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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이해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고난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저 유대인들을 향해 분개하거나, 가룟 유다의 죽음을 말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불평하고 뒷말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걸 두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의 수난을 이야기한다면 차라리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대하여‘라고 제목 붙이는 게 더 낫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여러 유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고난을 머리에 한 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금식을 하거나 긴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유익을 준다는 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무 십자가나 십자가 그림을 집 안에 걸어놓거나 십자가 목걸처럼 작은 십자가 장신구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그 십자가가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들을 불행을 막아내는 방패나 부적으로 사용합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고난을 엉뚱하게 묵상한 탓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에 오르실 때 예수님을 따르며 슬퍼했던 여인들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죄 없는 분이 그런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두고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슬퍼해야만 바른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책망하시면서, “차라리 자기 자신과 그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들을 위해서 울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까지 말한 방법들, 즉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잘못만 들추거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지켜준다고만 말하거나, 죄 없는 사람이 왜 고난 받냐며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제아무리 십자가를 많이 이야기하고, 장시간 기도하고, 설교를 수천 번 듣는다 해도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그 심장이 공포로 얼어붙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죄인을 너무나도 가혹하고 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거침 없은 진노와 심판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생명 값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너무 큽니다. 이사야 53:8에 나오는 "그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하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 이토록 고난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죄인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우리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그제사 알게 됩
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심령은 참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죽는 것과 같은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공포로 얼어붙고, 공포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6-37에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고 외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포에 떨면서 사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떨며 부르짖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손을 꿰뚫은 못을 보면서, 그 못이 바로 우리의 잘못된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머리를 찌르고 있는 가시관을 보면서 그 가시가 바로 예수님을 피흘리게 만드는 우리의 악한 생각들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시 한 개가 예수님의 피부를 찌르고 피 흘리게 하는 것을 볼 때, 그 장면에서 우리는 수천 개의 가시가 나 자신을 찔러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그 가시들이 영원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훨씬 더 엄청난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손과 발을 관통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고, 더 많은 못에 박히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을 진동하는 울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순교를 보고서 너희가 어떤 운명에 던져져야 했는지 깨달으라"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울려 퍼져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묵상의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악한 현실의 직시하고, 거기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고난을 참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몸과 영혼에 그토록 무서운 형벌을 받으셨다면,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묵상은 그 어떤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깨달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고난을 알고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강팍하고 굳은 마음을 스스로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이 바로 나의 것임을 이생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옥에서라도 그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생에서 경험하지 않는다면 지옥에서 당하는 길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공포에 떨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모든 것을 직접 겪게 될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이것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심어주시지 않는 한, 그의 고난을 스스로 깊이 있게 묵상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로 나의 죄에 대한 형벌로 경험케 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사모하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알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사색하는 이성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주어집니다.


III.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위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니거나,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거나, 교회에서 어떤 공로를 쌓아 죄를 없애보려는 잘못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케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여러분에게서 떼어 그리스도께로 맡기고, 그분이 나의 죄를 담당하고 해결하셨다는 진리만 신뢰하길 바랍니다.
이사야 53:6에서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24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셨으며, 바울은 고린도후서 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들을 의지하여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그가 부활하심을 통해 죄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이 부활로 인해 우리의 두려움이 비로소 사라집니다.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을 믿으면, 죄에 대한 두려움은 부활의 능력에 의해 삼켜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이런 죄 용서의 능력을 믿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이 믿음을 위해 삶의 자세를 고쳐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공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과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마음을 통과하여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까지 더 높이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처럼 여러분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향해 사랑으로 복종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요한복음 3:16에 있는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말씀 위에서 우리의 신앙과 신뢰는 확고한 것이 되고,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에 대한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죄의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은,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받아야 하는 고난의 모본이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당하고 있다면, 그 슬픔과 아픔이 그리스도의 가시와 못들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길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떠나기 싫은 것을 떠나고, 어떤 것을 억울하게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결박당하고 사로잡히셔서 이리저리 끌려다니셨는지를 기억해보길 권합니다.
속에서 또다시 죄가 고개를 치켜들때 예수님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교만이 여러분을 공격할 때 여러분을 사랑하신 주님이 살인자들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얼마나 조롱과 수치를 당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부정함과 욕망이 고개를 들면, 그리스도의 연약한 살이 찢기고 창에 관통되고 구타당하실 때 그 고통이 어떠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증오와 시기가 여러분을 부추기면서 복수하라고 외칠 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여러분과 또 모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시련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시련이 여러분의 몸과 영혼을 괴롭힌다면, 마음을 굳건히 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 내 주님께서 염려와 슬픔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를 흘리셨는데, 이 정도쯤이야 나도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죽음의 고통과 투쟁을 하셨는데, 종인 내가 발 뻗고 편히 누워있기만 바란다면, 나는 게으르고 부끄러운 종이 아니겠는가!” 이런 묵상의 방법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과 나쁜 습관들에 대항할 힘과 위로를 발견하고,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것이며, 고난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삶과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들이, 그분을 참되게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나타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마음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성한 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진실한 행동과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히브리서 12:3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안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일이 아주 드문 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잡한 설명으로 바꾸어버렸고, 행사로 바꾸어버렸고, 장식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입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성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금요일 설교 (출처: 루터선집 10:203-211; 영어원서 Luther's Works 42:7-14)
*덧)
1. 중앙루터교회 성금요일 저녁예배 설교는 루터의 이 원고를 낭독합니다.
2. 퍼가셔도 됩니다.

* 출처 최주훈 목사님 페이스북

2019년 11월 8일 금요일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 최주훈 역/주/해제

*본문 발췌: 마르틴 루터의 95개 논제, 최주훈 역//해제 (서울: 감은사, 2019)에서
 
<사면증의 효력에 관한 논제>(95개 논제)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이를 밝히려는 열망으로,
 
비텐베르크의 문학사이며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임명받은 교수 마르틴 루터가 이하의 논제들을 공개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은 서신으로 토론하길 요청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1.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4:17] 명령하셨을 때, 그 뜻은 신자의 모든 삶이 돌아서는 것이다.
 
2. 이 말씀은 사제가 집례 하는 고해성사, 즉 죄의 고백과 보속으로 이해될 수 없다.
 
3. 또한 이 말씀은 마음을 돌려세우는 내적 참회만 뜻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 그런 뜻이 아니다. 마음의 회개가 육의 정욕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회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4. 사람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미워하는 한, 죄에 대한 징벌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마음의 회개이다. 우리가 하늘나라가기까지 이 회개는 계속되어야 한다.
 
5. 교황은 자신의 판결 혹은 교회법의 판결에 따라 부과한 형벌 외에 어떤 죄도 사면할 권세나 의지를 갖지 못한다.
 
6. 교황의 사면권은 제한적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했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인정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이 사면의 권리를 무시하는 사람의 죄도 그대로 남는다.
 
7.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워진 사제에게 하나님 대하듯 순종하지 않고, 그를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 죄도 용서치 않는다.
 
8. 참회의 규정은 오직 산 자에게만 적용되며, 죽은 자에겐 적용될 수 없다.
 
9. 그러므로 성령은, 교황이 가진 권세가 죽음이나 어떤 곤궁한 사례에선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선하게 역사하신다.
 
10.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은, 죽어 연옥에 있는 자들에게 교회법이 정한 형벌을 적용하는 사제들의 행동이다.
 
11. 교회법을 위반하여 생긴 죄벌을, 연옥의 형벌로 바꿔치기 하는 가라지는 확실히 주교들이 잠자는 동안 심겨진 것이다[13:25].
 
12. 예로부터 참회에 부과되는 보속은 사제의 사죄선언 후가 아니라 이전 단계였다.
 
13. 임종하는 사람은 그의 죽음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는 교회법에 대해서도 죽은 것이므로 교회법이 부과한 징계에서도 완전히 풀려난다.
 
14. 영적인 강건함과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어가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공포를 초래할 것이다. 온전함을 채우지 못한 만큼 그에 따른 공포도 커진다.
 
15. 다른 것은 말하지 않더라도, 연옥의 고통은 이 두려움과 공포만으로도 가득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이 두려움과 공포는 절망과 맞닿아 있다.
 
16. 지옥, 연옥, 하늘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지옥은 절망이고, 연옥은 절망에 이르는 길이며, 하늘은 거기서 확실히 건져진 상태이다.
 
17. 연옥에 있는 영들은 공포가 감소하고 사랑이 증가되어야 마땅하다.
 
18. 연옥에 있는 영들은 결코 공로를 얻을 수 없으며, 사랑도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은 그 어떤 이성의 근거와 성서로도 증명할 수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19. 비록 우리가 모두 각자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 한들, 연옥의 영혼들이 자기 구원에 대해 최소한의 것이라도 확신하고 있는지 증명할 길은 없어 보인다.
 
20. 그러므로 교황이 모든 죄를 완전히 사면한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말 그대로 모든 죄를 사면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교회가 부과한 징계에 한하여 사면한다는 뜻일 뿐이다.
 
21. 그 때문에, 교황의 사면증이 모든 죄의 형벌을 풀고,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의 말은 모두 엉터리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의 영들의 어떤 형벌도 사면할 수 없다. 교회법을 위반한 형벌은 살아있는 동안 치렀어야 할 일이다.
 
23. 만일 모든 죄벌(罪罰)에 대한 완전한 사면이 누군가에게 허락된다면, 이는 가장 완전한 사람에게만, 즉 매우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이다.
 
24.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죄의 모든 형벌에서 해방된다는 무제한적이고 허울 좋은 약속에 속고 있는 것이다.
 
25. 모든 주교와 사제도 자신에게 맡겨진 관구와 교구에서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세를 동일하게 행사할 수 있다.
 
26. 교황이 연옥에 있는 영들의 형벌을 사면하기 위해 열쇠의 권위 대신 중보기도를 사용한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사실 교황의 권세는 연옥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27. [연보궤 안에 넣은] 돈이 상자 속에서 울리는 순간, 연옥에 있던 영혼이 빠져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교설을 외치는 것이다.
 
28. [연보궤 안에 넣은] 돈이 상자 속에서 울리는 순간, 이득과 탐욕은 증가한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교회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르는 것이다.
 
29. 성 세베리누스(St. Severinus)과 파샤시우스(St. Paschasius)에 관한 전승이 알려주듯, 연옥에 있는 모든 영이 거기서 구원 받기를 원하는지 아닌지, 그 누가 알겠는가!
 
30. 자기가 행한 회개의 진실성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완전한 사면을 받았다고 어떻게 확증할 수 있겠는가!
 
31. 진실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자가 드물 듯, 순전한 마음으로 면죄부를 사는 사람도 드물다. 분명히 드물다.
 
32. 누구든지 면죄부를 받고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렇게 가르치는 저들의 선생과 함께 영원히 저주 받을지어다!
 
33. 교황의 사면증을 가리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케 하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선물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특별히 경계해야 한다.
 
34. 왜냐하면 이것이 전해주는 은혜는 단지 인간이 정한 형벌, 즉 성례전적인 보속을 요구하는 형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35. 참으로 비기독교적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돈을 주고 연옥의 영혼을 구해 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특별증서(confessionalia)를 구입하면 더 이상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설교하는 것이다.
 
36. 참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황의 사면증이 없어도 죄와 형벌로부터 완전한 사면을 누린다.
 
37.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나 죽으나 가릴 것 없이 그리스도와 교회가 소유한 모든 유익을 함께 누린다. 하나님께선 이 모든 것을 사면증과 상관없이 주셨다.
 
38. 그러나 교황의 공적인 사면 선언과 징계에 대한 관여를 결코 무시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 그것은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사면을 선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39. 사면증의 유익과 참된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한 자리에서 가르치는 것은 학식 있는 신학자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40. 참으로 회개하는 죄인은 죄에 따른 형벌을 달게 받는다. 반면에 수많은 사면증들은 형벌에 대해 둔감하게 만들고, 형벌을 멀리하게 만들며, 적어도 이런 일에 대한 빌미를 제공한다.
 
41. 사도적 사면권을 설교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보다 나은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히 가르쳐야한다.
 
42.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선한 사랑의 실천을 사면증 구입과 비교하는 일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며, 이것은 교황의 의도와 상관없다.
 
43.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궁핍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은 사면증을 구입하는 것과 비할 바 없이 선한 일이다.
 
44. 왜냐하면 선행을 통해 사랑은 성장하고, 그 일을 통해 인간은 더욱 선한 사람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면증으로는 선하게 될 수 없고, 오직 형벌에서 벗어날 뿐이다.
 
45.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궁핍한 자를 지나치면서 사면증을 구입하는 사람은, 교황의 사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들이는 것이다.
 
46.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재산이 풍족한 사람이 아니라면, 가족을 위해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고, 사면증 구입에 낭비하면 안 된다.
 
47.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사면증 구입 여부는 선택사항이지 강제할 일이 아니다.
 
48.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교황이 사면증을 발행하면서 진실로 원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져오는 돈이 아니라 더욱 경건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49.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교황의 사면증은 사람들이 그것에 신뢰를 두지 않을 때만 유용하다. 사면증에 매달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어질 정도라면 그것은 매우 해로운 것이다.
 
50.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만일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의 갈취(喝取) 행위들을 안다면, 그는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 베드로 성당을 올려 세우기보다 차라리 불태워 잿더미가 되는 것을 바랄 것이다.
 
51.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만일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이 갈취한 돈에 대해서 안다면, 당연히 베드로 성전을 팔든지 아니면 교황이 자신의 재산을 청산해서라도 면죄부를 구입한 사람들의 돈을 반환해 줄 것이다.
 
52. 교황이 발행한 사면증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은 한낱 부질없는 짓이다. 판매 위탁자나, 아니, 교황이 그 증서에 대해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53. 하나님의 말씀 대신 면죄부 선전을 하도록 교회마다 명령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리스도와 교황의 원수다.
 
54. 사면증에 대한 말을 하나님 말씀의 분량과 같거나 더 할애하는 것은 설교시간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55. 교황의 견해는 틀림없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교황이 발행한 사면증(indulgentia)은 매우 작은 일이어서 행진하는데 종 하나만 필요하고 한 번의 예배로 충분한 반면, 복음은 백 개의 종을 울리며 백 번 행진하고 백 번 예배해야 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
 
56. 교황이 발행하는 사면증은 교회의 보화라는 교설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 충분히 논의된 적도, 알려진 적도 없다.
 
57. 실제로 그것을 교회의 보화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설교자들이 거저 내어주기보다 그저 거둬 들이기만하기 때문이다.
 
58. 그 보화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진실로 교회의 보화란 교황의 도움 없이도 속사람에겐 은혜를, 겉사람에겐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가져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59. 성 라우렌티우스는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보화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그때 그 자리의 의미를 살려 그렇게 말한 것이다.
 
60.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교회가 얻게 된 열쇠의 권능은 이런 종류의 보화라고 할 수 있다.
 
61. 왜냐하면, 죄벌에 대한 사면과 소송의 해결은 교황의 권세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62.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다루는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러나 이 보화는 가장 멸시 받는다. 복음은 먼저 된 자를 나중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64. 반면에 사면의 보화는 지극히 환영받는다. 이는 나중 된 자를 먼저 된 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65. 그러므로 복음의 보화는 그물과 같아서, 예로부터 그 그물로 사람들을 풍성히 건져 올렸다.
 
66. 이에 비해 사면의 보화는 그물과 같아서, 지금 그 그물로 돈을 풍성히 낚아 올린다.
 
67. 설교자들이 큰 은총이라고 외쳐대는 사면증이 재물 축적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한 실제로 그렇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68.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자비에 견주어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티끌보다 못한 것이다.
 
69. 주교와 교구 사제들은 사도계승의 권위를 부여받은 대사(大赦, indulgentia) 대리인들을 온갖 경의를 다해 영접할 직무상 의무가 있다.
 
70.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의무는 저들이 위임받은 사항 대신 자기들의 희망사항을 선전하지 않는지 눈과 귀를 열어 감시하는 것이다.
 
71. 사도적 진리인 사면권을 반대하며 말하는 자는 파문 받고 저주 받을지어다!
 
72. 그러나 면죄부 설교자의 뻔뻔함과 오만한 말을 경계하고 반대하는 자에겐 복 있을지어다!
 
73. 사면증 판매를 방해하며 손쓰는 자에게 교황의 파문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옳다.
 
74. 그러나 그보다 더 옳은 일은, 사면증을 구실 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가리며 방해하는 자를 교황이 파문하고 출교시키는 일이다.
 
75. 불가능한 말이지만, 교황의 사면증엔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하더라도 그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정신 나간 짓이다.
 
76.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정반대다. 교황의 사면증은 제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를 지울 수 없다.
 
77. ‘지금 베드로가 교황으로 온다하더라도 면죄부보다 더 큰 은총을 줄 수 없다고 선전하는데, 그것이야말로 베드로와 교황에 대한 모독이다.
 
78. 우리는 그런 말에 경멸한다. 현재 교황과 모든 교황들은 그보다 더 큰 은총, 즉 고린도전서 12장에 선포된 것처럼, 복음과 여러 능력 그리고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79. 교황의 팔에 장식으로 새겨진 십자가 무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효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80. 이 같은 교설이 군중들에게 버젓이 설교되는 것을 묵인하는 주교와 교구 사제, 그리고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져야한다.
 
81. 이런 뻔뻔스런 면죄부 설교 때문에 일반 신자들조차 교황을 모독하고 신랄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상황에 제 아무리 박식한 사람이라 해도 교황의 명예를 지켜주기란 쉽지 않다.
 
82.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가장 거룩한 사랑을 베푼다는 교황이 왜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이는 영혼의 가장 궁극적인 요청이고 신자들의 가장 정당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황은 지금 대성당 건축이라는 매우 하찮은 이유 때문에 수많은 영혼들을 돈으로 팔아넘기고 있다.
 
83. 또 이렇게 묻는다. 연옥에서 죗값을 치른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인데, 무슨 이유로 죽은 자를 위해 매번 돈을 받고 위령미사와 기도를 대신 드려주는 것인가? 그것이 불의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런 목적의 헌금을 되돌려주거나 그 관습을 없애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84. 또 이렇게 묻는다. 돈만 지불하면 불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 된 영혼도 하나님의 친구요 경건한 영혼이 되도록 구해내면서, 참으로 경건하고 사랑스런 영혼들은 구해내지 않는다. 이들의 절실한 간청을 알고도 동일한 사랑으로 구해내지 않는다면, 이 어찌 해괴한 하나님과 교황의 자비란 말인가?
 
85. 또 이렇게 묻는다.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이미 오래전에 폐기되고 없어졌는데, 어찌하여 그 효력이 살아 있는 것처럼 사면증을 판매하는가?
 
86. 또 이렇게 묻는다. 오늘날 교황은 부자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부자인데, 왜 베드로 성당을 자기 돈이 아닌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건축하는가?
 
87. 또 이렇게 묻는다. 완전한 통회로 완전한 사면을 받고 영적 보화에 참여할 권리를 얻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교황은 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도대체 무엇을 사면하고, 또 어떤 보화를 주겠다는 것인가?
 
88. 또 이렇게 묻는다. 지금 교황은 하루에 딱 한 번만 죄를 용서하고 보화를 나누어주는데, 하루에 백번 용서하고 백번 나누어준다면 교회는 얼마나 더 큰 복을 얻겠는가?
 
89. 또 이렇게 묻는다. 교황의 사면증은 돈이 아니라 사죄를 통한 영혼 구원에 목적이 있다고 하면서, 왜 예로부터 발행된 사면증서들과 사면 선언들의 효력을 모조리 정지시키는가? 예전 사면과 지금 사면은 효력이 다르단 말인가?
 
90. 일반 신자들이 던지는 예리하고 불편한 질문들을 정당한 이유 없이 권력으로 누르고 입막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황의 반대자들에겐 비웃음거리를, 그리스도인들에겐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91. 그러므로 교황의 바른 정신과 뜻에 따라 사면이 선포되었다면, 이 같은 질문들은 쉽게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니, ‘사면증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92. 평안이 없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평안하다, 평안하다외치는 모든 선지자들이여, 물러갈지어다!
 
93. 십자가 없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십자가, 십자가외치는 모든 선지자들이여, 복 있을지어다!
 
94.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고난과 죽음과 지옥까지 통과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9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안전하게 보장된 평화보다는 수많은 시련을 통해 하늘에 들어간다는 것을 더욱 굳건히 신뢰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