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의 책임은 백성에게 있다- 사무엘상 8장과 12장을 중심으로
사무엘상 8-12장은 부족사회에서 군주제 사회로 이행하던 시기에 있었던 국가권력 논쟁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이행에 따른 사회적 변화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어서 이로부터 당시 국가권력의 기본적인 성격을 추출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대한 구약성서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이 장은 적절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특히 그 변화들은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전 9-8세기 이후 이스라엘 사회를 규정할 생산관계의 단초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만큼 그에 대한 8-12장의 통찰은 근본적이고 또 예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시간적 거리를 감안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함께 고려하면, 그 내용들은 현대 국가권력 일반을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 먼저 이행에 관한 논쟁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권력의 ‘지향점’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관심은 본문의 역사적 형성과정에 대한 물음보다는 본문의 현재 형태에 집중하게 한다. 그렇다 해도 형성사적 사유가 배제되지는 않는다.
8장과 12장은 사울의 즉위에 관한 9-11장을 감싸며 이 사건과 아울러 군주제 자체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제공해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찾아와 그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8장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짜여 있다. I 4절 <나아오다:돌아가다> 22b절 II a 5a, b절 <부패와 ‘다른 나라처럼’ : ‘다른 나라처럼’과 전쟁> 20b, a절 b 6절 <기도:기도> 21절 c 7a절 <응답: 왕을 세우라 : 응답: 왕을 세우라> 22a절 III a 7b-8절 <백성: 하나님의 왕권 거부 : 하나님: 백성의 구원 요청 거부 경고> 18절 b 9절 <경고:거절> 19절 IV 10:11-17절 <군주제 설명> 8장 4-22절은 이처럼 전체적으로 교차법 구조를 보이고 II와 III은 그 안에서 평행법 구조로 되어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복잡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과는 I이 보여주는 대로 단순하고 분명하다. 이스라엘은 군주제 도입을 위한 그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교차법 구조로 되어 있는 II의 5절과 20절은 이스라엘이 군주제를 요구하는 배경을 밝혀준다. 그들이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내적으로는 부패에 있고 밖으로는 전쟁의 효율성에 있다. 이때 방점은 후자에 놓인다. 그리고 이것은 사울 선택의 정당성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확증되는 것에서 확인된다.(9-11장) 사울에 대한 무시와 비방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군주제가 시작된다.(11:12-15 참조) 군주제는 III의 19절에서 이스라엘이 11-18절의 경고를 거부하고 왕의 필요성을 완강히 주장하기 때문에 도입이 허용되지만, 그 도입 요구에 대한 평가는 이를 하나님의 왕권 거부로 간주하는 7b절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1)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사들은 엘리와 사무엘(!)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토대를 갖춘 제왕적 통치자가 아니라 군사적 구원자이든 정치·사법적이든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실현하는 제한적/카리스마적 대행자들일 뿐이다.(삿 8:23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이 사사들에 의해 이상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사기의 대부분은 오히려 정반대의 양상을 보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져 왔던 하나님의 왕권 제도지만, 이제 전쟁 위기 앞에서 백성들은 이를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판단에는 4장에 보도된 언약궤의 실패도 한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언약궤 때문에 블레셋 지역은 여러 가지 괴로운 일들을 겪었고 또 언약궤는 독자적으로 돌아왔다.(5:1-7:1) 뿐만 아니라 사무엘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굴복시키고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7:2-17) 이를 다 목격했는데도 이스라엘은 사무엘 이후 자신들을 다스리고 자신들을 위해 싸울 자를 사사,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왕에게서 찾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들에게 그들이 앞으로 군주사회에서 고통을 겪을 때 그에게 호소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또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이 이민족의 억압 때문에 울부짖으면 그가 듣고 구원 활동을 시작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여기서 군주제 도입은 백성이 군주에게 의지하고, 그 때문에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제도적 거리가 생김을 뜻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논쟁 한 가운데 위치하는 IV는 군주제 도입이 백성에게 미치는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 결과들을 아우른다. 11-12절은 아들들에게 부과되는 군대 관련 부역과 노역, 13절은 딸에게 부과될 노역, 14절은 토지수용, 15절, 17a절은 농업․목축 생산물의 십일조 세를 다루고, 17b절은 군주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처럼 각종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백성을 ‘종’이라고 규정한다. 군주제 요구는 안에서의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밖으로부터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며, 이러한 안전과 자유의 교환이 권력 출현의 배경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군주제를 요구함으로써 이집트에서와 달리 자기 땅에서 자발적으로 권력의 종이 되려 한다는 것이 본문의 경고다. 엘리와 그 아들들의 경우가 이미 보여준 것처럼, 사무엘의 부재와 그 아들들의 부패가 앞으로도 있을 전쟁에서 안전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와 불안을 덜어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무군주사회에서 군주사회로의 전환을 꾀하지만 이스라엘이 그 결과 얻을 것은 종의 지위뿐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다. 12장에서2) 사무엘은 이에 따라 왕으로 선택되고 검증된 사울을 이스라엘 앞에 세운다. 그의 왕 즉위는 출애굽 이후 하나님을 잊고 버려온 역사의 귀결로 간주된다. 비록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이스라엘이 선택한 군주제의 운명은 여전히 이스라엘 자신에게 달려 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를 경외하며 그의 법을 지키는지 여부가 관건이다.(12:14-15, 24-25) 6-12절의 이스라엘 역사 회고는 이 조건의 이행에 대해 긍정적 답을 내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이 14절의 소원을 낳는다. 오, 너희가 야훼를 경외하고 그를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야훼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너희나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나 다 너희 하나님 야훼를 따른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한 이스라엘이 계속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셈이다. 이것은 동시에 군주제 도입의 폐해를 완화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야훼를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왕과 지배세력의 자의적 권력행사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 야훼의 말씀은 군주제 사회의 헌법과 같은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권력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작은 규모의 군대 유지, 부의 축적 자제, 많은 아내 금지, 야훼 경외와 그의 말씀 준수 등을 말하는 신명기 17장 14-20절의 본문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야훼 경외와 그의 말씀 준수가 반복된다. 따라서 왕에게 요구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들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사무엘서를 포함한 보다 넓은 신명기적 역사서를 고려할 때 드러난다. 사무엘하 8장 16절과 열왕기상 3장 3절, 10장 9절은 군주제의 목표와 이상이 정의와 공의 실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군주제 사회에서 ‘종’으로 전락되는 것을 방지하고, 더 나아가 왕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둠으로써 군주제 도입으로 발생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제도적 거리를 극복하는 길이 된다. 정의와 공의는 예언서들에서도 군주들이 실현해야 하는 과제로 언급된다. 미가는 정의를 아는 것이 군주제 사회 통치자들의 본분이라고 역설한다.(3:1) 예레미야는 정의와 공의가 번영의 길이라고 설파하며, 정의와 공의는 약자의 권리와 인권을 존중하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22:3, 15) 그렇기에 이사야는 미래의 왕이 공의로 통치하는 꿈을 꾼다.(9:1-7; 11:1-9; 32:1) 그 꿈이 실현된 사회에서는 한편으로는 군주제 도입의 계기가 되었던 전쟁이 폐지되고(사 2:1-4; 미 4:3),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과 훼손되었던 평화로운 삶이 회복된다.(미 4:4 또한 사 65:21-23도 참조) 이러한 사회의 모습은 시편기자가 노래하는 대로 인애와 진리가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춤하는 세상이다.(시 85:9-13 또한 사 32:15-18; 45:8도 참조) 이러한 정의와 공의 이해 배후에는 야훼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있다. 야훼는 정의를 사랑하고(사 61:8),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이다.(렘 9:24) 정의는 야훼의 말씀의 한 축이기에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정의 실천을 낳는다.3) 그리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야훼를 사랑하는 길이다.(출 20:6; 신 5:10; 또한 요 14:15.21; 15:10도 참조)4) 따라서 야훼의 말씀은 군주제 사회로의 전환으로 발생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신학적 장치이자 정치적 장치인 셈이다. 12장 15절과 24-25절에서 눈길을 끄는 현상은 진술의 초점이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결정하는 요인을 왕과 그 제도보다는 그 제도를 선택한 백성에게서 찾는 것은 권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본문은 백성이 권력의 희생자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중심은 왕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왕이 현실적으로 지배 권력을 행사함에도 그는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권력은 양도된 것이 아니라 위임된 것이기 때문이다. 위임자는 하나님의 동의를 얻어낸 백성이다. 그렇기에 권력의 부침은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는 정치 현실과 일치하지 않고 또 실제로 역사 속에서 찾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이해이지만, 그 진술 자체의 의미는 반감되지 않는다. 위임받은 자가 권력을 남용하여 위임자인 백성을 억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러한 진술은 - 물론 보다 세밀한 논의가 있어야 하지만 - 적어도 그러한 권력행사에 대한 반론권 내지 백성의 권력 통제권을 보장할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상 8장과 12장은 국가권력의 생성을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는 것으로 최종 이해하면서도, 그 전제 아래 국가권력의 목표를 설정하고 말씀에 의한 통제 가능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점에서 국가 권력의 시작은 창세기 3장이 보도하는 인간의 새로운 인식 능력 획득과 비교될 수 있다. 그 능력과 국가는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기본조건에 해당하는데, 각각의 시작을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렇다. 후대의 층인 12장 17절과 19절은 국가권력의 태동시키는 왕 요구가 하나님을 거부한 ‘큰 악’이라고 한다. 구약성서는 백성에게 국가권력에 순종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백성과 국가권력이 모두 지키고 순종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곧 ‘말씀’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은 권력에 짓밟히는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은 순종이 아니라 오히려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다. 정의와 공의를 지향하도록 이끄는 책임이 백성에게 있어서다. 이에 비춰 신약 특히 로마서 13장의 국가권력 이해에 대해 짤막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구약의 국가권력 이해가 신약에서의 이해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반쪽 진실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 시작은 하나님과 충돌하는 것이었지만 백성의 요구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추인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구약성서가 보도하는 이스라엘에서의 권력 생성과정을 일반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권력의 생성과정을 이해하는 범례로 사용하고자 하며, 그렇게 해도 큰 무리가 없기만 바란다.) 바울은 권력의 목적을 하나님의 일을 실현시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에서 그 예를 찾는다. 그러나 ‘정상적인’ 국가권력의 운용이 문제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경우에도 바울의 말을 적용하여 국가권력에 순종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예컨대 선을 장려해야 할 국가권력이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자들을 오히려 억압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밝힌 입장을 따라 간다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뜻밖에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그의 태도를 결정한다. 이를 국가권력의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국가권력의 남용을 어떤 이름으로 미화해도 그 질문은 실체를 들여다보게 할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보다 작은 권력의 영역에서이기는 하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고 하는 공회 앞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라고 반문한다.(행 4:19) 그렇다면 국가권력을 따르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로마서 13장은 국가의 비정상적 권력행사가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그 말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하나님은 국가권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행사가 약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도록 이루어지는 데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다시 사무엘상 8장 5절, 20절로 돌아가자. 이 구절들은 국가권력 태동의 동인을 미래에 대한 백성들의 불안과 그에 따른 안전과 안정 욕구에서 찾는다. 그 때문에 자신의 자유와 소유를 포기할 수도 있을 만큼 그 불안과 욕구는 지배적이다. 이것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국가권력의 지배와 통제를 기꺼이 용인할 수 있고, 권력남용조차 감수할 수 있고 자신을 종의 상태에 머무르게 할 수도 있고 또한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합리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해도 국가권력의 행사가 정의와 공의와 평화를 지향하도록 하려 한다면, 사람들은 그와 같은 불안과 욕구를 권력의 형태와 힘을 빌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방식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에서 발견된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자못 심각한 질문에 대한 답은 ‘평범하게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었다. 이때 이웃이란 내가 아는 범위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이웃은 고통과 외로움 가운데 신음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고 상처를 싸매주는 것이 예수가 말하는 사랑이다.(눅 10:25-37) 이것이 구원과 영생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야 하는 길이다. 그 길을 가는 자들의 공동체가 예수가 세우기 원하는 공동체다. 그 속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자기 훈련이 이루어진다. 불안을 서로 나눠 짊어지고 타인과 그의 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그 공동체에는 권력이 설 자리가 없다. 모든 사람들을 ‘종’으로 만들려 하는 폭압적 권력에 누구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말씀 곧 법의 전부이다. 법을 지킴으로써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에 그렇다. 법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사무엘상 12장은 바로 이스라엘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그때에 지배적 힘이 되고자 하는 권력이 제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권력은 정의와 공의를 지향할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상기 | 박사는 한신대(M. Div)와 독일 뮌스터 대학(Th. D)에서 구약을 공부하고 현재는 한신대와 감신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쓴 책으로 『레위기 1』이 있고, 주요관심사는 지혜문학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