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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일 토요일

부동산문제와 그리스도인_주택임대차보호법_김요한

1. 7월 30일에 계약 갱신 청구권과 전월세 상한제를 골자로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그다음날인 7월 31일부터 즉각 시행에 돌입하였다.

2. 이번에 통과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의 핵심인 '계약 갱신 청구권'은 건물 임차에 있어 2년 간 1차 연장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고, '전월세 상한제'는 기존 계약을 갱신할 때 임대료 상승폭을 최대 5%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다.

3. 새로 제정된 주책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되기 직전 혹은 직후부터 이 법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혹자는 이 법이 기존의 주책 임대(차) 시장 질서 및 관행을 붕괴시킬 것이라 주장하고, 서울 강북에 집을 한 채 갖고 있고 강남에서 전세를 사는 어떤 국회의원은 자신을 '임차인'이라고 주장하며 마치 이 법이 임차인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처럼 사자후를 토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단체로 모여 '왜 내 집에서 세입자를 마음대로 못 내보내냐?'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조차 등장했다.

4. 더욱이 무슨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모임인지 뭔지 하는 집단에서는 아예 이번에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헌법에 규정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위헌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니, 혹여라도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다 한들 그들이 추구하고 지지하는 나라의 모습이란 게 오로지 가진 사람들의 이익과 권리 보존에만 몰두하는 나라일 듯 싶어 정신이 아득해지기까지 한다.

5. 주택임대차보호법에 극렬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의 핵심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경제적 권리'가 자리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개인의 재산권을 왜 사회가 규제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사실상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도 안 된다. 국가 혹은 사회가 무엇이건대 개인의 돈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뺏어가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런 주장이 온당한 것인가?

6. 주택임대차보호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내가 뼈빠지게 일해서 천신만고 끝에 장만한 집"을 왜 사회가 이래라저래라 하느냐고 한다.
그런데 이 주장도 틀렸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뼈빠지게 일해서' 집을 장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까말, 우리 사회에서 순전히 자기가 노동을 통해서 번 돈만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있다면 몇 명이나 있을까?
유주택자들 대부분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샀거나- 이 경우 은행의 돈은 누구 돈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광의의 의미에서 은행의 돈 역시 사회 공금이다- 혹은 부모에게서 다양한 편법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식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들이 '뼈빠지게'란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정말 '뼈빠지게' 일하는 노동의 고통과 눈물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7. 한편으로 지금  이 시국에 부동산 문제로 온 나라가 양분되어 내전에 가까운 분열과 갈등을 노출하는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 지각있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현 정부를 향해서 더 이상 실기하지 말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건만 정부-여당이 미적거리다가 부동산이 겉잡을 수 없이 폭등하면서 사후약방문격으로 뒤늦게 팔을 걷어붙인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8. 그럼에도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동산 문제에 대해 내 나름의 생각과 입장을 밝힘으로써 몇몇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판단에 약간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이 글을 쓴다.
만일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이번에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경도된 현 정권이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박탈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9. 성경은 오로지 '영적' 문제만을 가르친다고 믿는 많은 보수적(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달리 사회 문제,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당연히 그런 이슈들에 대해 다각도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성경이 사회 문제에 발언하는 것의 상당수는 '부동산' 정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공평하게 '배분 받아' 사는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성경은 고아, 과부, 나그네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땅을 확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심지어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모든 사람이 원래 소의 땅을 회복할 것을 사회적 구원과 윤리의 궁극적 목포로 제시한다(희년, 레위기 25:23 이하).

10. 부동산 정의에 관한 성경의 통렬한 가르침은 구약성경 예언서에 이르면 더욱 노골적인 양상을 띤다.
주지하듯이 구약의 예언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불의와 부패에 맞서 신적 계시를 선포하면서 투쟁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히 자기 시대의 이스라엘이 부동산 문제에 있어 극도로 타락했다고 비판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언한다. 
가령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정의를 바라셨으나 압제뿐이었고,
의로운 삶을 바라셨으나 고통의 부르짖음뿐이었다.
오호라, 다른 사람들이 집과 밭을 차지할 수 없도록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하여, 이 땅 가운데 홀로 살려 한 너희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이사야 5:7-8).

예언자 미가도 비슷한 말을 한다.

"그들의 침상에서 악을 계획하고 동이 트면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손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밭이 탐나면 밭을 빼앗고
집이 탐나면 집을 빼앗는다.
사람을 속여 그의 집을 빼앗고 그의 재산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계획했으니 너희는 이 재앙을 피하지 못하리라'"(미 2:2-3).

11. 통상 이사야와 미가를 가리켜 최초의 문서 예언자라 칭하는데, 우리는 이들 예언자들이 출현하던 시기에 이미 이스라엘 사회가 부동산 문제로 사회 양극화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구약 예언서(총 16개 예언서) 메시지의 핵심은 우상숭배를 질타하고 사회정의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부동산 양극화 문제를 한편으로 사회정의가 실종된 대표적 현상이자, 탐욕이란 우상숭배의 극단적 모습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본질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12. 신약성경에 이르면 구약의 땅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가르침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수렴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 때문에, 신약에서 부동산 문제를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신약성경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동산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준다.

첫째는 사도행전 2-5장에 나타난 것처럼 오순절 직후에 성령이 충만해진 초기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는 것이다. 즉 성령충만함의 공동체적 결과는 빈부격차의 완화 내지 해소를 위한 사회적 나눔에 있었다.
둘째는 초기 교회가 강력하게 견지했던 종말론적 삶의 모습이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어떠해야 할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지금부터는...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쁨에 넘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그것들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그것은 이 세상의 현재 모습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7:29-31).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종말론적인 소망을 품고 있다면 이 세상의 위대한 가치(행복, 성공, 자랑, 안전에 대한 욕구)들을 과격하게 '상대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교훈한다.

13. 따라서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부동산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는 비교적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사회에서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 불안에 대해 긍휼과 연민의 시선을 가져야 하며,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에 대한 탐욕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물론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집을 소유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소유와 재산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비춰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히브리서 11:16의 말씀을 약속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고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두셨습니다."

만약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그리고 교회 중에 이런 신앙 가치관과 신념이 분명한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필경 우리 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엄청난 진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교회가 천민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오로지 개인의 탐욕과 특권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도 진정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별하고 성찰하지 못한다면, 교회나 사회나 공히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2014년 6월 12일 목요일

불링거(Heinrich Bullinger)가 이해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거룩_박동근 목사

불링거가 이해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거룩

< 박동근 목사강변교회 교육목사 >

시작하는 말

쮜리히의 종교개혁자였던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창세기 17장을 통해 은혜 언약의 본질적 내용을 발견하고 표현한 중요한 신학자였다.

불링거는 언약의 주제를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원칙으로 인식하고언약 주제를 최초로 논문으로 작성한 첫 번째 개혁신학자였다신학사적 의미를 갖는 이 소중한 논문의 제목은 De Testamento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첫 판이 나오기 2년 전인 1534년 10월에 출판되었다.

따라서 불링거의 언약신학의 가치는그가 언약의 주제를 최초로 종교의 주요 요점으로 제시하고 그러한 위치에서 언약을 조망하려 시도한 첫 인물이었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불링거에게 있어 언약은 전 성경의 표적이었다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언약은 전 성경이 가르치려는 교훈의 핵심이며그렇기 때문에 전 성경의 해석학적 틀이기도 하다.

1. 불링거가 이해한 언약신학

불링거는 창세기 17장에서 전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을 요약해내고 있다.

불링거에게 있어 창세기 17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에 대한 공공의 기록으로 여겨지며언약의 단순한 상태를 표현하는 장으로 간주하고 있다그리고 창세기 17장에 대한 불링거의 해설을 살피는 일의 가치는그가 은혜 언약이라는 해석학적 틀즉 해석의 렌즈를 통해 구원의 서정을 조망한다는 데 있다.

구원의 서정을 언약의 구도 속에서 이해하는 일은 몹시 중요해 보인다구원의 서정을 언약의 렌즈를 조망하면,구원의 서정이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특별히 언약으로 구원의 서정을 조망함으로써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일과 거룩한 삶의 추구가 어떻게 조화되는지에 대한 더욱 큰 통찰을 얻을 수 있다구원의 서정이 구원을 직선적으로 조망한다면언약은 구원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언약적 조망 안에서는은혜 언약의 조건성과 관련해 은혜와 행위믿음과 행위에 대한 더욱 풍요로운 시야를 가질 수 있다언약신학은 구원이라는 주제를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구분 아래서 조건약속위협 등의 요소들의 구분을 통해 여러 각도로 바라보도록 돕기 때문이다불링거는 칭의와 성화를 언약의 렌즈를 통해 드려다 보고 있다.

2. 창세기 17장에 나타난 언약신학

불링거가 창세기 17장에서 발견한 중요한 진리는 무엇인가불링거는 창세기 15장과 17장에서 언약의 의미를 조망한다불링거는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언약을 맺으시는 행위를 하나님의 황송한 자기 낮추심으로 여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심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연약함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다그런데 이 언약 안에는 조건(condition)이 존재한다곧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아브라함을 조건을 따라 서로 묶으셨던 것이다.

행위 언약에서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고 그 순종에 따라 영생과 영벌을 각각 약속과 위협의 요소로 갖는다행위 언약에서 조건으로서 순종은 구원의 원인이며 조건을 의미한다그러나 은혜 언약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연합 안에서 공로의 믿음에 의한 전가와 성령의 내주를 통해 성화가 발생한다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믿음이란 도구를 통해 오직 은혜로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진정한 연합을 통해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이들에게 조건으로써 순종은 구원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은혜 언약 안에서 조건으로 제시되는 조건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불링거는 창세기 17장에서 은혜 언약 안에 조건성을 통찰한다곧 불링거에 따르면은혜 언약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조건을 따라 아브라함을 자신에게 결속시키신다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은혜 언약 안에도 순종의 요구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아브라함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Walk before me and be upright, 창 17:2). 여기에서 순종의 요구는 구원의 조건으로 혹은 공로신학적 의미로 요구되지 않는다불링거는 이 순종이 오직 은혜의 모토와 모순되지 않는 의미로 요구됨을 통찰한다이러한 조건성순종의 요구가 공로신학이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첫째언약의 주도권과 기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불링거는 인간의 공로로 인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인 순수한 선하심으로부터 이러한 언약을 제공하신다는 점에 있어 그러하다고 가르친다곧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생각할 때하나님과 그의 자비와 주권만이 종교의 기원이며 주안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둘째불링거는 언약의 조건을 지킬 수 없는 유아들을 아브라함과 후손에 포함시킨다.

재세례파처럼 유아들의 구원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불링거에게 있어 언약의 조건들만 고려하고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무시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3. 언약신학에서 본 믿음과 순종의 관계

불링거에게 있어 은혜 언약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불링거는 본문에서 순종의 요구에 앞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고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서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 El Shaddai)는 순종의 요구에 있어 전제이다곧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하나님의 존재와 완전성에 대한 믿음이 언약적 관계의 적용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고그를 모든 사람의 보수자이신 하나님으로서(히 11믿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창세기 17장 1절의 말씀은은혜 언약 안에 순종의 요구가 주어지지만언제나 그 조건의 성취는 하나님의 능력 공급하심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그리고 언약을 맺으시는 대상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엘 샤다이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주권과 은혜를 전제로곧 하나님 자신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기 때문에그리고 너에게 능력을 공급할 것이기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요구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불링거는 은혜 언약의 조건성을 해설한다그에 따르면성도의 삶의 결백과 순결함을 가진 믿음의 신실성은 은혜 언약 백성이 따른 바른 길이다오직 은혜로 받는 구원은 결코 순종의 삶을 배제하지 않는다그러나 그 순종은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적 의미로 추구되지도 않는다.

이처럼 불링거에 따르면창세기 17장의 은혜 언약은 전 성경의 두 가지 중심 주제를 함축한다그것은 칭의와 성화이다성경은 오직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는 진리를 전한다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칭의를 받게 하는 수단인 믿음은 순종을 낳게 한다.

마치는 말

불링거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거룩한 삶의 요구라는 은혜 언약의 두 중심 주제를 십계명 서문에서도 발견한다십계명 서문에는 율법이 주어지는 정황으로써 은혜를 말씀하고 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이 십계명이 주어지는 정황을 살펴보면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그들을 구원하셨다먼저 은혜를 주시고약속 안에서 순종을 명령하셨다계명이 은혜를 앞서지 않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셔서 애굽의 군사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주셨다이 일이 십계명을 주시는 사건을 앞서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타겟으로서 은혜 언약은 오직 은혜를 통한 구원과 은혜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라는 요구를 그 중심 주제로 포함하고 있다그리고 은혜 언약 안에 이 두 중심 주제는 신구약의 통일성 안에서 은혜 언약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언약적 관점에서 구원의 서정이 해설되어야 할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불링거의 가르침은 칼빈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안에서도 메아리치고 있다(Calvin, Comm. on Genesis. 17:1-4; Zacharias Ursinus,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99 참조).

<교수 은퇴 기념 고별 강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_박영선 목사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 박영선 교수, 남포교회, 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

이 원고는 2013년 11월 29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박영선 교수 은퇴 기념강좌의 내용을 강의안에 의존하여 임의로 발췌한 것입니다원고의 일부 내용 중 미흡한 점이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발췌자 송영찬 국장>

인류 역사 속에서 보수주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하고 명예로운 것에 대하여 그다지 깊은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야 하는 보수주의는 이 시대에 과연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궁색하게 보일 수 있다하지만 그 보수주의를 통해 누가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우리는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이라도 실패한 적이 없으셨다심지어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실패가 아니었다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보수주의이다이런 점에서 보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가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Text(역사적 사실)와 Context(역사적 의미)

보수주의는 역사성의 인식에서부터 자유주의와 다르다보수주의는 역사곧 사실을 하나님의 경륜과 약속의 시행으로 본다반면에 자유주의는 역사곧 사실보다는 실존의 공감과 이해에 우선을 둔다그 결과 사실보다는 그 의미에 치중한다보수주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한다반면에 자유주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보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강조한다여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미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사실(text)을 담고 흘러간다이와 관련해 하나님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8-11)라고 선언하신다.

그렇지만 역사라고 하는 시공간 속에서 사실(text)과 정황(context)의 구별은 그리 쉽지 않다오히려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정황(context)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구체적으로 개인의 신앙체험에서 보듯이, text가 context와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text는 그 특정한 context 이외의 것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이러한 점은 자유주의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특히 인문학자들에게 있어 역사의 context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들은 text를 무시한 채 역사를 '반복'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인생을 '윤회'라고 오해하기도 한다그들은 역사 속에 녹아든 text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이것은 마치 학교를 보는 것과 같다학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학교 자체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매년 학생들이 입학하고 승급하고 졸업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윤회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또한 해마다 학생들의 입학과 졸업이 반복된다고 해서 학교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정황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역사의 틀은 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하지만 그 각각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찾아오심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밭에 감춰진 보화는 그 context의 보잘 것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text 자체를 무시케 하게 만든다그와 같이 말구유는 역사지만 그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조작되거나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그러나 보수주의는 text를 감싸고 있는 context를 더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보수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문곧 text를 존중한다하나님은 역사 속에 그 text를 보여주신다그것이 바로 계시이다특히 구약이 그렇다구약에는 문맥이 있다그 문맥이 없다면 신약조차 있을 수 없다이런 이유에서 보수주의는 하나님만이 주도권과 능력을 행사하시며 그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신학 원리로 고백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text를 context 없이 전하면다만 고함과 공허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그러니 context 속에서 text를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전후 사정이 없다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

구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해서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지를 보아야 한다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충돌을 통해 자신을 보이셨다그것이 바로 계시였으며 이 계시는 전인격적인 성숙을 그 목적으로 주어졌다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context와 text 자체또 이해와 설득이 모두 하나님께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따라서 역사의 내용과 사실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근거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이에 대하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야곱이 경험한 벧엘 사건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창세기 28장 10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야곱에게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신다야곱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이시다조부와 부친의 하나님 곧 과거의 하나님이시며동시에 야곱의 하나님 곧 현재의 하나님이시며그 하나님께서 조상들에서 하신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여기에서 그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2.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하나님의 역사성으로 실제가 된다곧 역사라고 하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야곱은 역사의 문맥인 정황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가 있다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유산(모태 신앙), 체험(극적 회심), 기복(현실)이 동기가 되거나 정황(context)을 가지는 경우이다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서 text를 만나게 된다.

둘째는 개인 현실에서 느끼는 실존적 결단현실적 필요정체성의 질문 등에 의해 구체화 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특성도 갖게 된다그리고 이 정황(context)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오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 특성을 전부 가지거나 균형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의 정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인정한다감리교에서는 헌신과 열정을 강조하게 된다순복음에서는 체험적 신앙을 그 정점으로 가진다이런 것들은 모두 text의 정황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그 결과 설명이 달라진다본문즉 text는 동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황을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그것을 가지고 서로 신학이 다르다고 매도하면 안 된다.

잘 아는 것처럼 각자 자신이 정황을 이해하는 방법들의 다양성즉 그 장점들이나 또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거나 증언을 하게 된다이것이 변증이고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균형과 종합을 위해 하나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이런 점에서 각각의 신학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방식과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정황 이해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자유주의에서는 context를 공감하고 납득하는 방식을 취한다거기에는 남다른 열심과 정열이 있다심지어 감동과 환희사색과 성찰도 있다그들은 누구보다 이 방면에서 많은 고뇌를 한다하지만 그 결과는 체험주의이거나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정황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시도들 때문이다반면에 보수주의특히 장로교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

보수주의는 일종의 원어민과 같다고 할 수 있다신앙이 모국어인 자신들은 실상 자기가 가진 유산을 잘 모르기 마련이다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를 한다특히 문법과 철자를 사용함에 있어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그렇다고 해서 외국인들이 원어민들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신앙 그 자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성경 원어나 성서 역사의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왜냐하면 별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히브리어희랍어라틴어독일어 심지어 불어까지도 공부한다그리고 이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그러나 정작 그들은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잘 아는 것처럼 언어()는 역사와 유산으로 만들어 진다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text를 대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된다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역사를 인정한다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거기에서 구체적인 정황을 찾으며 마침내 역사의 완성을 보고 있다이것이 다른 점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은 체험(확인), 헌신(열정), 공감(실존등이 결국 하나님의 크기와 약속과 능력 그리고 성품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이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혹시 그와 같은 모든 정황들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보수주의는 결국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역사의 완성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비록 자기 자신이 속한 역사의 성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정황을 해석하고 변증함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다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인 신학이라거나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다름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오히려 서로 배타적일 때 기독교 신앙을 훼손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 사실을 교회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처음에 가톨릭에서는 장엄한 형식과 아름다움에 text를 담아 자신들의 진심을 표하는 방식을 강조했다그래서 가톨릭은 성상이나 성화와 미사 혹은 화려한 예식(일곱 성례)와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러한 가톨릭의 형식이 오히려 text를 가린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로써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들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이것들은 모두 사실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그래서 개혁자들은 선포 위주의 방식을 택했다이때부터 설교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계몽주의 영향을 받게 되자 설명이 강조되기 시작했다그래서 사람들은 정통적인 선포 위주의 설교를 설명 위주의 설교로 바꾸게 되었다그러한 설명을 통해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신앙을 납득시키고자 했다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 방식이다.

또 다른 방식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사실이 중시된 선포에서 사실은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만을 강조하는 방식이 등장했다이로써 사실은 더 이상 실제적이지 않게 되었다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방식이다이 자유주의에서는 내용의 공감만을 강조하게 된다.

3. 자유주의를 향한 질문

자유주의에서는 text보다는 context의 의미가치이해공감 등에 강조점을 둔다때문에 그들은 초시간적 추상적 개념들에 초점을 둔다한마디로 이것은 환상적이다그러기 위해 그들은 이 추상적 개념들을 도입함에 있어 실존성을 강조한다왜냐하면 context의 의미가치이해공감 등을 실감해야 할 자아곧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고무적이다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앙으로 이끄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우리는 그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자칫하면 이 길만이 신앙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인식론을 향해 질문해야 한다곧 인간이 다만 신적 의지와 능력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라면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수주의 곧 개혁주의는 답을 해야 한다그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인간의 선택과 책임은 명예요 영광이다.

둘째그러나 인간의 공감과 이해에 의해 성립되는 신의 존재나 의지일 수 없다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움과 피조물로서의 한계와는 진정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셋째신앙인의 감격은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그의 선하심과 능력에 근거한다.

성경은 이상의 사실들을 증거한다곧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언한다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진술이다생각한다고 해서 존재 있는 것이 아니다존재하기 때문에 생각도 하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그러나 그 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존재만 인정하게 되면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무척이나 성경 본문에 충성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그러나 그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한다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지만 생각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야 한다일반적으로 개혁주의는 인간의 이해에 묶인 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반면에 자유주의가 말하듯공감을 요구한다는 점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근거가 되거나 출발점은 되지 못한다나와 현재라는 정점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한편하나님의 임재가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여러 죄악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그래서 선지서들은 징벌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며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은 은혜가 된다고 말한다그것은 도덕이 아니며윤리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함이다곧 하나님의 없음이 벌이고 그것이 곧 재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상을 볼 때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 분명해진다.

먼저 (1) 교리를 외우듯이 거대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누려야 한다이 교리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교리는 나중에 이해하게 된다거기에 인격이 따라야 한다곧 하나님의 일하시는 정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리를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타인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배우는 것과 같다.

집나간 자식이 정신 차리는 문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증명한다반면에 집에 있는 자신의 유익과 명예에 대한 책임도 말하고 있다큰 아들에게 있어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비난이 전부라면 결코얘야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담긴 부요함에 참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이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한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누리고 있어야 한다여기에는 큰 법칙이 있다.곧 교회 안에서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원칙이다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며그리스도 안에서 이 부요함과 신실함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역설이 담긴 text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보수주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그 첫 번째가 바로 보수주의가 대면하고 있는 과제이다곧 (1) 유신론 안에서 전체 세계관이 항상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2) 교회가 (죽은전통주의 항목context가 배제된 채로 text에 집착하는 경향을 지녀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말하는 성경으로서 text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제임스 사이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필연과 자유를 관념의 세계에서 생각지 않고, '신 앞에 서 있다하는 현실에서 생각한다면그리고 내가 '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으며동시에 '모든 것은 내개 달렸다'는 것을 안다면이 두 개의 조화될 수 없는 명제를 두 개의 분할된 타당성의 영역에 돌림으로써 내가 살아가야 할 역설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또는 어떤 신학적 기교로써 이 둘의 관념적 화해에 도움을 주려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스스로 취하여 함께 살아야 하며또한 함께 살 때만 이 두 가지는 하나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 “모든 정황에 네가 들어가 살아라.”이 명령을 기억하라이럴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반면에 text에서 보이는 역설을 잘못 수용할 때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신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역설적으로 이해한 진술이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의 입장을 비역설적으로 진술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2) 대부분의 비역설적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거나 인간의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끝을 맺는다즉 그들은 펠라기안이거나 극단적 초칼빈주의로 흐른다펠라기안주의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로 책임을 넘긴다.초칼빈주의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넘긴다.

3) 역설을 의지하는 것의 약점은 멈취야 할 지점(경계)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한계를 정할 외적인 객관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역설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그런데 사실 그 지점을 알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5. 신학과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

과연 신학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하나님에게인가아니면 인간에게인가여기에 하나님과 학문의 대립이 있다계시와 인식의 대립이 있다사실과 의미의 대립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학문의 대상일 수 없다곧 신학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학이 존재하는 거다마찬가지로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인식을 필요로 한다인식을 위해 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사실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게 된다의미를 가지기 위해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이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이것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그리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우연 속에 있는 존재라면의미와 이해와 객관적 기준을 가지지 못하며 다만 억지가 된다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실은 우연으로부터인가필연으로부터인가우연이면 사실은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허무주의에 불과하며역사는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곧 역사가 우연이라 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반면에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그 필연을 만드신 분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미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어느 것 하나도 역사의 사실은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곧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실패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에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근거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곧 인간은 자신과 현실을 설명할 세계관을 필요로 하고대부분은 내용보다 어떤 주류나 인물로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그래서 대부분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다만 지도자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보전 하려고 한다자기가 아닌 칼빈이나 박윤선을 내세우는 것으로 모두를 납득시키려 한다그리고 칼빈을 모르면박윤선을 모르면 신학이 다르다고 함으로써 책임을 모면하거나 그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한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위대한 장수라고 하면 오다도요토미도쿠가와를 내세운다그런데 그들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복종한 무지하고 순종적인 병졸들 때문이었다우리는 오다도요토미도쿠가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병졸들을 보아야 한다.

병졸들의 무지와 순진은 절대적 다수에게 준 복이다그러니 지도자들이라면 우월함으로 자신을 확인하려말고 유통업자 같은 역할임을 기억해야 한다여기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기쁘신 은혜에 속한다여기에는 우리의 승인이나 획득이 필요하지 않는다단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공감하거나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의존의 책임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가지는 것이다때문에 교육과 진심으로 그들을 공감시켜서 자신의 짐을 덜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여기에서 우리는 실존적인격적 요소인 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1) 실존적이라는 말은 관념적이지 않고구체적이라는 것이다바울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롬 12:1). 삶으로써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2) 인격적이라는 말은 기계적이지 않고 더 풍성하고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풍요롭고 풍성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6. 결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그 하나님은 폭풍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신다(욥 40:6).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욥에게 보이신다그러자 비로소 욥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라고 실토하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고 고백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그리고 땅을 보라그리고 그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을 보라이것들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바로 사망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다곧 부활 사건이 그것이다.

그래서 오늘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내일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오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다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우리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이유와 자격 없이 어느 시대나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내셨고 세우셨음을 자랑스러운 명예로 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