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38)<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4) 기도의 강조
성령을 통하여 베푸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통치를 우리는 기도로 덕을 입게 됩니다. 성령이 기도할 때에 임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예수가 기도의 모범으로서, 그분은 스스로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으로 연장되어, 초대교회가 기도의 공동체로 형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5) 가난하고 고난받는 자들의 해방에 대한 강조
소외된 자들,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죄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과 관심이 누가복음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는 이들에게 복만 선포되는데 반해,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에서는 그것이 부자들에 대한 저주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6:24-26). 이 정신이 1:46-55의 “마리아의 노래”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매우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누가는 예수의 메시아 취임 설교(눅 4:18-21)에서 예수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자로서의 메시아임을 강조합니다. 또 눅 2:1-14과 행 28:30-31의 수미쌍관을 통하여 메시아(그리스도) 예수를 가이사 아우구스도와 대조시킵니다.
온 세상을 무력으로 평정한 가이사 아우구스도가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주요 신의 아들이라고 칭송되는 데 대항하여, 에수가 사랑과 섬김으로 온 세상에 참 평화를 가져온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가이사의 로마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대조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가 정치적 해방자라기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해방(죄와 불의의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메시아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가 로마제국을 대치하는 다윗왕조를 시온에 세우는 메시아, 즉 로마의 가이사를 대치하는 이스라엘의 ‘가이사’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해방과 평화를 가져오는 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나라(통치)의 대행자임을 보여 줍니다.
3. 신학의 효용성
앞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구원 사건의 모멘트입니다. 이중에 바울, 마가, 마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가령 고린도전서 2:2을 보십시오. 거기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도 가령 빌립보서 2:6-11이나 고린도전서 15:23-28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사탄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꺾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만유의 주가 되시어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며,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저항하는 사탄의 잔여 세력을 소탕해간다(그렇게 현재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식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베푸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통치를 우리는 기도로 덕을 입게 됩니다. 성령이 기도할 때에 임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예수가 기도의 모범으로서, 그분은 스스로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으로 연장되어, 초대교회가 기도의 공동체로 형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5) 가난하고 고난받는 자들의 해방에 대한 강조
소외된 자들,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죄인들에 대한 예수의 사랑과 관심이 누가복음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는 이들에게 복만 선포되는데 반해,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에서는 그것이 부자들에 대한 저주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6:24-26). 이 정신이 1:46-55의 “마리아의 노래”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매우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누가는 예수의 메시아 취임 설교(눅 4:18-21)에서 예수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자로서의 메시아임을 강조합니다. 또 눅 2:1-14과 행 28:30-31의 수미쌍관을 통하여 메시아(그리스도) 예수를 가이사 아우구스도와 대조시킵니다.
온 세상을 무력으로 평정한 가이사 아우구스도가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주요 신의 아들이라고 칭송되는 데 대항하여, 에수가 사랑과 섬김으로 온 세상에 참 평화를 가져온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합니다. 이렇게 가이사의 로마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대조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가 정치적 해방자라기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해방(죄와 불의의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메시아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가 로마제국을 대치하는 다윗왕조를 시온에 세우는 메시아, 즉 로마의 가이사를 대치하는 이스라엘의 ‘가이사’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해방과 평화를 가져오는 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나라(통치)의 대행자임을 보여 줍니다.
3. 신학의 효용성
앞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구원 사건의 모멘트입니다. 이중에 바울, 마가, 마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가령 고린도전서 2:2을 보십시오. 거기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도 가령 빌립보서 2:6-11이나 고린도전서 15:23-28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사탄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꺾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만유의 주가 되시어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며,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저항하는 사탄의 잔여 세력을 소탕해간다(그렇게 현재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식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다만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더 강조한다는 것 뿐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속죄와 새 언약을 위한 제사를 드렸음을 중시하되, 하나님 우편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현재적 구원 사역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합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아예 통합해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올려짐이 바로 그의 영광받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그리스도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들어 올려짐”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땅에서 들어 올려지는 순간이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의 계시자(하나님의 아들, 하나님)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요 8:28, 13:31-32 등).
요한계시록은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5장) 자신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구속해 낸 그의 교회를 일꾼(메시아적 군대) 삼아 사탄의 세력을 무찌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식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누가도 계시록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현재 실현해 가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합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점을 위해서 누가는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에 그리스도의 승천을 그립니다.
요한은 그것을 그리스도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들어 올려짐”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땅에서 들어 올려지는 순간이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의 계시자(하나님의 아들, 하나님)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요 8:28, 13:31-32 등).
요한계시록은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5장) 자신의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구속해 낸 그의 교회를 일꾼(메시아적 군대) 삼아 사탄의 세력을 무찌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식으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누가도 계시록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현재 실현해 가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합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점을 위해서 누가는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에 그리스도의 승천을 그립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있어 십자가에서의 속죄 신학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8:18-20의 사도적 위임에 해당하는 누가복음의 24:47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명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36-43에 누가는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한 설교를 보고하는데, 그것은 사실상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요약한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복음의 요체를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행 10:43). 사도행전 13:38-39에 있는 바울의 설교의 요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누가도 예수의 최후의 만찬 말씀(눅 22:17-22)을 담고 있으려니와, “(하나님)의 아들의 피”(행 20:28)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 사실들은 누가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속죄 제사를 치른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속죄제사로 드려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음을 전제하고, 부활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현재 행사하시어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들은 누가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속죄 제사를 치른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속죄제사로 드려서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음을 전제하고, 부활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현재 행사하시어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십자가 신학,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제사에 근거한 칭의론의 범주를 선포하는 그의 복음을 재발견한 종교개혁의 후예들로서 우리는 바울식 십자가 신학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에 더 초점을 맞춘 누가나 계시록식으로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바울식 십자가 신학, 칭의론의 복음은 구원의 은혜성을 잘 드러내고,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과 절실한 관계를 갖게 하는데 아주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복음 선포 방식과 함께, 누가나 계시록식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여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적 대행자로서 그의 영으로 지상의 교회 안에 계시며, 교회를 인도하시며, 교회에 힘을 주셔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통리를 실현하고 있다는 것도 강조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현재 인권의 확대로, 사회 정의와 평화의 확대로 구현되어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 또는 군사로서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