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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9일 수요일

우리시대 실패한 정치의 징후들

공생의 정치신학: 캐서린 켈러의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1)

본고는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16집(2020): 327-358에 게재된 논문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연재하는 것임을 일러둔다. - 저자 주

우리 시대 정치신학의 필요성 혹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전제는 우리는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우리의 정치는 삶을 더 정의롭고 풍요롭고 공평하고 넉넉하게 만드는데 실패했다. 근대로부터 이어진 인간해방의 꿈은 소위 ‘호모 데우스’라 불릴 극소수 특권계층의 형성으로 신기루처럼 부서지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던 경제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정치(政治)는 결코 정치(正治)로 이어지지 못하고, 거주지와 삶을 의미하는 단어로부터 유래하는 경제(eco-nomy)는 결코 삶을 가능케 하는 체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자유도 온전한 평등도 가져다주지 못했고, 자유민주주의의 물질적 성장엔진이었던 자본주의는 그 성장의 끝이 도래했다고 말해진다.

자본주의는 폐허들을 양산하면서, 불안정하고 취약한 인생들의 숫자만을 성장시킨다. 안나 씽은 이를 “불안정성의 범지구적 상태”(1)라고 표현한다. 모든 것이 정처없이 표류하고, 가치가 의미를 상실하고, 기준은 권력의 힘과 크기를 의미할 뿐인 우리 시대의 핵심적 문제들 중 하나가 ‘정명’(正名, to retify names)의 실패라고 크로켓(Clayton Crockett)은 주장한다. 즉 사물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기호자본주의의 시대, 법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 등과 같은 이름들이 올바로 작동하지 않는 시대, 이름은 금융통화처럼 정처 없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2)

이런 가운데 신자본주의의 범지구적 질서에 맞서 지역주의가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와 종교의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이를 “종교의 귀환”(the return of religion)으로 부르기도 한다.(3) 모든 것이 불분명해진 시대를 종교적 전통의 가치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종교의 귀환은 곧 샹탈 무페의 표현처럼 “정치적인 것의 귀환”(4)이기도 하다. 이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종교의 부흥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적인 것’이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을 결정하는 ... 차원”으로서, 우리의 모든 정체성은 관계성, 말하자면 내외의 경계성으로 구성된다. 이는 외부 타자에 대한 적대관계를 통해 우리의 경계가 설정된다는 칼 슈미트의 논리를 따른 것이다.(5)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이러한 모습으로 귀환하는 것은 도착적 귀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정치가 맞이하고 있는 급박성은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로 인해 ‘예외 없이’ 모든 생명이 존재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급박성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친구/적의 경계를 설정하는 예외적 주권권력의 힘을 자신의 정치신학(6)의 토대로 삼았던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논리는 그 어떤 예외도 허용치 않는 오늘 우리 지구행성의 위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 시대에 정치신학을 재규정할 필요성을 인식한다.

생태계 위기와 기후변화는 지구 위에 살아가는 생명의 공멸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제 정치신학의 주제는 해방이나 반란 혹은 저항보다는 ‘공생’(co-life)으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공생’이란 그저 관계적으로 얽힌 존재들이 서로 좋게 상리공생(相利共生)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신학적 의미에서 혹은 기독교 신앙적 의미에서 ‘공생’이란 서로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존재들끼리의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기존사회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등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들을 하나님의 동등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는 기획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것은 현사회구조 하에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존재를 예를 들어, 노예와 여자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고 품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었다. 황제를 정점으로 모든 존재가 신분제 위계질서로 규정된 사회구조 하에서 그들은 기존의 위계적 사회질서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기준으로 재구성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 박해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즉 기독교 공동체는 처음부터 기존과는 다른 정치체재를 전개하는 정치적 공동체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두를 적/아군의 이분법으로 재구성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아군을 결집해 정치세력화해내는 칼 슈미트적 정치신학과 정반대로, 적/아군 혹은 친구/적의 이분법을 허물고, 동등한 존재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하의 존재(the inhuman)를 형제와 자매로 호명하며, 존재를 회복시켜주는 정치, 즉 공생의 정치였다. 캐서린 켈러는 이를 ‘정치적인 것의 귀환’으로 선포하고, 신학적으로 성찰한다.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신학은 제도권 정치를 넘어, “우리의 우주정치적 얽힘들의 위태로운 유한성과 ‘다중다성적 리듬’(polyrhythmic)의 복잡성”(7)을 포착하고, 거기서 “새로운 정치적 행동주의를 위한 시간”을 열어(8), 현재의 제도권 선거정치를 넘어서는 “민주적 투쟁성(democratic militancy)”(9)을 모색하는 신학이다.

여기서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은 배제와 혐오의 정치 즉 친구와 적의 이분법적 정치신학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논리를 기후변화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종말의 상황 속에서 대안적으로 실현하려는 신학적 노력이다. 신학을 세속의 한복판에 실현할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는 “세속화된 신학”(theology secularized)(10)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배제와 혐오가 아니라 “창생 집단체”(the genesis collective)(11)의 관계성 속에서 비존재로 밀려난 이들을 존재로 회복하여, 피조세계에 참여시킨다는 의미에서 성화(sanctification)의 정치신학이기도 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Anna Lowenhaupt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6.
(미주 2) Clayton Crockett, Radical Political Theology: Religion and Politics After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1), 1.
(미주 3) Ibid., 2.
(미주 4) Ibid., 2;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이보경 역, 『정치적인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Political), 4쇄 (서울: 후마니타스, 2012), 11.
(미주 5)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2012), 13.
(미주 6)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라는 용어가 독일의 보수적인 법 이론가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1921년 출판된 책 제목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 매우 역설적인데, 그는 “국가에 관한 근대 이론의 모든 중요한 개념들은 세속화된 신학적(theological) 개념들”이라고 주장했다(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8).
(미주 7)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2018), 39; 폴리리듬(polyrhythm)은 서로 다른 리듬이 중첩되어 연주되는 것으로서, 재즈같은 분야에 쓰이는 음악용어로부터 유래한다.
(미주 8) Ibid, 39.
(미주 9) Ibid, 40.
(미주 10) Ibid, 162.
(미주 11) Catherine Keller, On the Mystery: Discerning Divinity in Proce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8), 47.

우리 시대 자유민주주의의 실패

 공생의 정치신학: 캐서린 켈러의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2)


오늘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democracy)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체제이다. 즉 자유주의(liberalism)과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이념적 대립이 ‘자유’와 ‘평등’ 혹은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담지되어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공동의 적, 즉 절대주의와 권위주의적 전통들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공동투쟁의 결과였다.(1)

하지만, 이미 보수적 정치학자 칼 슈미트(Karl Schumitt)가 지적했듯이, 자유와 평등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란 이 갈등의 자리를 “긴장의 장소”(the locus of tension)(2)로 간주하고, 이 “구성적 긴장”(3)을 “여러 다른 헤게모니적 배열들 간의 끊임없는 협상과정”으로 삼는 정치적 절차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지배로 인해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로 진입했고, 이제 ‘평등’의 이념은 ‘공정한 경쟁’으로 대치되어, ‘개인의 권리’로 환원되어버린 껍데기뿐인 ‘인권’ 개념으로 초라하게 남아있을 뿐이다.(4)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더불어 급격히 ‘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었고, 평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자유선거 시행과 인권 수호”의 초라한 구호들로만 존재해고 있을 뿐이다.(5) 즉 우리는 “대중주권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이 침식”된 “포스트 민주주의의 상태”(6), 즉 ‘자유주의’ 체제가 승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공평성, 다르고 다양한 문화와 믿음들에 대한 관용, 인간 존엄성의 수호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의 신장을 외쳤던 자유주의 체제는 “실제적으로는 거대한 불평등을 낳고, 획일성과 동종성을 부여하고, 물질적 영적 퇴화를 부추기고 그리고 자유를 침해”(7)했다. 자유주의가 이상적으로 주장했던 것과 우리가 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 차이의 격차가 점점 심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를 해방하는 수단들이 우리를 감금하는 철장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그래서 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와 불만족이 증폭되고 누적되고 있으며, 때로 마녀사냥의 대상을 찾아 정의(justice)의 이름으로 분노를 광장으로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유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이행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 금융귀족같은 소위 신-엘리트들의 출현(8), 그에 따른 대중들의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가 자제력과 숙고의 능력 그리고 민주적 정부를 만들어가기 위한 절차들보다는 “정치적 분노와 좌절”을 표현하는데 소진되고 있다.(9)

자유주의(liberalism)의 핵심에는 “권리를 담지한 개인이 자신만의 훌륭한 삶을 추구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인간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10)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자유주의 모델 정치체제는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주장하며, 이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각 개인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동의한 소위 “사회 계약”(social contract)설을 발명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주창하였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점점 더 미세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확장되고 있고, 시민들은 정부가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멀리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세계화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시민들을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그리고 각자도생의 삶으로 몰아갈 뿐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자유주의 체제가 유일하게 확보해준 개인의 권리란 오직 충분한 부와 지위를 확보한 이들의 권리와 자율뿐이라고 느낀다.(11) 따라서 시민들은 현 체제가 ‘실력주의’(meritocracy)가 되었고, 소위 능력있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세습하고, 교육 시스템은 인성이나 소명을 찾는 장이 아니라 사회의 소위 ‘루저’(loser)를 솎아내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다고 느낀다.

소비자본주의 체제와 결탁하여,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로 대치하였고, 사회적 경쟁의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적 구조가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는 현실과 그로 인해 야기된 경제적 불안정성과 심화되는 불평등의 격차를 값싼 상품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통해 무마시키려 노력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격차가 공정성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승자로부터 패자를 채로 거르는 시스템을 통해 심화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격차가 초첨단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의 격차로 이어져, 정말 소수의 초부유층이 자신들을 수퍼휴먼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현실이 소위 “호모 데우스”의 시대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를 하라리는 “불평등의 업그레이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2) 세계화가 초래하는 무한경쟁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논리로 포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대의 모두는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발전의 혜택을 누린다는 위로 아닌 “위로”가 주어지기도 한다.(13) 분명한 것은 이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세계화 경제가 현세대의 누구로부터도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드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총체적 난국이 자유주의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가 그 본연에 충실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고 진단한다. 즉 자유주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14)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총체적인 좌절과 실패는 바로 우리가 “자유주의의 이상들에 맞추어 살아내는데 실패”(15)했다는 잘못된 분석이다. 이는 우리가 ‘자유주의’(liberalism)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비롯된 것이며, 이 이데올로기의 동굴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비교를 통해 알려줄 다른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보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이다.

현재 우리 시대의 실패는 자유주의의 전적인 성공에 따른 결과라는 드닌의 진단과 병행하여, 샹탈 무페는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의 무능이 이 실패를 부추긴 주요원인들 중 하나라고 진단한다. 즉 현재 서구 정치에서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이 담고 있는 수많은 요구들이 진보적 해답이 필요한 민주주의 요구라는 것을” 좌파 정치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16) 즉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일구어낸 타협이 우리 시대 유래없는 승자와 패자의 격차를 양산해 내고 있으며, 이 세계화의 패배자들이 외치는 함성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로 반영되는 민주주의적 열망들이 낙오자와 실패자의 좌절과 분노로 응집되고, 그 분노의 감정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적대와 혐오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중산층의 최소한의 이익도 지켜내지 못한”(17) 진보정치인들에 대한 깊은 불신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성공적인 실패’는 “더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18) 즉 ‘성공보다 나은 실패’를 시도하지 않았던 결과인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불안한 결합은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성공을 양산해내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진화에 의존한 결과이다. 그래서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안정성이 극히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비교적 경제변화와 상관없이 정치적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던 마을 공동체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붕괴 혹은 폐지되고, 전 지구를 시장경제라는 우산 하에 두고자 기획되었던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다문화’ 시대에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인 다문화’가 자유주의 기획의 일부로 고립되어 게토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모순을 대변한다. 그래서 정치는 차라리 실패했었던 것이 나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실패를 경험했더라면, 지금같은 극단적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해도 말이다.


미주

(미주 1)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이승원 역,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 2쇄 (서울: 문학세계사, 2019), 28.
(미주 2) 앞의 책, 29.
(미주 3) 앞의 책, 30.
(미주 4) 앞의 책, 31.
(미주 5) 앞의 책, 31.
(미주 6) 앞의 책, 34.
(미주 7) Patrick J. Denneen,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8), 3.
(미주 8) 이를 샹탈 무페는 “서구 사회의 과두제화”(oligarchization)로 표현하고 있다(『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3).
(미주 9)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xiv.
(미주 10) Ibid., 1.
(미주 11) Ibid., 3.
(미주 12) Yuval Noah Harari,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 (London: Harvill Secker, 2015), 346.
(미주 13)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10.
(미주 14) Ibid., 3.
(미주 15) Ibid., 4.
(미주 16)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9.
(미주 17)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노정태 역, 『진보의 몰락』(Death of the Liberal Class) (서울: 프런티어, 2013), 25.
(미주 18)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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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죄로 간주하는 나는 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가

 1. 동성애는 성경적 관점에서 죄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다. 나는 우리 신앙과 행위를 위한 최고 기준을 성경이라고 받아들인다. 어느 것도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며, 성경보다 높은 권위는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인정하거나 열린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만, 나는 동성애가 죄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질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동성애를 사랑으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배우자가 아닌 사람을 만나는 게 참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륜인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동성애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경우에도 신앙적 관점에서 여전히 죄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죄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우리는 모두 탐욕적 성향과 이기적 성향을 안고 태어난다. 선천적으로 도벽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도둑질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처럼, 선천적으로 동성애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성경적 관점에서는 죄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차별도 성경적 관점에서 죄다

하지만 동성애가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죄라는 말은 동성애자들을 차별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을 죄라고 가르친다(약 2:8-9).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롬 2:11).

누군가 죄를 짓는다고 그를 미워하거나 박해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예수님께서 세리를 용납하고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만났을 때 원수 지간인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것처럼,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게 옳다(약 3:9-10). 우리가 사랑할 이웃은 우리에게 문안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다(마 5:46-47). 오히려 우리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누군가 도둑질했다면 그것은 죄다. 범죄행위에 맞게 적절히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전과자라고 하더라도 사적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전과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물건을 팔지 않거나 출판물로 공개적으로 모욕해서도 안 된다. 도둑질이 옳아서가 아니다. 아무리 죄를 지었더라도 적절한 처벌을 벗어난 대응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녀 훈육은 부모에게 주어진 의무다. 어떤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해서 밥 먹이지 않고 폭력적으로 대하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 부모는 처벌받게 될 것이다. 국가에서 훈육을 금하지는 않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자녀를 죽였기 때문이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성경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죄다. 하지만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대부분 처벌이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이 신정국가가 아닌 이상 성경적 규범은 대한민국 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샤리아나 불교의 법이 대한민국 국법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성경 속 모든 규정이 대한민국 법이 될 수는 없다. 간음이나 이혼과 마찬가지로, 동성애도 국가에서 처벌하는 일이 불가하다. 성경에서는 우상숭배가 가장 큰 죄이지만, 우상숭배를 대한민국 국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동성애자라서 모욕한다거나, 왕따한다거나, 능력이 있는데도 회사에서 여러 불이익을 주는 일은 정당하지 않다. 차별금지법은 그러한 차별을 미리 방지하자는 법이다. 아무리 신앙적 관점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합리한 차별을 당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법이다.

범죄 혐의자에게 미란다원칙을 적용하고, 변호인 도움을 받도록 보장한다. 범죄 혐의가 있다고 피의 사실을 미리 공표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죄를 짓는 게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보면 분통 터지는 일일 것이다. 경찰이 자기 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보호하는 모습을 볼 때 화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죄를 지었다고 피해자 가족에게 폭행당하고 죽임 받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그 사람이 행한 게 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의미에서다. 이와 비슷하게 차별금지법은 차별이라는 불합리를 막자는 법이다. 이것은 성경적 가치에 해당한다.

인간은 악해서 다수가 되면 횡포를 부리기 쉽고, 소수는 다수의 횡포에 차별을 받아 정말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동남아시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당하기 쉽다. 차별금지법은 차별하지 못하게 해서 모두가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 성경적 가치를 담고 있다.


3. 신정국가가 아니기에 불신자들 행태에 상관 말아야 한다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우상을 찍어내 버리고 산당을 제거하라고 규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을 인정하셨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절간에 잠입해 기드온처럼 용감하게 부처상들을 파괴하는 일이 옳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만 섬기기로 시내산 언약을 통해 계약 맺은 신정국가에서나 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는 곳은 신정국가가 아니다. 성경 율법을 국가의 법으로 가지고 있지도 않다.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이 세상 법칙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우상을 찍어 버리지는 않았다. 바벨론은 신정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를 향한 가르침은 바울서신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 우상숭배하거나 음행하는 자들이 있다면 출교시키라고 명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상숭배한다고 해서 절교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들의 삶에 신경 쓰지 말라고 권면했다.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고전 5:12-13). 교회가 할 일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에 참견하는 게 아니다. 동성애자들을 찾아가 죄라고 지적할 게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불신자들과 거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상에게 바친 물건일 가능성이 있어도 묻지 말고 사서 먹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고전 10:25). 우리는 지금까지 불교도들에게도 장사하면서 살아왔다.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동안 불신자들이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한다.

동성애자에게 케이크 주문이 들어왔을 때 그들에게 케이크를 파는 일은 신앙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 집을 타 종교인들에게 파는 일도 문제가 아니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라 세상이며,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타 종교인이나 불신자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관계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불교도들처럼 산속에 들어가 혼자 고고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기 때문이다.


4.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은 동성애자들과의 전쟁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이나 반기독교적 성향이 있는 세력을 우리의 영적 대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물리적 방법으로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세를 과시해 입법을 막고, 단체로 몰려가 시위하는 방법으로 굴복시키려 한다. 전화 돌리거나 문자 폭탄을 돌려 우리 힘을 보여 주어 온갖 이 세상 세력을 굴복시키는 일을 영적 승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대적은 그들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영적 싸움 대상은 마음속에서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들고, 탐욕적으로 만들고, 음욕을 품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고,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게 만드는 사탄이다(엡 6:12). 사탄은 우리의 신앙 열정을 교만으로 바꿔서 망하게 만든다. 사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공로로 바꿔 버리고, 주님을 향한 헌신을 자랑거리로 바꿔 버린다. 이러한 영적 대적과 싸워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우리 대적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 왔다. 그 대적이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이며, 힘겨루기를 통해 그들을 짓밟아 버리는 것을 영적 승리라고 속삭이는 사탄의 속임수에 곧잘 넘어갔다. 그래서 베드로는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잘라 버렸다. 예수님을 체포하는 자들을 칼을 써서라도 물리치는 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는 무리와 싸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다.

타락할 대로 타락했던 중세 기독교는 십자군을 동원해 이슬람 사람들을 박멸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전쟁에 순수한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이 많이 자원했다. 그러한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을 이용한 자들은 정치권이고 장사치였다. 자신들의 정치적·물질적 이익을 위해 신앙으로 십자군 전쟁을 포장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이 이용만 당했다. 역사는 십자군 운동이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기록한다. 기독교는 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없다. 칼을 쓸 때 오히려 기독교는 망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동성애자들을 향해 기독교가 힘을 사용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싸움에서는 반드시 질 수밖에 없다. 칼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5. 빛과 소금 역할 감당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이다

힘을 과시하는 방법으로는 동성애자들 마음을 얻을 수 없고, 그들을 회개로 인도할 수 없다. 힘으로는 우리보다 이 세상이 더 세다는 사실을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절망적이지 않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기신 싸움을 하고 있으며,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은 힘을 쓰는 게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 때,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동성애는 죄이자 하나의 우상이기에, 결코 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그들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성경 가르침대로 아름답고 건전한 가정을 이루어 산다면, 그들은 비로소 우리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다. 옛날 다신교를 믿던 사람들이 유일신을 섬기던 유대인을 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생각하고 돌아섰던 것처럼 말이다.

진리에는 힘이 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은 가장 강력한 전도 방법이다. 우리가 음란하게 살며 온갖 매체를 통해 목사들 비리와 성 추문이 방송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동성애가 죄라고 외치면 "너나 잘하세요"라는 비아냥만 들을 것이다. 이 세상은 오히려 동성애자들 편에 서게 될 것이다.

- 보수 교계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기 위해 '진정한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 연합'을 창립했다. 


6. 차별금지법은 신앙의자유 억압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종교의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이는 헌법적 권리이기 때문에 하위법인 차별금지법에 따라 제한될 수 없다. 일각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성경이 불온·금지 서적 취급받게 되고, 신앙의자유가 박탈될 것이며,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는 등 온갖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외국 사례들을 언급하며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과도한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시행되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여전히 신앙의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고용이나 직업 문제에서,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는 학교에서,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 행정 서비스를 받을 때 차별하는 일을 금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네 가지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분야는 문제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설교하거나 동성애 관련 주장이 담긴 책을 쓰는 일 등은 대상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를 반대하다가 경찰에 잡혀가고 직장에서 해고됐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러한 주장도 억지다. 동성애를 반대해서 경찰에 잡혀가거나 직장에서 해고된 게 아니다. 현행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를 반대하는 일을 하다 도로교통법을 위반했거나, 집회 신고까지 마친 정당한 집회를 방해했거나, 반동성애 강의를 하는 중에 성희롱적 표현을 무분별하게 사용했다가 처벌받기도 하고 불이익당하는 것이다. 동성애에 반대하지만 법을 위반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벌되지 않는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동성애에 반대했기 때문에 핍박당한 것이라고 우기는 일은 옳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악마가 되기 쉽다. 그게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방식이다. 우리는 자녀가 잘못했을 때 윽박지르거나 가혹하게 때려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범죄행위다. 교회 분쟁이 일어났을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무찌르기 위해 무슨 짓을 해도 옳다고 착각하고는 한다. 다른 편 예배를 방해해도 괜찮고, 반대편 사람들이 교회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폭력을 써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동성애가 죄라는 생각이 들면, 종종 동성애를 반대하는 모든 행위가 정당할 것이라고 착각하고는 한다. 법을 어기거나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신고를 마친 그들의 집회를 물리력으로 방해해도 괜찮다고 여기기도 한다. 강의할 때 동성애를 반대한답시고 성희롱적 발언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이런 일들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을 때 동성애를 반대했기 때문에 받는 억울한 처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칭찬받을 게 없기 때문이다(벧전 2:20).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더라도 강단 위에서 동성애가 죄라는 성경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종교의자유는 헌법적 권리이고, 일개 법이 헌법을 능가할 수는 없다. 길거리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외치는 일은 제지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가 신정국가가 아니고, 다양한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를 인정받는 민주국가이기에 당연하다. 아무리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민주국가 내에서 남의 집 우상을 부술 권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길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선포하고 싶겠지만, 그러한 행위는 결코 전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낸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했던 것처럼 먼저 접촉점을 찾아 대화하며 마음을 여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사람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마음이 닫힌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외치는 일은, 팀 켈러 말처럼 다이너마이트를 바위 옆에서 터트리는 것과 같아서 바위를 그슬리게 할 뿐 쪼개지는 못한다.


7. 서구 교회 몰락은 차별금지법 때문 아니다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퍼트리는 주장이 있다. 프랑스에서 차별금지법을 막지 못했기에 학교에서 동성애 교육을 하고, 교회에서 동성애 반대 설교를 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교회가 문을 닫고 술집으로 변했다는 내용이다. 프랑스에서 교회가 문을 닫은 게 정말 차별금지법 때문일까. 인과관계가 맞는가? 오히려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꼰대처럼 굴어서 우리에게 그런 꼰대 같은 종교가 필요 없다고 느끼게 만든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나그네든 과부든 고아든, 약자를 돌보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게 성경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이 사회에서 뿌리 뽑아야 한다고 하는 옹졸한 바리새인 같은 마음이 더 문제 아닐까.

프랑스에 차별금지법이 있지만 교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교회 내에서 동성애가 죄라는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칼뱅주의·개혁주의적 교회도 프랑스에서 성장하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들도 잘 활동하고 있다. 세상은 동성애를 잘못된 방식으로 반대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적어도 생각이 다르고, 종교가 다른 다원화한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지내야 한다.

사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었다. 미국에서는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 대우하면 처벌받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미국 내에서 동성애가 죄라고 설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교회에서 그렇게 설교하고 있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모욕 주거나 사회생활할 때 차별하는 일은 금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차별금지법이 아주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지만 수많은 교회가 여전히 부흥하고 있다.

지혜롭지 못한 어머니는 아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다 너의 그런 행동 때문"이라고 말하고는 한다. 모든 것을 하나의 원인에 갖다붙이는 방식으로는 아이 행동을 교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승전 동성애, 기승전 차별금지법이라고만 외치는 일은 일부 사람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을 수 있겠지만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8. 차별금지법은 미래의 우리를 위한 법이다

사실 차별금지법은 결국 결국 우리를 위한 법이다. 우리가 지금은 다수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사회에서 소수가 될 수 있다. 청소년 중 기독교 신자 비율이 3% 미만이라 한다. 머지않아 기독교는 소수가 될 게 자명하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혐오하면서 왕따하고, 거래에서 불이익을 주고, 직장에서 차별 대우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없다면 말이다. 여당일 때 했던 말을 야당이 됐을 때 뒤집고 야당일 때 했던 말을 여당이 됐을 때 뒤집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처럼, 우리도 그때 가서는 말을 뒤집을 것인가. 항상 역지사지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다양한 사람이 서로 존중하며 살기 위한 최소한의 법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 유리한 법이다. 옛날 바울 사도가 로마법 보호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차별금지법 때문에 보호받을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소수가 됐을 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집을 매매하는 것이나 세입자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할 수 있다. 우리가 소수가 됐을 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차별을 받아 승진을 거부당할 수도 있고, 좋은 성적을 거두어도 입사를 거부당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그러한 행위 자체를 못 하게 돕는 좋은 법이다.

그래서 나는 동성애가 죄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다.


9. 학교에서 동성애가 나쁘다고 가르칠 수 없게 된다는 우려에 대하여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학교에서는 동성애를 비판하는 말을 전혀 할 수 없게 되고, 만일 이를 위반하면 처벌받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분이 많다. 그건 사실이다. 앞으로 우리가 학교에서 함부로 동성애에 대해 비판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다시 질문해 봐야 한다. 과연 우리가 믿는 바를 공적 영역에서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하는 게 옳은지 말이다.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개인의 신앙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은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다. 자신에게 기독교 신앙이 있고 예수님을 믿는 일을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하더라도 부하 직원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공적 영역에서 강요할 수 없다. 부대 지휘관이라 하더라도 다른 종교를 가진 부하들을 존중해 줘야 한다. 부대 내 다른 종교 시설물들을 함부로 처분해서도 안 된다.

내가 창조론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칠 수는 없다. 물론 진화론과 창조론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고 소개할 수는 있겠지만, 자기 신앙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우상숭배가 악한 일이라는 신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학교에서 불교인을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종교의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믿는 바를 공적 영역에서도 강요할 수 있게 허용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학교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면 우리가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개인의 신앙을 공적 영역에서 강요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나쁜 일이 아니다. 결국 모두에게 유익한 법이다. 

학교에서 동성애가 나쁘다고 가르칠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학교 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공개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아무리 성경에서 금하더라도, 이혼하는 것이 죄라고 가르칠 수 없고,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고 가르칠 수 없다. 우상숭배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가르칠 수 없고, 이자를 받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칠 수 없으며, 이슬람이 나쁜 종교라고도 가르칠 수 없다. 그렇게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다면, 타 종교가 대한민국 다수를 차지할 때 기독교는 사악한 종교라고 가르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이제 전적으로 사적 영역이다.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줄 때, 세상은 비로소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다. 진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국진 / 신학 박사, 전주 예수비전교회 담임목사, 전북극동방송 신앙 상담 프로그램 '아그런가' 진행자, 이국진TV 운영 유튜버, 각종 매체 칼럼니스트. 아가페 성경 편찬책임자를 역임했고, 저서로는 <아, 그런가?!>·<두들겨 보기>(WBS), <사람이 여물어 교회가 꽃피다>(홍성사), <사랑>(아가페북스), <예수는 있다>(국제제자훈련원) 등이 있다.

[출처: 뉴스앤조이] 동성애를 죄로 간주하는 나는 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지 않는가

2020년 8월 1일 토요일

부동산문제와 그리스도인_주택임대차보호법_김요한

1. 7월 30일에 계약 갱신 청구권과 전월세 상한제를 골자로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그다음날인 7월 31일부터 즉각 시행에 돌입하였다.

2. 이번에 통과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의 핵심인 '계약 갱신 청구권'은 건물 임차에 있어 2년 간 1차 연장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고, '전월세 상한제'는 기존 계약을 갱신할 때 임대료 상승폭을 최대 5%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다.

3. 새로 제정된 주책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되기 직전 혹은 직후부터 이 법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혹자는 이 법이 기존의 주책 임대(차) 시장 질서 및 관행을 붕괴시킬 것이라 주장하고, 서울 강북에 집을 한 채 갖고 있고 강남에서 전세를 사는 어떤 국회의원은 자신을 '임차인'이라고 주장하며 마치 이 법이 임차인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처럼 사자후를 토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단체로 모여 '왜 내 집에서 세입자를 마음대로 못 내보내냐?'는 시위를 하는 사람들조차 등장했다.

4. 더욱이 무슨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모임인지 뭔지 하는 집단에서는 아예 이번에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헌법에 규정된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위헌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니, 혹여라도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다 한들 그들이 추구하고 지지하는 나라의 모습이란 게 오로지 가진 사람들의 이익과 권리 보존에만 몰두하는 나라일 듯 싶어 정신이 아득해지기까지 한다.

5. 주택임대차보호법에 극렬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의 핵심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경제적 권리'가 자리하고 있다. 쉽게 말해 개인의 재산권을 왜 사회가 규제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사실상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도 안 된다. 국가 혹은 사회가 무엇이건대 개인의 돈을 세금이란 명목으로 뺏어가는가? 그렇다면 과연 이런 주장이 온당한 것인가?

6. 주택임대차보호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내가 뼈빠지게 일해서 천신만고 끝에 장만한 집"을 왜 사회가 이래라저래라 하느냐고 한다.
그런데 이 주장도 틀렸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뼈빠지게 일해서' 집을 장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까말, 우리 사회에서 순전히 자기가 노동을 통해서 번 돈만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있다면 몇 명이나 있을까?
유주택자들 대부분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샀거나- 이 경우 은행의 돈은 누구 돈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광의의 의미에서 은행의 돈 역시 사회 공금이다- 혹은 부모에게서 다양한 편법으로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식으로 집을 장만한 사람들이 '뼈빠지게'란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들은 정말 '뼈빠지게' 일하는 노동의 고통과 눈물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7. 한편으로 지금  이 시국에 부동산 문제로 온 나라가 양분되어 내전에 가까운 분열과 갈등을 노출하는 모습은 매우 안타깝다. 지각있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현 정부를 향해서 더 이상 실기하지 말고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건만 정부-여당이 미적거리다가 부동산이 겉잡을 수 없이 폭등하면서 사후약방문격으로 뒤늦게 팔을 걷어붙인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8. 그럼에도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동산 문제에 대해 내 나름의 생각과 입장을 밝힘으로써 몇몇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판단에 약간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이 글을 쓴다.
만일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이번에 시행된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경도된 현 정권이 개인의 사유재산권을 박탈하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9. 성경은 오로지 '영적' 문제만을 가르친다고 믿는 많은 보수적(근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달리 사회 문제, 정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당연히 그런 이슈들에 대해 다각도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성경이 사회 문제에 발언하는 것의 상당수는 '부동산' 정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공평하게 '배분 받아' 사는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성경은 고아, 과부, 나그네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땅을 확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심지어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모든 사람이 원래 소의 땅을 회복할 것을 사회적 구원과 윤리의 궁극적 목포로 제시한다(희년, 레위기 25:23 이하).

10. 부동산 정의에 관한 성경의 통렬한 가르침은 구약성경 예언서에 이르면 더욱 노골적인 양상을 띤다.
주지하듯이 구약의 예언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불의와 부패에 맞서 신적 계시를 선포하면서 투쟁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히 자기 시대의 이스라엘이 부동산 문제에 있어 극도로 타락했다고 비판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선언한다. 
가령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정의를 바라셨으나 압제뿐이었고,
의로운 삶을 바라셨으나 고통의 부르짖음뿐이었다.
오호라, 다른 사람들이 집과 밭을 차지할 수 없도록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더하여, 이 땅 가운데 홀로 살려 한 너희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이사야 5:7-8).

예언자 미가도 비슷한 말을 한다.

"그들의 침상에서 악을 계획하고 동이 트면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손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밭이 탐나면 밭을 빼앗고
집이 탐나면 집을 빼앗는다.
사람을 속여 그의 집을 빼앗고 그의 재산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계획했으니 너희는 이 재앙을 피하지 못하리라'"(미 2:2-3).

11. 통상 이사야와 미가를 가리켜 최초의 문서 예언자라 칭하는데, 우리는 이들 예언자들이 출현하던 시기에 이미 이스라엘 사회가 부동산 문제로 사회 양극화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구약 예언서(총 16개 예언서) 메시지의 핵심은 우상숭배를 질타하고 사회정의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은 부동산 양극화 문제를 한편으로 사회정의가 실종된 대표적 현상이자, 탐욕이란 우상숭배의 극단적 모습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은 실상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과 본질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12. 신약성경에 이르면 구약의 땅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가르침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수렴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 때문에, 신약에서 부동산 문제를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최소한 두 가지 점에서 신약성경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동산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준다.

첫째는 사도행전 2-5장에 나타난 것처럼 오순절 직후에 성령이 충만해진 초기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는 것이다. 즉 성령충만함의 공동체적 결과는 빈부격차의 완화 내지 해소를 위한 사회적 나눔에 있었다.
둘째는 초기 교회가 강력하게 견지했던 종말론적 삶의 모습이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어떠해야 할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지금부터는...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쁨에 넘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물건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세상 물건을 쓰는 사람은 그것들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그것은 이 세상의 현재 모습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7:29-31).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종말론적인 소망을 품고 있다면 이 세상의 위대한 가치(행복, 성공, 자랑, 안전에 대한 욕구)들을 과격하게 '상대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교훈한다.

13. 따라서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부동산 문제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는 비교적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사회에서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 불안에 대해 긍휼과 연민의 시선을 가져야 하며,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에 대한 탐욕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물론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집을 소유하거나 부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소유와 재산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비춰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히브리서 11:16의 말씀을 약속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고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두셨습니다."

만약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그리고 교회 중에 이런 신앙 가치관과 신념이 분명한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필경 우리 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엄청난 진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교회가 천민 자본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오로지 개인의 탐욕과 특권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도 진정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별하고 성찰하지 못한다면, 교회나 사회나 공히 미래가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_채영삼


포괄적차별금지법, 한 그리스도인의 답변



‘포괄적차별금지법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오늘 강의 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한다. 특히, 청년들의 고민이 많다. 나 역시 아직 고민을 계속하고 있지만, 부족한대로 내 의견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포괄적차별법의 문제는, 좌파 우파의 이념의 문제도, 진보와 보수의 대결도, 네오-맑시즘과 자본주의의 대결도, 친정부-반정부의 문제도 아니다. 이 문제를 이러한 프레임 안에서 다루는 것은 왜곡이다.

2. ‘법 제정’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이슈는,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도 아니다.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조장하고, 인권을 신장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어느 쪽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차별, 평등, 인권의 프레임에서 다루는 것은 착시현상이다.

3. ‘포괄적차별금지법’의 ‘법’으로서의 핵심 문제는, ‘자유’의 문제이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문제에 대해 ‘찬성’하고 ‘옳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하는 것처럼, 그것을 ‘반대’하고 ‘틀렸다고 믿는’ 신념, 그런 사상을 가질 자유, 그것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4. 동성애 등을 찬성하는 논리로서, “동성애자를 사랑한다면, 동성애를 죄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는 일부 현실적이나, 상식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어떤 사람의 의견과 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상식이다. 어느 쪽이든 생각이 다르다고 그 사람의 입을 막거나 차별할 수 없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다. 죄를 심판하시며 죄인을 구원하신다. 십자가는, 죄를 심판하고 죄인은 사랑하신 지혜의 나타남의 절정이요 증거이다.

5. 동성애를 찬성하는 논리로서, 보수교회는 ‘모든 죄를 지으면서 굳이 동성애만 최악의 죄처럼 말하는 것은 자격 없는 일’이라는 비난이 있다. 이 논리는, ‘동성애는 죄’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 주장은 위의 4의 주장과 공존할 수 없다.

6.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에 대한 개인의 자율성 문제는, 단지 성윤리에 그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이 문제가 서구 기독교 사회에 닥친 ‘성 혁명’의 문제일 때, 이 문제는 결혼, 가정, 교육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문제이며, 무엇보다 기독교 전통,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에 대한 도전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이슈이다.

7. ‘성경은 동성애를 모른다’는 주장, 즉, 성경에서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며, 19세기 이후 동성 인격 간의 애정을 포함한 성행위로서의 ‘동성애’는 성경이 ‘몰랐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동성애’에서도, 블랙수면방이나 게이클럽처럼, 단지 ‘동성 성행위’로서 동성애를 행하기도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고대의 노예제도에서 노예는 ‘재산’이지 ‘인격’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노예들은 주인이나 주인의 자녀들의 선생으로 존경받기도 하고, 가족 이상의 대우를 받기도 했다.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동성 성행위’이지 ‘동성애가 아니라는 주장은, 예컨대 ‘과식은 했는데 음식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주장처럼 추상적이고 현실성이 떨어진다.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의 자기 결정권’이나 ‘동성애’ 등은 명백히 부정적이며 인정되기 어렵다.

8. ‘동성애는 죄이나, 차별금지법은 찬성한다’는 의견은, 교회를 공적 영역에서 축소시킨다. 교회를 위한 법은 세상을 향한 양심의 법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상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고,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도 교회는 할 말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현재 차별금지법의 핵심이 ‘신념, 사상의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차별, 평등,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9. 교회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십자가의 공의와 긍휼의 복음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지 이론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이나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큰 어려움 없이 찾아올 수 있는 ‘품’이 되어야 한다. 중국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한 학생에게 아들이 있었다. 부모의 이혼 후에, 그 아들은 동성애에 빠졌다. 그 소문이 교회에 돌았고, 그 아들은 더 이상 교회에 갈 수 없었다. 그 어머니 학생이 한 말이 마음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내 아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죄라고 정죄하고서, 그 죄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하나님은 죄인인 당신과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동성애 커플이 들어온다면, 두 번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한 번에 다 깨닫고 회개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죄들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더 큰 죄들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는가? 동성애자,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청년들이 그저 머물 수 있는 교회의 품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죄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것은 무책임하지 않은가?

10. 차별금지법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를 법의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정치적 세력과 권력의 힘으로 풀려 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교회는 그런 방식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의 9번에서와 같은 노력이, 진정성을 보여주는 참된 해결책에 가까울 것이다. 더 나아가, ‘성 혁명’에서 ‘성’(gender)이라는 주제는, 단지 ‘성’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도대체, ‘몸’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권리인가? ‘나의 자궁은 내 것이기 때문에, 임신은 병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성경이 ‘몸’을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할 때,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할 때, 아니, 동양이나 서양 고대 사상에서 한 인간의 몸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했을 때, ‘몸’이란 무엇인가?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의 저자, 로드 드레허는, ‘성(性)의 형이상학’을 제안한다. 교회는, 이 기회에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고민하여 다루고, 다음 세대에게 성경적인 ‘육체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11. 만일, 동성애, 성정체성, 성적지향 등의 문제가 서구를 휩쓴 ‘성 혁명’의 일환으로서, ‘다원주의’의 폭넓은 도전 가운데 하나라면, 그 배후에는 불가피한 ‘영적 싸움’이 있음도 자각해야 한다. 다원주의의 사회적 모토는,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란, 이제 정상(正常)은 없다’는 것이다. 누가 감히 ‘정상과 비정상’을 결정하는가? 교회가 뭔데,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을 이야기하는가? 정상과 비정상은 사회적 학습의 결과이고, 결국 사회적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 각각의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비정상이 없다는 새로운 정상’은, ‘정상-비정상이 있다’는 ‘하나의 비정상’(예컨대, 기독교의 전통)만큼은 인정하지 못한다. 논리적 말장난이 아니라, 그것이 다원주의의 자기모순이며 독재성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것은 영적 전쟁이다.

12. 권위주의는 나쁜 것이다. 폐해가 많다. 권위주의를 타파하자고, 권위 자체를 없애버리면,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없앤 권력이 새로운 권위가 된다. 역설적이지만, 창조질서, 중세인들이 ‘합리적 직관’으로 알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적 직관’은 정상이 있고 비정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원주의자들도, ‘옳고 그름이 있다’는 그 사실, 틀렸다고 말할 때는 옳다고 믿는 기준이 있다는 그 사실, 기준, 곧 정상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질서 자체는 파괴할 수도 없고, 하려 해서도 안 된다. 남성 중심의 지배체제가 낳는 폐해가 심하다. 아직도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참으로 그러하다. 바로 잡아야 한다. 하지만 남성 지배체제의 폐해가 심각하다고 해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더 큰 폐해를 낳는다. 세상이 어둠인 이유는, 분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컨대 창조질서로 표명된 그 기준, 성경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 질서의 남용, 악용의 폐해를 바로 잡는데 역시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13. 법적인 해결도 중요하다. 하지만,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리가 없이 사랑은 사랑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하지만, ‘사랑 없이 진리를 말하는 것도 진리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랑 안에서’ 해야 한다. ‘진리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셋 중 어느 하나가 빠져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함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찾아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주께서 교회를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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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6일 월요일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런 저런 우려에 대해_김근주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런 저런 우려에 대해

- 아직 사회적 교회적 합의가 안 되었는데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불평이 있다. 차별금지법은 이미 2006년부터 발의되었다. 수 차례 발의되었지만, 그때마다 보수 기독교계가 나서서 계속해서 무산시켰다. 그리고 2020년이니 이미 10년이 넘어간다. 그 긴긴 동안 뭐하고 이제 와서 아직 합의가 안 이루어졌다니. 그것은 게으름이요 무지를 드러낸 소리일 뿐이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는 이들이 대략 90퍼센트 가량이었다. 결국 일부 보수 개신교를 제외하고 대체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 셈이다. 박근혜 탄핵은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정이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탄핵이 부당하다는 소리가 거의 20퍼센트 넘게 존재한다. 어떤 합의를 해야지 개혁과 변화가 가능할까.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성 소수자에 대한 합의라니, 왜 누군가의 존재가 사회의 합의에 의해 인정되어야 하는가? 왜 보수 개신교계가 누군가의 성별 정체성을 합의해 주어야 하는가? 왜 보수 개신교계가 성별 정체성의 다양성에 대해 합의할 때까지 나머지 사회 전체가 기다려야 하는가? 이미 많은 소리가 있어 왔고, 많은 괴로움이 보고되었건만, 이제 와서 저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무관심과 게으름 말고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으로 차별금지법 반대하는 이들은, 기존 교회가 성 소수자를 환대하지 못했음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을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차별금지법 조차 반대하는 처지에, 대체 기존 교회는 그들을 환대하지 못했던 과거를 어떻게 반성하자는 것일까? 오직 립서비스일 따름이다. 이 문제와 연관해 계속 반복되는, '죄악은 반대하되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이 왜 허망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 차별금지법의 네 영역 가운데 고용 영역이 있다. 그래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가 교회 직원에 지원했을 때 그 법으로 인해 차별하지 않아야 해서 뽑아야 한다는 어려움을 우려하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가령, 불교인이 교회 직원을 뽑는 데에 지원할까? 그 곳이 교회임을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지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렇더라도 현재 그 사람을 종교 이유로 안 뽑거나 불이익을 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얼마나 될까?
마찬가지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여기는 교회 직원에 동성애자인 분이 지원할까? 어쩌면 누군가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특수한 사례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사유가 되기는 어렵다. 저러한 사례는 달리 다루어져야지, 저런 사례를 끄집어 내어 차별금지법을 우려하는 것은 부적합하다. 저런 가능성으로 인해 우려한다면, 지금 현재 보수 교회에서 자행되는 극심한 차별과 혐오 발언의 현실에 대해 더 깊이 개탄하는 것이 먼저다.

- 교회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 설교 못하게 될까봐 어지간히도 염려한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이 목사들이 그야말로 순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저런 소리를 설교랍시고 하게 될 현실이 떠올라 끔찍하지만, 그렇게 설교할 자유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의 영역은 교육, 고용, 재화와 서비스, 행정 서비스 영역이기에, 종교 시설 내에서의 설교나 가르침은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가령, 기독교 학교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라고 가르칠 수 없게 될까봐 우려하는 소리도 있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제발 기독교 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기를. 대체로 저런 기독교 학교는 ‘창조 과학’이라는 사이비 가르침을 확신에 가득 차서 가르치곤 한다. (나는, ‘창조 과학’ 옹호하는 무리와 ‘동성애 반대’하는 무리 사이에 교집합이 상당히 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중대형 크기 교회를 자기 새끼에게 물려준 교회는 대체로 저 교집합에 속할 것이라는 심증이 있다^^) 어떤 기독교인은 ‘창조 과학’이야말로 ‘성경적’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시대는 대체 무엇이 성경의 가르침과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기독교 학교를 설립한 이들이, ‘우리가 이 뜻으로 만들었으니 우리는 이 뜻으로 갈거야’라고 우겨대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적 동기에서 나온 확신이라기보다 ‘이 학교는 내꺼야’라는 그릇된 소유 의식일 가능성이 크다. 

기독교 정신의 근본은 사랑, 섬김 같은 가치, 혹은 예수님의 표현대로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 23:23),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이다. 이러한 가치를 결코 양보할 수 없되, ‘창조 과학’이니 ‘동성애에 대한 견해’는 논의될 문제이지, 일방적으로 선포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 짐승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 이들의 행동으로서 동성 성행위를 규탄한 바울의 로마서 1장과는 달리, 예수를 내 구주로 고백하는 동성애자가 존재하는데, 바울을 근거로 ‘동성애는 죄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며 문제 제기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학교에서 ‘동성애는 죄악이다’ 못 가르칠까봐 우려하는 것 역시 지극히 협소한 우려이며 부당하기까지 한 우려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의 존재를 두고 죄악이라고 규정하는 말을 못하게 될까봐 저토록 우려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기독교 학교의 학생 중에도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한 성 소수자가 적은 숫자이지만 있을 수 있는데, 그를 향해 ‘동성애가 죄악이다’라는 식의 가르침이 대체 무슨 놈의 자유인가. 그런 자유를 잃게 될까봐 그리도 두려운가. 기독교 학교의 정말 좋은 점은, 일방적 전달과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 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도록 돕는 것, 그래서 언제건 우리가 중요하다 여겼던 것들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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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9일 화요일

교회는 정부의 방역지침을 지지해야 한다


<교회는 정부의 방역지침을 지지해야 한다>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김병훈 교수 -

문재인 대통령은 20일에 일부 교회가 예배를 열겠다는 교회들이 많아 걱정이라고 말하며, 예배를 자제하는 교회의 협조를 구하였다. 그러면서 “종교집회에 대해 박원순 서울 시장과 이재명 경기 지사가 취하고 있는 조치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중앙정부도 “지자체의 조치를 적극적으로 뒷받침 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환으로 정세균 국무총리는 21일에 “집단감염 위험이 높은 종교시설과 실내 체육시설, 유흥시설은 앞으로 보름 동안 운영을 중단해 줄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담화는 단순한 권고만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총리는 “불가피하게 운영할 경우에는 시설업종별 준수사항을 철저히 지켜야” 하며 “준수사항을 지키지 않을 경우 직접 행정명령을 발동해 집회와 집합을 금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정총리의 담화는 앞서 발표한 지자체들이 집단감염 예방을 위해 교회, 다중 이용시설 등에 예배나 영업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이를 위반하여 확진자가 발생하면 방역, 치료에 대한 구상권 청구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한 것과 내용상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1. 교회가 하지 말아야 할 일
그러면 교회는 이러한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의지와 행정권 행사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겠습니까? 가장 염려스러운 반응은 정부와 지자체의 발표에 종교의 자유를 앞세워 반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보여야 할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대략 다섯 가지 점에서 그러합니다.

첫째는 정부와 지자체의 의지가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담화나 발표는 지역감염이 더 심화되기 이전에 시민들을 감염에서 보호하고, 조속히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행정적 노력의 하나일 뿐입니다. 이러한 일에 나태하거나 무능하다면 오히려 정부나 지자체는 시민으로부터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정부나 지자체가 보호할 시민의 안녕과 사회 일상의 회복 안에는 교회의 예배활동의 안전한 보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맥락에서 보면 정부와 지자체의 조치는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민적 질서를 유지하여 교회의 종교 집회가 평안히 유지되도록 하는 정부가 해야 할 의무(레 24:16; 왕하 18:3-4; 대하 34:33; 스 7:23,25-2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3.3; 칼빈, 『기독교 강요』 4.20.2-3)를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교회가 정부와 지자체의 방역 지침에 성실히 협조하는 일은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일에 공의를 유지하며 공동체의 안전을 위하여 정부에게 시민적 권세를 주셨습니다.(롬 13:1-2; 시 82:1,6; 요 10:35; 칼빈, 『기독교 강요』 4.20.1) 이러한 맥락에서 정부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기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정부가 행하는 시민적 선을 위한 행정상의 임무와 실행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하여야 합니다.(롬 13:4-5; 벧전 2:13-14,16;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0.4; 칼빈, 『기독교 강요』 3.19.15) 이러한 협조는 하나님께 뜻에 순종하는 일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일입니다.

넷째는 교회가 정부나 지자체의 담화나 권고에 대해 반발하고 방역 지침을 지키지 않은 채 예배집회를 강행하여, 감염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이 혹시라도 발생한다면, 교회는 이웃 사랑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일뿐더러, 포괄적 의미에서 이웃의 생명을 해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감염의 문제는 교회에게만 해당되거나 교회 내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 문제입니다.

다섯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여야 할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신자가 하나님께 공 예배를 드리는 일을 앞세우지만, 앞서 말한 네 가지 내용과 관련하여 균형 있는 이해를 갖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온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스스로 장애물을 놓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정부나 지자체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감염이 증폭되는 행위를 한다면 시민사회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 교회가 해야 할 일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크게 네 가지 사항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방역을 위해 수고하는 정부나 지자체의 노력을 지지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협조의지를 밝히면서 방역 지침을 지키는 데 필요한 물적, 인적 도움이 있다면 정부나 지자체에 요청을 하여 정부와 교회가 협력관계를 갖는 일입니다.

둘째는 각 교단이 총회적 차원에서 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대외 성명을 발표하고, 지교회로 하여금 정부의 대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요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는 각 교단은 총회나 노회적 차원에서 지교회 가운데 이러한 지침을 지키며 공예배를 하거나 온라인 영상을 송출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지교회가 있는 지를 살펴, 도움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는 교회는 이번 사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위하여 희생적 사랑을 실행하며, 이를 위하여 총회나 지교회적으로나 또는 교인들 개인적으로 봉사하는 일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살펴본 바처럼, 교회가 정부나 지자체가 집회금지나 집회중단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권고를 강력하게 하는 것에 대해 불필요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거나 반발을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옳지 않으며, 또한 지혜로운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부나 지자체는 무조건적으로 집회를 제한 또는 금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지자체는 방역 지침, 또는 시설업종별 준수사항을 제시하면서 이것을 지켜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부나 지자체는 법적으로 가능하다면 일체의 종교집회를 아예 금지하고 싶은 숨은 의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정부나 지자체가 집회를 열고자 할 경우 조건을 지키라는 제한을 두고 있다는 것은, 정부나 지자체가 현 상황에서 종교의 집회를 전면 금지할 상황적 명분이나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이러한 기회에 도리어 시민적 선을 잘 준수하고 영적 선을 도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을 나타내고, 교인들이 복음이 우리의 참 소망인 이유를 견고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20. 3. 2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0026

2018년 6월 14일 목요일

오늘날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 실천_김회권

 
오늘날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 실천
김 회 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오늘 우리의 주제는 두 가지 질문 속에 함축되어 있다.
첫째, 과거와 달리 오늘의 시대에 요구되는 기독교회의 정치실천은 무엇인가?
둘째, 오늘의 기독청년, 대학생들이 정치에 대해 가져야 할 관심은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은 한국교회에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실천이라는 과제를 이해하기에 앞서 답변되어야 할 질문들이다. 이 두 질문에 대한 잠정적 답변부터 제시하고 강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첫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정치적 관점을 깊이 이해한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예수처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왕성하게 선포하고 그 복음적 진리를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명확한 정치실천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섬기는 지도자들을 배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확장하여 가는 길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천적인 정치실천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것이다. 기독청년 각 자가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직업생활의 영역에서 왕같은 제사장역할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 정치참여다. 넓은 의미의 정치활동은 모든 직업 및 사회활동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이 강의안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실현에 대한 생각을 네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정치란 무엇인가?
둘째, 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하는가?
셋째, 성경적 정치실천이란 무엇이며, 그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넷째, 정치발전에 대한 기독청년들의 참여가능성은 무엇인가?
에 대한 논의로 구성될 것이다.
 
1.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한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회의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통괄적으로 조정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정치의 목적은 재화와 용역의 적절한 배분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마찰과 갈등을 최소화하는 데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는 민주주의 정치다. 민주주의 정치는 데모스, 국민들”(세금을 내고 징병 의무를 지니는 자유시민들)들의 이해를 집중적으로 대변하는 정치다. 여기서 말하는 국민들은 단일한 구성체가 아니라 복합적인 계층과 계급을 망라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가리킨다.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적 원리의 하나인 견제와 균형이다. 권력분산을 통한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갖고 민주주의 사회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 계급이나 계층의 자원 및 재화, 용역의 독점욕과 이기심을 억제하고 경계한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원리는 공동체 구성원이 그 가치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신봉하고 수호할 의지로 똘똘 뭉쳐 있지 않다면 부서지기 쉬운 유리잔과 같다.
현실 사회에서 정치는 거의 도덕적 슬럼지대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정치는 비린내나는 이기심과 이익, 탐욕과 각축을 다루는 일이기에 정치가는 도덕적 윤리적 청정상태를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정치는 항상 전쟁분위기와 같은 긴장과 적의를 타고 항해하는 배와 같다. 지방선거나 대선을 앞두고 우리 나라는 정치열기로 거칠게 가열되는 양상을 보인다. 아무리 정치에 무관심하려고 해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집안까지 차고 넘칠 수 있는 거칠고 위협적인 정치격랑이 드세게 일고 있다.
최근 우리 나라의 정치도 왕성한 민주주의 정치의 빛과 그림자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정치는 각축, 상호비방, 비난과 비판, 야유와 조롱 등 지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게임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이 개인과 집단/계급/계층의 이기심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상호 정쟁과 갈등은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정치는 진화되어야 할 여지가 적지 않다. 어찌 보면 최근 우리 나라의 정치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는 절차상 더디고 답답한 과정을 거치기도 하고 무리해 보이는 쟁점을 놓고 각축하는 일을 자주 연출한다.
왜냐하면 어떤 정파나 개인도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탐욕과 권력욕, 특권의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정치는 항상 시끄럽고 번잡스럽다.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고, 자유와 자유가 대립하는 곳이 정치다. 최고 헌법 기관인 대통령도 자신의 권리주장을 위해서 헌법소원을 낸 판국이다. 이처럼 정치는 시끄럽고 너저분한 하수구 도랑같은 악취를 풍긴다. 왜냐하면 정치는 인간의 거의 억제되지 않는 원초적 집단적 계급적 이기심을 대변하는 전사들의 각축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외양이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환멸이나 실망을 정당화하며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참 태도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미 용인되고 있는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는 개인과 집단(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상호간의 끊임없이 깨어있는 상호감시작용을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 정치영역에서의 각축과 경쟁은 이기심의 억제와 권력감시 차원에서는 순기능을 보여줄 때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한다면 정치 또한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각성된 신앙양심에게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정치 분야도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입문해야 할 영역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2. 그리스도인과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 현실과 당위 사이에서-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자체의 도덕적 애매모호성과 열악성 때문에 정치를 신앙적 실천의 영역에서 제외하려고 노력해 왔다. 특히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기독인들의 정치참여가 절실히 요청될 때마다 경건주의적인 정적주의(pietistic quietism)나 예언자적 비관주의(어차피 역사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야 되고 하나님의 불심판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로 도피하여 너저분해 보이는 현실정치를 강 건너 불 보듯 하였다. 그나마 이런 소극적 불참은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에 아부하고 결탁되어 가장 나쁜 형태의 정치참여를 실행해 온 보수주의 교회의 행태에 비하면 한결 낫다. 무조건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과 결탁하는 것은 그 세력이 옳건 그르건 간에 항상 조심해야 할 정치참여다.
물론 가장 나쁜 정치참여는 악한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의 정치원리를 저버리는 경우다.
우리가 오늘 주요 과제로 설정한 것은 경건주의적 정적주의에 빠져 정치의 중요성을 몰각하고 있거나 세상 정치에 무관심한 그리스도인들을 정치에 연루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는 더럽다고 피해갈 영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양심과 고상한 윤리, 영적인 권세와 선교열정이 과시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창조시 주셨던 문화명령에 대한 순종의 일환으로 정치에 참여하여야 한다. 창세기 1:26-28(2:15)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고 피조세계를 다스리라고 명령하신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다스리는 일, 에덴 동산을 관리하고 지키는 일은 아담에게 본원적으로 부여된 사명이다. 여기서 다스리는 일이 아담의 원초적 사명이다. 아담은 동물들의 세계(야수성, 본능성)를 다스려야 할 사명이 있다. 정치는 인간 안에 내재된 동물스러움을 다스리는 일이 아닌가? 따라서 정치는 잠재적인 무질서와 혼돈세력을 다스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해야 할 사명 수행의 일환인 셈이다. 모든 직업 활동이 이런 넓은 의미의 정치참여다.
둘째, 아담의 범죄로 이 세상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땅으로 돌변하였다. 인간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죄인인 인간은 다른 죄인들의 최악의 타락사태를 막기 위하여, 정치에 참여하여야 한다. 야수적 본성이 충돌하는 정치현장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의 정치는 인간들이 더 나쁘게 타락하지 못하도록 막는 억제와 정죄기능의 율법 역할을 하는 셈이다. 공권력을 가진 국가나 정부의 공무원으로 취직하는 것은 이런 의미의 정치참여다. 정권 획득이나 유지를 위한 파당적 정당활동만이 정치참여가 아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참회하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활동에 참여하여야 한다.
셋째,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를 위한 도구로서 정치활동에 참여하여야 한다. 이 때 정치권력 획득 과정에 참여하기 위하여 선거에 참여하는 것, 피선거권자가 되는 활동 등이 전문적인 의미의 정치참여로 간주된다. 이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현실 정치를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근사치적으로 수렴하는 정치적 실천에 투신하여야 한다(비스마르크의 조롱: “나는 산상수훈처럼 정치할 수 없다.”).
 
이런 삼중적인 의미의 정치참여의 모본을 보이신 분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성경적 정치실천의 전범(典範)이 된다.
 
3. 성경적 정치실천이란 무엇이며, 그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실상 우리가 주()와 스승으로 섬기고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가 당대의 정치적 갈등과 분쟁의 한 복판에서 격랑을 일으킨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상 권력과 정치에 대한 근원적 공격이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인간의 정치의 소멸을 가져오기 때문에 모든 세상 권력자들은 거의 필사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저항한다(정사와 권세, 보좌와 주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통치로 세상권력에 희생당하고 죽임 당한 사람을 구출해 내는 대항정치운동이었다. 마귀의 권세에서, 질병의 권세에서, 그리고 악한 율법체제와 억압적 종교체제로부터 사람들을 구출해 내어 하나님의 영의 자유 속으로 초청하려는 운동이었다.
예수의 공생애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확산시키는 운동으로서 당시의 주류 정치세력들의 통치 정당성을 빼앗아가버리는 아주 위험하고 거룩한 도발이었다.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외치면 외칠수록 세상 나라들의 권세는 쇠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그의 대적들은 원래 서로 적대적인 원수 사이였으나 "예수"라는 엄청난 하나의 공공의 적을 대면하고서 동지처럼 단결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운동은 당대의 권력자들과 지배세력들과 충돌하였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 소식 때문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다"는 예수의 선언은 하나의 중립적인 사실을 알리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거짓된 왕들을 보좌로부터 끌어내리는 정치운동이요, 앙시엠레짐(구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운동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장로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헤롯당, 열심당원, 사두개인, 로마 총독부 등의 집중적이고 통일된 저항과 박해를 초래하게 된다. 이 여섯 개의 정파들과 집단들은 원래 각각 사이가 나쁜 세력들이었으나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는 한 패거리가 되었다. 예수님은 온순한 인격과 얌전한 매너(예수님에게서 기대하는)로 그들의 적대행위와 저항을 넘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대적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한결같이 권력의지의 화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종교와 정치의 권력의 힘에 의지하여 사람을 지배하고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세력들이었다.
이에 비하여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권력의지의 영원한 포기였다(2:6-11). 자신을 위한 권력을 영원히 포기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권력의지의 포기는 유대 광야에서 마귀와 백병전을 벌일 때 이미 실현되었다. 마귀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세에 정의는 특별한 권능의 남용, 특별한 보호의 향유, 그리고 부귀 권세 영화의 독점을 의미하였다. 모든 지상의 세속권력은 이 세 가지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부당하게 행사되는 지상 권력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왜냐하면 마귀의 본질은 권력의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세속적 권력자들은 빼앗길 때까지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지는 못한다.
권력의 마귀적 속성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통제하는 일은 12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조종하는 것처럼 현기증 일으키는 고난도의 기술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권력포기와 비움의 길이다. 유대 광야에서 40일간 굶주리면서 하나님 아들, 즉 메시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직접 시험하였다.
여기서 시험의 본질은 권력을 휘두르는 메시야(카리스마, 기적 능력, 특권적 권능 호소형 메시야)가 될 것인지 아니면 비권력적 메시야가 될 것인가를 결정짓는 시험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가? 마귀와 예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정의가 다르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특혜적 권능과 권력을 휘두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예수님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됨은 굶주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여 복종함(복종함으로 원기를 얻음), 특혜 대신 비특권적 겸손, 그리고 부귀영화권세 대신에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위한 자기희생(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김)을 의미하였다. 예수님에게 아들됨은 배타적인 충성심이었다. 여기서 그의 일생을 특징지운 예수님의 신적 겸손과 자기비하가 시작된다. 마귀에게 절하지 않은 결단이 그로 하여금 권력자형 메시야의 길 대신에 수난과 모욕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메시야가 되게 하셨다.
 
이전부터 우리나라는 엄청나게 높은 도덕적 수준과 국민의 힘을 무섭게 자각하는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다. 이제 권력이 특권과 반칙적 혜택과 탈법적 권위남용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전세계적인 추세다. 앞으로 세계는 민주주의 단계를 지나 예수 그리스도적인 기준에 못 미치는 자들을 정치 모리배요 협잡꾼 혹은 마귀의 꼭두각시로 금방 식별하는 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마귀적 지도자와 참 지도자를 지혜롭게 분멸하는 메시야적 백성 공동체도 나타날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는 정쟁과 권력투쟁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정치의 빛 하에서 분석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을 빼앗기도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도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비권력적 섬김이야말로 예수님의 섬김 지도력에 접근하는 지도력이다. 권력의 정상에서 자신을 냉정하게 살피고 엄격하게 다그치면서도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멸사봉공하는 지도력이 출현할 때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분투하여야 한다.
많은 권력자들이 권력의 전성기에서 낙마하고 추락한다. 권력의 마귀적 속성에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권력의 기만적 속성에 대책 없이 당한다. 권력의 마귀적 속성에 깨어있는 사람은 권력을 봉사의 도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악한 지도자들과 부패한 왕후장상들이 정치권력의 정점에서 앉아서 멍한 상태에서 겪는 마귀의 시험을 예수님은 유대 광야 모래 바람 맞으며 감당하신 것이다. 자기비하의 힘으로 마귀를 이겨냈다. 겸손의 힘으로 마귀를 결박하였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머문다. 예수님의 말의 위력의 그의 극단적인 겸손과 자기비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공생애 동안 내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그의 권력의지의 포기에서 용솟음치는 말씀과 겸손한 섬김행위 속에서 치료의 능력을 방출하였다. 유대 광야에서 마귀(권력의지)의 시험을 이긴 예수님이 골고다 십자가상의 마귀의 조롱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모든 권력자들이 예수님의 자기비하와 자기 비움의 결단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선포가 그리스도인의 핵심적 정치참여인 셈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권력포기를 구현하는 지도자들이 섬기는 정치가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4. 정치발전에 대한 기독청년들의 참여 방법은 무엇인가? - 섬기는 지도력의 배출을 통한 한국교회의 정치참여
이제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방안을 생각해 보자. 모든 그리스도들에게 기대되는 정치실천은 두 가지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전도 활동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섬기는 리더로서의 헌신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외에 비상시국이 아닌 한(독일 나치하 혹은 일제 치하) 정치권력을 획득할 목적을 염두에 둔 채 한국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특정한 정치활동을 벌여서는 안 된다. 다만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부름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상생활 및 직업영역에서 섬기는 리더의 삶을 살아야 한다. 결국 한국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길로서 앞으로 더 많은 전문적 연구가 필요한 분야가 지도력 양성 및 배출 분야다. 그래서 요즈음 생각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심각한 화두(話頭)어떻게 하면 성경적인 지도자 혹은 지도력을 발굴하고 배출할 수 있을까?”이다.
리더란 일정량의 권한과 권위를 위임받아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지도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리더는 자신의 지도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다. 가정의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종업원을 거느리는 가게 주인, 교사, 공무원, 조직과 위계사회에서의 각 단위의 책임자, 장관, 그리고 대통령 모두가 리더다.
위임받은 권력과 권한()의 크기와 범위가 차이가 날 뿐 위에서 열거된 모든 사람들이 리더다. 리더는 자신의 권한과 권위()의 한계 안에서 자신의 지도력(방향 定位)을 발휘하여 조직 혹은 공동체가 합의한 목표를 성취시키는 촉매자 역할을 감당한다.
모든 리더들은 제한된 권위와 권력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일정량의 권위와 권한을 부여한 조직/혹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평가와 감시에 늘 노출되어 있다. 지도자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타당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그 지도자에게 권한과 권위를 위임한 조직/혹은 공동체가 우선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검증 장치가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단위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위임된 권력과 권한을 초월하여 과잉 지도력을 발휘하려는 유혹에 시달린다.
과잉 지도력은 대부분 지도자 자신의 관심과 이익을 자신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관철시키거나 추구하려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반()유기체적이고 반()공동체적인 현상이다. 자신이 위임받은 권한과 권위 경계 너머까지 지도력을 발휘하려는 지도자는 지도자의 범주를 이탈하여 소위 지배자가 되려는 사람들이다.
지배자는 지도자가 부패하고 타락한 경우 출현하는 권력강제자(power enforcer)이며 권력남용자(power abuser). 성경의 오랜 전통에서 보면, 하나님의 권한과 권위를 위임받은 지도자들(, 방백,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은 하나님의 상시적(常時的)인 감시와 감찰 앞에 벌거벗은 존재처럼 노출되어 있었던 존재였다. 전제 왕권을 휘두르던 왕들도 하나님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파견된 하나님 나라의 전권대사인 예언자들의 탄핵과 비판 앞에 전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왕상 22; 7:10-17).
한국교회가 지도자를 배출하려고 투신할 때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지도자는 하늘이 낸다는 운명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문제다. 실상 하늘이 내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리더는 훈련과 오랜 교육, 연단과 실습을 통해 양성되는 산물인 것이다.
 
1. (1) 과연 지도자는 과연 하늘이 내는 것일까?
우리 나라는 지도자 복이 없다는 탄식어린 말을 자주 듣는다. 사실 돌이켜 보면, 2,000년 역사 동안 우리 나라에 자랑할 만한 지도자가 많지 않았고, 현대사 반세기 동안에는, 더더욱 민족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지도자가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많은 경우 민족적 지도자로 등장했던 사람들이 악명높은 지배자로 단죄되며 역사의 무대로부터 퇴장당하곤 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우리는 우리 나라를 국민들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세계 공동체의 발전에 창조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내는 데 쓰임받을 만한 지도자들을 거의 갖지 못하였다. 왜 우리는 긴 역사에 비하여 민족의 사표와 귀감이 될 만한 지도자적인 인물들을 갖지 못하였을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운명주의적인 세계관이 그 중의 하나라고 본다. 그 동안 국가적 사표가 될 만한 지도자가 등장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지도자란 하늘이 낸다는 식의 막연한 운명주의적 세계관이 우리 국민들의 의식을 지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향도(嚮導)할 지도자적인 인물들이 하늘로부터떨어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그런 지도자적인 인물들을 미리 발굴하고 길러낼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한 시대를 넘어 통할 수 있는 깊은 경륜과 세계적인 안목을 갖춘 지도자는 갑자기하늘에서 떨어지는 방식으로 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지도자를 길러내는 시대, 즉 우리 시대의 중심과제를 능숙하게 다루고 한 시대를 앞서가는 영적 경륜을 구비한 지도자들을 주문생산(注文生産)해 내야 하는 시대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경륜과 실력과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구비한 지도자는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생산되지 않고 가내 수공업적인 생산 양식으로 양성된다. 지도력은 이상적인 모범을 통하여 모방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도자 배출은 가내수공업적인 수작업(手作業)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그것은 시간과 정성이 투입되는 공정(工程)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적인 공평과 정의가 정착된 공동체를 창조하고 운영할 지도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투신하는 인재양성소가 되어야 한다. 이사야 58:12은 이런 비전을 고취시켜 준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이사야 58:12). 한국교회는 오랜 역사 동안에 걸쳐서 파괴된 기초(“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다시 쌓고 무너진 데를 보수하며 인적이 끊어진 황무지를 사람 살 만한 땅으로 만드는 일에 투신하는 기관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럼 역대의 파괴된 기초란 무엇인가? 역대의 파괴된 기초란 민중수탈형 엘리트가 국가 및 사회의 중심기관을 장악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현장을 의미한다.
민중수탈형 엘리트는 자신의 출세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부귀영화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다. 어느 때나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비하여 악하고 어그러진 지도력의 최대 피해자들은 권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할 만한 조직력도 어떤 언로(言路)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릇된 지도자들이 만들어내는 권력강제와 권력남용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한국교회는 이제 민중수탈형 엘리트의 역사를 끝내고 목민애중형(牧民愛衆型)(민중을 섬기고 무리를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겨레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비젼(vision)에 투신하여야 한다. 목민애중형 지도자들은 자신의 출세와 권력을 무리들(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고 권력을 비절대화하고 그것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을 축소하고 부정하는 지도자들이다. 이런 지도자들은 마치 화학원소 운동에서 에너지 준위가 더 큰 궤도를 돌던(K, L 궤도) 원소들이 에너지 준위가 작은 궤도로 진입하면서 열과 빛을 발산하듯이(자기부인/자기축소의 결과),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축소시킴으로써, 일종의 구원 에너지를 방출한다.
 
 
2. (2) 성경적인 지도력의 근거와 자기 제한-사사(師士) 시대에서 왕정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성경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신정통치)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지도력을 대행하는 대리자다. 한 공동체의 성장과 번영에 결정적인 조타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사무엘상 8-12(8:6-18)에는 인간 왕정이 시작되는 경과가 소개되고 있다. 인간 왕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등장하기 전에는 사사(師士)”라고 불리던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지도력을 행사하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다. 하나님은 사사(師士)”라고 하는 아주 제한적인 권위만 행사하는 지역지도자들을 통하여 신정통치를 실행하셨다. 이런 사사와 달리,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상대로 징병과 징세를 강요할 수 있는 전제적(專制的) 지배자로서의 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왕이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위협하는 존재로 소개된다(삼상 8:6-18[특히 11-18]; 삼상 12:12-13).
 
11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12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13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14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15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16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17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20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 8:11-18)
 
사무엘은 자신과 같은 순회 지도자(사사)에 비하여, 인간 왕은 거의 전제권력을 소유한 지배자로 발전될 위험이 있음을 알린다. 하나님께서도 인간 왕정은 신정통치의 이상을 배척하는 것이며 중앙집권적 권력을 행사하는 인간 왕의 출현은 신정통치의 이상-제한적인 권위와 권력을 위임받은 사사의 다스림에 비하면-을 거부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6-7).
그래서 특히 신정통치의 이상(理想) 대신에 등장한 인간 왕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징발한다는 점이 부각된다. 궁궐을 유지하기 위한 인력동원,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광범위한 물자징발은 사사시대의 신정통치적인 이상에 비하면 엄청난 재앙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가장 역설적인 음조로 들리는 말이 18절이다.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점이 바로 모든 인간 지도자들을 세울 때 야기되는 항구적(恒久的)인 위험요소다. 옛날 사사들에 비하면 인간 왕은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 권위를 위임받은 전시(戰時) 대비 지도자였기 때문에 지배자로 변질될 가능성이 많은 존재였다(삼상 8:19-20; 삼상 12:14-15). 이런 전제권력을 행사할 지도자의 출현이 이스라엘 사회에 끼칠 악영향을 사무엘 선지자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왕정이 도입된 이후 이스라엘의 왕들은 권력남용과 권력강제를 통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유혹 앞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대신하는 과도기적 피위임자(被委任者)들임에 불과하였지만, 일단 한 번 선택되자마자 그들의 위임받은 지도력을 전제권력으로 변질시킴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백성들의 우환거리가 된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지도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이 지도력 행사의 실패 때문에 야기된 온갖 시련과 좌절에 직면하고 있다. 돈과 권력남용, 도덕적 및 윤리적(성적인 부패) 부패 등으로 세계의 지도자들이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참된 지도자와 참된 지도력을 갈구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때가 될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어쩌면 그들의 우환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지도자들을 뽑는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일반 사회에서도 통할 수 있는 지도력의 전범(典範)을 성경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보편적인 지도력은 어떤 것일까?
 
3. (3) 성경적인 지도력의 전범(典範)으로서의 메시야적 지도력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일관되어 흐르는 이상적인 지도력은 메시야적인 지도력이다.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자세히 예수가 행사한 지도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혹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다. 메시야(그리이스어로 메시야가 그리스도로 번역)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도 예수의 중심 메시지는 메시야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친정(親政)통치 시대의 도래였다.
예수님은 메시야인 자신을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주제아래 종속시켰기 때문에, 즉 그 만큼 자신을 감추고 부인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신약의 사도들은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 철저하게 복종시킨 그 나사렛 예수가 구약시대가 그토록 오랫동안 예언하고 고대해 오던 메시야임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이상왕(메시야)의 관점에서 인간 왕들(지도자)의 통치행위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예수님은 인간 왕에게 위임된 지도력이 필연적으로 지배력(권력남용과 권력강제)으로 변질된 점을 직시한다.
예수 당시의 세계는 로마제국의 가이사(Caesar)의 권력(공포, 권력, 폭압)강제와 권력남용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좀더 국지적으로 보자면, 팔레스틴은 헤롯 가문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권력강제와 권력남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모든 단위의 인간 왕(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권한사용의 한계를 넘어 권력남용과 강제적인 사용에 경도되었음을 간파한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이런 권력남용과 권력강제로 특징지워지는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표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스승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도외시한 채, 영광중에 인자의 나라(메시야의 나라)가 임하면, 왕이신 예수님의 옆자리에, 즉 큰 자리에 앉으려고 각축하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예수님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섬기는 지도력의 본질을 가르치신다.
예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곧 하나님 나라가 영광과 권능 중에 임할 때, 즉 예수가 왕으로 등극할 때, 자신들을 왕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청탁하자, 10제자들이 격분한다. 이내 제자공동체는 누가 크냐?,” “누가 왕이신 예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을 것인가?”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 이 다툼의 상황 속으로 예수님이 끼어든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 자신의 지도력, 즉 섬기는 지도력(牧民愛衆型 지도력)의 본질을 보여준다.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35-45)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표현은 예수님은 당시의 로마제국과 헤롯 가문의 통치 본질을 권력강제적 통치(kata-kurieuaw[임의로 주관])와 권력남용(kata-exousiazaw[권력 남용])이라고 정의하는 장면이다. 41절의 소위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라는 표현은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다. 원전의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다: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예수는 권력강제와 임의주관(권력남용)을 통하여 지배하는 사람들은 소위(순전히 외견상의) 집권자들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실제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즉 다스리지 못한다. 그들은 강제로 지배하고 억압적으로 내려 누를 뿐이지, 마음의 승복이나 복종을 얻어내지 못한다. 예수는 자신이 대안적인 지도자라는 자의식을 공적인 맥락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다. 예수는 에스겔 34장의 빛 하에서 자신을 선한 목자(“자신이야말로 선한 목자라고 규정한다.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0-15).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그가 목자없는 양같은 무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기를 자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마가복음 6:34). 결국 예수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주장하는 성경적인 맥락을 이해하려면, 에스겔 34(특히 2-24)을 살펴보아야 한다.
 
2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4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5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6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8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9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찌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1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2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13 내가 그것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14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1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찌라. 16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찐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22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같은 무리들에 대하여 애끓는 연민과 긍휼을 느꼈다. 법과 체제 바깥으로 밀려난 자, 그 당시 정치-종교 기존체제 안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채 방치된 대중들, 그들이 예수님께 흡인된 무리였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선한 목자로서의 감수성을 불러일으켰고 예수는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의 다스림 안으로 초청하였을 때, 이미 그는 하나님 안에서 이미 구원을 누린다고 주장하던 종교적인 지배세력과 충돌한다. 예수는 무리들의 질병을 고쳤고 그들을 점령한 귀신들을 축출하였고 그들의 문드러지고 훼손된 존엄성을 회복하였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뜻한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넘치는 애찬의 식탁으로 초청하였고 그들과 기꺼이 한 통속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은 권력강제와 권력남용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사랑어린 돌보심(loving care)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지도력은 선한 목자의 지도력이다.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같은 민중들을 위하여-자기의 인권과 권리를 지킬 수 없는 체제 밖의 사람들-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던진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라는 말은 전투적인 이미지가 있다. 에스겔 34장에는 악한 목자, 거짓 목자, 삯군 목자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양은 수탈의 대상이다. 초식동물인 양을 육식동물인 늑대들과 사자들이 잡아먹으려고 덤벼들 때 예수님은 초식동물을 지키신다. 예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육식동물들은 식성을 바꾸어야 한다. 예수님은 육식동물을 초식동물로 변형시킨다.
예수님의 권능과, 놀라운 지혜의 말씀과 성경해석, 그리고 병자들과 어린아이들, 여인들, 이방인들에 대한 자비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왜 예수님은 그 시대의 권력강제와 남용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던 지배자들과 그토록 달랐을까? 빌립보서 2:5-11은 예수님의 지도력의 진정한 근원을 보여준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는 철두철미 자신(메시야 비밀)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친정통치만 선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진실로 하나님 아버지를 완벽하게 대표하고 대신한 메시야임을 증명하였다. 신약의 사도들은 예수의 공생애 선포와 십자가의 죽음 사건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축소시키고 부정한 그 모습이 예수가 참 메시야임을 입증한 사건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예수가 반역한 천사들의 세계, 즉 영적인 세계에 대한 통치권까지 구사하게 된 근거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한없이 낮춘 메시야, 그리스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a man after God's heart)였다. 그는 첫 아담과 달리 하나님과 동등됨을 강탈할 그 무엇으로 간주하지 않고(something to be robbed/grasped),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곧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의 길은 자기비움, 권력의 비절대화였다. 소위 집권자들은-겉으로 볼 때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권력강제자들, 임의주관자들임-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강제로 움직이려고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완벽하게 낮춤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다.
성경적인 지도력이란 희생과 섬김을 통한 지도력이다. 지도력은 실천궁행(實踐躬行)을 통하여 시범을 보이는 것이다. 산상수훈이라는 말은 실천하여 시범을 보이면서 가르쳐주신 가르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자신을 비워 종의 도를 실천하는 지도력을 유산으로 남기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다스림을 극대화하였고, 하나님은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크리스챤 지도자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자적인 품성을 구현하는 지도자다.
 
4. (4) 소결론: 예수는 믿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모방의 대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모방의 대상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 세 가지 의미는 (1) 의존 (2) 사랑 (3) 모방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의존할 뿐만 아니라 예수가 걸어간 길이 궁극적인 진리임을 믿고 그를 모방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왕적인 지도력을 모방하도록 초청받은 사람들이다. 특별히 지도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세 번째 의미가 중요하다. 크리스챤 지도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오로지 예수의 섬기는 지도력을 모방함으로써만이, 세상의 잘못된 지도력 관행(권력강제와 권력남용)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다. 또한 자신을 종으로 낮추셨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자신을 낮추는 크리스챤 지도자들은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 구원의 에너지를 방출한다.
 
추후적 성찰
* 모든 전제(독재)권력 행사자들은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위협하는 난입자들이다.
* 하나님의 신정통치의 현실적인 양태는 지역, 마을 자율주의적 사회다. 강제적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자가 필요없는 사회다. 사랑의 법이 지배하는 고도로 성숙한 자율적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친정통치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사회다.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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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윤종석 역(서울: 복있는 사람, 2002)
쟈크 엘룰, 뒤틀려진 기독교(서울: 대장간, 1998)
찰스 링마, 행동하는 신앙인을 위한 자크 엘룰 묵상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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