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6일 금요일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신뢰 문화
김형민/호남신학대학교 교수
현대는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과거와는 달리 청소년들은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타율보다는 자율의 가치를 중시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이러한 개인화의 과정이 현대인들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자율성의 증대로 인해 각 개인이 짊어져야 할 위험과 책임도 더욱 커졌다. 그런 점에서 개인화는 에고이즘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하지만 개인화를 자아중심적 개인주의로 오해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일들이 자주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갈등도 증폭되고 사회구성원들 상호간의 신뢰도 약화되고 있다. 우리가 이기적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성의 회복이다.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될 때 우리 공동체는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사회학자들의 말과 같이 신뢰는 ‘사회자본’이다. 신뢰는 사회의 문화적이며 사회적 협력을 촉진하다. 어느 사회든 신뢰는 신앙과 관습을 통해 전승되었다. 신뢰성 회복을 위한 종교공동체, 특히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긴급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신뢰란 무엇인가? 신뢰는 결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아니다. 인간적 품성도 덕도 아니다. 신뢰는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시고 신뢰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다. 신학자 본회퍼의 말과 같이 ‘신뢰는 인간의 공동생활의 가장 위대하고, 진기하며, 복된 선물’이다. 불신이 인간의 사회성을 파괴한다면, 신뢰는 인간의 공동체와 우정을 회복시킨다. 이러한 우정의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기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촉진해 나가야 할 ‘신뢰의 문화’이다.
신학자 슈트룽크는 우리가 예수를 만나면 세 가지 차원의 신뢰의 문화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예수를 만나면 자기신뢰가 회복된다. 그동안 우리는 자기신뢰를 잘못된 신앙의 유형으로 생각해 왔다. 자기신뢰보다 자기불신을 겸손한 신앙적 이상과 경건한 삶의 태도로 칭송해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는 숙명적으로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적극적인 신뢰형성을 방해한다. 자신을 불신하도록 종교적으로 교화된 사람이 ‘신뢰의 문화’에 동참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예수는 자기신뢰가 메시아적 신뢰형성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자기신뢰를 불합리한 삶의 태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신뢰’는 이기주의나 자아중심주의와는 다르다. 부자 농부의 비유(눅 12:16-21)는 신뢰를 선물로 인지하는 못한 자아중심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풍성한 추수의 결실을 맺은 부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대신 오직 자신을 향해 말한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하나님과 예수의 신뢰능력을 의지하는 자기신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가 말씀하신 자기신뢰는 약하고 아픈 자들을 치유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능력이다. 쓰러진 자들이 일으킴을 받고 억눌린 자가 자유를 얻음으로써 상실한 자신의 인간존엄을 회복하게 된다. 예수 안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향한다. 마치 병든 자들이 자신의 치유를 예수께 청탁한 것과 같다. 환자들의 청탁은 바로 예수를 신뢰하는 환자들의 자기신뢰를 나타낸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자신만을 신뢰하는 자는 자신의 치유를 결코 남에게 청하지 않는다.
둘째는 ‘우리 신뢰’의 회복이다. 새로운 자기신뢰는 예수의 ‘신뢰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위한 신뢰’로 확장해 간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신뢰가 자기만을 신뢰하는 자들의 이기적 집단주의로 발전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흥미롭게도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편협한 신뢰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날 제자 요한이 예수께 와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금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눅 9:50)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던 익명의 치유자가 제자들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익명의 치유자를 자신들의 경쟁자로 생각하며 불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그의 치유사역을 금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제자들의 편협한 ‘우리 신뢰’의 태도를 보게 된다. 제자들의 신뢰는 오직 제자공동체 내면만을 향해 있었다. 제자들은 내적으로는 공동체적 신뢰를 공유하면서도, 외적 공동체를 불신하는 자신들의 이율배반적 행위를 인식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익명의 귀신을 쫒는 자가 자신들의 공동체 속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생각할 뿐,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귀신을 쫒는 자의 소속에만 관심을 두었다. 제자들은 오래 동안 전승되어내려 온 유대교의 사회적 관습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것은 곧 ‘너희를 위하지 않는 자들은 너희를 반대하는 자’라는 원칙이다. 이 원칙을 따른 자들은 ‘우리 신뢰’를 말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때에는 언제나 자신을 지지하는 자로 한정했다. 오직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만 신뢰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까지 지혜로운 삶의 방식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제시한 놀이이론을 따르는 자들만이 신뢰할 수 있으며, 이를 거절하는 자는 의심하고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제자들의 행위를 책망하시며 이 원칙을 뒤집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눅 9:50) 예수의 말씀은 ‘우리 신뢰’를 말하면서도 이를 제한적으로 적용하려는 삶의 자세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즉 그의 제자공동체는 예수가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며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들은 예수가 ‘아바’라고 불렀던 바로 그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오고 계신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요, 그런즉 그들의 하나님 신뢰는 곧 ‘미래를 향한 신뢰’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셋째로 ‘미래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을 바라볼 때 인간은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한 신뢰를 얻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과감히 고향을 등지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미래를 향한 신뢰’는 낙관주의적 삶의 철학과는 다르다. 낙관주의가 과거 지향적이며 무비판적 태도라는 점에서 종말론적 신앙과 구별된다. 낙관주의는 과거에 경험했던 행복을 바로 미래에 투영시킨다. 이제까지와 같이 미래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예수공동체가 품고 있는 미래에 향한 신뢰는 낙관적이라기보다는 비판적이다. 과거에 자신을 지배해왔던 힘과 판단과 과감하게 결별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신뢰의 공동체로 부르셨고, 그들을 이제까지 자신을 얽매였던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하셨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의 삶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의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마 19:29)까지 버려야만 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은 금욕적 자기포기가 아니라 전적인 신뢰의 능력이다. 신뢰는 하나님의 미래를 신뢰함으로써 이생의 삶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는 무력한 자포자기가 아니라 창조적 자기절제의 힘이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삶의 현실에서 볼 때 수용하기가 어려운 요구이다. 그렇다면 그의 요구를 만족시킬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을 인간을 긍정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으로 믿기에, 바로 이 믿음에 따라 이웃까지도 신뢰하는 자이다. 어느 날 예수를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던 부자 청년은 평소 윤리적 삶을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인간의 전형이다(마 19:16이하).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를 거절하고 예수의 곁을 떠났다. ‘도덕능력’이 아니라 ‘신뢰능력’의 부재가 부자 청년의 문제였다. 그 젊은이는 예수를 따르면 얻게 될 ‘미래를 향한 신뢰’를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완성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뢰가 종말론적 신앙 가운데 미래를 신뢰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서로 나누며 선취해야 할 신앙적 삶의 태도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성의 상실을 염려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정신은 각 개인 사호간의 신뢰가 회복될 때 가능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뢰는 은혜의 사건이다. 신뢰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감사의 삶으로 응답해야 할 신앙적 책무이다. 그런즉 이웃에게 실망했다고 이웃에 대한 신뢰를 포기할 수 없다. 너무 많은 신뢰가 어리석음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불신은 불행의 출발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을 신뢰하겠다는 뜻에서 ‘신뢰도 좋은 것이지만 통제가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있다. ‘통제도 좋지만 신뢰가 더 좋다.’ 신뢰의 회복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다시 살린다.
김형민
호남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숭실교회 협동목사
2020년 11월 19일 목요일
길을 걷는 사람_ 최주훈
<길을 걷는 사람>
얼마 전 루터교회 목회자 연장 교육에서 박윤만 교수의 강의를 매우 인상 깊게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첫 번째 주제가 “초기 기독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라는 문제였습니다. ‘기독교’, ‘교회’라는 말이 너무 익숙해서 이 질문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첫 질문이 저에겐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정말 1세기엔 예수 따름이 스스로 뭐라고 불렀을까, 그리고 밖에선 또 어떻게 이름했을까.
그 답이야 예수님 만나봐야 알겠지만, 강의를 맡았던 박윤만 교수는 성서의 다양한 구절(행 9:2; 19:9, 23; 22:4; 24:14)을 근거로 초기 기독교는 “그 길”, 또는 “나사렛 이단” 같은 말로 불렸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설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다”라고 선언한 구절,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길”(도)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름을 지을 땐 아무렇게나 짓지 않지요. 그 이름에 소망을 담는 건 상식입니다. 1세기 교인들이 스스로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건, 자신들이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의식이 담겨 있다고 봐야합니다.
마가복음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길을 중심으로, 이 길이 도대체 무엇인지 설명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일단, 막 1:1절은 마가복음이 교회 공동체 예배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운율을 통해 감지 할 수 있습니다. 한글 번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인데, 헬라어는 “아르케 투 에방겔리우 예수 크리스투 후이우 데우”라고 읽습니다. 여기, ‘우~’라는 음이 반복되는데, 고대인들에게 이 운율의 반복은 경건한 분위기를 깊게하는 예전적 음운이예요.
그다음 2절에 저 유명한 이사야의 예언이 나오지요. 여기서 마가복음서 기자는 구약을 인용하면서 ‘과거에서 현재로’라는 시간의 길을 닦아 놓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길을 준비하리라..., 길을 곧게하라”라는 인용구를 살포시 넣어둡니다. 이로써 마가복음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길을 밝히는 의도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특별한 것은 그 길의 출발지가 ‘광야’라는 점입니다.
5절을 봅시다.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이 다” 광야로 나옵니다. 유대와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요? 잘 정비된 지역, 사람들의 밀도가 높은 대도시이지요. 여기서 복음서 기자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살짝 숨겨 놓은 것 같아요. ‘유대,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로 정작 말고 싶은 단어는 ‘성전’이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살지요. 그곳에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야말로 유대인의 삶을 지탱하는 근간이고, 생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유대인들의 통념으로 봐서는 성전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시온의 대로’라는 탄탄한 대로를 거쳐 갑니다. 그런 대로를 걸어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기존의 통념이지요.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를 뒤집어 버립니다. 대도시, 성전, 탄탄대로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나와 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대 땅의 사람들, 예루살렘에 모여 살던 도시인들, 성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예측할 수 없는 황량한 땅, 광야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이동 경로가 완전히 바뀌어버렸지요. 길 없는 곳으로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광야라는 곳은 족장과 예언자들의 땅이기는 하지만, 이 광야에 그 어떤 나라가 세워진 적도 없고, 안전이 보장된 체계가 세워진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과거의 역사는 있지만, 제도와 틀이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복음은 도시 사람들을 불러 이곳으로 인도한 다음, 진리의 길을 걷게 만듭니다. 물론 모두가 이 길 걷기에 동의하고 그 길을 걸어간 건 아닙니다. 고향 가족들과 가진 자들은 이 길을 거부했고, 제자들은 이 길에 올라섰다 탈선하기를 반복합니다.
중심지 예루살렘을 비우고, 광야에서, 그리고 외곽 갈릴리에서 걷기 시작한 사람들이 광야 한 가운데서 예수를 만나 눈을 뜨기 시작하지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맹인이 시력 회복하고 “모든 것을 밝히 보는” 구절일 겁니다(8:22-26). 새롭게 눈을 뜬 사람에게 이 길이 어떤 길인지, 그 방향이 어디인지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그 길의 종착지는 무덤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길이 끊어진 어두운 무덤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것을 암시하며 복음서를 마무리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무덤 안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길인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부활’, ‘십자가 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교회력의 새해는 마가의 해입니다. 그래서 이번 해 교회 주제를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분명히 오늘 우리의 상황도 코로나 때문에 암흑 같은 상황입니다. 무언가 계획하거나 준비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으니 대비할 수 없는 무덤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탈선하더라도 일단 일어나 걸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골머리 쓸 것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강점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고유의 것, 우리 교회 말고는 다른 곳에선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나눌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예수의 길 위에 있기 기도하며, 서로를 돌아보는 것, 즉 복음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가장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이들의 지혜로운 나눔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 중앙루터교회 2021 정책 당회 설교 막 1:1-5 ‘길을 걷는 사람들’
최주훈 목사 (2020.11.20.토)
2020년 8월 1일 토요일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_채영삼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오늘 강의 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한다. 특히, 청년들의 고민이 많다. 나 역시 아직 고민을 계속하고 있지만, 부족한대로 내 의견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포괄적차별법의 문제는, 좌파 우파의 이념의 문제도, 진보와 보수의 대결도, 네오-맑시즘과 자본주의의 대결도, 친정부-반정부의 문제도 아니다. 이 문제를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다루는 것은 왜곡이다.
2. ‘법 제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이슈는,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도 아니다.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조장하고, 인권을 신장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어느 쪽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차별, 평등, 인권의 프레임에서 다루는 것은 착시현상이다.
3. ‘포괄적차별금지법’의 ‘법’으로서의 핵심 문제는, ‘자유’의 문제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문제에 대해 ‘찬성’하고 ‘옳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그것을 ‘반대’하고 ‘틀렸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4. 동성애 등을 찬성하는 논리로서, “동성애자를 사랑한다면, 동성애를 죄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일부 현실적이나, 상식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어떤 사람의 의견과 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상식이다. 어느 쪽이든 생각이 다르다고 그 사람의 입을 막거나 차별할 수 없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다. 죄를 심판하시며 죄인을 구원하신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고 죄인은 사랑하신 지혜의 나타남의 절정이요 증거이다.
5. 동성애를 찬성하는 논리로서, 보수교회는 ‘모든 죄를 지으면서 굳이 동성애만 최악의 죄처럼 말하는 것은 자격 없는 일’이라는 비난이 있다. 이 논리는, ‘동성애는 죄’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 주장은 위의 4의 주장과 공존할 수 없다.
6.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에 대한 개인의 자율성 문제는, 단지 성윤리에 그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문제가 서구 기독교 사회에 닥친 ‘성 혁명’의 문제일 때, 이 문제는 결혼, 가정, 교육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문제이며, 무엇보다 기독교 전통,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도전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이슈이다.
7. ‘성경은 동성애를 모른다’는 주장, 즉, 성경에서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며, 19세기 이후 동성 인격 간의 애정을 포함한 성행위로서의 ‘동성애’는 성경이 ‘몰랐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에서도, 블랙수면방이나 게이클럽처럼, 단지 ‘동성 성행위’로서 동성애를 행하기도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고대의 노예제도에서 노예는 ‘재산’이지 ‘인격’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노예들은 주인이나 주인의 자녀들의 선생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가족 이상의 대우를 받기도 했다.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지 ‘동성애가 아니라는 주장은, 예컨대 ‘과식은 했는데 음식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주장처럼 추상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의 자기 결정권’이나 ‘동성애’ 등은 명백히 부정적이며 인정되기 어렵다.
8. ‘동성애는 죄이나, 차별금지법은 찬성한다’는 의견은, 교회를 공적 영역에서 축소시킨다. 교회를 위한 법은 세상을 향한 양심의 법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고,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도 교회는 할 말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현재 차별금지법의 핵심이 ‘신념, 사상의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9. 교회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십자가의 공의와 긍휼의 복음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이론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이나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큰 어려움 없이 찾아올 수 있는 ‘품’이 되어야 한다. 중국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한 학생에게 아들이 있었다. 부모의 이혼 후에, 그 아들은 동성애에 빠졌다. 그 소문이 교회에 돌았고, 그 아들은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 어머니 학생이 한 말이 마음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내 아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죄라고 정죄하고서, 그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나님은 죄인인 당신과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동성애 커플이 들어온다면, 두 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한 번에 다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더 큰 죄들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가? 동성애자,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청년들이 그저 머물 수 있는 교회의 품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죄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은 무책임하지 않은가?
10.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를 법의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정치적 세력과 권력의 힘으로 풀려 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교회는 그런 방식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의 9번에서와 같은 노력이, 진정성을 보여주는 참된 해결책에 가까울 것이다. 더 나아가, ‘성 혁명’에서 ‘성’(gender)이라는 주제는, 단지 ‘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몸’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권리인가? ‘나의 자궁은 내 것이기 때문에, 임신은 병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성경이 ‘몸’을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할 때,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할 때, 아니, 동양이나 서양 고대 사상에서 한 인간의 몸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했을 때, ‘몸’이란 무엇인가?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의 저자, 로드 드레허는, ‘성(性)의 형이상학’을 제안한다. 교회는, 이 기회에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고민하여 다루고, 다음 세대에게 성경적인 ‘육체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11. 만일,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 등의 문제가 서구를 휩쓴 ‘성 혁명’의 일환으로서, ‘다원주의’의 폭넓은 도전 가운데 하나라면, 그 배후에는 불가피한 ‘영적 싸움’이 있음도 자각해야 한다. 다원주의의 사회적 모토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란, 이제 정상(正常)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가? 교회가 뭔데,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을 이야기하는가? 정상과 비정상은 사회적 학습의 결과이고, 결국 사회적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 각각의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비정상이 없다는 새로운 정상’은, ‘정상-비정상이 있다’는 ‘하나의 비정상’(예컨대, 기독교의 전통)만큼은 인정하지 못한다. 논리적 말장난이 아니라, 그것이 다원주의의 자기모순이며 독재성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12.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다. 폐해가 많다. 권위주의를 타파하자고, 권위 자체를 없애버리면,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없앤 권력이 새로운 권위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창조질서, 중세인들이 ‘합리적 직관’으로 알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 직관’은 정상이 있고 비정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원주의자들도, ‘옳고 그름이 있다’는 그 사실, 틀렸다고 말할 때는 옳다고 믿는 기준이 있다는 그 사실, 기준, 곧 정상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질서 자체는 파괴할 수도 없고, 하려 해서도 안 된다. 남성 중심의 지배체제가 낳는 폐해가 심하다. 아직도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참으로 그러하다. 바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남성 지배체제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해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더 큰 폐해를 낳는다. 세상이 어둠인 이유는, 분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컨대 창조질서로 표명된 그 기준, 성경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질서의 남용, 악용의 폐해를 바로 잡는데 역시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13. 법적인 해결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리가 없이 사랑은 사랑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사랑 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도 진리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셋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함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교회를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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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9일 화요일
교회, 기적을 만들어가는 공동체_최종원
교회, 기적을 만들어가는 공동체
- 2019 VIEW 가을 졸업생 환송회 메시지
1.
‘모든 중세사가는 교회사가’라고들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중세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이니 중세역사와 교회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다만, 저 같은 중세사가는 그 시대 속에 존재했던 하나의 제도로서의 교회를 탐구한다는 면에서 신학적인 접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달리 얘기하자면,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제도에 우선하는 특별한 의미를 교회에 부여하거나, 신적인 가치를 지닌 기관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제 수업을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시겠습니다만, 저는 교회란 기본적으로 전통과 교리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보수적인 조직이며,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는 근대에 최적화된 근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혐오와 배제의 아이콘 마냥 되어버린 개신교의 현실에 여러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전긍긍 속앓이를 하지요. 하지만 다원화된 사회에서 생성될 수밖에 없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단일하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근대성의 명제로 환원하여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워 대응하고자 하는 한, 한국 교회에 대한 전망은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면 상대적이라고 펄쩍 뛰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전 것이 무너지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필연입니다. 고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도 교회의 역사는 무너지고 세워짐의 연속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교회 구조나 심지어 신학의 뼈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이런 시각으로 진단하는 것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들을 짚어준다는 점에서 신선할 수도 있으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적잖이 불편함을 느낍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우기 보다는 흔드는 것이 아니겠냐는 우려가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교회론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오늘은 VIEW에서의 학업을 마무리하고 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교회를 전망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야 할 분들에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교회란 무엇인지를 나누고 싶습니다.
2.
저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거나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하자”와 같이 교회를 정체성 혹은 본질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치 교회에서 한때 이상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오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단코 그런 시절은 없었습니다. 유럽에서 교황의 힘이 정점을 찍고 가톨릭 체계가 완성된 장기 12세기나 종교개혁 이래 프로테스탄트 시스템이 정착된 17세기를 역사에서는 다름을 틀림으로 옥죄는 이단이나 마녀사냥이 활발한 탄압사회(persecution society)의 형성기로 봅니다. 종교가 정체성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면 반드시 다름을 억압하는 폭력을 낳았습니다. 제도화된 종교가 피해갈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질문이 나오게 되겠지요. 종교의 속성이 그러함에도 제도교회가 두 번의 천년을 넘어 유지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에 대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제도나 교리를 체계화하고 붙드는 것이 교회의 핵심이 아니라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질문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물론 거창하게 교회론이라고 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제게 교회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다소 모순적인 곳입니다. 결코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에 대한 지향을 포기할 수 없는 곳 말입니다. 시대의 주류 교회가 어떠한 길을 걸어왔건,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 무엇인지를 품고 시대에 거슬러 교회가 지녀야 할 가치에 천착해 온 공동체 말입니다.
그 점에서 교회란 기적을 '만들어가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그 이데아가 현실에서 구현된 사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수 많은 기적 중 단 일곱가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각각의 기적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5장의 베데스다 못가에 찾아가셔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셔서 베데스다 못가를 방문하셨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 안에 많은 불치병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왜냐하면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자비라는 뜻이 무색하게 베데스다 연못은 병든 사람들이 제한된 기회를 잡고자 무한경쟁 하는 불안과 염려가 상존하는 곳, 바로 인간사회의 축소판입니다.
예수님이 명절에 그 베데스다에 가셨다는 것, 그리고 그 곳에서 아마도 가장 절망으로 보이는 38년 동안 병으로 앓고 있던 사람을 주목해 고쳐 주셨다는 것은, 평범해 보이지만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이며, 교회가 이룰 수 있는 기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에베소서 1:23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명절에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으로 가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서 있어야 할 곳이 바로 병들어 아프고, 소외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속한 세상을 외면하고 내세나 타계를 지향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사회에 찾아가신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 속에서 가장 희망을 볼 수 없는 자에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역할일 것입니다.
3.
제가 말하는 것과는 다소 다른 의미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기적을 만드는 공동체’라는 자의식이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왜곡되어 오늘 교회는 가장 빨리 남을 제치고 연못 속에 들어가는 것을 학습하는 공간인양 변질되었습니다. 입시철을 앞두고 11월이면 한국에서 한창이라는 입시생을 위한 기도회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교회에 오니 병 낫고, 물질의 축복 받고, 자녀가 성공했다는 간증의 또 다른 변형입니다. 다들 교회와 기도하니 베데스다 연못가에 물이 움직일 때에 일등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자녀들이 입시에 성공하는 체험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오해하는 것이고, 기적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너머가 있음을 알게 하고, 그 너머를 지향해야 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한경쟁의 베데스다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를 전복하는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교회가 만들어 낼 기적입니다.
우리는 과학이나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기적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사용할 때의 쓰임새는 조금 다릅니다. 흔히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돕기 위해 희생한 사례, 초월의 인간애를 기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진정한 기적이란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본성인 이기심을 거스르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기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치유이건, 물질이건, 축복이건 어떤 형식으로든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적이 아닌, 주술이고 미신입니다.
정말 큰 기적이 무엇일까요? 서로 다른 문제를 안고 있는 병자들이 베데스다와 같은 경쟁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살면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가장 소외된 자, 가장 낮은 자를 서로 보듬어 주고 살아가는 것, 그래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평화로울 수 없는 세계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기적을 꿈꾸는 공동체는 공동체와 사회의 가장 작은 자, 가장 대접 받지 못할 자,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두고 다가서는 공동체입니다. 나와 우리의 이기심과 이익, 욕심에 매몰되지 않고 타자를 지향하는 것이 기적을 만들어 가는 첫걸음입니다. 기적은 나를 위한 뭔가를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나를 넘어선 공동체를 지향하며 함께 가꾸고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4.
역사가 주목하는 교회의 변곡점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차별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 나왔습니다. 율법과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교에 토대를 두었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른바 이방인들을 차별 없이 맞아들이기 위해 율법과 할례라는 제도종교의 핵심적인 틀을 포기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근친상간이나 식인을 행한다는 오해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중세 시절, 교황의 세력이 무소불위로 커지고 십자군이라는 광기로 나타났던 그 교회를 성찰하도록 해준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모든 재산을 버리고 청빈을 추구하는 각성 운동을 일으켰던 ‘작은형제회’라는 수도회였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형성의 비극인 노예무역 역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각성한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으로 폐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적같은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바라보고 준비하고 헌신한 이들이 만들어 간 결과입니다.
교회가 기적을 일으킨 사건으로 기억할만한 역사의 사례들은 교회가 교회밖의 타자, 이방인, 나그네에게 관심을 전환할 때였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멈춰 서서 교회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존속을 위해서는 이같은 기적이 필요해 보입니다. 실상 전방위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배제와 혐오를 실천하고 있는게 교회인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때로 우리 무릎의 힘을 빼 놓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고 구현할 수 없는 이데아 속의 기적을 여전히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많은 과오로 이 땅에서 사라졌어야 마땅했을 것 같은 그 교회가 이기심을 내려놓고 타자를 용납하는 기적을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기적은 얼마나 냉철하게 본질 앞에서 성찰하고 방향을 잡아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게 기적을 준비하는 길입니다. 기적은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배제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통해, 우리가 가꾸고 만들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적은 문제의식을 가진 개개인이 마음을 모았을 때 성취될 수 있는 필연의 사건입니다. 그 전제는 낙심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포기할 수만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기적을 준비해야 하는 한 가지 당위가 우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는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고, 인간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기적 위에 세워졌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와 마지막 모임을 하게 된 모든 분들이 VIEW에서 함께 한 경험을 안고 한국 교회의 기적을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동역자로 더욱 든든하게 서 가시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2019년 7월 20일 토요일
마르다와 마리아 _ 최주훈
<마리아와 마르다>
이전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눅10:38-42)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민했던 대목인데, 참고가 될까 해서 몇 글자 다시 남겨본다. 이 본문은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 단순히 말씀과 노동의 우위를 따지는 본문이 아닌 건 확실하다. 특이한 해석 중 하나는 여성인권문제로 접근하는 방법인데, 케네스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보는 예수, 239-301)가 대표적이다. 상당히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난 좀 다른 방식으로 이 본문을 들여다본다. 미쉬나 전통을 배경에 깔고 이 구절을 해석해 보면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미쉬나에서 명령하는 ‘손님 접대법’에 충실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때문에 이제껏 읽어왔던 독법과 전혀 다른 뉘앙스로 본문을 읽어낼 수 있다.
못된 언니 마르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니라, 미쉬나에 기록된 대로, 주인의 권리를 손님으로 오신 지혜자에게 넘겨주며 율법에 순종하는 마르다, 게다가 자기 동생의 역할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연장자의 권리를 사용하라며 손님 예수께 겸손히 말을 올리는 착한 여인의 뉘앙스가 바로 그것이다.
그 다음 예수님의 반응 역시 주목할 만하다. '마르다를 두 번 부르는 것’을 두고 화가 나거나 짜증 섞인 예수님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게 통념적이지만, 나에겐 전혀 다른 색깔의 목소리로 들린다. 마르다를 인정해주고 사랑하는 예수의 온유한 목소리로 말이다.
마리아도 미쉬나 율법에 충실하다.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이 증거다. 미쉬나의 율법, 손님 접대법'에 보면, ‘지혜자가 집에 왔을 때 그에게 눈과 귀를 가까이 청종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리아는 그 율법을 그대로 준행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케네스 베일리는 ‘발치에 앉았다’는 표현을 중동의 일반적인 화법이라고 말한다. 특히 바울이 ‘가말리엘의 발 밑에서 자랐다’는 인용구를 들어 ‘제자가 된다’라는 해석을 한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마리아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르다나 마리아 모두 율법에 순종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본문은 둘의 우열, 마리아와 마르다, 또는 '노동'과 '말씀 듣는 것'의 우열을 가리고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관심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한 가지만 언급하면, 등장인물의 이름 속에 담긴 비밀이다.
마르다는 ‘주인’이란 뜻이다. 마르다는 이름에 걸맞게 주인의 권리를 (율법에 따라) 예수에게 넘겨준다. 칭찬받을 일이고 칭찬 받는다.
마리아는 어떤가? ‘좋은 것’이란 뜻이다. 아주 흥미로운 대목은 마지막 구절이다. 여기 보면,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들었을까?
‘마리아는 마리아를 택했다. 그러므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을 택했다. 그러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예수 앞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예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누구도 그 생명의 고귀함과 존재의 가치를 빼앗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히 깨닫는 순간 영원한 생명의 신비가 열려졌다는 의미도 여기 있다. 누가복음서 기자는 이 사건을 통해 ‘영생’의 신비가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다 마리아의 이야기는 이미 눅10:25절부터 시작하는 율법교사와 예수의 대화 주제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주제? 영생이다.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란 길로 설명하고, 곧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꺼내놓는다. 이건 영생을 위한 이웃사랑 항목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지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하나님사랑에 해당하는 항목으로써, 궁극적인 영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체를 문학적 기법으로 보면, 중동문학에서 흔히 보이는 ‘수미상관법’(댓구법)에 속하는 것 같다.(이 기법을 베일리는 아주 강조한다. 그래서 혹자는 누가 복음서 기자보다 베일리가 댓구법을 더 좋아한다고 할 정도다.)
어찌되었건, 누가복음서 기자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청중들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예수 앞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영생', 곧 하나님사랑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야 한다. 내가 어디 서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목사, 장로, 기업인, 정치인, 이라는 것은 모두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 서 있는지 근본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 지 알아야 산다. 개 속에 늑대의 유전자가 있다는 것까지도 알아야 하듯, 우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파멸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 존재의 신비를 깨닫는 길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누가복음서 기자가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던 “복음”이 아니었을까?
설익은 내 해석이다. 설교 준비하다가 생각나는대로 주절주절 써 본다.
#설교 #메모 #단상
2016년 4월 29일 금요일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해석·관찰·적용으로 이어지는귀납적 성경연구법
해석·관찰·적용으로 이어지는귀납적 성경연구법
- 목회와 신학 2012년 3월호
진지한 성경 연구의 필요성
1.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몇 년 전, 성경의 한 본문을 연구하다가 다른 목사님들은 어떻게 설교하시는지 궁금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본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매우 놀라운 경험을 했다.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구성 면에서 주요 해석과 적용은 말할 것도 없고 표현까지 비슷한 것이 아닌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生)을 드리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결심을 하고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일 텐데, 어쩌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설교를 베끼게 됐을까? 원래부터 다른 사람의 설교로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계획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성경에 있는 ‘그’ 내용보다는 ‘다른’ 내용, 즉 독특하게 생각할 만한 것을 찾고 전하려 한다는 데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런 식의 ‘독특한 설교’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이 부교역자로 있는 목사님에게 성경 한 본문을 보여주면서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목사님은 충실하게 본문의 메시지를 잘 설명했는데, 담임목사님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거 말고, 좀 특이한 거 없어?”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으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또한 조금만 자세히 살펴도 하지 않았을 수준 낮은 설교를 왜 매주 하는 걸까? 이와 관련해 어떤 분들은 목회적 상황이 그리 만만치 않고, 또 앉아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와 관련된 원인들을 좀 더 찾아보고자 한다. 그 이면에 숨겨진 더 깊은 차원의 원인을 단 몇 가지만이라도 살펴본다면,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뒤틀려진 목회관과 성경관
먼저 목회에 대한 생각이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목회관의 핵심은 교회 성장 지상주의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이들은 목회의 모든 활동에서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누구에게나 거부감이 없고 좋아할 만한 교회가 돼서 더 많은 사람들이 걸림돌 없이 들어올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때문에 이들은 큰 교회가 하는 것을 따라하기 바쁘고, 유행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데 열심이다.
설교도 이런 전반적인 목회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선 설교가 목회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설교도 교회 성장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본다. 설교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현장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만드는 시간으로 간주한다.
그러니 설교를 위해 성경에서 ‘설교거리’를 찾을 때도 ‘성경 본문의 어떤 특이한 말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해줄까’ 하는 관점으로 성경을 읽는다. 이런 분들은 자신보다 교인 수가 적은 동료 목사나 후배 목사에게 “성경으로 목회하는 게 아니야”, “설교가 다가 아니야”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이 목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조차 없는 듯하다. “기독교란 그 본질 자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교다”?1 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들은 자신이 전하고 강조하는 설교,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프로그램들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무엇을 하든지 교회에 사람들의 숫자만 늘어나면 된다는 ‘실용주의 정신’이 그 어떤 성경의 진리보다 우선한다.
이런 목회관의 근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로 성경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하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히 4:12), 구원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성경(딤후 3:14~17)에 대한 믿음이 없다.
만일 그들이 이를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날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 교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온전히 살아가도록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고 예배에서 설교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해 말씀 선포에 힘쓰지 않겠는가? 교회의 목표와 그에 따른 인적·물적 자원 배분, 각종 행사나 프로그램 등을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그 뜻대로 정하지 않겠는가? 경영자 또는 상담가로서의 목회자 상(象)은 그에게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며, 남의 설교를 참고는 할지언정 성경연구를 통해 먼저 자신이 배우고 믿어 순종한 후 그것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려고 할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졌을 때 쇠퇴기에 빠졌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다는 로이드 존스의 말을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2
3. 진지한 성경 연구의 필요성
한 목회자가 변하면 한 교회가 변한다. 현재 나타나는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이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첫 번째 원인은 바로 ‘목회자’다. 목회자가 먼저 변해야 한다. 목회자가 변하면 목회자는 바른 설교를 할 것이고, 그 설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모든 성도들이 변할 것이다. 이는 즉, 교회가 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길밖에 없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지한 성경 연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 앞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세로 서는 것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그 성경 말씀으로 생명에 이르고 그것이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원천임을 믿는 것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회자로 부르신 이유가 말씀을 가감 없이 온전히 선포하라고 주신 사명임을 믿고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자의적인 판단이나 개입을 자제하며 본문 내용의 객관성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지 않고 그 아래 있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이 제시하는 길로 걸어가고자 하며, 그 말씀이 주는 지혜와 능력으로 새롭게 될 때 목회자는 변한다. 그것은 이 한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계속돼야 할 과정이다.
성경연구방법론
24년 동안 매주 신학대학원에서(현재 15개 신학대학원에서 활동) 신대원생들에게 성경 연구방법과 성경을 가르치는 동안 축적된 연구방법론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일반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기존 방법론에서 좀 더 발전시킨 방법론의 전체 그림을 제시하려고 한다.
1. 올바른 성경 연구의 전제
첫째로 성경에서 특별한 것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성경 연구는 특별한 해석, 남들과 다른 해석, 남들이 하지 않았던 해석을 하려는 생각을 버릴 때 시작된다. 많은 목회자들이 통찰(insight)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이를 종종 성경 본문의 의미와 상관없는 독특하고도 주관적인 해석으로 오해한다. 통찰이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들을 보다 올바르고 통합적이며 바른 신학적 관점에서 그 관계의 의미를 재조합해 내는 일이다. 선입견이나 상투적인 해석과 설교를 조심하면서 본문 자체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의미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며, 해석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둘째로 성경을 연구할 때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기 전에 본문을 붙잡고 수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석이나 설교집 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신앙의 선배들이나 뛰어나신 분들의 글은 귀한 교회의 유산으로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연구하기 전에 그런 글들을 접하면 오히려 연구에 많은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성경 본문 그 자체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분석 혹은 종합하고 이해하며 묵상하는 식의 연구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회자는 무엇이든 쉽게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귀한 신앙의 선배들 모두가 다 그 시대에 참고할 만한 자료들이 있었지만, 성경 본문을 붙잡고 수고하고 땀 흘리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해석을 위한 관찰
1) 관찰은 왜 어렵게 느껴지는가?
‘귀납적 성경 연구’는 성경 본문 자체를 강조하기에 관찰 방법이 발달해 있다. 그래서 문제도 발생한다. 15년 가까이 목회자와 신대원생들에게 성경 연구를 가르치면서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 관찰과 관련된 것이다. 성경 본문을 반복적으로 읽고 다양한 관찰 방법을 사용하다 보면 2~3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그런데 많은 경우 수고한 만큼의 해석이란 성과가 없어 지치곤 한다. 즉 효과적인 관찰을 하지 못한 것이다. 성경 말씀을 잘 연구하고 올바로 이해해서 말씀을 잘 전하려고 성경 연구를 시작했는데, 시간만 많이 소요되고 그 성과는 별로 없다면 얼마나 힘이 빠지겠는가?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그것은 관찰과 해석이 분리됐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해석을 위한 관찰’이 아니라, ‘관찰을 위한 관찰’을 했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르칠 때마다 “관찰과 해석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며, 관찰은 해석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찰은 절반의 해석이다”란 표어도 그래서 만든 것이다.
어느 모임에서 이렇게 가르치자, 한 전도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목사님, 해석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해석을 몰랐다. 해석을 몰랐기 때문에 해석을 위한 관찰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석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호한 말인가? 한 절 한 절 다 설명할 수 있으면 해석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언제쯤 멈추면 되는가? 해석을 하다가 중간에 멈추면 어느 정도 해석이 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어디서부터 다시 봐야 하는가? 이와 같이 해석 자체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을 위한 관찰을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해석 중심의 성경 연구
성경연구방법론이나 성경해석학을 다룬 여러 책들을 보면 해석 개념이 어렵게 설명돼 있다. 원어와 당시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할 때는 해석이 멀게만 느껴진다.
실용적으로 해석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왜 성경 연구를 하는가? 성경 말씀의 ‘내용’뿐만 아니라 ‘의미’, 즉 하나님의 뜻(메시지)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큼만 하나님의 뜻을 알면 되지 않는가? 즉 연구자가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 은혜를 충분히 받는다면, 또한 설교자가 본문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면 해석은 된 것이 아닌가? 혹 이 과정에서 역사적·문화적 배경 이해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원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없더라도 해석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해석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우선 성경 본문의 중심사상(Main Idea)을 알아야 한다. 성경 본문의 통일성을 인정한다면, 일정한 성경 본문은 하나의 중심사상을 갖는다. 그 하나의 중심사상을 말하기 위해 그 본문 내용이 있는 것이며, 그 본문은 그 중심사상으로 통일성을 갖는다. 둘째로 하위사상(Sub Idea)을 알아야 한다. 하위사상은 중심사상을 지지하는(supporting) 진리요, 메시지다. 중심사상을 전개하기 위해 그 본문은 여러 개의 하위사상들을 갖는다. 중심사상과 하위사상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셋째로 중심사상과 하위사상을 통합하는 흐름(문맥)과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연구자는 해석을 위해 관찰을 해야 한다.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서 혹은 여러 관찰 방법을 사용하면서 중심사상, 하위사상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와 본문의 구조를 알기 위해서 애써야 한다. 좋은 관찰은 ‘해석을 하는 관찰’이다. 이렇게 무엇을 위해 본문을 읽고 관찰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안다면 보다 효율적인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관찰이 아니라 해석이 이끄는 성경 연구의 기본구조’로 이해하는 것이다(<표 1> 참조). 이렇게 해야 관찰 방법 자체에 매몰돼서 수고했음에도 그 결실이 적은 아쉬움, 관찰과 해석이 분리되는 비효율적인 연구 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
<표 1>
기존 구조 관찰 → 해석 → 적용
새로운 구조 해석 → 관찰 → 적용
3) 어떻게 하면 잘 관찰할 수 있는가?
성경연구법을 다룬 책들을 보면 관찰 방법이 많고 복잡하다. 그 많은 관찰 방법을 다 따라야 하는가? 정답은 없겠지만 대략의 생각을 말해본다면, 첫째로 가장 일반적이고도 필수적인 관찰 방법을 알아야 한다. 특별한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에 주목하기보다는 어떤 본문이든 적용할 수 있는 가장 필수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적은 수의 방법을 잘 사용하자.” 둘째로 관찰을 자꾸 방법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그냥 ‘읽기’로 이해해야 한다. 방법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방법 없이 그냥 읽게 되면 중요한 내용들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 연구에 익숙한 분들은 방법 없이 그냥 읽으면서 필요한 내용들을 다 파악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안 되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에게는 약간의 관찰 방법이 필요하다.
가장 필수적인 관찰방법은 후에 다루겠다. 여기서는 관찰의 기본으로 읽기를 다루고자 한다. 성경은 자세히 읽어야 한다. ‘자세히 읽기’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생명과 경건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갖는 진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자세히 읽어야 하냐?”고 질문한다. 그냥 자세히 읽으면 되는데 자세히 읽기에도 방법이 필요한가 보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참고해 제시하자면 ‘체계적 읽기’, ‘꼼꼼히 읽기’, ‘낯설게 읽기’, ‘적용적 읽기’ 등이 있다. 체계적 읽기는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부차적인가를 구분하면서 읽는 것이다. 꼼꼼히 읽기는 본문의 한 자 한 자가 다 필요해서 기록됐다고 믿고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읽는 것이다. 낯설게 읽기는 선입견이나 ‘익숙함’에 의해 간과하는 부분이 없도록, 아무리 익숙한 내용이나 표현이라 할지라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대하는(‘거리 두기’) 것이다. 적용적 읽기는 적용의 방향을 먼저 나에게 향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말한 몇 가지만 유의해도 충분히 제대로 된 관찰, 즉 효율적이면서도 유익한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필자가 가르치면서 느낀 목회자들이 흔히 빠지는 어려움들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기본 개념이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니, 나머지 필요한 정보들은 여러 좋은 책들을 참고해서 얻기 바란다.
3. 원리에 기초한 해석
1) 해석의 3대 원리
앞에서 관찰할 때 해석이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을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정리한 중심사상, 하위사상 등이 잘못된 것이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해석 원리’가 필요하다.
해석 원리는 성경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을 거쳐 교회 안에서 정립된 원리다. 이 원리는 여러 전통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원리들을 좀 더 쉬운 표현으로 세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문맥에 적합한 해석’, ‘하나님 중심적 해석’, ‘본문에 근거한 해석’이다. 이 외에도 여러 해석 원리들이 있지만,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적용하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알아 가면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해석 원리는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가장 중요한 원리들로 간주하는 것으로, 주석서들을 보면 이 원리에 따라 주석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문맥에 적합한 해석 원리’는 문맥, 즉 글의 흐름을 단어나 문장 혹은 문단의 의미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한 단어나 한 문장은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문맥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앞에서 말한 중심사상은 문맥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특히 중심사상과 문맥은 해석의 방향도 잡아주기 때문에 부분적인 난제를 쉽게 해결하는 해석적 유익도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 중심적 해석 원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인격],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사역] 대해 먼저 주목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자, 하나님에 대한 계시다. 연구자들은 이 두 번째 원리에서 가장 많은 실수를 한다. 연구할 때나 설교할 때, 사람 편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살리신 것에 대해 증거하는 종교다. 그러므로 본문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에 대해 한두 마디만 나오더라도 주목해야 한다. 설령 본문에 그것이 나오지 않더라도 전후 문맥 속에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어떤 식으로 이 본문에 영향을 끼치는지, 또는 배후로 작용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 통해 행위 이전에 은혜를, 명령법(imperative) 이전에 직설법(indicative)을 붙잡을 수 있다.
끝으로 ‘본문에 근거한 해석 원리’는 성경 본문에서 많이 다루고 강조하는 내용에 집중하는 원리다. 이 원리는 특이한 해석으로 멋지고 능력 있고 탁월하게 보이려는 의도로 본문을 제멋대로 재단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말씀의 종이지, 말씀의 주인이 아니라고. 특이하게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동의할 만한 것을 더 깊이 더 본문에 충실해서 새롭게 발견하려고 해야 한다. 설교의 능력은 특이하거나 남들과는 다른 독특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겸손히 받아 그것을 신실하게 믿고 충성스럽게 선포할 때 나타나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을 배우지 않았는가? 본문에서 많이 말하고 반복해서 말하는 강조점을 찾고, 명백하게 말하는 것을 이해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원리는 방법이 아니다. 즉 성경을 읽을 때 자연스러운 관점이 돼야 하고 몸에 밴 습관이 돼야 한다. 이 원리에 입각해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고 연구한다면, 대부분의 결과는 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2) 3대 원리에 따른 관찰 방법
해석 원리를 아예 관찰 방법으로 연결시킬 수도 있다. 앞에서 구체적인 관찰 방법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을 기억할 것이다. 몇 가지 방법을 나열하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찰 방법은 해석 원리에 근거해 설정돼야 한다.
<표 2>
해석 원리 해석 원리에 따른 관찰법
문맥에 적합한 해석 문단 나누기
하나님 중심적 해석 하나님 찾기
본문에 근거한 해석 강조점 찾기
위의 <표 2>를 보면 각 해석 원리에 따라 ‘문단 나누기’, ‘하나님 찾기’, ‘강조점 찾기’라는 관찰 방법이 연결돼 있다. 이렇게 한다면 해석 원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또한 이 세 가지가 가장 일반적이고 필수적인 관찰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관찰 방법들이 원칙 없이 소개되며, 그것을 왜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식의 접근은 대단히 중요하다. 배운 대로 여러 방법을 사용하면서 관찰을 열심히 하지만, 왜 하는지 몰라서 즉 어떤 원리에 근거해 그 방법이 도입됐는지 알지 못해서 결실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수고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원리적인 접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 귀납적 방법의 약점을 극복하는 복음적 해석
그레엄 골즈워디는 귀납적 연구 방법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 접근 방법(귀납적 방법-인용자)은 실질적으로, 본문이 성경 전체의 통일성과 어떻게 부합하며, 따라서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지 혹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능력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엄청난 가정들을 창출한다. 그것이 일종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3 흔히 귀납적 성경 연구라고 하면 한 본문을 자세히 살피고 그곳에서 신자의 삶에 유용한 몇 개의 교훈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본문을 다른 성경과 동떨어진 외딴 섬처럼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귀납적 성경 연구가 아니다. 하나의 독단이 형성되기 쉬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귀납적인 연구는 철저히 성경 본문 그 자체에 근거를 두겠다는 것이고 따라서 작게는 한 본문, 크게는 성경 전체를 텍스트로 보고 연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성경의 각 부분(한 문단, 한 장 혹은 한 권)은 성경 전체의 한 부분으로 존재할 때 온전한 본모습을 갖출 수 있다.
그래서 ‘복음적 해석’을 해야 한다. 복음적 해석이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뜻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됐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다 알려졌다(엡 1:8~10). 즉 복음이 선포된 것이다. 만유의 주로 높이 들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이 구원의 경륜을 이루어가시면서 다스리신다. 오늘 우리는 신약시대, 교회시대, 성령의 시대, 은혜가 충만한 구원의 시대에 살고 있는 목회자들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며 설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창세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점진적인 구원역사의 발전과 전개, 즉 구속사를 공부해야 한다. 사람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야 한다.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교회의 탄생에 대해 낱낱이 검토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적 중요성과 만유의 주로 높이 들리시며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만물을 통일하시는(엡 1:10)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해야 한다. 목회자는 이를 위해 부르심 받은 자들이다.
5. 적용
해석이 성경 연구의 꽃이라면, 적용은 열매다. 적용을 통해 성경 연구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계속 성경 연구를 할 수 있는 힘도 얻을 수 있다. 교회사를 볼 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항상 경건 혹은 거룩의 필요성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적용하지 않는 성경 연구는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는 적용할 때 놓치기 쉬운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원리화’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 원리화란 성경 본문에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타당성을 갖는 영적·도덕적 혹은 신학적인 원리들을 발견하려는 시도다. 성경 해석의 일차적 목표는 ‘성경 시대 당시의 의미와 원리’지만 ‘그때 거기서(then and there)’의 원리를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그대로 ‘지금 이곳(now and here)’에서 적용할 때 잘못된 적용이 될 수도 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살전 5:26)란 본문을 생각해 보자.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문화가 지금도 통용되는 곳도 있겠지만, 한국적 상황에서 그런 인사를 하기 위해 접근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결코 그 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중심사상적 적용’을 해야 한다. 적용을 할 때 흔히 범하는 실수는 적용하고 싶은 것만 적용한다는 점이다. 당장 필요한 것만 취하려 하고, 자신의 생각과 삶을 크게 바꿔야 하는 도전적인 말씀은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 회피하려는 성향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에서 가장 주력해서 말하는 중심사상(혹은 그와 더불어 하위사상)과 관련된 것을 ‘적용점(application points)’으로 붙잡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고 그것이 연구자에게 쉽지 않은 도전이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히 받고 순종하려는 자세로 엎드려야 한다.
셋째로 ‘구체적인 적용’을 해야 한다. 피상적인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피하는 또 하나의 전략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어느 때, 어떤 사람들과 관련해,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를 고민할 때 그 말씀은 살아서 힘 있게 다가올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그 말씀을 붙들고 고민하며 살아내지 않는 자가 어찌 참된 설교자가 될 수 있겠는가?
맺음말
케빈 J. 밴후저는 성경 연구의 네 가지 자세를 정직성, 개방성, 집중성, 순종이란 ‘해석의 덕목’으로 제시한다.4 이런 덕목들은 성경 연구가 어떤 정신과 관점 위에서 이뤄져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경 연구에 게으르거나, 설교와 가르침 등의 실용적 목적으로만 말씀을 연구하는 기능적인 접근이나, 성경적 관점이 아닌 개인의 필요 또는 세속적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성경을 오용하는 잘못된 신학적 태도는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 연구를 할 때 꼭 고려해야 할 네 가지를 정리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경 연구는 ‘교회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깨달음과 거룩한 지식의 축적(교리나 성경신학 등)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성령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혼란은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마치 기독교가 20세기에 시작된 것처럼 역사와 전통을 외면했기 때문에 나타났다는 주장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로 소위 QT식의 성경 읽기를 극복해야 한다. 다소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요즘 잘못된 성경관을 근거로 성경을 주관적이고 상대주의적으로 읽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내게 주신 말씀’이란 말은 이 유행을 잘 반영한 표현인데, 성경은 교회에 주신 보편적인 말씀이지, 내게 주신 개인적이고 특수한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할 때 내게 ‘강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나의 느낌이나 주관적 판단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정해지는 것인가?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성경 본문에 기록된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읽는 이의 주관적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객관적이고 보편적 의미에 기반을 둔 ‘함께 성경 읽기’가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셋째로 성경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수반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한다. 성경 연구를 지적인 작업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다 이해한 말씀을 적용하려고 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자 손을 뻗는 그 순간에 이미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하시는 내적 증거(Inner Witness)의 역사, 성경을 연구할 때 그 말씀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조명(Illumination)의 역사,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소망을 주시며 굳어진 마음을 녹이고 고집을 꺾으시는 성화(sanctification)의 역사를 행하신다.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성경 연구는 이렇듯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하는 과정임을 믿고, 목회자는 하늘의 지혜와 능력을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성경을 대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성경이 소위 ‘성직자’의 전유물이었던 중세 로마카톨릭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지 못했기에 그토록 이단적 사설이 만연하고 부패와 타락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성경은 어렵기 때문에 평신도가 봐서는 안 될 것으로 주장했던 로마카톨릭에 대항해,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의 명료성(Perspicuity of Scripture)’이란 진리로 맞섰고, 모든 성도들의 손에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들려주기 위해 목숨 걸고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기 위해 애썼던 것이 아닌가? 일주일에 한 번도 성경을 진지하게 읽지 않고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을 구원받은 자로 인정해주는 현대 교회의 흐름과 문화는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매일 연구하는 것(Daily Bible Study)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필자 정보 - 이혁
아나톨레 대표.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B.A.), 동 대학교 대학원(M.A.), 총신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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