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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3일 금요일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_이정순(목원대 신학)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


이정순 교수(목원대 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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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연일 확산되고 있다. 누구도 예측 못한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의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애를 쓰고 있다. 감염을 막기 위해 실시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종교계 역시 건물 중심의 의례 행위를 자제하고 온라인이나 가정에서의 의례로 대체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기독교계 역시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면서 또 일부에서는 여전히 예배당에서의 예배를 고집하면서 이것을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신앙의 가치로 내세우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전쟁 때도 중단하지 않았던 예배를 왜 중단해야 하느냐고 항변하면서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물론 생명을 우선시하는 이 위중한 시기에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얼마 전 대구의 신천지로 바이러스 감염자가 폭증하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는 이제 신천지든 정통 교회든 하나로 보이는 듯하다. 정말 바이러스에 의해 다수의 고귀한 생명이 원치 않는 죽음을 맛보고 있는 시대에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생명이 먼저인가 아니면 종교가 우선인가 하는 질문이 절로 떠오른다.

며칠 전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주일 예배를 강행하던 한 목사가 구속된 일이 일어났다. 이 사람은 주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행정명령을 무시한 채 3월 29일 주일 두 차례에 걸쳐 수백명이 모이는 예배를 개최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물론 보석금을 내고 바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나라 미국에서도 교회 예배를 제한할 정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얼마나 위중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목사를 기소한 검사는 기자회견에서, "주 정부의 행정명령은 헌법적으로 유효하다"라고 언급하면서 마가복음 12장 31절을 근거로 해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계명은 없으며, 이웃을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노출시켜 건강을 해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만일 우리 주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하다. 기독교의 나라인 미국은 물론 현재 많은 서구의 나라들이 종교 집회를 금지하고 있다. 그 대신 각자가 있는 곳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킨 채 온라인을 통해서든 아니면 개인이나 가족 예배라는 형식을 통해서든 종교 의식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다. 종교인이라면 당연히 거룩한 예배당이나 종교 시설에서 종교의식을 갖는 게 당연할 텐데,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는 특별한 시기인 만큼 한 발자국 물러나 달라는 특별 요청인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특별 예배에 머무르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교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차안에서 함께 동영상을 시청하는 형태의 예배도 시행되고 있다. 미국의 한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를 ‘드라이브 쓰루’ 형태로 받고 있다고 한다. 신자는 차에 탄 채 창문만 열고 신부는 2미터 쯤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아 신자의 고해성사를 듣는다는 것이다. 특별한 시대에 신앙을 쌓아가는 다양한 방식이 매우 흥미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 시설에서의 종교 예식, 즉 예배당에서의 예배만이 유일한 신앙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많은 것 같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생각하고 사모하는 그들의 신앙을 존경하면서도, 이 역시 기독교 예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배란 무엇인가?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성행하는 시대에 예배의 본질은 무엇인가?

2

기독교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구약의 배경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약 시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 예배의 강화였다. 그때까지 법궤를 모시고 광야 이곳 저곳을 이동하였던 이스라엘은 이제 거대한 왕국이 되면서 법궤를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를 강조하게 된다.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킨 야훼 하나님, 200여년 동안 왕 없이 사사 체체를 유지 시켜주었던 엘로힘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갇히게 되었다. 세상 한 복판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일원은 누구든지 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을 정립해야 하고, 최소한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직접 와서 동물을 희생제로 드려야 했다. 그래야 자신들의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너무 크고 화려하게 짓다가 무리를 일으키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된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남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북 이스라엘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자 사마리아에 수도를 정하고 그리심산에다 성전을 짓고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했다. 이것이 성서적으로 사마리아인의 기원이다. 이때부터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전이 두 개가 생겼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당하여 이방인들과 섞이기 시작했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을 당해 포로로 끌려갔다. 신앙의 중심지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더 이상 방문할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이국땅에서 절망하던 이스라엘 인들은 이제 성전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을 회관과 같은데서 모이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율법을 공부하면서 자녀들의 신앙을 교육했다. 이것이 회당의 시초이다. 여기서 등장한 율법전문가들을 랍비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이 고국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잠시 복구했지만, 희랍과 로마의 침략을 당했다. 결국 예루살렘 성전은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전 역시 서쪽 벽만 남긴 채 완전히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굳이 언급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기독교의 성전 개념을 형성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유대교식으로 예배당을 구약시대의 성전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것을 잘 살펴보면 이런 성전 중심, 장소 중심의 예배는 이제 중단되었음을 알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 말미에 예배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절). 그러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 .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21-24절).

예수님 당시까지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고, 사마리아인들은 “이 산”이라 지칭한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왔다. 그러면서 각자 자신들의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다”(21절)라고 말씀하셨다.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예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 어떠한 화려한 성전도 아니라 그 어떤 곳에서든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보다 예배 장소나 예배의 도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디서든 개인이나 집단이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24절의 “영과 진리로”(「새번역 성서」)를 「개역 성경」에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했는데, 본래의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표현은 헬라어 “엔 퓨누마티 카이 알레세이아(έν πνεύματί και άληθεία)”를 번역한 것인데, “영과 진리”(in spirit and in truth)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말을 ”영적으로 참되게“ 라고 번역했는데, 의미가 더 잘 전달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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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예배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나서 오늘날과 같은 보다 체계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초대교회는 지금과 같은 정형화된 형식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후에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예배가 정착된 것이다. 에베소서 5:19-20에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면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라고 되어 있다. 예배의 주요 요소들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또 성경에서는 일요일 오전 11시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라고 언급하는 구절이 없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다음에 부활한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 날 모임을 가졌는데, 이후 이것이 주일예배로 정착되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유대교 회당 한 모퉁이에서 예배를 드리다 유대교의 박해를 받아 쫓겨났고, 이후 곳곳에 흩어진 성도들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의 극심한 박해 시기에는 그마저 힘들어서 비밀리에 모였고, 지하 동굴에서도 모였다. 이렇게 신자들이 모인 모임 그 자체가 ‘에클레시아’(세상으로부터 불러내다), 즉 교회이다. 그래서 그 어느 곳에서든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마18:20)고 약속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이 두 세 사람도 모이지 못하면 예배는 불가능한 것인가? 바울서신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모두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6:19, 3:16)라고 선포한다. 이미 성도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각자 처해진 상황 하에서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리면 그것 역시 훌륭한 예배라는 것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는,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실천적인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라는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전통을 어쩔 수 없이 중단해야 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예배당에서 드리는 주일 11시 예배를 잠시 중단한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은 중단되거나 교회의 본질이 손상되지 않는다. 온라인이라는 과학 기술을 도구로 하는 예배든, 가정 단위로 드리는 가정 예배든, 또 혼자 드리는 예배든, 시간과 장소 및 방법에 제한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오해했듯이 참된 예배, 진정한 예배는 장소나 시간 또는 방식에 그 본질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또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신 기술을 도구로 하여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더 나아가 생활 속에서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되는 것이야 말로 이 시대 우리가 다시 생각하고 추구해야 할 예배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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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익투스타임즈(http://www.xtimes.kr)

2020년 8월 19일 수요일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_ 이정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는 개인의 안전과 위생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그렇다고 더럽다는 말도 아니다). 삶에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만큼만 적당히 조심하고 적당히 씻는 사람이라 처음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질 때만 해도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확진자 수가 20명 언저리 넘어갈 때. 뉴스는 연일 코로나19였고, 주변 사람들이 철저하게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도 '메르스 때도 그렇고 대충 넘어갔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먹고 마셔 댔다. 다시 말하지만 부끄럽다.


이 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때에는 신천지 관련하여 집단감염이 대규모로 터진 2월이었다. 대규모 감염 뉴스를 들은 날은 우리 교회의 청년부 수련회를 출발하기 전날이었고, 나는 이 수련회를 취소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사실 대규모 감염이 터지기 전부터도 수련회 취소에 대한 말들은 나왔지만, 열심히 준비한 청년들이 낙심할 것이 염려되기도 해서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대구에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 이후에는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 서둘러서 여러 회의를 열었고, 그날로 수련회 취소를 결정했다. 그 주에는 주일예배를 축소해서 드렸고, 그다음 주부터 지금까지 나는 주일에 사랑하는 성도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후 많은 분이, 한국교회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태 앞에서 여러 주장과 논의를 쏟아 냈다. 특히 주일 공예배 회집 방법과 연관하여 엄청난 논의가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쏟아지는 듯하다. 사실 필자는 이러한 담론들에 보탬이 될 정도로 사태를 잘 알지 못하기에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다만, 현실 목회자로서 실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행동 강령 몇 가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는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실천하고 있고, 또 실천하려 하는 몇 가지 행동들이다. 가능한 한 교파와 교단을 막론하고, 공예배와 교회 형태에 대한 입장이 어떻든지 대체로 동의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공동체 구성원들 간 자원 흐르게 하기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에도 아주 많은 성도가 경제적으로 급속히 어려워졌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교회 상황이 그럴 것이다. 이 와중에 관찰한 현상이 하나 있다. 이 상황에서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지 않은(심지어 이 상황 때문에 더 형편이 좋아진) 성도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그들의 열망은 전례 없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자신들만 경제적으로 평탄하다는 사실에 심지어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고, 가진 자원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달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그 예로, 분당우리교회에서 진행하는 미자립교회 월세 대납 운동에 20억 넘는 거액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보라. 목회자들은 여기서 신실한 중개인이 될 수 있다. 설교와 광고 시간을 이용하여 교회에 연약한 사람들을 돕도록 호소하고, 방법을 마련해 줄 수 있다. 두 가지만 예를 들겠다.

- 구제 지정 헌금

성도들끼리 교제가 활발했다면, 성도들은 이미 같은 구역이나 소그룹 내의 어려워진 형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서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받는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두렵기도 할 것이고, 또한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 6:3) 해야 하는 원칙에 위배될까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의기소침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돕고자 하는 성도들이 자신이 구제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직접 전달해 달라는 헌금을 교회에 하고, 교회가 누가 헌금했는지 밝히지 않고 대상자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으로 헌금을 만들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원할 경우) 헌금한 사람에게 투명하게 밝히면 된다. 성도들 모두에게 이 시스템은 잘 알려져 있고, 제직들에 대한 신뢰가 높은 교회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동참하는 것을 볼 것이다.

- 마스크 나눔

마스크 대란이긴 하지만, 성도들 중에는 많은 마스크를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정죄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은 마스크 대란 뉴스를 보며 찔림을 받는다. 교회는 이들에게서 마스크를 기부받아 없는 집에(그리고 지역사회에) 나누어 줄 수 있다. 실제로 필자는 마스크를 기부받아 배달하러 다니기도 했다. 마스크가 쌓여 있는 가정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챙길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쁨을 누릴 것이고, 마스크를 받은 사람들 역시 돌봄을 받고 있다는 확신에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목회자는 이 사이를 중개함으로 굉장한 보람을 누릴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공동체 구성원들 간 교제 흐르게 하기

코로나19 이후의 교회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공동체 내의 활발한 교제가 없었던 교회는 정말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전에 교회 내에서 교제와 사랑을 나누어 본 적은 없고 그냥 예배하기 위한 종교 기관으로서만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온라인으로 예배하면 되는데 왜 내가 예배당까지 가야 하지?'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공동체 내에서 사랑과 교제를 누리고 있던 사람들은 보지 못하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 시기를 힘들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 시기에 더 많은 전화 심방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위의 첫째 방안을 행하려고 하면 자연히 전화 심방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지, 어느 집에 마스크가 없는지 알지 못하면 도울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전화로 심방할 때, 서로 사정을 돌아볼 수 있도록 연락하라고 권면할 수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교회 성도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착하다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가 성도들이 잘 순종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서로를 돕고 살피라"고 권면하면 즐거이 따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목회자들의 권면을 따르지 않는 많은 경우는, 따지고 보면 동기 부여를 제대로 해 주지 못했든지, 권면의 내용이 터무니없기 때문일 수 있다. 서로를 섬기라고 권면하는 것은 성경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수준 높은 동기부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간에 연락이 별로 없었던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어색한(?) 통화라도 나누어 보도록 권면해 주라. 특히 교회 내의 약자들을 세심히 살피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세속 사회 향해 자비 흐르게 하기

개신교는 천주교나 불교처럼 모두를 관할하는 기구가 없기 때문에, 모든 교회가 주일에 문을 닫고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당분간 한국교회가 세속 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아무리 "우리 교회는 달라요!"라고 말해 봤자 말이다). 그렇다면 그냥 세속 사회 평가를 너무 의식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좋다. 지역사회에 마스크를 나누는 일도 할 수 있고, 어려운 분들을 찾아 도울 수도 있다. 두 가지만 더 제안해 보려고 한다.

- 공무원들에게 따뜻하게 협조하기

물론 정부로서는 교회가 안 모이는 것이 최선이겠고, 또한 많은 교회가 동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 모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겠다면, 최소한 방역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정부에 할 수 있는 한 협조하는 것이 옳다. 하나 확실한 것은, 최소한 일선 공무원들이 '흠, 이번 기회에 기독교를 박해해야겠어. 예배를 금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만일 더 윗선의 정치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틀렸다고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그냥 그분들은 '빨리 이 코로나19 사태 끝났으면 원이 없겠다' 하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주말에 누군들 돌아다니며 일하고 싶겠는가. 따뜻한 웃음으로 대해 주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작은 선물(예컨대 작은 음료수라도)이라도 내밀라. 그리고 꼭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말자.

- 복지 기관들 돌아보기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복지 기관에 기부를 많이 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시기에 가장 먼저 지출을 제한하는 돈 역시 기부금이다. 따라서 복지 기관은 지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 전체가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기부금이 끊긴 상황에 대해 하소연할 곳도 없을 것이다. 구제 헌금으로 걷은 돈을 약간이라도 전달한다면, 그리고 작게나마 연락을 통해 사랑을 전한다면 감사를 표현할 것이다.

여담으로, 이러한 상황은 선교사님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님이 한국교회가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 상황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번 주 선교비를 보내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는 전화를 받고서도 아무 데도 말하지 못한다. 사실 이들은 미자립 교회보다도 더 약자인 경우가 많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보내 드릴 돈이 없을 수 있다. 따뜻한 전화와 기도 제목 요청이라도 해 준다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예배 형태 바뀌면서 생기는 약자들 챙기기

특히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교회는 이 부분을 세심하게 챙겨야 한다. 교회 내의 어르신들은 온라인으로 예배를 송출해도 보시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분들은 누르면 바로 볼 수 있는 링크를 전달해 드리거나, 그것도 힘들면 누군가 도와줄 사람들을 붙여 주어야 한다. 예배할 마음이 없으셨다면 모르거니와, 예배하고 싶은데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 예배할 수 없게 되면 대단히 소외당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역시 전화로 세심하게 심방하며 주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챙겨 드린다면 쉽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신경 써야 하는 분들이 있다. 가족 중 믿는 사람이 자기 혼자밖에 없는 분들이다. 청년들 중에도 이런 분이 많고, 특히 자녀와 배우자 모두가 신자가 아닌데 자신만 신자인 경우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가족끼리 모여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혼자 방에 숨어서 몰래 핸드폰으로 예배를 시청해야 하는 경우도 그나마 나은 상황이다. 자기 방이 따로 있지도 않고, 어디 나갈 곳도 없는 분들은 온라인 예배도 그림의 떡이다. 이런 분들 중 원하는 분들은 방역상 아주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고 극소수가 모여서 예배하도록 배려해 줄 수도 있고, 그것도 어렵다면 연락을 지속하며 목양적인 배려를 받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


다섯째,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설교하기

이러한 사태에서 가장 지혜롭지 않은 방식의 설교는, 정부나 특정 단체를 비난하며 공격하고 자신을(그리고 자신이 속한 교회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예컨대 "정부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정부는 ~을 하고 있습니다!"라든지, "지금 모여서 예배하지 않는 저들은 ~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는 "지금 모여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는 메시지들이다. 물론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이 사태 때문에 교회의 본질과 예배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질까 봐 조바심이 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메시지들은 "나는 의롭고 저들은 악하다"는 식으로만 들리기 쉽다. 성도들은 결국 "나는 이런 좋은 교회를 다니고 있어! 저런 나쁜 교회들과는 다르지!" 하며 자기 의에 빠지든지, "나는 설교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저 설교자는 왜 저렇게 교조적이지?" 하며 반감만 품게 되기 쉽다(덩달아 무의미한 죄책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고 싶어 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는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이 정당화되는지, 또는 이러한 상황까지 왔는데도 꼭 모여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원리도 궁금해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은 따로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과연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짧은 지면에서 신정론에 관한 논의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교파나 교단마다, 혹은 설교자 개인마다 신정론에 관한 견해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그분의 섭리는 선하다는 것.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신다는 것. 때로 우리 눈으로 볼 때는 나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고통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합의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답이 아닌지는 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건 답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답이라면 왜 하나님 자신이 고통으로 뛰어드셨겠는가? 왜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겪으시며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겠는가?

그분은 고통을 안 주시는 하나님도 아니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 버려 두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섭리와 사랑. 은혜를 사랑 어린 마음과 눈물로 전하라. 정말 성도들은 위로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가 고난 가운데서도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 힘을 공급할 것이다.

세속 언론이 교회를 호의적으로 언급해 줄 일도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호의적으로 보도해 줄 만한 일을 많이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냥 억울해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낫다. 최소한 우리의 선행을 받는 사람들은 안다. 혹여 그들이 몰라 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보신다. 이 위기는 우리가 은혜를 행하는 연습을 할 기회이다. 교회가 코로나19를 전염시키는 원흉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 억울하거나 괴롭다면, 은혜를 전염시킬 수 있도록 힘을 내 보자. 특별히 지역 곳곳에서 교회를 섬기느라 분투하는 모든 목회자가 은혜 안에 거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힘내세요!

이정규 / 시광교회 담임목사, <야근하는 당신에게>(좋은씨앗), <새가족반>(복있는사람) 저자

[출처: 뉴스앤조이]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

2020년 4월 1일 수요일

사이버 성찬식은 가능한가?

사이버 성찬식은 가능한가?

유경재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처음으로 사이버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사이버 예배가 가능하다면 사이버 성찬식도 가능하다고 보고 정성들여 영상을 준비하였고, 더불어한교회 교인들에게 미리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도록 고지를 하였다. 설교 후에 성찬식 순서를 진행하였는데 리마예식서를 따른 사순절 성찬식으로 준비하였다(말미에 예식순서를 올렸다). 우리집에서는 막내딸네 가족 네 사람과 우리 부부 두 사람 모두 여섯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사진에 보는 대로 빵과 잔을 준비하였고, 영상을 따라 성찬식을 행하였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눈물이 날만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탕자의 비유를 중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설교 후에 찬송가 227장 성찬찬송 2절 가사 “자녀될 자격 내게 없어도 주 나를 용납하여 주소서”를 부를 때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가족들도 모두 은혜로웠다고 한다. 이런 실험을 통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사이버 성찬식도 가능하겠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신학적 논의도 필요한다고 본다.

사이버성찬식을 준비하면서 리미문서인 <BEM문서>(이형기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를 다시 한 번 들추어 보았다. 우선 성찬의 정의를 보면 “본질적으로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사의 성례전”(34)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행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에 생명을 주시고 성도 하나하나를 새롭게 하신다고 하였다. 결국 목사나 사제가 집례를 하지만 실제로 빵과 잔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모든 일이 가능하기에 교회라는 공간 안에 함께 모일 때나 각 가정에서 예식을 따라 행할 때나 성령은 동일하게 역사하신다고 본다면 사이버 성찬식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BEM문서는 성찬의 의미를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로, 성찬은 “교회가 모든 피조물을 대신하여 드리는 찬양의 대제사”이다. 성찬은 우리가 베푼 잔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푼 잔치에 우리가 초대된 것임으로 이 잔치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여 계시고, 초대된 우리는 우리를 은혜의 잔치에 초대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를 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힘껏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되어 하나님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둘째로, 성찬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anamnesis)”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념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과거 구원의 사건을 오늘에 재현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기념은 그 사건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을 오늘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신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친히 그와의 교제(communion)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성찬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의 식탁임을 뜻한다.

셋째로, 성찬을 성찬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찬 때 우리에게 실제로 임재하도록 하시며, 성찬 제정 때 하신 말씀에 담긴 약속을 성취”하신다고 하였다. “성령은 성찬을 가능케 하시며, 성찬식이 계속해서 유효하도록 만드시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 되신다. 성찬의 기념이 단순한 회상이 아닌 현재적 경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이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찬 사건의 근원이 되시며 궁극적으로 성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찬의 중심인 성육신 하신 아들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로 체험케 하시는 성령의 힘, 결국 성찬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를 동시에 체험하게 되는 것이며, 아울러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를 우리가 체험하게 된다.

넷째로, 성찬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자리이다. “교회의 삶을 양육하시는 그리스도와의 성찬적 사귐은 동시에 교회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서 교제함을 말한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가 충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성찬을 통해서이다.” 성찬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가 확실하게 세워지게 된다. 동시에 이것은 교회 안에서의 공동체 확립만이 아닌 세계 공동체 확립에까지 확장되어야 함을 뜻한다. “성찬 의식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 간의 화해와 동참을 요구하며, 사회․경제․정치적 삶 속에서 합당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촉구하는 끊임없는 도전”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동참할 때 모든 종류의 부정의․인종차별․인종분리주의․자유의 결핍이 근본적으로 도전 받게 된다”고 하였다. 성찬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이 세계 속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함을 뜻한다. 성찬을 통한 성도의 교제는, 이 세계 속에 깃들인 모든 악과 투쟁하여 마침내 모든 세계민이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찬은 개교회 안의 교제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모든 성도와의 교제를 지향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사이버 성찬식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끝으로, 성찬은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이 땅에 나타난 그 나라의 징표들에 대해 감사를 드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임해 오는 하나님나라를 기쁜 마음으로 기념하고 또 고대하는 축제”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성찬은 미래의 이상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미리 맛봄이요, 동시에 그것을 지향해 가는 밥상임을 뜻한다. 성찬은 완전한 코이노니아가 회복된 미래의 공동체를 미리 체험하는 자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별이 극복되어야 하며, 우리의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할 것을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성찬을 거행하는 자체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한다는 증거”가 된다.(35-43쪽)

이런 성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사이버 성찬도 이런 의미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볼 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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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성찬예식

【초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을 맞아 우리가 지금 주님의 거룩한 성찬상에 함께 모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이 예식을 거룩하게 지키도록 하신 것은 그 안에 머물러 새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에서입니다. 사순절에 주님은 우리를 그의 성찬상에 부르심으로 그의 겸손과 비하, 그리고 고난당하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힘쓰도록 촉구하십니다. 주님의 겸손함을 본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이 식탁에 초대합니다.
【처음 기원】 생명의 주 되신 하나님,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희의 죄와 무지로 말미암아 깨어진 세계를 새롭게 하시려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 드립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받으셨으며, 저희의 약함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고, 저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징계를 받으셨으며, 저희의 병을 낫게 하시려고 매를 맞으셨습니다. 주여, 저희의 눈을 밝히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상처를 보게 하시며, 묵묵히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인내와 겸손을 알게 하소서.
오 주님! 주의 거룩한 성찬상에 둘러앉은 이 시간 저희의 무지를 일깨워 주셔서 생명의 양식인 떡과 포도주를 감사함과 두려움으로 받게 하옵소서. 저희가 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므로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하심을 본받게 하시고 그의 순종하심을 따라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 멘.
※ 다같이 찬송 621장을 부르시겠습니다.
【성령의 임재의 기원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거룩하시며 주의 영광은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주께서 일찍부터 세상 가운데 보내셨던 성령을 지금 또다시 이 거룩한 예전에 보내 주시어 이 식탁이 성별되게 하시옵소서. 이 떡과 이 잔이 저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몸과 피가 되게 하시고, 저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정사】 이 성찬의 식탁은 우리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까지지도 씻어 주시고
가장 비천한 자리까지 낮아지시어 인류를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삶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떡을 떼시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 받아 먹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자, 마셔라. 이것은 죄의 용서를 위해 너희를 위해 흘린 내 피로 맺은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신비가 크고 또 놀랍습니다.
【마지막 기원】 성령과 더불어 하나되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모든 영광과 존귀가 지금부터 영원무궁토록 주님의 것이 옵니다. 아멘

【분병례】 ※ 각자 준비된 빵을 손에 들기 바랍니다.
목사: 이것은 여러분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회중: 아멘.(성가대 송영 229장 2절)
※ 함께 드시겠습니다.
※ 각자 준비된 잔을 손에 들기 바랍니다.
목사: 이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회중: 아멘.(성가대 송영 229장 3절)
※ 함께 드시겠습니다.

【감사의 기도】
※ 다같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오 주 하나님, 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저희를 새롭게 하시고 강건케 하시며,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오니 감사드립니다. 이제 주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저희로 하여금 주님께서 앞서 가신 섬김의 길을 따라 주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섬김의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저희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20년 3월 26일 목요일

그리스도인의 지표가 주일예배인가?

그리스도인의 지표가 주일예배인가?


최종원 (VIEW)


때로 자명해 보이는 진술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를 일요일마다 주일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요즘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는 이들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들을 그리스도인의 숫자에 포함시키는지는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예배를 꾸준히 드리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면, 주일예배를 꾸준히 드리지만 비그리스도인처럼 사는 것은 가능한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일상이 예배이고 예배가 일상이라는 말로 퉁치자는 의미가 아니다.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 드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표지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한번쯤 던져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성수라는 의식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연결시키다 보면, 그리스도인임을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주일예배 참석 자체가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제기를 하게 되면, 꼭 그런 말하는 ‘놈’ 치고 주일성수 잘하는 ‘놈’ 없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 ‘매우’ ‘잘’ 안다.

주일예배가 중요하다고 해서, 곧 주일성수가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단 하나의 지표로 작동할 수는 없다. 뭔 비뚤어진 심사냐고 하겠지만, 역사를 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여기서 질문 두 개만 던지고 가 보자.

질문 하나, 한국에서 불교 신자, 혹은 유교 신자로 고백하는 지표가 특정일에 절이나 사당에 가는 것일까?

질문 둘, 오래 기독교 전통을 유지시켜 온 중세 유럽인들은 매주일 미사를 드리러 교회에 갔을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불교나 유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정기적으로 법회나 제사에 참여하는 것과 그 종교를 신봉하는 것을 등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좀 더 고약하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세계 속에 살던 중세 유럽인들은 매주 예배에 갔을까? 그렇지 않다. 현실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매주 수용할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년에 몇 차례 특정한 절기에만 교회에 갔다. 마치 오늘날 불교신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개념은 흥미롭게도 종교개혁 이후 잉글랜드에서 등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잉글랜드 국교회를 확립하면서 주일예배 참여를 의무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주일예배는 ‘국교회’ 예배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국교회에 반대하는 비국교도들이나 가톨릭 신봉자들을 파악해서 차별을 부과하기 위한 조치였다. 작년 이맘 때 잉글랜드 성공회 400년 만에 주일예배 의무 폐지 (Church of England makes Sunday services non-compulsory)라는 소식이 떴다. 오늘날 교회 상황에서 여러가지 해석들이 오갔지만, 이 주일예배 의무 조항은 단순한 종교적 조치가 아닌 국교회 확립을 위한 국가의 조치였다. 그러면서 주일성수가 국교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이 성격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일예배 참석 말고도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요소는 많다. 아니 많아야 한다. 그것이 많지 않으니 주일예배만 목숨 거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한다. 주일성수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아니다. 신학적 코멘트는 사양한다.

2019년 7월 20일 토요일

전통예배가 아닌 정통예배 _ 최주훈

<정통 예배 의식? 그런 거 없어요.>
 
우리의 대적자들은 우리가 고백하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제7조를 정죄한다. 우리의 신앙고백서 제7조는 아래와 같이 규정한다. “교회의 참된 통일을 위해서는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관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인간의 전통, 곧 인간에 의하여 제정된 의식과 예식이 어디서나 같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복음 선포와 성례집행에 관한 특별한 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대적자들은 좋아하겠지만, 단지 보편적 의식만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하면 그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대적자들이 원하는 특별한 의식, 통일된 의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교회의 참된 일치는 오직 참된 영적 통일성에 관한 것일 뿐이다. 그 통일성 없이는 참된 마음의 믿음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칭의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서 보편적인 것이든 특별한 것이든, 인간이 만들어낸 의식들이 서로 같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가 모세의 예식 안에 매여 있지 않은 것처럼, 교회의 통일성은 어떤 전통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의 내적 의는 심령에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이든 특별한 것이든, 인간이 고안한 모든 전통은 이 생명을 만드는 일에 아무런 효력이 없다. 이러한 인간적 전통들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성령은 오직 순결과 인내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랑의 행위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본문: 필립 멜란히톤의 <변증서>(1531,37) § 7-8교회’, in: 지원용 편, <루터교신앙고백서>, 142.
 
참고: 종교개혁 당시 루터교회 신앙고백서에 대한 로마의 반응이 <반박서>로 나왔다. 반박서가 루터교회를 정죄하던 근거 중 하나가 미사집례와 관련한 특별의식에 관한 것이었는데,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교회는 교회 당국이 제정한 특별하고 특정한 예배의식 대신,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현장에서 추구했기 때문이다.
 
#비아토르 #예배 #정통예배 #예배의다양성 #멜란히톤변증서
 
 
 
 

2018년 4월 28일 토요일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제자도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제자도1)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


                                              김회권 교수(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초대 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 1세(597년)는 제자도는 순교자와 같은 의미의 단어라고 정의하면서 국가적 단위의 공권력에 의한 순교가 사라진 시점에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은 제자도의 실천이라고 설파했다. 제자도는 땅, 보금자리, 소유, 자기 보호장치의 무소유(스티븐 니일, <기독교선교사>)를 통해 온전히 하나님 나라 복음의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성공한 성직자계급이나 중산층들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그 체제전복성과 급진성을 상실하게 되고 교회는 주류 이데올로기의 해안을 의지하여 항해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세계내적인 기관으로 전락해 버렸다(쟈크 엘룰, <튀틀려진 기독교>; 한스 요하힘 크라우스, <조직신학>). 따라서 갈릴리 호수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그물, 세관, 심지어 부모와 처자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의 급진적인 삶은 시대착오적인 급진주의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보여준 급진적 복음실천이 없이는 교회는 주류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으로 흡수병합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체제변혁성과 역사창조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의 신자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현상유지적인 경건 혹은 기독교영성 유지 이상의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어떻게 이 상황을 돌파해 내어야 할까? 다시금 제자도의 삶의 뿌리를 찾아보고 오늘날의 삶의 맥락에서 재현하고 추체험하는 길밖에 없다(A. B. Bruce, <12 제자 훈련>; 데이빗 왓슨, <제자도>) 성경적 제자도를 재구성하려면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 복음의 본래 육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공공의 이익과 생존 공동체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적인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강의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의 공공성과 그것에 걸맞는 공공의 제자도에 대하여 다루려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사회를 향한 사회선교적 복음 공세를 펼쳤고,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공공성이 넘치는 제자도를 형성해 왔다. 사회적 제자도의 핵심에는 정치권력의 기독교적 무장해제 활동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회적 제자도는 항상 권력을 쥔 세력들에 의한 박해를 초래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위험하고 복잡한 사회적 제자도 실천을 위해서는 견고하고 정치한 신학적 담론이 요청된다.2)


I. 서론: 사회선교란 무엇인가?

선교(mission)란 하나님께 파송받은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 그리고 자연과의 화해를 경험하도록 촉진하는 활동이다(고후 5:18-21).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십자가의 수치스런 형장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대신적 순종과 모범적 순종을 통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화해의지와 화해 결단이 바로 복음이다(롬 1:2-4; 3:24-26). 선교는 모든 적대적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의 화해의지를 증거하는 운동으로 그것의 궁극적 목적은 만유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복속시키는 것이다. 그동안 기독교회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교는 개인이나 집단을 향한 개종 유도 행위였다. 명제적으로 선포된 구두 선포(케뤼그마)를 듣고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게 만드는 전도활동(롬 10:4-11)이 선교의 주요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전도는 하나님의 복음전파 활동의 전부를 포괄할 수 없다. 신구약 성경에 걸쳐 전개된 하나님의 선교는 개인의 개종이나 회심을 위한 전도활동을 넘어 사회 구조나 공동체의 문화나 정치체제의 거룩한 전복(顚覆)과 변혁을 기도(企圖)한다.
   
구약성경 첫 장인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행위라고 선포한다.3)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순종되어 현실이 되는 세계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명령이 지체없이 순종되고 현실이 되는 나라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왕적인 명령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선교의 창조신학적 근거다. 또한 이스라엘 중심의 구원사도 창조시 계획한 하나님 나라 계획이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좌절되자 그 좌절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세계재창조 역사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선교의 구속신학적 근거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자체가 한 위대한 나라, 열방으로 흘러들어갈 복의 근원이 될 공동체, 의와 공도의 공동체(창 12:1-3; 18:19) 창조였으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계약백성으로 창조해주신 목적도 거룩한 백성공동체와 제사장 나라 형성이었다. 철두철미하게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정치사회적 공동체 창조가 하나님의 구원사가 성취하려고 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신약성경에 와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건설이었다(막 1:14-15).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철저히 사회적인 차원의 구원을 전제하거나 수반한 활동이었다. 심지어 개인전도의 교본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이나 사도 바울 서신도 사도 바울의 해외선교활동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인 통치를 받는 교회 공동체 창조와 이방 세계의 거룩한 체제전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도 바울의 사회선교적 활동의 진면목은 그가 자신의 궁극적인 투쟁의 대상이 혈과 육(개인)이 아니라 정사, 권세, 보좌, 주관, 능력(고전 15:24, 엡 6:12;, 골 2:15, 벧전 3:22)으로 불려지는 영적 정치적 위계질서라고 언명할 때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개별적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거의 신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영적 지배구조의 실체를 혁파하고 무장해제시키는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갖고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사회선교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회심이나 개종을 넘어 사회구조, 정치 및 문화체제 전반의 기독교적 변형을 기도하는 운동이다.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청년들 안에서 일고 있는 사회변혁의 비전은 19세기 스위스 독일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이나 1920년대 미국의 사회복음운동과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운동이다. 사회선교운동이 기독교신앙을 실천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는 사회구조를 문제시하고 그것을 혁파하고 고치려고 분투한다는 점에서 이 두 운동과 흐름을 같이 한다. 침례교 목사였던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는 독일의 자유주의자 알베르트 리츨(1860-1944)의 인류애 형제애 개념, 아돌프 하르낙(1859-1930)의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애 개념에서 자신의 신학사상을 도출하였다. 라우센부쉬가 주도한 1920년대의 미국 사회복음 운동은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며 기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집단적인 죄를 회개하도록 하며 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구원을 선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히브리 예언자들의 예언운동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사회복음운동의 성서적 근거를 발견하였다. 그는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야고보서의 메시지에 근거하여 자본주의에 의하여 망가진 노동자계급과 교회가 연대하여 새로운 하나님 나라 건설 운동에 참여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특히 야고보가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고대 히브리 예언자적 전통과 당시의 유대인 공동체를 관통하는 단서라고 보았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지상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율법과 그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미국이 바로 그런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과정에서 라우센부쉬는 미국을 무비판적으로 이상화하였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기독청년들에게 일고 있는 사회선교운동은 정치적 구조를 바꾸는 운동으로 축소될 수 없는 성령의 주도적 운동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또한 19세기 종교사회주의처럼 하나의 정치이념을 신봉하고 그것을 법제화, 구조화하려고 하는 운동이 아니다. 사회선교는 법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선을 강제하는 운동이 아니다. 이 운동은 차라리 라우센부쉬의 역사적 예수와 낭만적 이상에 근거한 사회기관에 대한 회의를 표하면서 기독교 현실주의를 주창한 라인홀드 니이버나 에른스트 트륄취의 기독교사회학을 미국적 토양에 접목시키려고 한 리쳐드 니이버의 문화변혁론에 가깝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선교사명에서라기보다는 창조신학의 위임 명령(창 1:26-28)에서 사회선교의 대의명분을 찾았고 내재적 정치질서와 정의 관계에 우선적 주목을 보였다. 그는 사회복음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예수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러나 예수가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 지상의 정치적 사회적 기관과 프로그램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다).4)
   
단언컨대 사회선교는 권력을 장악하여 이데올로기를 주입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이 아니다. 또한 인간의 죄악의 참혹한 뿌리깊음과 파괴적인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사회복음운동(social gospel movement)과는 달리 사회선교운동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으며 정치주의적인 효율성과 편의성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하여 진보에 대한 신앙, 죄의 사회적 성격 강조로 특징지워지는 사회복음 운동은 교회가 혁명적 사회운동의 프로그램을 가져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운동은 예수의 가르침을 지상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순진한 낙관주의를 드러냈다. 이 운동은 사회질서의 무한정한 기독교화를 추구하였다.
   
이에 반하여 사회선교는 인간의 전적 타락성을 예의주시하면서 개인을 지배하는 사회구조들의 비신화화를 시도하지만 교회 전체가 구비하여야 할 혁명적 사회개조 프로그램을 내세우지 않는다. 사회선교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자연과 역사, 개인의 인격과 사회구조, 관습, 법, 풍속 등 문화전반)에 관철되는 상황을 근사치적으로 촉진시키는 운동이다. 세계내적 역사내적 운동으로서 사회선교운동은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이상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운동이다. 사회선교에 투신한 그리스도인들은 물질과 영혼, 이 세상과 이데아의 세계를 나누는 이분법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가 이 세상의 총체적 영역에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는. 세상 모든 요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고백이 스며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태라고 본다. 이런 종말론적인 완성태인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며 근사치적으로 구현하려는 사회선교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필수적 단계다. 이런 점에서 사회선교의 또 하나의 신학적 근거는 종말론 신학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종말의 시점으로 보류하는 종말론 신학은 하나님 나라운동에 투신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암울한 비관주의와 낙담에서 건져주고 하나님 나라를 친히 완성시켜 가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겸허한 시인에 이르게 할 것이다. 종말론적 신앙의 실천으로서 사회선교 활동은 역사 속에 활동하는 정사와 권세와 보좌 주관 등을 무장해제시키는 선한 싸움에 참여하지만 그것은 단기적으로 일시적인 후퇴와 패배를 맛볼 수 있다.
   
사회선교는 개인적, 실존적, 인격적 주체에 대한 복음제시와 하나님 나라 전파와는 달리, 개인을 지배하고 관장하는 공동체나 집단, 인간결사체나 조직의 법, 제도, 관습, 종교, 이데올로기 등 모든 초개인적인 집단이나 공동체의 운영원리를 하나님의 의와 공평의 원리 아래 복속시키고 수렴시키는 활동이다. 사회선교는 국가주의, 집단주의, 기업체 결사주의, 노동조합주의 등 언제든지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자율왕국으로 변질될 수 있는 중간 권력위계질서의 불의를 고발하고 혁파하는 운동이다. 제국 내에서 제국이 선포하는 법령의 무효화를 위해 죽음으로 불복종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이 사회선교를 수행하려는 사회선교사는 고도로 단련되고 숙달된 성령의 검투사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분노와 증오의 희생자가 되지 말아야 하며, 악과의 타협도 하지 말아야 하는 전사적 용맹과 담력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사회선교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긴 사람들이 수행하는 운동이다.
   
사회선교는 자신이 철저히 성령의 충만을 맛보며 하나님의 통치의 풍성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에 감복된 개인들이 펼치는 운동이다. 사영리나 간단한 복음제시로 개인의 양심을 전복시키고 각성시켜 복음결신에 이르도록 돕는 개인전도와는 달리 사회선교는 정교한 사회분석이나 사회과학적 인식을 요구한다. 사회분석, 사회과학적 이해, 사회집단의 행동 및 운영원리 파악, 대안 사회, 대안공동체 대조사회를 제시함으로써 사회선교는 가능하다.
   
요약하면 첫째, 사회선교는 개인은 악하지만 개종의 대상이나 인격적 호소와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집단은 인격적 호소와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로지 공적인 정의와 정치과정을 통해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둘째, 개인이 악의 영에게 지배당하고 종속당하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모든 단위의 인간 집단이나 결사체들은 악한 영에게 지배당하거나 종속될 수 있음을 주목한다.5) 이 세상에서 악한 영에 지배받고 있는 집단이나 결사체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하나님의 창조 주권 아래 종속되어 있지만 실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상관없이 저항적인 자율왕국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영적 중간 위계질서적 권세들인 정사, 권세, 보좌, 주관, 능력의 동맹세력을 구성할 수 있다(행 19장 아데미 여신 숭배 중심도시인 에베소의 경우). 셋째, 사회선교는 개인전도와 회심운동을 전제하고 그것의 토대 위에 사회질서, 법, 관습, 이데올로기 등을 기독교적인 이상에 수렴하도록 변혁하는 것이다. 사회선교는 사회구조만 바꾸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보는 낙관주의를 경계하고 오히려 개개인의 시민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것, 즉 성령에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회선교의 우선 전략이라고 본다.


II. 사회선교의 요건으로서의 사회과학적 인식

1. 사회과학이란?

인류역사 이래 줄곧 자기 자신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해 지나치게 세밀하게 탐구하는 행위는 아주 위험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지배계급의 성원이나 피지배자들이 공히 지배층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사회질서는 신의 섭리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그래서 그것은 영원하다고 믿었다. <사회과학>은 사회생활과 사회적 형태의 제 측면을 관습과 위로부터 즉 종교와 도덕으로 설명하려는 전과학적(前科學的) 세계관과는 달리 사회생활의 주체인 개인과 집단, 계급이나 국가 등 역사내재적 요인들을 고려하려 설명하려는 지적 활동이다. 사회과학은 사회조직, 사회유지, 사회변동의 과정이 신적 의지의 발현이나 신의 섭리라고 간주되던 중세적 신화적 사고로부터 <과학적 이유>와 근거에 의한 사회이해를 추구하려고 한다. 사회과학적 인식의 단초는 토마스 아퀴나스적인 전일적 기독교신앙에 지배당하던 중세 유럽을 사회과학적 계몽으로 이끈 자연과학자들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이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적 인식론의 타당성을 확보한 데카르트 이래 19세기 오귀스트 꽁트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지성사는 기독교신앙의 신학적 사회해설에 대항하여 사회과학적 인식을 주창해온 계몽주의적 지성인들의 분투의 역사였다. 이런 계몽주의적 사회과학의 절정으로 칼 맑스의 공산주의 사상이 등장했다.
   
근대의 초입에 등장한 사회과학자들은 세계와 역사의 변동을 신의 뜻으로 간주하고 어떤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신의 뜻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는 기독교적 '신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역사변동의 주요 원인을 인간과 계급, 집단이나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명분들이나 이해관계로 설명하는 사회과학으로 맞섰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과학 그 자체 안에는 반(反)기독교적이고 무신론적인 주장이 개재되어 있다. 그런데 사회과학의 반대점에 서 있는 이런 기독교는 참된 의미의 기독교를 대표하기보다는 정치권력의 상부구조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정치권력화된 기독교다.
   
또 다른 한편 <과학>이라는 말 자체가 필연적으로 반(反)기독교적이라고 의심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과학에 대하여 은근한 적대심과 반감을 드러낸다. 사회의 변동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사회과학에 대한 적의는 사회변동을 싫어하는 보수세력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그들에게는 무조건 “기존 질서”(status quo)는 일단 신적 재가(divine sanction)를 받은 구조로 보이고 새로운 사회정치 질서는 소중한 가치와 전통을 파괴하려는 불온한 세력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변동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가진 기존 사회질서의 수혜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이성과 사유, 언어라는 일반은총으로 수행하는 학문의 한 분야다. 자연과학이 절대로 무오하거나 확실하지 않는 학문이듯이, 사회과학은 결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의 세계를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연성이 있는 관찰이나 사실, 주장이나 인과 관계를 다룬다. 사회과학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인간 역사와 그 안에 활동하는 집단들의 동태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비밀과 신묘막측함을 탐색하는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의 신학적 활동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은 그 자체로 기독교신앙과 충돌하는 학문이 아니다.
   
사회조직과 유지 그리고 사회변동과정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지배자들과 기득권자들의 신과 그 신에 속박되어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무신론적이고 저항적이며 위험스러운 인본주의>로 보이지만, 보다 더 나은 정의, 평등, 자유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자들은 계급사회의 원시적 갈등상을 한 점 에누리 없이 폭로해 버리는 사회과학과 어느 정도 동역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이 중립적인 물질세계와 연관되기보다는 오히려 일단의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활동과 결합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사회과학>에 대한 부정적 인상의 원천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선교에 투신한 그리스도인들은 가치내포적인 사회과학적 교양으로 무장하여 모든 인간적 결사체들의 자기절대화의 경향성을 쉼없이 경계하고 경고하여야 한다. 민족, 교회, 정당, 국가, 노동조합, 주식회사 등 모든 인간적 조직체들의 조직원리, 법, 제도, 이데올로기 등은 나름대로의 영속성을 주장하지만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영구적인 기관이 될 수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역사 속에 파죽지세로 침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변혁 운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와 조율되어 존속가능한 집단으로 자기갱신이나 변혁에 성공하지 못하는 집단은 와해되고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신학적 토대 위에 구축된 사회과학은 사회선교에 투신한 그리스도인들의 필수 교양이다.  

2. 사회과학의 특성

사회과학이 과학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근사치적 불완전한 과학일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적 인식의 보
편성보다는 훨씬 약한 보편성을 가진 학문이 사회과학이다. 사회과학의 잠정성과 불완전성의 가장 큰 이유는 사회과학적 인식을 구축하는 자도 인간이요 그의 인식대상인 사회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이 연구대상인 사회의 일부분이므로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혼동되는 나머지 진정한 '과학적' 접근은 쉽지 않은 것이다. 또한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 이상의 것이므로 사회에 관한 연구는 개인의 심리를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사회란 실험실의 마취당한 개구리처럼 고정된 지점에서 관찰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 자신의 시점과 관찰지점을 움직이게 할 정도로 역동적인 변화와 활동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과학은 과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우발적으로 보이는 요인들이 무질서하고 다층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사회를 탐구대상으로 삼기에 어디까지나 어림수 과학이요 불완전하고 비자기완결적인 과학이다. 그것은 과학이지만 동시에 억측이나 속견으로 추락될 위험을 내포한 부서지기 쉬운 불완전한 과학이다.
   
사회과학을 덜 과학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더 근본적인 사회과학의 특성은 탐구대상과 탐구주체가 <죄>와 <자기중심성>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도 그 궁극의 전제는 검증되지 않은 종교적 동인(動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은 어떤 선험적(先驗的)인 <죄>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사회과학은 사회변동과 운용을 위해 불가피한 방편이지만, 그 <사회과학> 또한 죄에 오염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절대적으로 옳아 보이고 보편타당한 객관적 지식체계라고 인정되는 <자연과학>도 인간의 죄악된 죄와 오류의 세계관에 기반되어 있다. 세속적 자연과학은 법칙론적이고 기계론적 우주관에 기반한다. 오늘날의 자연과학(특히 생명공학이나 우주천체물리학 등)에는 기계적인 우주와 그 법칙의 배후에 역사하고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앙고백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계급적 불평등 사회조건하에서는 죄와 편견에 물들지 않은 보편타당한 사회과학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칼 맑스는 보편적 사회과학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당파적 사회과학을 주장했다. 그는 지배자를 위한 사회과학(허위적 이데올로기)과 피지배자를 위한 사회과학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했다. 봉건주의 체제를 붕괴시킨 사회과학이 자유주의 경제체제 및 그 세계관이라면, 부르조아 자본주의 체제의 기저를 흔드는 대표적 사회과학은 맑시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회를 지배하던 지배계급이 누구냐(부르조아냐 프롤레타리아냐)에 사회과학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예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사회과학을 주창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주창하는 신학적 사회과학은 하나님을 위한 당파적 사회과학이다. 가능하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설득력을 행사하는 사회과학을 구축하는 것이 사회선교의 우선적 과제다. 자연과학은 자연의 불변적이고 반복적인 체계에 관한 지식에 점차 접근해 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회변동은 급격하고 전면적이며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숱한 자유로운 요인들, 우발적 요인들이 사회변동에 관여한다. 특정한 사회변동은 변동 주체들의 누적된 문제의식(불만, 울분, 좌절감, 분노)과 그 문제의식을 집단행동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촉진시키는 안팎의 요인들(법, 통신수단), 그리고 또 그런 집단행동을 조직화하고 극단화하는 데 일조하는 기득권세력의 완악함과 우매무지 등이 동시에 작용하여야 발생한다. 기독교적 사회과학은 사회변동을 촉진시키고 완성시키는 과정에 참여하는 여러 요인들 중 지극히 우발적인 요인들 중 하나님의 섭리라는 요소를 또한 매우 중요한 계기로 파악하고 주목한다.    

3. 사회과학의 필요성과 기독교적 대안 사회과학

인간의 구체적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사회적 뒤얽힘 속이다. 이 사회적 뒤얽힘은 현대에 올수록 복잡하고 다원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구성한 사회이기에 그 사회의 구성과정, 유지 및 변동과정은 사회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 특정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이해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필수적 교양이 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사회구성체>도 분석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거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사회적 생존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인간의 꿈과 희망, 죄와 편견, 욕망과 좌절이 투사된 유기적 실체이기 때문에 마땅히 인간의 술어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사회>는 크게 보아 재화생산체제(물적 토대)와 인간의 사회적 관계유지 체제(상부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반드시 칼 맑스식의 사고일 필요가 없다. 불편부당한 사회에서는 이 사회가 물적 토대와 상부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등의 불온한 사상일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부조리하고 불의한 사회구조 아래 매여 있다. 모든 민족국가나 합중국, 기업, 정당 등 인간적 결사체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비하여 창조적 해체 위기에 놓여있는 과도기적 기구요 기관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가 해소시켜 주어야 할 만큼 극심한 불평등과 불의에 매여 있다. 이런 불평등하고 불의한 계급 및 계층 구조로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는 이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법적 강제장치로서 국가기구 혹은 그에 준하는 기구가 요청된다.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바로 물적 토대와 그 물적 토대를 유지하고 관장하는 이념적 강제기구인 국가기구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도 이 사회구성체이다. 이 부당한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고 온존, 유지시키고 심화, 세습시키는 사회구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위임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천국과 지상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낙원안의 즉자적 몽롱상태에 빠져 사는 자가 아니라 계급, 계층, 종교 이데올로기 등 각종 사회변동의 요인들이 작용하는 사회구성체 안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개인이거나 영혼일 수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의식하건 못하건 간에 혹은 치열하게 의식하건 느슨하게 의식하건 상관없이 특정한 사회계층이나 사회계급의 일부로 살아간다. 부동산 가격의 낙폭, 골프장 건설, 새만금 간척사업, 한미 FTA, 햇볕 정책 등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의견대립은 그들이 속한 사회적 자리(계층 계급 거주지역)의 차이를 반영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자기”는 개인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적인 권리, 특권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자기”다. 강남이나 신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부동산이나 아파트 값이 폭등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부인해야 할 자기가 커진 것이다. 부자, 유력자, 출세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더욱 낙차 큰 자기하강과 비움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통상적인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들의 신앙고백은 죽어서 가게 될 처소인 천국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죽어서 가게 될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 살아있는 순간에 온갖 종류의 욕망과 불의가 어지럽게 춤추는 사회질서 한복판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분투에 굼뜨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사고로 이 애매하고 막연한 신앙고백을 수정하면 “나는 현재 계급적 기득권을 맘껏 누리는 <지배계급>(혹은 지배 이데올로기)안에 있는가 아니면 악한 사회구성체의 희생자인가?”를 부단히 물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영생을 누려야 할 것이다. 이 부당하고 불의한 계급적 계층적 위계가 엄존하는 사회 한 복판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참 제자다. 그들이 바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뒤를 잇는 표준적 구원경험에 이른 제자들이다. 사회과학적 인식으로 세상의 종교를 보면 다음과 같은 도전적인 선언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는 신자와 불신자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신과 피지배자의 신이 있을 뿐이다." 이 선언은 1987년에 서울대 학생회관 앞 널따란 대자보벽에 붙여져 휘날렸던 구호다(서울대 기독학생연맹에서 붙인 대자보 중 일부). 우리는 이 선언이 극단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무효화할 만큼 한국의 기독교회의 사회선교적 실천은 견실한가? 부자들과 유력자들의 교회가 사회의 지배층과 자연스럽게 제휴하며 기독교 복음을 사회의 상부구조의 일부로 순치시키는 것이 아닌가? 자본주의적 질서,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질서, 자원남용적 지구환경 파괴적 무한 중상주의, 농업에 대한 몰지각한 파괴와 홀대가 과연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순조롭게 공존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기독교 복음의 이름으로 자원 약탈을 위한 침략 전쟁이 정당화되는가? 국제적 합의나 외교상식을 무시하고 상대가 되지도 않는 최빈국 최약소국에 전무후무한 양의 재고폭탄을 쏟아붓는 제국주의적 횡포와 오만을 보고도 그 제국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공존할 수 있는 행동인가? 아무리 사회과학을 부정하는 보수적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사회과학적 인식을 자신의 설교 속에 집어넣게 마련이다. 부당한 법과 제도에 대하여, 부당한 전쟁에 대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이름으로 미화하기도 하고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들은 다만 나쁘고 부정확한 사회과학적 인식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사회과학은 신화화되고 우상숭배시되는 사회체제의 유지를 위한 <위로부터의 강제적 설명>에 저항하는 한 도구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회체제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체에 비추어 엄청난 불의와 죄와 탐욕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사회과학적 통찰력을 소유해야한다. 그런데 이 사회과학은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의해 통제되고 재정위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토대 위에 구축된 사회과학이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사회과학이나 부르조아의 사회과학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아래 심판당하는 사회과학일 뿐이다.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속주의 이름과 자격으로 이 불의한 세계와 인간이 당신의 형상대로 회복되고 운용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 의와 공평, 인자와 자비가 넘치는 메시야 왕국의 비젼을 주신다. 기독교적 사회과학은 <완성된 사회>인 메시야 왕국의 비젼에서 솟아나는 신령한 영감이다. 이 신령한 영감과 신앙고백에 투신되어 현 상태의 모순 척결에 헌신해야 한다. 모든 사회구성체가 갖고 있는 자아중심성, 불변성, 영속성 주장에 대항하여 새로운 대안 사회의 비젼을 제시해야 한다. 이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환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온전히 관철되는 메시야 왕국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사회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 <근사치적 접근>의 사회를 위한 기독교의 사회과학과 사회변혁의 모델은 <중간고리>의 개발에서 현실화된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도 결국 인간과 하나님의 역동적 친교가 뒤얽힘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실현될 가치들을 이 지상에서 선취하여 사회화시키는 자들이다.

III. 공관복음서의 몸소 하나님 나라 나사렛 예수의 사회선교 운동

우리는 개인구원이라는 개념에 매우 익숙한 반면에 사회구원 혹은 사회선교라는 개념에는 낯설다.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를 찾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이 체험한 구원이 실존주의적 한계를 넘어서서 사회변혁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더 나아가 역사적 기독교회가 흔히 보여주었던 바 기존사회의 통합에만 봉사하는 내재 종교 내지는 유사(類似)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넘어 낡은 가죽부대를 해체시키는 변혁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상의 상호연관적이며 또 독립적인 두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개개인의 신자가 경험하는 실존적 구원경험인 자아변혁이 사회변혁의 아르키메데스점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 중 가장 현저한 근거는 공관복음서가 증거하는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나사렛 예수는 낡은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의 갈등과 긴장이라는 범주(막 2:22)를 사용하여 역사의 제 과정에서 세계변혁을 향도하고 급기야는 세계완성을 진취해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6)
   
1. 사회선교와 기독교회의 변혁론적 위상 

사회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사회변혁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변혁은 사회구성체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구성된 토대+상부구조(이데올로기ㆍ법률ㆍ국가기관 등)]의 변혁을 의미한다.7) 사회구성체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계급관계로 보는 세계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사람들의 계급관계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방법이 사회구성체인데 이 사회구성체는 개개인의 실존을 주형(鑄型)하는 선험적인 틀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은 사회구성체 토대의 근저에 있는 <하나님과 동료인간과 자연으로부터 3중적인 소외상태, 즉 원죄상태에 빠져 있는 죄>를 가장 근원적 기저(基底)라고 파악한다.8) 누구를 숭배하는가? 하나님? 자아? 사탄? 즉 <숭배의 대상>이 모든 판단과 활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맑시즘적인 의미에서 하부구조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인데 반해 하나님 나라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예배와 신앙의 관계, 누구를 主로 믿고 섬기는가?가 가장 심층적 하부구조(이하 심층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자본가와 임노동자의 생산양식으로 보는 맑시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돈의 신, 맘몬 「자본」신의 숭배관계가 더 근원적 토대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구성체를 논할 때 <숭배와 신앙관계>(심층구조)와 <생산양식 : 재화의 생산, 분배>(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3층적 구조로 파악한다. 기독교는 심층구조에서부터, 즉 예배주체인 자아에서부터 변혁을 일으키는 변혁운동인 것이다.9)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위해 정복전쟁을 벌였을 때 이방 신들의 제단과 그 부대시설에 대한 철저한 파괴를 우선적 사명으로 삼았다.
   
<심층구조> 즉 예배 문제는 <하부구조>, 즉 동료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하부구조>(계급관계)는 상부구조(국가, 이데올로기, 법률, 종교)를 규정한다. 2,000년 교회사를 회고해 볼 때 기독교회가 아주 빈번히 변혁운동의 1차적 대상으로 설정된 상부구조의 일부로 기능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10) 교회가 변혁세력의 향도기능을 감당하기는커녕 수구세력의 일부로 고착되어 있었을 때, 교회는 하나님나라와의 연결고리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었다. 심층구조에서부터 상부구조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변혁을 수행하는 하나님 나라를 실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기독교변혁세력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독교회가 변혁세력으로 등장할 때 정치적 급진주의나 메시야적 열광주의의 형태를 띠어서는 안 된다.11) 기독교회의 세계변혁은 3중적 구조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복된 공격과 세계 속으로 침투해오는 하나님 나라에 공명함으로써 추진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변혁운동은 사탄이나 우상이나 자아 대신에 하나님을 섬기도록 겨냥한다. 계급적 노동착취대신에 형제적 친교와 동역을 숭상한다. 사회선교는 특정 국가나 법 체제가 지배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옹호하지 않고 신앙적 경건(sonship, fatherhood)과 형제우애(fellowship, brotherhood)12)를 증진시키는 종(從, minister)의 조직체로 거듭 태어나도록 분투하는 과정이다.


2.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세계의 변혁>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1) 몸소 하나님 나라(ἄυτο βασιλεὶα)13): 세상의 변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선포의 핵심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 자신이 <몸소 하나님 나라>(ἄυτο βασιλεὶα)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모든 선포는 자기주해적(self-explanatory) 자기계시적(self-revelatory)이었다. 그는 그 실존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었고, 인격화된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는 이념과 말에 있지 않고 인격과 능력 - 변혁적 능력 속에 있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 속에 현존한 하나님 나라가 세계변혁의 에너지를 창출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와 더불어 왔으나, 완성점을 향해 역사적 제 과정 속에 <수난적 존재>로서 변혁운동에 참여하고 있다.14) 아직 세상에는 파괴적인 세력과 반대세력이 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시 8:3, 104:35). 마지막 때에야 모든 적대자들이 극복된다. 세상의 군왕들은 자신의 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가 발생하면 초동진압을 하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종말진압을 하신다.15) 이미 현존했으나(already) 아직 완성(not yet)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은 새 창조를 향해 세계변혁의 과정을 줄기차게 향도해 가고 있다.16)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바로 세계변혁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우리가 주창하는 사회선교는 이미(already) 현존하고 침투한 하나님 나라를 승인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세계변혁의 계시 속에서 완성점을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적 성장에 기대고 있다. 인간의 이념적 확신이나 자가추진적 변혁 노력 그 자체가 세계변혁적 사회선교의 충분한 토대가 될 수 없다. 세계변혁은 <하나님 나라>의 선행적(先行的) 운동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급작스레 완성된 형태로 낯설게 주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변혁의 제과정속에 충실히 자라가는 유기체인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설정된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적 성장과정은 사탄적ㆍ옛 아담적 주권과 그 사령부인 정사와 권세의 폐위를 의미한다(비교. 골 2:15). 하나님 나라는 신(神)적 경배를 요구하는 거짓된 권위(authorities)와 정치체제(principalities)를 전복시킨다(비교. 엡 6:10-12). 누가복음은예수의 주권을 3:1-6에서 그 당시 정사와 권세의 계열을 배경으로 생생하게 대조시킨다. 가이샤(Casear)-빌라도(Pilate)-헤롯(Herod)-안나스, 가야바로 이어지는 거짓 신들의 보좌들은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 사역으로 붕괴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 시대의 정사와 권세의 하청계열은 예수의 메시야적 등극을 저지하려고 반메시야 연합전선을 폈으나(시 2) 몸소 하나님 나라인 예수는 승귀(昇貴)된 주(Lord)로 부활하였다(행 9:1-16, 빌 2:6-11).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가 시작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모든 반(反)메시야적 연합 블록(block)을 부수고 갱신시킨다. 자기중심적 자아, 가족이기주의, 지배계급의 연합, 국수적 인종주의, 파시즘, 노동조합주의 등 모든 반(反) 혹은 유사(類似) 메시야적 보좌들을 폐위시키는 것이다.
   
신(神)과 같이 되려는 개인과 집단의 자아숭배가 하나님 나라가 전복시켜 버릴 세상적 사회 체계의 핵심이다. 불변성, 영원성을 요구하는 이 세계 체계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붕괴될 운명에 처하였다.17) 세계는 이제 신적 활동의 능력(δυναμις,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발적인 에너지: 롬 1:16-17)의 작용권 내로 디밀어 졌다. 새 인류, 새 삶, 새로운 공동생활은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복종과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아숭배와 죽음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했고 3위 1체 하나님과의 복된 친교로 부르셨다. 그 복된 친교의 현실적 표현이 바로 성만찬과 세례로 입교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상 교회다.
   
나사렛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현재의 낡은 세계 속으로 뚫고(breaking-in) 들어온다. 그의 말(dābār)과 행위18)로부터 <강력한 시간의 역류>가 일어나 종말의 시간이 현실의 시간 속으로 역진(逆進)해 온다. 즉 자유가 속박의 그물 속으로, 사랑이 증오의 흐름 속으로, 메시야적 치유가 병자의 고난과 고통 속으로, 생명이 죽음의 세계 속으로 쇄도해 온다.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걸림이 된 예수라는 사람의 나약한 인간성과 인격 속에 <숨기워진 채> 하나님 나라가 현재화된다. 이처럼 인격은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는 신비체이다. 이처럼 세계변혁은 인격적 실존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새 세계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앞세워 이 세상의 영역에 침투하면 이 세상의 불변시되던 거짓된 권좌들은 분쇄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틈새에서 드라마와 종교적 흥행을 전개하는 모든 종교적 신화는 분쇄된다.19) 때때로 역사적 기독교회는 여타의 자연종교들처럼 <이 세상>과 <저 세상>사이의 틈새에서 종교적 흥행에 골몰한 나머지 세계의 변혁력을 상실해 버렸다. 하나님 나라의 줄기찬 변혁의 견인차에 연결되지 못한 교회는 이데올로기나 세상풍습의 부속물로 전락하는 보수의 아성이 되는 것이다.

   
(2) 세계변혁의 능력 : 하나님의 전투적 사랑 아가페20)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 아가페를 통한 변혁의 나라이다. <저 세상>에 가기 위해 율법과 선행과 수도생활의 사닥다리로 상승하는 에로스(eros)적 표현물이 자연종교라면, 하나님 나라는 이런 자연종교를 분쇄하며 역전시킨다. 종교는 낡아빠진 세계상의 대표적 표상이요 자기신격화(self-deification) 자기의화(self-sanctification)이며, 타락한 인간성의 가장 교묘한 변장술이다. 자기영화와 영원성을 추구하는 타락한 종교성은 거짓된 권좌의 자기영화추구와 악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삶과 공동생활속에 깊이 개입하는 변혁의 능력이요 사랑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의 종교적 감정이나 고양된 정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 드러나는 사랑은 분열과 적대관계, 이기심과 증오, 거짓과 잔인함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비참함에 대한 하나님의 복된 공격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교적 감정이나 윤리적인 규범의 영역으로 밀려날 수 없는 세계변혁의 에너지요, 전투적 사랑이다.21) 이 사랑은 사탄(Satan)의 통치에 휘둘린 채 자아숭배에 빠져드는 삶과 공동생활과 문화와 종교의 토대에 대한 공격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은 마지막 때에 세계변혁의 견인차이며 이런 종말론적 관련 속에서만 우리는 그 사랑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치유하고 구원하는 사랑의 능력으로 세상을 채우며 단절을 극복하고 적대성을 종결짓고 이기주의와 집단 이권에서 세상을 해방시킴으로써 혁명적으로 구현된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들의 나라가 아니며 사랑의 표지 안에서 새로운 공동생활의 토대이며 시작이다. 곧 새로운 사회를 동트게 하는데 기여하지 않는 새로운 개인성 따위는 성서에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스토아적 정밀한 감정의 교류가 아니다. 그 사랑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전투적 사랑이요, 아주 심각하고 처절한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구약에 나타난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구원 속에서 체감되고 터득되는 것이다, 실존 속에 역사하는 이 하나님의 전투적 사랑을 즉 세계만인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과 불타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크기를, 길이를 사도 바울은 터득한 것이다(엡 3:18-19). 세계변혁은 세계완성의 윤곽 안에서 일어나는 종말적 표지이며, 실존적 구원은 세계변혁의 아르키메데스점(point)인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구원사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3)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차원
   
결국 공관복음서에서 이뤄지는 예수의 낡은 가죽 부대 변혁 운동은 하나님 나라 완성의 과정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임을 살펴 보았다. 낡은 체제의 변혁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목적지가 아니라, 사랑과 우애로 가득 찬 공동체 생활,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기착지다. 사회체계를 틀어쥐고 있는 결속력은 율법과 권력의 원시적 강제력에서 기인하며, 이 권력은 이데올로기나, 신화나 종교의 미명 아래 작용한다. 그런데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는 그 권력(權力)작동과 행사에 이의 제기를 하고 나선다. 그 「권력」장악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기반의 무근거성을 드러낸다. 마가복음 10:41-45에서 예수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나 권세자들은 카타규리오(κατακυριεuω), 카타엑수시아조(καταεξουσιαzw)한다고 한다.22)κατα는 강세접두사며 κυριεμω(主[κυριος]노릇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예수께서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당시에 억압적인 권력으로 주(主) 노릇하는 로마제국의 가이샤(Casear) - 총독 빌라도(Pilate)-유대의 위탁통치 왕 헤롯(Herod) - 대제사장 안나스(Annas)와 가야바의 악한 위계통치체제를 공격한 것이다. 카타엑수시아조(καταεξουσιαzw: 권세[εξουσια]를 무리하게 행사한다는 의미)라는 단어를 예수께서 사용하신 목적은 예수 자신의 <섬기는 왕권> 즉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들을 대조하려고 함이었다. 카타큐리오 카타엑수시아조로 특징지워지는 모든 세상 나라는 섬기는 왕권으로 세워지고 운영되는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는 필연적으로 대결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운동은 정치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23) 섬기는 나라로서 하나님 나라는 그 시대의 정사와 권세와 보좌의 하청적 수직위계질서와 적대적으로 조우하며, 그것들을 중심으로부터 붕괴시켜 버린다. 따라서 지상의 권력체제들과 하나님 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으며 몸소 하나님 나라,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고난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 세상 나라들이 주는 박해와 적의를 온 몸으로 감싸안고 싸우는 선한 싸움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무장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 나라운동, 사회선교에 참여할 자격을 얻지 못한다.
   
교회사의 오랜 시대는 <하나님 나라>보다는 교회의 체제확대와 유지에 더 충실했다.24) 하나님 나라 완성의 희망을 따라 모험에 찬 창조적 순례를 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정사와 권세가 제시하는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에 순응해 왔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오랫동안 실종된 주제였고 장례식 때의 플라톤적 천당이 하나님 나라와 유사한 개념으로 들릴 정도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한국교회의 망각증세는 어떤 사회변혁적 에너지 창출도 하지 못하는 영적 무기력으로 나타난다. 한국교회는 사회변혁은커녕 자신마저도 변혁하지 못하고 중생대의 거대공룡인 스타우루스처럼 소멸될 운명에 처해있다. 2,000년 교회사가 보여주듯이 선도적인 자리에 서서 세계변혁에 기여하지 못하는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장애물로 역기능해 왔다. 한국교회가 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변혁과정에 동참키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가 갖는 정치적 차원, 역동적 차원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 교회는 복마전이 되느냐(막 11:17, 렘 7:11, 사 56:7) 세계변혁의 전진기지가 되느냐? 기로에 놓여 있다.
   
공관복음의 몸소 하나님 나라인 예수는 실존 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세계변혁의 아르키메데스포인트가 될 수 있음을 승인하고 있다. 세계변혁의 첫 과정은 실존적 변혁이다. 개인의 실존적 구원체험은 내면화, 타계주의화의 방식으로 사적 경험으로 축소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 도래 사건이다. 따라서 개인구원은 반드시 세계변혁의 능력으로 질적 비약을 경험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체험은 이웃 구원과 세계 변혁에 대해 아무런 접촉점도 갖지 못한 창(窓)없는 단자적(單子的) 체험이 아닌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변혁의 단초로서 실존적 변혁이 세계변혁의 운동으로 승화되어 간다는 우리의 논지를 예증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의 다메섹 구원 경험(행 9:1-10, 22장, 26장)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의 구원 사건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단자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구원이해를 세계변혁적 지평에서의 구원이해로 전환시키는 데 적절한 근거가 될 것이다.


IV.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운동 속에 나타난 사회선교 운동

1. 사도 바울의 회심과 사도직에로의 소명 속에 나타난 세계지향성
   
(1)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은 특수한 사도적 소명체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신자의 구원경험의 모범적 사례이기도 하다. 구원사건과 소명사건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도상의 구원경험을 언급할 때마다 그의 사도적 소명사건을 동시에 언급한다(고전 9:1; 15:8-10; 갈 l:13-17; 빌 3:4-11; 롬 10:2-4; 고전 9:16-17; 고후 5:16; 엡 3:1-13; 골 1:23-29; 롬 12:3, 15:15; 고전 3:10; 갈 2:9).25)<나는 구원받았다. 중생을 체험했다>는 식의 특정시간의 회심과정만 강조하는 경건주의적 고백에만 머물지 않고, 구원 사건속에 내포되어 있는 구원자(선물[Gabe]을 주신 주시는 분[Geber])의 의도에 깨어 있었다. 그의 실존적 구원사건을 선물을 주시는 분(Geber)의 주권자적 계획의 빛 하에서 해석했다. 그는 로마서 1:14에서 빚진 자(οψειλητης ειμι)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실 더 큰 구원계획속에서 중간단계로 자신을 구원하셨음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지가 아니라, 이방인 구원이 궁극적 목적지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 무할례자의 사도가(갈 1:15-17)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의 실존적 구원사건 속에는 기독교적인 구원체험이 겨냥해야 할 보다 궁극적 목적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 당시 이방인에게 <구원>을 선포한다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구원을 선포해 주는 바울의 복음(롬 2:16은 “나의 복음”이라고 지칭)은 바울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십자가 고난이었다. 바울의 복음은 단지 단자적인 개인 영혼만을 구원하는 천국행 티켓 발매행위가 아니라 바리새적인 신학과 구원관이라는 낡은 가죽부대를 찢고 바리새적인 종교의 근저를 부수는 하나님 나라의 공격무기였다. 먼저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울의 복음전파 행위는 성전과 회당 중심의 유대 기득권 체제(the Establishment)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성전-율법-할례로 이어지는 유대사회의 정사와 권세는 불변성을 고집하는 낡은 가죽부대였다. 세계 만민까지 구원의 잔치에 초청하여 나사렛 예수의 보편적인 메시야 왕국을 전파하는 바울의 이방 선교는, 민족주의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한 유대인들의 국수주의적 기대와 이방인에 대한 경멸을 거룩하게 분쇄하는 복된 공격이었다(행 10:28, 11:1-5).26) 세계의 구원은 거룩한 시온과 그 성전에서 시작되어 이스라엘을 만국의 제사장 나라로 등극시키고 열방을 이스라엘의 외곽에서 봉사하도록 하는 청사진이 바리새인적 신념이었다(사 60:1-14, 61:4-7). 바울 당시 유대인의 유월절에는 100만 마리의 희생양이 봉헌되었을 만큼 메시야 왕국의 꿈은 임박한 실현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유대인 사회에 “사형수 예수가 부활하여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었다는 선포는 견딜 수 없는 공격이었다. 예수는 참 대제사장이요(히 4장) 참 성전(히 7-8장)이요, 참 희생제물이고 참 율법의 마침이며(롬 10:4)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은 유대 선전 기득권 체제를 뒤흔든 것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갈 3:28)고 선언함으로써 기존의 유대 종교 체제를 혁파하려고 하였다. 이런 사도 바울의 대변화에는 다메섹 도상의 구원경험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바울의 다메섹 체험은 유대 바리새인 청년 사울(Saul)이 사도 바울로 변화된 사건이고, 이 체험 속에는 바울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세계선교의 경륜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바리새인의 실존 속에 일어나 자아변혁의 사건은 바리새적 낡은 체제의 변혁사건으로 점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2) 실존적 구원 속에 내포된 세계지향성
   
물론 사도 바울의 이방선교 활동의 1차적 목표는 개인들을 향한 전도활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 그것은 유대교 그레코-로만 문명에 속한 도시들을 싸고 있던 낡은 체제의 변혁활동이었고 그의 사회변혁 활동은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세계적 확장을 위한 투신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확신을 위한 투신은 그 시대의 낡은 가죽부대의 해체작업을 수반하였는데 그 과정에 바울은 엄청난 고난과 박해를 감수하였다(고후 4, 6, 11장). 바울의 고난은 우발적인 고난이 아니라 낡은 세계와 하나님 나라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적대와 긴장감의 개인적 경험이었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그랬고 바울의 이방선교 활동이 그랬듯이 사회선교는 반드시 수난과 박해를 초래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변혁적 사회선교의 동기는 정치권력의 획득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변혁세력의 동기와는 판이하다. 그러나 외형상 매우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사도 바울 이방 선교단 일행은 천하를 어지럽히는(turn upside down) 자들로 오해받았다. 로마 황제 가이샤가 아닌 “다른 임금” 예수를 전파하는 정치적 모반자들이라고 간주되었다(행 17:6-7). 에베소 선교시에는 바울 일행이 큰 성령의 권능으로 에베소인들의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인 삶을 지배하던 아데미 여신 숭배체제와 마술의 세계를 혁파하자 모든 에베소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가?(행 19장).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복음전파 행위는 넓은 의미의 정치운동이라서 기존 정치권력과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선교사는 정사와 권세들의 저항을 예상하며 그것들이 가해오는 폭력적 저항의 희생자가 될 각오를 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세계변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도상에서 수행하는 선교적 사역이지 특정한 정치이데올로기를 즉각적으로 실행가능한 현실정치 프로그램으로 제시하는 운동은 아니다. 낡은 체제의 소멸에 사회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지만, 사회선교가 그 낡은 체제를 1:1로 대체할 구체적 정치사회적 대안 프로그램을 제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자본주의 대안으로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반대로 사회주의 대신에 자본주의를 제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변혁 동력을 특정 지점에서 고착시켜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사회변혁력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쉼없이 달려간다. 하나님 나라의 세계변혁은 특정이데올로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념과 모델의 이데올로기화(化)를 저지하고 다가오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역류하는 변혁에너지에 자신을 늘 개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구원체험은 세계만인의 구원계획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무릇 기독인의 구원체험은 단자적이지 않고, 대신 세계적 연대성과 지향성을 견지하고 있다. 특정시대의 기독인의 구원 체험 속에는 그 시대의 주요 모순(낡은 가죽부대)을 찢고 새 가죽부대를 형성케 할 능력이 공급되어진다. 바울의 구원 사건 속에는 그 시대의 주요 모순인 이방인과 유대인(선민)의 갈등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로마서 1:16-17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몸소 체험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요 박해자였던 자신을 찾아 오셔서 화해와 용서와 위임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이처럼 용서하시고 새 피조물로 창조하시겠다는 복음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하신 화해와 용서의 태도는 바로 이방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였던 것이다(고후 5:18-20).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죄인의 벽이 무너지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적대적인 쌍방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 화해의 경험이 교회공동체를 배태한 것이다. 「교회」는 제도이기 전에 화해경험이고 사건인 것이다(엡 2:10-12).
   
사도 바울의 구원은 결국 세계만인의 구원을 위한 중간공리이며, 이 하나님의 궁극계획을 깨달은 바울은 이방구원의 사도로 부름받은 것이다. 모든 기독인의 구원 경험 속에는 이방지향적, 궁극적 지향성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27)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극심한 한반도에서의 구원 사건 속에는 이 모순을 극복할 능력이 공급되어져 있게 마련이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다메섹 체험에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에 기반된 낡은 가죽부대를 파열하고 새 가죽부대를 형성할 능력이 제공되는 것이다. 한반도 기독인이 맛본 해방과 구원의 경험은 한반도 사회변혁의 수준을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실존적 다메섹 구원체험은 사회변혁의 동력을 용출하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발전소이기 때문이다.
   
계급갈등이나 계층 갈등 더 나아가 이념갈등이 극심한 한반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갈등들의 한편에서 서서(특히 지배계층이나 지배계급)의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나팔수로 머물 수 없다. 이런 갈등들의 근원적 원인들을 제거하고 공평과 정의, 인애와 사랑이 가득 찬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 정진하도록 부름받고 있다. 노사갈등에 관한 우리 나라의 법은 제3자 개입금지를 명하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는 제3자란 없다. 하나님은 결코 제 3자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갈등과 모순의 제 3자적 방관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낡은 가죽부대를 찢고 새 가죽부대를 엮어가는 데 투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체험은 사적 소유가 아니라 세계적인 자산(資産)인 것이다.


  2이데올로기적 변혁운동과 하나님나라의 변혁운동
   
이데올로기적 변혁이 중앙집권적 권력의 장악을 통한 <위로부터의 전복>(superversion)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변혁론은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인격과 마음의 설복과 지배로서 심층구조부터 변혁시키는 <아래로부터의 전복>(subversion)이다. 이데올로기적 변혁론이 계급갈등과 계급비화해성의 원칙에 근거한 투쟁과 분열의 역학(dynamics)에 기초한 변혁론인데 비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림을 통해 신-인간, 인간-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화해와 평화의 역학에 기초한 성령적 변혁론이다. 하나님 나라(다스림)에 들어온 개개인의 성육신적 자기비하로 변혁의 열과 빛을 내며 화해를 엮어내는 자기희생적 변혁론이다. 하나님 나라 변혁론은 타자희생이나 증오의 에너지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감동, 희생과 설복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변혁론이다. 원자들은 에너지 준위가 높은 궤도(하나님)에서 낮은 궤도(인간)로 진입하면서(성육신) 열과 빛을 발산한다. 더 높은 준위에 있는 개개인들이 자기 기득권의 궤도를 탈출하여 낮은 궤도로 내려오면 변혁의 열과 빛(energy)을 발산한다. 기독교회가 자신이 마땅히 누려도 되는 기득권 계급의 궤도에서 섬기는 계급으로 진입하면(빌 2:6-11), 이 세상을 향한 엄청난 양의 변혁적 열과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변혁론이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체제에 안주하려는 변혁론인데 비해 하나님 나라의 변혁론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 앞에 자신을 개방시키는 종말론적 유보에 바탕한 영구변혁론이다.
   
그런데 현실 기독교는 변혁운동인가? 이 질문이 새삼스럽게 제기되어야 할 만큼 한국교회의 현황은 경직된 보수주의로 닫혀있다. 민족 모순과 계급모순을 부둥켜안고 싸우는 변혁운동권을 공안당국자의 시선으로 쳐다보는가? 아니면 메시야적 기대감으로 쳐다보고 있는가? 세계는 이념의 빗장이 풀리고 분열과 증오로 얼룩진 원수들이 통합의 역동성을 드러내면서 역학적 균형을 이루어 가는 이 때, 한국 교회는 이 급변하는 형세를 자본주의의 무한 승리로 태어난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질서에 편승하고만 있을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누가 대통령이 되는 일에만 정신을 팔고 있을 것인가?
   
이 세계 안에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통치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적 인종적 이념적 블록(block)의 단결체제가 이합집산을 하면서도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기독교회는 메시야적 통치에 저항하는 세계상 앞에서 완성을 향해 줄달음치는 하나님 나라의 지축에다 그 자신의 운명을 결박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완성점을 향해서 분초를 다투며 달음질하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낡아진 가죽부대로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는 낡은 가죽부대 속에 항상 새포도주를 발효시켜서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여명을 선취토록 하신다. 기독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정당한 수용체가 되기만 하면, 그것은 낡은 가죽부대 안에서 일어나는 발효력 왕성한 새 포도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왕왕 교회사는 교회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의 도구로 전락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기능하였음을 증시(證示)하고 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교회공동체의 구원 체험 속에 그 시대의 주요 모순을 돌파하고 죄악된 사회구성체를 변혁하고 새 가죽부대를 창출할 수 있는 에너지와 권능을 허락하셨다.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감춰진 채 누룩처럼 발효하고 있다. 겨자씨는 잠시 동안 숨기워 진채 보존되듯이, 새 가죽부대의 청사진은 갑자기 현상되는 것이다. 자아구원 속에는 사회구원, 생태계 구원의 대경륜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공동체의 변혁목표는 유일회적인 사회혁명이 아니다. 한 정권이나, 체제의 소멸과 옹립도 아니고 하나님나라의 완성점에 대한 근사치적 접근이다. 반(反)변혁세력의 대오에서 출애굽하여 - 계급갈등의 방관자적, 초월자적 입장에서 -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헌신하면 자연히 사회변혁의 향도적 리더쉽을 행사할 수 있다. 교회가 직면한 사회는 하나의 특정사회구성체로서 그것 자체를 옹호하고자하는 강고한 권력의 하청질서를 이루고 있다.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궁극적 승인은 종교에 의한 신적 재가이다. 따라서 교회가 변혁세력이 되고자 할 때, 교회내에서 종교개혁적 자기 갱신을 먼저 맛보아야 한다. 실존을 찍어낸 사회구성체의 틀을 변혁하지 않는 한 <구원>은 증장되지 않는다. 실존 속에서 일어난 자아변혁적 중생체험(conversion)은 사회구성체를 변혁시키는 내연재료로 기능한다. 체제변혁의 관건은 실존적 구원사건(변혁)에서 비롯되고, 사회변혁의 실존적 구원 내용 속에 선취되어 있다. 사회변혁은 실존구원의 자라감과 완성을 증장시키고 촉진시킬 것이다. 죄악된 사회구조는 자기충족적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자신을 신처럼 경배해 줄 것을 요구한다. 성숙하고 정교한 이데올로기일수록 이의제기를 허용치 않는 정언명법으로 신적 권위로 장식되어 있다.28)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세계 질서의 쇄도를 보면서 이런 우상화된 이데올로기의 총공세를 보고 있다.

  
3. 하나님나라 운동의 객체이면서 주체인 교회공동체

앞서 말했듯이, 사회변혁론적으로 조망하면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은 이미 사회변혁 에너지를 발산하는 과정이며 이 낱낱의 개인들의 구원경험은 귀납적으로 교회의 사회변혁 에너지로 고양된다. 이것이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구원경험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사회변혁적 이상에 눈뜨는 경험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교회됨의 핵심은 실존적인 구원경험(indicative-하나님나라의 수용성)이며 이 구원경험은 타자지향성, 세계변혁 지향성을(imperative-하나님 나라의 발산성) 내포하는 구원 경험이다.29)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살펴 보았듯이, 그의 다메섹적 체험은 기독신자의 실존적 구원 경험의 핵이요, 세계지향적 변혁력이 발산되는 아르키메데스점이다.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은 노동당과 같은 강철같은 전위당이나, 무력시위 등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은 나약한 인간성, 자기를 비운 연약성속에 역사한다. 하나님 나라는 가장 약한자 속에서 현존하고 발효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는 토양과 같이 어떤 작위적 조작도 허용치 않는 지극히 “수용적인 실존” 속에서 역사한다. 하나님 나라는 “받기만”하는 자 속에서 역사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존의 방법은 십자가의 길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 참혹한 무기력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침투하고 현존한다. 어떤 시대든 교회는 그 시대마다의 독특한 죄와 죽음의 메카니즘과 맞대결하면서 해방과 구원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한다. 경천동지할만한 혁명의 함성속에서 발산되는 변혁의 열기는 개개인의 윤리적 결단이나 실존적 변혁을 거치지 않는 경우에는 허수의 열기로 판명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변혁력은 겨자씨와 누룩의 생명력과 같다. 누룩은 겉모습은 작고 미약하지만 낡은 가죽부대를 터치는 발효력이 있다. 노동당과 같은 강철같은 조직속에 하나님 나라는 현현하지 않는다. 겨자씨처럼 자기 스스로를 비우고 축소시켜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은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은 발산되는 것이다. 한 시대의 사회변혁은 이 작은 겨자씨나 누룩같은 실존적 변혁사건에서 연원된다.
   
1-3차 선교여행 중에 바울이 뿜어낸 그 엄청난 변혁의 에너지는 <누룩과 겨자씨>같은 <다메섹의 구원사건>속에서 발원되는 것이다. 바울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였고 태산을 옮겨 바다에 던진 자였다. 바울의 다메섹 구원사건은 그의 내면에 일어난 실존주의적 구원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이웃에게 스며드는 역사적, 객관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유럽과 소아시아 즉 세계선교라는 그 거대한 변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바울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다메섹 사건을 일으키신 것이다. 군중적 열기나 집단주의적 이해관계가 창출하는 변혁에너지는 치열한 듯 하나, 하나님 나라가 보유한 창조적 변혁 능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미약하다. 교회됨의 본질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삼중적 화해를 경험하는 데 있다. 기독교회는 자신이 속한 시대의 분열적 대극을 핵융합적 에너지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창립된다는 것은 그 교회가 속한 사회의 분극화 작용을 배태하는 총체적 메카니즘을 분해하는 화해의 진지 구축을 의미한다. 교회의 현존 자체가 적대적 쌍방의 극적 연합의 에너지를 발산시켜 그 여세로 여타의 분열적 대극을 와해시킨다는 것이다. 혁명적 사건들보다 한 실존의 내면속에서 시작되는 내밀한 구원경험과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 결단은 훨씬 더 엄청난 변혁의 에너지를 발산해 낸다. 변혁의 대상은 제도, 이념이기 전에 인격이다. 변혁의 에너지는 이념 속에 보관되어 있지 못하고 인격 속에 화육되어 있다. 인격의 변혁은 인격만 할 수 있다.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 수용체(객체)가 될 때만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주체로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격사건이며, 각각의 인격이 오토 바실레이아가 될 때 사회변혁의 능력이 생성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참된 기독인이 되는 길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한 사람의 공산주의자가 되는 길보다 더 어려운 길이다. 사회구성체의 변혁은 물적인 권력의 강제(superversion)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격의 변혁(subversion)에 의한 것일 때 그 변혁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할 수 있으리라.
   
요약하면, 우리는 이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체험한 복음의 자아변혁적 구원능력이 실존주의적인 주관주의로 축소되지 않고 세계변혁과 타자 구원으로 치환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서적 범주를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오토 바실레이아(ἄυτο βασιλεὶα)인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과 사도직 소명체험에서 발견하였다. 부가적으로는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교회론적 진술(행 2장, 4장, 9:15, 고전 9:1, 갈 1:12-17, 빌 3:4-15) 속에서 실존적 구원이 내포하고 있는 타자지향성과 세계변혁성을 포착하였다.
   
또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변혁운동 - 정치권력 획득에 일차적 목표 - 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도상에서 일어나는 종말론적 변혁운동의 일환인 사회선교 활동과의 차별성을 지적하였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우주적 구원사속에서 교회는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운동의 객체이며 수용체이자, 또 한편으로 세계변혁의 주체일 수 밖에 없는 교회공동체의 이중적 특성을 취급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독교회의 세계변혁운동은 정치적 급진주의나, 메시야적 열광주의와는 다른 종말적 유보위에서 일어나는 신앙적 선취과정임을 분명히 했다. 변혁운동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근사치적 접근과정을30) 각 시대마다 창조적으로 열어가는 <신앙 운동>인 것임을 주지시키고자 한 것이다.


Ⅴ. 결론 : 세계변혁의 향도인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사회선교는 제자도의 주요 실천항목

사회변혁의 관심은 맑시즘이나 정치적 저항자들, 직업혁명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세계변혁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역사적 현존의 반영임을 확인했고, 가장 본질적인 성서적 주제였음을 확인했다. 하나님은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자(Neuer)로서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갖고 시간을 역류하여 이 현재속에 침투한 <Der Kommende 오시는 자>이다. 특히 사회경제적 체제의 변혁은 성서의 주요한 관심 중에 하나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세계가 죄와 불의속에 왜곡되어 탄식하는 것을 외면치 않으신다. 개입하시고 변혁하시되 마침내 세계를 재창조하여 완성하실 때 계속 변혁하신다(계 22:1-5).
   
구약성경의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사회변혁의 예전적 긍정(sacramentalization)을 잘 보여준다.31) 50년만 지나면 <팔린 토지와 전답, 가옥, 노예>는 원주민에게 회복된다. 부와 가난의 세습을 막으시는 긍휼의 손길이다. 희년법 제도는 구약시대의 주기적인 사회혁명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성례전(sacrament)이었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매개물이다. 희년법제도는 주기적 사회변혁을 예전적 수준에서 적극 명령하고 있다. 재벌의 영구상속과 토지의 사적 소유는 바알 토지제도의 후예들이지 희년법의 정신을 전혀 담지 못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 4장에서 초대교회는 이 희년제도(cf. 눅4:16-18 은혜의 해)를 실천했다.32) 교회사의 첫 시작부터 <사회변혁의 예전화>라는 명예로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왜곡된 교회사는 하나님 나라의 추상성과 피안성을 강조했다. 하나님 나라를 정신화했고 신학과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과정을 밝히기 보다는 은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는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 표준적인 구원경험을, 표준적인 교회경험을 맛보아야 한다. 지금 이 땅에 교회 간판을 붙이는 교회들이 아니라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잣대로 교회됨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 세계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낡은 세계의 변혁이나, 세계갱신을 목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의 한 양태다(렘 31:33, 사 43:25, 44:22, 겔 36:26-27).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보지자이거나 구원의 창고가 아니다. 변혁된 삶을 살며 변화를 일으키도록 기대되는 이 집단은 스스로 하나님나라의 위대한 혁명을 수행할 주체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수용체다. 따라서 사회변혁은 교회갱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삶을 돈의 지배 안에 그리고 소유물의 획득과 증대를 위한 열망안에 가두어 놓는 속박과 황금사슬을 깨뜨리는 능력(dynamics)을 지닌 자유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터오며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결사적인 욕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한다. 이 나라는 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안에서 자본주의적 악마적 권능을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안에서는 물신숭배가 더 이상 위광을 발휘하지 못한다.33) 자본주의 체제하의 교회는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다.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바다에 침몰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는 마침내 돈은 물신(物神)의 위광을 잃고 형제적인 친교의 토대를 놓아주는 데 사용된다.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염려(마 6:25) 탐욕(눅 12:15, 딤전 6:10, 히 13:5)에 사로잡힌 세상안에서 돈은 성스런 광채를 지니며 치명적 힘을 구사한다. 돈의 신 맴몬(Mammon)이 세상과 삶을 지배하는 듯 하다. 맘몬의 경제적 현현양식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하부구조인 자본가 - 임노동자의 관계는 맘몬숭배 위에 터하고 있다. 하나님나라 운동입장에서 보면 맘몬숭배가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모순인 것이다. 맘몬 신(靈)은 자본주의라는 사회구성체를 물적(物的) 토대로 삼아 자신의 가치관을 개개인들 속에 내면화시킨다. 더욱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의 분류속에서 삶은 더욱 더 비인간화의 심연으로 빠져든다. 복음은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의 모든 예상과 기대를 초월하여 변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자족적이고 정지된 사회구성체가 아니다. 모순이 극에 달한 사회구성체를 그 시대마다 창조적으로 해체해가도록 추동하는 모든 영적인 통찰(insight)이요 지적 정위요 도덕적 결단이요 재정적 투신이다.
   
사도행전 2-4장의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koinonia)는 맘몬 지배적 인류역사의 마지막 성숙의 목표를 잘 보여준다. 소외된 삶의 와중에서 위세를 떨쳤던 모든 물질적 수단은 형제적 친교의 토대가 된다. 형제애로 엮어진 이 공동체는 성령안에서 사적 재산권(신성불가침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규약)과 소시민적 소유영역의 울타리가 무너져 내린 하나님의 가족들이었다. 모든 풍요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 속에서 강력하게 현존하셨다. 이 초대교회의 참회와 회개는 돈 지갑과 소유물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교회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세상의 빛이다(마5:10-11, 10:17, 요 15:18, 16:1-2, 마 13:33). 그러면서도 교회는 주변세계의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적응하는 길이 항구적인 유혹으로 열려있다. 안타깝게도 종교개혁에 의해 생겨난 교회들(자유교회, 경건한 집단들)은 중산층의 대변자이며 생활 및 사고 방식에 있어서 집요하게 중산층의 경계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비판적 분석과 검토를 통해 교회체제안에서 주변세계의 권력체계가 어느정도 반영되고 종교적으로 재가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공동체의 삶에 자기비판적 분석과 검토는 시민적인 계급체제의 속박에서 새로 해방되는 일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교회공동체가 당대의 주류의 지배질서와 계급사회의 바다속에 함몰되어 버린다면 낡은 세계를 변혁하고 해방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한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와 정치의 죄악된 메카니즘을 복음의 광채로 공격함으로써 변혁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열광적 종교전쟁이나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미가 아니다. 국수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십자가 행진도(Crusade Parade)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기존체제와 사람들을 쉴새없이 변혁에너지로 공격하는 변혁운동인 것이다. 시대, 장소, 체제, 인종을 불문한 변혁운동인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 완성의 희망에 대한 투신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광풍에 직면하여 야웨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맘몬과 바알신으로 혼동되는 지경에 당도했다. 이익 추구, 물질적 풍요를 우상시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한 명의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는 일은 한 명의 공산주의자로 살아가는 일보다 더 어렵고 위험에 찬 일이다. 참된 신앙적 실존은 비길 수 없는 고난과 죽음의 심연에로의 끌려가는 경험을 피할 수 없다. 확실히 참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의해 지지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쓰라린 고난의 길(Via dolorrosa)이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아변혁에서 시작된다. 이 그리스도인됨이 동료 인간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에 있어서 혁명적 결과를 가져온다. 제자도는 자아변혁적이면서 동시에 사회변혁적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뤄질 때까지 쉼없는 갱신운동이자 변혁운동이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고 따라서 새 인간, 새 상황, 새 정치를 창조하시는 성령! 땅의 불의 가운데서 하늘의 정의를 세우고 모든 죽은 것이 살아나고, 새로운 세계가 이루어지기까지 쉬지도 않고 잠잠하지도 않으시려는 성령이시다(Karl Barth).


토의를 위한 질문
1. 어떤 점에서 개인 구원 경험 안에는 이웃 구원과 세계 변혁의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는가? 각자의 경험을 통해 이 주장의 타당성을 토론해 봅시다.
2. 몸소 하나님 나라란 개념이 어떤 점에서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가 될 수 있을까?
3. 한국교회가 왜 사회변혁에 앞장서지 못하고 수구 혹은 보수세력의 온상처럼 기능하고 있을까? 위의 글을 중심으로 토론해 봅시다.
4. 성서적 사회선교 운동이 어떤 점에서 종말론적인가? 하나님 나라운동의 일환이 사회선교운동이 열광적 메시아운동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참고고서 목록
Hans Joachim Kraus, 『조직신학』, 박재순 역(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6).
Gustavo Gutierez, The Power of the Poor in History(New Yo가, NY: Orbis book, 1983).
하우쯔 바르트, 『현대ㆍ우상ㆍ이데올로기』, 김영철 역(서울 : IVP, 1988).
Karl Heim, 『세계의 완성자 예수』, UBF 간사회 역(서울 : UBP, 1985).














1) 이 글의 주요 부분은 <성서한국>이 발행하는 책(사회선교)에 기고된 글임을 밝힌다.
2) 짐 월리스(Jim Wallis)의 The Soul of Politics가 정치의 개종가능성을 다루는 책이다.
3)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읽는 모세오경 1. 김회권 교수의 창세기, 출애굽기 강해』(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30-41.
4) 이 둘은 본격적인 의미의 기독교 사회학 담론을 주도한 에른스튀 트륄취(1865-1925,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의 사상을 반향하고 있다. 
5) Walter Wink, Engaging the Powers: Discernment and Resistance in a World of Domination (Philadelphia: Fortress, 1992).  
6) Hans Joachim Kraus, 『조직신학』, 박재순 역(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본 고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그 골격을 크라우스(Kraus)의 『조직신학』에서 취했다.
7) 양상철, 경제사학습 (서울: 세계, 1987) 중 “사회구성체의 기본문제," 73-90.
8) 프란시스 쉐퍼, 『현대사상과 기독교』 (서울: 성광, 1984); J.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II. Ⅰ- Ⅵ, trans. Henry Beveridge(Grand Rapids, IN: Eerdmans, 1981).
9) Karl Heim, 『세계의 완성자 예수』, 장국원 역(서울 : UBP 1985), 55-67.
10) 라인홀드 니버, 맑스 엥겔스의 종교론, (서울: 아침, 1988), 52-56, 160-167.
11) Kraus, 같은 책, 476.
12) G. Gutierez, The Power of the Poor in History (Maryknoll: Orbis book, 1983), 51-52.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의 핵심은 Sonship-Fatherhood와 fellowship-brotherhood와 자연 과의 fraternity(친화성)의 획득이다.
13) 교부 오리게네스가 마태복음 주석서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Origenes, Mattaus Commentary ⅩⅣ. 9).
14) Karl Heim, 같은 책, 228-230.
15) Heim, 같은 책, 27-28.
16) Kraus, 같은 책.
17) Emil Brunner, Man in Revolt, trans. Olive Wyon(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4), 145-159.
18) 같은 책, 91. dābār는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event-word, effective word를 의미한다(사 55:10-11).
19) 같은 책, 64; Karl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2), 24-60.
20) Kraus, 같은 책, 129-132.
21) Hans Joachim Kraus, 같은 책, 20-38.
22) Nestle-Aland 26th Novum Testamentum Graece, 125:
    οἴδατε ὅτι οὶ δοκούντες ἄρχειν τών ἐθνών κατακυριεὐουσιν αὐτών καὶ οὶ μεγἀλοι 
    αὐτών κατεξουσιἀζουσιν αὐτών.
23) Hans Joachim Kraus, 같은 책, 470-480.
24) 이신건, “하나님 나라와 세계변혁Ⅰ,” 총신대보 142호.
25) 이런 절들에 사용된 바울의 공식문구는 χαρισ+부정과거(aorist) 수동태 동사(διδωμι)+ μοι인데, 이것은 구원사건과 사도직소명사건의 일치를 드러내 주는 구절이다.
26) W. Barclay, The Mind of St. Paul(London: Collins Clear-type press, 1958), 9-31.
27) Seyoon Kim, The Origin of Paul's Gospel(Grand Rapids, IN: Eerdmans, 1981), 56-66.
28) 하우쯔 바르트, 『현대ㆍ우상ㆍ이데올로기, 김영철 역(서울 : IVP, 1988), 30-50.
29) Walter E. Conn, Conversion(New York: Society of St. Paul, 1978), 281-314
30) Juan Luis Segundo, “The Proximity of the Kingdom,” in The historical Jesus of the Synoptics (Maryknoll: Orbis book, 1985), 101-112.
31) 대천덕, 『토지와 자유』(서울: 생명의 샘터, 1986).
32) 장 뜨로그메, 『예수와 비폭력혁명』 (서울 : 한신연, 1986), 19-40.
33) Kraus, 같은 책, 450-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