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시민성의 그루터기는 '탁월하게 다른 삶'이다
지상강좌 기독교윤리 5
성숙한 시민성의 그루터기는 ‘탁월하게 다른 삶’이다
문 시 영 교수
숭실대학교(B.A., M.A., Ph.D.)와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공부했다. 현재 남서울대학교 기독교윤리 교수로 있으며, 새세대교회윤리연구소(NICE) 소장이다.
사람은 좋은데? 사람이 좋아야!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사람은 좋은데…”하며 말끝을 흐리는 경우가 있다. 무능하다거나 문제가 있다는 뜻의 반어법이기 쉽다. 그런가 하면 조사助詞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뜻이 확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하는 경우가 그렇다. 사람 됨됨이가 마음에 든다고 좋은 평가를 내린 셈이다. 두 경우 모두 ‘사람’에 대한 평가라는 점에서는 공통이나 하나는 부정적인 평가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평가다. 무능하거나 실수가 많더라도 사람이 좋아야 한다. 무능하고 실수도 많은 데다 사람까지 좋지 못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물론, 사람도 좋고 능력도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윤리적으로 사람 됨됨이에 대한 평가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한 번의 도덕적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 자체가 도매금으로 좋지 않게 평가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매도하는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기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한 마리 제비가 날아왔다고 해서 봄이 된 것은 아니다. 한 번의 실수로 한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 전체를 문제투성이로 몰아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역시 비슷한 경우 아닐까. 반사회적인 범죄 행위를 눈감아주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더구나 하나의 행위를 근거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은 도덕적 성숙 혹은 갱신을 기대할 수 없게 한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라고 하신 말씀에도 이런 뜻이 담겨 있을 듯싶다. 지금의 행위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의 사람 됨됨이나 배경을 생각한다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변화될 모습까지 생각하면 하나의 행위만으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한 사람의 됨됨이를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법률시스템이나 사회정책에 의해 결정되는 요소가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가 자라난 배경, 가정의 분위기, 특히 그가 신앙인인가 혹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들을 탁월하게 풀이한 윤리학자가 있다. 「타임」지가 2001년 미국 최고의 신학자America’s Best Theologian라고 격찬했고,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에 초청받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듀크대학교의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왕성한 저술 활동이 현재진행형이기에 단편적으로 평가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우어와스가 윤리의 관점을 ‘doing’의 문제에서 ‘being’의 문제로 전환시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그의 윤리관을 대변한다. 하우어와스에게 윤리란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율법시스템이 아니다. 행위자의 배경과 그의 이야기를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상황윤리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행위자의 성품character을 중요하게 보자는 뜻이다. 우리가 하우어와스에 주목하는 것은 그의 관점에 교회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요소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제인 시민사회의 도전에 직면한 한국 교회를 위해 공공신학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대안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사람 됨됨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스택하우스의 공공신학이 교회 밖으로의 윤리를 제안한 것과 달리 하우어와스는 교회 안으로의 윤리를 말한다. 시민사회에 들어가 사회정책과 윤리를 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교회 스스로 사회윤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우어와스의 생각을 요점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윤리를 ‘교회론적 윤리’ecclecial ethics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교회의 교회됨을 구현하자는 취지다. 교회로 교회되게 하면 시민사회가 따라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론적 윤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우어와스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계기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요더John. H. Yoder와의 만남을 통해 얻은 ‘평화에 대한 신념’이요, 다른 하나는 맥킨타이어A. MacIntyre의 영향을 받은 ‘공동체주의적 관점’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앞서 말한 설명에 빗대어 보면 ‘좋은 사람의 성품은 교회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형성되고 훈련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도덕적 자아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이며, 교회 공동체를 통해 그의 성품이 형성되고 훈련되어 평화의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우어와스가 공동체를 통해 형성되는 성품 혹은 사람 됨됨이에 주목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자.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자면 요더의 평화주의를 접한 것이 먼저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맥킨타이어와의 만남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자아에 대한 이해와 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하우어와스의 교회론적 윤리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강좌를 ‘사람 됨됨이’로 출발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윤리가 행위의 문제에서 인격 또는 성품의 문제로 무게 중심이 이동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우어와스가 보기에 윤리학자의 임무는 개별적 윤리문제에 답을 주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인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인격이란 자아가 존재하는 형식으로서 당연히 ‘자아는 어떤 정체성을 지니는가? 성품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등의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에서 ‘공동체주의’라는 개념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현대영미철학의 논쟁에서 ‘자유주의’는 이성에 입각한 윤리적 자유를 주장하지만 공동체주의자들은 이성에 대한 추종이 오늘의 윤리적 위기를 낳았다고 본다.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덕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특히 자아에 관한 설명에서 칸트적 설명을 거부하고 자아의 ‘배경’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은 추상적인 ‘유령적 자아’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우어와스는 계몽주의적 기획과 포스트모던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덕의 윤리를 활용했던 도덕철학자 맥킨타이어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인간을 ‘이야기하는 존재’로 여기는 맥킨타이어에 동의하면서, 하우어와스는 공동체주의를 수용한다. 인간은 공동체에 속한 존재요, 공동체가 지닌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윤리적으로 성숙된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사람 됨됨이에 관한 기독교적 설명이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며,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훈련받고 성숙한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교회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교회의 이야기, 즉 예수 이야기를 통해 자아와 인격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교회는 기독교적 덕성의 훈련장이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성숙시키며 윤리적 독창성과 탁월성을 지닌 존재로 만들어가는 곳이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강조, 교회를 통한 윤리적 훈련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이다. 하우어와스의 윤리를 교회론적 윤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 됨됨이, 예수 이야기로 형성되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덕성을 훈련시키는 교회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어떤 덕성을 함양하고 성숙시켜야 하는가?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신앙인의 윤리는 자연법 윤리와 다르다. 신앙공동체에 속한 존재들은 복음의 이야기 속에서 정체성과 역할을 발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예수 이야기’Jesus narrative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가 지닌 이야기는 다름 아닌 예수 이야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며 십자가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대목에서 하우어와스는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낸다. 특히 평화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이것은 하우어와스의 윤리 형성에 있었던 또 하나의 계기, 즉 요더와의 만남을 통해 설명된다. 특히 전쟁에 대한 반대와 비폭력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적 평화의 가치는 하우어와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평화주의자로서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요더에게 예수 내러티브의 핵심은 ‘십자가’다. 요더가 속했던 메노나이트의 전통은 그의 관점을 무저항, 비폭력의 평화주의에 이르게 한다. 요더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로 상징되는 새로운 윤리로 우리를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근본적으로 철저히 다른 새로운 삶의 질서를 지닌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기존 사회를 위협했으며 십자가로 대변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셨다.1 그리고 ‘예수와 같이 되는’ 제자도와 본받음의 핵심에 ‘평화’가 있다는 것이 요더의 관점이다.
이러한 요더의 흔적들은 하우어와스의 관점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하우어와스가 듀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을 때 그곳 철학과 교수인 맥킨타이어를 만난 것이 공동체주의를 발전시키는 계기였다면, 요더와의 만남은 핵심가치들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평화의 덕성과 교회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한 요더의 암시가 하우어와스 윤리의 토대인 셈이다. 더구나 요더가 교회를 예수 이야기의 공동체로 보았던 점 또한 하우어와스에게 중요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요더가 교회를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로 간주하고 국가의 대안이라고 보아 영적 정치 행위를 강조했던 것도 그 중 하나다.
하우어와스에게서 요더의 영향은 윤리적 관심과 방법론 자체를 전환시킬 정도였다. 본래 하우어와스는 예일대학교에서 리처드 니버의 제자인 거스탑슨의 지도를 받아 계시의 의미와 책임적 자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노트르담대학의 교수로 부임한 이후, 이미 노트르담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던 요더의 책은 하우어와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우어와스는 전쟁에 대한 반대와 평화주의를 강조하는 큰 틀을 마련했다. 평화를 위한 덕성이 예수 이야기의 핵심이요 교회가 가르쳐야 할 윤리적 독창성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배운다. 그 배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평화의 백성으로 성숙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점령군 로마인들에 대한 적개심보다 용서와 자유의 비전을 제시한 것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신앙인들은 예수 이야기를 따라 우리 시대를 향한 평화의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 그 핵심에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자리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십자가 지는 각오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하우어와스의 윤리가 평화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평화가 그의 윤리에서 중요한 이슈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데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전반적으로 그의 윤리가 시민사회와 ‘다른’ 길을 강조한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다. 그의 윤리에서 시민사회와 ‘다른’ 길을 강조는 대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평화에 대한 강조 역시 애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찌든 시민사회와는 다른 길을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다. 그가 교회를 향하여 미국의 시민사회와 경제시스템, 그리고 의료문제에 이르기까지 ‘다른’ 길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르게 살기, 그 불편한 동거
이제 남은 문제는, 실상 우리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민사회와 교회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이다. 필자 나름대로 소화해서 말한다면 하우어와스는 시민사회 속에서 ‘다르게 살기’를 제안한다. 근거와 모델은 교회가 지닌 예수 이야기다. 십자가를 통해 평화를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 ‘다르게 사는’ 삶의 핵심이다. 단순하게 다른 방식이 아니라 ‘탁월함으로서의 다름’이다.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따라 평화를 위해 살아가면 결국 시민사회가 따라오게 될 것이며 이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보자. 기독교의 사회윤리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우어와스의 답은 그렇게 살아내기 자체가 쉽지 않지만 간단명료하다. 교회가 지닌 예수 이야기가 곧 사회윤리다.2 여기에 사용된 ‘narrative’를 ‘내러티브’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표현을 쓰든 간에 예수 이야기가 교회공동체를 통한 성품 형성에 배경이 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내러티브는 모든 공동체에 필수요소다. 특히 예수 이야기는 시민사회와 구분되는 목소리를 내는 교회만의 독특한 이야기다.3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신앙인에 대한 그의 관점, 곧 신앙인이란 교회에서 예수 이야기대로 살도록 훈련받고 성숙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시민사회 속에서 교회공동체는 불편한 동거 관계에 있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신앙인은 시류에 영합하는 존재라기보다 나그네 된 거류민resident aliens이다.4 일찍이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듯싶다.
하우어와스는 윌리몬과 공저한 책 첫머리에 상징적으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 3:20~21.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로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혹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정책으로 정리된 사회윤리를 제시하기보다는 시민사회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준 셈이다.
그래서 하우어와스는 교회가 사회문제들에 어설프게 개입하지 말라고 한다. ‘예수 이야기’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현실주의에 입각한 사회윤리를 강조했던 라인홀드 니버를 자주 비판한다. 저술에 대한 학문적 비판뿐 아니라 사회문제에 관한 니버식 접근 전반에 대해 비판적이다. 니버가 현실 정치에 관하여 사회구조와 정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책을 제시하는 형태로 개입했던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하우어와스가 보기에 교회는 사회정책을 입안하는 기구가 아니다. 예수 이야기대로 살아내면 시민사회가 따라올 것이라는 신념의 반증이다. 교회가 곧 사회윤리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실제로 그는 미국의 정치 및 경제시스템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데 거침이 없다. 하우어와스는 교회와 세상을 동일시하는 콘스탄틴주의적 성향이 기독교를 세속적 권력과 결탁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미국의 기독교가 사회문제들에 가담하여 애국주의나 국수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반대한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도덕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 바탕에는 폭력에 대한 거부, 특히 의로운 전쟁론에 대한 반대가 깔려있다. 오히려 교회는 폭력에 의한 갈등처리가 일상화된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5 하우어와스는 미국의 시장경제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고삐 풀린 욕망의 사회에 살고 있다. 미국의 문화는 끊임없는 소비를 부추기는 거대한 욕망의 슈퍼마켓일 뿐이다.6 나아가 안락사와 임신중절과 같은 의료문제까지도 시장 자본주의적 접근과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세상적 가치와 전혀 다른, 독특한 삶의 원리를 따라 살자는 것이 하우어와스의 요점이다. 세상과 전적으로 다른 원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어설프게 동화되지 말자는 것과 같은 뜻이다. 정책을 제시하고 개입하는 것 자체가 타협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의 방식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셈이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 문화에 만연된 쾌락주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국가숭배 등에 맞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야비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예배’라는 잔치를 베풀 수 있는 소망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나라를 지배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하셨던 예수의 길을 따르자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어쩌면 교회 역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불편한 동거’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교회 스스로 세상에서 퇴거하자는 뜻으로 들리기 쉽다. 이러한 비판을 의식한 듯 하우어와스는 자신의 생각이 세상에서 은둔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 세상에서 주의 말씀대로 살아내기에 힘쓰자는 뜻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그것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세상 밖으로 몰아내려 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있어야 한다.”7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이야기의 공동체에 속한 자로서, 세상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합리적인 언어들로 번역하여 설명될 것도 아니요 시민사회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의 이야기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면 된다. 우리가 지난 호에 살펴 본 스택하우스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제시하는 셈이다. 실제로 현대기독교윤리학에서 공공신학과 라이벌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우어와스가 ‘예수 이야기’의 공동체와 평화를 실천할 성품과 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독특한 ‘다름’에 대한 주장이 지나쳐 윤리적 게토에 갇힐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소종파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는 비판이 따라다니는 이유다.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퇴거주의라는 비판도 받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우어와스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기에 창의적인 제안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 성품, 덕, 그리고 평화에 대한 그의 메시지가 더욱 풍요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
시민사회에서 ‘교회다운 교회되기’
솔직히 필자가 교회특강 혹은 설교에서 공공신학과 교회론적 윤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노라면 상당수의 청중들이 공공신학보다 하우어와스에게 관심을 가진다. 공공신학이라는 이름부터가 왠지 복음적인 신앙인들에게는 부담스러운가 보다. 한국 교회의 복음적 신앙전통에서는 ‘말씀대로 살아서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공공신학보다 호소력이 큰 셈이다. 왜 그럴까?
분명 하우어와스의 제안은 안팎으로 안티와 변화의 요구에 직면한 한국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내용이다. 한국 교회는 교회의 교회됨에 관하여 혹은 교회다운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다르게’ 사는 방식에 관하여 고민해야 할 때다. 특히 교회부터 새로워져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한 한국 교회에 좋은 길잡이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시민사회가 교회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필자가 보기에 하우어와스를 한국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아시아적 가치관이 작용할 수 있다. 공공신학에 멸사봉공의 아시아적 관점이 적용될 수 있다면, 교회론적 윤리에는 사회에 본이 되고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적용될 수 있겠다. 더구나 사람됨을 우선시하는 것은 덕德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중시하는 아시아적 가치관에 가깝다. ‘덕스러움’ 혹은 ‘후덕厚德함’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가 그것이다. 교회에 대해 사회가 본받을 만한 그 무엇을 요구하는 것도 아마 이런 영향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하우어와스는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귀감, 이를테면 공공신학처럼 공공성이나 투명성을 말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예수 이야기대로 ‘다르게’ 살자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기독교윤리학자가 예수의 윤리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중용의 윤리가 아닌 극단의 윤리라고 설명했던 것과 가까워 보인다. 하우어와스가 평화를 강조하면서 미국 시민들에게 자녀들의 군복무에 대한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암시한 부분에서는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바라기는 ‘다름’에 관한 강조가 세상 속에서 극단의 길을 걷자는 말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한다.
한 가지 더 짚어보자. 예수 이야기대로 사는 것이 시민사회와의 단절이어서는 곤란하다. 다름으로서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것은 좋으나 신앙의 사사화로 흘러서는 안 된다. 예수 이야기에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우리들끼리’의 집단적 사사로움으로 전락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하우어와스의 윤리는 공공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소통이다. 그가 이라크 파병 반대를 말한 것도 공공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민사회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되 ‘다른 길’을 제시하는 노력인 셈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한국 교회에는 말씀이 부족한 게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내는 게 부족하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 사는 길이 무엇인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일, 교회로 교회되게 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도 시민사회가 문제를 삼는다면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신앙인의 사람 됨됨이 역시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 예수 이야기대로 살기로 결단하는 복음적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교회 밖으로 시민적 공공성을 압도할 성숙한 시민으로 나서야 할 때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느니라약 2:13.
주(註)
1. John H. Yoder, 「예수의 정치학」, 신원하·권경연 옮김 (서울: IVP, 2007), 101~102.
2.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Toward a Constructive Christian Social Ethic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1), 40.
3. 앞의 책, 69.
4. Stanley Hauerwas & William H. Willimon, Resident Aliens: Life in the Christian Colony (Abingdon Press, 1989) 11~13.
5. Stanley Hauerwas & William H. Willimon, 「십계명」, 강봉재 옮김 (복있는 사람, 2007), 125.
6. Stanley Hauerwas & William H. Willimon,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이종태 옮김 (복있는 사람, 2006), 108.
7. 앞의 책, 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