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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6일 금요일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신뢰 문화



김형민/호남신학대학교 교수



현대는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과거와는 달리 청소년들은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타율보다는 자율의 가치를 중시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이러한 개인화의 과정이 현대인들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자율성의 증대로 인해 각 개인이 짊어져야 할 위험과 책임도 더욱 커졌다. 그런 점에서 개인화는 에고이즘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하지만 개인화를 자아중심적 개인주의로 오해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일들이 자주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갈등도 증폭되고 사회구성원들 상호간의 신뢰도 약화되고 있다. 우리가 이기적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성의 회복이다.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될 때 우리 공동체는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사회학자들의 말과 같이 신뢰는 ‘사회자본’이다. 신뢰는 사회의 문화적이며 사회적 협력을 촉진하다. 어느 사회든 신뢰는 신앙과 관습을 통해 전승되었다. 신뢰성 회복을 위한 종교공동체, 특히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긴급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신뢰란 무엇인가? 신뢰는 결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아니다. 인간적 품성도 덕도 아니다. 신뢰는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시고 신뢰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다. 신학자 본회퍼의 말과 같이 ‘신뢰는 인간의 공동생활의 가장 위대하고, 진기하며, 복된 선물’이다. 불신이 인간의 사회성을 파괴한다면, 신뢰는 인간의 공동체와 우정을 회복시킨다. 이러한 우정의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기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촉진해 나가야 할 ‘신뢰의 문화’이다.

신학자 슈트룽크는 우리가 예수를 만나면 세 가지 차원의 신뢰의 문화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예수를 만나면 자기신뢰가 회복된다. 그동안 우리는 자기신뢰를 잘못된 신앙의 유형으로 생각해 왔다. 자기신뢰보다 자기불신을 겸손한 신앙적 이상과 경건한 삶의 태도로 칭송해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는 숙명적으로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적극적인 신뢰형성을 방해한다. 자신을 불신하도록 종교적으로 교화된 사람이 ‘신뢰의 문화’에 동참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예수는 자기신뢰가 메시아적 신뢰형성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자기신뢰를 불합리한 삶의 태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신뢰’는 이기주의나 자아중심주의와는 다르다. 부자 농부의 비유(눅 12:16-21)는 신뢰를 선물로 인지하는 못한 자아중심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풍성한 추수의 결실을 맺은 부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대신 오직 자신을 향해 말한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하나님과 예수의 신뢰능력을 의지하는 자기신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가 말씀하신 자기신뢰는 약하고 아픈 자들을 치유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능력이다. 쓰러진 자들이 일으킴을 받고 억눌린 자가 자유를 얻음으로써 상실한 자신의 인간존엄을 회복하게 된다. 예수 안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향한다. 마치 병든 자들이 자신의 치유를 예수께 청탁한 것과 같다. 환자들의 청탁은 바로 예수를 신뢰하는 환자들의 자기신뢰를 나타낸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자신만을 신뢰하는 자는 자신의 치유를 결코 남에게 청하지 않는다.

둘째는 ‘우리 신뢰’의 회복이다. 새로운 자기신뢰는 예수의 ‘신뢰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위한 신뢰’로 확장해 간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신뢰가 자기만을 신뢰하는 자들의 이기적 집단주의로 발전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흥미롭게도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편협한 신뢰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날 제자 요한이 예수께 와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금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눅 9:50)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던 익명의 치유자가 제자들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익명의 치유자를 자신들의 경쟁자로 생각하며 불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그의 치유사역을 금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제자들의 편협한 ‘우리 신뢰’의 태도를 보게 된다. 제자들의 신뢰는 오직 제자공동체 내면만을 향해 있었다. 제자들은 내적으로는 공동체적 신뢰를 공유하면서도, 외적 공동체를 불신하는 자신들의 이율배반적 행위를 인식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익명의 귀신을 쫒는 자가 자신들의 공동체 속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생각할 뿐,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귀신을 쫒는 자의 소속에만 관심을 두었다. 제자들은 오래 동안 전승되어내려 온 유대교의 사회적 관습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것은 곧 ‘너희를 위하지 않는 자들은 너희를 반대하는 자’라는 원칙이다. 이 원칙을 따른 자들은 ‘우리 신뢰’를 말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때에는 언제나 자신을 지지하는 자로 한정했다. 오직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만 신뢰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까지 지혜로운 삶의 방식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제시한 놀이이론을 따르는 자들만이 신뢰할 수 있으며, 이를 거절하는 자는 의심하고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제자들의 행위를 책망하시며 이 원칙을 뒤집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눅 9:50) 예수의 말씀은 ‘우리 신뢰’를 말하면서도 이를 제한적으로 적용하려는 삶의 자세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즉 그의 제자공동체는 예수가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며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들은 예수가 ‘아바’라고 불렀던 바로 그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오고 계신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요, 그런즉 그들의 하나님 신뢰는 곧 ‘미래를 향한 신뢰’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셋째로 ‘미래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을 바라볼 때 인간은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한 신뢰를 얻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과감히 고향을 등지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미래를 향한 신뢰’는 낙관주의적 삶의 철학과는 다르다. 낙관주의가 과거 지향적이며 무비판적 태도라는 점에서 종말론적 신앙과 구별된다. 낙관주의는 과거에 경험했던 행복을 바로 미래에 투영시킨다. 이제까지와 같이 미래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예수공동체가 품고 있는 미래에 향한 신뢰는 낙관적이라기보다는 비판적이다. 과거에 자신을 지배해왔던 힘과 판단과 과감하게 결별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신뢰의 공동체로 부르셨고, 그들을 이제까지 자신을 얽매였던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하셨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의 삶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의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마 19:29)까지 버려야만 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은 금욕적 자기포기가 아니라 전적인 신뢰의 능력이다. 신뢰는 하나님의 미래를 신뢰함으로써 이생의 삶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는 무력한 자포자기가 아니라 창조적 자기절제의 힘이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삶의 현실에서 볼 때 수용하기가 어려운 요구이다. 그렇다면 그의 요구를 만족시킬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을 인간을 긍정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으로 믿기에, 바로 이 믿음에 따라 이웃까지도 신뢰하는 자이다. 어느 날 예수를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던 부자 청년은 평소 윤리적 삶을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인간의 전형이다(마 19:16이하).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를 거절하고 예수의 곁을 떠났다. ‘도덕능력’이 아니라 ‘신뢰능력’의 부재가 부자 청년의 문제였다. 그 젊은이는 예수를 따르면 얻게 될 ‘미래를 향한 신뢰’를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완성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뢰가 종말론적 신앙 가운데 미래를 신뢰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서로 나누며 선취해야 할 신앙적 삶의 태도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성의 상실을 염려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정신은 각 개인 사호간의 신뢰가 회복될 때 가능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뢰는 은혜의 사건이다. 신뢰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감사의 삶으로 응답해야 할 신앙적 책무이다. 그런즉 이웃에게 실망했다고 이웃에 대한 신뢰를 포기할 수 없다. 너무 많은 신뢰가 어리석음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불신은 불행의 출발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을 신뢰하겠다는 뜻에서 ‘신뢰도 좋은 것이지만 통제가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있다. ‘통제도 좋지만 신뢰가 더 좋다.’ 신뢰의 회복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다시 살린다.





김형민

호남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숭실교회 협동목사

2020년 8월 1일 토요일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_채영삼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오늘 강의 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한다. 특히, 청년들의 고민이 많다. 나 역시 아직 고민을 계속하고 있지만, 부족한대로 내 의견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포괄적차별법의 문제는, 좌파 우파의 이념의 문제도, 진보와 보수의 대결도, 네오-맑시즘과 자본주의의 대결도, 친정부-반정부의 문제도 아니다. 이 문제를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다루는 것은 왜곡이다.

2. ‘법 제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이슈는,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도 아니다.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조장하고, 인권을 신장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어느 쪽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차별, 평등, 인권의 프레임에서 다루는 것은 착시현상이다.

3. ‘포괄적차별금지법’의 ‘법’으로서의 핵심 문제는, ‘자유’의 문제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문제에 대해 ‘찬성’하고 ‘옳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그것을 ‘반대’하고 ‘틀렸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4. 동성애 등을 찬성하는 논리로서, “동성애자를 사랑한다면, 동성애를 죄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일부 현실적이나, 상식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어떤 사람의 의견과 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상식이다. 어느 쪽이든 생각이 다르다고 그 사람의 입을 막거나 차별할 수 없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다. 죄를 심판하시며 죄인을 구원하신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고 죄인은 사랑하신 지혜의 나타남의 절정이요 증거이다.

5. 동성애를 찬성하는 논리로서, 보수교회는 ‘모든 죄를 지으면서 굳이 동성애만 최악의 죄처럼 말하는 것은 자격 없는 일’이라는 비난이 있다. 이 논리는, ‘동성애는 죄’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 주장은 위의 4의 주장과 공존할 수 없다.

6.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에 대한 개인의 자율성 문제는, 단지 성윤리에 그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문제가 서구 기독교 사회에 닥친 ‘성 혁명’의 문제일 때, 이 문제는 결혼, 가정, 교육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문제이며, 무엇보다 기독교 전통,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도전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이슈이다.

7. ‘성경은 동성애를 모른다’는 주장, 즉, 성경에서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며, 19세기 이후 동성 인격 간의 애정을 포함한 성행위로서의 ‘동성애’는 성경이 ‘몰랐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에서도, 블랙수면방이나 게이클럽처럼, 단지 ‘동성 성행위’로서 동성애를 행하기도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고대의 노예제도에서 노예는 ‘재산’이지 ‘인격’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노예들은 주인이나 주인의 자녀들의 선생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가족 이상의 대우를 받기도 했다.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지 ‘동성애가 아니라는 주장은, 예컨대 ‘과식은 했는데 음식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주장처럼 추상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의 자기 결정권’이나 ‘동성애’ 등은 명백히 부정적이며 인정되기 어렵다.

8. ‘동성애는 죄이나, 차별금지법은 찬성한다’는 의견은, 교회를 공적 영역에서 축소시킨다. 교회를 위한 법은 세상을 향한 양심의 법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고,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도 교회는 할 말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현재 차별금지법의 핵심이 ‘신념, 사상의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9. 교회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십자가의 공의와 긍휼의 복음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이론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이나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큰 어려움 없이 찾아올 수 있는 ‘품’이 되어야 한다. 중국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한 학생에게 아들이 있었다. 부모의 이혼 후에, 그 아들은 동성애에 빠졌다. 그 소문이 교회에 돌았고, 그 아들은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 어머니 학생이 한 말이 마음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내 아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죄라고 정죄하고서, 그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나님은 죄인인 당신과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동성애 커플이 들어온다면, 두 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한 번에 다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더 큰 죄들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가? 동성애자,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청년들이 그저 머물 수 있는 교회의 품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죄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은 무책임하지 않은가?

10.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를 법의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정치적 세력과 권력의 힘으로 풀려 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교회는 그런 방식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의 9번에서와 같은 노력이, 진정성을 보여주는 참된 해결책에 가까울 것이다. 더 나아가, ‘성 혁명’에서 ‘성’(gender)이라는 주제는, 단지 ‘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몸’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권리인가? ‘나의 자궁은 내 것이기 때문에, 임신은 병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성경이 ‘몸’을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할 때,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할 때, 아니, 동양이나 서양 고대 사상에서 한 인간의 몸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했을 때, ‘몸’이란 무엇인가?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의 저자, 로드 드레허는, ‘성(性)의 형이상학’을 제안한다. 교회는, 이 기회에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고민하여 다루고, 다음 세대에게 성경적인 ‘육체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11. 만일,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 등의 문제가 서구를 휩쓴 ‘성 혁명’의 일환으로서, ‘다원주의’의 폭넓은 도전 가운데 하나라면, 그 배후에는 불가피한 ‘영적 싸움’이 있음도 자각해야 한다. 다원주의의 사회적 모토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란, 이제 정상(正常)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가? 교회가 뭔데,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을 이야기하는가? 정상과 비정상은 사회적 학습의 결과이고, 결국 사회적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 각각의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비정상이 없다는 새로운 정상’은, ‘정상-비정상이 있다’는 ‘하나의 비정상’(예컨대, 기독교의 전통)만큼은 인정하지 못한다. 논리적 말장난이 아니라, 그것이 다원주의의 자기모순이며 독재성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12.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다. 폐해가 많다. 권위주의를 타파하자고, 권위 자체를 없애버리면,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없앤 권력이 새로운 권위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창조질서, 중세인들이 ‘합리적 직관’으로 알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 직관’은 정상이 있고 비정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원주의자들도, ‘옳고 그름이 있다’는 그 사실, 틀렸다고 말할 때는 옳다고 믿는 기준이 있다는 그 사실, 기준, 곧 정상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질서 자체는 파괴할 수도 없고, 하려 해서도 안 된다. 남성 중심의 지배체제가 낳는 폐해가 심하다. 아직도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참으로 그러하다. 바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남성 지배체제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해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더 큰 폐해를 낳는다. 세상이 어둠인 이유는, 분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컨대 창조질서로 표명된 그 기준, 성경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질서의 남용, 악용의 폐해를 바로 잡는데 역시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13. 법적인 해결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리가 없이 사랑은 사랑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사랑 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도 진리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셋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함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교회를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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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6일 월요일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런 저런 우려에 대해_김근주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런 저런 우려에 대해

- 아직 사회적 교회적 합의가 안 되었는데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불평이 있다. 차별금지법은 이미 2006년부터 발의되었다. 수 차례 발의되었지만, 그때마다 보수 기독교계가 나서서 계속해서 무산시켰다. 그리고 2020년이니 이미 10년이 넘어간다. 그 긴긴 동안 뭐하고 이제 와서 아직 합의가 안 이루어졌다니. 그것은 게으름이요 무지를 드러낸 소리일 뿐이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는 이들이 대략 90퍼센트 가량이었다. 결국 일부 보수 개신교를 제외하고 대체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 셈이다. 박근혜 탄핵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정이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탄핵이 부당하다는 소리가 거의 20퍼센트 넘게 존재한다. 어떤 합의를 해야지 개혁과 변화가 가능할까.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성 소수자에 대한 합의라니, 왜 누군가의 존재가 사회의 합의에 의해 인정되어야 하는가? 왜 보수 개신교계가 누군가의 성별 정체성을 합의해 주어야 하는가? 왜 보수 개신교계가 성별 정체성의 다양성에 대해 합의할 때까지 나머지 사회 전체가 기다려야 하는가? 이미 많은 소리가 있어 왔고, 많은 괴로움이 보고되었건만,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무관심과 게으름 말고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으로 차별금지법 반대하는 이들은, 기존 교회가 성 소수자를 환대하지 못했음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차별금지법 조차 반대하는 처지에, 대체 기존 교회는 그들을 환대하지 못했던 과거를 어떻게 반성하자는 것일까? 오직 립서비스일 따름이다. 이 문제와 연관해 계속 반복되는, '죄악은 반대하되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이 왜 허망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 차별금지법의 네 영역 가운데 고용 영역이 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가 교회 직원에 지원했을 때 그 법으로 인해 차별하지 않아야 해서 뽑아야 한다는 어려움을 우려하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가령, 불교인이 교회 직원을 뽑는 데에 지원할까? 그 곳이 교회임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지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렇더라도 현재 그 사람을 종교 이유로 안 뽑거나 불이익을 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기는 교회 직원에 동성애자인 분이 지원할까? 어쩌면 누군가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특수한 사례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사유가 되기는 어렵다. 저러한 사례는 달리 다루어져야지, 저런 사례를 끄집어 내어 차별금지법을 우려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저런 가능성으로 인해 우려한다면, 지금 현재 보수 교회에서 자행되는 극심한 차별과 혐오 발언의 현실에 대해 더 깊이 개탄하는 것이 먼저다.

- 교회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 설교 못하게 될까봐 어지간히도 염려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이 목사들이 그야말로 순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저런 소리를 설교랍시고 하게 될 현실이 떠올라 끔찍하지만, 그렇게 설교할 자유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의 영역은 교육, 고용, 재화와 서비스, 행정 서비스 영역이기에, 종교 시설 내에서의 설교나 가르침은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가령, 기독교 학교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라고 가르칠 수 없게 될까봐 우려하는 소리도 있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제발 기독교 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기를. 대체로 저런 기독교 학교는 ‘창조 과학’이라는 사이비 가르침을 확신에 가득 차서 가르치곤 한다. (나는, ‘창조 과학’ 옹호하는 무리와 ‘동성애 반대’하는 무리 사이에 교집합이 상당히 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중대형 크기 교회를 자기 새끼에게 물려준 교회는 대체로 저 교집합에 속할 것이라는 심증이 있다^^) 어떤 기독교인은 ‘창조 과학’이야말로 ‘성경적’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시대는 대체 무엇이 성경의 가르침과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이들이, ‘우리가 이 뜻으로 만들었으니 우리는 이 뜻으로 갈거야’라고 우겨대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적 동기에서 나온 확신이라기보다 ‘이 학교는 내꺼야’라는 그릇된 소유 의식일 가능성이 크다. 

기독교 정신의 근본은 사랑, 섬김 같은 가치, 혹은 예수님의 표현대로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 23:23),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이다. 이러한 가치를 결코 양보할 수 없되, ‘창조 과학’이니 ‘동성애에 대한 견해’는 논의될 문제이지, 일방적으로 선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 짐승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이들의 행동으로서 동성 성행위를 규탄한 바울의 로마서 1장과는 달리, 예수를 내 구주로 고백하는 동성애자가 존재하는데, 바울을 근거로 ‘동성애는 죄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며 문제 제기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 못 가르칠까봐 우려하는 것 역시 지극히 협소한 우려이며 부당하기까지 한 우려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의 존재를 두고 죄악이라고 규정하는 말을 못하게 될까봐 저토록 우려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기독교 학교의 학생 중에도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한 성 소수자가 적은 숫자이지만 있을 수 있는데, 그를 향해 ‘동성애가 죄악이다’라는 식의 가르침이 대체 무슨 놈의 자유인가. 그런 자유를 잃게 될까봐 그리도 두려운가. 기독교 학교의 정말 좋은 점은, 일방적 전달과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 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도록 돕는 것, 그래서 언제건 우리가 중요하다 여겼던 것들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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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6일 금요일

홈스쿨 (3)

일천개의 홈스쿨이 있다면 일천개의 홈스쿨링 방법이 있다.


“1천 개의 홈스쿨링 가정이 있다면 1천 개의 홈스쿨링 방식이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홈스쿨링을 하는 부모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홈스쿨러들은 딱딱한 공교육의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공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학교를 그만둔다. 그러나 부모의 교육철학이나 아이의 특성, 살고 있는 지역의 문화와 환경에 따라 아이들의 삶의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도 목격된다. 아이가 배우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가정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학교 안에서건 밖에서건 엄연한 현실이다.
지난 1월15일~17일 충북 제천에 있는 간디청소년학교에서 홈스쿨링 네트워크인 ‘학교너머’가 주최하는 ‘홈스쿨링 가족 캠프’가 열렸다. 가깝게는 근처 제천 시내에 사는 가족부터 멀리 부산과 경기 북부에 이르기까지, 산 넘고 물 건너 캠프에 참여한 참가자들로 방학 중인 학교가 들썩거렸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부모들은 부모들끼리 모여 그동안 인터넷으로만 주고받던 이야기를 앞다퉈 풀어놓는 자리에서, 몇 가족을 만나 사연을 들어보았다.

올해 15살이 된 명지네는 충북 봉화에 산다. 2000년 아버지 장창호씨와 어머니 차정원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 단양으로 이사를 했고, 2003년 다시 봉화로 옮겼다. 초등 5학년이던 명지는 봉화로 전학을 한 뒤 몹시 힘들어 했다. “6학년 언니들이 신고식을 하라며 괴롭힌다”는 것이다.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는 곳에 사는 터라 명지가 학교까지 가는 일 자체가 부담스런 상황이었다. 6학년 진학을 앞두고 명지가 학교를 그만두던 날, 가족들은 ‘탈학교 파티’를 열었다.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어머니 차씨가 귀농하기 전 초등학교 교사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엄마가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하면 집에서도 애들을 잘 가르치겠다며 부러워해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농삿일이 바쁜데 아이를 하루종일 데리고 있을 수도 없고, 학교에서 하던 대로 시간표를 짜서 아이 공부를 가르치면 집이 곧 학교가 되니 명지가 더 답답해 할 게 뻔하잖아요. 처음에는 이것저것 해보라고 시키고 점검도 했는데, 한 달 만에 둘 다 지쳐 버렸죠.”
그래서 명지는 하루종일 놀았다. 그러다 불쑥 ‘영어공부를 하겠노라’고 했다. ‘동방신기’때문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따라부르고 싶은데, 영어 가사를 도통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명지는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보면서 영어 공부에 열을 올렸다. 학교너머 캠프에 참여한 뒤 또래 홈스쿨러들과 연락을 하면서 이것저것 관심을 갖고 욕심을 내는 일도 많아졌다. 차 씨는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면 어느 부모든 조바심이 나고 불안하게 마련이지만, 아이 스스로 하고 싶어야 무언가 하게 되니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아이를 믿어야 할 것 같다”고 조언했다.

경기 고양에 사는 소영이는 고등학교 학력 인정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14살인 소영이가 중학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고교 검정고시까지 치르는 것은 ‘천재’라서가 아니다. 입시 전문가인 아버지 이재건씨의 독특한 철학 때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상위 1% 안에 드는 아이들 중에 부모와 심각한 갈등을 겪지 않는 아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학교가는 것이 즐겁고 공부가 재미있다는 ‘천재’들은 아주 드문데, 우리 소영이는 그런 천재가 아닙니다. 누구를 위한 경쟁인지도 모르는 지옥을 6년이나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게 했지요.”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에서 아버지와 공부하는 소영이는 가끔 교복을 입은 친구들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막상 초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 학교 이야기를 들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또래 친구들이 학교와 학원으로 ‘뺑뺑이’를 도는 지난 열 달 동안, 소영이는 어림잡아 넉 달 가량 각종 캠프에 참여해 놀았고, 나머지는 책을 읽거나 검정 고시 준비를 했다.

아버지 이 씨는 잘라 말했다. “소영이가 대학에 갈 지, 언제 갈 지는 이번 검정고시 이후에 소영이가 결정하겠죠. 치열하게 경쟁해서 가는 대학은 안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만약 경쟁을 할거라면 자신이 누구를 위해 왜 경쟁을 하는지 스스로 알고 하길 바랍니다. 고등학교를 일찌감치 졸업한 셈이니,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남보다 많겠죠. 제가 소영이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은 그것 뿐입니다.”
경북 영천에 사는 수민이는 올해 16살이다. 동생 민정이는 집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수민도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다. 한 학년에 한 학급씩, 한 반에 학생이 열 명쯤 되는 ‘작은 학교’다. 초등학교 졸업 뒤 규모가 큰 중학교에 진학한 수민이는 학교에 다녀온 뒤 “이상하다”고 했다. “한글로 ‘아이 엠 어 보이’라고 16장이나 ‘빽빽이’ 숙제를 하라는데 꼭 해야 돼?” “인체에 대한 공부를 한다면서 학생을 앞에 세워놓고 여기저기 만지면서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어.”
어머니 서경희씨는 담임 교사와 의논도 하고, 학교쪽에 항의도 해 보았지만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수민이가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걱정이었어요.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는데, 어느날 수민이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더군요.”
수민이는 요즘 중학 학력 인정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영어는 무척 잘한다. 한글 자막이 없어도 외화를 보는 수준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수민이를 위해 초등 5학년 때부터 외화 비디오를 사준 것이 부모의 유일한 ‘뒷받침’이었다. 나머지 과목은 인터넷으로 교육방송을 보면서 공부를 한다. 애초 수학과 과학이 어렵다던 수민이는 “책을 한 번 더 보고 이야기 하겠다”고 하더니, 같은 책을 세 번씩 읽은 뒤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혼자서 해도 이해가 돼. 학원 갈 필요 없겠어.” 서 씨는 수민이가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아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목표를 세우고 해냈다는 사실이 수민이에게 값진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어요. 그 중에는 집을 ‘명문 사립학교’와 맞먹는 수준으로 만든 부모들도 있었어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르쳐주고, 해외 어학연수도 보내고. 우리는 그럴 수가 없어요. 이번에도 가족 캠프에 올 지, 아니면 수민이만 계절학교에 참여할 지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했거든요. 학교너머 캠프는 저렴한 편이지만, 두 가지 다 할 수는 있는 형편은 아니니까요. ” 서 씨는 “부모가 아이를 직접 가르칠 수 있거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이들만 홈스쿨링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처지에 놓인 홈스쿨러들이 서로 도울 수 있는 네트워크가 활발해졌으면 한다”고 했다. 제천=이미경 기자

홈스쿨 제2의 대안학교 ②

대안학교+홈스쿨 접목 각자 짠 시간표 북돋워

홈스쿨 제2의 대안학교 ②
 
그룹 홈스쿨 그룹홈스쿨은 쉽게 말해 서너 명 또는 대여섯 명의 홈스쿨러가 모인 배움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일체의 틀과 제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관심과 기호에 따라 배움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교육과정을 스스로 결정하며 강사나 교재, 시간 등 공부하는 방식도 스스로 선택한다. “스스로 교육의 주체가 되어 필요한 교육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대안교육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룹홈스쿨에서 학교는 장소의 의미로만 제한된다.
 
교육의 본질과 관련해서 ‘학교’보다는 ‘교육공동체’라는 말을 선호한다. 이 역시 교육의 주체성 회복에 대한 강조에서 비롯된다. 그룹홈스쿨은 2004년초 분당에서 만들어진 ‘그루’가 시초다. 이후 남한산초등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남한산작은학교가 문을 열었고, 제천간디마을학교도 만들어졌다.
 
‘그룹홈’에서 기원한 안산 들꽃피는학교 역시 그룹홈스쿨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지난 6일 광주시 남한산공원 귀퉁이에 있는 한 카페 2층. ‘우석 엄마’ 조은숙(36)씨가 수학 강의를 하고 있다. 6명의 아이들은 바닥에 둥글게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이날은 방학 수학특강 마지막날. 오후 6시께 강의가 끝나자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진성하(15)군이 농구공으로 드리블을 하고 바로 옆에선 오민석(14)군이 벽에 대고 탁구 연습 흉내를 낸다. 채병훈(14)군은 그 와중에 드럼을 치며 어수선함을 가중시킨다. 그룹과외 장소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학교’다. 이름은 남한산작은학교. 학생은 모두 여섯이고, 교사가 한 명 있다. 시간표는 있지만 학생마다 다 다르다. 당연히 정규학교는 아니다. 그렇다고 대안학교도 아니다. 굳이 유형을 나누자면 그룹홈스쿨 학교 정도에 해당한다.
 
그룹홈스쿨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남한산작은학교의 시작은 2004년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안학교 못지 않은 알차고 열린 프로그램으로 관심을 모은 남한산초등학교에 자녀를 보냈던 학부모들이 졸업 이후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일반중학교로, 일부는 대안중학교로 진학했지만 몇몇은 또 다른 길이 없을까 고민한 것이다.
 
조은숙씨는 “소박한 교육,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개별적으로 홈스쿨을 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대안학교의 장정과 홈스쿨의 장점을 모두 취할 수 있는 그룹홈스쿨이었다”고 설명했다.
 
2개월 정도의 준비모임과 토론, 친해지기 캠프 등을 통해 지난해 2월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교사는 저소득층 자녀 방과후학교에서 경험이 많은 조은형(33)씨를 데려왔다. 지금 학교로 쓰고 있는 장소는 카페 주인인 성하 어머니 안영자씨가 공짜로 내놨다.
 
전혀 새로운 형태의 학교로 출발한 만큼 남한산작은학교엔 독특한 게 많다. 우선 두 가지 목표가 있다. 자기주도적 학습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목표 수행을 위한 시간표는 개별적으로 정한다. 자신이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을 스스로 배우는 것이다. 가령 채우리(15)양은 머리 미용이 전공이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근처 복지회관과 문화센터에 가서 배운다. 농구선수가 꿈인 성하는 청소년수련관에서 마련한 농구 프로그램을 듣고 있다. 수시로 남한산초등학교를 찾아 혼자서 연습도 한다. 민석이는 기타와 영어 두 개를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기타는 강사로부터 배우고 영어는 외국 드라마 DVD를 반복적으로 듣고 새벽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실력을 쌓고 있다. 병훈이는 드럼 매니아다. 학원에서 잠깐 수강한 뒤 지금은 독학으로 맹렬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책벌레 권우석(14)군은 왕성한 독서에서 배움의 즐거움을 찾고, 이예진(14)양은 수학을 좋아해서 인터넷 강의와 독학 교재를 통해 수학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는 목표치가 높고 상대평가를 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데, 여기서는 자기가 스스로 목표치를 정해놓고 공부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없고 신나고 효율도 높다”고 했다.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배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겹치는 부분도 생겼다. 이런 부분은 시간을 조정해서 같은 시간에 같이 공부하기로 했다.
 
현재 공통과목은 밴드, 미술, 철학, 수학 등 4개 분야. 외부 강사(밴드, 철학)와 학부모(미술, 수학) 등이 강사를 맡고 있다. 문제는 알아서 공부하도록 하면 자칫 나태해질 우려가 크다는 것. 학생들과 학부모는 이를 감안해 시간표는 맘껏 짜되, 일단 짜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기로 약속했다. 말하자면 스스로 자기 시간관리의 감독자가 된 것이다.
 
그룹홈스쿨은 한편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민석이는 “가끔 일반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는 “교사와 눈 맞추고 즉석에서 문답이 이뤄지는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에 비해 장점은 아주 많다고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시험 안보는 스트레스가 어디냐”(성하) “1년에 3번씩 축제하고 수시로 즐거운 파티를 열 수 있어 너무 즐겁다”(민석) 세상을 넓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우리) “항상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길렀다”(예진) 등등.
 
6명의 아이들은 1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가족보다 더 깊은 정이 쌓였다. 특히 지난 여름 학교에서 강원도 평창까지의 166km 도보여행 도중 서로 부추겨주고, 대화하고, 같이 노숙한 경험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붕어빵 장사를 같이 한 것도 좋은 추억거리. 현재 100만원을 모았는데 몇백만원이 모이면 ‘찐한’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벼르고 있다.
 
1994년 김현수 목사가 꾸려가던 안산노동교회를, 여덟 명의 청소년들이 ‘기습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 학교이자 생활공동체다. 김현수 목사는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위해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했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세상을 배움터 삼아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경기 안산시 와동 인근에는 김 목사처럼 대문을 활짝 열고 아이들에게 안방을 내어준 ‘대안가정’(그룹홈)이 열 한곳에 이른다.
 
잔디네, 야긴새벽이슬, 코스코스, 새밭토끼풀 등 저마다 독특한 이름을 가진 대안가정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 60여명. 돌봐줄 부모나 친척이 마땅치 않은 15~19살 청소년들이다. 아이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공부를 한다. 절반가량 아이들은 안산 지역 일반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들꽃피는학교를 ‘방과후 학교’나 ‘계절학교’로 활용한다. “학교가 지겹다”거나 “부모가 없다고 놀림을 당할까봐 두렵다”는 등의 이유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절반 가량 아이들은 아예 들꽃피는학교로 등교를 한다.
 
들꽃피는학교로 등교하는 30여명 아이들 중에는 대안가정에 살고 있지 않더라도 비슷한 이유로 학교를 떠난 안산 지역 아이들 4~5명도 포함돼 있다. 오전에는 국어, 영어, 수학 같은 일반 과목을, 스스로 짠 계획표대로 자신의 수준에 맞춰 공부한다. 이 학교 김금훈 교사는 “7~8명이 한 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교사가 과목별로 ‘진도를 나간다’는 개념 없이, 아이가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공부할 수 있도록 살피고 돕는다”고 말했다. 오후가 되면, 들꽃피는학교는 일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대안가정 밖 청소년들까지 60~70명이 몰려들어 북적거린다. 텃밭 가꾸기(노작), 요리, 옷 만들기, 미술, 음악, 연극, 컴퓨터 실기 같은 좀 더 ‘재미있는’ 수업이 시작된다. 근처에 있는 전자제품 애프터서비스 센터나 카센터, 음식점 같은 곳으로 직업 체험(인턴십)을 하러 가는 학생들도 있다. 이들을 돕는 것은 ‘지역 주민’들이다.
 
근처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원장과 강사들이 영어회화를 가르쳐주고, 손글씨 프리랜서 일을 하는 ‘동네 누나’도 강사로 나선다.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컴퓨터 교사는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저녁이면 학교로 출근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역주민 구의선씨다. 김금훈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대안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15명의 생활교사를 포함해 학교 일을 하는 교사들이 30명, 지역이나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교사가 10명, 총 40명의 교사가 들꽃피는학교를 꾸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안산시 와동에 4층짜리 학교 건물을 완성하면서, 들꽃피는학교는 대안가정 아이들뿐 아니라 어려움을 겪는 지역 청소년들까지 껴안을 수 있는 든든한 ‘진지’가 됐다.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홀대받는 청소년들을 위해 가정과 학교의 경계를 허문 것이 들꽃피는학교의 시작이라면, ‘대안가정과 대안학교, 배려가 넘치는 지역사회’라는 열린 공동체를 일구려는 것이 이 학교의 최종 목표다.

홈스쿨

홈 스쿨


나는 올해 열일곱살이다. 집은 경기도 가평 용문산 자락. 교사인 엄마와 작은 사업을 하는 아빠, 초등학교 5학년 동생 종보, 그리고 누렁이 개 세 마리랑 같이 산다. 취미는 놀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등산, 자전거 타기, 걷기, 거문고 연주, 책읽기, 만화 보기가 취미다.
학교엔 안 간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집에서 지냈다. 4년째다. 멀대같이 큰(176센티미터) 녀석이 학교에도 안가고 집에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다. 매일같이 즐겁고 신날 뿐이다. 난 학교를 뺀 모든 곳에서 배운다. 만화와 비디오를 보며, 백두대간 종주를 하며, 평화 캠프에 참가하며 배운다. 친구들과 공을 차며 동생과 눈썰매를 타며, 자원봉사를 하며 배운다.
홈스쿨러들끼리 모여 같이 공부도 한다. 영등포 하자센터에서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연구수업, 철학 토론, 창조적 스토리텔링, 건축 등 4개 주제로 공동학습을 한다. 10명이 모여 3학기째 진행했고, 지금은 방학중이다.
요즘은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중국 쓰촨성 답사 준비에 바쁘다. 쓰촨성이 새 관광 코스를 개발하기 위해 외국인들을 초청했는데 발빠르게 정보를 입수해 나도 한 자리 얻었다. <삼국지>를 읽는 한편, 중국 현대사를 다시 살피고 있다. 몇년전 홈스테이로 우리 집에 머물렀던 베이징대 형이 한국에 유학와 있어, 그 형으로부터도 중국 정보를 얻을 생각이다. 중국에 다녀온 뒤에는 본격적으로 2006년 ‘홈스쿨 계획표’를 짤 것이다.
학교를 그만두기 전=어린 시절 부모님 덕을 많이 봤다. 부모님은 잘 노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공부이고, 평생의 자산이 된다는 믿음을 가졌고 나는 줄창 놀았다. 여덟살이 되자 서울의 거대 학교로 들어가 놀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학교는 놀지 못하게 했다. 하고 싶은 건 모조리 금지였고, 하기 싫은 것만 억지로 시켰다. 의미도 없는 숙제를 잔뜩 내주는가 하면 시시콜콜 매일같이 준비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한번은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라고 해서 한참 그리고 있는데 금이 넘어갔다며 그러지 말라고 했다. 넘어가면 뭐 어떤데? 그러다 종이 쳤다. 선생님은 스케치북을 덮으라고 했다. 다 그리지도 않았는데 시간 끝났다고 무조건 못하게 했다. 지우개 밥 안치운다고 뭐라 그런 적도 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죽겠는데, 쉬는 시간에만 갈 수 있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 자유와 감성은 학교에서 철저히 갇혔다. 내 쌓이는 불만을 본 엄마는 아니다 싶은지 2학년 때 서울 외곽의 작은 학교로 전학시켰다. 어린이신문 강제구독, 전교생을 운동장에 세워놓은 채 이어지는 1시간짜리 조회 등 억압적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고민 끝에 엄마와 아빠는 내게 ‘주1일 학교 안가기’를 권장했다. 산에 오르거나 연극, 영화를 보고 시장에도 가고 박물관, 유적지, 서점 등을 돌아다녔다. 즐거웠다. 내 얼굴에 어느새 생기가 돌았다. 새로운 학습의 경험이었다.
3학년 때 우리는 “정말 서울은 놀 데가 못돼”하며 시골로 이사했다. 작은 학교, 자연속 학교에서 난 사계절 자연을 느끼며 ‘사람답게’ 살기 시작했다. 봄철 화전 놀이, 여름철 물놀이, 가을철 감 따먹기, 겨울철 눈싸움, 썰매타기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6학년을 마치고 난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학교 안가고 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 아빠는 흔쾌히 허락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온전한 나만의 시간으로 누리고, 나만의 정신을 키워나가게 되는 출발점이었다.
학교에서 가정으로 옮겨진 배움터=처음 홈스쿨을 생각하면서 뭔가를 꼭 해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책 읽고, 산에 오르고, 여행하면 좋겠거니 했다. 비디오와 만화책도 실컷 보고 가끔 봉사활동도 해보곤 싶었다. 계획을 수도 없이 세워보고 또 허물었다.
몇날 며칠 고민하고 부모와 상의한 뒤, 우선 역사와 한문을 공부해보기로 했다. 역사는 현대 사회의 시민으로서 세계 공민으로서의 기초 소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고, 한문은 한문 교사인 엄마의 권유가 강하게 작용했다. 나중에 들은 엄마의 생각. “한국사를 통사적으로 가볍게 한번 보고, 근현대사를 좀 집중적으로 보고 이어서 인류사, 세계사를 보다 보면 아이의 관심사에 따라 폭이 넓어지리라 기대했단다.”
초등학교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서점에 들러 일반교양 수준의 책을 둘러보고 목록을 작성한 뒤 도매상을 통해 택배로 100권의 책을 사들였다. 곧장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2>를 본 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1,2,3>으로 한 단락씩 천천히 읽었다. <만화 한국사>와 <이야기 한국사 1~16>는 이야기책 읽듯 읽어 내려가면서 줄거리를 간추렸다. 한문 공부는 사서 등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 <중국고전>을 다시 읽어본 뒤, 몇 문장씩 쓰고 읽고 해석해봤다.
2~3시간 정도의 역사와 1시간 정도의 한문 공부가 끝나면 혼자서 점심을 준비해 먹었다. 오후는 자율학습. 놀기도 하고 청소도 하고 책도 봤다. 만화나 비디오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음악도 하니 볼 것도 할 것도 많기만 했다. 며칠에 한번씩 스크랩한 신문으로 ‘세상 읽기’를 시도했다. 주말은 휴일. 등산도 하고 한 주동안의 일을 기록했다. 물론 실컷 노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세상으로 뛰쳐나가다=학교에서 뛰쳐나온 이유는 공부는 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책에만 빠져살 수는 없었다. 현장학습 거리가 필요했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던 중 환경운동단체인 녹색연합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새만금으로 첫 야외학습을 나갔다. 간척 현장을 둘러보고 밤새 소모임 토론을 하면서 환경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느꼈다. 다녀온 뒤 <녹색시민 구보씨의 하루> <지구가 만약 100명의 마을이라면> <떡갈나무 바라보기> <나무를 심은 사람>를 읽으니, 환경에 대한 내 나름의 시각이 세워지는 것 같았다.
비록 1박2일이었지만 집을 떠나 본 경험은 자신감을 키웠다. 좀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현장을 찾아나섰다. 집 근처의 화서 이항로 유적지, 양수리 고인돌을 둘러봤고 이어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 방이동 백제 고분로,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했다. 고창 고인돌, 선운사, 읍성, 경주 남산 등으로 거리도 시간도 점점 확대됐다. ‘땅을 디디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 모두가 더없이 좋은 공부’라고 느껴졌다. 월 1회 정도 계획됐던 현장학습은 2~3회로 늘더니 일주일에 한번꼴로 정착됐다. 물론 좋은 기회가 생기면 계획에 없어도 곧바로 가방을 꾸려 떠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여운형 추모회 참가, 5월 광주 순례, 나눔의집 방문, 강화도 유적답사, 종묘대제 참관, 꽃동네 봉사 활동…. 환경활동가 중심의 ‘녹색순례’에 참석해 열흘동안 백두대간을 걷기도 하고, 한북 정맥 탐사팀에 합류해 색다른 산행을 경험하기도 했다. 따져보니 무박산행만 20차례가 넘는다. 여기에 ‘수유+너머’의 한문 경전 세미나, 하자센터에서 진행된 새로운 생태주의 음악 허법 프로젝트, 십대들을 위한 평화 캠프, 대안교육 연합 캠프, ‘새로 펴냄’ 독서 소모임, 여러 형태의 여행, 대통령 탄핵반대 시위, 위안부할머니 수요집회 참석 등 숱한 배움의 장이 내 앞에 펼쳐졌다. 애초 계획대로 세상 모든 곳이 학교가 돼가기 시작했다. 매번 잘 아주 아주 잘 놀았고, 모든 현장학습은 신나고 특별하고 즐거웠다.
내 배움터는 나라 밖으로도 뻗어나갔다. 우리와 교육 현실이 비슷하고 우리보다 앞선 대안교육의 현장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일본의 대표적 대안교육기관인 ‘도쿄 슈레’를 방문했고, 일본의 대안교육모임인 ‘프리다스’와도 정기적인 교류를 했다. 일본인 친구들이랑 같이 먹고 자며 노래부르고 역사에 대해 토론하며 난 너무도 큰 경험을 했다. 한독 청소년 교류 프로젝트 ‘동서남북’에 참가해서 분단과 통일에 전면적인 고민을 해봤고, 지난해 7월에는 중국과 스웨덴 사람을 홈스테이로 집에 초청하기도 했다.
너무도 재미있는 공부=학교 공부의 목적은 1차적으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장장 12년간 책과의 긴긴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학교를 벗어나고 나서 내가 한 모든 공부는 재미있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음에는 부모님이 추천한 책들을 주로 읽었다. 1년 정도 지나면서 나름대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부모님 서가에 꽂혀 있던 <백범일지> <아리랑> <돌베개> <여운형 평전> <구술 한국사> <의열단> <상록수> <네가 하늘이다 1,2> <압록강은 흐른다> 등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근·현대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어 <토지> <우리 역사 아웃사이더-세상은 그를 잊으라 했다> <우리 역사 속에 왜?> <거꾸로 읽는 한국 현대사> <한국사 산책 60~80년대> <대한민국사 1,2,3> 등을 독파했다.
역사에 관심이 커지자 KBS <인물현대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영화 <송환> <레드헌터> 등으로 볼거리쪽으로 영역을 넓혔다. 다큐멘터리 자료 화면 <격동의 80년대>도 구해서 봤다. 만화 <오! 한강>은 내가 본 최고의 역사책이었다.
역사 공부는 세계사로 이어졌다. <인류이야기 1,2,3> <교실 밖 세계사 여행>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 <교실 밖 지리여행> <세계화 시대의 지리 읽기>등을 읽었고, 더불어 <그리스 로마 신화>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이슬람 바로 알기> <굿바이 바그다드> 같은 책도 봤다, 만화 <북해의 별>이나 <글래디에이터> <아미스타트> <잔다르크> <기사 윌리엄> <모던 타임즈> <알리> <애나 킹> 등의 많은 역사 비디오들을 그냥 재미있게 봤다.
중국사 관련 장정 부분에서는 <주덕 평전-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와 <중국의 붉은 별>을 놀라움으로 읽었다. 가족 여행으로 중국에 가서는 나름대로 자료집을 만들고 사전에 <하루 밤에 읽는 중국사> 등의 책을 보고, 방문했던 하룡공원, 천안문 등과의 관련 역사를 떠올렸다. 관련 영화 <인생>을 보면서 나름대로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 현상과 이면, 다양한 시각이 있음을 알게 됐다.
철학책도 읽었다. <생각은 힘이 세다> <아주 철학적인 하루> <마음을 여는 철학 이야기> <삶의 철학 산책> <철학의 기초>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등을 탐독했다. 특히 <아주 철학적인 하루>라는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내가 알아야 할 학문이 철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들을 내가 다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철학하는 자세를 배우고 공부는 해볼만하다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노는 것도 프로젝트로=사는 게 공부다. 여행이나 공모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사전에 준비하고 자료집을 만들거나 기획서를 써보는 것도 공부다. 캠프에 참가하고 스스로 열어보기도 하는 것 역시 좋은 공부다. 일을 마무리하면 보고서나 후기를 쓰는 것도 알찬 학습이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처음부터 기획하고 준비하기 위한 모든 것이 공부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친구와 노는 것도 공부다. 물론 이 모든 공부는 재미있고 보람있다.
한번은 홈스쿨러 캠프에서 만난 가까워진 부산의 한 친구집에 놀러가기로 했다. 일단 양쪽 집의 부모님께 허락을 얻은 뒤 뭘 할지 계획을 세웠다. 난 며칠에 걸쳐 ‘거친 파도 소리 들으러’라는 제목을 붙이고 부산 개관, 일정 잡기, 가보고 싶은 명소 등에 대해 자세하게 정리했다. 기차시간과 삯을 알아보고 선물도 구입했다. 그리고 3박4일 정말 잘 놀다 왔다. 돌아온 뒤 사진을 곁들인 소감문을 기록하니 전 과정이 괜찮은 프로젝트였다.

2018년 6월 25일 월요일

기도란 무엇인가요?

- 기도란 무엇인가요?
 
하나님과 진심어린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인 동시에 우리의 의무입니다. 믿음 가운데 드리는 기도엔 영과 물질의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참조: 93/96
 
- ‘하나님의 명령이며 의무라는 게 무슨 말인가요?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은 거룩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위급한 모든 순간에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곧 기도입니다.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참조: 8:5-13
 
- 기도에 약속된 영적인 복이란 무슨 말인가요?
 
기도할 때 영적인 복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뜻입니다. , 피조물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 죄를 용서하시는 성자 그리스도의 칭의, 그리고 우리를 깨닫게 하시며 치료하며 도우시는 성령의 거룩한 인도가 기도 가운데 임한다는 뜻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의심 없이 기도하는 자에게 이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십니다.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8:2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 기도할 때 약속된 물질의 복이란 무엇인가요?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부족함 없이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때 부자 돼서 혼자 떵떵거리며 살라고 그런 복을 주시는 게 아닙니다. 물질의 복을 주시는 이유는 언제나 우리 삶 속에서 그분의 이름이 드높아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기도 네 번째 간구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26:39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언제 어디서 기도해야 하나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식사 시간과 잠자리에 들고 일어날 때는 꼭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쁠 때나 슬플 때, 특별한 일이 있을 때도 역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장소는 교회건 집이건 직장이건 길을 가건 가릴 필요 없습니다. 모든 곳이 기도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꼭 자녀의 손을 잡고 하루 한 번 기도하길 바랍니다.
 
63:6-7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하나요?
 
우리 자신과 이웃,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피조세계와 자연 환경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딤전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어떤 말로 기도해야 하나요?
 
보통 기도 마지막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붙여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 구절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자기 속에 있는 마음을 외마디 탄식으로 해도 되고, 그 마음을 성경구절이나 시편을 엮어서 해도 되고, 찬송가나 기도 책을 들고 기도해도 됩니다. 기도에서 어떤 말을 할지, 그리고 길고 짧고도 역시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으로 거짓 없이 진심으로 하는 게 중요합니다.
 
1:5-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6: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7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 모든 기도 중에 어떤 기도가 가장 뛰어난 기도인가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주기도).
 
*6:9-13, 11:2-4
 
- 주기도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시작하는 말과 일곱 개의 간구 그리고 끝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주기도의 시작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이 우리의 참 아버지이고 우리는 그분의 참 자녀임을 믿으라고 권유하십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아이가 사랑하는 부모에게 하듯,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 작업 중 <신앙의 대화: 루터의 소교리문답 해설 편역>, III 주기도
 
 
 
 

2014년 12월 4일 목요일

톰 라이트 읽기를 위한 지도 (A Map for Reading N.T. Wright)

톰 라이트 읽기를 위한 지도 (A Map for Reading N.T. Wright)


0.
John의 시대가 가고, Tom의 시대가 오고 있다


뭐든지 하지 말라면 더 관심이 가는 법이다. 한국과 서구 기독교계에 형성된 톰 라이트에 대한 양분화된 평가는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적 방법론에 오염된 신학계에 홀연 등장한 초강력 변증가인가, 아니면 그는 복음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해 적군에게 성문을 열어주게 만드는 자유주의자들의 ‘트로이의 목마’인가? 감히 예단을 하자면, 나는 영국 복음주의에 ‘존(John Stott)의 시대’가 가고, ‘톰(Tom Wright)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어린시절에 받은 목회의 소명의식, 대학시절의 기독학생연합(Christian Union) 활동, 성공회 내 복음주의 학자들을 위한 연구소 라티머 하우스(Latimer House) 총무, 성공회 내 복음주의운동인NEAC(National Evangelical Anglican Congress)에 적극 참여 등 비교적 선명한 복음주의자로서의 궤적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의 본격적인 학술적 저작은 때로 전통적인 신학적 경계선을 넘어가는 듯이 보이고, 이신칭의 교리를 훼손 내지는 약화시키는 것으로 비난받고, 신앙인들이 겨우 억누르고 있는 고민을 나서서 적극 거론하는 위험을 감수하곤 한다. 그가 벌여놓은 논의의 규모와 폭에 압도되는 경험을 하노라면, 다시 한번 그의 신학 노선에 궁금증이 생긴다.


나는 2001년에 톰 라이트(N.T. Wright)를 한국에 대중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글을 썼다.[1] 그것이 인연이 되어 2003년에는 민중신학자들의 모임에서 ‘톰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해 글을 써서 발표하고 토론하는 기회가 있었고, 어느 대학생 선교단체 간사수련회에서는 톰 라이트의 박사 논문을 많이 참고하며 썼던 내 석사논문을 바탕으로 ‘로마서 강해’를 하루 종일 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주로 의료인들로 구성된 ‘톰 라이트 읽기 모임’의 초청으로 4시간에 걸친 강의를 신나게 한 기억도 난다. 이들은 2년에 걸쳐 그의 주저를 다 읽어치웠던 이들이기에 가장 심도 있게 토론할 수 있었다. 청어람에서도 한두 번 톰 라이트를 다루는 강좌가 있었다. 경기도 어느 교회에서 온 청년들이 제일 앞줄을 차지하고 앉았다. 어떤 연유로 왔는가 물었더니, 청년부 전도사님이 그룹을 만들어서 몰래 읽혔다고 했다. 톰 라이트를 읽다가 매료된 20대 중반의 한 의대생은 결국 그의 책을 번역하고 보급하기 위해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가장 최근의 경험은 2013년 상반기 청어람 강좌에 찾아온 어떤 중년 남성과의 대화였다. 자신을 초신자라고 했다. 최근에 신나게 읽은 책이 톰 라이트와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라고 했다. 그는 왜 교회에서는 이런 책을 읽히지 않는가 반문했다.


눈 밝은 대중들이 톰 라이트를 발견하고 있다. 반면, 국내 신학계는 그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역사적 예수’ 연구나 ‘바울의 새 관점’ 등의 주제에서 대표적 성서학자로 꼽히는 그의 주장은 대부분의 국내 신학교에서는 별로 다뤄지지 않는다. 정작 신학생들에게 톰 라이트는 낯선 학자이다. ‘개혁주의’를 힘주어 표방하는 그룹에서는 그가 종교개혁의 칭의사상(justification)을 오도하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된다. 국내에서 그에 대한 몇 편의 비판 논문이 발표된 바 있으나, 아쉽게도 그의 저작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나는 대중이 높이 평가하는 신학자를 왜 신학교에서는 관심이 없는가를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묘한 엇갈림이 무얼 말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결코 쉽다고 할 수 없는 대형 성서학자의 전문적 서적까지도 씹어먹듯 달려드는 이들이 저변에 만만찮게 형성되어 있다는 점과 정작 국내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이런 요구에 전혀, 혹은 거의 대응하지 못하는 부조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물음이다.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목회자 양성이란 과제에만 매달리고, 성도들의 질문을 맞대면하는 감각을 잃어버릴 때, 목회자가 생각하는 성도들의 필요와 성도들이 느끼는 자신들의 필요가 어긋날 때, 사람들은 탐탁치 않은 눈길을 뒤로하고 톰 라이트를 찾아내어 탐독해 들어갔다. 이런 현상은 국내에만 국한된 모습은 아니다. 적어도 영미권에서 대중들이 톰 라이트에 환호하고, 읽어 들어가는 양상에는 일관된 유사성이 있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멈추는 지점에서 성큼 한발 더 나아가는 지점에 톰 라이트가 서 있다.


제3권까지 출간된 그의 주저 시리즈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Christian Origin and the Question of God)’ 제4권이 올해 후반에 출간 예고되어 있다.[2] 바울신학의 논의 지형이 요동할 것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신앙적 함의에 대한 토론이 거세게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1.
톰 라이트는 왜 학자적 명성뿐 아니라, 대중적 환영을 받았을까?


첫째로 그는 성경과 기독교에 대해 제기되는 핵심적 질문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룬다. 지적 성실성과 자신감을 갖고 질문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매력을 주었다. 그가 감당하는 논의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포괄적이고, 그가 던지는 질문은 단도직입적이다. 이런 폭과 깊이만으로도 상당히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둘째로 그는 자신의 신학적 작업이 어떤 함의를 갖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강단 신학이 학계 울타리를 좀처럼 넘어서지 못하였던 반면, 그의 논의는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신학적 고민을 하던 이들에게 매우 유용한 자원이 되어 주었다.

셋째로 그의 독특한 문체를 꼽을만한데, 그는 학술서적에서조차 자유분방한 논쟁적 스타일이 드러난다. 의외로 그의 글은 전문지식이 충분치 않더라도 읽기 힘들지 않다. 그가 무엇과 싸우고, 무엇을 문제삼고 있는지를 파악한다면 논쟁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금새 핵심으로 진입하고, 대립되는 개념을 바로 분별해내는 그의 스타일에 익숙해지면 약간 장황한 듯한 그의 글은 익살스럽게 읽힌다.

그의 4번째 주저가 세상에 나오면 새로운 논쟁의 주제들이 여럿 등장하겠으나, 현재까지 나온 책을 중심으로 짚어보아야 할 키워드들은 스티븐 커트에 따르면 38개에 이른다.[3]


01) 역사(history)

02)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

03) 이야기(story/narrative)

04) 이스라엘의 역사

05) 언약(covenant)

06) 유일신론(monotheism)

07) 의, 토라, 성전

08) 유배(exile)

09) 종말론(eschatology)

10) 천국/하늘(heaven)

11) 부활

12) 실천(praxis)과 상징(symbol)

13) 예언자

14) 왕국

15) 회개

16) 악의 문제(problem of evil)

17) 비유들(parables)

18) 예루살렘의 몰락

19) 메시아/그리스도

20) 속죄(atonement)

21) 예수와 하나님

22) 예수의 부활

23) 복음

24) 우상숭배

25) 승리

26) 의(righteousness)

27) 칭의(justification)

28) 하나님의 아들

29) 성령

30) 주

31) 재림/파루시아(parousia)

32) 심판(judgment)

33) 교회

34) 미덕(virtues)

35) 성례전(sacrament)

36) 기도

37) 성경의 권위

38) 제5막



여기에는 성서학 연구 방법론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도 있고, 성경의 익숙한 상징이자 용어들이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닌 것도 있고, 선행된 여러 논의를 바탕으로 그 의미가 재규정되거나 심화될 주제들도 포함된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런 기본 어휘와 개념이 재정의 되거나 내용이 심화된다면, 여기에 근거해서 쌓아올린 신앙고백과 신학적 논의들이 연쇄적으로 변화를 겪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간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용어와 개념이 더 이상 새로운 질문에 응답하는 데에 실패하고 메마른 동어반복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보아왔다. 톰 라이트의 작업은 옛 언어에 생기를 불어넣고, 오래된 토대의 숨겨진 면모를 노출시킴으로써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다시 한번 우리가 묻고 토론하기에 마땅한 진지하고도 절박한 주제임을 일깨워주었다.



2.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1) ‘역사적 예수 연구’를 중심으로


톰 라이트를 일급 학자로 주목받게 한 작업은 흔히 ‘역사적 예수 연구(Historical Jesus Studies)’라는 분야이다. 이 분야는 사실상 근대 성서학의 궤적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분야인지라, 성서학 분야에 대한 선이해가 있는 이라면 그가 내어놓는 주장들이 기존의 방법론이나 전제에 얼마나 겁 없이 도전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4]

제대로 읽으려면 그의 주저 제1권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1992)>(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3)과 제2권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Jesus and the Victory of God, 1996)>(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4)을 탐독하는 것이 제일 좋다. 성서학의 전문용어나 선이해가 없어서 곤란을 겪는 이들에게는 <예수(Original Jesus, 1996)>(살림, 2007)와 <지저스 코드(The Challenge of Jesus, 1999)>(성서유니온, 2006)를 권할만하다. 전자는 BBC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은 것으로 일세기 유대의 상황과 예수의 면모를 흥미롭게 잘 조명해주고 있고, 후자는 그의 주저 제2권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책이다. 그의 성경해석은 매우 전복적이고 파격적인 듯 하지만, 본문에는 오히려 충실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일세기 유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할 수 있는 책들이다.


2) 부활과 재림의 문제 중심으로

그가 주저 제3권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2003)>(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5)이란 주제로 두꺼운 책을 내어놓았을 때는 그 작업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좀더 대중적으로 써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Surprised by Hope, 2007)>(IVP, 2009)가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더불어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Evil and the Justice of God, 2006)>(IVP, 2008)가 다루고 있는 주제도 제대로 조명을 받게 된다.

이 논의는 기독교권에 흔한 (휴거와 재림의 시기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이나, 전통적인 의미의 ‘영원히 불타는 지옥’을 심판의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 등에 급제동을 걸면서 전향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 정의와 평화를 위한 헌신 등을 하나님 나라의 약속으로 보게 하는 신앙적 안목을 열어주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이 책들을 읽고 자신의 종말관이 바뀌었다고 호평을 했다. 이와 관련된 책으로 마커스 보그와 공저한 <예수의 의미(The Meaning of Jesus: Two Visions, 1999)>(한국기독교연구소, 2001)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예수의 의미를 비교 서술한 흥미로운 기획이다.


3) 바울의 신학을 중심으로

톰 라이트는 바울신학자로 학자적 경력을 시작한 셈인데(박사논문이 ‘로마서’였고, ‘바울에 대한 새관점’ 논의도 그가 크게 기여한 분야이다), 조만간 그의 바울연구가 집대성된 4권의 책이 출판될 예정이라 언급을 아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핵심 요지는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What St. Paul Really Said?, 1997)>(에클레시아북스, 2011)에 잘 담겨있고, <톰 라이트의 바울(Paul, Fresh Perspectives, 2005)>(죠이선교회, 2012)에 한번 더 잘 정돈되어 있다.


미국의 존 파이퍼가 톰 라이트의 바울 이해를 비판하는 <칭의 논쟁: 칭의교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The Future of Justification: A Response to N. T. Wright, 2007)>(부흥과개혁사, 2009)를 쓰면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응답은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 2009)>(에클레시아북스, 2011)에 잘 담겨있다.


4) 주제별 관심을 중심으로

다양한 신학적 관심사들을 놓고 그는 많은 책을 저술했다. 간단히 눈에 띄는 것만 언급하자면, 성경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준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Scripture and the Authority of God, 2005)>(새물결플러스, 2011)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성품과 삶의 문제를 매우 잘 다뤄준 <그리스도인의 미덕(After You Believe, 2010)>(포이에마, 2010)를 권할 만하다. 또한 그는 성경 읽기에 관해 괄목할만한 기여를 했는데, Everyone 시리즈로 신약 전체에 대한 간명한 설명서를 내고 있고, 복음서 읽기를 강조한 How God Became King: The Forgotten Story of the Gospels (HarperOne, 2011)과 예수의 의미를 다시 되새긴 Simply Jesus: The Coming of the King (HarperOne, 2011), 자신이 직접 번역한 신약성경인 The Kingdom New Testament: A Contemporary Translation (HarperOne, 2011)을 출간했다. 그외 설교집도 상당한 숫자에 이른다.


5) 인터넷에서

그의 자료를 집대성한 웹페이지(http://ntwrightpage.com/)가 존재하고, 이를 통해 근황이나 새로운 저술 내용을 쉽게 내려받을 수 있다. 전세계에서 벌어진 그의 강연도 유튜브나 iTunes 등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페이지에도 일목요연하게 링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