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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1.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이해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고난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저 유대인들을 향해 분개하거나, 가룟 유다의 죽음을 말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불평하고 뒷말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걸 두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의 수난을 이야기한다면 차라리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대하여‘라고 제목 붙이는 게 더 낫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만 해도 우리에게 여러 유익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고난을 머리에 한 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금식을 하거나 긴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유익을 준다는 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무 십자가나 십자가 그림을 집 안에 걸어놓거나 십자가 목걸처럼 작은 십자가 장신구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그 십자가가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들을 불행을 막아내는 방패나 부적으로 사용합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고난을 엉뚱하게 묵상한 탓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해골 언덕에 오르실 때 예수님을 따르며 슬퍼했던 여인들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죄 없는 분이 그런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두고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십자가 사건을 슬퍼해야만 바른 묵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책망하시면서, “차라리 자기 자신과 그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들을 위해서 울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까지 말한 방법들, 즉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잘못만 들추거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지켜준다고만 말하거나, 죄 없는 사람이 왜 고난 받냐며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제아무리 십자가를 많이 이야기하고, 장시간 기도하고, 설교를 수천 번 듣는다 해도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II.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이해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그 심장이 공포로 얼어붙게 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죄인을 너무나도 가혹하고 엄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거침 없은 진노와 심판은, 죄인을 구하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생명 값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너무 큽니다. 이사야 53:8에 나오는 "그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였다"하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 이토록 고난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죄인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우리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그제사 알게 됩
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을 때, 우리 자신의 심령은 참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죽는 것과 같은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공포로 얼어붙고, 공포는 더 깊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36-37에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고 외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공포에 떨면서 사도들을 향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떨며 부르짖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손을 꿰뚫은 못을 보면서, 그 못이 바로 우리의 잘못된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머리를 찌르고 있는 가시관을 보면서 그 가시가 바로 예수님을 피흘리게 만드는 우리의 악한 생각들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시 한 개가 예수님의 피부를 찌르고 피 흘리게 하는 것을 볼 때, 그 장면에서 우리는 수천 개의 가시가 나 자신을 찔러야 마땅하다는 것, 그리고 그 가시들이 영원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훨씬 더 엄청난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손과 발을 관통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고, 더 많은 못에 박히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그 말씀이 우리 마음을 진동하는 울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순교를 보고서 너희가 어떤 운명에 던져져야 했는지 깨달으라"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울려 퍼져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묵상의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악한 현실의 직시하고, 거기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고난을 참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때문에 몸과 영혼에 그토록 무서운 형벌을 받으셨다면, 그것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묵상은 그 어떤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깨달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고난을 알고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강팍하고 굳은 마음을 스스로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떨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이 바로 나의 것임을 이생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옥에서라도 그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생에서 경험하지 않는다면 지옥에서 당하는 길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공포에 떨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모든 것을 직접 겪게 될 것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이것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을 바르게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마음 가운데 심어주시지 않는 한, 그의 고난을 스스로 깊이 있게 묵상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로 나의 죄에 대한 형벌로 경험케 하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사모하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알게 되는 것은 여러분의 사색하는 이성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주어집니다.


III.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위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를 향한 형벌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쫓아다니거나,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거나, 교회에서 어떤 공로를 쌓아 죄를 없애보려는 잘못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케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여러분에게서 떼어 그리스도께로 맡기고, 그분이 나의 죄를 담당하고 해결하셨다는 진리만 신뢰하길 바랍니다.
이사야 53:6에서는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24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셨으며, 바울은 고린도후서 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경 말씀들을 의지하여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깁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죄를 담당하셨고, 그가 부활하심을 통해 죄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이 부활로 인해 우리의 두려움이 비로소 사라집니다.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을 믿으면, 죄에 대한 두려움은 부활의 능력에 의해 삼켜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 가운데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이 이런 죄 용서의 능력을 믿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믿음의 문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이 믿음을 위해 삶의 자세를 고쳐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공포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제는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과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마음을 통과하여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까지 더 높이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처럼 여러분을 사랑하실 수 없으셨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을 향해 사랑으로 복종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요한복음 3:16에 있는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말씀 위에서 우리의 신앙과 신뢰는 확고한 것이 되고,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이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세워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죄에 대한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죄의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은,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받아야 하는 고난의 모본이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서 슬픔과 아픔을 당하고 있다면, 그 슬픔과 아픔이 그리스도의 가시와 못들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길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떠나기 싫은 것을 떠나고, 어떤 것을 억울하게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결박당하고 사로잡히셔서 이리저리 끌려다니셨는지를 기억해보길 권합니다.
속에서 또다시 죄가 고개를 치켜들때 예수님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교만이 여러분을 공격할 때 여러분을 사랑하신 주님이 살인자들 속에서 십자가에 달려 얼마나 조롱과 수치를 당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길 바랍니다. 내 안에서 부정함과 욕망이 고개를 들면, 그리스도의 연약한 살이 찢기고 창에 관통되고 구타당하실 때 그 고통이 어떠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증오와 시기가 여러분을 부추기면서 복수하라고 외칠 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많은 눈물과 부르짖음으로 여러분과 또 모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는지 기억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시련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시련이 여러분의 몸과 영혼을 괴롭힌다면, 마음을 굳건히 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 내 주님께서 염려와 슬픔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과 피를 흘리셨는데, 이 정도쯤이야 나도 견뎌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이 죽음의 고통과 투쟁을 하셨는데, 종인 내가 발 뻗고 편히 누워있기만 바란다면, 나는 게으르고 부끄러운 종이 아니겠는가!” 이런 묵상의 방법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악과 나쁜 습관들에 대항할 힘과 위로를 발견하고,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것이며, 고난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삶과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들이, 그분을 참되게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나타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마음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성한 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진실한 행동과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히브리서 12:3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1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 안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르게 묵상하는 일이 아주 드문 게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조잡한 설명으로 바꾸어버렸고, 행사로 바꾸어버렸고, 장식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입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성금요일 설교) 마르틴 루터의 성금요일 설교 (출처: 루터선집 10:203-211; 영어원서 Luther's Works 42:7-14)
*덧)
1. 중앙루터교회 성금요일 저녁예배 설교는 루터의 이 원고를 낭독합니다.
2. 퍼가셔도 됩니다.

* 출처 최주훈 목사님 페이스북

2020년 8월 19일 수요일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_ 이정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는 개인의 안전과 위생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그렇다고 더럽다는 말도 아니다). 삶에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만큼만 적당히 조심하고 적당히 씻는 사람이라 처음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질 때만 해도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확진자 수가 20명 언저리 넘어갈 때. 뉴스는 연일 코로나19였고, 주변 사람들이 철저하게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도 '메르스 때도 그렇고 대충 넘어갔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먹고 마셔 댔다. 다시 말하지만 부끄럽다.


이 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때에는 신천지 관련하여 집단감염이 대규모로 터진 2월이었다. 대규모 감염 뉴스를 들은 날은 우리 교회의 청년부 수련회를 출발하기 전날이었고, 나는 이 수련회를 취소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사실 대규모 감염이 터지기 전부터도 수련회 취소에 대한 말들은 나왔지만, 열심히 준비한 청년들이 낙심할 것이 염려되기도 해서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대구에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 이후에는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 서둘러서 여러 회의를 열었고, 그날로 수련회 취소를 결정했다. 그 주에는 주일예배를 축소해서 드렸고, 그다음 주부터 지금까지 나는 주일에 사랑하는 성도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후 많은 분이, 한국교회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태 앞에서 여러 주장과 논의를 쏟아 냈다. 특히 주일 공예배 회집 방법과 연관하여 엄청난 논의가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쏟아지는 듯하다. 사실 필자는 이러한 담론들에 보탬이 될 정도로 사태를 잘 알지 못하기에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다만, 현실 목회자로서 실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행동 강령 몇 가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는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실천하고 있고, 또 실천하려 하는 몇 가지 행동들이다. 가능한 한 교파와 교단을 막론하고, 공예배와 교회 형태에 대한 입장이 어떻든지 대체로 동의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공동체 구성원들 간 자원 흐르게 하기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에도 아주 많은 성도가 경제적으로 급속히 어려워졌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교회 상황이 그럴 것이다. 이 와중에 관찰한 현상이 하나 있다. 이 상황에서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지 않은(심지어 이 상황 때문에 더 형편이 좋아진) 성도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그들의 열망은 전례 없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자신들만 경제적으로 평탄하다는 사실에 심지어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고, 가진 자원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달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예로, 분당우리교회에서 진행하는 미자립교회 월세 대납 운동에 20억 넘는 거액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보라. 목회자들은 여기서 신실한 중개인이 될 수 있다. 설교와 광고 시간을 이용하여 교회에 연약한 사람들을 돕도록 호소하고, 방법을 마련해 줄 수 있다. 두 가지만 예를 들겠다.

- 구제 지정 헌금

성도들끼리 교제가 활발했다면, 성도들은 이미 같은 구역이나 소그룹 내의 어려워진 형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서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받는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두렵기도 할 것이고, 또한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 6:3) 해야 하는 원칙에 위배될까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의기소침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돕고자 하는 성도들이 자신이 구제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직접 전달해 달라는 헌금을 교회에 하고, 교회가 누가 헌금했는지 밝히지 않고 대상자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으로 헌금을 만들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원할 경우) 헌금한 사람에게 투명하게 밝히면 된다. 성도들 모두에게 이 시스템은 잘 알려져 있고, 제직들에 대한 신뢰가 높은 교회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동참하는 것을 볼 것이다.

- 마스크 나눔

마스크 대란이긴 하지만, 성도들 중에는 많은 마스크를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정죄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은 마스크 대란 뉴스를 보며 찔림을 받는다. 교회는 이들에게서 마스크를 기부받아 없는 집에(그리고 지역사회에) 나누어 줄 수 있다. 실제로 필자는 마스크를 기부받아 배달하러 다니기도 했다. 마스크가 쌓여 있는 가정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챙길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쁨을 누릴 것이고, 마스크를 받은 사람들 역시 돌봄을 받고 있다는 확신에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목회자는 이 사이를 중개함으로 굉장한 보람을 누릴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동체 구성원들 간 교제 흐르게 하기

코로나19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공동체 내의 활발한 교제가 없었던 교회는 정말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전에 교회 내에서 교제와 사랑을 나누어 본 적은 없고 그냥 예배하기 위한 종교 기관으로서만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온라인으로 예배하면 되는데 왜 내가 예배당까지 가야 하지?'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공동체 내에서 사랑과 교제를 누리고 있던 사람들은 보지 못하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 시기를 힘들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 시기에 더 많은 전화 심방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위의 첫째 방안을 행하려고 하면 자연히 전화 심방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지, 어느 집에 마스크가 없는지 알지 못하면 도울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전화로 심방할 때, 서로 사정을 돌아볼 수 있도록 연락하라고 권면할 수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교회 성도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착하다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가 성도들이 잘 순종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서로를 돕고 살피라"고 권면하면 즐거이 따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목회자들의 권면을 따르지 않는 많은 경우는, 따지고 보면 동기 부여를 제대로 해 주지 못했든지, 권면의 내용이 터무니없기 때문일 수 있다. 서로를 섬기라고 권면하는 것은 성경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수준 높은 동기부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간에 연락이 별로 없었던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어색한(?) 통화라도 나누어 보도록 권면해 주라. 특히 교회 내의 약자들을 세심히 살피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세속 사회 향해 자비 흐르게 하기

개신교는 천주교나 불교처럼 모두를 관할하는 기구가 없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주일에 문을 닫고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당분간 한국교회가 세속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아무리 "우리 교회는 달라요!"라고 말해 봤자 말이다). 그렇다면 그냥 세속 사회 평가를 너무 의식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다. 지역사회에 마스크를 나누는 일도 할 수 있고, 어려운 분들을 찾아 도울 수도 있다. 두 가지만 더 제안해 보려고 한다.

- 공무원들에게 따뜻하게 협조하기

물론 정부로서는 교회가 안 모이는 것이 최선이겠고, 또한 많은 교회가 동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 모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겠다면, 최소한 방역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정부에 할 수 있는 한 협조하는 것이 옳다. 하나 확실한 것은, 최소한 일선 공무원들이 '흠, 이번 기회에 기독교를 박해해야겠어. 예배를 금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만일 더 윗선의 정치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틀렸다고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그냥 그분들은 '빨리 이 코로나19 사태 끝났으면 원이 없겠다' 하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주말에 누군들 돌아다니며 일하고 싶겠는가. 따뜻한 웃음으로 대해 주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작은 선물(예컨대 작은 음료수라도)이라도 내밀라. 그리고 꼭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말자.

- 복지 기관들 돌아보기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복지 기관에 기부를 많이 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시기에 가장 먼저 지출을 제한하는 돈 역시 기부금이다. 따라서 복지 기관은 지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 전체가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기부금이 끊긴 상황에 대해 하소연할 곳도 없을 것이다. 구제 헌금으로 걷은 돈을 약간이라도 전달한다면, 그리고 작게나마 연락을 통해 사랑을 전한다면 감사를 표현할 것이다.

여담으로, 이러한 상황은 선교사님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님이 한국교회가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 상황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번 주 선교비를 보내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는 전화를 받고서도 아무 데도 말하지 못한다. 사실 이들은 미자립 교회보다도 더 약자인 경우가 많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보내 드릴 돈이 없을 수 있다. 따뜻한 전화와 기도 제목 요청이라도 해 준다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예배 형태 바뀌면서 생기는 약자들 챙기기

특히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교회는 이 부분을 세심하게 챙겨야 한다. 교회 내의 어르신들은 온라인으로 예배를 송출해도 보시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분들은 누르면 바로 볼 수 있는 링크를 전달해 드리거나, 그것도 힘들면 누군가 도와줄 사람들을 붙여 주어야 한다. 예배할 마음이 없으셨다면 모르거니와, 예배하고 싶은데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 예배할 수 없게 되면 대단히 소외당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역시 전화로 세심하게 심방하며 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챙겨 드린다면 쉽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신경 써야 하는 분들이 있다. 가족 중 믿는 사람이 자기 혼자밖에 없는 분들이다. 청년들 중에도 이런 분이 많고, 특히 자녀와 배우자 모두가 신자가 아닌데 자신만 신자인 경우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가족끼리 모여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혼자 방에 숨어서 몰래 핸드폰으로 예배를 시청해야 하는 경우도 그나마 나은 상황이다. 자기 방이 따로 있지도 않고, 어디 나갈 곳도 없는 분들은 온라인 예배도 그림의 떡이다. 이런 분들 중 원하는 분들은 방역상 아주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고 극소수가 모여서 예배하도록 배려해 줄 수도 있고, 그것도 어렵다면 연락을 지속하며 목양적인 배려를 받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


다섯째,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설교하기

이러한 사태에서 가장 지혜롭지 않은 방식의 설교는, 정부나 특정 단체를 비난하며 공격하고 자신을(그리고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예컨대 "정부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정부는 ~을 하고 있습니다!"라든지, "지금 모여서 예배하지 않는 저들은 ~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는 "지금 모여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는 메시지들이다. 물론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이 사태 때문에 교회의 본질과 예배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질까 봐 조바심이 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시지들은 "나는 의롭고 저들은 악하다"는 식으로만 들리기 쉽다. 성도들은 결국 "나는 이런 좋은 교회를 다니고 있어! 저런 나쁜 교회들과는 다르지!" 하며 자기 의에 빠지든지, "나는 설교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저 설교자는 왜 저렇게 교조적이지?" 하며 반감만 품게 되기 쉽다(덩달아 무의미한 죄책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고 싶어 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는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이 정당화되는지, 또는 이러한 상황까지 왔는데도 꼭 모여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원리도 궁금해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은 따로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과연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짧은 지면에서 신정론에 관한 논의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교파나 교단마다, 혹은 설교자 개인마다 신정론에 관한 견해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그분의 섭리는 선하다는 것.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신다는 것. 때로 우리 눈으로 볼 때는 나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고통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합의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답이 아닌지는 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건 답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답이라면 왜 하나님 자신이 고통으로 뛰어드셨겠는가? 왜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겪으시며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겠는가?

그분은 고통을 안 주시는 하나님도 아니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 버려 두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섭리와 사랑. 은혜를 사랑 어린 마음과 눈물로 전하라. 정말 성도들은 위로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가 고난 가운데서도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 힘을 공급할 것이다.

세속 언론이 교회를 호의적으로 언급해 줄 일도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호의적으로 보도해 줄 만한 일을 많이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냥 억울해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낫다. 최소한 우리의 선행을 받는 사람들은 안다. 혹여 그들이 몰라 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보신다. 이 위기는 우리가 은혜를 행하는 연습을 할 기회이다. 교회가 코로나19를 전염시키는 원흉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 억울하거나 괴롭다면, 은혜를 전염시킬 수 있도록 힘을 내 보자. 특별히 지역 곳곳에서 교회를 섬기느라 분투하는 모든 목회자가 은혜 안에 거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힘내세요!

이정규 / 시광교회 담임목사, <야근하는 당신에게>(좋은씨앗), <새가족반>(복있는사람) 저자

[출처: 뉴스앤조이]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

2020년 8월 1일 토요일

부동산문제와 그리스도인_주택임대차보호법_김요한

1. 7월 30일에 계약 갱신 청구권과 전월세 상한제를 골자로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그다음날인 7월 31일부터 즉각 시행에 돌입하였다.

2. 이번에 통과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의 핵심인 '계약 갱신 청구권'은 건물 임차에 있어 2년 간 1차 연장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고, '전월세 상한제'는 기존 계약을 갱신할 때 임대료 상승폭을 최대 5%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다.

3. 새로 제정된 주책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되기 직전 혹은 직후부터 이 법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혹자는 이 법이 기존의 주책 임대(차) 시장 질서 및 관행을 붕괴시킬 것이라 주장하고, 서울 강북에 집을 한 채 갖고 있고 강남에서 전세를 사는 어떤 국회의원은 자신을 '임차인'이라고 주장하며 마치 이 법이 임차인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처럼 사자후를 토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단체로 모여 '왜 내 집에서 세입자를 마음대로 못 내보내냐?'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조차 등장했다.

4. 더욱이 무슨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모임인지 뭔지 하는 집단에서는 아예 이번에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헌법에 규정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위헌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니, 혹여라도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다 한들 그들이 추구하고 지지하는 나라의 모습이란 게 오로지 가진 사람들의 이익과 권리 보존에만 몰두하는 나라일 듯 싶어 정신이 아득해지기까지 한다.

5. 주택임대차보호법에 극렬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의 핵심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경제적 권리'가 자리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개인의 재산권을 왜 사회가 규제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사실상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도 안 된다. 국가 혹은 사회가 무엇이건대 개인의 돈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뺏어가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런 주장이 온당한 것인가?

6. 주택임대차보호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내가 뼈빠지게 일해서 천신만고 끝에 장만한 집"을 왜 사회가 이래라저래라 하느냐고 한다.
그런데 이 주장도 틀렸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뼈빠지게 일해서' 집을 장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까말, 우리 사회에서 순전히 자기가 노동을 통해서 번 돈만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있다면 몇 명이나 있을까?
유주택자들 대부분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샀거나- 이 경우 은행의 돈은 누구 돈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광의의 의미에서 은행의 돈 역시 사회 공금이다- 혹은 부모에게서 다양한 편법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식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들이 '뼈빠지게'란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정말 '뼈빠지게' 일하는 노동의 고통과 눈물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7. 한편으로 지금  이 시국에 부동산 문제로 온 나라가 양분되어 내전에 가까운 분열과 갈등을 노출하는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 지각있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현 정부를 향해서 더 이상 실기하지 말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건만 정부-여당이 미적거리다가 부동산이 겉잡을 수 없이 폭등하면서 사후약방문격으로 뒤늦게 팔을 걷어붙인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8. 그럼에도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동산 문제에 대해 내 나름의 생각과 입장을 밝힘으로써 몇몇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판단에 약간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이 글을 쓴다.
만일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이번에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경도된 현 정권이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박탈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9. 성경은 오로지 '영적' 문제만을 가르친다고 믿는 많은 보수적(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달리 사회 문제,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당연히 그런 이슈들에 대해 다각도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성경이 사회 문제에 발언하는 것의 상당수는 '부동산' 정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공평하게 '배분 받아' 사는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성경은 고아, 과부, 나그네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땅을 확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심지어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모든 사람이 원래 소의 땅을 회복할 것을 사회적 구원과 윤리의 궁극적 목포로 제시한다(희년, 레위기 25:23 이하).

10. 부동산 정의에 관한 성경의 통렬한 가르침은 구약성경 예언서에 이르면 더욱 노골적인 양상을 띤다.
주지하듯이 구약의 예언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불의와 부패에 맞서 신적 계시를 선포하면서 투쟁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히 자기 시대의 이스라엘이 부동산 문제에 있어 극도로 타락했다고 비판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언한다. 
가령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정의를 바라셨으나 압제뿐이었고,
의로운 삶을 바라셨으나 고통의 부르짖음뿐이었다.
오호라, 다른 사람들이 집과 밭을 차지할 수 없도록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하여, 이 땅 가운데 홀로 살려 한 너희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이사야 5:7-8).

예언자 미가도 비슷한 말을 한다.

"그들의 침상에서 악을 계획하고 동이 트면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손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밭이 탐나면 밭을 빼앗고
집이 탐나면 집을 빼앗는다.
사람을 속여 그의 집을 빼앗고 그의 재산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계획했으니 너희는 이 재앙을 피하지 못하리라'"(미 2:2-3).

11. 통상 이사야와 미가를 가리켜 최초의 문서 예언자라 칭하는데, 우리는 이들 예언자들이 출현하던 시기에 이미 이스라엘 사회가 부동산 문제로 사회 양극화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구약 예언서(총 16개 예언서) 메시지의 핵심은 우상숭배를 질타하고 사회정의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부동산 양극화 문제를 한편으로 사회정의가 실종된 대표적 현상이자, 탐욕이란 우상숭배의 극단적 모습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본질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12. 신약성경에 이르면 구약의 땅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가르침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수렴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 때문에, 신약에서 부동산 문제를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신약성경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동산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준다.

첫째는 사도행전 2-5장에 나타난 것처럼 오순절 직후에 성령이 충만해진 초기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는 것이다. 즉 성령충만함의 공동체적 결과는 빈부격차의 완화 내지 해소를 위한 사회적 나눔에 있었다.
둘째는 초기 교회가 강력하게 견지했던 종말론적 삶의 모습이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어떠해야 할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지금부터는...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쁨에 넘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그것들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그것은 이 세상의 현재 모습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7:29-31).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종말론적인 소망을 품고 있다면 이 세상의 위대한 가치(행복, 성공, 자랑, 안전에 대한 욕구)들을 과격하게 '상대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교훈한다.

13. 따라서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부동산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는 비교적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사회에서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 불안에 대해 긍휼과 연민의 시선을 가져야 하며,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에 대한 탐욕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물론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집을 소유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소유와 재산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비춰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히브리서 11:16의 말씀을 약속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고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두셨습니다."

만약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그리고 교회 중에 이런 신앙 가치관과 신념이 분명한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필경 우리 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엄청난 진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교회가 천민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오로지 개인의 탐욕과 특권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도 진정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별하고 성찰하지 못한다면, 교회나 사회나 공히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_채영삼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오늘 강의 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한다. 특히, 청년들의 고민이 많다. 나 역시 아직 고민을 계속하고 있지만, 부족한대로 내 의견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포괄적차별법의 문제는, 좌파 우파의 이념의 문제도, 진보와 보수의 대결도, 네오-맑시즘과 자본주의의 대결도, 친정부-반정부의 문제도 아니다. 이 문제를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다루는 것은 왜곡이다.

2. ‘법 제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이슈는,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도 아니다.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조장하고, 인권을 신장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어느 쪽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차별, 평등, 인권의 프레임에서 다루는 것은 착시현상이다.

3. ‘포괄적차별금지법’의 ‘법’으로서의 핵심 문제는, ‘자유’의 문제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문제에 대해 ‘찬성’하고 ‘옳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그것을 ‘반대’하고 ‘틀렸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4. 동성애 등을 찬성하는 논리로서, “동성애자를 사랑한다면, 동성애를 죄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일부 현실적이나, 상식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어떤 사람의 의견과 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상식이다. 어느 쪽이든 생각이 다르다고 그 사람의 입을 막거나 차별할 수 없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다. 죄를 심판하시며 죄인을 구원하신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고 죄인은 사랑하신 지혜의 나타남의 절정이요 증거이다.

5. 동성애를 찬성하는 논리로서, 보수교회는 ‘모든 죄를 지으면서 굳이 동성애만 최악의 죄처럼 말하는 것은 자격 없는 일’이라는 비난이 있다. 이 논리는, ‘동성애는 죄’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 주장은 위의 4의 주장과 공존할 수 없다.

6.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에 대한 개인의 자율성 문제는, 단지 성윤리에 그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문제가 서구 기독교 사회에 닥친 ‘성 혁명’의 문제일 때, 이 문제는 결혼, 가정, 교육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문제이며, 무엇보다 기독교 전통,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도전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이슈이다.

7. ‘성경은 동성애를 모른다’는 주장, 즉, 성경에서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며, 19세기 이후 동성 인격 간의 애정을 포함한 성행위로서의 ‘동성애’는 성경이 ‘몰랐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에서도, 블랙수면방이나 게이클럽처럼, 단지 ‘동성 성행위’로서 동성애를 행하기도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고대의 노예제도에서 노예는 ‘재산’이지 ‘인격’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노예들은 주인이나 주인의 자녀들의 선생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가족 이상의 대우를 받기도 했다.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지 ‘동성애가 아니라는 주장은, 예컨대 ‘과식은 했는데 음식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주장처럼 추상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의 자기 결정권’이나 ‘동성애’ 등은 명백히 부정적이며 인정되기 어렵다.

8. ‘동성애는 죄이나, 차별금지법은 찬성한다’는 의견은, 교회를 공적 영역에서 축소시킨다. 교회를 위한 법은 세상을 향한 양심의 법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고,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도 교회는 할 말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현재 차별금지법의 핵심이 ‘신념, 사상의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9. 교회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십자가의 공의와 긍휼의 복음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이론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이나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큰 어려움 없이 찾아올 수 있는 ‘품’이 되어야 한다. 중국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한 학생에게 아들이 있었다. 부모의 이혼 후에, 그 아들은 동성애에 빠졌다. 그 소문이 교회에 돌았고, 그 아들은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 어머니 학생이 한 말이 마음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내 아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죄라고 정죄하고서, 그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나님은 죄인인 당신과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동성애 커플이 들어온다면, 두 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한 번에 다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더 큰 죄들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가? 동성애자,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청년들이 그저 머물 수 있는 교회의 품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죄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은 무책임하지 않은가?

10.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를 법의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정치적 세력과 권력의 힘으로 풀려 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교회는 그런 방식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의 9번에서와 같은 노력이, 진정성을 보여주는 참된 해결책에 가까울 것이다. 더 나아가, ‘성 혁명’에서 ‘성’(gender)이라는 주제는, 단지 ‘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몸’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권리인가? ‘나의 자궁은 내 것이기 때문에, 임신은 병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성경이 ‘몸’을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할 때,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할 때, 아니, 동양이나 서양 고대 사상에서 한 인간의 몸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했을 때, ‘몸’이란 무엇인가?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의 저자, 로드 드레허는, ‘성(性)의 형이상학’을 제안한다. 교회는, 이 기회에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고민하여 다루고, 다음 세대에게 성경적인 ‘육체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11. 만일,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 등의 문제가 서구를 휩쓴 ‘성 혁명’의 일환으로서, ‘다원주의’의 폭넓은 도전 가운데 하나라면, 그 배후에는 불가피한 ‘영적 싸움’이 있음도 자각해야 한다. 다원주의의 사회적 모토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란, 이제 정상(正常)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가? 교회가 뭔데,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을 이야기하는가? 정상과 비정상은 사회적 학습의 결과이고, 결국 사회적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 각각의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비정상이 없다는 새로운 정상’은, ‘정상-비정상이 있다’는 ‘하나의 비정상’(예컨대, 기독교의 전통)만큼은 인정하지 못한다. 논리적 말장난이 아니라, 그것이 다원주의의 자기모순이며 독재성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12.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다. 폐해가 많다. 권위주의를 타파하자고, 권위 자체를 없애버리면,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없앤 권력이 새로운 권위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창조질서, 중세인들이 ‘합리적 직관’으로 알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 직관’은 정상이 있고 비정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원주의자들도, ‘옳고 그름이 있다’는 그 사실, 틀렸다고 말할 때는 옳다고 믿는 기준이 있다는 그 사실, 기준, 곧 정상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질서 자체는 파괴할 수도 없고, 하려 해서도 안 된다. 남성 중심의 지배체제가 낳는 폐해가 심하다. 아직도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참으로 그러하다. 바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남성 지배체제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해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더 큰 폐해를 낳는다. 세상이 어둠인 이유는, 분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컨대 창조질서로 표명된 그 기준, 성경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질서의 남용, 악용의 폐해를 바로 잡는데 역시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13. 법적인 해결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리가 없이 사랑은 사랑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사랑 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도 진리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셋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함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교회를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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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5일 목요일

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벗자,

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벗자!
 
-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닌가
 
1. 일상이 거룩해야 하는가?
 
본래 사람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사람에 대한 경외감이 있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의 역사에서 범인을 넘어선 성인을 만들고 그들을 기리는 이유이다. 같은 맥락에서 세속 사회에서도 영웅을 만들고 그들의 삶을 기념한다. 적어도 사후에 평가가 이루어지고 나서 존경 받는 것이야 그들의 삶 자체가 증명한 것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치자. 사람들은 죽은 자만을 성인으로 받들지 않는다. 이 땅에 살면서 범인의 삶을 초월하는 사람들을 본받고 싶고, 그들의 말에서 삶의 해답을 찾고자 귀 기울인다. 그래서 삼천 배를 하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사람들은 기를 쓰고 성철 스님을 만나고자 했었다.
 
그 결과 신앙의 높은 경지란 일반 대중들은 도달할 수 없는 고귀한 종교 엘리트의 것이 되었다. 이 분리가 가속될수록 종교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게 된다. 신앙은 일상의 영역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 되어 버린다. 하루 7시간 기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는 분, 24시간 예수만을 바라보고자 한다는 분 등 범인의 수준을 넘어서는 이들은 때마다 나타났다.
 
불온하게 표현하자면 삶이 종교에 삼켜져 버렸고, 사람들은 종교에 강박을 갖게 되었다. 내부에서는 경건이라고 부르나 외부에서는 엄숙주의라고 부른다. 일상이 거룩해야 하는가? 매일 새벽 기도를 하고 세상에 나가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것, 이것이 거룩인가? 주일만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위선이라 비판하고, 나머지 6일도 주일처럼 살아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나머지 6일도 주일처럼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은 더 큰 위선이다. 물론 그 의도를 이해하긴 하지만, 6일의 삶에 통념적인 거룩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상의 거룩이 무엇일까? 매일 새벽 기도를 하거나, QT를 하거나, 성경공부로 일주일을 보내어 주변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낸다는 식으로 암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주일의 위선의 주중의 연장일 뿐이다. 오히려 일상의 거룩이나 영성은 일상의 타인과의 부딪침 속에서 그들에게 관심 갖고 베푸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주일은 그러한 삶에서 오는 수고와 피로를 안식하고 서로 격려하고 재충전하는 축제여야 한다.
 
2. 근대, 놀이의 죽음
 
<중세의 가을><에라스무스 전기> 등으로 잘 알려진 요한 후이징가 (1872-1945)1, 2차 세계대전의 격동기를 몸으로 살아낸 네덜란드 역사가이다. 중세사가였지만 그는 양차대전의 격랑 속에서 과학과 진보에 대한 맹신이 우상화되어 비판적 성찰 능력을 상실한 당대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호모 루덴스 (유희의 인간)>에서 산업혁명을 거치며 생산성 향상을 위한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고발했다. 후이징가는 모든 문명은 놀이 정신이 없을 때 존재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인간성을 상실시키며 쌓아올린 근대 문명의 결과를 비극적으로 전망하였다. 그는 중세의 민중문화가 담보했던 놀이의 가치를 재해석하였고, 고대의 놀이문화를 재발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본래 그랬다. 고대의 모든 종교 제의는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놀이 한 마당이었다. 실제로 중세에서 문화로 자리잡은 종교는 각종 축일 등을 제정하며 민중의 놀이문화와 함께 발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유희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와 예배하는 인간인 호모 아도란스 (homo adorans)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종교는 축제였고, 예배는 놀이였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직 중심의 엘리트 문화가 지배하였지만, 자연스레 엘리트 문화와 다른 대중문화가 보편 교회의 전통 안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 중세는 일관된 종교성이 강제되기 보다는 서로 다른 종교 문화들이 지역별, 신분별로 공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이 느슨한 종교적 실천은 도전 받았다. 개별 국민 국가가 종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함에 따라 종교는 국가의 통치의 효율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개별 국가들에서 독자적인 예배의식과 교리를 만들어냈다. 스콧 헨드릭스를 비롯해 종교개혁기를 연구하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16세기를 재기독교화 (re-Christianization)라는 시각에서 접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관점에서 종교개혁을 보면 전형적으로 국가주의와 근대성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청교도 목회자들과 대중들 사이 종교 실천을 둘러싼 계급갈등이 그 한 사례이다. 잉글랜드 혁명 이후 청교도 목회자들이 주일 오후 대중들이 즐겼던 맥주 파티 (church ale)와 축구의 관습을 금지시켜 반발을 샀다. 대중들은 국왕 제임스 1세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청원하였고, 국왕은 <스포츠의 서 (Book of Sports)> (1617)를 반포하여 대중들에게 주일에 즐길 수 있는 문화 활동을 정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대중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조치로 청교도들은 잉글랜드 내에서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종교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분리주의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이 개신교 전통이 자리한 지역의 대중들은 엘리트가 부과하는 강화된 신앙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불면증의 문화사>를 쓴 뉴질랜드 역사학자 서머스브렘너는 구원과 금욕에 대한 칼뱅주의의 강조가 근대인들에게 종교의 강박으로 작용하여 불면증이라는 질병을 야기했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3.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과학의 발전과 진보를 지향하는 근대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최고의 효율을 추구한다. 규율과 제도를 강조한다. 학교, 병원, 감옥, 군대뿐 아니라 교회 역시 규율을 통한 확장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 결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대형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교역자가 관리와 통제의 중심에 서고 그 허리는 믿음 좋은 제직들이 떠받치고, 셀 모임이나 구역 모임으로 표현되는 촘촘한 직제로 위계체제가 완성된다. 하지만 효율과 통제에 기반한 조직은 종교이건, 군대이건, 학교이건 억압과 폭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미투운동이 극단, 연예계, 문학계 등에서부터 주로 터져 나왔을까? 개인의 장래를 쥐고 통제할 수 있는 수직적 권력구조가 폭력을 방관하고 조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입 간호사들에 대한 태움문화라든가 해마다 3월이면 반복되는 대학 신입생 군기잡기 같은 폭력성 등 역시 효율적인 통제와 관리를 목적으로 한다. 형태는 다르나 본질은 집단주의, 전체주의의 구현이다.
 
한국 교회 성장에 여러 긍정적, 부정적 유산을 남긴 제자훈련은 어떨까? 훈련의 목적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새벽 기도하고, QT를 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일정부분 동의할 수 있지만 신앙이 같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이 생긴다. ,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는 개인성이 개발되기 보다 집단성이 강화된다. 한 번 질문해 보자. 신앙 훈련의 목적이 습관을 만드는 것인가? 사명과 소명과 제자됨 속에 인간성이 사라질 위험은 없는가? 자기가 없어지는 훈련에 인간애마저 상실할 수 있고, 제자가 되는 것마저 도그마가 될 수 있다. 제자도와 훈련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교회는 엄숙주의 (quietism)가 지배하게 된다. 자신을 전적으로 신의 뜻에 복종시키고 이 땅의 것을 포기하고 하늘에만 가치를 두는 삶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엄숙주의란 17세기 말 등장한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고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에 무관심하며 신과 신성한 것에 수동적인 태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가톨릭 백과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엄숙주의는 인간의 가장 높은 완성도는 정신적인 자기 소멸과 결과적으로 현재의 삶이 영혼의 신성한 본질에 흡수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따르거나 의지하지 않는다. 신이 개인 안에서 행동하는 동안 개인은 수동적이 된다. 일반적으로 엄숙주의는 거짓되거나 과장된 신비주의를 의미하며, 가장 비현실적인 영성을 떠올리게 되고, 도덕성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긴다.’
 
이 엄숙주의의 가치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 인간의 유한성을 기억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만을 강조하게 된다. 그 속에서 현재의 삶에 가치를 두는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 양 되어 버린다. 엄숙주의가 지배할수록 교회는 천상의 가치를 강조한다. 교회 내의 비판의 소리를 내는 것도 덕이 되지 않으므로 경계하게 된다. 교역자들과 제직들은 제자도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가치를 주입한다. 왜 교회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이런 구조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내포하는 폭력에 저항하면 은혜와 덕이 되지 않는다고 정죄한다. 제자훈련이란 교회가 근대의 효율을 위해 기계적인 규율을 강제하는 것을 그럴싸한 용어로 포장하는 것일 수 있다. 솔직해지자. 이건 아니다.
 
실제 한국 교회는 사명과 선교, 제자도에 몰두하느라 현재의 가치, 놀이의 가치, 휴식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그런데도 24시간 예수만 바라보고 생각하라 한다. 현실은 교회 성장과 유지를 위한 프로그램을 돌리느라 격무에 시달리는 교역자들이 절대 다수이다. 24시간 예수만 생각하라는 메시지에 일반인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아마 그렇게 살아내지 못하는 연약한 자신을 자책하며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믿음의 삶의 표징은 이 세상과 단절하고 좀 더 주님을 바라보는 내부지향으로 좁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믿음이고, 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영성 훈련, 제자 훈련이라면 근본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엄숙주의를 강요하고 훈련을 강조하는 것은 목표달성의 효율을 위해 개인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4. 일상화된 엄숙주의를 벗자
 
하루 24시간 예수와 살면 행복할까? 진짜 그런 삶이 바른 삶이라고 믿는 걸까? 이것이야말로 위험하다. 하늘의 것을 사모하느라 이 땅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어 보인다. 하루 종일 예수께 사로잡히려면 가톨릭 봉쇄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게 맞다. 물론 24시간 예수만 생각하라는 것은 레토릭이겠지만, 이러한 류의 사고는 그리스도인들을 오도할 수 있다. 죄의식과 마음의 부담을 효과적으로 덜면서 사회 현실을 외면할 구실이 되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 연구하고 싶다는 열망도 자칫하면 엄숙주의의 반영일 수 있다. 너무 하늘의 것만을 사모하게 되면, 변화산의 초막에 머무르며 사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땅의 문제를 강 건너 불 보듯 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예수님을 하루 종일 생각한다면, 바리새인, 서기관, 외식하는 자들을 비판하던 예수, 가나안 혼인 잔치에 가서 먹고 즐기던 예수,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던 예수, 장사치의 소굴이 되어 버린 성전의 좌판을 둘러 엎으신 예수,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살았던 예수, 자기를 욕하는 자에게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라며 용서했던 예수 등을 외면할 수 있을까? 당대 사회의 불의와 아픔에 공명하는 예수를 보면 약자에 대한 편애도 보여야 마땅할 것 같다. 그런데 예수를 많이 생각하고 바라볼수록 현실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심판자가 되어 판단하거나, 엄정하게 중립적인 언어만을 구사하는 천사가 되어 버린다. 그런 분들이 사회적인 이슈 앞에 이제는 그만 하고 기도할 때입니다고 짐짓 중재재판의 판결자가 된 양 선포한다. 사회가 정의 실천을 외칠 때 그들은 공의의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다. 사람들이 차별에 대해 지적하는 문제를 그들은 영적 분별이라 한다. 대중들이 혐오라 표현하면 그들은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라고 한다.
 
이것이 온통 예수님만 생각할 때 생길 수 있는 삶의 부작용이다. 신앙과 일상이 괴리되어 생기는 분열증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러한 주입을 신성하게 여기고 그것이 지향하는 도달할 수 없는 약속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가장 숭고한 종교처럼 보이나 가장 위선일 수 있는 것, 가장 타계적이어서 가장 현실에 무관심할 수 있는 것, 이 삶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우상숭배일 수 있다. 이 연장에서 미션얼 교회, 제자훈련 혹은 세속성자라는 것도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새로워지고자 하는 몸부림과 의도는 충분히 존중한다. 다만, 이러한 것이 근대 사회 구조의 틀을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신자들을 객체화 시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자.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로 옮기건 오늘 최선을 다하라라고 옮기건 하늘만 바라보는 데서, 오늘 우리와 주변의 현실을 직면하여야 한다. 교회 내의 일상화된 엄숙주의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불온함이 변화를 이끈다.
 
168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는 엄숙주의 68개조를 정죄하였다.
 
 
 
 
 
 

말씀 속에 거하기, 앨런 록스버러(alan j. roxburgh)

[Dwelling in the Word]
 
Text: 누가복음 101-12
 
- 본문을 눈으로 읽어가면서 낭독하는 사람의 소리를 따라가기
 
- 본문을 두 차례 천천히 낭독하기
 
기도하고 묵상하기:
 
- 본문을 읽어가면서 어디에서 잠시 멈추게 되었는가? 무엇이 이목을 집중시켰는가?
 
-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이나 느낌으로 새롭게 얻게 된 것은 무엇인가?
 
- 본문에 대해서 어떤 질문이 생겨났는가?
 
함께 묵상하기:
 
-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답해 보라.
 
- 어떤 이미지나 은유나 단어가 계속 떠올랐는가?
 
- 어떤 질문들이 계속 생겨났는가?
 
- 어디에서 열정을 느꼈는가?
 
- 어디에서 불안감, 걱정이 느껴졌는가?
 
- 우리 서로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
 
- 본문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서로서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면, 우리의 이웃/우리 동네들 가운데서 일하시고 계시며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존재와 자취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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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거하기"란 무엇인가?
 
- 성경말씀(본문)을 사용하여 묵상하고 성찰한다
 
- 전문적인 성경 연구는 아니다
 
- 함께 '함께 한 사람들과 더불어서'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분별하는 과정을 말한다
 
- 읽는다
 
- 눈으로 읽을 뿐 아니라 누군가의 낭독을 통해서 소리로 들어서 읽는다
 
- 모여서 함께 모인 사람들과 더불어서 그들의 눈과 귀와 깨달음을 통해서 읽는다
 
- 문화(사회)를 변화시키는 열쇠의 역할을 하는 실천(실행/연습)이다
 
- 나와는 다른 생각과 상상과 감각이 다른 상상력을 이끌어낸다
 
- 자유롭게 서로서로의 말을 듣는다
 
- 자기의 삶에서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스토리(내러티브)가 솟아 올라 흘러나오는지를 경청하라
 
- 지금까지 통상적인 교회 생활과 그 방법들을 비추어 보고 지금 함께 읽는 말씀이 어떻게 다른지, 어떤 다른 면을 가르쳐주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분별해 보라
 
- 이를 통해서 쇄신하고 혁신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을 내딛으라
 
- 왜 누가복음 101-12절인가?
 
- 여기에는 몇 개의 지평이 펼쳐지면서 교차하고 만나고 있다. 에수님의 지평, 제자들(70)의 지평, 동네들의 지평, 하나님의 지평, 하나님나라의 지평, 그리고 이 본문이 목표로 하고 있었던 1차 독자들의 지평.
 
- 다시금 주목해야 할 사항을 본문이 담고 있다.
 
- 상상력들을 확장시키고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도움을 주는 세 가지 물음들:
 
1.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웃과 동네에서는 하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며 하시려는가?
 
2. 이 본문에서 보여주듯, 바운더리들을 넘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3. 이 지역에서 교회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 왜 똑같은 본문을 반복적으로 다음 모임에서도 또 다음 모임에서도 계속해서 1년 혹은 2년 사용하는가?
 
* 변화는 아주아주 느리게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임하는 프로세스다. 하나님에 대해서, 세계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서로서로를 조금씩 조금씩 끌어당겨서 그에 대한 새로운 다른 대안적 스토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것이 본문을 읽어가면서 해석을 통해서 찾아오는 변화다. 월터 브루그만.
 
* 말씀의 권위가 진실로 작동한다. 특히 교회가 복음을 통해서 세상 가운데서 일하고자 할 때 확실하게 작용한다. N. T. 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