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선교의 첫 결실
조선 선교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미 남장로회 외지선교회는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조선 선교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인 입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조선 선교에 열망을 가진 청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섭리하신 뜻이었습니다.
미 남장로회는 그리스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는데, 그리스 정부 당국이 남장로교 선교활동을 방해하는 바람에 부득이 그리스 선교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북장로회 소속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인 존 T. 언더우드가 2만 5천 달러, 언더우드 선교사도 500달러를 헌금하여 조선 선교를 위해 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남장로회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는 7명의 남녀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들이 바로 테이트와 그의 누이 메리 테이트, 리니 데이비스, 레이놀즈 부부 그리고 전킨 부부였습니다. 존슨이 일곱 명으로 구성된 선교단에 들지 못하게 된 것은 그가 이미 한 달 전 조선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조선의 선교사 후원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1892년 9월 7일 테이트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 레이놀즈와 전킨 부부 등 7인의 선발대는 서부로 가는 관문인 세인트루이스에 모였습니다, 남장로회 외지선교 실행위원회가 주관하는 파송예배를 드리기 위해섭니다. 센트럴장로교회와 에비뉴장로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마친 그들은 힘차게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들이 떠나는 선교의 장도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하시기를 많은 사람들이 염원했습니다. 이들이 이후에 조선 선교를 위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고 생명까지 바쳐가며 뿌린 복음의 씨앗은 오늘날 한국의 호남지방에서 엄청난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호남의 모든 교회들 뿐 아니라 그들의 미래인 오늘날의 우리들 또한 박수를 치며 당시 그들의 장도를 환영하면서 그들에게 진 선교의 빚을 어찌 다 갚을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조선에 들어올 무렵 마침 주미 워싱톤 초대 한국공사관 이채연(李菜淵) 서기관 부부가 귀국하게 되어 이들은 서로 만나게 됩니다. 특히 데이비스는 이 부인과 사귀게 되어 함께 오게 되어 1892년 10월 18일 다른 이들 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인과의 사귐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낯선 땅에서의 선교 활동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그 부부도 결국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채연은 귀국 후 전우국방판(電郵局幇判))이 되었다가 1894년(고종31년)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거쳐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이 되어 개화정책 수립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독립협회 창립에도 참가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는 조선의 개화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부인과 친했던 리니 데이비스는 버지니아주 아빙돈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자주 가난한 자나 병든 자들을 돌보는 봉사 일을 하였고, 그러는 동안 해외 선교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데이비스는 처음엔 아프리카 선교를 생각하였지만 앞서 소개한 것처럼 조선 선교의 강연을 듣고 난 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조선으로 떠날 무렵에 그녀의 어머니는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지체 말고 조선으로 떠날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데이비스는 서울에 도착한지 9일 만에 어머니의 소천소식을 듣게 되어 슬픔에 빠져 오열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조선 전도가 막 시작된 터였고 너무나 바쁜 나머지 어머니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조선에 들어온 1년 동안 1,885명의 사람들과 80여 곳의 가정을 전도하였습니다. 서양여인들을 처음 본 조선의 여인들이 흥미를 가지고 찾아오면 그녀들은 서양인의 살림을 소개해 주고 성경과 찬송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조선 여인들의 입에서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라는 찬송이 힘차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데이비스는 군산에 내려와서도 부녀들과 아이들에게 찬송을 가르쳐 아이들이 돌아다니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예수 사랑하심은>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한 북장로교회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의 부인 애니 로리 아담스(Annie Laurie Adams Baird 안애리 1864-1916. 6. 9.)가 번역한 찬송입니다. 본래 애니는 언어학자이지만 한국어와 한국음악에 조예가 깊어 많은 찬송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하였습니다. 찬송 <인애하신 구세주여>와 <멀리 멀리 갔더니> 도 애니의 번역 찬송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은>을 잠깐 소개하자면, 이 곡은 1860년에 발표된 찬송으로 본래 안나 바틀렛 워너와 그녀의 여동생 수잔이 함께 쓴 『넓고 넓은 세상』이란 소설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이 소설에서 병약했던 조니는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에 주일학교 교사인 린덴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합니다. 린덴은 요한복음 15장 9절을 바탕으로 “주님이 날 사랑하십니다. 성경 말씀이 네게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어리고 약한 이들 주님께 속하였으니 이들은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라는 노래를 불러 줍니다. 조니는 이 노래를 들으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데이비스가 가르쳐 당시 우리 아이들이 부르고 다닌 <예수사랑하심은>의 가사는 이러합니다.
쥬님날 사랑함을 셩경으로 내가 아오
보배 피 흘님으로 두려온 마음 업시하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 셩경으로 내가 아오
“예수씨 날 사랑하오”라고 힘차게 찬송을 불렀을 그때 모습을 상상해 보면 싱긋이 미소가 지어지고 콧등이 시큰거리는 감동이 솟아납니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먼저 조선으로 떠난 이후 6명의 선교사들은 일본 요코하마에 머물면서 주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은퇴한 헵번 목사에게 언더우드 목사가 쓴 조선어 문법책과 사전을 받아 공부하며 조선에 관한 기초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인을 만나면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정도의 인사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조선으로 출발했습니다.
1892년 11월 3일, 마침내 그들은 그처럼 간절히 기도하며 가고자 했던 조선 땅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그들은 서울로 올라가 마펫, 그래함 리, 빈튼 선교사 같은 조선 선교의 고참 선교사들을 방문하여 인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여호와 하나님의 진실로 선하심과 구원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선으로 인도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명예를 감사합니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서대문 인근에 있던 전 독일 공사의 집이였던 기와집을 1,500달러에 구입하였고, 실내를 서양식으로 개조했습니다. 이 집에서는 레이놀즈 부부와 전킨 부부 그리고 데이비스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테이트 남매도 함께 기거하게 되면서 숙식을 공동으로 해결하니 사람들은 미국 남부인들이 모여 산다고 하여 이곳을 딕시(Dixie, 미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국의 통칭)라고 불렀습니다.
1895년 서울에서 조선어를 익히고 조선의 문화와 생활을 체험한 전킨 선교사 부부와 드류 의료선교사는 4명의 선원들을 태운 목조선(木造船)을 전세 내어 여러 가지 약품과 책 그리고 다른 선교 용품들을 잔뜩 실은 다음 인천을 출발하여 177km의 바닷길을 여행하게 됩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앞서 드류가 1차 방문 했던 ‘군산’이였습니다. 군산은 보통 바닷길로 4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 이들은 무려 11일이 지나 도착했습니다.
어찌나 바다가 험하고 파도가 드높은지 배안으로 바닷물이 쉴 새 없이 들어와 이들은 물 퍼내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또 안개가 자욱하여 앞을 바라보아도 알 길이 없었는데, 사공도 길을 잃었는지 이리저리 노를 저으며 한참을 헤매다가 간신히 군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녹초가 되어 버렸지요. 그러나 군산에 도착하니 다시금 선교의 열정이 솟아올랐고, 그들은 기대로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군산에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산의 3월 날씨는 한 겨울처럼 추웠고, 찬바람은 사정없이 옷 속을 파고들어와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가량 될 것 같은 그런 날씨였습니다. 당시 군산은 아직 개항 이전이라 여기 저기 100여 호의 초가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전형적인 어촌이었습니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더럽고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길가 집들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술에 취해 여기저기에서 도박판을 벌려 소리를 지르다가 도박판이 싸움판으로 바뀌곤 하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 있어 굿하는 소리도 여기저기에서 들려 왔습니다. 또 당시 서양인들에 대한 감정이 나쁜 사람들이 많아 돌팔매질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호감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아 이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전킨과 드류 의료선교사는 선창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배처소와 진료소를 차리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당시 군산 진영이 있던 수덕산 기슭에 있는 초가집 두 채를 50달러에 구입했습니다. 당시 환률 시세로는 상당히 비싸게 샀다고 하겠습니다. 드류 선교사의 집은 1917년 당시의 우체국이 있던 언덕의 기슭에 있었고 전킨의 집은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전킨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고 드류 선교사들은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두 선교사를 찾아와 말씀도 듣고 치료도 받을 수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이 넘쳐나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산에서 한 달여 동안 생활하면서 집도 구하고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안면도 익힌 전킨과 드류 선교사는 가족들을 데리러 서울로 갔습니다. 당시 조선의 역사적 상황은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동학혁명의 영향으로 시국이 어수선 하던 차에 1894년 고종은 김홍집, 박영효 등을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오랜 세월 이어오던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차별 없이 관리를 뽑도록 하였습니다. 고종은 자신이 먼저 머리를 자른 뒤 전국적으로 단발령을 실시했으며, 근대식 학교를 세우고 도량형을 통일시켰습니다. 새로운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추려는 여러 가지 제도도 새롭게 단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많은 백성의 저항을 야기해 사회가 어수선해졌고 더욱이 이 일은 일본의 적극적인 사주와 지도에 의한 일이었기에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1년 가까이 청국과 일본의 전쟁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청일 강화조약이 성립되자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지위가 확보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수백 년 동안 이어오던 청의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가 실질적으로 종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노골적인 간섭과 침략의 야욕은 더욱 악랄해졌으니 마침내 1895년 8월 20일 경복궁 옥호루에 있는 명성왕후의 처소에까지 일본의 낭인들이 들어와 무참히 왕비를 살해한 천인공노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일본 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은 자객들의 소행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민심은 흉흉하다 못해 살벌한 상태로 악화되었으니, 서울에 와 있던 외국인들은 매우 당황스럽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킨과 드류 선교사도 쉽사리 군산으로 내려올 수 없어 차일피일 날짜를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1896년 4월 두 선교사 가족들은 인천에서 씨 드래곤이라는 증기선을 세내어 군산으로 내려가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증기선은 갑자기 고장이 나는 바람에 수리에 들어가 버렸고, 할 수 없이 그들은 작은 일본식 배 하나를 전세 냈습니다. 그 배는 매우 작았습니다. 이삿짐들은 작은 화물칸에 쑤셔 넣고 겨우 네 명의 어른들이 앉을 정도의 작은 방안에 쭈그리고 앉는 것으로 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겪은 그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1896년 4월 5일 안전하게 군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전킨은 이때의 여행을 “닭장 속의 4일”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좁고 어려운 배에서의 생활을 기록했습니다.
이때로부터 거슬러 11년 전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아펜셀러 두 선교사가 4월 5일 조선 선교를 위해 인천항에 도착하였는데 전킨과 드류 선교사 부부 역시 4월 5일 군산에 도착했으니 그 날짜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많은 교회사가들이 군산에 교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이야기할 때 약간의 이견들이 있습니다. 1892년 미 남장로회 7인의 선교사들이 입국한 1892년부터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레이놀즈와 드류 선교사가 1894년 호남선교 답사를 하기 위해 군산에 와서 전도를 하였으니 이때를 군산 교회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전킨과 드류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군산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온 1895년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현재 군산 개복교회는 1894년을, 구암교회는 1892년을 교회의 기원으로 삼고 역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산교회라고 공식적으로 불린 때는 1896년이었습니다. 교회의 시작을 복음을 전할 때부터로 하느냐 아니면 교회의 이름을 정하고 예배를 드릴 때부터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좀 더 교회사학적 검토와 합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1896년, 드디어 군산 땅에 여호와 닛시의 깃발이 휘날리는 교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군산진교회 또는 군창교회로 불렸고 후에 군산교회라 불린 교회가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바야흐로 복음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낯설고 물 설은 이국의 한 어촌에서 젊은 선교사 부부들이 생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집 주변에는 그늘이 될 만한 나무 한그루도 없이 삭막했으며, 사리 때가 되면 바닷물이 범람하여 마당과 길이 질퍽하여 걸어 다니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선교부에서 배를 보내온다고 하지만 말이 정기선이지 선장 마음대로이니 서울 선교부에서 보내는 생활용품이나 선교용품들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애로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민들이 쌀, 계란, 채소, 생선 등을 선물로 갖다 주어 주민들과의 친밀감은 오히려 더 높아졌습니다.
1897년 5월 전킨 선교사는 군산에서의 감격스런 예배를 아래와 같이 편지에 썼습니다.
주말 예배에 등록한 교인이 40명입니다. 이중의 반은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방은 종이 문 막이에 의하여 두 개의 방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여자들이 한 방을, 남자들이 다른 방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닥은 볏짚으로 짜서 만든 자리를 깔았습니다. … 출석을 부르고 결석자를 점검하여 그들을 아는 사람들에게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예배자들은 큰 목소리로 찬송을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평상시 큰 목소리로 책을 읽던 습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좀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주일학교 성경공부를 한 시간 하였는데 『그리스도인 준수자』란 책을 번역하여 한 장씩 공부를 시켰습니다. … 주일학교가 끝나면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정기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제목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설교 후에 헌금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의 남자가 헌금을 세니 1달러 6센트, 엽전이 무려 530전이였습니다. 이 헌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며 돈이 남으면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저축해 나중에 쓰일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군산의 첫 교인들이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달러는 선교사들이 낸 헌금일 것이고 당시 아직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피선교지의 40명 정도 되는 교인들이 530전이나 헌금을 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도 해외에 나가 처음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헌금은 고사하고 주민들에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차비까지 준다는 합니다. 군산의 첫 번째 교인들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에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욱더 이 땅에 풍요로운 축복으로 내려 주시리라는 아브라함의 제단을 쌓았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킨과 드류 선교사는 군산에서 복음전도와 의료선교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주님들의 경계를 해소하고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두 선교사는 매일 아침 9시부터 10시 반까지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였고 그 외 시간에는 환자들을 정성껏 치료하였습니다. 어떤 날은 50여명의 환자들이 몰려와 진료를 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서툰 조선어였지만 한사람씩 붙잡고 기도하며 친절하게 치료해주는 두 선교사의 정성에 감동하여 주민들은 답례로 생선, 김, 달걀 등의 식료품을 가져와 고마운 마음을 표하였습니다. 이때 이들의 따뜻한 마음에 김봉래, 송영도, 차일선 등이 최초의 원입교인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군산 선교의 첫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1866년 6월에 기록한 전킨 선교사의 편지에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교회에 핵심이 되는 몇몇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중 세 사람이 세례를 받고 싶다고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비 신자 반에서 교육을 시키었습니다. 우리는 매주 주일 오후에 그들을 만나서 회개에 관하여, 믿음에 관하여, 기도에 관하여, 안식일에 관하여, 세례에 관하여, 성만찬에 관하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또 십계명과 교회법에 대해서도 가르쳐 공부를 끝냈습니다. … 오랜 시간 진흙바닥을 수리한 후 드류 박사는 다시 금주부터 일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환자들을 살피는 평일에는 성 조지 십자가 깃대를 그리고 병원을 열지 않는 주일에는 성조기 깃대를 세우려 하였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매 주일 오후 세 사람에게 세례 예비교육을 시킨 다음 1896년 7월 20일 세례식을 거행하니 이들은 호남의 최초 세례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성찬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10월 4일에는 송영도의 딸 송성장이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이 역시 호남 최초의 일입니다. 계속해서 차인원, 주원선, 문화숙, 이자유, 박시길 등 20여 명의 학습교인을 세웠으니 옥토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놀랍게 자라 이제 바야흐로 수많은 열매를 맺을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1896년 10월에 제15차 선교연례회의가 서울에서 있었는데 여기서 호남선교부를 군산보다는 나주로 옮기는 것이 유리하다는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킨 선교사와 드류 선교사는 이 안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두 선교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군산을 포기할 수 없다고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마침내 1년간 유예기간을 두고 다시 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주 지방은 유진 벨 선교사와 헤리슨 선교사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나주 지방 유생들의 강한 반대로 나주 선교부는 철수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군산선교부의 문제가 일단락되자 두 선교사와 군산의 교인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전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어떤 이는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토요일에 군산에 와서 하룻밤을 묵은 후 주일 오후에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주일 예배와 성경공부에 질병으로 인한 결석자가 있으면 드류 선교사가 곧바로 가정방문을 하여 환자를 돌보니 군산교회는 그 수가 날마다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군산교회가 활발히 일어나 전주보다 성장하게 되자 군산 선교부 폐지론이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전킨 선교사의 선교 반경은 점점 넓어졌습니다. 그가 군산 인근 주변의 촌락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니, 만지산, 남차문, 송지도 등에 정기적인 예배 처소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지산은 오늘의 지경이고, 남차문은 남전리, 송지도는 김제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병호 │ 목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NCCK 회장, 군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군산 나운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