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2024년 3월 29일 금요일
마르틴 루터의 성 금요일 설교
2021년 3월 26일 금요일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신뢰 문화
김형민/호남신학대학교 교수
현대는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과거와는 달리 청소년들은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타율보다는 자율의 가치를 중시하도록 교육받고 있다. 이러한 개인화의 과정이 현대인들의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자율성의 증대로 인해 각 개인이 짊어져야 할 위험과 책임도 더욱 커졌다. 그런 점에서 개인화는 에고이즘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하지만 개인화를 자아중심적 개인주의로 오해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일들이 자주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갈등도 증폭되고 사회구성원들 상호간의 신뢰도 약화되고 있다. 우리가 이기적 개인주의의 위험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신뢰성의 회복이다. 서로 간의 신뢰가 회복될 때 우리 공동체는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사회학자들의 말과 같이 신뢰는 ‘사회자본’이다. 신뢰는 사회의 문화적이며 사회적 협력을 촉진하다. 어느 사회든 신뢰는 신앙과 관습을 통해 전승되었다. 신뢰성 회복을 위한 종교공동체, 특히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긴급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신뢰란 무엇인가? 신뢰는 결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아니다. 인간적 품성도 덕도 아니다. 신뢰는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하시고 신뢰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다. 신학자 본회퍼의 말과 같이 ‘신뢰는 인간의 공동생활의 가장 위대하고, 진기하며, 복된 선물’이다. 불신이 인간의 사회성을 파괴한다면, 신뢰는 인간의 공동체와 우정을 회복시킨다. 이러한 우정의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기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촉진해 나가야 할 ‘신뢰의 문화’이다.
신학자 슈트룽크는 우리가 예수를 만나면 세 가지 차원의 신뢰의 문화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예수를 만나면 자기신뢰가 회복된다. 그동안 우리는 자기신뢰를 잘못된 신앙의 유형으로 생각해 왔다. 자기신뢰보다 자기불신을 겸손한 신앙적 이상과 경건한 삶의 태도로 칭송해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태도는 숙명적으로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적극적인 신뢰형성을 방해한다. 자신을 불신하도록 종교적으로 교화된 사람이 ‘신뢰의 문화’에 동참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예수는 자기신뢰가 메시아적 신뢰형성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자기신뢰를 불합리한 삶의 태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기신뢰’는 이기주의나 자아중심주의와는 다르다. 부자 농부의 비유(눅 12:16-21)는 신뢰를 선물로 인지하는 못한 자아중심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풍성한 추수의 결실을 맺은 부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대신 오직 자신을 향해 말한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하나님과 예수의 신뢰능력을 의지하는 자기신뢰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예수가 말씀하신 자기신뢰는 약하고 아픈 자들을 치유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능력이다. 쓰러진 자들이 일으킴을 받고 억눌린 자가 자유를 얻음으로써 상실한 자신의 인간존엄을 회복하게 된다. 예수 안에서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향한다. 마치 병든 자들이 자신의 치유를 예수께 청탁한 것과 같다. 환자들의 청탁은 바로 예수를 신뢰하는 환자들의 자기신뢰를 나타낸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자신만을 신뢰하는 자는 자신의 치유를 결코 남에게 청하지 않는다.
둘째는 ‘우리 신뢰’의 회복이다. 새로운 자기신뢰는 예수의 ‘신뢰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위한 신뢰’로 확장해 간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신뢰가 자기만을 신뢰하는 자들의 이기적 집단주의로 발전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흥미롭게도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편협한 신뢰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어느 날 제자 요한이 예수께 와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금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눅 9:50)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던 익명의 치유자가 제자들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익명의 치유자를 자신들의 경쟁자로 생각하며 불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그의 치유사역을 금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제자들의 편협한 ‘우리 신뢰’의 태도를 보게 된다. 제자들의 신뢰는 오직 제자공동체 내면만을 향해 있었다. 제자들은 내적으로는 공동체적 신뢰를 공유하면서도, 외적 공동체를 불신하는 자신들의 이율배반적 행위를 인식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익명의 귀신을 쫒는 자가 자신들의 공동체 속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만 생각할 뿐,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귀신을 쫒는 자의 소속에만 관심을 두었다. 제자들은 오래 동안 전승되어내려 온 유대교의 사회적 관습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것은 곧 ‘너희를 위하지 않는 자들은 너희를 반대하는 자’라는 원칙이다. 이 원칙을 따른 자들은 ‘우리 신뢰’를 말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때에는 언제나 자신을 지지하는 자로 한정했다. 오직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만 신뢰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까지 지혜로운 삶의 방식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제시한 놀이이론을 따르는 자들만이 신뢰할 수 있으며, 이를 거절하는 자는 의심하고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 제자들의 행위를 책망하시며 이 원칙을 뒤집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눅 9:50) 예수의 말씀은 ‘우리 신뢰’를 말하면서도 이를 제한적으로 적용하려는 삶의 자세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실천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런즉 그의 제자공동체는 예수가 오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며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들은 예수가 ‘아바’라고 불렀던 바로 그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오고 계신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요, 그런즉 그들의 하나님 신뢰는 곧 ‘미래를 향한 신뢰’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셋째로 ‘미래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을 바라볼 때 인간은 현재를 넘어 미래를 향한 신뢰를 얻게 된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과감히 고향을 등지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미래를 향한 신뢰’는 낙관주의적 삶의 철학과는 다르다. 낙관주의가 과거 지향적이며 무비판적 태도라는 점에서 종말론적 신앙과 구별된다. 낙관주의는 과거에 경험했던 행복을 바로 미래에 투영시킨다. 이제까지와 같이 미래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예수공동체가 품고 있는 미래에 향한 신뢰는 낙관적이라기보다는 비판적이다. 과거에 자신을 지배해왔던 힘과 판단과 과감하게 결별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신뢰의 공동체로 부르셨고, 그들을 이제까지 자신을 얽매였던 모든 구속으로부터 해방하셨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의 삶에 동참하기 위해 ‘자신의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마 19:29)까지 버려야만 했다.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은 금욕적 자기포기가 아니라 전적인 신뢰의 능력이다. 신뢰는 하나님의 미래를 신뢰함으로써 이생의 삶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는 무력한 자포자기가 아니라 창조적 자기절제의 힘이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삶의 현실에서 볼 때 수용하기가 어려운 요구이다. 그렇다면 그의 요구를 만족시킬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을 인간을 긍정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으로 믿기에, 바로 이 믿음에 따라 이웃까지도 신뢰하는 자이다. 어느 날 예수를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던 부자 청년은 평소 윤리적 삶을 모범적으로 실천해 온 인간의 전형이다(마 19:16이하).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를 거절하고 예수의 곁을 떠났다. ‘도덕능력’이 아니라 ‘신뢰능력’의 부재가 부자 청년의 문제였다. 그 젊은이는 예수를 따르면 얻게 될 ‘미래를 향한 신뢰’를 자신의 삶으로 온전히 완성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뢰가 종말론적 신앙 가운데 미래를 신뢰하는 자들이 이 땅에서 서로 나누며 선취해야 할 신앙적 삶의 태도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성의 상실을 염려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정신은 각 개인 사호간의 신뢰가 회복될 때 가능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뢰는 은혜의 사건이다. 신뢰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감사의 삶으로 응답해야 할 신앙적 책무이다. 그런즉 이웃에게 실망했다고 이웃에 대한 신뢰를 포기할 수 없다. 너무 많은 신뢰가 어리석음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불신은 불행의 출발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검증할 수 있는 것만을 신뢰하겠다는 뜻에서 ‘신뢰도 좋은 것이지만 통제가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수 있다. ‘통제도 좋지만 신뢰가 더 좋다.’ 신뢰의 회복만이 우리의 공동체를 다시 살린다.
김형민
호남신학대학교 기독교윤리학 교수
숭실교회 협동목사
2020년 11월 19일 목요일
길을 걷는 사람_ 최주훈
2020년 11월 13일 금요일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_이정순(목원대 신학)
코로나 19 바이러스 시대에 생각하는 예배의 본질
2020년 8월 19일 수요일
우리시대 실패한 정치의 징후들
| 본고는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16집(2020): 327-358에 게재된 논문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연재하는 것임을 일러둔다. - 저자 주 |
우리 시대 정치신학의 필요성 혹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전제는 우리는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우리의 정치는 삶을 더 정의롭고 풍요롭고 공평하고 넉넉하게 만드는데 실패했다. 근대로부터 이어진 인간해방의 꿈은 소위 ‘호모 데우스’라 불릴 극소수 특권계층의 형성으로 신기루처럼 부서지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던 경제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정치(政治)는 결코 정치(正治)로 이어지지 못하고, 거주지와 삶을 의미하는 단어로부터 유래하는 경제(eco-nomy)는 결코 삶을 가능케 하는 체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자유도 온전한 평등도 가져다주지 못했고, 자유민주주의의 물질적 성장엔진이었던 자본주의는 그 성장의 끝이 도래했다고 말해진다.
자본주의는 폐허들을 양산하면서, 불안정하고 취약한 인생들의 숫자만을 성장시킨다. 안나 씽은 이를 “불안정성의 범지구적 상태”(1)라고 표현한다. 모든 것이 정처없이 표류하고, 가치가 의미를 상실하고, 기준은 권력의 힘과 크기를 의미할 뿐인 우리 시대의 핵심적 문제들 중 하나가 ‘정명’(正名, to retify names)의 실패라고 크로켓(Clayton Crockett)은 주장한다. 즉 사물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기호자본주의의 시대, 법과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 등과 같은 이름들이 올바로 작동하지 않는 시대, 이름은 금융통화처럼 정처 없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2)
이런 가운데 신자본주의의 범지구적 질서에 맞서 지역주의가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와 종교의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한다. 그래서 이를 “종교의 귀환”(the return of religion)으로 부르기도 한다.(3) 모든 것이 불분명해진 시대를 종교적 전통의 가치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종교의 귀환은 곧 샹탈 무페의 표현처럼 “정치적인 것의 귀환”(4)이기도 하다. 이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종교의 부흥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적인 것’이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을 결정하는 ... 차원”으로서, 우리의 모든 정체성은 관계성, 말하자면 내외의 경계성으로 구성된다. 이는 외부 타자에 대한 적대관계를 통해 우리의 경계가 설정된다는 칼 슈미트의 논리를 따른 것이다.(5)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이러한 모습으로 귀환하는 것은 도착적 귀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정치가 맞이하고 있는 급박성은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로 인해 ‘예외 없이’ 모든 생명이 존재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급박성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친구/적의 경계를 설정하는 예외적 주권권력의 힘을 자신의 정치신학(6)의 토대로 삼았던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논리는 그 어떤 예외도 허용치 않는 오늘 우리 지구행성의 위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귀환’ 시대에 정치신학을 재규정할 필요성을 인식한다.
생태계 위기와 기후변화는 지구 위에 살아가는 생명의 공멸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제 정치신학의 주제는 해방이나 반란 혹은 저항보다는 ‘공생’(co-life)으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통속적으로 생각하는 ‘공생’이란 그저 관계적으로 얽힌 존재들이 서로 좋게 상리공생(相利共生)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신학적 의미에서 혹은 기독교 신앙적 의미에서 ‘공생’이란 서로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존재들끼리의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기존사회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등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들을 하나님의 동등한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는 기획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것은 현사회구조 하에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존재를 예를 들어, 노예와 여자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고 품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었다. 황제를 정점으로 모든 존재가 신분제 위계질서로 규정된 사회구조 하에서 그들은 기존의 위계적 사회질서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기준으로 재구성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 박해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즉 기독교 공동체는 처음부터 기존과는 다른 정치체재를 전개하는 정치적 공동체였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두를 적/아군의 이분법으로 재구성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아군을 결집해 정치세력화해내는 칼 슈미트적 정치신학과 정반대로, 적/아군 혹은 친구/적의 이분법을 허물고, 동등한 존재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하의 존재(the inhuman)를 형제와 자매로 호명하며, 존재를 회복시켜주는 정치, 즉 공생의 정치였다. 캐서린 켈러는 이를 ‘정치적인 것의 귀환’으로 선포하고, 신학적으로 성찰한다.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신학은 제도권 정치를 넘어, “우리의 우주정치적 얽힘들의 위태로운 유한성과 ‘다중다성적 리듬’(polyrhythmic)의 복잡성”(7)을 포착하고, 거기서 “새로운 정치적 행동주의를 위한 시간”을 열어(8), 현재의 제도권 선거정치를 넘어서는 “민주적 투쟁성(democratic militancy)”(9)을 모색하는 신학이다.
여기서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은 배제와 혐오의 정치 즉 친구와 적의 이분법적 정치신학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논리를 기후변화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종말의 상황 속에서 대안적으로 실현하려는 신학적 노력이다. 신학을 세속의 한복판에 실현할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는 “세속화된 신학”(theology secularized)(10)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배제와 혐오가 아니라 “창생 집단체”(the genesis collective)(11)의 관계성 속에서 비존재로 밀려난 이들을 존재로 회복하여, 피조세계에 참여시킨다는 의미에서 성화(sanctification)의 정치신학이기도 할 것이다.
미주
(미주 1) Anna Lowenhaupt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6.
(미주 2) Clayton Crockett, Radical Political Theology: Religion and Politics After Liber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1), 1.
(미주 3) Ibid., 2.
(미주 4) Ibid., 2;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이보경 역, 『정치적인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Political), 4쇄 (서울: 후마니타스, 2012), 11.
(미주 5)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2012), 13.
(미주 6)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라는 용어가 독일의 보수적인 법 이론가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1921년 출판된 책 제목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 매우 역설적인데, 그는 “국가에 관한 근대 이론의 모든 중요한 개념들은 세속화된 신학적(theological) 개념들”이라고 주장했다(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8).
(미주 7)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2018), 39; 폴리리듬(polyrhythm)은 서로 다른 리듬이 중첩되어 연주되는 것으로서, 재즈같은 분야에 쓰이는 음악용어로부터 유래한다.
(미주 8) Ibid, 39.
(미주 9) Ibid, 40.
(미주 10) Ibid, 162.
(미주 11) Catherine Keller, On the Mystery: Discerning Divinity in Proces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8), 47.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_ 이정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는 개인의 안전과 위생에 크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그렇다고 더럽다는 말도 아니다). 삶에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만큼만 적당히 조심하고 적당히 씻는 사람이라 처음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질 때만 해도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확진자 수가 20명 언저리 넘어갈 때. 뉴스는 연일 코로나19였고, 주변 사람들이 철저하게 마스크를 쓰고 다녔는데도 '메르스 때도 그렇고 대충 넘어갔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먹고 마셔 댔다. 다시 말하지만 부끄럽다.
이 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때에는 신천지 관련하여 집단감염이 대규모로 터진 2월이었다. 대규모 감염 뉴스를 들은 날은 우리 교회의 청년부 수련회를 출발하기 전날이었고, 나는 이 수련회를 취소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사실 대규모 감염이 터지기 전부터도 수련회 취소에 대한 말들은 나왔지만, 열심히 준비한 청년들이 낙심할 것이 염려되기도 해서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대구에서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 이후에는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 서둘러서 여러 회의를 열었고, 그날로 수련회 취소를 결정했다. 그 주에는 주일예배를 축소해서 드렸고, 그다음 주부터 지금까지 나는 주일에 사랑하는 성도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후 많은 분이, 한국교회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사태 앞에서 여러 주장과 논의를 쏟아 냈다. 특히 주일 공예배 회집 방법과 연관하여 엄청난 논의가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교회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코로나19 이후 교회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쏟아지는 듯하다. 사실 필자는 이러한 담론들에 보탬이 될 정도로 사태를 잘 알지 못하기에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다만, 현실 목회자로서 실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행동 강령 몇 가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는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실천하고 있고, 또 실천하려 하는 몇 가지 행동들이다. 가능한 한 교파와 교단을 막론하고, 공예배와 교회 형태에 대한 입장이 어떻든지 대체로 동의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공동체 구성원들 간 자원 흐르게 하기
- 구제 지정 헌금
성도들끼리 교제가 활발했다면, 성도들은 이미 같은 구역이나 소그룹 내의 어려워진 형제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서기 어려울 수도 있다. 받는 상대방의 자존심이 상할까 봐 두렵기도 할 것이고, 또한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 6:3) 해야 하는 원칙에 위배될까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의기소침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돕고자 하는 성도들이 자신이 구제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직접 전달해 달라는 헌금을 교회에 하고, 교회가 누가 헌금했는지 밝히지 않고 대상자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으로 헌금을 만들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는 (원할 경우) 헌금한 사람에게 투명하게 밝히면 된다. 성도들 모두에게 이 시스템은 잘 알려져 있고, 제직들에 대한 신뢰가 높은 교회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동참하는 것을 볼 것이다.
- 마스크 나눔
마스크 대란이긴 하지만, 성도들 중에는 많은 마스크를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정죄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은 마스크 대란 뉴스를 보며 찔림을 받는다. 교회는 이들에게서 마스크를 기부받아 없는 집에(그리고 지역사회에) 나누어 줄 수 있다. 실제로 필자는 마스크를 기부받아 배달하러 다니기도 했다. 마스크가 쌓여 있는 가정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챙길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쁨을 누릴 것이고, 마스크를 받은 사람들 역시 돌봄을 받고 있다는 확신에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목회자는 이 사이를 중개함으로 굉장한 보람을 누릴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자발적으로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 시기에 더 많은 전화 심방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위의 첫째 방안을 행하려고 하면 자연히 전화 심방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누가 경제적으로 어려운지, 어느 집에 마스크가 없는지 알지 못하면 도울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전화로 심방할 때, 서로 사정을 돌아볼 수 있도록 연락하라고 권면할 수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교회 성도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착하다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가 성도들이 잘 순종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서로를 돕고 살피라"고 권면하면 즐거이 따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도들이 목회자들의 권면을 따르지 않는 많은 경우는, 따지고 보면 동기 부여를 제대로 해 주지 못했든지, 권면의 내용이 터무니없기 때문일 수 있다. 서로를 섬기라고 권면하는 것은 성경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수준 높은 동기부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간에 연락이 별로 없었던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어색한(?) 통화라도 나누어 보도록 권면해 주라. 특히 교회 내의 약자들을 세심히 살피도록 해야 한다.
- 공무원들에게 따뜻하게 협조하기
물론 정부로서는 교회가 안 모이는 것이 최선이겠고, 또한 많은 교회가 동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안 모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겠다면, 최소한 방역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정부에 할 수 있는 한 협조하는 것이 옳다. 하나 확실한 것은, 최소한 일선 공무원들이 '흠, 이번 기회에 기독교를 박해해야겠어. 예배를 금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만일 더 윗선의 정치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틀렸다고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그냥 그분들은 '빨리 이 코로나19 사태 끝났으면 원이 없겠다' 하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주말에 누군들 돌아다니며 일하고 싶겠는가. 따뜻한 웃음으로 대해 주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작은 선물(예컨대 작은 음료수라도)이라도 내밀라. 그리고 꼭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잊지 말자.
- 복지 기관들 돌아보기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복지 기관에 기부를 많이 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시기에 가장 먼저 지출을 제한하는 돈 역시 기부금이다. 따라서 복지 기관은 지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회 전체가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기부금이 끊긴 상황에 대해 하소연할 곳도 없을 것이다. 구제 헌금으로 걷은 돈을 약간이라도 전달한다면, 그리고 작게나마 연락을 통해 사랑을 전한다면 감사를 표현할 것이다.
여담으로, 이러한 상황은 선교사님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님이 한국교회가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 상황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이번 주 선교비를 보내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는 전화를 받고서도 아무 데도 말하지 못한다. 사실 이들은 미자립 교회보다도 더 약자인 경우가 많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보내 드릴 돈이 없을 수 있다. 따뜻한 전화와 기도 제목 요청이라도 해 준다면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예배 형태 바뀌면서 생기는 약자들 챙기기
특히 신경 써야 하는 분들이 있다. 가족 중 믿는 사람이 자기 혼자밖에 없는 분들이다. 청년들 중에도 이런 분이 많고, 특히 자녀와 배우자 모두가 신자가 아닌데 자신만 신자인 경우는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가족끼리 모여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혼자 방에 숨어서 몰래 핸드폰으로 예배를 시청해야 하는 경우도 그나마 나은 상황이다. 자기 방이 따로 있지도 않고, 어디 나갈 곳도 없는 분들은 온라인 예배도 그림의 떡이다. 이런 분들 중 원하는 분들은 방역상 아주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고 극소수가 모여서 예배하도록 배려해 줄 수도 있고, 그것도 어렵다면 연락을 지속하며 목양적인 배려를 받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좋다.
다섯째, 고난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설교하기
물론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고 싶어 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는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이 정당화되는지, 또는 이러한 상황까지 왔는데도 꼭 모여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원리도 궁금해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은 따로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이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또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과연 함께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짧은 지면에서 신정론에 관한 논의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교파나 교단마다, 혹은 설교자 개인마다 신정론에 관한 견해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그분의 섭리는 선하다는 것.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신다는 것. 때로 우리 눈으로 볼 때는 나쁜 일이지만,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고통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합의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이 답이 아닌지는 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이건 답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답이라면 왜 하나님 자신이 고통으로 뛰어드셨겠는가? 왜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을 겪으시며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겠는가?
그분은 고통을 안 주시는 하나님도 아니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 버려 두시는 하나님도 아니다.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섭리와 사랑. 은혜를 사랑 어린 마음과 눈물로 전하라. 정말 성도들은 위로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가 고난 가운데서도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 힘을 공급할 것이다.
세속 언론이 교회를 호의적으로 언급해 줄 일도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호의적으로 보도해 줄 만한 일을 많이 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냥 억울해하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낫다. 최소한 우리의 선행을 받는 사람들은 안다. 혹여 그들이 몰라 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보신다. 이 위기는 우리가 은혜를 행하는 연습을 할 기회이다. 교회가 코로나19를 전염시키는 원흉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 억울하거나 괴롭다면, 은혜를 전염시킬 수 있도록 힘을 내 보자. 특별히 지역 곳곳에서 교회를 섬기느라 분투하는 모든 목회자가 은혜 안에 거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힘내세요!
이정규 / 시광교회 담임목사, <야근하는 당신에게>(좋은씨앗), <새가족반>(복있는사람) 저자
[출처: 뉴스앤조이] 코로나19 사태를 대하는 교회를 위한 5가지 행동 강령
우리 시대 자유민주주의의 실패
공생의 정치신학: 캐서린 켈러의 ‘(성공)보다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를 위한 정치신학 (2)
오늘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democracy)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 체제이다. 즉 자유주의(liberalism)과 민주주의(democracy)라는 이념적 대립이 ‘자유’와 ‘평등’ 혹은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담지되어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공동의 적, 즉 절대주의와 권위주의적 전통들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공동투쟁의 결과였다.(1)
하지만, 이미 보수적 정치학자 칼 슈미트(Karl Schumitt)가 지적했듯이, 자유와 평등은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유민주주의란 이 갈등의 자리를 “긴장의 장소”(the locus of tension)(2)로 간주하고, 이 “구성적 긴장”(3)을 “여러 다른 헤게모니적 배열들 간의 끊임없는 협상과정”으로 삼는 정치적 절차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지배로 인해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로 진입했고, 이제 ‘평등’의 이념은 ‘공정한 경쟁’으로 대치되어, ‘개인의 권리’로 환원되어버린 껍데기뿐인 ‘인권’ 개념으로 초라하게 남아있을 뿐이다.(4)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등장과 더불어 급격히 ‘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었고, 평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자유선거 시행과 인권 수호”의 초라한 구호들로만 존재해고 있을 뿐이다.(5) 즉 우리는 “대중주권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이 침식”된 “포스트 민주주의의 상태”(6), 즉 ‘자유주의’ 체제가 승리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공평성, 다르고 다양한 문화와 믿음들에 대한 관용, 인간 존엄성의 수호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의 신장을 외쳤던 자유주의 체제는 “실제적으로는 거대한 불평등을 낳고, 획일성과 동종성을 부여하고, 물질적 영적 퇴화를 부추기고 그리고 자유를 침해”(7)했다. 자유주의가 이상적으로 주장했던 것과 우리가 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 차이의 격차가 점점 심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를 해방하는 수단들이 우리를 감금하는 철장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그래서 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와 불만족이 증폭되고 누적되고 있으며, 때로 마녀사냥의 대상을 찾아 정의(justice)의 이름으로 분노를 광장으로 표출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유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이행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 금융귀족같은 소위 신-엘리트들의 출현(8), 그에 따른 대중들의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가 자제력과 숙고의 능력 그리고 민주적 정부를 만들어가기 위한 절차들보다는 “정치적 분노와 좌절”을 표현하는데 소진되고 있다.(9)
자유주의(liberalism)의 핵심에는 “권리를 담지한 개인이 자신만의 훌륭한 삶을 추구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인간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10)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자유주의 모델 정치체제는 “제한된 정부”(limited government)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주장하며, 이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각 개인이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동의한 소위 “사회 계약”(social contract)설을 발명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주창하였다.
하지만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점점 더 미세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삶을 통제하기 위해 확장되고 있고, 시민들은 정부가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너무 멀리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세계화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시민들을 무한경쟁과 적자생존 그리고 각자도생의 삶으로 몰아갈 뿐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자유주의 체제가 유일하게 확보해준 개인의 권리란 오직 충분한 부와 지위를 확보한 이들의 권리와 자율뿐이라고 느낀다.(11) 따라서 시민들은 현 체제가 ‘실력주의’(meritocracy)가 되었고, 소위 능력있는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세습하고, 교육 시스템은 인성이나 소명을 찾는 장이 아니라 사회의 소위 ‘루저’(loser)를 솎아내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다고 느낀다.
소비자본주의 체제와 결탁하여, 자유민주주의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로 대치하였고, 사회적 경쟁의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적 구조가 세대를 거쳐 대물림되는 현실과 그로 인해 야기된 경제적 불안정성과 심화되는 불평등의 격차를 값싼 상품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통해 무마시키려 노력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격차가 공정성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승자로부터 패자를 채로 거르는 시스템을 통해 심화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격차가 초첨단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의 격차로 이어져, 정말 소수의 초부유층이 자신들을 수퍼휴먼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현실이 소위 “호모 데우스”의 시대로 등장하고 있으며, 이를 하라리는 “불평등의 업그레이드”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2) 세계화가 초래하는 무한경쟁의 현실에서 이는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논리로 포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세대의 모두는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발전의 혜택을 누린다는 위로 아닌 “위로”가 주어지기도 한다.(13) 분명한 것은 이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세계화 경제가 현세대의 누구로부터도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드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총체적 난국이 자유주의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가 그 본연에 충실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고 진단한다. 즉 자유주의는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14)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총체적인 좌절과 실패는 바로 우리가 “자유주의의 이상들에 맞추어 살아내는데 실패”(15)했다는 잘못된 분석이다. 이는 우리가 ‘자유주의’(liberalism)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망각한데서 비롯된 것이며, 이 이데올로기의 동굴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비교를 통해 알려줄 다른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보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이다.
현재 우리 시대의 실패는 자유주의의 전적인 성공에 따른 결과라는 드닌의 진단과 병행하여, 샹탈 무페는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의 무능이 이 실패를 부추긴 주요원인들 중 하나라고 진단한다. 즉 현재 서구 정치에서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이 담고 있는 수많은 요구들이 진보적 해답이 필요한 민주주의 요구라는 것을” 좌파 정치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16) 즉 진보 혹은 좌파 정치인들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일구어낸 타협이 우리 시대 유래없는 승자와 패자의 격차를 양산해 내고 있으며, 이 세계화의 패배자들이 외치는 함성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로 반영되는 민주주의적 열망들이 낙오자와 실패자의 좌절과 분노로 응집되고, 그 분노의 감정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적대와 혐오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노동자와 중산층의 최소한의 이익도 지켜내지 못한”(17) 진보정치인들에 대한 깊은 불신이 우파 포퓰리즘의 목소리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의 ‘성공적인 실패’는 “더 나은 실패”(a failing better)(18) 즉 ‘성공보다 나은 실패’를 시도하지 않았던 결과인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불안한 결합은 물질적 성공과 경제적 성공을 양산해내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진화에 의존한 결과이다. 그래서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안정성이 극히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비교적 경제변화와 상관없이 정치적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던 마을 공동체 시스템이 전면적으로 붕괴 혹은 폐지되고, 전 지구를 시장경제라는 우산 하에 두고자 기획되었던 세계화는 역설적으로 ‘다문화’ 시대에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가 꽃을 피우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인 다문화’가 자유주의 기획의 일부로 고립되어 게토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모순을 대변한다. 그래서 정치는 차라리 실패했었던 것이 나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실패를 경험했더라면, 지금같은 극단적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다해도 말이다.
미주
(미주 1)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이승원 역,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 2쇄 (서울: 문학세계사, 2019), 28.
(미주 2) 앞의 책, 29.
(미주 3) 앞의 책, 30.
(미주 4) 앞의 책, 31.
(미주 5) 앞의 책, 31.
(미주 6) 앞의 책, 34.
(미주 7) Patrick J. Denneen,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8), 3.
(미주 8) 이를 샹탈 무페는 “서구 사회의 과두제화”(oligarchization)로 표현하고 있다(『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3).
(미주 9)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xiv.
(미주 10) Ibid., 1.
(미주 11) Ibid., 3.
(미주 12) Yuval Noah Harari,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 (London: Harvill Secker, 2015), 346.
(미주 13) Deneen, Why Liberalism Failed (2018), 10.
(미주 14) Ibid., 3.
(미주 15) Ibid., 4.
(미주 16) 무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2019), 39.
(미주 17)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노정태 역, 『진보의 몰락』(Death of the Liberal Class) (서울: 프런티어, 2013), 25.
(미주 18)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the Earth: Our Planetary Emergency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123.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