 한 번 기도하길 바랍니다.
 
63:6-7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하나요?
 
우리 자신과 이웃,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피조세계와 자연 환경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딤전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어떤 말로 기도해야 하나요?
 
보통 기도 마지막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붙여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 구절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자기 속에 있는 마음을 외마디 탄식으로 해도 되고, 그 마음을 성경구절이나 시편을 엮어서 해도 되고, 찬송가나 기도 책을 들고 기도해도 됩니다. 기도에서 어떤 말을 할지, 그리고 길고 짧고도 역시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거짓 없이 진심으로 하는 게 중요합니다.
 
1:5-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6: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7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 모든 기도 중에 어떤 기도가 가장 뛰어난 기도인가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주기도).
 
*6:9-13, 11:2-4
 
- 주기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시작하는 말과 일곱 개의 간구 그리고 끝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주기도의 시작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이 우리의 참 아버지이고 우리는 그분의 참 자녀임을 믿으라고 권유하십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아이가 사랑하는 부모에게 하듯,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 작업 중 <신앙의 대화: 루터의 소교리문답 해설 편역>, III 주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